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환 EAI 수석연구원(서울대 강사)은 북한 경제의 고질적 문제가 자본·노동 부족이 아닌 총요소생산성의 정체에 있으며, 이는 AI가 이론적으로 가장 큰 효용을 발휘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분석합니다. 저자는 하지만 전력·데이터 인프라 제약과 자본재 수입 봉쇄로 이러한 잠재력이 실제 도약으로 이어지기 어렵고, 다른 외부 협력이 부재할 경우 북한이 중국 기술생태계에 종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합니다. 나아가 오 박사는 인도주의·생산성 보조 영역의 '얕은 협력'을 먼저 가동하고 향후 조건이 갖추어질 때 '깊은 협력'으로 이행하는 단계적 전략을 제시합니다.
AI 시대 경로 선택과 신한반도 구상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가 한반도 안보와 남북관계, 그리고 장기적으로 한반도 구상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AI 시대 경로 선택과 신한반도구상」 워킹페이퍼 시리즈를 발간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대북정책은 비핵화와 남북교류협력, 평화체제 구축, 통일을 서로 연결된 과정으로 이해해 왔으나,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와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의 남북관계 재규정, 미중 전략경쟁의 구조화로 인하여 이러한 구상이 전제해 온 조건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AI를 둘러싼 국제질서의 변화와 북한의 기술발전 경로를 살펴보는 한편, 군사·경제·지식 거버넌스 영역에서의 파급효과를 검토함으로써 AI 시대에 걸맞은 신(新)한반도구상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북한은 고성능 반도체와 컴퓨팅 인프라의 제약으로 프런티어 AI를 자체적으로 발전시키는 대신 무인기와 사이버작전, 감시체계 등 특정 목적에 필요한 AI를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의 기술생태계에 대한 의존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선택은 남북 간 군사적 위기불안정성과 기술·지식격차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한국에도 새로운 대응 전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 또한 AI 기반 감시정찰과 정보분석, 위기관리 능력을 발전시키는 한편, 인간안보 분야를 중심으로 한 대북 협력의 가능성을 위험관리의 관점에서 모색하고 있습니다. 특히, AI의 민군 겸용성을 고려할 때 대북 협력이 북한의 군사능력이나 사회감시 능력의 강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억제와 방어를 지속하면서도 조건이 허용되는 영역에서 협력을 준비하는 이중적 접근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본 워킹페이퍼 시리즈는 AI를 둘러싼 국제질서의 변화로부터 출발하여 북한의 AI 발전경로와 군사·경제·지식 거버넌스 영역에서의 파급효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한국의 대북 AI 협력 방향과 신한반도구상의 함의를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를 통해 AI 시대의 한반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학술적·정책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의 전략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AI 시대 경로 선택과 신한반도 구상 발간 목록]
① AI시대 전략환경의 변화와 미래 한반도 구상, 전재성 [워킹페이퍼 읽기] ② AI를 둘러싼 일반적 동향, 백서인 [워킹페이퍼 읽기] ③ 북한의 AI 현황, 오인환 [워킹페이퍼 읽기] ④ 군사 부문: AI 시대 남북관계의 리스크와 기회, 김양규 [워킹페이퍼 읽기] ⑤ 경제 부문: AI 시대 남북관계의 리스크와 기회, 오인환 [워킹페이퍼 읽기] ⑥ 지식 및 거버넌스 부문: AI 시대 남북관계의 리스크와 기회, 최인호 [워킹페이퍼 읽기] |
Ⅰ. 서론
AI가 군사·안보 영역에서 남북 간 전략적 안정성을 위협하는 변수로 작동한다면, 경제 영역에서 AI는 보다 양가적인 성격을 지닌다. 한편으로 AI는 북한의 고질적인 생산성 저하와 자본 및 인프라 제약을 우회할 수 있는 잠재적 도약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 간 발전격차를 구조적으로 고착화하고 북한의 대중(對中) 경제 및 기술 종속을 심화시키는 경로가 될 수 있다. 본 장은 북한 경제의 거시·산업적 조건 위에서 AI가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점검하고, 남북 경제협력이 직면한 새로운 기회와 제약을 분석한 뒤, 대중(對中)협력 경로와 남북협력 경로를 미래 옵션 시나리오로 비교한다. 이를 토대로 결론에서는 경제 부문 AI 협력의 장단점과 정책적 과제, 그리고 한계를 종합한다. 군사 부문 분석이 "협력이 어려운 조건에서 어떻게 전략적 안정성을 설계할 것인가"라는 위험관리의 문제로 귀결되었다면, 경제 부문은 그보다 넓은 가능성의 공간을 갖는다. 다만, 그 가능성은 북한의 제도적 조건, 미중 AI 전략경쟁의 구조, 그리고 한국 대외 AI 협력정책의 방향성이라는 세 겹의 제약 안에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 본 장은 이 세 제약을 일관되게 견지하면서 경제 부문 AI 협력의 현실적 좌표를 제시한다.
