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사랑방, 그 후! - 25기 최은호(서울대학교 외교학 석사과정)
2026-02-06

이번 학기에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 내가 국제정치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라고 하자 의사는 이렇게 반응했다. “국제정치? 그걸 굳이 공부할 필요가 있나요? 그냥 센 나라, 트럼프 같은 사람이 이기는 게 국제정치 아니에요?” 이를 단순한 비전문성이나 무지의 문제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발언에는 훨씬 더 날카롭고 뼈아픈 비판이 담겨 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해 간질과 치매를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제시할 수 있다. 반면 국제정치학자들은 소련 붕괴에 따른 냉전의 종식도, 유럽연합의 장기적 지속 가능성도 예측하지 못했다. 만약 의사가 이렇게 수시로 오진을 내린다면 면허 정지를 피하기 어려울 텐데, 이러한 예측을 내놓은 왈츠와 그의 제자들은 변함없이 당당히 국제정치학 학계의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은 기존 국제정치학이 경제학에 비해 일원적 체계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한탄하면서, 이러한 실패를 현실주의 이론의 변수적 “parsimony”와 대체로 정확한 설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부분적 부정확성으로 환원한다. 의사가 암 말기에 대한 오진을 의술의 우아함을 위해 불가피한 대가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이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자연과학과 같은 예측만이 사회과학 이론의 존재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국제정치학 이론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고 또 무엇이 좋은 이론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왜 사랑방에 들어왔으며, 한 학기를 마치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얻어가야 보람찬 일 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동일할 것이다. 1년 여정 끝에 이에 대한 답은 크게 세 가지로 추려볼 수 있을 것 같다. 보는 것, 행하는 것, 그리고 삼가는 것이다.

 

먼저 보는 것이다. Theory라는 말이 θεωρέω(보다)에서 유래했듯이, 국제정치학, 아니 모든 사회과학 이론의 의의는 세계를, 진경산수眞景山水를 바라보는 데 있다. 동주 이용희가 동양 미술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을 보든 천하도를 보든, 주은래와 키신저 혹은 김일성과 이후락이 악수하는 사진을 들여다보든, 마두로에 대한 기사를 읽든 궁극적으로는 모두 유사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진경산수는 부끄러움이 많은 대상이라 스스로를 친절하게 내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류 지성이 함께 공동共同의 동공瞳孔을 빌려 보아야 한다. 나와 다른 지평을 가진 무수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매개해야만 그 실루엣을 겨우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타인과 나의 거리를 확인하고, 이들과 동화되었다가 다시 거리를 두는 반복 속에서만 진경은 조금씩 형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복잡한 작업을 위한 도구라고는 언어라는 다소 엉성한 다리 뿐이기에 이 여정은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행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은 데카르트로부터 내려오는 서양 지적 전통에 따라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고 환경이나 역사를 주어진 조건으로 간주하지만, 국제정치적 상상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체적 생명력을 갖는다. 아이디어와 물질 환경이 때로는 조건이 되고, 때로는 의지가 되는 장 – 그것이 바로 국제정치다. 국제정치를 상상하는 사람에게는 시공간에 대한 예민한 직관과 동시에 무거운 도의적 책임이 뒤따른다. 근대를 초극하려는 슈미트나 1940년대 일본 근대초극론의 사례는 상상이 얼마나 강력하고 또 위험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준다. 이론은 기술적 기능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고대 그리스의 예언처럼 규범적이고 자기실현적인 힘을 갖는다. 그렇기에 2050년, 2100년의 미래 세계정치를 상상하는 것은 세계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것의 구성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삼가는 것이다. 학문에 대한 진지함이란 이중적인 것 같다. 한편으로는 전술했듯이 진경에 이르는 도정에서 학문이 열쇠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진지함은 학문에서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진경에 도달해야 한다는 절실함을 더해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절실함에서 비롯되는 경계심이다. 이 경계심은 꽤 유기적으로 생기는 듯하다. 사랑방 답사보고서를 쓰는 학우들이 일관되게 하는 진술은, 자신이 쓰는 것이 소설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방을 들으며 아직 그것을 정확히 붙들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국제정치를 보며 느꼈던 복잡다단한 답답함, 혹은 외국에 체류하며 그 사회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식에서 느꼈던 이질성을 나름대로 설명, 아니 합리화할 수 있는 직관이 생긴 듯하다. 물론 그 직관이 옳은지, 아니면 어긋난 확신과 위험한 자신감에 불과한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삼간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라는 상충된 동력을 화합시키려는 자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랑방은 내가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고 새로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의사의 냉소적 질문에 답하자면, “힘에 의한 국제정치학”에서 힘을 구성하는 원리를 바로 보는 데 있다. 인간 사회 조직방식과 국제질서의 가변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수업이 끝난 뒤, 내게는 사랑방 강의계획서라는 이름의, 교수님이 중매해주신 이들의 연락처가 남아 있다.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는 그들에 대해 거의 백지상태였고 선입견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책을 더듬거리며 읽고 사랑방에서 오간 대화를 따라가다 보니, 각자에 대한 희미한 윤곽이 생긴 느낌이다. 다음번에는 훨씬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화부에는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어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다시 읽어볼 요량이다. 사랑방 실라버스를 한 번 맛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다시 회독하고 계속 고민해봐야 한다는 점에서 내게 사랑방이 끝난 수업이 아닐 것이다. 하영선 교수님께서 심어주신 문제의식은 평생 곱씹으며 가져가야 할 것이기에, 사랑방은 내 삶 전체에 걸쳐 이어질 수업인지도 모르겠다. 수업을 이끌어주신 하영선 교수님과 25기 학우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앞으로 들어올 26기생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내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