설인효 국방대 교수는 중국의 A2/AD 능력이 발전하면서 미군의 전진 배치가 억제의 상징인 동시에 개전 초기의 고가치 표적이 되는 ‘전진 배치의 역설’이 나타났다고 짚습니다. 저자는 미국의 대응을 후퇴가 아닌 ‘네트워크화된 분산전력’으로의 전환으로 보며, 억제의 초점이 ‘압도에 의한 억제’에서 ‘거부에 의한 억제’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설 교수는 주한미군 태세 조정의 판단 기준을 ‘효과의 보존’으로 옮기고, 한국이 ISR·지휘통제·정밀타격·군수 능력으로 분산된 한미 전력을 연결하고 지속시키는 핵심 노드가 될 것을 제안합니다.
한미동맹 프로젝트 동아시아연구원(EAI)은 미국의 대 전략 변화와 동맹 현대화가 한미동맹에 가져오는 구조적 변화를 분석하고, 한국의 안보전략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한미동맹 프로젝트 워킹페이퍼 시리즈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미국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인식되고 있으나, 그 변화의 본질이 한미동맹의 작동 원리와 한국의 안보에 어떠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지에 대한 체계적 논의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지난 30년의 미국을 기준으로 오늘의 미국을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의 지체가 한국 안보전략의 가장 큰 도전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 글로벌 다중위기의 상시화, 전진 배치된 미군의 취약성과 방산 공급망의 한계는 미국이 모든 위기를 동시에 관리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2026년 이란 전쟁과 인공지능·무인체계 중심의 미래전 양상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하고 있습니다. 이에 미국은 제한된 전략자원을 핵심 지점에 집중하고, 동맹을 일방적인 안보 수혜의 대상이 아니라 전략적 분업과 교환의 제도로 재설계하고자 합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현대화는 이러한 대 전략 차원의 재편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출된 사례입니다.
이제 한미동맹의 미래는 미국이 한국을 지켜줄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 한국이 미국에게 반드시 필요한 전략적 가치를 스스로 창출하고 보존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변화를 동맹 약화로만 읽게 되면 안보 불안과 국론 분열에 빠질 수 있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연루 위험과 강압적 협상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주한미군 다영역 특임단,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방위산업 협력, 확장억제의 실효성, 대만사태와 한반도의 전략적 위상 등 핵심 의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검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본 워킹페이퍼 시리즈는 이러한 쟁점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변화하는 동맹의 방향과 조건을 한국의 국익에 맞게 설계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미동맹을 논의하기 위한 학술적·정책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의 주도적 대응 전략을 모색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한미동맹 프로젝트 발간 목록]
① 인식의 지체와 진정한 위기, 김양규·설인효·전재우 [워킹페이퍼 읽기] ② 미국 대전략의 전환과 동맹 현대화, 설인효·전재우 [워킹페이퍼 읽기] ③ 이론적 검토: 패권 변동기 동맹 조정과 새로운 안보 패러다임, 설인효·전재우·김양규 [워킹페이퍼 읽기] ④ 인태지역 군사력 균형 변화와 억제 패러다임 전환, 설인효 [워킹페이퍼 읽기] |
Ⅰ. 중국의 반접근/지역거부 전략(A2/AD)과 전진 배치의 역설
인도-태평양 군사력 균형의 변화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중국이 반드시 미국보다 더 강한 군대를 만들어야만 미국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중국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핵심은 미국을 전장에서 정면으로 격파하는 것보다 미국이 전장에 들어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들어오더라도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 충분한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국의 압도적 힘 자체를 제거하기보다 그 힘이 작동하는 조건을 공격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사고의 배경에는 미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보여준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한 중국의 면밀한 관찰이 존재한다. 특히 1991년 걸프전은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충격에 가까운 경험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은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군사력의 양적 우위만으로 이라크를 압도한 것이 아니었다. 위성·감시정찰, 정밀유도무기, 전자전, 지휘통제, 공군력과 해군력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함으로써 이라크군의 지휘체계와 핵심 전력을 짧은 시간 안에 무력화하였다. 2003년 이라크전은 이러한 미국식 전쟁 수행이 정보화와 합동성의 발전을 통해 한층 더 고도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군사연구는 두 전쟁을 집중적으로 분석했고, 그 결과 ‘첨단기술 조건하 국부전’에서 ‘정보화 조건하 국부전’으로 미래전 인식 자체를 발전시켰다.[1]
중국이 이들 전쟁에서 배운 것은 미국의 강점만이 아니었다. 강점이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도 함께 관찰했다. 미국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 주변의 기지와 항만에 상당한 전력을 집결시키고, 항모전단과 장거리 항공전력, 공중급유기, ISR과 지휘통제망을 결합한 뒤 압도적인 전투력을 투사하였다. 다시 말해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우수한 플랫폼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구에 접근하고, 전력을 집결시키고, 기지를 안정적으로 운용하며, 방대한 정보망과 군수망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우위였다.
바로 이 지점이 중국의 대응전략이 출발한 곳이다. 미국의 항공모함보다 더 많은 항공모함을 만들거나 미 공군보다 더 우수한 공군을 즉시 건설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 주변에서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 의존하는 기지·항만·활주로·항모전단·C4ISR 체계와 군수망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훨씬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미국의 힘을 직접 파괴하기보다 미국의 힘이 전장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좁히는 것이다. 미국 전략연구가 중국의 이러한 능력을 반접근·지역거부(Anti-Access/Area Denial: A2/AD)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온 이유이다.[2]
이에 따라 중국은 수십 년에 걸쳐 장거리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대함탄도미사일, 공중·해상·우주 기반 ISR, 통합 방공망, 전자전과 사이버, 대우주 능력을 복합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체계의 목적은 개별 미군 플랫폼을 하나씩 파괴하는 데만 있지 않다. 분쟁 초기 미군이 전장 상황을 파악하고 전력을 집결시키며 작전을 지휘하고 지속하는 ‘체계 전체의 연결성’을 흔드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중국의 군사혁신에서 정밀타격과 정보전, 우주·사이버·전자전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발전한 것은 이러한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3]
그 결과 인도-태평양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떠받쳤던 가장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인 전진 배치의 의미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냉전과 탈냉전기 전진 배치된 미군은 미국이 위기 발생과 동시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가시적인 억제의 상징이었다. 상대가 전쟁을 시작하면 이미 현지에 있는 미군과 충돌하게 되고, 이는 미국의 대규모 개입을 거의 자동적으로 초래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인계철선(tripwire)’ 효과도 가졌다.