Ⅱ. 북한의 경제 부문 AI 활용 현황과 변화 가능성
1. 북한 경제의 거시적 조건: 장기침체와 외연적 성장의 한계
북한 경제 부문에서 AI가 가질 수 있는 의미를 가늠하려면, 먼저 북한 경제가 처한 거시적 조건을 정확히 짚어야 한다. 북한 경제는 장기적으로 1950년대 후반의 ‘반짝 고성장’ 이후 지속된 장기침체를 겪어 왔다. 1950년대 후반에는 소련 원조에 따른 물적자본 투입과 천리마 운동과 같은 대중 동원을 통한 노동 투입이 고성장을 견인했으나, 1960년대 이후 자본 및 노동 투입을 빠르게 늘리기 어려워지면서 성장률이 둔화되었다(1960년대 4.1%, 1970년대 2.9%, 1980년대 2.4%). 1990년대에는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붕괴와 자연재해가 겹치며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큰 폭의 역성장을 겪었고, 이후 1999~2016년에는 연평균 1.4%의 완만한 회복세를, 2017~2022년에는 대북제재 강화와 코로나19로 연평균 -2.0%의 역성장을 거쳐, 2023년 3.1%·2024년 3.7%로 회복 국면에 진입했다.
성장회계(growth accounting) 방식의 분해는 북한 경제의 근본적 취약점을 드러낸다. 북한의 경제성장은 대부분 자본 및 노동 투입 증가에 의한 ‘외연적 성장’이었으며, 생산성 증가율은 낮거나 오히려 하락했다. 1956~69년 연평균 7.0%의 성장률을 기록한 가운데 총요소생산성(TFP) 증가는 1.1%에 불과했고, 1970~89년에는 -0.8%, 1990~99년 -3.3%, 2010~18년에는 -1.7%로 생산성이 지속적으로 경제성장을 저해해 왔다. 이는 북한이 1980년대까지는 요소투입 증가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외연적 성장이 한계에 봉착한 1990년대 이후로는 역 성장하거나 매우 느린 성장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도출되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북한 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자본 및 노동의 부족이 아닌 생산성의 정체이며, 이는 원리상 AI·디지털전환(DT) 기술이 가장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AI가 총요소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북한 경제는 이론적으로 AI 도입에 따른 생산성 개선 여력이 매우 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후술하듯 이 이론적 잠재력과 현실적 실현 가능성 사이에는 데이터 및 전력 인프라, 자본재 접근,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도라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2. 산업구조와 산업정책: AI가 들어설 자리
북한의 산업구조는 1950년대 중반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에 따라 농업 중심(1955년 농림어업 비중 약 60%)에서 공업 중심으로 전환되었으나, 1990년대 경제위기로 제조업 기반이 흔들리고 서비스업 비중이 증가하는 굴절을 겪었다. 2024년 기준 북한 경제에서 농림어업, 공업,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약 21%, 49%, 30%로 추정된다. 대북제재 강화 이후 광물 수출 금지와 자본재 수입 금지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광업과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축소된 반면, 전력 및 건설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상승한 점이 최근의 특징이다.
산업정책 측면에서 북한은 휴전 직후인 1953년 채택된 ‘중공업 우선 발전 전략’을 현재까지 기본 골격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김정은 시기에도 4대 선행산업(석탄, 금속, 철도수송, 전력)과 기간공업(금속, 기계, 화학)을 우선 성장시킨다는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김정은 시기 들어 산업 간 자원배분에서는 실용주의적 기조가 두드러진다. 단기간에 성과 도출이 어려운 부문보다는 성과가 가시화되거나 이미 거두고 있는 부문에 자원을 집중하여 중화학공업 대규모 신규투자를 자제하는 한편, 에너지(발전) 부문과 기존 설비의 안정화 및 현대화에 자원을 투입해 왔다.
