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성 EAI 원장(서울대 교수)은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화와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 속에서 지난 30년간의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고, 한반도 평화공존의 장기전략을 제시합니다. 전 원장은 남북한의 주권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구상을 제시하며, 평화공존을 대화와 교류협력을 넘어 군사적 억제, 위기관리, 공동번영, 국제협력의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울러 미국 중간선거 이후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을 활용하되, 미국 행정부 및 의회와 협력해 합의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핵위험 감소에서 평화체제 구축으로 이어지는 장기적 로드맵을 마련할 것을 제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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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평화공존 정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26년 8월 15일 이재명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포용적·안정적·책임 있는 평화공존이라는 세 가지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서로의 정치체제와 차이를 인정하고, 군사적 긴장과 갈등을 관리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동북아와 국제사회의 안정으로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이어 9월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는 북미대화의 재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한 핵·미사일 능력의 고도화 중단과 축소를 거쳐 핵 없는 한반도로 나아가는 방향을 국제사회에 제시하였다.[1]
평화공존이라는 개념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냉전기 미소 관계에서도 사용되었고, 한국의 역대 정부도 여러 형태로 남북 간 평화공존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오늘의 평화공존은 과거와 다른 국제정치적 조건에서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핵능력은 고도화되었고 남북관계의 성격에 관한 양측의 인식이 달라졌으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도 장기간에 걸친 재편 과정에 들어섰다. 앞으로 20~30년 동안 이러한 조건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 것인지 전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평화공존을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제시한 것은 의미 있는 정책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제안한 한반도 평화공존 구상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동안 한국의 대북정책은 비핵화와 평화체제, 교류협력과 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모색해 왔다. 대화와 협력을 중시한 정부도 있었고,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는 억제와 압박을 상대적으로 강조한 정부도 있었다. 각각의 정책은 일정한 성과와 경험을 축적했지만, 문제는 목표 달성에 필요한 국제정치적 조건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공존은 기존 정책의 경험을 활용하면서 장기적인 남북관계의 방향을 재구성하려는 접근이다. 북핵문제가 해결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에야 평화가 성립한다고 본다면, 그때까지의 남북관계는 언제까지나 불완전한 상태로 남게 된다. 그러나 전쟁의 위험을 줄이고,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며, 상호 적대성을 관리하고 공동의 이익을 확대하는 노력 역시 평화의 실질적인 진전이다. 대화와 협력은 평화공존을 실현하는 중요한 정책수단이지만, 그 자체가 전략적 방향이 될 수는 없다. 북한이 당장 대화에 응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군사적 안정성을 높이고,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핵위험을 관리하며, 장기적인 공동번영의 조건을 준비할 수 있다. 남북대화가 재개된다면 이러한 정책의 범위와 효과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공존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남북한이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주권적 권한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 안정적인 군사적 억제와 위기관리를 통해 전쟁을 방지하고, 정치적 상호인정과 공동의 이익을 확대하며, 주변국 및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지속가능한 평화체제를 형성해 나가는 장기적 국가전략이다. 이러한 과정은 핵 없는 한반도를 지향하면서 미래 세대가 평화적 통합과 통일의 가능성을 계속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공존을 추진하려면 대북정책을 평가하는 시간적 범위도 달라져야 한다. 한 정부의 임기 안에서 남북회담이 얼마나 개최되었고 교류협력 사업이 얼마나 진전되었는지는 중요한 평가기준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반도의 군사적 안정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남북한의 상호인식과 관계를 운영하는 규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미래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조건이 어느 정도 축적되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평화공존 정책의 의의와 성과는 이러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Ⅱ. 지난 30년의 대북정책을 가능하게 했던 국제질서의 변화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은 한반도 핵문제가 국제정치의 중요한 현안으로 등장한 계기였다. 이후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와 2000년대의 6자회담, 9·19 공동성명, 여러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관련국들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하였다. 정책수단과 협상의 방식은 달랐지만 비핵화는 한국의 보수와 진보 정부,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정부가 공유한 중요한 목표였다.
