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성 EAI 원장(서울대 교수)과 오인환 EAI 수석연구원(서울대 강사)은 대북 AI 협력을 당장 실행할 사업이 아닌 인간안보와 장기적 통합역량을 보존하기 위한 '대기적 준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합니다. 저자들은 군사·사이버·감시 기술 대신 보건·재난 등 군사 전용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은 영역에서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넓혀 가되 국제기구 중심의 검증을 갖추는 '위험관리형 협력'을 제시합니다. 이를 토대로 데이터와 표준을 점진적으로 쌓아 가는 'AI 커먼스'가 남북 연결 가능성을 보존하는 장기적 통합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전망합니다.
AI 시대 경로 선택과 미래 한반도 구상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가 한반도 안보와 남북관계, 그리고 장기적으로 한반도 구상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AI 시대 경로 선택과 미래 한반도 구상」 워킹페이퍼 시리즈를 발간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대북정책은 비핵화와 남북교류협력, 평화체제 구축, 장기적 통합을 서로 연결된 과정으로 이해해 왔으나,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와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의 남북관계 재규정, 미중 전략경쟁의 구조화로 인하여 이러한 구상이 전제해 온 조건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AI를 둘러싼 국제질서의 변화와 북한의 기술발전 경로를 살펴보는 한편, 군사·경제·지식 거버넌스 영역에서의 파급효과를 검토함으로써 AI 시대에 걸맞은 미래 한반도 구상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북한은 고성능 반도체와 컴퓨팅 인프라의 제약으로 프런티어 AI를 자체적으로 발전시키는 대신 무인기와 사이버작전, 감시체계 등 특정 목적에 필요한 AI를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의 기술생태계에 대한 의존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선택은 남북 간 군사적 위기불안정성과 기술·지식격차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한국에도 새로운 대응 전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 또한 AI 기반 감시정찰과 정보분석, 위기관리 능력을 발전시키는 한편, 인간안보 분야를 중심으로 한 대북 협력의 가능성을 위험관리의 관점에서 모색하고 있습니다. 특히, AI의 민군 겸용성을 고려할 때 대북 협력이 북한의 군사능력이나 사회감시 능력의 강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억제와 방어를 지속하면서도 조건이 허용되는 영역에서 협력을 준비하는 이중적 접근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본 워킹페이퍼 시리즈는 AI를 둘러싼 국제질서의 변화로부터 출발하여 북한의 AI 발전경로와 군사·경제·지식 거버넌스 영역에서의 파급효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한국의 대북 AI 협력 방향과 미래 한반도 구상의 함의를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를 통해 AI 시대의 한반도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학술적·정책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의 전략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AI 시대 경로 선택과 미래 한반도 구상 발간 목록]
① AI시대 전략환경의 변화와 미래 한반도 구상, 전재성 [워킹페이퍼 읽기] ② AI를 둘러싼 일반적 동향, 백서인 [워킹페이퍼 읽기] ③ 북한의 AI 현황, 오인환 [워킹페이퍼 읽기] ④ 군사 부문: AI 시대 남북관계의 리스크와 기회, 김양규 [워킹페이퍼 읽기] ⑤ 경제 부문: AI 시대 남북관계의 리스크와 기회, 오인환 [워킹페이퍼 읽기] ⑥ 지식 및 거버넌스 부문: AI 시대 남북관계의 리스크와 기회, 최인호 [워킹페이퍼 읽기] ⑦ 한국의 대북 AI 협력 방향과 미래 한반도 구상에 대한 함의, 전재성·오인환 [워킹페이퍼 읽기] ⑧ 북한 AI의 세 경로와 미래 한반도 구상, 전재성·오인환 [워킹페이퍼 읽기] |
Ⅰ. 북한 AI의 구조적 제약과 한국의 전략적 선택
앞선 군사, 경제, 지식·거버넌스 부문의 분석을 종합하면 북한의 AI 발전은 기술수준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북한은 기초적인 알고리즘 연구와 공개모델의 활용, 소규모 미세조정, 사이버작전 보조, 제한적인 감시·선전용 응용프로그램 개발을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특정한 군사·경제적 목적에 AI를 선택적으로 적용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이 AI 발전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미이다. 다만 AI를 국가적 산업체계나 안정적인 군사체계로 확대하려면 고성능 연산자원과 전력, 서버와 저장장치, 네트워크와 클라우드, 센서와 로봇, 충분한 데이터와 전문인력, 국제적인 연구교류와 외화조달 능력이 함께 필요하다. 북한이 직면한 제재와 경제·인프라의 제약은 바로 이러한 AI 전반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적으로 작용한다.
