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차 세계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
강대국들의 패권경쟁과 무력 선호,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후퇴 그리고 권위주의 부상, 국제기구 무력화….
오늘을 읽는 키워드지만, 100년 전에도 유효한 키워드였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며 낯설어진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시선을 돌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100년간의 평화’ 막바지였던 1차 세계대전 직전,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 시기와의 비교다. 세계적 역사학자인 마거릿 맥밀런은 “(양차 대전) 당시 전 세계를 짓눌렀던 개전(開戰)의 공포를 우리가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고 투자계의 스티브 잡스로 물리는 레이 달리오는 “1945년 형성된 새 질서가 진화해 1929~1939년 당시와 유사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봤다. 미 국방부전략기획담당 특별보좌관 출신의 할 브랜즈도 “지금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1930년대와 훨씬 더 닮았다”고 했다.
과연 어느 정도로 유사한 것인가. 역사의 반복(repeat)인가, 비슷한 변주(rhyme)인가. 중앙SUNDAY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이 4일부터 공동기획 ‘1·2차 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을 통해 이 논쟁을 다룬다. ‘100년간의 평화’와 전간기가 왜 비극적으로 귀결됐는지, 오늘날 그 경로를 차단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색이기도 하다. 12명의 전문가가 상호의존부터 패권 경쟁, 극단주의까지 12주제를 탐색한다.
고정애 기자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철로 주변을 순찰하는 관동군. 1933년 북중국에서 열하작전을 펼 때 일본산 트럭과 포드 트럭 사이의 극명한 성능 차이를 목격한다.
일본은 대미 교역 의존도를 낮추고 전략물자를 국산화하는 등 디커플링을 시도하지만 미국의 보복 조치를 당하게 된다. [사진 김명호]
경제 보복이 횡행하는 세상이다. 미국과 캐나다는 보복관세를 주고받고 수입 금지 카드까지 꺼냈다. 미국은 이란을 옥죄기 위해 포괄적 경제제재에 주요국 참여를 독려하고 이란은 보복을 공언한다. 중국은 희토류 수출 통제로 일본을 압박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제사회에 심대한 타격은 미·중 경제갈등이다. 2018년 시작된 관세전쟁은 첨단기술과 핵심 광물 통제로 비화했고, 상대국 공급망의 분단을 획책하고 자국 공급망의 안정성과 회복력을 확보하는 싸움이 되었다. 양국은 상대와의 경제적 상호의존이 자국 경제 취약성을 증대시켜 안보 위협을 초래한다고 보고 상호의존 축소와 경제적 자립을 국가안보의 핵심과제로 삼았다. 이렇듯 무역·투자·기술·전략물자를 둘러싼 상호 보복의 악순환이 지속한다면 세상은 어떤 결과와 마주할 것인가.
전간기(1919~41) 아시아·태평양 공간을 돌이켜 보면 유사한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워싱턴 체제라는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일본은 무역과 투자를 통해 국력 신장에 성공했고, 미·일 양국은 서로의 최대 교역국 중 하나로 긴밀한 상호의존 관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1930년대 들면서 한편으로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법 등 보호주의와 배타적 경제블록의 부상,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내에서 만주 권익 확보란 제국주의적 팽창과 경제적, 안보적 자립을 추구하는 세력의 등장이 겹치면서 미·일 관계는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에 대한 경제적 상호의존을 대폭 축소하려는 일본과 기성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 압박을 가하는 미국 사이에 경제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1941년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텍사스 유전 등 시찰한 야마모토 절망

1941년 진주만 공습을 기획하고 지휘한 일본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 사령관. [중앙포토]
일본에서 경제적 상호의존과 안보 자립, 전쟁의 관계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물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다. 그는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을 기획하고 지휘한 해군의 최고 브레인이고, 하버드대 유학(1919~21년)과 주미대사관 무관 근무(1926~28년)로 군부 내 미국을 가장 잘 아는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청년 장교 시절 야마모토는 군부 내 대유행한 총력전 개념에 경도되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을 목도하면서 전쟁이 전선에서 군대와 군대의 단기 결전이 아니라 인구·산업·자원·과학기술 등을 총동원한 장기전임을 깨달았다. 여기서 가장 큰 교훈은 미래 전쟁의 승패는 평시에 준비한 국가의 종합적인 전쟁 능력, 특히 산업력과 자원 확보 역량에 좌우된다는 것이었다.