지난 30여 년의 정책을 완전한 실패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남북관계의 제도적 경험이 축적되었고, 핵활동 동결과 검증, 군사적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에서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다만 완전한 비핵화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능력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하였고, 이제는 핵무력을 국가안보와 체제유지의 핵심 수단으로 제도화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그동안의 비핵화 정책이 탈냉전 이후 미국이 국제질서에서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던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 국제금융체제와 동맹 네트워크, 국제기구에 대한 영향력은 대북 제재와 보상, 외교적 압박과 관계정상화를 조직하는 핵심 자원이었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미국 중심 국제질서와 상당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북한의 비핵화를 국제적 공동목표로 인정하였다.
북한의 경제적 취약성과 국제적 고립 역시 대북정책의 중요한 전제였다. 북한이 경제발전과 체제안정을 위해 외부 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필요로 하는 한, 경제적 보상과 국제사회 편입의 가능성은 협상을 촉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북한의 전략적 선택 자체가 이러한 가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외부 환경이 한국과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정책 자원의 범위를 규정한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국제적 조건이 근본적이고 광범위하게 변화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군사·경제적 능력과 동맹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단극적 우위를 모든 영역에서 행사하기는 어려워졌다. 중국은 경제와 기술, 군사력에서 미국과 경쟁하는 국가로 성장하였고, 러시아는 특히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전후로 미국 및 유럽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하였다. 여러 중견국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도 강대국 간 경쟁 속에서 독자적인 외교적 선택을 추구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이러한 변화는 더욱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럽과 중동의 전쟁은 국제질서에서 군사력의 역할을 다시 부각시켰고,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와 금융, 공급망의 변화는 각국의 국내정치와 경제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공지능과 무인체계, 감시정찰과 정밀타격, 사이버와 우주기술의 발전은 군사적 억제와 위기관리에 새로운 조건을 부과하고 있다.
세계화 양상도 변화하고 있다. 국가들은 경제적 효율성뿐 아니라 기술적 우위, 공급망 안정, 산업기반, 안보를 함께 고려한다. 그렇다고 국제적 상호의존이 약화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금융, 인공지능, 보건, 기후변화, 사이버공간, 에너지 영역의 연결은 지속되고 있으며 여러 영역에서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현재의 국제질서는 세력배분뿐 아니라 경제와 기술, 국제제도와 규범, 국가 간 관계의 방식이 함께 변화하는 거시복합이행의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북아에서도 이와 유사한 변화가 나타난다.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이 강화되는 한편,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협력도 발전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반도의 안정, 미국의 지역전략, 러시아와의 협력이라는 서로 다른 목표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두 개의 완결된 진영이 대립하는 새로운 냉전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중국과 러시아, 중국과 북한 사이에는 이해관계의 차이가 존재하고 미국의 동맹국들 역시 모든 전략적 사안에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지난 30년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면 어느 정도의 변화가 요구되는가. 우선 북한의 핵능력과 대외관계가 달라졌고, 한국과 미국이 사용할 수 있는 정책적 자원도 변화하였다. 따라서 북한 비핵화를 장기적 목표로 유지하되, 현재의 핵위험과 군사적 대립을 관리하고, 남북관계와 국제협력의 여러 영역에서 가능한 변화를 축적해 나가는 접근이 요구된다.
평화공존 정책은 이러한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미국 중심 단극질서의 자원을 활용하던 과거의 대북정책을 변화한 국제질서에 맞추어 재조정하고, 한반도의 평화가 동북아 지역질서의 안정에 기여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향후 20~30년의 국제질서가 어떠한 형태로 전개될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만큼, 특정한 국제적 조건이 다시 형성되리라는 기대에 의존하기보다 여러 가능한 질서 속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평화공존 전략을 발전시켜야 한다.