과학기술 기반 경제발전의 강조 역시 김정은 시기 산업정책의 특징이다. 2016년 7차 당대회의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은 인민경제의 현대화, 정보화 및 과학화를 기본방향으로 제시했고, 가장 최근의 9차 당대회에서 발표된 ‘새로운 경제발전 5개년(2026~2030년) 계획’에서도 신에너지, 우주, 인공지능을 중요 과제로 명시하며 첨단기술 기반 신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첨단 과학기술의 강조, 산업부문의 과학화 및 현대화는 주로 제조업 부문의 자동화를 통한 효율성 제고를 의미하며, 산업구조의 대대적 전환과 고도화를 추진할 의지나 역량은 부족하다. 9차 당대회 과제 가운데서도 지방발전, 중화학공업 정비 및 보강 등이 시급한 만큼 신산업에 우선순위를 두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조건은 본 보고서 3장에서 분석한 북한 산업 AI의 성격과 정확히 부합한다. 북한 경제 부문 AI 활용의 본질은 ‘경제의 정보화’를 위한 생산공정의 자동화 및 지능화이며, 그 기술적 실체는 CNC(컴퓨터 수치제어) 기술과 분산조종체계(DCS)의 진화 과정에 자리한다. 북한에서 AI는 별도의 혁신 패러다임보다 기존 디지털전환의 토대 위에 적용되는 ‘임베디드(embedded) AI’의 성격을 지니며, 대규모 인프라 및 자본이 요구되는 영역보다 기존 정보화 역량을 활용해 단기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에 집중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결국 북한의 산업 AI는 ‘구조적 체질 개선’보다 기존 생산의 ‘정상화’를 보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위 산업정책의 실용주의·정상화 지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3. 대외무역 구조: AI활용의 외부 제약
북한 경제에서 AI가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변화 중 하나는 대외무역이지만, 여기서 북한이 직면한 제약은 오히려 더 구조적이다. 북한은 내부 생산 기반이 취약해 광물, 수산물, 의류 등을 수출하고 부족한 공산품, 식량 등을 수입하는 구조이며, 전자제품 등 고기술 제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중간투입과 고정자본 투자도 상당 부분 수입 물자에 기반하여 무역이 곧 주민 생활과 공업 생산에 직결되어 있다.
대북제재 강화는 이 무역구조를 크게 왜곡했다. 수출제재가 석탄 및 의류 등 주력 수출품목을 사실상 전면 금지한 반면 수입은 중공업 제품 일부만 금지하여 북한의 무역적자가 2000~2016년에는 연평균 약 10억 달러에서 2017년에는 제재 강화 이후 연평균 약 20억 달러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수출 품목은 석탄, 금속광물, 의류 중심에서 시계 무브먼트, 가발(가수염) 등 경공업 임가공 제품과 텅스텐광과 몰리브덴광 등 비(非)제재 광물, 접경지역 송전을 통한 전기에너지 등으로 대체되었다. 수출 집중도는 가발과 가수염 등 일부 임가공 제품에 집중되며 다시 상승하는 추세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자본재 수입의 붕괴다. 2018년 북한의 대중(對中) 자본재 수입액은 2017년 5억 달러에서 94.5% 급락한 2,700만 달러에 그쳤으며, 이러한 자본재 수입 감소는 생산 설비 노후화를 가속화해 제조업 생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AI 기반 산업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컴퓨팅 하드웨어, 센서, 서버, 고급 반도체가 모두 자본재이자 제재 대상 품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자체적 산업 AI 고도화는 무역 차원에서 이미 강하게 봉쇄되어 있다. 임가공(인모 가공 등) 중심의 회복은 노동집약적 저 부가가치 경로이지 AI 친화적 경로가 아니다.
4. 변화 가능성의 두 얼굴: 도약 잠재력과 자기강화적 격차
종합하면 북한 경제 부문에서 AI의 변화 가능성은 두 얼굴을 갖는다. 잠재적 측면에서, 생산성 정체가 북한 경제의 핵심 병목이라는 점은 AI·DT가 가장 높은 한계효용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다. 글로벌 사우스 개도국에서 보건·농업·교육 등 분야에 소형·특화(small/specialized) AI 모델을 현지 데이터로 구축하는 접근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은, 자본 및 인프라가 제한적인 북한에도 적용 가능한 모델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북한이 농수산업 생산성 예측, 전력 수급 최적화, 감염병 대응, 물류·재고 관리 등 ‘낮은 위험·단기 성과’ 영역에서 AI를 도입할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제약적 측면은 더 강력하다. 첫째, 글로벌 노스-사우스 간 AI 도입 격차가 이미 확인되는 가운데(생산가능인구 중 생성형 AI 사용 비율은 노스 24.7% 대 사우스 14.1%), 인프라 — 특히 대규모 전력과 데이터 — 가 이 격차의 근본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만성적 전력난과 폐쇄적 데이터 환경을 가진 북한은 이 격차의 최하단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둘째, IMF 추정에 따르면 AI의 생산성 증대 효과는 노출도(exposure)와 준비도(preparedness)가 높은 선진국이(미국 최대 +5.4%, EU +4.4%) 저소득국(+2.7%)을 상회하므로, AI는 오히려 발전격차를 확대할 개연성이 높다.
셋째, 본고의 6장 지식 및 거버넌스 영역에서 분석한 ‘자기강화적 격차’와 ‘지식종속’의 논리는 경제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AI 역량은 데이터, 컴퓨팅 및 인적자본의 함수이므로, 초기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축소되기보다 확대되는 경로 의존성을 띤다. 따라서, 북한 경제 부문 AI의 변화 가능성은 "AI가 북한 경제를 도약시킬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제도적·협력적 조건이 갖추어질 때 도약 잠재력이 자기강화적 격차를 압도할 수 있는가"라는 조건부 질문으로 재 정식화되어야 한다. 이 조건의 핵심에 남북 경제협력의 가능성과 제약이 자리한다.