그러나 상대가 전진 배치된 미군을 정밀하게 타격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논리는 훨씬 복잡 해졌다. 미군이 분쟁지역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신호이지만, 동시에 전쟁 초기 상대가 가장 먼저 무력화하려 할 고 가치 표적이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의미도 된다. 특히 위치가 이미 알려진 대형 비행장과 항만, 탄약고, 연료 저장시설, 통신 및 지휘통제 시설은 평시에는 동맹 공약의 물리적 증거이지만, 전시에는 ‘좌표가 알려진 고 가치 표적’이 된다.
본 보고서는 이러한 현상을 ‘전진 배치의 역설(Forward Presence Paradox)’로 규정한다. 전진 배치의 역설이란 군사력이 분쟁지역에 가까이 배치될수록 언제나 억제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장거리 정밀타격 능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그 전력이 오히려 초기 공격의 매력적인 표적이 되고, 미국에게는 초기 손실과 확전이라는 두 부담을 동시에 발생시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전진 배치가 ‘억제의 자산’에서 ‘취약성의 기반’으로 완전히 전환된다는 뜻이 아니라, 억제 효과와 취약성이 동시에 증가하는 지점이 출현했다는 의미이다.
이 문제는 더 이상 이론적 가능성에 머물지 않는다. RAND의 장기간 미중 군사력 균형 연구는 미국이 전체적인 군사력에서는 여전히 중국보다 우위에 있더라도, 중국 연안에 가까워질수록 지리적 거리와 중국의 미사일·방공·ISR 능력이 미국의 우위를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다고 분석하였다. 특히 중국의 미사일 공격에 노출된 미 공군기지의 작전 능력은 미중 군사력 균형을 판단하는 핵심 변수가 되었으며, 중국은 미국과 전 세계적 군사력 규모에서 동등해지지 않고도 자국 주변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심각하게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4]
최근의 연구는 이러한 취약성이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코(Kelly Grieco) 등이 수행한 2024년 Stimson Center의 정량모형은 중국 인민해방군 로켓군의 반복적인 활주로 공격을 가정할 경우 일본의 주요 미 공군기지에서 전투기 작전이 약 12일 동안 중단될 수 있으며, 공중급유기와 대형항공기의 작전은 더 오랫동안 제약될 수 있다고 분석하였다. 연구진은 분산배치와 활주로 복구, 미사일방어를 강화하더라도 이러한 취약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렵다고 평가하였다.[5]
이 결과가 갖는 전략적 의미는 단순히 “미군기지가 위험하다”는 데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 지도부가 미국의 공군력을 일정 기간 전장에서 배제할 수 있다고 믿을 경우, 그 짧은 시간 안에 대만에서 군사적 기정사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오판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억제의 실패는 반드시 상대가 장기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을 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전쟁의 첫 며칠 또는 몇 주 안에 되돌리기 어려운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A2/AD는 군사력 균형의 문제를 넘어 위기 안정성에도 심각한 문제가 된다. 미국이 결국 더 많은 전력을 동원하여 중국을 격퇴할 수 있더라도, 개전 초기의 대규모 피해와 기정사실화를 막지 못한다면 억제의 목적은 이미 상당 부분 실패한 것이다.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누가 이기는가와 전쟁 자체를 막을 수 있는가는 서로 다른 질문이 될 수 있다.
2023년 CSIS가 실시한 대만 침공 워 게임은 이러한 차이를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연구진은 2026년 중국의 대만 상륙침공을 가정하여 총 24회의 워 게임을 실시했으며, 대부분의 기본 시나리오에서 미국·대만·일본은 중국의 상륙 침공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났다. 미국과 동맹은 수십 척의 함정과 수백 대의 항공기, 수천 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대만 경제는 심각하게 파괴되며, 미국의 세계적 군사적 지위 역시 상당 기간 훼손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연구가 결론에서 “승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한 이유이다.[6]
이것은 ‘승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중국의 대만 장악을 저지했더라도 항모와 주요 함정, 첨단 항공전력이 대규모로 소실되고 일본과 괌의 핵심 기지가 심각하게 손상되며 미군의 전 세계적 전력투사 능력이 수년간 약화된다면, 그것을 온전한 전략적 승리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전쟁에서 이겼지만 그 전쟁 이후의 질서를 지탱할 힘을 잃는다면 그것은 소위 피로스의 승리에 가까울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결과가 예상될 때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결정할 수 있을지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그 자체가 억제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미국 군사전략이 풀어야 할 질문도 바뀌고 있다. 과거의 질문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을 격퇴할 수 있는가”였다면, 새로운 질문은 “중국이 처음부터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짧은 시간 안에 달성할 수 없다고 믿게 할 수 있는가”이다. 상대가 첫 공격으로 미국의 전진 전력을 무력화하고 기정사실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의 전환이 곧 ‘압도에 의한 억제’에서 ‘거부에 의한 억제’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출발점이다. 거부억제의 핵심은 전쟁이 발발한 뒤 상대에게 더 큰 피해를 가하겠다는 약속, 즉 응징 보복에 의해서만 억제가 달성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공격하더라도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며, 첫 공격 이후에도 미국과 동맹의 전력이 생존하여 계속 싸울 수 있다는 확신을 상대에게 심어주는 데 있다. 2026년 미국 NDS가 제1도련을 따라 “강력한 거부방어(strong denial defense)”를 구축하고, 침략이 실패할 것임을 상대가 사전에 인식하게 만드는 것을 거부억제의 본질로 규정한 것은 이러한 전략적 전환을 가장 명시적으로 보여준다.[7]
이러한 전진 배치의 역설은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문제에도 직접적인 함의를 갖는다. 주한미군은 여전히 북한의 공격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직결될 것이라는 강력한 정치·군사적 신호이며, 한미연합방위체제의 핵심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한반도와 주변 지역 전체가 북한뿐 아니라 중국의 장거리 정밀타격과 우주·사이버·전자전 능력이 미치는 공간으로 변화한 상황에서, 대규모 고정 시설과 집중된 전력의 생존성이라는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다.