III. 두 국가론과 주권 문제에 대한 재고찰
평화공존 정책이 제기하는 이론적 문제 중 하나는 남북한을 어떠한 정치적 관계로 이해할 것인가이다. 북한은 2023년 말부터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재규정하면서 통일과 민족공동체에 대한 기존 입장을 변경하였다. 한국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북한의 두 국가론을 어떻게 평가하고, 한국의 통일정책과 남북관계의 법적·정치적 성격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에 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남북한은 하나의 국가인가, 두 개의 국가인가. 이 질문에는 역사적·법적·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이 얽혀 있다. 남북한은 각각 독자적인 정부, 영토, 주민,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며 1991년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국제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국가로 활동해 왔지만, 남북관계에서는 서로를 일반적인 외국으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역사적 인식과 통일의 지향, 서로 다른 정치체제의 존재와 군사적 대립이 오랫동안 함께 유지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하나의 법적 범주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근대 국제정치에서 주권국가는 일정한 영토, 주민, 정부를 가지고 대내적으로 최고 권위를, 대외적으로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정치 단위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 국가의 주권적 권한은 여러 차원에서 서로 다르게 행사된다. 국제법적 국가성, 정치적 승인, 영토에 대한 통치권한, 외교적 자율성, 군사적 지휘권, 경제적 정책결정권은 개념적으로 구별되며, 각기 다른 수준에서 행사된다.
현대 국제정치에서도 이러한 복합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주권국가로 존재하면서도 여러 정책권한을 공동의 제도 속에서 행사한다. 군사동맹에 참여하는 국가들은 독립적인 주권을 유지하지만 군사적 지휘, 작전계획, 정보, 기술의 상당 부분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한다. 국제금융체제와 무역제도 역시 국가의 정책적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관계에서 주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사방식과 국가 간 상호인정의 수준은 다양하게 재구성되는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이러한 복합성은 더욱 특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남북한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는 규정을 유지하였다. 상대의 국가적 실체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법적·정치적으로 완전한 외국 관계로 규정하지 않는 이중적인 관계였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이러한 관계를 일방적으로 변경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두 개의 정치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두 정치체가 영구적으로 적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이 북한의 현재 통치체제와 정치적 권한을 인정한다고 해서 북한이 내세우는 영구적인 적대관계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통일의 가능성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현재의 국가적·제도적 현실을 부정한다면 남북 간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관계에서 주권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국가로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상대를 정당한 협상상대로 인정하는 것, 상호 권한과 책임을 제도적으로 조정하는 것, 장래에 보다 긴밀한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서로 다른 수준의 문제이다. 이러한 차원을 구별할 때 비로소 하나의 국가인가 두 개의 국가인가 하는 형식논리적 논쟁에서 벗어나 보다 실질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주권국가간의 관계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는 관계주의(relationalism) 국제정치이론도 이러한 접근에 유용한 시각을 제공한다. 국가는 독자적인 능력과 제도를 가진 행위자이지만 다른 국가와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과 이해관계, 정책적 선택의 범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상대를 지속적인 군사위협으로 규정하면 자신의 군사태세와 외교적 선택도 그러한 인식에 맞추어 형성되고, 상대 역시 군사력 확대나 적대 정책으로 대응하게 된다. 반대로 억제를 유지하면서도 상대의 정치적 존재를 인정하고 위기관리와 협력의 규칙을 축적하면, 체제와 군사력이 단기간에 달라지지 않더라도 관계의 성격은 점진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분단 이후 남북한의 군사조직과 동맹정책, 통일정책과 상호인식이 서로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온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현대의 적대관계 역시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반복되어 왔으며, 그 방향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평화공존은 현재의 두 정치체와 주권적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미래의 관계를 미리 확정하지 않는 접근이 될 수 있다. EAI가 제시한 ‘통일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 개념은 이러한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정책적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남북한의 국가적 현실을 인정하되 적대관계를 영구적인 상태로 제도화하지 않고, 상호존중과 협력, 그리고 주민들의 선택에 따라 장기적인 통합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구상이다.
물론 이 접근에는 헌법, 남북관계발전법, 기존 남북합의, 국제법 간의 관계를 세밀하게 검토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상호인정의 수준을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 주권적 권한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통일지향성과 현재의 국가적 현실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는 평화공존이 장기 전략으로 자리 잡기 위해 풀어야 할 이론적 과제이다.