Ⅲ. 남북 경제협력의 새로운 기회와 제약
1. 협력의 출발점: 글로벌 사우스 프레임과 적대적 두 국가론
현재 남북 경제협력은 정치적으로 거의 모든 채널이 단절된 상태에서 출발한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조국통일’ 담론을 전면 폐기한 상황에서, 민족공동체 회복을 전제로 한 전통적 경제협력 논리는 작동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치적 공백을 우회하기 위한 하나의 접근은 북한을 우선 글로벌 사우스의 일부로 간주하고, 한국이 글로벌 사우스를 대상으로 전개하는 국제개발협력 및 AI 협력 모델을 북한에 잠재적으로 적용 가능한 모델로 미리 설계해 두는 것이다. 이는 민족 내부 거래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프레임 대신, 보편적 개발협력이라는 탈 정치화된 프레임을 통해 정치적 공간이 열렸을 때 즉시 가동할 수 있는 정책을 사전에 준비하는 전략이다.
이 접근 방식의 현실적 토대는 최근 한국의 대외 AI 협력정책이 글로벌 사우스를 향한 실질적 방향성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026년 2월 공개된 ‘제4차 국제개발협력 기본계획’은 기존 강점분야인 보건, 농촌 개발, 교육, 기후, 공공행정에 더해 AI를 중점 분야로 추가하였으며, 정부는 협력국의 기술 수준과 IT 환경에 맞는 AI 인프라 설계·구축, 협력국 수요에 맞춘 소형·특화 AI 모델 개발을 강조하는 ‘개도국 맥락에 맞는 실용적·맞춤형 AI 협력’을 지향한다. 분야별로는 보건(AI 기반 디지털 헬스, 감염병 대응), 식량 및 농업(ICT 기반 스마트팜), 공공행정(빅데이터 기반 전자정부) 등 북한의 인도주의·생산 수요와 직접 맞닿는 영역이 명시되어 있다. KOICA의 중장기 AI 전략, NIA의 개도국 대상 AI 협력사업(나이지리아 AIDC, 우간다 루간다어 LLM, 카자흐스탄과 베트남 현지 데이터·언어 사업 등)은 ‘현지 데이터와 언어를 결합한 소버린(sovereign) AI 역량 형성’이라는 방향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언어, 지형, 기후의 유사성이 큰 북한에 응용 시 비교우위가 매우 높은 모델이다.
2. 인도주의·생산 분야의 기회 공간
남북 경제협력에서 AI가 비교적 낮은 정치적 장벽을 가질 수 있는 기회 공간은 인도주의와 생산성 보조 영역에 집중된다. 첫째, 의료 및 보건 분야다. AI 기반 질병 예측 및 진단 보조, 감염병 대응 역량 제고, 기후대응 보건시스템 구축 등은 북한 주민의 인간안보에 직접 기여하면서도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북한 자체적으로도 종합약국 AI 로봇, 질병 예측 및 진단 보조 모델 등 보건 분야에서의 AI 활용이 보고된 바 있어 수용 기반이 존재한다.
둘째, 농업과 임업 분야다. 농업은 북한의 주된 산업이자 김정은 시기 실용주의 산업정책이 내부 자원으로 성과 도출이 가능하다고 보며 강조해 온 영역이다. ICT 기반 스마트팜, 농수산업 생산성 예측 및 향상, 산림 및 수해 모니터링 등은 북한의 식량 수급 개선이라는 절실한 수요와 직결되며, 한국이 글로벌 사우스를 대상으로 축적한 농업 AI 및 디지털 개발협력 경험을 이전하기에 적합하다. 셋째, 재난 및 기후 대응이다. 기상정보 공유, 감염병 관리, DMZ 생태관리, 산림 복원 모니터링 등은 접경의 물리적 인접성으로 인하여 한국에도 직접적 편익이 발생하는 공동 공공재의 성격을 띤다.
이 영역들의 공통점은 (1) 인도주의적 정당성이 높아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쉽고, (2)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보다 현지 데이터 기반 소형 AI로 구현 가능하며, (3) 군사적 전용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이다. 한국의 제4차 국제개발협력 기본계획이 중점 분야로 설정한 영역과 북한의 수요가 겹치는 이 교집합이 정치적 공간이 열릴 경우 가장 먼저 가동될 수 있는 남북 AI 경제협력의 1차 후보군이다.
