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연구원(EAI)은 양극화 진영대결, 민주주의 후퇴, 사회 분열과 같이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사회 정치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으로 자유주의에 주목하고 있다. EAI는 자유주의의 정의 및 분석을 통해 한국 자유주의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나아가 극단적인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자유주의 연구 프로젝트를 2021년 출범하였다. 연구결과는 총 4편의 워킹페이퍼로 발간하였다

워킹페이퍼
[EAI 워킹페이퍼] 자유주의 시리즈④_ 한국사회 타자의 포용을 위한 자유주의적 탐색

I. 서론: 타자란 무엇인가?   대구에서 중단된 모스크 건설은 현재 ‘중재불능’ 상태에 있다고 전해진다. 전국에 20여 개가 있는 모스크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잠재되어 있다. 코로나 19에 따른 국민재난지원을 둘러싸고도 ‘국민’이 누구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다른 범죄들에 비해 유난히 부각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범죄 등 이른바 국민이 아닌 사람들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한국의 언론에 등장하고 사건화되는 것은 요즘은 일상에 가깝다. 그러한 외국인과 관련한 사건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상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이 최근에는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표지를 달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언론의 주목 대상이 된다. 결국 강제 전역되고 급기야 죽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변희수 하사 사건’은 최근의 대표적인 예이다. 트랜스젠더라는 이른바 성 정체성의 문제와 군이라는 어쩌면 가장 남성적인 집단에서 발생했던 배제의 문제가 또 한 명의 희생을 가져왔다. 지난 2021년 지방자치단체 보궐선거 특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나타난 20대 남녀의 투표 성향의 뚜렷했던 차이는 그간에 쌓여있던 젠더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사회 화두 중의 하나가 ‘공정’으로 등장하면서 남녀 차이 혹은 차별과 관련한 ‘불공정’의 문제가 또한 대두되었고, 지난 보궐 선거는 그 투표 성향으로서 보여주었다.   결국 이러한 갈등의 양상들은 하나의 어젠더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문제들이 중첩적으로 포개지거나 착종되면서 획일적인 방식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러한 갈등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적대적 감정이 격화되면서 갈등의 상대방을 배제하고 억압하려 하면서 ‘타자화’ 현상이라는 점이다. ‘타자’란 ‘우리’라는 ‘동일성’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고 배제된 것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런 타자에 대한 인식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항상 달라져 왔다. 우선 누구를 그 사회의 타자로 설정하느냐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글의 서두에서 비록 외국인 혹은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로 시작했지만, 그들의 문제는 극히 최근의 현상일 것이다. 해방 이후로 한정하여 한국 사회의 타자의 문제를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양한 수준과 다양한 공간에 등장하는 타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나 근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집단주의의 강조 속에서 이루어진 ‘정체성 부여(identification)’의 역사적 과정이 존재해 왔고, 그러한 정체성 형성의 과정은 결국은 포섭과 강제적 동일화 그리고 그것에 동반되는 배제의 과정, 결국은 일정한 ‘타자 만들기’의 과정을 포괄하고 있다.[1]   근대 이후 한반도에서 국민국가 건설의 과정은 식민지, 전쟁과 분단 등의 특수한 경험과 그 영향, 그리고 이후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한에서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독자적인 길 모색 등을 거치면서 특수성이 존재하였고, 그 과정에서 정체성 형성에 수반되는 ‘타자 만들기’의 경험 역시 존재하였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경제 위기와 사회의 신자유주의화 속에서 나타난 특수성 역시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 1987년 민주화 그리고 1997년 경제 위기를 겪고 난 후, 이전 시기와는 일정한 단절을 이루면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다양한 현상에 대한 진단과 더불어 한국사회의 다양한 타자화 현상과 그를 통한 대립의 격화라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한 제안의 원칙에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특히 근대적 자유주의의 내재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한국사회의 자유주의적 과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노력과 결부된다. 이는 자유주의가 지닌 근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동시에 한국 사회에 맞닥뜨리고 있는 자유주의적 과제 및 탈근대적 과제를 동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II. 무엇이 타자를 만드는가?   수년전 예멘 난민 사태를 둘러싸고 진행된 일련의 과정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책적으로 추진되어온 ‘다문화주의’가 얼마나 허울뿐이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제주에 예멘으로부터 온 500여 명의 난민신청자들이 있다는 소식이 전국으로 알려지자, 청와대 인터넷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제주도 불법 난민 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 신청 허가 폐지/개헌 청원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고, 며칠 만에 20만 명을 훌쩍 넘었던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수차례 예멘 난민의 추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조직되었고, 수많은 참가자들을 동원하였다. 앞서 언급한 대구에서 모스크 건설 중단 결정은 그것의 연장선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멘 난민 거부, 모스크 건설 중단 등의 문제는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 이상의 문제가 교차하여 엉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은 예멘 난민이나 모스크 건설의 거부 등에서 등장하는 공통의 요소는 무슬림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다. 2018년 예멘 난민 반대 운동은 이들이 왜 왔으며, 그들이 예멘 현지에서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으며, 그들이 ‘중동’이라는 지역에서 온 이슬람교도, 무슬림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하였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무슬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종의 문화적 표상을 다시금 소환하였다. 우리가 이슬람교와 무슬림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표상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며,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나 9.11 테러 이후 그리고 몇 년 전 시리아 지역에서 발생하여 유럽에 난민 사태를 발생시켰던 IS 집단 사태 이후 굳건해진 이슬람에 대한 시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그것이 소환된 것이다. 특히 예멘 출신 난민에 대한 거부에서 주요하게 제기된 것은 무슬림 남성들로부터 ‘우리 여성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당시 예멘 난민을 반대하던 이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는 “혐오가 아니라. 안전을 원한다.”라는 문구 그리고 “불법 가짜 난민 추방 · 국민 안전 최우선”이라는 문구들이었다. 이와 같은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에는 “보수 정치인, 근본주의 기독교, 청년, 여성들 간의 감정적 연합”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러한 연합 속에서 한국 여성은 우파 정치인과 보수적 기독교의 보호자로서 우월적 위치를 구성하는 수동적 기호로 활용되거나 한국 남성의 보호의 대상으로 재현되었다(김현미 2020; 2018, 220-22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칭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보수 개신교 혐오세력이 난민이라는 공동의 ‘적’을 배척하기 위해 여성 인권의 이름으로 “위험한 연대”를 형성하였다(김나미 2018; 정혜실 2018). 즉 눈 앞의 공동의 ‘적’을 두고서 오랫동안 적대시해온 오랜 ‘적’과의 아이러니한 연대가 구성된 것이다.   한편으로 2021년 8월 미군의 갑작스러운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인해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들어온 아프가니스탄 난민들 –현지 한국 협력자들–은 그나마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별탈없이 입국하였다. 그들이 한국대사관이나 기업의 조력자들이었다는 이유라는 것이 우선 고려–난민에 대한 인류애적 호소나 세계시민으로서의 의무의 문제가 아니다–되었기에 별다른 반대 없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시기 프랑스에 입국한 프랑스 조력자들 가운데 탈레반이 5명 숨어들었다는 보도는 또 다른 위협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 역시 한국 사회에서 두려워하는 무슬림이라는 점에서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태도로 그들을 대하게 될지는 쉽게 예단하기 힘들다. 최근에는 서서히 그들의 장기체류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보도가 흘러나오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마치 1970년대 베트남 보트피플(Boat People)이 부산에 수용되고 어느 한명 남지 않고 모두 다른 나라로 이주하도록 강제되었던 상황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난민이 법적인 문제이자 사회적 문제로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난민지원에 관한 협약>과 <난민지위에 관한 의정서>에 가입하면서부터이다.[2] 이에 따라 1993년 12월 출입국관리법과 1994년 6월 출입국관리법 시행령에 난민 관련 조항을 신설하고 1994년 7월부터 난민 지위 인정을 위한 신청접수를 받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2000년까지 단 1명도 난민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2000년 대한민국이 유엔난민기구 집행이사국이 된 이후 2001년 에티오피아 출신의 반정부단체 활동가 타다세 레레세 데구에게 1명의 난민 지위를 인정한 것이 처음이었다. 