IV. 8월 이후의 변화와 평화공존 정책의 현실적 과제
8월 15일 평화공존의 세 가지 청사진이 제시된 이후 한반도 안팎에서는 여러 사건이 이어졌다. 북한의 접경지역 요새화와 지뢰 문제, 사이버 활동과 불법적 외화 획득,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과 미국 국내정치의 변화 등은 평화공존 정책이 고려해야 할 새로운 조건을 보여준다.
북한의 접경지역 요새화는 남북한의 물리적 분리를 강화하고 교류협력의 가능성을 제약한다. 그렇지만 군사적 경계가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군사적 불안정의 증가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방어적 요새화는 상대방의 기습공격 가능성을 낮추고 군사적 경계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효과가 나타날지는 북한의 군사적 배치와 작전개념, 한국의 대응태세를 함께 분석해야 판단할 수 있다.
지뢰 매설과 군사분계선 인근의 충돌 가능성은 별도의 관리가 필요한 문제이다. 물리적 분리와 군사적 대립이 장기간 지속될수록 경계를 관리하는 규칙과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는 절차는 더욱 중요해진다. 군사적 접촉을 줄이는 조치가 안정적인 상호억제로 이어지도록 하면서도, 접경지역 주민과 군인의 안전을 보호하고 위기 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북한의 사이버 활동과 불법적인 외화 획득 문제도 평화공존의 경제적 차원과 맞닿아 있다. 해외 IT 노동자 활동, 가상자산 탈취 등 국제규범을 위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국제적 감시, 제재, 수사협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북한이 장기적으로 합법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경제발전의 기회를 확보할 수 있도록 어떠한 조건을 마련해야 하는지도 중요한 과제이다. 국제규범의 집행과 미래의 경제협력은 별개의 정책이 아니다. 북한의 경제적 행태를 변화시키기 위한 장기적 접근 속에서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최근 Global NK에서 발간된 박원곤, 박형중, 조은정의 논평도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2][3][4]북한의 적대적 관계 규정, 핵 강압능력, 해외 IT 활동에 관한 이들의 분석, 특히 북한의 전략적 목표와 협상 조건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평화공존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경계하도록 한다. 이러한 논의는 북한의 전략을 정확히 파악하고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며 국제적 협력체계를 강화하는 작업이 장기적인 평화공존 정책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된다.
최근의 사건들은 평화공존 정책의 영역이 대화와 교류협력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군사적 억제, 위기관리, 국제규범의 집행, 경제적 유인, 주변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대한 분석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각 영역은 서로 다른 속도로 진전될 것이다. 따라서 개별 사건을 곧바로 정책의 성패로 판단하기보다,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는지, 서로의 의도를 판단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가 확보되고 있는지, 국제협력을 통해 북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이 발전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남북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기에도 한국이 추진할 수 있는 정책적 과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축적될수록 향후 대화가 재개되었을 때 활용 가능한 협력의 기반도 그만큼 확대될 수 있다.
Ⅴ. 미국 중간선거 이후, 북미정상회담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11월 3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과 하원의 다수당 지위를 모두 확보하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새로운 국내정치 환경에 직면하였다. 공화당은 여러 전통적 지지지역에서도 패배하였으며, 이란전쟁의 장기화, 생활비 부담, 행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 등이 주요 요인으로 평가된다. 밴스 부통령은 전쟁이 선거 결과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였고,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란전쟁에 따른 유가 상승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기존의 이란정책을 즉각 변경할 뜻은 보이지 않았다.