3. 구조적 제약 ①: 제도와 인적자본의 이중 간극
그러나 이러한 기회 공간은 두 겹의 구조적 제약에 의해 강하게 제한된다. 첫 번째 제약은 제도와 인적자본의 이중 간극이다. 남북경제통합의 실현가능성과 성패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북한의 제도적 개혁과 인적자본 수준 제고이며, 이는 AI/DT 시대에도 변함없이 유효하다. 인적자본 측면에서 북한의 수준은 남한과 격차가 큰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통합 시 부정적 충격을 확대하고 시너지 효과를 저해하는 요인이다. 동서독 사례에서 통일 직후 1991년 동독 국민소득이 1989년 대비 32% 감소하였으며, 서독에서 동독으로의 이전지출이 막대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동독 노동자의 생산성이 서독 임금 수준에 미치지 못한 데 있었다. 북한이탈주민 연구 역시 인지적 능력, 경쟁의식 및 금융지식 등에서 남한주민과 상당한 격차가 있고, 거주기간이 경과해도 취업률 및 소득 격차가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됨을 보여준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주의-자본주의 협력에서 발생하는 인적자본의 미스매치다. 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평균 교육수준이 높았음에도, 이념 교육과 학업 경쟁의 왜곡으로 표면적 교육수준 대비 실제 인적자본 수준이 낮을 수 있다. 게다가 사회주의는 기업의 진입 및 퇴출이 없고 기술혁신 속도가 느려 고정지식이 강조되는 반면, 산업 주기가 빠른 자본주의에서는 고정지식보다 유동지식과 범용지식이 중요하다. 이념교육이 강하고 노력동원이 빈번한 북한의 특성상 이 괴리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AI/DT 시대는 이 부조화를 한층 증폭시킨다. AI/DT 시대에는 산업 사이클이 더욱 짧아져 노동자가 변화된 업무와 산업구조에 계속 새롭게 적응해야 하며, 특정 산업에 특화된 지식 및 기술보다 유동지식과 비인지능력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 결과, 많은 부문에서 전문 인력의 가치가 퇴색될 수 있으며, 북한의 경우 기존 IT 인력의 경쟁력마저 저하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AI/DT는 북한의 인적자본 격차를 줄여 주는 평준화 기제가 아닌, 오히려 격차를 확대하는 가속 기제로 작동할 위험이 크다.
4. 구조적 제약 ②: 민간기업 참여와 시장메커니즘의 부재
두 번째 제약은 협력의 실행 주체와 작동 원리에 관한 것이다. AI/DT 시대 남북 경제협력은 단계마다 민간기업, 특히 대기업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남한 민간기업이 참여하려면 북한에서 사유재산권 보장, 가격 및 생산 결정의 자율권 보장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제도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체제이행 수준의 전면적 개혁이 당장 어렵다면, 초기에는 특별법이 적용되는 경제특구 등을 통해 제도 적용 범위를 제한하는 점진적 접근이 가능하다.
특히, AI/DT 환경에서는 시행착오(trial and error)와 생산공정의 미세조정이 더욱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므로 중앙계획의 비효율성이 극대화된다. 북한도 최근 기술혁신과 생산 부문의 질적 향상을 강조하지만, 생산량 위주로 평가하는 시스템 하에서는 이를 추구하기 어렵고 실패 가능성이 있는 기술개발 시도에 대한 책임소재도 불명확하다. 결국, 남북 경제협력의 성과를 극대화하고 북한의 빠른 경제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장 메커니즘의 대폭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이 경제활동에 대한 법적·행정적 통제를 강화하고 국가유통망을 통한 거래 일원화를 시도하는 재집권화 경향을 보여 온 점은 이 제도적 전제가 단기간에 충족되기 어려움을 시사한다.
여기에 본 보고서가 6장에서 분석한 정보통제의 딜레마가 더해진다. AI 산업의 본질은 데이터의 자유로운 축적, 이동 및 활용에 있으나, 북한 체제는 정보 통제를 체제 생존의 조건으로 삼는다. 남북 경제협력의 AI 구성요소가 깊어질수록 북한 당국이 감내해야 할 정보 개방의 비용은 증가하며, 이는 협력의 심화 자체를 정치적으로 제약하는 내생적 한계가 된다.
5. 기회와 제약의 종합: 비대칭적 가능성의 구조
종합하면 남북 경제협력에서 AI가 여는 기회는 인도주의·생산성 보조 영역에 국한된 ‘얕은 협력’에서는 비교적 현실적이지만, 산업 고도화 및 시장통합으로 나아가는 ‘깊은 협력’에서는 제도, 인적자본, 정보통제라는 삼중 장벽에 막히게 된다. 이 비대칭성은 군사 부문에서의 협력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과는 다른 구조다. 경제 부문에서는 협력의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는 않으나, 그 문이 열리는 폭과 깊이가 북한의 제도적 선택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의 과제는 군사 부문처럼 "협력 불가 조건에서의 위험관리"가 아닌, "얕은 협력의 인도주의 채널을 열어 두면서, 깊은 협력으로의 이행에 필요한 제도적 조건을 어떻게 유도·준비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Ⅳ. 북한의 경제 AI 미래 옵션 시나리오: 대중(對中)협력과 남북협력 비교
군사 부문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경제 부문 AI 미래 옵션도 (1) 대중(對中) 협력 경로, (2) 제재회피형 저비용 자체 활용 경로, (3) 남북협력 경로의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만 경제 부문에서는 군사 부문과 달리 세 번째 경로가 ‘비현실적’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경제 영역에서는 이중용도 문제와 억지균형 변동의 논리가 약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세 시나리오를 비교한다.