1994년부터 2020년까지 총 71,041명의 난민신청자가 있었지만, 그 중 난민 인정을 받은 경우는 799명에 한정된다. 그것은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국가들의 난민 인정비율이 37%에 이른다는 점에서 겨우 1% 인정을 넘는 한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3]   2012년 동아시아 최초로 별도의 ‘난민법’을 제정하면서 난민신청자의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는 국제적인 인권 국가로서의 위상을 홍보했던 한국의 입장에서 현실적인 수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간 한국 사회는 다문화주의를 외치면서 한국사회로 유입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들에 대해 관용을 강조하고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2018년 예멘 난민 사태가 보여준 것은 그것이 얼마나 허울 좋은 구호였으며, 얼마나 임시방편적이고 일시적인 조치들이었는가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멘 난민 반대 움직임을 통해서 그간 잠재되어 있던 반다문화, 반이주민 정서가 ‘잠재적 테러리스트’ 또는 ‘잠재적 성범죄자’ 등의 이름을 통해 난민을 낙인 찍고, 또한 그간 이주민, 불법체류자, 조선족 등에 대한 위험한 표상과 결합시킴으로써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비(非)국민’으로 규정짓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간 한국 사회에서 주요한 담론을 형성하였던 다문화주의는 이제 낡은 혹은 국민을 역차별하는 때라서 “순수한 국민”에게 피해를 입히는 이데올로기로 규정되고 공격받기 시작한다. 반다문화주의자들은 정부의 다문화 정책을 국민과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된 국민에 대한 역차별로 규정하고, 자신들을 인종주의자로 낙인찍고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언론에 대해서도 반감을 드러낸다(육주원 2016, 120). 반다문화주의 담론은 앞서 난민에 대한 거부 운동 속에서 드러났던 ‘자국 여성보호’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민족의 순수성’이라는 상징적 재현에 대한 집착을 강요하면서 자국 여성들을 대상화하고 ‘자국 여성보호’의 논리를 제기하며 나아가 다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다(Yuval-Davis 2012, 58-62). 그러한 점에서 반다문화주의의 난민 반대와 페미니즘의 연대는 아이러니하거니와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작동하였던 것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논리 특히나 절대적인 경쟁 사회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자기보호 본능의 자극 때문이다.   마치 세월호 사건 당시 ‘국가의 부재’를 목도하였다면, 이제 새로운 변화 속에서 ‘국민’을 보호해 줄 ‘국가’를 호출하고 나선 것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는 ‘국민이 먼저’라는 구호로 전환되었고, 그 국민을 보호할 강력한 국가를 요구한다. 한편으로 이미 오랫동안 신자유주의의 강세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국가를 다시 소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의 극단화되고 시장의 영역에서 국가가 사라져갔지만, 그러한 경쟁의 틀을 마련하고 그나마 ‘공정한’ 경쟁을 이루기 위해서 ‘국민들만의 자유로운 경쟁’의 공간을 만들어낼 울타리를 국가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트럼프에 연호했던 것은 미국인들만의 자유로운 경쟁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자유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강력한 국가를 원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로 마치 국가 권력을 무기력화시키면서 국경을 넘나드는 난민, 이주노동자, 무국적자, 불법입국자 등을 추방하고 그들에게 장막을 쌓아 올리는 강력한 국가를 다시 희망하고 있다. 다문화주의는 마치 국경의 소멸과 국가의 부재를 드러내는 표현인 듯 간주된다.   예멘 난민 문제가 결과적으로 큰 잡음 없이 소멸된 탓에 더 이상 문제가 확장되지는 않았다. 당시 예멘 난민 중 3명이 난민 신청을 했지만 2명이 난민 수용되었고, 이후 3명이 ‘인도적 체류’ 신청을 했지만, 이 역시 재판부가 “외국인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인도적 체류 허가를 신청할 권리가 대한민국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았고, 인도적 체류허가 신청권리는 대한민국 정부의 비호를 요청하는 권리이지, ‘인간의 권리’로서 인정되는 헌법상 기본권이라고 보기 어렵다”라는 판결을 통해 거부하였다.[4] 이러한 판결은 대한민국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주권의 배타적 속성 그리고 인간의 권리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국민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권리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근대적 특성 등을 분명히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난민 문제와 관련하여 유럽의 예를 비추어 본다면, 그것이 가지는 쟁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지난 수년 전 유럽에 시리아 난민들이 유입되었을 때, 각국은 쉽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아무리 인권에 호소하더라도 쉽지 않았고, 유럽연합 차원에서 할당제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시리아 난민 문제에서 가장 적극적인 표시를 했던 나라는 독일이었다. 흔히 ‘무티(Mutti: 엄마) 리더십’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메르켈의 우호적 조치가 가능했던 것은 결국 독일경제의 조건이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경제적으로 지속적인 불황의 상태와 높은 실업률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면, 독일은 예외적으로 경제적으로 활황 그리고 낮은 실업률 심지어는 노동력 부족 현상까지 있어 시리아 난민 문제에 우호적일 수 있었다(이승현 2016).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각국에서 인종주의적 색채를 지닌 극우민족주의는 여전히 확장세를 얻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한국에서 타자의 문제가 급격히 부각되면서 공격적인 혐오 발언을 발생시키고 집단적인 배제의 움직임까지 보이는 부분은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급격한 신자유주의화와 맞물려 있다. 철저한 경쟁 사회로의 진입 이후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던져진 개인들은 경쟁 속에서 누군가를 밟고 일어나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고, 그것은 사회를 공존의 모델을 통해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기 게임의 모델을 따라 구성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개인들은 끊임없이 속물적 근성을 발휘함을 통해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며, 그 경쟁에서 탈락한 자들은 ‘잉여’적 존재로서 취급받는다. 그 경쟁 속에서 경쟁자를 타자화하려는 경향이 발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2018년 당시 예멘 난민 문제의 경우 특수하게 단지 난민이라는 특수한 존재의 문제만이 아니라 페미니즘 문제는 물론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교차하는 일종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원 2020). 특히나 최근 한국 사회에 이슈가 되는 페미니즘 문제가 교차함과 동시에 여기에 세대 간의 갈등 문제 역시 중층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응축되어가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예멘의 난민에 대해 무슬림이라는 이유, 그것은 이슬람에 대한 오래된 편견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배척하고자 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을 배척하는 명분에 여성 보호라는 ‘유사 페미니즘’ 논리를 내세운다.[5] 하지만 난민 문제가 사라진 자리에 페미니즘은 사라지고 가부장적 논리가 재등장하였고, 다시 타자화의 대상으로 여성을 지목하게 된다. 최근 20-30대 남성 취업자 및 구직자들은 노동시장의 경쟁 속에서 이중적 억압을 받고 있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우선은 기존 정규직 기성세대 40-50대가 높여놓은 진입장벽과 경쟁해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동일 세대 여성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20대 초반의 남성들이 군 복무와 관련하여 받는 피해의식은 결국 그 비난의 화살을 20대 여성에게 돌릴수 밖에 없게 된다. 또한 취업의 치열한 경쟁 속에 여성에게 주어지는 할당제에 대한 반감은 역시 그렇게 켜켜이 쌓여진 피해의식에 또 하나의 무게를 더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갈등 표출 혹은 폭발 현상을 둘러본다면, 결국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소외, 타자화 현상들이 중첩되고 교차되어 응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타자라고 지칭되고 있는 특정한 집단이 이러한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들 속에서 표출되는 모순을 응축하면서 표적이 되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난민 문제가 불거지는 얼마 전부터 현재까지 사그라지지 않는 문제 중의 하나가 젠더갈등이다. 젠더 갈등의 상징적 계기가 되었던 사건은 ‘강남역 살인사건’이었다. “여자라 살해당했다”라는 상징적 어구들로 나타난 문제는 그간 누적되어온 젠더갈등의 폭발이었고, ‘여성혐오’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젠더 갈등이 극단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후 이러한 문제들을 다양한 지점에 폭로된 ‘미투’ 운동 그리고 혜화동 시위를 거치면서 수그러들지 않고 잠재적 폭발력을 지니면서 한국 사회에 지속되고 있다. 특히 이 문제에서 여성들의 고통 그리고 혐오라는 말과 함께 남성들 전체가 잠재적인 살인자나 성범죄자로 간주되는 남성 혐오의 극단적인 양상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남성들에 대한 공격은 군가산점 문제 등 취업을 앞둔 20-30대 세대들 간의 갈등과 접목되어 갔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드러났던 2-30대 남녀의 대비되는 투표성향은 그러한 갈등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그간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여성 할당제가 오히려 역차별 논란으로 번졌고, 남성의 군 의무복무와 그 효과에 대한 막연한 갈등 여지 등이 잔존해 있다. 