선거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대외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국 대통령제에서 중간선거는 행정부를 교체하지 않으며, 대통령의 정상외교와 군 통수권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 정상과의 협상이나 외교적 의제 설정에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적 조건은 중간선거의 패배가 오히려 대통령의 정상외교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국내 입법 성과를 달성하기 어려워진 대통령이 외교 영역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추구하려는 유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임기 동안 김정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이러한 정상외교는 트럼프식 외교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싱가포르와 하노이 정상회담의 경험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최고지도자 간의 정치적 결단이 기존의 외교적 교착을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과, 정상 간의 합의가 실질적인 비핵화와 관계정상화로 이어지려면 구체적인 협상, 검증, 이행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정상회담의 개최와 합의 도출 및 합의 이행의 지속가능성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중간선거 이후 북미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새로운 외교적 성과를 모색할 수 있는 선택지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이란전쟁의 장기화가 국내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나 핵·미사일 활동의 제한을 위한 협상은 상대적으로 다른 외교적 경로를 제공할 수 있다. 대통령의 재량이 비교적 큰 정상외교를 통해 정치적 성과를 추구하려는 유인이 강화될 수 있다.
한편 북한의 선택은 별개의 문제이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와 체제안전을 중시하고 있으며, 핵무기를 유지한 상태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할 수 있다. 김여정 총무부장은 최근 미국의 바이낸스 해킹사건에 대한 논박을 하면서도 “평화수호를 위한 선택지에는 분명 대화가 포함”된다는 여지를 남겼다.[5]동시에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와의 군사협력 역시 북한의 협상 조건과 대외적 선택공간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 대통령의 정상외교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커진다고 해서 북한이 곧바로 협상에 응하거나 실질적인 핵능력 제한에 합의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한국은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 평화공존 정책은 북미대화를 한반도의 장기적인 군사적 안정과 평화체제 구축으로 연결할 수 있는 정책적 방향을 제공한다.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북한 핵·미사일 능력의 고도화를 우선 중단시키고, 중기적인 축소를 거쳐 장기적으로 핵 없는 한반도로 나아가는 접근이 제시된 바 있다.
이러한 단계적 접근은 북미협상에서 현실적인 의제를 구성하는 데 유용하다. 북한의 핵능력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이상, 궁극적인 비핵화 목표를 유지하되 현재의 핵위험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가 협상의 핵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핵활동의 고도화 중단, 검증 가능한 제한, 핵물질과 핵무기 관련 능력의 축소, 군사적 신뢰구축을 서로 연결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의 핵활동을 일정 기간 중단시키는 합의가 한국의 안보에 미칠 영향이다.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장거리 미사일과 한국을 직접 위협하는 단거리 핵전력이 협상에서 서로 다르게 취급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제한적인 동결에 합의할 경우 제재완화와 안전보장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도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은 북미협상을 지원하되, 그 합의가 한반도 전체의 군사적 안정과 장기적인 비핵화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의 역할은 북미 양측의 만남을 촉진하는 외교적 노력에 그쳐서는 안 된다. 협상의 의제, 단계별 합의 가능성, 검증과 이행, 남북관계와의 연계를 검토하고,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더라도 합의의 효과가 일시적인 정치적 성과에 머무르지 않도록 후속 협상의 경로를 마련해야 한다.
미국 중간선거는 이 과정에 새로운 변수를 추가하였다. 2027년 1월, 민주당이 장악한 새 의회가 출범하면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의회 차원의 검토와 감독이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은 예산과 입법, 관련 상임위원회 활동과 청문회, 행정부에 대한 자료 요구 등을 통해 북미합의의 내용과 이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대북제재의 완화와 관련된 법률적 조건, 핵활동의 검증, 동맹국에 대한 안전보장, 합의 위반 시 대응조치 등이 중요하게 검토될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핵능력을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장기적인 비핵화에 어떠한 기여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도 예상할 수 있다.
한국은 이러한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행정부에 대해서는 북미정상회담이 제공할 수 있는 외교적 성과와 한반도 안정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민주당 지도부와 관련 상임위원회에는 합의의 검증 가능성과 제도적 지속성, 동맹의 안전보장과 국제 비확산질서에 대한 기여를 중심으로 협력할 수 있다.
이러한 대미외교는 단순한 정치적 균형 맞추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미국의 정권교체와 의회 구도 변화에도 지속될 수 있는 한반도 평화정책의 기반을 형성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평화공존을 향후 수십 년의 국가전략으로 이해한다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외교뿐 아니라 의회와 행정부의 전문 관료조직, 군과 정보기관, 정책연구기관과의 협력도 중요해진다.