제재가 북한의 AI 발전을 완전히 차단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픈소스 코드와 공개논문, 중국과 러시아를 통한 기술접근, 해외 IT 노동자와 사이버 네트워크는 북한이 기술과 연산자원에 우회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제공한다. 생성형 AI가 신원 확인이나 제재 회피에 활용될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AI는 제재의 대상인 동시에 제재를 우회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제재의 보다 현실적인 효과는 북한의 AI 개발 그 자체를 중단시키는 것보다 대규모 연산 인프라와 산업생태계, 고도화된 군사 AI 체계를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확대하는 속도를 늦추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북한이 어떤 방식으로 AI 발전의 제약에 대응하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앞 장의 분석에서 살펴본 경로를 종합하면, 현재 가장 현실적인 방향은 중국과 러시아의 기술생태계를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외부의존 경로와 공개모델·자체인력을 이용한 저비용 자력개발 경로가 함께 진행되는 형태이다. 이 경로는 북한이 당장의 기술적 한계를 어느 정도 보완하게 하지만, 장기간 지속될 경우 남북 간 기술과 지식의 격차를 확대하면서 북한의 특정 기술생태계에 대한 의존도 함께 높일 가능성이 있다. 군사 AI와 사이버 능력이 중·러 기술체계와 결합할 경우 한반도의 군사적 경쟁 역시 남북관계를 넘어 미중 및 강대국 기술경쟁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다.
한국과의 협력은 성격이 다르다. 군사 AI에서는 남북협력의 현실적 공간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전략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경쟁을 관리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다. 경제와 보건, 재난, 농업, 교육과 지식 등에서는 정치적 조건이 달라질 경우 제한적인 협력 가능성이 존재한다. 언어와 지형, 기후 및 개발조건의 유사성과 한국의 디지털 개발협력 경험을 고려하면, 북한의 발전과 인간안보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면서 특정한 외부 기술생태계에 대한 단일 의존을 줄이는 대안적 경로를 설계할 여지가 있다.
현재의 남북관계를 고려하면 한국과의 협력경로가 단기간에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한국의 전략도 북한에게 당장 협력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데서 출발하기 어렵다. 보다 현실적인 과제는 북한의 기술적 경로가 비가역적으로 고착되기 전에 미래의 협력을 가능하게 할 제도와 기술, 국제적 네트워크를 한국이 먼저 준비하는 것이다. 동시에 북한이 장기적으로 여러 발전경로의 비용과 편익을 비교할 수 있도록 협력경로의 실질적인 편익을 가시화할 필요가 있다. 전자를 협력의 공급 측 준비라고 한다면, 후자는 북한의 선택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수요 측 유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도 전략의 효과를 과장해서도 안 된다. 북한이 정치적 이유로 경제적·기술적 비용을 장기간 감수하거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의존을 자주성의 훼손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한국이 제시하는 대안의 효과는 제한될 수 있다. 다만 AI를 활용하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사이의 생산성·군사력·지식생산·거버넌스 격차가 자기강화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고려하면, 폐쇄와 고립의 장기 비용 역시 이전보다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러한 구조적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그 압력을 인식할 때 종속의 심화만이 유일한 대응이 되지 않도록 다른 경로를 준비하는 데 있다.
7장의 정책 논의는 이 문제에서 출발한다. 대북 AI 협력은 현재의 정치적 관계에서 당장 실행해야 할 사업 목록이라기보다, 한반도의 군사적 안정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북한 주민의 인간안보를 개선하고 장기적인 남북 통합역량을 보존할 수 있는 선택지를 준비하는 작업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Ⅱ. 대북 AI 협력의 기본 전제와 목표
1. 글로벌 사우스 협력 경험과 대기적 준비
대북 AI 협력을 처음부터 남북 특수관계나 통일정책의 틀로 제안하는 것은 현재의 정치적 조건에서 상당한 한계를 갖는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기존의 민족공동체 담론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통일을 전제로 한 기술협력은 북한이 이를 흡수나 체제변화의 수단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높인다. 남북 연락채널이 단절되어 있고 국제제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양자협력의 실제 집행도 쉽지 않다.