이에 중첩되어 경제적으로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세대 간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또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공정’ 담론과도 맞물려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강조된 ‘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을 저버린 다양한 사건들, 조국 사건을 비롯하여 부동산 폭등과 부동산 투기 과열 등등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과 불공정에 대한 누적된 불만 등등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 폭발 직전에 있다.   난민 문제는 눈에 보이는 사건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등장하였다면, 그간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누적되어온 갈등의 요소들은 특정한 세력 혹은 집단을 ‘타자’화하면서 극단적인 배제의 시도로 치닫고 있다. 그러한 갈등과 배제 현상 속에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이 교차하고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반면에 그것을 해결해야 할 정치는 ‘실종’ 상태에 있다.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정치의 자리에는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자리 잡고 있으면서 사회 갈등은 마치 정글과 같은 적자생존의 논리만이 남아 있는 양상을 띠고 있다. 따라서 정글과 같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경쟁자를 배제하는 방식이고 그것이 ‘타자화’의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III. 누가 타자였는가? 한국사회에서 타자를 구성하는 방식과 그 역사   해방 이후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남한의 자체의 국가 정체성 및 국민 정체성을 형성시켜 왔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국민국가의 형성의 과정은 일제의 잔재 위에 국가의 건설과정과 더불어 북한의 ‘인민’과 분리되는 남한의 ‘국민’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1945년의 해방과 뒤이은 48년의 정부 수립과 함께 성립된 제1공화국에서 ‘국민만들기’의 작동적 원칙이 된 것은 ‘반공주의’였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냉전이 전 세계적 정치지형을 결정하였고,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에 해당하였다. 남북의 대치 상황은 반공주의와 반제국주의라는 틀 속에 갇혔고, 남한은 ‘빨갱이’이라는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그들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일종의 호모사케르로서 빨갱이는 한국사회 첫 번째 정치적 타자였다. ‘적’으로 상정된 빨갱이는 남한과 대치하고 있는 주적으로서 북한의 인민과 동일시되는 대상이었고, 그러기에 그들 역시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되었다. 단일한 남한의 ‘반공적 국민’에게 더 이상의 타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적과 아를 구분하는 기준은 ‘반공주의’였다.   이후 박정희에 의한 5.16 쿠데타 이후 등장한 정권은 기존의 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개발’이라는 국민국가 건설의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냈다. 그에 따라 경제개발의 주체로서 국민의 호명 역시 새로운 동학을 갖게 된다. 5.16 직전의 4.19가 이승만의 억압에 대항하여 ‘자유’를 추구하였지만, 동시에 대중에게는 ‘빵’이 필요하였다. 대중의 빈곤탈출의 욕망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세력에게 새로운 정당성을 확보할 계기로서 경제개발의 길로 유인될 수 있었다. 대중의 빈곤탈출의 욕망과 쿠데타 정당성의 확보가 결합하면서 1960년대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의 구호 아래 동원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타자 역시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경제개발주체로 호명되는 국민을 만드는 과정에서 강제적으로 동원되는 이들은 그간 사회의 주변인으로 존재해 왔던 부랑아들 혹은 폭력배들이었고, 그들을 조직적으로 감금하고 또한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방식을 통해 전국민을 경제개발의 주체로 포섭하고자 하였다. 박정희 집권 당시 반공주의는 여전한 원칙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반공과 경제개발 주체로서 국민을 호명하고 만들어내는 작업 그리고 그로부터 배제되는 ‘타자’들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극단적으로 배제되기까지 하였다.   1970년대 이후 민주 대 반민주의 노선은 분명하게 그어졌고, 1980년 5.18 광주를 거치면서 그것은 더 분명해졌다. 그 대립 구도에서 오히려 타자는 부차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1970년대 이래 민족주의는 박정희에 의해서든, 그와 대립하는 측에서도 전유해야 할 중요한 이데올로기였다. 서로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올바름을 선점하고자 하였고, 누가 더 민족주의적인가를 둘러싸고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해방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 민족 그리고 국민이라는 집단적 주체가 우선적으로 호명되고 그것에 포함되기 위한 동원의 시간이 존재하였다.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이들도 민족담론에 대한 거부감을 갖지 않았고, ‘민중’이라는 말을 통해 새로운 주체를 호명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민족적’ 민중이었다. 즉 남한은 장기적으로는 통일된 민족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민족적 민중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1980년대까지는 거대 주체의 시기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서서히 그간 잠재되어 있던 개인들이 깨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신세대의 이름으로 거대주체 이전에 개별적 주체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1990년대는 개인주의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사회적 존재들의 등장은 주목할만한 현상이었고, 그것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주체의 탄생이라는 점에서도 긍정적이었다. 1990년대의 새로운 세대들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소수자들이 이른바 ‘커밍 아웃’을 수행하였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우리 사회의 ‘타자’로서 등장한 것이다. 물론 새롭게 등장한 소수자들은 이미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해 왔지만, 인정되지도 않았고 인정받고자 하지 않았기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커밍아웃과 함께 그들은 존재자로 등장하였고, 그들의 존재에 대한 인정 여부가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개인들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개인성을 추구하는 모습이 등장하였며, 나아가 그동안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 속에서 공개적 장소에 등장하지 않았던 이들이 서서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애자들의 커밍 아웃은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장애인들은 이제 열린 사회 속에서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장애인 및 여성할당제, 대체복무제 등등 다양한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다양한 배려 및 포용정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상황 속에서 맞게 된 1997년 경제위기는 다른 한편으로 한국사회의 개인주의적 극단화를 가져왔다. 한국 사회가 그동안 가족, 직장, 국가라는 나름의 울타리를 통해 개인을 보호하는 형태를 취해 왔다면, 1997년 경제위기는 그 무엇도 개인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세계화를 통해 국외로부터 새로운 타자, 즉 외국인 노동자 등 이주민의 입국을 허용하였고, 또한 한국 사회는 이러한 이방인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이방인의 숫자는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있다. 그들은 외모는 물론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들을 보이면서 우리의 주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한국사회의 새로운 타자로 등장하고 있다.   결국 누가 ‘국민’을 구성하는가? 좀 더 나아가 ‘국민’으로 구성되는 원초적 인민은 누구인가?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차분히 답해야 한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당연시되어 왔던 반공주의적이고 경제개발주체로서 국민,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게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유를 품고 있었던 국민이라는 경계가 이제 무너지지 시작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는 집단들이 출현하고, 그에 따른 극단적인 대결이 증폭되고 있다. 그것을 가속화하고 또한 대결의 양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상황 중의 하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이다. 어쩌면 그것들이 동시적으로 교착되면서 더 복잡하고 증폭된 양상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즉 세계적으로 1980년대 말 냉전의 종식과 신자유주의화 진행 그리고 한국에서의 민주화 이행 이후 1990년대 들어서 한국이 서서히 민주주의의 심화의 과정을 진행하고자 하면서 다양한 사회집단의 출현, 시민들의 개인적 욕망의 표출 등이 복잡적으로 엉키게 된 것이다. 또한, 자본과 노동의 세계화 속에서 외국인들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구성원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통합의 동력이어야 할 정치는 오히려 보이지 않고,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논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결국 다함께 살아가야 할 공존의 논리보다는 누군가를 억압하고 배제하면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논리만이 남아 있는 듯 하다.   IV.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민족주의의 시간이었다. 근대 초 전통적인 왕조 국가에서 근대적 국민국가로의 전환이 실패한 이후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해방과 국민국가 건설의 주체로서 민족 혹은 국민에 대한 호명이 민족주의를 통해 진행되어 왔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 오랫동안 민족주의가 우월한 나라였다. 