1. 시나리오 A: 대중(對中) AI 협력을 통한 종속적 정보화
현 시점에서 북한에게 가장 현실적인 외부 경제 및 기술 협력 경로는 중국이다. 중국은 AI 연구, 데이터 처리, 클라우드, 산업 자동화, 감시통제기술에서 세계적인 역량을 보유하고 있고, 북한의 무역·자본·에너지가 사실상 중국에 의존하는 현 구조상 AI 분야에서도 중국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파트너다. 글로벌 AI 지형에서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영향력을 가장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국가이며, 딥시크(DeepSeek)의 확산 사례에서 보듯이 개방성과 저렴한 접근성을 앞세워 서구 AI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한 시장 — 중국, 러시아, 이란 등 — 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 북한은 이 흐름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상에 놓인다.
그러나, 이 경로의 핵심 위험은 협력의 성격이 종속적이라는 데 있다. 중국과의 AI 협력을 강화할 경우, 중국이 데이터를 흡수하면서도 북한의 실질적 경제발전이나 산업개발에는 관심이 없는 형태로 협력을 장기적으로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지난 30여 년 간의 북핵외교 경험이 보여주듯, 미국이나 중국 모두 북한의 진정한 경제 및 산업 개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AI 경쟁에서 미중 간 과점 내지 독점 상태가 도래하는 국면에서, 중국에게 북한은 발전의 대상보다 데이터, 노동 및 전략적 완충지대의 효용을 갖는 객체에 가깝다.
그 결과 시나리오 A는 북한 경제에 ‘정상화 보조’ 수준의 부분적 효율 개선을 가져올 수는 있으나, 생산성 정체라는 근본 병목을 해소하는 구조적 도약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오히려 데이터 주권의 상실, 핵심 기술의 외부 의존 고착, 그리고 본 보고서가 6장에서 경고한 ‘기술 종속의 딜레마’ — 중국 및 러시아로부터의 기술 유입이 북한의 자율성을 잠식하는 — 가 경제 영역에서도 재현될 위험이 크다. 요컨대 시나리오 A는 북한 정권의 단기적 통제·효율 수요는 충족시키되 북한 경제의 장기 발전 잠재력은 외부에 저당 잡히게 되는 경로다.
2. 시나리오 B: 제재회피형 저비용 자체 AI 활용
두 번째 경로는 외부 의존을 최소화한 저비용 자체 AI 활용이다. 군사 부문 분석에서 보았듯 이 경로는 현 시점부터 바로 적용이 가능하여 현실성이 높고, 다른 시나리오와 동시에 진행될 수 있다. 경제 영역에서 이 경로는 오픈소스 모델과 경량화 알고리즘을 활용하여 기존 CNC·분산조종체계 기반 산업 정보화를 보조하는 ‘임베디드 AI’의 점진적인 확장으로 나타난다. 전력 수급 최적화, 생산공정 자동화, 농수산업 생산 예측, 재고·물류 관리 등 기존 정보화 역량 위에 얹을 수 있는 ‘낮은 위험·단기 성과’ 영역이 그 무대다.
이 경로의 장점은 자율성 보존과 즉시성이지만,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자본재 수입이 봉쇄되고 대규모 컴퓨팅 및 데이터 인프라가 부재한 조건에서의 자체 활용은 생산의 ‘정상화’를 보조하는 수준에 머물 뿐 산업구조의 고도화로 도약하기 어렵다. 즉, 시나리오 B는 북한 경제의 하방 위험을 일부 완화할 수는 있어도 상방 잠재력을 실현하지는 못하는, 본질적으로 방어적이고 저성장 지향적인(low-trajectory)인 경로다. 또한, 이 경로에서 축적되는 역량의 상당 부분이 6장에서 분석한 사회 통제 및 감시 영역으로 전용될 유인이 상존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경제적 편익만으로는 평가하기 어렵다.