한국이 글로벌 사우스와 약소국을 대상으로 축적해 온 디지털 개발협력은 다른 출발점을 제공한다. 보건과 농업, 교육, 기후, 공공행정 분야에서 이루어져 온 국제개발협력에 AI가 결합하면서, 협력국의 인프라와 언어, 데이터 환경에 맞는 소형·특화 모델과 소버린 AI를 지원하는 경험도 축적되고 있다. NIA와 KOICA를 비롯한 한국의 개발협력 기관이 보유한 이러한 경험은 북한을 특별한 정치적 대상만으로 규정하지 않고 저인프라 환경에 적합한 기술협력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틀 안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글로벌 사우스 프레임이 갖는 의미는 정치적 표현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기술생태계에만 접근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한국과 다자기구를 통한 개발협력 모델은 데이터와 기술에 대한 단일한 종속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이 된다. 한국이 북한에게 특정한 정치적 선택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인간안보와 경제발전에 기여하면서 데이터 주권을 일정하게 보존할 수 있는 다른 기술경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장기적인 선택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 단계에서는 이러한 모델을 북한에 즉시 적용하기보다 북한에 적용할 수 있는 형태로 준비해 두는 것이 우선이다. 글로벌 사우스에서 활용되는 저자원 의료 AI와 농업·재난 모델, 한국어 기반의 소형언어모델, 교육과 직업훈련 프로그램, 데이터 및 기술표준을 북한의 조건에 맞게 검토하고, 제재와 이중용도성에 관한 법적·제도적 기준도 함께 마련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공간이 열릴 때 정책을 처음 설계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기술과 제도, 검증방식을 일정한 정책적 재고(policy stockpile)로 유지하는 대기적 준비(stand-by readiness)가 필요한 이유이다.
2. 협력적 기술주권과 다자 네트워크
한국의 대북 AI 전략은 한국 자신의 AI 전략과도 분리하기 어렵다. 완전한 기술자립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은 반도체와 제조업, 디지털 인프라와 AI 역량을 토대로 필요한 기술과 자원을 국제 네트워크에서 확보하는 동시에, 다른 국가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자율성을 유지해야 한다. 앞 장에서 논의한 전략적 불가결성과 협력적 기술주권(cooperative technology sovereignty)은 이러한 상호의존을 전제로 한 전략이다.
대북협력에서도 다자적 위상은 중요한 자산이 된다. 한국이 국제 AI 거버넌스와 개발협력에서 신뢰할 수 있는 기술·제도 설계자로 자리 잡을수록 북한을 대상으로 한 협력도 한국의 단독적인 정치 제안보다 국제적으로 검증 가능한 기능적 협력으로 제시하기 쉬워진다. WHO와 같은 국제기구, 기술표준 협의체, 국제학술 네트워크와 개발금융을 활용할 경우 남북 간 정치적 부담을 낮추면서 사업의 사용목적과 기술의 범위를 보다 명확하게 제한할 수도 있다.
다자협력이 남북 간 정치문제를 우회하는 만능의 방법은 아니다. 국제기구 역시 주요국의 전략경쟁과 제재정책의 영향을 받으며,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의 기술통제와 충돌하는 협력은 지속되기 어렵다. 한국은 한미동맹에 기반한 기술·안보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안보와 개발협력에 필요한 제한적 대북 AI 협력이 가능하도록 사전에 협력 범위와 데이터, 기술수준, 검증절차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 대북 AI 협력은 한미 기술협력과 별개의 영역이라기보다 그 안에서 허용 가능한 협력의 범위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문제가 된다.