그러한 민족주의의 시간 속에서 이방인들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한 회고적 반성과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 즉 새로운 타자들의 유입과 그에 따른 공존의 모색 때문이었다. ‘다문화주의’라는 말이 유행처럼 한국 사회를 떠돌았고, 다문화가정, ‘다문화’라는 수식어는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다문화주의 즉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을 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다문화주의’는 단지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서술적 묘사의 개념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문화적 정체성과 그 차이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규범적 이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배타성을 띤 호칭개념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다문화주의의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캐나다의 경우 일종의 모자이크 사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각자의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받고 동시에 그들이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구성해 내는 방식이다.   한국 사회가 1990년대를 거치고 한일월드컵 응원전에서 보여준 나름의 ‘열린’ 민족주의라는 것을 통해 개방적이고 가능한 배타적이지 않은 민족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평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들, 그리고 최근의 예멘 난민사태가 보여준 극단적 혐오감의 표현들, 물론 그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배타적 감정표현의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볼 때, 한국이 과거의 강한 민족주의적 특성이 기이한 방식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짐작게 한다. 신자유주의의 급속한 유입을 통해 개인주의적 특성이 강화되고, 세계화 속에서 충분히 세계시민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박정희 시기 경제개발주체로서 국민이 세계 시민으로서 경제적 동물의 극단적 형태로 변형된 것은 아닌가 자문해야 한다.   즉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규범적으로 지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것이 새롭게 전화되거나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새로운 통합의 이데올로기를 찾지 못한 가운데서 부유(浮遊)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규범적 가치로서 받아들였던 다문화주의가 이미 그 한계를 보였고, 국민들의 거부감까지 표현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호출될 수는 없어 보인다. 2010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새로운 방향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2001년 9.11 이후 미국이나 캐나다의 모자이크적 통합모델에 대비되어 주목받았던 프랑스의 공화주의 모델, 즉 용광로 모델 역시 201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보여졌던 다양한 갈등 상황에서 그 한계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공화주의, 특히 유럽연합의 정치적 통합 강화과정에서 하버마스 등이 제시한 입헌적 공화주의는 기존 국민국가 시대의 민족주의의 문화적 요소를 정체성의 원칙으로 강조하던 것과 달리 정치적 원칙에 대한 합의에 기반한 정체성의 형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프랑스의 공화주의가 보여주는 모습은 공화주의가 강조하는 정치적 원칙, 특히 라이시테(laï̈cité -세속화의 프랑스적 원칙) 원칙의 경우, 오히려 구체적인 적용에서 무슬림들을 배제, 억압하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6] 즉 일정한 보편성을 추구하는 정치적 원칙마저도 서구중심주의적이거나 문화적 배경을 완전히 사상(捨象)한 채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화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그것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요건이자 동시에 공동체의 구성원이 지녀야 할 공동체에 대한 의무 그리고 나아가 권리 등을 포괄하는 원칙으로서 중요한 위상을 갖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화된 세계화 현상, 즉 자본, 노동, 상품의 끊임없는 이동은 그간 철벽과 같았던 국민국가 시대의 국경을 차츰 허무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민국가 시대에 통합의 이데올로기로서 유효했던 공화주의가 일정한 한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실이다. 세계화 속에서 국경이 희미해지고 국가권력이 미치는 한계가 뚜렷하고, 또한 국경을 넘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국민국가 시대와 같은 공화주의적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이 어쩌면 과도한 요구일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유효한 국민국가라는 공동체가 유지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 것 역시 필요한 몫이다. 그러한 점에서 구성원과 공동체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균형점을 찾기 위한 원칙을 우선 확립할 필요가 있다.   첫째, 가장 먼저 인정되어야 할 것은 그들의 존재 자체와 그들의 주체성이다. 그들의 통합과 배제의 대상이기 전에 사회적 존재이며, 주체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에 의해 인정받고자 하는 존재이기 전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인간으로서 존재라는 점이다. 그가 어디에서 왔건, 어떤 피부색을 가졌든, 어떠한 취향을 가졌든, 그것은 그 개인의 주체성의 문제이며, 자유주의적으로 그것이 공동체와 타인에 대해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용인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주체이자 동시에 타자이다. 19세기 말 짐멜은 이방인들이란 우리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나 다양한 ‘내부의 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단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였다(G. Simmel 2005, 79-80). 또한,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법정의 용어에 낯선 이방인이었고, 오이디스푸스가 낯선 땅에 갔을 때, 그 역시 이방인이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 역시 오이디푸스에 대해 이방인이 될 수 있듯이, 우리는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언제든지 타인이 될 수 있기에, 우리 모두는 모두에 대한 타인인 것이다(J. Derrida 2004). 물론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이방인은 어느 순간 타자화함으로써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억압하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만들어야 할 공동체는 모두가 타인인 그 상황에서 모두가 주체가 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근대의 합리적 개인이라는 거대 주체 이후 다양한 주체들의 출현과 그 무한한 잠재적 출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주체들에 의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두 번째 원칙은 다양한 주체들의 공동체가 연결되는 연대의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공동체 내에서 ‘타자화’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료 시민으로서의 연대가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의 유입 이후, 특히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개인의 경쟁력 강화를 통한 각자도생 그리고 국가 및 사회의 부재의 현실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오랜 동안 경제발전 그리고 민주화라는 목표 속에서 동원되거나 호명되었던 거대주체로서 민족 혹은 국민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경쟁적 개인 주체가 자리 잡은 것이다. 개인들은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잉여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경쟁자들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속물적 근성’을 키울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주류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은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사회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그 경제위기 이전에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위해 국민적 연대를 형성하였던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국민적 연대가 민주화 이후 개인성이 확장된 사회 속에서 그러한 개인의 주체성이 실현될 수 있는 계기로 새롭게 구성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에 적합하게 새롭게 구성된 연대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 이렇게 흩어진 개인 주체들을 끌어모으고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게 할 연대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연대의 이데올로기는 기존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같이 다시 내부의 끈을 강화하면서 외부의 장벽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상황에 맞게 세계시민적 의무와 우리 공동체의 의무를 동시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첫 번째로 지적했던 개인의 주체성에 기반한 때라서 그들의 주체성을 획일화하지 않는 방향 속에서 개인들의 연대가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과제를 연결 짓는 결국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 사이의 접점을 마련하기 위한 일종의 새로운 사회계약의 필요성이다. 