3. 시나리오 C: 남북협력 경로의 조건부 가능성
세 번째 경로인 남북협력은 군사 부문과 달리 경제 부문에서는 원리상 배제되지 않는다. AI는 재난 대응, 산림 및 수해 모니터링, 감염병 관리, 농업 생산성 향상, DMZ 생태관리, 기상정보 공유 등 비 군사 영역에 활용될 수 있고, 기초 AI 역량, 언어, 지형, 기후의 유사성 측면에서 북한이 한국과 직접 협력하는 편이 다른 경로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한국은 글로벌 사우스 대상 소형·특화 AI 개발협력 경험과 디지털 ODA 역량(양자 ODA 중 디지털 전환 지원 비중이 세계 최고 수준)을 보유하고 있어, 시나리오 C가 가동될 경우 북한 경제에 가장 큰 한계효용을 제공할 수 있는 파트너다.
시나리오 C가 시나리오 A에 대해 갖는 우위는 두 가지다. 첫째, 발전 지향성이다. 한국은 중국과 달리 북한의 실질적 경제발전 자체를 협력의 목표로 삼을 정치적·전략적 유인을 가지며, 이는 데이터 흡수형 종속협력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둘째, 모델 적합성이다. 언어, 지형, 기후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현지 데이터 기반 소버린 AI 모델의 이전 및 구축에서 한국은 비교우위를 갖는다. 그러나 시나리오 C는 5.2절에서 분석한 제약들 — 정치적 단절(적대적 두 국가론), 제도 및 인적 자본 간극, 시장 메커니즘과 민간기업 참여의 부재, 정보통제 딜레마 — 을 모두 통과해야 비로소 현실화된다. 따라서 시나리오 C는 ‘비현실적’이라기보다 조건부적이다. 그 조건의 충족 여부는 본질적으로 북한의 제도적 선택과 한반도 정치 상황에 달려 있으며, 현재로서는 그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4. 시나리오 비교의 함의: ‘A의 관성 대 C의 잠재력’
세 시나리오를 비교하면 다음 구도가 드러난다. 현재의 정치 및 구조적 관성은 시나리오 A(대중 종속협력)와 B(저비용 자체 활용)의 결합을 향해 있다. 이는 군사 부문에서 북한이 ‘A와 B의 결합’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경제 부문이 군사 부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발전 잠재력의 관점에서 가장 우월한 경로가 시나리오 C(남북협력)라는 사실이다. 군사 부문에서 남북협력은 안보전략상 모순이자 위험이었지만, 경제 부문에서 남북협력은 —조건만 충족된다면— 북한 경제에 가장 큰 발전 편익을, 한반도에는 공동 공공재를 제공하는 최선의 경로다.
여기서 한국 정책의 핵심 과제가 도출된다. 그것은 시나리오 A의 관성이 더 깊은 종속과 격차로 고착되기 전에, 시나리오 C로의 전환을 가능케 할 제도적 및 정책적 조건을 사전에 설계 및 준비하는 일이다. 정치적 공간이 닫혀 있는 현 단계에서는 이를 즉시 실행할 수 없으나, 글로벌 사우스 AI 협력 프레임을 통해 적용 가능한 모델, 제도, 실행체계를 미리 갖추어 두는 ‘대기적 준비(stand-by readiness)’가 요구된다.
Ⅴ. 경제 부문 AI 협력의 장단점, 정책적 과제, 그리고 한계
1. 장점: AI가 여는 경제협력의 새로운 가능성
경제 부문에서 AI 기반 남북협력이 갖는 장점은 분명하다. 첫째, 생산성 병목에 대한 직접적 겨냥이다. 북한 경제의 핵심 문제가 자본 및 노동 부족이 아닌 총요소생산성의 만성적 정체라는 점에서, 생산성 증대를 본령으로 하는 AI는 다른 어떤 협력 수단보다 북한 경제의 근본 문제를 직접 겨냥할 수 있다. 둘째, 저인프라 적합 모델의 존재다. 글로벌 사우스 대상 소형·특화 AI 협력 모델은 대규모 컴퓨팅, 자본 없이도 현지 데이터 기반으로 구현 가능해, 자본재 수입이 봉쇄된 북한에도 응용 여지가 있다. 셋째, 인도주의 채널의 정당성이다. 보건, 농업, 재난 분야의 AI 협력은 국제규범적 정당성이 높고 군사 전용 위험이 낮아, 정치적 단절 국면에서도 비교적 추진 명분을 확보하기 쉽다. 넷째, 한국의 비교우위다. 언어, 지형, 기후의 유사성,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ODA 역량은 한국을 북한 경제 AI 협력의 최적 파트너로 만든다.