3. 위험관리형 협력의 원칙
대북 AI 협력에는 기술의 이중용도성 때문에 일반적인 개발협력보다 높은 수준의 위험관리가 필요하다. 영상과 데이터 분석, 센서와 드론, 언어모델처럼 민간 분야에서 유용한 기술도 군사작전이나 사이버 공격, 주민감시와 선전에 이용될 수 있다. 협력의 효과를 평가할 때 북한에 얼마나 많은 기술을 전달했는가보다 어떤 목적으로 누가 사용하고, 군사·감시 용도로 전환될 위험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초기 협력은 군사적 전용 위험이 낮으면서 주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영역에 집중하는 것이 적절하다. 감염병과 재난, 식량, 보건, 산림, 수자원, 기후 대응을 비롯하여 이산가족 정보, 언어와 교육, 문화유산 등은 상대적으로 인간안보와의 연계가 분명하다. 농업과 에너지, 물류, 환경관리와 교육은 상당한 협력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데이터와 센서, 인프라가 군사·통치 목적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보다 엄격한 조건이 필요하다. 군사 AI와 사이버 작전, 사회감시와 주민분류, 자동화된 선전처럼 북한의 군사력이나 강압적 통치역량을 직접 강화할 수 있는 분야는 협력대상에서 배제해야 한다.
이 구별은 고정된 목록으로 이해하기보다 정치적 상황과 기술변화에 따라 조정되는 관리체계로 보아야 한다. 동일한 기술이라도 데이터의 종류와 적용 대상, 사용주체와 검증 가능성에 따라 위험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협력이 축적되고 독립적인 검증이 가능해질 경우 일부 조건부 영역의 협력범위가 확대될 수 있으며,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거나 전용사례가 발견되면 반대 방향의 조정도 필요하다. 협력의 확대 자체보다 협력과 통제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거버넌스가 더 중요하다.
4. 위험관리에서 평화구조까지
대북 AI 정책이 추구해야 할 목표도 하나로 압축하기 어렵다. 가장 기초적인 과제는 AI가 군사와 사이버, 감시체계에 결합하면서 한반도의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위험을 관리하는 것이다. 이 목표는 북한과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한국이 독자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AI와 핵전력이 결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오판과 선제사용 압력, 자동화된 군사작전의 확전 위험을 줄이는 것이 평화정책의 가장 낮은 층위를 이룬다.
정치적 조건이 허용되는 경우에는 보건과 식량, 재난 대응을 통해 북한 주민의 인간안보를 개선하는 협력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언어자원, 기술표준과 전문인력 네트워크가 남북 간 공유 가능한 자원으로 발전한다면 협력의 의미는 단기적인 인도주의 효과를 넘어선다. 서로 다른 체제가 사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일정한 공동자원이 형성되면서 장래의 제도적·사회적 통합에 필요한 비용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경험이 남북관계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협력이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자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며, 기능협력의 축적이 정치적 화해로 필연적으로 이어진다고 전제해서도 안 된다. 다만 완전한 단절 상태와 달리 공동문제를 처리하는 제도와 경험이 존재하면 남북관계가 변화할 때 활용할 수 있는 관계적 자원이 남는다. 위험관리, 인간안보, 통합역량의 축적, 평화구조의 변화는 이러한 의미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한 속도로 진전되는 목표는 아니다.
Ⅲ. 대북 AI 협력의 전략과 실행체계
1. 한반도에서의 ‘AI for Peace’
국제사회에서 AI for Peace는 분쟁 조기경보와 인도주의 대응, 휴전 또는 평화협정의 모니터링, 허위정보 분석 등에 AI를 활용하는 논의를 포괄한다. 한반도에서는 이 개념을 협력사업에만 한정하기 어렵다. 군사적 AI 경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으며 북한 핵문제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전략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부터 평화에 대한 AI의 기여로 포함할 필요가 있다.
군사 분야에서 한국이 AI 역량을 강화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 방향은 상대의 핵전력을 조기에 제거할 수 있다는 기대를 높이는 데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AI 기반의 감시정찰과 정밀타격이 북한의 핵전력 생존성에 대한 불안을 지나치게 높이면 북한은 위기 초기에 핵을 먼저 사용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의 군사 AI는 신뢰할 수 있는 보복능력과 지휘통제의 회복탄력성, 안정적인 조기경보와 위기관리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상대의 선제사용 유인을 낮추는 방향에도 충분히 투자되어야 한다. 군사 AI에서 협력이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더라도 경쟁의 양상을 전략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협력이 가능한 비군사 분야에서는 이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초기 AI 협력은 규모가 크거나 정치적 상징성이 높은 사업보다 목적이 분명하고 효과를 확인할 수 있으며, 중단이나 후퇴가 가능한 분야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산림병충해와 홍수·가뭄 예측, 감염병 위험분석, 식량작황 평가, 결핵과 말라리아 대응, 이산가족 데이터 정리, 언어자료 구축과 문화유산 보존은 기술적 범위를 비교적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업의 일차적인 목적은 남북관계 개선을 상징적으로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위험을 줄이고 협력이 안전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데 있다.