근대적 국민국가 시기의 국민적 정체성은 국가에 의한 민족주의적 호명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것은 동시에 국민적 주체의 형성과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체성의 부여보다는 스스로 정체성을 구성해내는 주체화 과정(subjectivation)이 필요하며, 그것이 개인 자유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고 국가는 그러한 개인들의 자유 실현 조건을 제공하면서 또한 그 과정을 통해 공동체의 가치를 구성해 나가야 한다. 개인들의 주체성이 실현되는 공동체 내에서이며, 결국 개인의 주체성의 실현의 공동체의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뒤르카임이 말했듯이, 국가라는 이름의 공동체는 구성원, 즉 국민의 집단적 의식이 표상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의 담지자로서 개인은 국가라는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위치 지워져야 한다. 시민의 권리가 국가 권력의 인정 하에서 실현되듯이, 시민은 국가라는 공동체에서 시민으로서의 의무의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 이때 의무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며 또한 공동체의 동료에 대한 의무이다. 공화주의의 강한 요구로서 개인적 이익을 희생하면서 공익을 요구하기는 현대 사회에서 쉽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개인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이 수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실현될 때 최대화될 수 있는 구조이다. 그러한 구조가 현실화될 때,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덕목이 동시에 확장될 수 있다.   최근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정치 영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포퓰리즘이다. 인기영합주의 혹은 대중추수주의라고 번역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포퓰리즘 현상은 정치권이 표를 얻기 위해 무분별한 예산 낭비나 무계획적인 예산지출을 행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또 다른 의미에서는 대중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의 방식일 수 있다. 기존의 대표자들에 대한 불신 속에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려는 욕구가 분출되면서 등장한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가속되는 상황에서 경쟁으로 몰리는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에 대한 즉각적인 요구를 분출하고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그것은 인기영합주의적 정치를 가져오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특정한 집단에 대한 타자화 과정 –‘공공의 적’으로 만들거나 희생양으로 만드는 방식– 을 진행함으로써 포퓰리즘은 억압적 정치의 도구가 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 포퓰리즘은 근대정치의 한계, 특히나 대표에 의한 정치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 현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히려 근대정치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대표를 통한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 대중들의 주체화의 계기로 만들 때 가능하다. 또한 그것을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적 인민적 주체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신자유주의화 이후 실종된 정치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선 포퓰리즘적인 대중 정치의 출현은 정치가 새롭게 갱신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난 2016년 겨울 촛불 시위에서의 시민들이 “정치에 냉소적이긴 하지만 결코 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던” 탓에 보여주었던 민주주의의 확장의 가능성이기도 하다(이지호 2017, 7). 격화된 경쟁 사회를 연대의 사회의 만들고, 경쟁력을 갖춘 개인들을 만들어내기도 보다는 공동체의 시민으로 개인들을 성숙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은 정치의 자리를 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통합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 다양한 존재들의 공존을 모색하는 노력을 시도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참고문헌 김나미. 2018. “‘여성인권’의 이름으로 맺는 ‘위험한 연대’: 예멘 난민 수용반대 청원과 이슬라모포비아”. 『제3시대』. vol. 134. 김현미. 2018. “난민 포비아와 한국 정치적 정동의 시간성”. 『황해문화』. 101호. 김현미. 2020. “어떻게 국민은 난민을 인종화하는가?” 『난민, 난민화되는 삶』. 서울: 갈무리. 육주원. 2016. “반다문화 담론의 타자만들기를 통해 본 다문화-반다문화 담론의 협력적 경쟁관계”. 『한국사회학』. 50(4). 이승현. 2016. “유럽의 시리아 난민유입과 독일의 노동정책”. 『국제노동브리프』. 14(3). 이지호. 이현우. 서복경. 2017. 『탄핵 광장의 안과 밖』. 서울: 책담. 전의령. 2020. “타자의 본질화 안에서의 우연한 연대: 한국의 반다문화와 난민 반대의 젠더정치”. 『경제와 사회』. 3. 정인섭. 2009. “한국에서의 난민수용 실행”. 『서울국제법연구』. 16(1). 정혜실. 2018. “우리 안의 인종주의: 자칭 ”래디칼 페미니스트들“과 보수개신교 혐오 세력은어떻게 ‘난민반대’의 한 목소리를 내게 되었는가?”. 『여/성이론』. 39호. 주원. 2019. “인종, 젠더, 교차적 페미니즘”. 『경계없는 페미니즘』. 서울: 와온. Butler, J. 2016. 『혐오 발언』. 유민석 역. 서울: 알렙. Derrida. J. 2004. 『환대에 대하여』. 남수인 역. 서울: 동문선. Simmel, G. 2005.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김덕영, 유미애 역. 서울: 새물결. Yuval-David, Nira. 2012. 『젠더와 민족』. 박혜란 역. 서울: 그린비.     [1] ‘혐오 발언’ 역시 우리가 주체화되는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의 일부분이다(J. Butler 2016, 61). [2] 물론 이전 한국에서 난민수용과 관련한 경험은 1975년 베트남 패망 이후 10여년 이상 유입된 베트남의 보트피플이다. 1975년 당시 한국군과 함께 철수한 1,335명과 한국 화물선이 베트남 인근해상에서 구조한 216명의 난민이 부산임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이 중 한국 남성과 결혼하여 국적을 받은 경우를 제외한 977명이 국외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보트피플이 1977년부터 유입되었고, 부산시 동래구에 설치된 <월남난민구호소>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단 한명도 정착이 허용되지 않았고, 베트남인들에게도 한국은 정착하고 싶지 않은 나라였다(정인섭 2009, 204). [3]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 통계월보> 2020 참조. [4] “예멘 난민 인도적 체류 허가 소송 ‘신청권리 없다’ 각하 판결”. <문화일보> 2021. 9. 2. [5] 마치 일제 식민지 시기 조국을 여성 혹은 누이에 비유하면서 그들을 보호해야 할 남성 가부장적 논리를 내세우는 것과 동일하다. [6] 특히 최근 극우민족주의 정당인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은 기존 인종주의적 경향의 극우에서 서서히 온건화된 모습, 흔히들 말하는 탈악마화 전략을 선택하면서 프랑스의 공화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공화주의가 비록 정치적 원칙에 기반하고 있지만, 충분히 배타적 이데올로기, 일종의 ‘민족적’ 공화주의를 강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 저자: 홍태영_국방대학교 안전보장대학원 교수.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미국 워싱턴대학교 방문학자 등을 역임하였고, 2021/2022년 한국정치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가안보, 정치사상, 한국정치, 유럽정치다. 최근 저서로서 《국민국가를 넘어서, 논문으로 “민족주의적 통치성과 국민만들기”, “프랑스 공화국과 공화주의의 탄생”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하은_EAI 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8) | hyoon@eai.or.kr  

홍태영 2022-03-16조회 : 1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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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워킹페이퍼] 자유주의 시리즈 ③_ 자유주의와 사회통합

I. 문제제기   한국 사회에서 사회통합은 중요한 사회적 과제이다. 사회통합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건—사회통합은 매우 다양한 의미와 측면을 갖고 있다—사회통합은 한국 사회의 현 단계 발전에서 일종의 병목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발전의 측면에서 보면 사회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인당 GDP의 27%, 연간 최대 총액이 246조원에 이른다는 연구 보고(삼성경제연구소 2019)가 있는가 하면, 사회발전의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행복 수준이 경제발전 즉 GDP 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주된 요인이 행복의 사회적 기초 즉 사회적 지지, 자유로운 삶의 결정, 부패인식, 타인에 대한 자비 등이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World Happiness Report, 2019). 한국의 신뢰 수준 특히 낯선 사람에 대한 일반화된 신뢰와 공공제도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은 2000년대 들어 지속되어온 현상이다. 사회통합이 한국의 사회, 경제, 정치 발전의 걸림돌이라는 인식은 보편화되어 있고, 역대 정부마다 사회통합 혹은 국민통합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어 사회통합을 위한 정책 방안을 모색하고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회통합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사회통합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과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통합에 뚜렷한 향상이 일어나지 못하는 배경으로 그 사상적 기초에 대한 논의와 고민의 부족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회통합은 대체로 사회학과 정치학, 사회복지학 등의 분야에서 주로 다루는 문제이자 주제이다. 이들 중에서도 사회학이 사회통합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들이 많다. 사회학에서 사회통합과 관련해서 중요한 개념들은 시민사회, 사회적 소통과 갈등, 사회적 자본, 가치와 규범 등이다. 시민사회는 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고 갈등이 발생하는 동시에 해결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는 무대이다. 사회적 자본은 시민사회에 축적된 사회관계와 자발적 결사, 사회적 신뢰로 구성된 문제해결을 위한 자원이다. 