중간선거 이후 미국의 정책은 두 가지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한다.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정치의 제약 속에서 북미정상회담을 포함한 새로운 외교적 성과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당 의회가 외교적 합의의 내용과 이행조건, 제재, 예산, 동맹정책을 어떻게 검토하고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앞으로 이란전쟁의 향방 역시 미국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전쟁의 군사적·경제적 부담이 커질 경우 미국의 정책적 자원이 중동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전쟁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외교적 전환이 이루어지면 북한과의 협상도 새로운 관심을 받을 수 있다. 미국의 대중국 전략과 인도-태평양 군사태세의 변화까지 고려하면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을 하나의 국내정치 변수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국은 북미정상회담의 재개 가능성을 높이는 외교와 정상회담 이후의 합의를 준비하는 외교를 병행해야 한다. 북미 간에 초기 합의가 이루어질 경우 이를 핵위험 감소와 군사적 신뢰구축, 남북관계의 안정과 평화체제로 연결하는 경로를 미리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회담 자체의 개최 여부에 관계없이 이러한 준비는 한국의 대북정책과 한미협력의 장기적인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Ⅵ. 군사적 안정에서 평화체제로: 새로운 로드맵의 설계
평화공존의 세 가지 청사진은 대북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러한 방향을 구체적인 정책 로드맵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특히 군사적 억제와 위기관리, 정치적 상호인정과 경제협력, 북미협상과 지역질서를 서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와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군사적 안정은 평화공존의 가장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되고 첨단 군사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억제력을 확보하는 일은 한국의 안보에 필수적이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공격과 군사적 강압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해야 남북관계의 변화도 보다 안정적인 조건에서 추진될 수 있다.
다만 억제력의 신뢰성과 위기안정성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능력이 충분하더라도 위기 상황에서 양측이 상대의 의도를 오판하거나 선제적인 군사행동을 선택할 유인이 높다면 전쟁 위험은 계속 존재한다. 핵무기와 정밀타격체계, 인공지능 기반 감시정찰 및 지휘통제체계가 결합되는 환경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더욱 중요해진다.
따라서 안정적 평화공존은 군사적 억제에서 출발하여 위기안정성과 제한적 신뢰구축, 군비통제, 평화체제로 이어지는 여러 정책을 함께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 과정이 반드시 하나의 고정된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군사적 신뢰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더라도 우발적 충돌방지와 위기 시 의사소통에 관한 제도를 마련할 수 있으며, 남북관계가 전반적으로 개선되지 않더라도 핵위험 감소를 위한 국제적 협상을 시도할 수 있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역시 이러한 장기적인 군사안정의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작권 전환은 한국의 군사적 자율성과 한미 연합방위체계의 미래에 관한 문제인 동시에, 한반도의 위기관리와 군사적 판단을 어떠한 지휘체계에서 수행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한국은 대북 재래식 억제에서 상당한 군사적 능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북한의 핵위협에 대한 억제는 미국의 확장억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국을 포함한 지역적 군사상황에서 한미동맹의 역할과 작전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양국 간 전략적 협의와 분업이 필요하다. 인공지능 기반 지휘통제체계가 발전하는 상황에서는 정보와 데이터의 공유, 자동화된 의사결정 지원, 인간의 최종적인 판단과 책임에 관한 문제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전작권 전환이 한국의 군사적 주도성과 연합방위의 효율성을 높이고 위기 상황에서 신뢰할 수 있는 판단과 대응을 가능하게 한다면 한반도 평화공존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전작권 전환의 조건과 절차를 한미동맹의 장기적인 재구성과 함께 검토해야 한다.
군사적 안정이 일정한 수준에서 확보되면 이를 정치적 관계의 변화로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평화공존은 현재의 두 정치체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상호 적대성을 줄이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지속가능한 관계로 발전하려면 남북 간 합의와 제도가 축적되어야 한다. 군사적 의사소통과 충돌방지의 규칙, 상호 체제에 대한 존중, 교류협력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제도 등이 함께 발전할 필요가 있다.