2. 협력영역의 구획과 단계적 진입
위험관리형 협력은 기술의 종류보다 사용환경과 전용 가능성에 따라 협력영역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군사 AI와 사이버 공격, 사회감시와 주민분류에 직접 연결되는 기술은 금지영역으로 설정한다. 농업과 물류, 에너지와 환경관리, 교육은 인간안보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서도 이중용도성이 있으므로 조건부 협력영역으로 다룬다. 보건과 재난, 감염병, 식량, 이산가족, 언어와 문화유산은 군사적 전용위험이 상대적으로 낮고 국제적인 정당성도 확보하기 쉬운 만큼 초기 진입영역으로 삼을 수 있다.
정책의 실제 집행은 남북관계의 정치적 조건에 맞추어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현재처럼 협력의 정치적 공간이 사실상 닫혀 있는 시기에는 한국 내부의 준비가 우선된다. 글로벌 사우스에서 활용되는 소버린 AI와 저자원 환경용 모델을 북한의 조건에 맞게 검토하고, 보건·언어·교육 분야의 공공적 AI 자원을 축적하며,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장래 북한 지역에 적용할 수 있는 디지털 교육과 직업훈련 모델을 시험할 수 있다. 군사 분야에서는 AI-핵 위험관리와 조기경보, 지휘통제 안정성에 관한 기술적·제도적 연구를 진행하면서 협력 가능 영역의 기준과 검증 프로토콜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정치적 공간이 부분적으로 열리면 남북 양자협력보다 국제기구를 매개로 위험이 낮은 분야부터 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건 분야의 데이터 표준화나 감염병·의료 AI, 농업과 재난 대응, 기술표준 협의 등은 국제기구와 다자 펀딩을 이용할 경우 사업목적과 기술의 범위를 보다 명확히 관리할 수 있다. 초기 사업에서는 사업 규모 자체보다 북한이 중·러 이외의 기술과 지식자원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경험을 제공하고, 동시에 국제협력에서 요구되는 표준과 검증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협력 경험이 축적되고 정치적 관계가 안정될 경우에는 일부 조건부 분야까지 협력을 확대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보건과 교육, 농업과 환경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모델, 기술표준과 전문가 네트워크를 개별 사업에 한정하지 않고 공유 가능한 자원으로 관리하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제한적인 시장 메커니즘과 민간기업의 참여가 가능해지면 산업 AI까지 협력범위가 확대될 수 있지만, 그 속도는 미리 정해진 시간표가 아니라 정치적 조건과 검증 결과에 따라 조정해야 한다.
3. 다층적 거버넌스와 검증
대북 AI 협력은 중앙정부 간 합의 하나만으로 관리하기 어렵다. 국제기구를 통한 정치적·규범적 관리, 분야별 전문가와 기관이 담당하는 기능적 관리, 데이터와 기술표준을 다루는 전문적 협의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결합되어야 한다. 앞 장에서 논의한 커먼스 거버넌스도 이러한 다층적 구조를 전제로 한다.
검증은 협력을 제한하는 장치인 동시에 협력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이다. 어떤 데이터를 사용할 것인지, 모델을 어떤 목적으로 운용할 것인지, 누가 접근할 수 있는지를 협력 이전에 명확히 하고, 가능한 경우 국제기구나 독립적인 전문기관이 사용과정을 검증해야 한다. 군사 및 사회감시로의 전용 여부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위반이 발견될 경우 협력범위를 축소하거나 중단하는 절차도 필요하다. 상대를 신뢰하기 때문에 검증을 줄이는 방식보다 검증 가능한 영역에서 협력함으로써 제한적인 신뢰와 예측가능성을 형성하는 방식이 현재의 남북관계에는 더 적절하다.