사회통합이 약해진 원인을 찾고 사회통합 수준을 높일 방안을 찾으려는 사회학 연구들에서 주로 의존해온 이론적 자원은 주로 체계이론, 의사소통이론, 네트워크 이론, 행위이론, 구조화 이론 등의 사회이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이론들은 설명을 위한 프레임워크는 될 수 있으나 심층적 진단과 처방을 위한 기초가 되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   사회통합의 현재 수준을 진단하고 사회통합 수준을 높이기 위한 처방을 내리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정치, 사회 사상적 기초이다. 사회통합의 개념적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사회통합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사회통합은 왜 필요한가 등 근본적인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논리적 전제조건을 찾고자 한다면 사상적 탐색과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이론적, 정책적 논의라도 그 사상적 바탕과 기초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현재 사회통합이라는 주제에서 왜 사상적 기초를 점검할 필요가 있는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 사회들에서는 사회를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그리고 이처럼 대립되는 입장과 관점에 따라 사회통합이 필요한지 아닌지, 사회통합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등에서 엄청난 생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어떤 입장에서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통합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아무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주제와 대상이 아니라 논의를 통해서 합의를 만들어가야 하는 주제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한국에서 최근 사회통합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게 부각된 쟁점이 공정성이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공격이 각종 사회정책이나 의사결정에 대해 쏟아졌다. 불공정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정치인들은 꼼짝없이 죄인이 되었으며, 정책이나 프로그램도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면 집행이나 진행이 중단된 채 논란이 끝나기를 기다리거나 수정 혹은 폐기될 운명에 처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공정을 둘러싼 논란과 시비에서 안타까운 문제의 하나는 사람들에 따라 공정의 의미나 기준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경험적 연구를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사례만으로 살펴보면 공정을 주장하는 상당수의 사람 특히 청년들에게 공정은 능력주의(meritocracy)에 입각한 자격(credential)의 인정이다(Sandel 2020). 요컨대 게임의 규칙을 잘 지키고 특히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이가 제대로 반영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입장의 사람들에게 공정은 약자에게 기회를 줌으로써 출발선에서의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다(Rawls 1972). 만약 이러한 두 입장이 맞붙는다면 서로를 불공정이라고 비판할 것이고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사회통합과 관련해서 정치, 사회사상의 기초를 따져본다고 할 때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이 글에서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자유주의 주변의 다양한 입장들의 차이를 검토해 보고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상적 입장을 중심으로 사회통합을 위한 논의와 합의가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할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왜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사회통합을 논의하는가에 대해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뒤에서 더 자세하게 제시하겠지만 논의의 출발을 위해 이유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은 지난 20여 년간 빠르게 개인화의 방향으로 가치와 규범의 변화를 경험하고 사회적 관계도 바뀌어 왔다. 그 결과 과거 20세기 한국 사회의 문화적 문법(정수복 2007)으로 작용해 왔던 유교적 집단주의라는 마음의 습속(habits of the heart)은 상당한 정도로 약해졌다고 판단된다. 서구에서는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자유주의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의 중심이 되었다가 공동체주의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면 한국의 경우는 그 반대로 오랫동안 공동체주의가 당연한 사고와 판단의 기존 역할을 하다가 그 지위를 도전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대안이 자유주의여야 하는가?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그동안 제대로 온전히 이해되거나 수용되어서 적용된 적이 많지 않다.   아주 짧게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운명의 변천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한말과 일본 강점기 즉 근대 초기에 자유주의는 주로 사회진화론과 같은 문명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후 냉전 하에서 자유주의는 공산주의 대 자유민주주의라는 양분 구도 속에서 공산주의가 아닌 모든 것, 즉 권위주의까지 포함하는 넓은 범위를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자유란 공산의 반대말로서만 즉 부정적 의미에서만 이해되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유의 의미를 찾는 것은 오히려 불온한 일이 되었다. 민주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면서 권위주의와 얽힌 자유의 오명이 씻어질 기회가 생겼지만, 정치적 대립의 심화 속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양극화된 논쟁 지형에서 자유는 중도에서 흔들리는 불안정하고 모호하며 때로는 불온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민주화 진영에게도 보수 진영에게도 자유주의는 신뢰하기 어려운 심지어 때로는 기회주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견인과 포섭의 대상일 뿐 견고한 동지적 연합의 대상일 수 없었다. 21세기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경제적 시련에 맞닥뜨린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는 그간 한국 정치, 경제, 사회에 쌓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인 양 기대와 두려움을 받으며 전격적으로 도입되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경제 영역에서 자유주의의 한 변종, 그중에서도 다분히 극단화된 변종일 뿐 자유주의 자체라고 할 수는 없다. 최근 청년층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역시 신자유주의 영향이 사회적으로 확산된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자유주의 자체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수용과 상호작용은 오명과 오해로 점철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제 자유주의를 제대로 그 실체를 파악하고, 한국 사회에서 사회통합이라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가능성과 한계를 차분히 논의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 소극적으로 생각하자면 그간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던 자유주의에게 제대로 기회를 한번 줘보자는 것이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개인화되고 양극단으로 치닫는 분열된 사회에서 중심을 잡고 양극단이 더 멀어지지 못하게 붙잡으려면 자유주의가 강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적극적으로 자유주의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자유주의는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서 모습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자유주의를 몸에 익히는 훈련도 필요하다. 자유주의를 제대로 실천하려면 대단한 균형 감각과 함께 다양한 상황과 요인들을 고려하는 폭넓은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사회통합의 중요한 구성요소 혹은 측면들에 걸쳐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 간의 비교 검토와 함께 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찾아보고자 한다.   II. 사회통합의 의미와 자유주의   사회통합은 영어로 분열된 것을 합친다는 의미(social integration)와 서로 모래알처럼 흩어진 것들을 뭉친다는 의미(social coherence)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의미로 사회통합을 사용할 경우에는 남북통일처럼 정치적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것,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쓰는 집단들이 주류 집단에 동화되는 것 등을 연상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 사회통합은 다분히 일체감을 강조하는 집중의 측면이 강조된다. 또 전자의 의미로 사회통합을 이해하면 20세기 중반 사회학 이론에서 논의되었던 체계통합과 사회통합의 구분도 언급된다. 체계통합이 기능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역기능이 최소화되어서 사회체계가 원활하게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회통합은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의 가치와 규범에 동의하고 이를 중심으로 사회적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도 사회 구성원들이 대단히 순응적일 것을 기대하는 보수주의적 편향이 사회통합에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 전자의 의미로 이해된 사회통합은 사회적 갈등이나 일탈에 대해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미리 단정해버릴 우려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로 사회통합을 의미를 해석하면 사회는 다원적이고 다양하다고 가정하게 된다. 이러한 다원적이고 다양한 사회의 집단과 개인들이 단일한 공통의 가치와 규범, 생활양식 등으로 통합(integrate)될 필요 없이 서로의 권리와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질서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두 번째 의미의 사회통합에 가까운 모습이다. 