경제·사회협력에서도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남북협력은 일방적인 지원이나 정치적 보상의 문제로만 다루기 어렵다. 보건, 감염병, 재난, 기후변화, 환경과 수자원 관리, 접경지역의 안전은 남북한 주민 모두의 이익이 걸려 있는 영역이다. 국제제재와 관련 규범을 고려하면서도 이러한 공동의 이익을 확대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어떠한 경제적 유인에 반응할 것인지, 제재와 경제협력을 어떤 조건에서 조정할 수 있는지, 국제규범의 준수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공동번영의 가능성은 이러한 조건을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과정에서 검토될 수 있다.
북미정상회담을 활용하는 외교적 로드맵도 보다 정교하게 마련해야 한다. 정상회담 이전에는 한미 간에 협상의 목표와 의제, 가능한 초기 합의를 검토하고 북한의 협상 의지를 면밀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정상회담에서 핵활동의 고도화 중단이나 군사적 긴장완화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검증과 이행체계를 구축하고 후속 협상의 의제를 구체화해야 한다. 이후에는 핵위험의 추가적인 감소, 남북 간 군사적 신뢰구축, 북미관계의 변화, 평화체제 논의를 서로 연결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러한 로드맵에서 중요한 것은 정상회담 이후의 정치적·제도적 조건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적 결단과 미국 의회의 제재·예산·감독 권한을 함께 고려하여 행정부와 의회 모두에 대해 장기적인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 국제적 차원에서는 중국, 일본, 러시아가 한반도 평화체제와 핵위험 감소에 어떠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분석하고 의제별 협력의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나아가 평화공존의 장기적 목표 가운데 하나인 통일의 문제도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군사적 위기관리와 대화의 통로가 복원되고 남북한의 상호인정과 협력이 제도화된다면, 그 이후 보다 긴밀한 공동체와 정치적 통합의 가능성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기존의 남북연합과 통일방안에 관한 논의도 현재의 두 정치체와 복합적인 주권성의 현실을 고려하여 다시 검토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통일이 현재의 평화공존을 잠정적인 상태로만 만드는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평화공존이 분단의 영구화를 의미할 이유도 없다. 미래의 남북한 주민들이 더 높은 수준의 정치적 결합과 공동체 형성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와 사회적 연결을 축적하는 것이 장기적인 정책의 방향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종합하면 평화공존 정책은 대화의 재개, 군사적 위험감소, 공동번영의 제도화, 평화체제와 미래 통합이라는 여러 목표를 서로 다른 시간적 범위에서 추진하는 장기복합전략이다. 각 정책은 병행될 수 있고 한 영역의 진전이 다른 영역의 변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 반대로 일부 정책이 교착되더라도 다른 영역의 노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평화공존 정책의 구체화는 일부 부처만의 과제로 남겨두기 어렵다. 통일부가 남북관계의 장기적 방향, 상호존중의 원칙, 교류협력과 평화적 관계의 제도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외교부, 국방부, 국가안보실은 군사적 억제와 위기관리, 북미협상과 주변국 협력을 함께 조정해야 한다. 국제제재와 경제협력, 사이버안보와 첨단기술에 관련된 정책 역시 범정부적인 협력을 필요로 한다.