한국 내부에서도 이러한 협력을 장기간 준비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디지털 ODA 경험을 가진 NIA와 KOICA, 한국어 AI 및 과학기술 자원을 보유한 연구기관, 보건과 재난 분야의 전문기관, 통일·외교·안보 관련 부처가 함께 참여하는 범정부적 협의체를 생각할 수 있다. 현재 단계에서 이 조직의 중심 기능은 사업을 서둘러 추진하는 데 있지 않다. 협력 가능한 자원을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기술발전에 따라 위험구획과 검증기준을 갱신하며, 정치적 공간이 열렸을 때 실행 가능한 정책을 유지하는 대기 관리(stand-by management)에 우선순위를 둘 필요가 있다.
Ⅳ. AI를 통한 남북 통합과 통일의 장기 비전
1. 통일의 장기적 통합과정
AI 시대에는 통일에 대한 준비도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기존의 시각보다 넓어질 필요가 있다. 정치적 합의와 법적·제도적 통합은 통일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실제 통합은 행정과 법, 재정, 보건, 교육, 산업과 인프라, 복지와 토지, 주민등록과 지역개발, 사회심리적 관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남북 사이의 기술과 지식, 제도적 격차가 커질수록 정치적 합의 이후에 해결해야 할 통합문제도 복잡해질 가능성이 크다.
AI는 이러한 장기적 통합을 두 가지 방식으로 준비할 수 있다. 하나는 미래의 통합과제를 사전에 분석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이용 가능한 자료가 충분히 축적된다면 북한 지역의 인프라와 보건, 교육과 산업, 에너지와 도시의 격차를 분석하고 다양한 통합경로의 비용과 효과를 비교할 수 있다. AI가 미래 통합의 최종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복잡한 정책 선택의 결과를 사전에 검토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통합에 필요한 자원 자체를 미리 축적하는 것이다. 남북 언어와 학술 자료, 의료·교육 데이터의 표준, 이산가족 정보, 환경과 문화유산 자료처럼 장기간 보존해야 할 자원을 공통의 기술표준에 따라 정리해 두면 정치적 상황이 변할 때 다시 연결하기가 쉬워진다. 이러한 자원은 당장의 통일 여부와 무관하게 남북 사이의 연결 가능성을 보존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2. AI 커먼스와 점진적 연결
AI 커먼스는 남북이 처음부터 하나의 거대한 공동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정치적·안보적 조건에서는 현실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보다 현실적인 의미의 커먼스는 서로 다른 행위자가 일정한 규칙 아래 공동으로 이용하거나 상호운용할 수 있는 데이터와 표준, 지식과 제도적 자원을 점진적으로 축적하는 것이다.
보건협력에서 국제적인 진단·통계 기준을 일부 공유하고, 교육이나 학술분야에서 언어와 연구자료의 상호운용성을 높이며, 재난과 기후 분야에서 공통의 위험분류와 정보기준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모두 작은 규모의 커먼스를 형성할 수 있다. 각각의 협력은 제한적인 기능적 목적을 가지지만, 장기간 축적될 경우 남북 사이에 완전히 사라져 가는 공동의 문제해결 자원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북한의 정치체제를 자동적으로 변화시킨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국제표준의 부분적 수용이나 외부 지식망과의 제한적인 접촉이 북한의 자력갱생 담론과 정보통제에 미세한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은 있지만, 단기간에 체제변화를 가져온다고 볼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협력을 체제변화를 위한 우회수단으로 명시적으로 이용할 경우 북한이 이를 안보위협으로 인식하고 협력 자체를 중단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커먼스의 일차적인 의미는 북한의 체제변화를 유도하는 데 있기보다 남북의 완전한 단절을 완화하고 장래에 활용할 수 있는 공통의 제도적·지식적 자원을 남기는 데 두는 것이 적절하다.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축적 자체가 북한의 선택환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AI 시대의 고립 비용이 커지고 중국이나 러시아에 대한 기술의존이 심화될수록 북한으로서는 외부 연결의 다변화와 기술적 자율성이 갖는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 한국과 국제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협력경로가 실제 발전과 인간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경험이 존재할 경우, 북한이 협력을 선택할 때 치러야 할 정치적 비용과 협력을 거부하면서 부담해야 할 경제·기술적 비용의 관계도 변화할 수 있다. 이러한 효과는 점진적이며 북한의 선택을 보장하지 않지만, 대안경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와는 다른 전략적 환경을 형성한다.