두 번째 의미의 사회통합에 포함된 또 하나의 측면은 사회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통해 사회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사적 영역에만 몰입하게 되면 사회는 모래알처럼 흩어진 모습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사회적 협동이나 유대(solidarity) 역시 약해지거나 사라질 것이다. 이 경우 자연과학의 비유를 빌리자면 엔트로피가 증가한 결과 사회의 원심력이 강하게 작용해서 무질서 혹은 분산상태에 빠지고 더 이상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할 구심력은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려면 서로에 대한 혹은 공유하는 것에 대한 애착과 친밀성이 발휘될 필요가 있다.   위의 두 가지 의미의 사회통합 모두 사회학에서는 중요한 사회의 측면이다. 전자의 측면이 강조되었던 것은 20세기 전반에서 중반까지이며, 이 시기에 중요한 사회이론의 기초는 탈콧 파슨즈(Talcott Parsons)의 구조기능주의 혹은 규범적 기능주의 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회를 통합하는 것은 한편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부분 간의 기능적 정합성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을 사회화시키고 통제하는 가치와 규범의 작동이다. 구조기능주의가 사회이론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기에 데이빗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1950),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윌리엄 화이트의 “조직인”(1956) 등 집단에 순종하며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린 대중사회에 대한 비판이 등장했다. 이러한 반응들은 곧 전자의 의미를 갖는 사회통합이 사회의 다원화와 복잡화에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1960년대 신사회운동과 청년들의 저항을 거치면서 전자 의미의 사회통합은 미국에서는 중요성이 약해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회통합에 대한 강조는 권위주의 시기에 사회에 대한 저항이나 일탈에 대해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첫 번째 의미에서의 사회통합은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대립 구도에서 볼 때 자유주의보다는 공동체주의에 더 가깝다. 공동체가 가진 공동체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에 비해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이 우선시된다. 공동체주의에서는 사회통합이 공동체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필수적이면서 동시에 당연한 것이다. 공동체주의 관점에서 사회통합이 성원들의 사회화와 규범, 규칙의 준수, 공동체 의식에 기반한 결속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회의 분열, 혼란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처방은 공동체 가치의 내면화를 위한 교육과 규범적 통제의 강화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다문화적 상황도 동화의 입장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게 된다. 소수자 집단이 전체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 살아가려면 전체 사회의 가치와 규범, 생활양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에서는 공동체적 가치와 규범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우선시되기 때문에 첫 번째 의미의 사회통합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 입장에서 사회통합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각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존과 공생의 상태 즉 두 번째 의미에서의 사회통합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혼란과 분열에 대한 자유주의의 처방은 서로 상충하거나 상쟁하는 권리와 자유의 조정과 다양한 가치와 주장의 관용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변화 중 사회통합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큰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글로벌화에 따른 인구의 이동이 늘어나면서 모든 사회마다 인종 다양성이 높아지고 있다. 디지털화의 결과로 온라인과 모바일에서의 사회적 교류와 관계가 폭증하고 있으며, 팬데믹에 의해 더 강화되기도 했지만,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 상호작용이 늘어나고 있다. 교육수준 향상과 물질적 풍요의 결과 사람들의 가치가 탈물질주의화 되면서 가치와 정체성의 다양성이 높아진다. 전 세계적으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경제적,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적 고립 증가는 공동체주의의 기반이 되는 사회적 소속감과 결속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사회적 분열과 갈등, 가치의 혼란과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특히 고용관계 등 사회적 관계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바뀌면서 삶은 점점 더 덧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에 덧붙여 한국에서는 IMF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으로 경제, 사회구조와 문화가 전반적으로 바뀌면서 개인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이제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한국을 특징지어 왔던 이웃간, 동료간 정겨운 관계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문화적으로는 해체이론을 기초로 한 포스트모던 이론, 사회, 경제적으로는 구성적 네트워크 이론에 의해 잘 설명이 된다. 의미와 관계가 모두 지속적인 재편의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리처드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상실』(1998),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 (1999), 울리히 벡의 『위험 사회』(1986), 스콧 래시와 존 어리의 『조직 자본주의의 종말』(1988),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의 『나홀로 볼링』”(1995) 등이다. 이른바 유동성과 유연성이 지배하고, 다양성과 다원주의가 일반화된 상황에서는 사회로의 구심력을 발휘할 필요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두 번째 의미에서의 사회통합 필요성은 높이되, 그동안 강조되었던 공동체주의에서 출발한 첫 번째 의미에서의 사회통합을 전제로 한 처방이나 대책의 현실적 적합성을 낮추고 있다. 결국, 위에서 살펴본 최근 사회 변화의 흐름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분열과 혼란을 줄이고 다수가 공존하며 공생할 수 있는 두 번째 의미에서의 사회통합 방안에 대한 모색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자유주의적 입장에서의 사회통합에 대한 적극적 대응과 고민을 의미한다.   III. 권리의 정치와 사회통합   공동체주의는 가치와 도덕에 입각한 책임과 의무를,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최우선으로 내세운다는 일반적 견해를 넘어 권리의 문제를 보다 폭넓은 맥락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가 권리와 자유의 남용을 가져와 사회를 혼란으로 이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에서 권리와 자유는 무조건적인 자유나 권리가 아니며,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해서도 안 된다. 자유주의의 고전적 입장을 대변하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나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되, 타인에 의해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와 자유를 더욱 강조했다(서병훈 2020).   그렇다면 권리는 무엇에 의해 제약당하게 되는가? 이 글에서는 크게 두 측면에서 권리 주장에 대한 제약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국가에 의한 권리의 인정과 보호이며, 또 하나는 시민들 권리의 상호 인정이다.   먼저 국가에 의한 권리의 인정과 보호를 살펴보자. 법학자인 스티븐 홈즈(Stephen Holmes)와 캐스 선스타인(Cass Sunstein)은 『권리의 대가』(Holms and Sunstein 2012)에서 권리가 절대적이지 못하며, 권리는 법적이고 제도적으로 보호되어야 실효성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이때 법적이고 제도적으로 보호된다는 것은 결국 국가 재정을 투입해서 개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국가가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자원 즉 재원이 부족하면 개인의 권리는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려면 이를 실효성 있게 보호할 자원도 함께 확보해야만 한다. 국가 재정 규모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희소한 자원인 국가 재정을 상충되는 권리 요구 중 어느 권리의 보호에 투입할 것인가이다. 권리의 주장은 개인의 권리에서 출발하지만, 종결점은 국가의 공적 인정과 보호이다.   권리가 국가의 재정을 투입해서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이 되려면 보편적이어야 한다. 만약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권리가 속하는 것이 되면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이익이며 특권이 된다. 따라서 국가는 권리가 특권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국민의 다수가 권리의 인정을 원하고 요구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면 국가는 이를 침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자유주의의 원리이다. 만약 국가가 이러한 원칙을 위반하고 다수의 요구에 밀려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면 그것은 대중의 독재이며, 또한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으로 전락하게 된다.   권리 주장에 대한 둘째 제약 조건은 시민들이 각자의 권리가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함으로써 상대방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권리 그중에서도 시민권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이면에는 시민사회가 다양한 집단에 대해 시민권을 확대해서 적용해온 과정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1960년대 흑인들이 시민권 운동을 통해 시민권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것은 과거 시민권을 인정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요구와 집단행동을 다른 시민들이 수용한 결과이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Honneth 2011)에서 인정투쟁이 시민권의 확대를 가져온 과정을 이론적,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사회학자인 제임스 콜맨은 “『사회이론의 기초』(1998)에서 시민들이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는 과정을 교섭과 협상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Coleman 1998).