특히 대만사태와 같은 역내 고강도 분쟁에서 주한미군의 기지와 자산이 광범위한 전구 작전과 연결되는 상황을 상정한다면, 한반도의 고정기지 역시 이러한 군사적 논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향후 주한미군의 일부 후방 분산, 순환 배치, 역할 조정이나 보다 광범위한 인도-태평양 전력망과의 연계를 그 자체만으로 동맹 공약 약화의 증거라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미군이 어디에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전력이 위기의 첫 순간을 견디고, 살아남아, 한국군과 연결되어 결정적인 군사적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한미군 감축이나 역외 역할 확대를 무조건 정당화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전력 조정의 타당성을 병력 숫자나 상징성만이 아니라 한반도 억제에 실제로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가라는 훨씬 엄격한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산과 후방 배치가 생존성을 높이더라도 유사시 한국 방어에 필요한 전력의 도착이 지연되거나, 역외 임무가 한반도의 억제 공백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현대화가 아니다.
결국 변화된 군사 환경에서 강한 동맹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달라져야 한다. 미군의 물리적 전진 배치 규모가 크다는 사실만으로 억제가 보장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앞으로 더 중요한 것은 첫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분산된 전력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한국군과 미국의 후방전력이 즉시 결합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적이 첫 공격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만들 수 있는가이다.
전진 배치의 역설이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단순하다. 가까이 있는 힘이 반드시 강한 힘은 아니다. 살아남아 끝까지 작동할 수 있는 힘이 강한 힘이다. 인도-태평양의 군사력 균형 변화는 이제 미국에게 더 많은 전력을 전방에 쌓아두는 문제보다, 분산된 전력을 어떻게 생존 시키고 연결하여 지속적인 거부능력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다음 절에서 살펴볼 미국의 새로운 작전개념들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Ⅱ. 미국 작전개념의 변화와 수렴: 분산을 통한 생존성 강화
그렇다면 중국의 A2/AD와 ‘전진 배치의 역설’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무엇인가? 그 답은 단순한 후퇴나 병력 감축이 아니다. 답은 ‘분산’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분산된 전력을 생존 시키고, 다시 하나의 전투체계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전쟁 수행 자체를 재설계하는 것이다. 중국의 정밀타격 능력이 대형·고정·집중된 전력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면, 미국은 표적을 작게 만들고, 흩어 놓으며, 끊임없이 이동시키되, 그 전투 효과는 오히려 하나로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대응하고자 하고 있다.
최근 미군의 인도-태평양 작전개념은 표면적으로 매우 다양하다. 공군은 민첩전투운용(Agile Combat Employment: ACE), 해병대는 원정전진기지작전(Expeditionary Advanced Base Operations: EABO)과 잔류부대(Stand-in Forces: SIF), 해군은 분산해양작전(Distributed Maritime Operations: DMO), 육군은 다영역기동부대(Multi-Domain Task Force: MDTF)를 발전시키고 있다. 군종마다 명칭과 운용방식은 다르지만 그 밑에 놓인 전략 논리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표면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심층구조가 존재하고 있다. 그 핵심은 ‘분산을 통한 생존성’이다. 중국의 정밀타격 복합체가 소수의 대형기지와 항공모함, 고정 지휘통제시설과 군수시설을 찾아내 집중적으로 파괴하도록 발전했다면, 미국의 대응은 상대가 감당해야 할 표적의 숫자를 늘리고 그 위치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고 가치 표적을 여러 개의 작고 기동적인 표적으로 분해함으로써 중국의 감시정찰과 표적획득, 타격체계에 과도한 부담을 부과하고, 어느 표적을 언제 공격해야 하는지에 대한 복합적인 딜레마를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공군의 ACE는 이러한 변화의 논리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미 공군은 ACE를 적의 위협 시간표 안에서 수행하는 선제적·반응적 기동을 통해 전투력을 계속 생성하면서 ‘회복력’과 ‘생존성’을 높이는 작전개념으로 정의한다. 핵심은 적의 공격을 단순히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항공전력이 언제 어디에서 작전할 것인지에 대한 적의 예측을 어렵게 하고 표적화 과정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있다. 미 공군 교리는 ACE가 적에게 정치적·작전적 딜레마를 제공하고, 미군이 적의 의사결정 주기 안에서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8]
따라서 ACE는 단순히 기지를 여러 곳으로 늘리는 개념이 아니다. 기존의 핵심 허브기지를 유지하되 군용 비행장과 동맹국 기지, 민간 공항, 전시에 신속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임시 거점을 연결하고, 항공기·탄약·연료·정비·지휘통제 인력을 필요에 따라 분산시키는 ‘허브-스포크형 전력운용’에 가깝다. 적은 더 이상 몇 개의 대형기지만 타격해서 미 공군의 전투력을 무력화할 수 없게 되고, 훨씬 많은 표적을 지속적으로 탐지·식별·추적해야 한다.
미 공군은 이를 위해 ACE를 태세(posture), 지휘통제(C2), 이동 및 기동(movement and maneuver), 방호(protection), 지속지원(sustainment)의 다섯 요소로 구성하고 있다. 이는 분산이 단순히 항공기를 흩어놓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투기가 다른 활주로로 이동하더라도 탄약과 연료가 없고, 정비가 불가능하며, 통신이 끊어지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기지를 방호할 수 없다면 분산은 생존성을 높이지 못한다. ACE의 본질은 ‘많은 기지’가 아니라, 여러 위치에서 반복적으로 전투력을 재생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9]
이는 억제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이 기습적인 미사일 공격을 통해 소수의 핵심 공군기지를 무력화하고 개전 초기 미국의 항공력을 전장에서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선제공격의 유인은 커질 수 있다. 반대로 공격 이후에도 미군 전투기가 여러 지역에서 계속 출격하고, 손상된 작전망이 빠르게 복원되며, 새로운 거점으로 이동하여 전투력을 재생할 수 있다면 첫 공격의 전략적 가치는 급격히 낮아진다. ACE가 제거하려는 것은 미사일 자체가 아니라, 미사일 선제공격으로 전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상대의 기대이다.