독립적인 정책연구와 지속적인 정세 분석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북한의 군사적 능력과 전략적 목표, 미국 국내정치와 대외정책, 북러관계, 중국의 대북정책을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다양한 상황에 대한 정책적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한다.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에 대한 평가와 개별 정책수단의 실효성에 관한 검토를 구분하면서, 정부와 민간 연구기관 사이의 정책적 논의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향후 수십 년의 남북관계를 전망한다면 초당적인 정책적 지속성 역시 중요하다. 한국은 이미 상당한 군사적·경제적 능력과 국제적 외교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다. 평화공존의 장기적인 성과는 이러한 능력을 어떠한 목표와 시간적 경로 아래 조직하고, 정권교체와 국제정세 변화에도 지속할 수 있는 연구와 실행체계를 마련하는가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Ⅶ. 결론: 향후 30년의 평화공존을 위한 과제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은 지난 30년 동안의 대북정책을 변화한 국제질서 속에서 다시 검토할 기회를 제공한다. 북핵문제의 완전한 해결, 평화체제 구축,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이라는 목표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추구할 수 있게 하던 국제정치적 조건이 달라졌고, 남북관계 역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포용적·안정적·책임 있는 평화공존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한 것은 이러한 장기적 과제를 논의할 정책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평화공존을 대화와 교류협력의 재개에 한정하지 않고 군사적 안정, 상호인정, 공동번영, 국제협력을 결합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킨다면, 향후 수십 년의 한반도 정책을 구성하는 중요한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론적·정책적 과제를 함께 풀어야 한다. 남북한의 국가성과 주권적 권한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 현재의 두 정치체를 인정하면서 미래의 통일 가능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군사적 억제에서 위기안정성과 신뢰구축, 평화체제로 이어지는 경로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미국 중간선거 이후 한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정상회담 추진 가능성을 적극 활용하되,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와 행정부의 정책 담당자들과도 협력하여 북미합의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정상외교는 대통령의 재량이지만, 합의의 지속성은 미국 정치제도 전체의 지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상회담 이후 핵위험 감소, 군사적 안정, 남북관계의 안정, 평화체제 구축을 하나의 경로로 잇는 로드맵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정상회담의 성사만큼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이다.
한국은 한미동맹과 군사적 억제력, 외교 네트워크, 경제·기술 역량, 남북관계의 제도적 경험 등 평화공존을 추진하기 위한 여러 정책수단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러한 수단들을 장기적인 전략목표 아래 조직하고, 변화하는 정세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조정하는 데 있다.
평화공존이 향후 30년의 국가전략으로 발전하려면 어느 한 정부의 정책적 성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남북한이 현재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주권적 권한을 가진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적대적 관계를 영구적인 상태로 확정하지 않고, 군사적 안정과 공동의 이익을 축적하면서 미래의 정치적 관계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반드시 하나의 통일 형태로 귀결될 것이라고 미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래 세대가 평화적인 조건에서 보다 긴밀한 정치적 공동체와 통합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유지되어야 한다. 핵 없는 한반도와 지속가능한 평화체제를 추구하는 과정도 함께 진행될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공존의 청사진을 어떻게 구체화하고 향후 수십 년에 걸친 국가전략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를 위해 국제질서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남북관계의 장기적인 목표를 재검토하며, 군사·외교·경제적 정책수단을 연결하는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 연구기관의 협력, 초당적인 정책적 논의와 제도적 지속성을 확보하는 일이 평화공존 정책의 실질적인 성과를 결정할 것이다. ■
[1]이재명 대통령, 「제81주년 광복절 경축사」, 2026년 8월 15일; 이재명 대통령, 「제81차 유엔총회 기조연설」, 2026년 9월 22일. 두 연설은 포용적·안정적·책임 있는 평화공존의 세 가지 청사진을 제시하고, 후자는 북미대화와 평화체제, 핵능력의 중단·축소 및 장기적 비핵화의 관계를 설명한다.
[2] 박원곤. 2026 “프레임의 전이: 적대적 교전국론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재편하는가.” EAI Global NK 논평
[3] 박형중. 2026. “북한의 향후 5년 전략 목표와 남북관계 전망.” EAI Global NK 논평. 저자는 북한의 핵 강압능력과 국경 요새화, 협상 지연전략을 분석하면서 한국의 군사적 대응과 장기적 협상전략에 관한 비판적 문제를 제기한다.
[4]조은정. 2026. “영토적 제재 VS 디지털 침투: 북한 IT 노동자의 유럽 확산이 던지는 경고.” EAI Global NK 논평. 저자는 북한의 초국경적 IT 노동 및 수익활동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적 집행협력의 필요성을 분석한다.
■ 저자: 전재성_EAI 원장; 서울대학교 교수.
■ 담당 및 편집: 송채린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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