2. 단점과 위험: 격차 고착과 종속의 가능성
반대로 위험도 분명하다. 첫째, 자기강화적 발전격차다. AI의 생산성 효과가 노출도, 준비도가 높은 경제에서 더 크게 나타나는 한, AI 시대는 남북 간 발전격차를 줄이기보다 확대할 개연성이 높다. 협력이 부재하거나 얕은 수준에 머물면, AI는 격차를 고착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둘째, 대중(對中) 종속의 심화다. 남북협력이 가동되지 않는 한 북한은 시나리오 A로 표류하며, 데이터 주권 상실과 핵심 기술의 외부 의존이 경제 영역에서 고착될 수 있다. 셋째, 이중용도의 잔여 위험이다. 경제 부문 AI는 군사 부문보다 이중용도 위험이 낮으나 영(零)은 아니다. 데이터 분석, 영상처리, 자동화 역량은 사회 통제 및 감시로 전용될 수 있어, 협력 설계 시 거버넌스 및 감시 영역과의 분리가 필요하다. 넷째, 제도 미 충족 시 협력의 공전이다. 시장 메커니즘과 사유재산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민간기업 참여가 불가능해, 협력이 정부 주도 시범사업 수준을 넘어 확장되기 어렵다.
3. 정책적 과제: ‘대기적 준비’와 단계적 설계
이상의 장단점을 고려할 때 한국의 경제 부문 AI 대북협력 정책은 다음 과제를 중심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첫째, 글로벌 사우스 프레임의 사전 정비다. 북한을 잠재적 협력 대상으로 명시하지 않더라도, 제4차 국제개발협력 기본계획의 AI, 보건, 농업, 공공행정 협력 모델과 NIA·KOICA의 소버린 AI 사업 경험을 북한 적용 가능한 형태로 정리 및 표준화해 두어야 한다. 이는 정치적 공간이 열렸을 때 즉시 가동할 수 있는 정책 재고(policy stockpile)를 확보하는 일이다.
둘째, 단계적·구획적 협력 설계다. (1) 인도주의, 재난, 보건, 농업의 ‘얕은 협력’을 1단계 후보로 삼고, (2) 경제특구 및 특별법을 매개로 한 제한적 시장 메커니즘 도입을 2단계로 연계하며, (3) 민간기업과 대기업 참여를 통한 산업 AI 협력을 3단계로 두는 점진적 경로를 미리 구획한다. 각 단계는 군사 전용 위험과 사회 통제 전용 위험을 차단하는 거버넌스 장치를 내장해야 한다.
셋째, 인적자본 격차 대응의 사전 투자다. AI/DT 시대 인적자본 미스매치가 통합의 최대 장애임을 고려할 때, 북한이탈주민 대상 AI 및 디지털 역량 교육, 북한 지역에 적용 가능한 직업훈련과 재교육 모델 개발, 유동지식 및 범용지식 중심의 교육 콘텐츠 설계 등을 선제적으로 축적해 두어야 한다.
넷째, 미중 전략경쟁 구조의 관리다. 한국의 대북 AI 협력은 미중 AI 경쟁의 구조와 분리될 수 없다. 미국이 중국 배제를 전략 목적으로 하는 공급망 재편 논리가 국제 AI 협력 전반을 규율하는 가운데, 한국은 한미동맹 기반의 가치·안보 연대와 북한을 향한 개발협력적 접근 사이에서 정교한 균형을 설계해야 한다. 북한이 시나리오 A로 깊이 편입될수록 남북협력 경로(시나리오 C)의 진입 비용은 커지므로, 종속 고착 이전에 대안 경로의 문을 열어 두는 전략적 시기 관리가 중요하다.
4. 한계: 정치가 규정하는 경제협력의 천장
마지막으로 경제 부문 AI 협력의 근본적 한계를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첫째, 정치적 종속성이다. 군사 부문이 전략적 안정성에 의해 규정되었듯, 경제 부문 협력의 천장은 결국 한반도 정치 상황과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이 규정한다. 본 장이 제시한 기회 공간은 정치적 공간이 열린다는 전제하에서만 현실화된다. 둘째, 제도의 내생적 장벽이다. AI 협력이 깊어 지려면 정보 개방과 시장 메커니즘이 필요하나, 이는 북한 체제 생존 논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따라서, 경제 부문 협력에도 본질적 상한이 존재한다. 셋째, 격차의 시간 의존성이다. AI 역량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되는 경로의존성을 띠므로, 협력의 부재는 단순한 기회 상실이 아닌 미래 협력 비용의 증가를 의미한다.
요컨대 경제 부문에서 AI는 군사 부문보다 넓은 협력 가능성의 공간을 열지만, 그 공간은 북한의 제도적 선택, 미중 전략경쟁의 구조, 한반도 정치 상황이라는 세 겹의 제약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현실적 과제는 협력을 당장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 가능성을 보존하고 그 조건을 준비하는 것 — 즉, 시나리오 A의 종속적 관성이 격차와 의존을 고착하기 전에, 발전 지향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남북협력 경로(시나리오 C)로의 전환을 위한 제도적·정책적 토대를 선제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AI 시대 경제 부문에서 한국이 견지해야 할 전략적 좌표라고 할 수 있다.■
■ 저자: 오인환_EAI 수석연구원; 서울대학교 강사.
■ 담당 및 편집: 임재현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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