미 해병대의 Force Design과 EABO 역시 같은 문제에 대한 다른 형태의 답이다. 2020년 발표된 Force Design 2030은 2018년 NDS 이후 해병대의 중심 임무가 중동의 대테러작전에서 인도-태평양의 강대국 경쟁으로 이동했음을 명확히 했다. 특히 현대 정밀타격체계의 사거리와 정확도, 치명성이 증가하면서 대규모 상륙전과 지속적인 지상 작전에 최적화되어 있던 기존 전력구조로는 미래의 해양 전장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해병대가 제시한 표현대로 핵심은 ‘기동성’과 ‘저피탐성’을 활용하여 “집중의 취약성 없이 질량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었다.[10]
EABO와 잔류부대 개념은 이러한 사고를 실제 작전공간에 적용시킨 것이다. 해병대는 제1도련 안팎의 다수 도서와 연안 지역에서 소규모·기동형 전력을 임시적이고 열악한 거점에 분산 배치하고, 이동형 레이더나 이동형 발사차량과 같이 적의 무기 교전구역(Weapon Engagement Zone) 안에서도 일정한 생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춘 전력의 운영을 통해 해양 거부, 정찰·대 정찰, 함대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공식 EABO 매뉴얼은 이러한 전력을 ‘기동성을 갖추고, 저피탐성이며, 지속적으로 유지·지원이 용이한 해군 원정전력’으로 규정한다. 잔류부대는 적의 A2/AD 바깥에서 안전하게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동성 높은 소규모 전력의 운영으로 일정한 위험을 감수하고 그 내부에 남아 적의 감시·표적화와 해양작전을 계속 방해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미래 해병대의 중심축은 과거와 같은 대규모 병력을 한 지역에 집중시켜 압도적인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방식에서 상당 부분 이동하고 있다. 이동형 대함미사일 발사대와 레이더, 방공·전자전 및 감시정찰 장비를 소규모 단위로 분산시키고, 필요할 때 위치를 옮기면서 해군의 해양통제와 해양거부를 지원하는 방향이다. 화력과 병력의 절대적 규모는 작아지더라도, 적에게는 찾아내고 제거해야 할 표적의 숫자가 크게 늘어난다. 이는 해병대가 전통적인 상륙작전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EABO 매뉴얼 역시 해병대 전체가 EABO만을 위해 설계되는 것은 아니며 위기대응과 다양한 상륙작전 임무가 계속된다고 명시한다.[11] 변화의 핵심은 ‘적 영토에 대규모로 상륙하여 점령하는 전력’에서 ‘적의 작전 공간 안에서 생존하며 목표 달성을 거부하는 전력’이라는 기능이 훨씬 중요해 졌다는 데 있다. 전진의 목적이 점령 자체보다 거부와 교란, 표적획득과 함대 지원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해군의 DMO 역시 같은 논리를 해양 전력에 적용한다. 해군이 공식적으로 정의한 DMO의 핵심은 한마디로 “함대를 분산시키되 효과는 집중하는 것(dispersing the fleet while concentrating effects)”이다. 사람과 플랫폼, 탄약과 데이터를 시간·공간·전자기 스펙트럼에 걸쳐 분산·통합·기동시킴으로써, 중국이 하나의 결정적 표적을 제거하여 미국의 해양전력을 마비시키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12]
따라서 DMO를 항공모함의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항공모함과 대형 수상함은 여전히 중요한 전력이다. 다만 항모전단 하나에 감시·지휘·항공타격과 방어 기능을 집중시키는 방식만으로는 중국의 장거리 대함타격체계에 대응하기 어려워졌다. 미래의 해양전에서는 수상함과 잠수함, 항공기, 무인체계, 우주·사이버 자산에 센서와 무장을 폭넓게 분산하고, 이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효과를 집중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즉 플랫폼은 흩어지지만 화력은 흩어져서는 안 된다. 개별 함정은 더 분산되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더라도 적의 표적을 발견하는 순간 다른 함정과 항공기, 잠수함 또는 장거리 무장 체계가 그 정보를 공유하여 하나의 타격체계처럼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분산은 표적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것이라면, 네트워크는 흩어진 전력을 다시 하나의 군사력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DMO가 정보우위와 해양작전센터(Maritime Operations Center)를 핵심 요소로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육군의 MDTF는 이러한 변화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동시에 논쟁적인 시도이다. 전통적으로 태평양의 해양 전역에서 육군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미 육군은 MDTF를 통해 지상전력이 장거리 정밀화력, 방공·미사일방어, 정보, 전자전, 사이버·우주 효과를 통합함으로써 적의 A2/AD 체계를 역으로 압박하고, 해·공군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하려 한다. 미 육군이 MDTF를 A2/AD 네트워크에 대해 다영역의 정밀효과와 화력을 동기화하는 ‘전구 수준의 기동요소’로 규정하는 것도 이러한 목적 때문이다.[13]
이 접근은 육군이 자신의 전통적인 지상전 역할을 해양 전역에 맞게 재정의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동맹국 영토와 도서·연안 거점에 이동식 장거리 미사일과 방공체계, 전자전·사이버·우주 기능을 분산 배치할 경우, 중국은 해상과 공중의 미군뿐 아니라 넓게 흩어진 지상 표적까지 동시에 탐색하고 공격해야 한다. 대형 함정이나 공군기지에 비해 작고 기동적인 지상발사체를 추적해야 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정밀타격체계가 가진 강점에 비대칭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MDTF와 지상기반 장거리화력 구상은 네 가지 작전개념 가운데 가장 많은 현실적 질문을 제기한다. 