미국 체류 시절 야마모토는 미국의 산업 역량을 확인하고자 텍사스 유전과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 피츠버그 제철소를 시찰하고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는 총력전의 핵심인 생산력과 보급력 측면에서 미국이 일본에 압도적 우위에 있으므로 장기전에서 승리는 절망적이라는 점이다. 훗날 그는 미·일 전쟁을 앞두고 “개전 6개월이나 1년은 거침없이 날뛸 수 있지만 그 이후는 자신 없다”는 유명한 발언을 한 바 있다. 둘째로 석유와 자동차 등 전략물자 공급에서 미국에 대한 과잉 의존이 초래하는 전략적 결과를 경고했다. 그는 미국과의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할수록 미국이 경제제재에 나서는 경우 공급망 붕괴로 국가안보가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 전망했다.
야마모토의 우려는 당시 군부도 공유했다. 특히 군함의 동력인 중유 수급을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하던 해군 수뇌부는 “가상 적국인 미국과 영국이 언제든 밸브를 잠그면 수조 엔을 들여 건조한 연합함대가 단 하루도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항구에 묶인 고철 덩어리가 될 것”이라며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영미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창설하면서 제16조에 집단안보 집행 수단으로서 경제제재를 법제화, 상비화한 데 주목했다. 영미가 무역봉쇄와 같이 국가 간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무기화하여 상대국을 강압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목도하며 해군은 정부에게 석유 금수(embargo)에 대비하는 특단의 조치를 요구했다.
당시 일본은 석유 수요의 9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영미 석유 메이저인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 스탠바크(Stanvac)와 로얄더치쉘의 자회사 라이징 선(Rising Sun)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고 자국 기업은 하청업체 수준에 머물렀다. 일본 정부는 가상 적국 기업이 자국 내 비축 기지, 유통망, 판매 가격, 정유 시설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를 경제안보상 치명적인 상황으로 규정했다. 대안은 원유를 수입하여 국내 자본이 정제하는 체제로 이행하고 영미 자본을 배제, 퇴출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당시 첨단 산업의 총아인 자동차산업의 상황도 깊이 우려했다. 이 역시 경제안보 차원에서의 전략적 가치 때문이었다. 결정적 계기는 1933년 북중국에서 관동군의 열하작전(熱河作戦)이었다. 당시 관동군이 반일 세력의 거점인 중국 열하성을 침공했을 때, 작전 지역은 산악 지형인 데다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지는 극한 환경이었다. 철도가 없는 험지에서 관동군 야전 자동차부대는 관제 국산 트럭과 대량 징발·구매한 1934년형 포드(Ford) 트럭을 함께 투입했는데, 둘 사이 극명한 성능 차이를 목격했다. 혹한에 멈춰선 국산 트럭과 달리 포드 트럭은 단번에 시동이 걸렸고, 험준한 산악 지형을 거침없이 돌파했다. 관동군 척후·기동부대는 포드에 병력과 중화기를 싣고 경이적인 진격 속도로 불과 3일 만에 열하성 수도 청더(承徳)를 함락시켜 육군 수뇌부를 아연케 했다. 이들은 군용 트럭의 전략적 위력을 실감하고 그 주역이 미국의 포드라는 뼈아픈 현실과 마주했다. 만약 미국이 부품 공급과 차량 판매를 차단하면 군의 기동력은 하루아침에 마비될 것이었다.