3. 군사·경제·지식 부문의 상이한 역할
AI가 한반도 평화와 통합에 기여하는 방식은 부문별로 동일하지 않다. 군사 분야에서 당장의 목표는 협력보다 전략적 안정성이다. 남북 모두 AI를 군사력 증강에 활용하는 상황에서 가장 빠른 탐지와 선제타격 능력을 경쟁적으로 추구할 경우 위기 시 결정시간이 짧아지고 핵사용 압력이 높아질 수 있다. 한국은 필요한 억제력을 발전시키면서도 보복 확실성과 지휘통제의 안정성, 조기경보와 위기관리 능력을 강화하여 북한의 선제사용 유인을 줄이는 관리된 군사경쟁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AI와 핵지휘통제, 자율무기와 위기안정성에 관한 위험관리와 군비통제의 문제가 남북관계뿐 아니라 미중 전략관계에서도 중요한 의제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경제 분야에서는 제한적인 협력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북한의 경제가 안고 있는 생산성과 자원배분, 농업과 에너지, 물류와 보건의 문제에 AI를 적절히 활용할 경우 비교적 적은 자원으로 일정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한국은 언어와 지형, 개발조건의 유사성 및 디지털 개발협력 경험에서 일정한 장점을 가지지만, 그러한 잠재력은 북한의 제도적 선택과 제재, 미중 기술경쟁, 한반도의 정치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현재의 과제는 곧바로 경제 AI 협력을 확대하는 데 있기보다 정치적 조건이 바뀔 경우 인간안보와 경제발전에 연결할 수 있는 기술과 제도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지식·거버넌스 영역은 장기적인 통합에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하다. 언어와 교육, 의료와 학술자료 등 공유 가능한 지식자원의 축적은 장래의 사회적·제도적 통합비용을 줄일 수 있지만, 동일한 AI가 주민감시와 사상통제, 정보조작에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는 협력을 확대하는 것 자체보다 어떤 데이터와 모델이 누구에게 어떤 권한을 부여하는가를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인간의 권리와 데이터 주권을 훼손하는 협력이 장기적인 통합에 기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4. 비관적 현실과 전략적 준비
AI 시대의 신통일구상은 기술발전이 통일을 자동적으로 촉진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현재의 추세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AI는 북한의 군사력과 감시통치를 강화하고, 남북의 기술·지식격차를 확대하며, 북한의 특정 외부 기술생태계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오랫동안 누적된다면 정치적 관계가 개선되더라도 남북을 실제로 다시 연결하는 비용은 이전보다 커질 가능성이 있다.
현재 남북의 교류와 대화가 거의 중단되고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국제질서의 전략경쟁도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장의 AI 협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현재의 정책을 억제와 기술통제에만 한정할 필요도 없다. 억제와 방어를 충분히 유지하면서 AI와 핵의 결합이 초래할 새로운 위기위험을 관리하고, 북한 주민의 인간안보와 관련된 협력의 기준과 기술을 준비하며, 남북 사이의 장기적인 지식·제도적 연결 가능성을 보존하는 작업은 정치적 관계가 개선되기 이전에도 상당 부분 진행할 수 있다.
신통일구상의 의미도 이러한 장기적 준비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어느 시점에 북한의 선택을 직접 결정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보다, 향후 여러 정치적 경로가 나타날 때 평화와 협력에 유리한 선택이 가능하도록 조건을 준비하는 것이다. 북한의 종속과 폐쇄가 심화되는 경우에는 그 위험을 관리할 역량이 필요하고, 제한적인 개방이 시작될 경우에는 위험이 낮은 분야에서 협력을 즉시 가동할 준비가 필요하며, 장기적으로 관계가 안정될 경우에는 축적된 데이터와 표준, 지식과 제도를 남북의 공동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통일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세대의 과제는 통일의 시기와 형태를 미리 확정하는 데 있지 않다. 남북이 서로 다른 국가와 체제로 존재하는 기간에도 군사적 파국을 방지하고 주민의 인간안보를 개선하며, 미래에 다시 연결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 제도적 자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AI는 이러한 작업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고 새로운 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다. 어떤 가능성이 현실화될지는 기술 자체보다 이를 어떠한 전략과 규범, 제도 속에서 사용하고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다.■
■ 오인환_EAI 수석연구원; 서울대학교 강사.
■ 전재성_EAI 원장;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 담당 및 편집: 임재현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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