아무리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무인도를 활용하고, 미사일의 사거리가 길어도 이를 배치할 동맹국의 동의가 없다면 운용할 수 없고, 표적정보를 지속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장거리 화력의 가치도 제한된다. RAND의 기존 연구 역시 태평양에서 지상기반 대함·장거리미사일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동맹국의 기지 제공과 운용 동의, 타 군종 또는 동맹국의 표적정보, 상당한 수의 미사일과 군수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별도의 연구에서도 한국·일본·호주·필리핀·태국 등 주요 동맹국이 미국의 지상발사 중거리미사일을 상시 배치하는 데 대한 정치적 수용성이 매우 제한적일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14] 이러한 비판은 단순한 장애요인이 아니라 분산 작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분산은 그 자체로 생존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부대가 작아지면 탐지는 어려워질 수 있지만 동시에 고립되기 쉬워진다. 전력이 넓게 흩어질수록 탄약과 연료, 정비와 의료지원의 부담은 커지고, 통신이 두절될 경우 각 부대는 서로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한 채 개별적인 표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해병대의 EABO나 공군의 ACE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실제 미군 교리는 분산 거점에 대한 사전 물자 배치, 지속 가능한 군수체계, 복원력 있는 통신망과 위임형 지휘, 기지 방호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분산 작전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다시 말해 분산은 해답의 절반에 불과하다. 나머지 절반은 흩어진 전력을 연결하고 유지하는 능력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군의 ACE, 해병대의 EABO와 SIF, 해군의 DMO, 육군의 MDTF가 다시 하나의 개념으로 수렴한다. 군종마다 움직이는 방식과 사용하는 플랫폼은 다르지만, 모두가 전력을 넓게 분산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정보와 화력, 지휘와 군수를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 미래전의 핵심은 ‘분산된 전력’이 아니라 ‘네트워크화 된 분산전력’이다.
이러한 요구를 합동군 차원에서 구현하려는 핵심 구상이 합동전영역지휘통제(Joint All-Domain Command and Control: JADC2)이다. JADC2는 단일한 무기체계나 하나의 새로운 지휘소를 만드는 사업이 아니다. 과거 육·해·공·우주·사이버 영역과 각 군종별로 분절되어 있던 센서와 데이터, 지휘통제체계와 타격수단을 연결하여, 어느 센서가 획득한 정보라도 가장 적절한 타격수단과 신속하게 결합할 수 있도록 만들려는 지휘통제의 전환이다. 미 국방부의 JADC2 전략은 이를 전 영역과 모든 전쟁단계에서, 동맹·파트너와 함께 ‘감지하고(sense), 이해하고(make sense), 행동하는(act)’ 능력을 관련성 있는 속도로 구현하는 것으로 설명한다.[15] 이 점에서 미국 작전개념의 변화를 단순히 기지의 분산이나 부대의 소형화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ACE, EABO, DMO, MDTF의 진정한 목적은 미군을 여기저기 흩어놓는 데 있지 않다. 적에게는 수많은 표적으로 보이면서도, 아군에게는 하나의 전투체계처럼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전력은 분산하되 효과는 집중하고, 지휘는 분산하되 목적은 통합하며, 플랫폼은 흩어져도 정보와 화력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미래의 인도-태평양 군사력 균형을 결정하는 기준도 달라진다. 어느 국가가 더 많은 전투기와 함정,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가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첫 공격을 받은 뒤에도 센서와 지휘통제망이 살아 있는가, 잃어버린 노드를 다른 노드가 대체할 수 있는가, 분산된 부대가 계속 보급받고 이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발견된 표적을 가장 적합한 타격수단과 얼마나 빠르게 연결할 수 있는가가 실제 전투력의 크기를 결정한다. 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미래의 인도-태평양 억제는 ‘얼마나 많이 전진 배치했는가’보다 ‘흩어진 전력을 얼마나 빠르게 감지-연결-판단-타격의 연쇄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중국의 A2/AD가 미국의 플랫폼 우위를 공격했다면, 미국의 대응은 플랫폼의 숫자를 다시 늘리는 것만이 아니라 플랫폼 사이의 연결성을 높여 체계 전체의 생존성과 적응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는 한미동맹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 한국의 군사적 가치는 동북아 최전방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대규모 미군을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기지 체계에서 상당 부분 나왔다. 이러한 가치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중국의 장거리 정밀타격과 다 영역 감시체계가 발전하고 미군의 전력 운용 방식이 분산·네트워크화 될수록 ‘좋은 위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앞으로 한국은 인도-태평양의 분산된 미군 전력과 실제로 연결될 수 있는 핵심 노드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ISR과 조기경보 정보가 미군의 전구 정보망과 연결되고, 한국의 장거리 정밀타격과 통합미사일방어가 미국의 전구 화력 및 방어망과 연동되며, 사이버·우주·전자전 능력이 공동의 작전상황인식에 기여해야 한다. 동시에 탄약과 연료, 정비·MRO, 항만·비행장, 지휘통제망을 통해 손상된 전력이 다시 전투력을 생성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군사전략에 무조건적으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 한반도 억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미국의 분산 전력 운용에 반드시 필요한 정보·지휘통제·군수·정비의 기능을 제공할 수 있게 되면,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미군이 주둔하는 장소’에서 ‘미군과 연합군이 살아남아 계속 싸울 수 있게 하는 체계’로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다.
전진 배치의 시대에 동맹의 가치를 결정한 핵심 자산이 ‘위치’였다면, 분산전의 시대에는 ‘연결성과 지속성’이 그 위치에 더해진다. 앞으로 강한 동맹은 단순히 많은 미군을 가까이에 보유한 동맹이 아니다. 분산된 전력을 살아남게 하고, 서로 연결하며, 손실을 입은 뒤에도 다시 전투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동맹이 강한 동맹이다.