1930년대 초 일본 자동차 시장은 포드와 GM이 90% 이상을 장악했고, 나아가 포드의 헨리 포드 사장은 일본을 단순 조립 기지가 아닌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는 생산 거점으로 삼고 요코하마 소재 대규모 부지를 사들여 최첨단 일관 생산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이에 대항하여 일본 정부와 육군은 포드의 성능과 대량생산 방식을 벤치마킹하되, 포드 자체는 일본 시장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에 국산 완성차 메이커를 육성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인위적 디커플링 시도는 혹독한 대가
일본 정부는 전략산업 부문에서 본격적으로 대미 디커플링에 나섰다. 석유 부문에서는 1934년 ‘석유업법’을 제정하여 정유와 수입을 국가 허가제로 하여 기업의 신규 진입과 설비 투자를 통제하고 판매량을 할당하며 6개월분 석유 비축을 의무화하여 전략물자의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초강력 조치를 실시했다. 자동차 부문도 유사하게 1936년 ‘자동차제조사업법’을 제정, 국가 허가제를 도입하고 일본 회사에만 면허를 발급했다. 포드와 GM에게 생산량을 강제 동결하고 공장 증설을 전면 불허했다. 반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려던 도요타(豊田)와 닛산(日産)을 ‘허가 회사’로 지정하여 파격적인 법인세 면제, 보조금 지급, 관세 보호 혜택을 몰아주었다.
이렇듯 국가안보와 자립을 위해 단행한 무지막지한 대미 디커플링은 일련의 보복조치를 불러왔다. 미국은 1911년 체결된 미·일 통상항해조약 파기를 선언하여 전면적 경제제재를 취할 법적 권한을 확보하며 보복의 빌드업을 개시했다. 수출통제법을 발효하고 정밀 공작기계와 고급 고철 수출을 전면 금지하여 일본 자동차 공급망을 교란했다. 석유 수급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 군부가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자 미국은 자국 내 일본 자산을 전면 동결하고 석유 봉쇄를 단행했다. 결국, 대미 자립 조치들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금수 조치로 국가의 사활이 걸리는 결정적 취약성을 초래하여 극단적 선택을 불사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먼저 공격했다”는 야마모토의 고육책은 이렇게 나왔다.
전간기 미·일 관계가 주는 교훈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강대국이 인위적으로 디커플링을 시도하면 돌이키기 힘든 대가를 치른다는 점이다. 오늘날 미·중 관계에서 보듯이 국가안보를 위한 디커플링을 강화할수록 상대방은 기술과 경제 자립을 생존의 문제로 다루는 과잉안보 상태에 빠지고, 그 결과 서로 취약성과 급소(chokepoint)를 공략하여 안보적 불안정성을 증폭시킨다. 양국이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방지하려면 역사적 교훈을 직시하여 회복력 있는 상호의존 관계 구축을 향한 전략적 선택을 내려야 한다.
ㆍ야마모토 이소로쿠(1884~1943)=일본 해군 제독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 진주만 공습과 미드웨이 해전을 지휘했다. 1943년 남방 전선을 시찰에 나섰다가 상공에서 미군에 의해 격추돼 사망했다. 당시 미군이 일본 해군의 관련 암호를 해독해 야마모토의 이동 일정과 경로를 파악했다. 미군의 참수작전명은 ‘복수작전(operation vengeance)’.
ㆍ초크포인트=해협·운하처럼 해상 교통이 특정 좁은 지점에 집중되는 전략적 요충지를 뜻한다. 봉쇄나 통제가 이뤄지면 에너지·상품 공급망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어 국제 안보와 무역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호르무즈해협·말라카해협 등이 대표적이다.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전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이자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시카고대 정치학 박사. 한국국제정치학회·현대일본학회 회장을 지냈다. 일본외교, 국제정치경제, 동아시아국제정치, 공공외교가 관심 분야다. 『트럼프의 귀환, 미국의 미래』 『개념전쟁』(2023), 등의 저서가 있다.
[출처:중앙일보, 고정애 기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63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