Ⅲ. 억제 패러다임의 전환: ‘압도’에서 ‘거부’로
인도-태평양 군사력 균형의 변화와 미군 작전개념의 재설계는 결국 억제의 문법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미국이 실제로 운용해 온 지역 억제는 상당한 전력의 전진 배치와 신속한 증원, 정보우위와 정밀타격을 결합하여 위기 초기부터 상대를 압도하고 제압할 수 있다는 능력과 의지를 보여주는 방식에 크게 의존하였다. 본 보고서는 이를 분석적 의미에서 ‘압도에 의한 억제’라고 부른다. 이는 전통적 억제 이론의 별도 유형이라기 보다, 탈냉전기 미국의 압도적 군사 우위를 전제로 형성된 실천적 억제모델을 지칭한다.
고전적 억제이론은 상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보복 비용을 위협하는 ‘응징에 의한 억제(deterrence by punishment)’와, 공격하더라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도록 만드는 ‘거부에 의한 억제(deterrence by denial)’를 구분해 왔다. 스나이더(Glenn Snyder)가 일찍이 정식화한 이 구분에서 거부 억제의 핵심은 상대가 전쟁을 시작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시작하더라도 원하는 정치·군사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데 있다.[16] 오늘날 인도-태평양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바로 이 고전적 거부 억제의 논리가 미중 군사력 경쟁이라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다시 전략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탈냉전기 미국의 지역 억제는 이러한 두 유형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군사태세에서는 전진 배치된 미군, 항공모함 전단, 대규모 공군력, 우세한 ISR, 정밀타격, 그리고 본토와 다른 전구로부터의 압도적 증원 능력을 결합함으로써 “전쟁을 시작해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을 매우 가시적인 군사력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중심이었다. 상대가 위기를 군사적으로 확대하는 순간 이미 전방에 배치된 미국의 군사력과 충돌하고, 뒤이어 훨씬 더 큰 전력이 투입될 것이라는 기대가 억제의 강력한 기반이었다.
이 모델에서 동맹국의 전략적 가치 역시 비교적 명확했다. 동맹국은 미국이 전장에 신속하게 접근하고 압도적 전력을 전개할 수 있도록 기지·항만·공역·훈련장과 정치적 접근권을 제공하였다. 미국의 전력은 동맹국 영토에 가능한 한 가까이 배치되고, 동맹국은 이를 통해 미국의 공약을 물리적으로 묶어두었다. 많은 미군이 가까이 있을수록 억제가 강하다는 공식은 이러한 군사적·정치적 조건 속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A2/AD가 성숙하면서 이 공식의 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의 군사력을 전체적으로 능가하지 않더라도, 제1도련과 그 주변의 미군 기지·비행장·항만·지휘통제시설과 고 가치 플랫폼을 장거리 정밀타격으로 위협함으로써 미국의 지역 전력 투사를 상당 기간 방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켜 왔다. 최근의 정량 연구가 일본과 괌의 주요 미 공군기지에 대한 중국의 미사일 공격이 개전 초기 항공작전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단기간의 기정사실화(fait accompli)가 가능하다고 오판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17]
문제는 단순한 전력손실을 넘어선다. 상대가 “첫 타격으로 미국의 전방 전력을 상당 부분 무력화한 뒤 미국의 본격적인 대응이 시작되기 전에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원래 억제를 위해 배치된 전력이 역설적으로 선제공격의 유인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진 배치가 여전히 미국 공약의 강력한 상징인 것은 분명하지만, 지나치게 집중된 전력이 상대의 정밀타격 범위 안에 들어가면 억제 효과와 취약성이 동시에 커지는 ‘전진 배치의 역설’이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미국 전략의 무게중심은 보다 명시적으로 거부에 의한 억제로 이동하고 있다. 이 전환을 가장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인물이 2026년 현재 미 전쟁부 정책차관인 콜비(Elbridge A. Colby)이다. 2018년 NDS의 핵심 설계자였던 Colby는 『The Strategy of Denial』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아시아 전략목표를 중국의 지역 패권 장악을 저지하는 데 두고, 중국이 제한전쟁과 신속한 기정사실화를 통해 반 패권 연합을 무력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부 방어(denial defense)’를 미국 국방전략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8] 미국이 중국을 완전히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자신의 가장 유리한 군사전략을 실행하더라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도록 거부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점에서 거부억제를 압도를 포기하는 단순한 후퇴 전략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억제의 목표를 상대의 ‘패배’보다 상대의 ‘실패’에 맞추는 보다 현실성 높은 전략이다.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겠다는 약속보다 공격을 하더라도 얻을 것이 없도록 만드는 데 집중한다. 이는 목표가 더 절제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제한적인 전략이지만, 중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전방 집중과 신속 증원을 방해하기 위해 구축한 A2/AD 환경에서는 오히려 더 현실적인 접근이 될 수 있다. 이행 여부가 불확실한 비현실적 전략은 억제력을 갖기 힘들다.
2026년 미국 NDS는 이러한 흐름을 공식 전략의 언어로 매우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NDS는 중국의 지배를 저지하기 위해 제1도련을 따라 “강력한 거부방어(strong denial defense)”를 구축하고, 공격을 시도해도 실패할 것임을 상대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거부에 의한 억제의 본질”이라고 명시한다. 동시에 역내 동맹과 파트너들이 이러한 거부 방어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도록 능력과 책임을 확대할 것을 요구한다.[19] 거부억제는 따라서 미국의 작전개념 변화와 동맹 현대화를 연결하는 핵심 고리이다.
이러한 변화는 미군 주둔태세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다만 이를 “제1도련에서 제2도련으로의 일괄적인 철수”로 이해하는 것은 명확한 오류이다. 변화의 보다 정확한 방향은 제1도련에 대규모 고정 고 가치 전력을 집중하는 위험을 줄이고, 일부 핵심·지원전력을 제2도련을 포함한 보다 후방의 분산된 거점에 배치하는 한편, 제1도련에는 작고 기동성이 높으며 생존성이 강한 미군 전력과 동맹국의 거부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동맹 현대화의 여러 층위 중 군사적 측면은 바로 이러한 전방 집중에서 분산·생존·복원력 중심의 태세로의 이동과 연결되어 있다.[20]
후방·분산 배치는 따라서 단순한 후퇴와 동일하지 않다. 그 전략적 목적은 ‘앞에 있지 않아도 싸울 수 있고, 맞아도 무너지지 않으며, 흩어져 있어도 연결되고, 첫 공격 이후에도 다시 전투력을 생성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상대의 미사일 사거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고 가치 표적을 더 넓은 공간에 분산시키면 상대가 요구 받는 ISR·표적획득·타격 자원의 양은 증가하고, 하나의 성공적인 선제타격으로 전체 작전체계를 마비시킬 가능성은 낮아질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기정사실화의 유인을 낮춘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거부 억제가 성공하려면 상대는 첫 공격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첫 공격 이후의 전쟁 전체를 계산해야 한다. 몇 개의 기지와 지휘통제시설을 파괴하더라도 동맹국의 전력이 버티고, 분산된 미군이 살아남으며, 후방의 장거리 전력과 해·공군력이 계속 투입될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단기간에 정치적 승리를 확보할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약화된다. 첫 타격의 군사적 효율성을 낮추는 것이 곧 첫 타격의 정치적 매력을 낮추는 것이다.
거부억제는 전략 안정성 측면에서도 일정한 장점을 가질 수 있다. 압도적인 전방 공격 전력은 동맹국에게 강력한 안심을 제공하지만 상대에게는 그 전력을 전쟁 초기에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이 압도당할 것이라는 압박을 줄 수도 있다. 양측이 점점 더 많은 정밀타격과 선제공격 능력을 전방에 집중할 경우 위기에서는 ‘먼저 맞으면 진다’는 불안이 커지고, 군비경쟁과 위기 불안정성이 심화될 수 있다. 반대로 충분히 생존 가능하고 분산된 거부 태세는 한 번의 기습으로 상대가 결정적 우위를 얻을 가능성을 낮춤으로써 선제공격의 시간적 압박을 완화할 수 있다. 미국의 장기적 산업·재정적 제약까지 고려한다면, 중국과 전방 공격전력을 끝없이 숫자로 경쟁하는 것보다 동맹국의 능력과 분산된 생존전력을 활용하여 중국의 승리 가능성 자체를 낮추는 편이 더 지속 가능한 전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거부억제가 자동적으로 군비경쟁과 전략경쟁을 완화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미국의 분산배치와 제1도련 동맹국의 장거리타격 능력 강화를 보다 견고한 봉쇄체제의 구축으로 인식한다면 오히려 대응 군비를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 분산되고 생존성 높은 거부태세는 보다 지속 가능한 억제구조를 만들 가능성이 있지만, 위기관리와 신호관리, 중국과의 전략적 소통이 결여될 경우 베이징에는 ‘더 내구성 있는 봉쇄체제’로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거부억제는 군사태세만의 문제가 아니라 군사태세와 위기관리, 외교적 신호를 함께 설계해야 하는 전략이다.
거부억제의 또 다른 약점은 동맹 보증의 가시성 감소이다. 대규모 미군이 동맹국 영토에 배치되어 있으면 미국의 개입 의지를 설명하기 쉽다. 반대로 일부 전력이 후방으로 이동하고 동맹국의 1차적 책임이 확대되면 동맹국 국민은 이를 미국의 철수나 공약 약화로 인식할 수 있다. 상대 역시 미국이 전쟁 비용을 회피하기 위해 역내 개입 의지를 줄였다고 오판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 더 생존성 있는 태세가 정치적으로는 더 불안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거부억제가 성공하려면 단순한 후방 분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미국은 ‘물리적 존재’의 일부를 줄일 경우 ‘작동 가능한 지원’의 신뢰성을 더 높여야 한다. 평시의 연합연습, 공동작전계획, 데이터·ISR 공유, 지휘통제 연동, 전략자산 전개훈련, 탄약과 군수의 사전배치 등을 통해 후방에 위치한 미군도 위기 발생 시 즉각적으로 동맹방위에 결합될 수 있음을 반복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뒤에 있으나 늦지 않고, 분산되어 있으나 분리되어 있지 않은 동맹’이어야 한다.
동맹국에게 요구되는 변화는 더욱 크다. 미국의 전진 배치 부담이 줄어들수록 동맹국은 초기 위기를 스스로 버티고 상대의 단기 목표 달성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국방비 증액이 아니라 ‘고슴도치형 전략적 거부 능력’의 확보를 의미한다. 장거리 정밀타격, 통합 방공·미사일방어, 이동형 화력, 분산된 지휘통제, 무인체계, 탄약과 군수 지속능력 등을 결합하여 상대가 동맹국을 단기간에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Colby의 거부전략에서도 동맹은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미국이 중국의 아시아 패권을 막기 위해서는 반 패권 연합 자체가 중국의 제한전쟁과 각개격파 전략을 견딜 수 있어야 하며, 각 동맹국이 실제로 방어될 수 있다는 신뢰가 유지되어야 한다.[21] 따라서 미국의 역할 축소와 동맹국 역할 확대만을 강조하면 거부 전략은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 동맹국이 미국의 공약을 의심하여 중국에 편승하거나 자율적 생존전략으로 이탈한다면 중국의 지역 패권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목적 자체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거부억제는 동맹국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전략인 동시에, 더 높은 수준의 군사적 능력과 자율성을 허용해야 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미국이 동맹국에게 스스로 방어하라고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 방어에 필요한 장거리 정밀타격, 첨단 ISR, 미사일방어, 사이버·우주 능력의 발전을 과도하게 제한한다면 전략은 작동하기 어렵다. 따라서 동맹 현대화는 책임 이전과 함께 첨단 무기체계·기술·정보 접근 확대, 공동기획과 상호운용성 강화, 기존 제도적 제한의 재검토를 수반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또한 거부억제가 주둔미군의 완전한 철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전략적 전환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미국 전력과 조력자(enabler)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둔미군은 동맹공약의 정치적 가시성을 제공하고, 정보·지휘통제·미사일방어·군수·전략자산 연계를 위한 기반이 되며, 미국이 약속하는 ‘핵심적이지만 보다 제한적인 지원(critical but more limited support)’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연결점이기 때문이다. 2026 NDS도 한국이 북한 억제의 일차적 책임을 담당할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핵심적 지원과 주한미군 태세의 갱신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22]
다중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 역시 미국과 동맹국 사이의 군사적 이익 합치를 가져온다. 한국이 한반도 억제를 주도하고 미국이 보다 넓은 인도-태평양 과제에 집중하더라도, 미국은 한반도 억제가 실패할 경우 대만과 한반도라는 복수의 위기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의 억제 성공을 지원할 강력한 자기이익을 갖는다. 동시에 주한미군의 지속적 존재는 이러한 전환과정에서 동맹공약의 가시적 닻(anchor)으로 기능할 필요가 있다. 동맹 현대화의 핵심은 미국의 부재가 아니라 미국의 역할 변화이다.
과거의 동맹 방어가 미국의 전진 배치와 압도적 증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새로운 모델에서는 동맹국이 전쟁의 초기 국면을 견디고 적의 기정사실화를 거부하며, 미국이 제공하는 소위 ‘보다 제한적이지만 결정적인 능력’이 필요한 순간 결합되는 구조가 중요 해진다. 이는 책임의 분산이면서 동시에 능력의 결합이다. 한국군이 아무리 강해져도 미국의 전략적 조력 능력이 사라져서는 안 되고, 반대로 미국의 지원이 아무리 강력해도 한국군이 초기 방어를 담당할 능력이 없다면 거부 억제는 성립하기 어렵다.
한국에게 이는 매우 직접적인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향후 한국은 북한의 재래식 위협에 대한 억제와 방어의 1차적 책임을 더 많이 담당할 가능성이 높다. 주한미군의 일부 역할 조정, 분산, 전략적 유연성이 논의될 경우 대응의 중심을 단순히 “몇 명의 미군을 남길 것인가”에 두어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미군 능력이, 어디에서, 어떤 조건과 절차에 따라 한국군과 결합하여 억제의 효과를 유지 또는 강화할 것인가이다. 이것은 ‘형태의 보존’에서 ‘효과의 보존’으로 질문을 전환하는 일이다. 한국이 확보해야 할 것은 병력의 숫자에 대한 추상적 약속만이 아니라 유사시 미국 전략자산의 전개와 장거리 정밀타격 지원, ISR 및 데이터 공유, 통합미사일방어 연동, 사이버·우주·전자전 지원, 탄약·정비·MRO와 군수 지속능력이 어떠한 계획과 절차에 의해 제공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제도적 보장이다. 동시에 한국군의 지휘통제체계가 미군의 분산 전력과 연합합동전영역지휘통제(CJADC2)를 통해 즉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23]
핵위협을 고려하면 이러한 제도화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북한의 핵전력 발전으로 한국군이 재래식 방어를 주도한다고 해서 미국의 핵·전략적 역할까지 축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재래식-핵 통합(Conventional-Nuclear Integration: CNI), NCG를 통한 핵협의와 공동기획, 위기 시 전략자산 운용과 지휘통제의 연계를 보다 구체화해야 한다. 미군의 물리적 구성과 위치가 변화할수록 확장억제는 상징에서 절차로, 약속에서 작동가능한 역량으로 더욱 깊이 제도화되고 현시 되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요구하는 것만큼 자신의 전략적 거부 능력을 어떠한 개념으로 발전시킬 것인지도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는 전통적 한반도 방어를 넘어 장거리 정밀타격, 분산·기동형 전력, 통합미사일방어, 무인·AI 체계, 사이버·우주·전자전, 군수·산업기반을 하나의 거부체계로 결합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미국의 역할이 줄어드는 빈 공간을 단순히 메우는 것이 아니다. 한국 스스로 상대의 전략적 선택을 제약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에 동맹 현대화가 한국에게 제공할 수 있는 역설적인 기회가 있다. 더 많은 책임을 요구 받는 것은 분명 부담이다. 그러나 그 책임을 실제로 수행하려면 한국은 더 많은 정보와 기술, 더 높은 지휘권한, 더 강력한 장거리 전력과 전략적 자율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동맹 현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경우에는 단순한 ‘부담 이전’이 되지만, 능력과 권한의 확대와 결합할 경우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높이면서 동시에 동맹을 더욱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제3장의 결론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인도-태평양 군사력 균형의 변화는 기존 한미동맹의 작동 방식에 상당한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억제의 붕괴나 미국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고 있는 것은 억제가 아니라 억제를 만들어 내던 과거의 방식이다. 문제는 우리가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에 부합하는 접근법을 기획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느냐이다.
과거의 억제 문법은 명료했다. “미국이 앞에 있으므로 공격하지 말라.” 대규모 전진 배치와 압도적인 증원 능력 자체가 메시지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밀타격체계가 성장하고 미국의 전력이 여러 전구에서 동시에 요구되는 시대에는 그 문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억제의 문법은 보다 복합적이지만 본질은 오히려 분명하다. “공격해도 이길 수 없다. 첫 타격으로 전쟁을 끝낼 수 없다. 일부 전력을 파괴해도 동맹은 무너지지 않는다. 흩어진 전력은 살아남아 다시 연결되고, 미국의 결정적 지원은 계속 투입되며, 결국 너의 정치적 목적은 거부될 것이다.”
이것이 ‘압도’에서 ‘거부’로 이동하는 억제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이다. 한국의 과제는 과거의 문법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억제의 문법 속에서 한국군과 주한미군, 미국의 후방전력과 확장억제를 어떻게 다시 결합할 것인지 스스로 설계하는 것이다. 그 설계에 성공할 때 동맹 현대화는 미국의 부담을 한국에 이전하는 과정이 아니라, 한국이 한반도 억제를 주도하면서도 미국의 결정적 능력을 더 깊고 확실하게 묶어두는 새로운 동맹 질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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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설인효_국방대학교 전략학부 교수.
■ 담당 및 편집: 임재현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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