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권리를 그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권리를 인정할 권리 즉 권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서로 협상과 교섭을 벌인다고 보았다. 그 예로 대표적인 것이 담배를 피울 권리와 담배 피는 것을 허용할 권리이다. 콜맨에 따르면 사람들은 당사자인 흡연자가 자신의 담배를 피울 권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흡연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건강과 환경권을 존중해서 자신의 담배 피울 권리를 인정할 권리를 지닌 사람들에게 반대급부를 제공하거나 아니면 특정한 조건에서만 피우겠다는 조건을 걸고 교섭과 협상을 하는 것이다.   권리에 대한 권리를 가진 다른 사람들의 승인을 얻으려면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이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다. 권리를 인정받으려면 라이너 포르스트(Rainer Forst)가 주장하는 정당화(justification)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Forst 2014). 권리를 인정받으려는 주체들의 권리 주장 정당화는 계속해서 오가기 때문에 일방적일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가 권리를 남발하거나 남용할 위험성이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못한 것이다. 권리와 자유의 남용으로 사회를 혼란으로 이끄는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이다. 자유지상주의는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보다는 자신의 권리 주장을 극대화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그 결과의 하나는 바로 갈등의 증가와 힘의 논리의 지배이다.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다수가 될 때 우리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포퓰리즘으로 나가게 될 우려가 높다는 것을 최근의 반복된 외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이를 방지할 힘은 권리의 상호성을 인정하는 자유주의에 있다.   IV. 정체성(젠더)의 정치와 자유주의   권리의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가 바로 정체성의 문제이다. 최근 들어 한국에서 제기되는 많은 권리 주장들 상당수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21세기 들어 가장 빠르게 논의와 갈등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이 정체성(identity)이다. 젠더(gender), 인종, 성적 지향과 같은 정체성 문제는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와 갈등의 핵심이 되고 있다. 정체성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정체성과 구별되는 차이(difference)이며 사회의 다양화와 복잡화가 수많은 차이를 낳는 과정에서 정체성도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 정체성이 중요해지는 반면 기존의 사회적 갈등을 주도했던 계급은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줄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정체성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부각되는 정체성으로는 젠더와 성적 지향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도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만큼 국내 거주 외국인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들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은 편이다. 반면 최근 들어 젠더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사회갈등의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또한, 성적 지향은 정치권의 기존 균열과 무관하게 양분시킨 차별금지법 쟁점과 연결되면서 한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갈등의 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정체성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한국 사회에서 젠더 문제와 관련하여 과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유교적 문화에 뿌리를 가진 가부장주의였다. 가부장주의는 여성에 대한 억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 핵심은 가족을 보호한다는 즉 가족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의 재생산과 안정에 필요한 출산과 돌봄 등의 역할을 여성이 전담하면서 여성에게는 불리한 지위가 부여되고 여성 억압적인 측면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부장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2000년대 초 신자유주의에 의한 한국 사회, 경제의 전면적 재편의 과정에서 거의 해체되다시피 했다. 한국의 경제발전 시기에 가부장제의 물질적 기반은 결국 가부장이 외벌이로 많은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이러한 가부장주의적 가족 내 성별 분업은 자녀에 대한 투자에도 반영되어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적 교육투자 및 기대를 낳기도 했다.   그런데 IMF 외환 위기 이후 이러한 가부장주의적 가족 내 성별 분업과 가족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가치와 인식이 급격하게 바뀌게 되었다. 우선 경제적 불안정, 특히 고용의 불안정이 일반화되면서 가부장 혼자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든 경우가 크게 늘어나게 되고 그에 따라 ‘고개 숙인 아버지’, ‘가족의 해체’ 등과 같은 표현들이 한국의 가족에 대해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가족의 경제적, 물질적 조건의 변화는 신자유주의만이 아니라 인구적 변화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다. 새로 가족을 형성해야 할 청년층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부모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매우 어려워지면서 가족 형성의 지체가 나타난 것이다. 결혼율이 낮아지고 출산율도 그에 따라 크게 낮아지게 되었다. 출생하는 자녀의 수가 급격하게 줄면서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적 교육투자와 기대 역시 바뀌어서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높은 교육열이 등장했다. 그 결과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여성의 비판적 사고능력이 높아지면서 가부장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여성들 사이에서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 즉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 체제의 재편,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가족형성의 지체, 여성의 고학력화와 가부장주의에 대한 비판 증가 등은 모두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가족의 가치와 규범을 강조해왔던 가부장주의가 존립할 수 있는 여건이 급격히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가족의 가치와 가족이라는 단위가 한국 사회에서 젠더 문제를 바라보는 공동체주의의 가장 중요한 근거이자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처럼 작용했던 공동체주의의 중요한 축인 가족과 가족 가치가 위협받게 됨으로써 젠더 문제에서 공동체주의의 입장은 매우 약해지게 된 것이다. 반면 가족의 약화와 함께 사회의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개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게 되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1인 가구의 비중이 전체 가구의 30%를 넘어서게 되었고 그중에서 청년층의 비중은 절반을 넘는다. 그 결과 최근 가족 관련된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족을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은 이제 생계를 함께 하는 경제적, 가계를 잇는다는 재생산적, 성적 욕구를 충족한다는 성적 측면보다 근원의 정서적 만족을 제공한다는 측면이 가장 부각되게 되었다(보사연 2020).   가족주의적 입장이 약화되는 것과 함께 주목되는 사실은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권리에 대한 관심과 주장이 빠르게 늘어나는 점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매년 실시하는 <국가인권실태조사>의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20~30대 여성의 비율은 같은 연령대 남성에 비해서도, 다른 연령대의 여성에 비해서도 매우 높아서 전체 평균의 3~4배에 이른다(국가인권위원회 2020). 이러한 사실은 앞서 설명한 가족으로부터 독립한 개인 중에서 젊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성차별에 대해 매우 민감해지고, 혼자 생활하면서 젠더 관련된 안전의 문제가 부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권리에 대한 관심과 주장은 한편에서는 의식적 자각의 결과이지만, 현실적 조건에서의 변화가 가져온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에서 공동체주의의 입장이 약화된 반면 자유주의의 권리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과 아울러 주목할 점이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는 정체성 지상주의 혹은 정체성 집단주의의 영향력과 그 내용이다. 자유주의의가 젠더 문제를 포함한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입장은 서로 다른 조건과 배경을 지닌 각자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려면 서로 간의 차이와 함께 각자의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기반해서,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소수자 권리 주장 및 차별 반대 확산을 정체성의 인정(recognition)과 포용, 평등권의 입장에서 수용하는 것이다. 요컨대 서로 다르지만 이러한 차이를 용인하고 포용하는 관용(tolerance)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용에서 제일 중요한 점은 무조건 관용하고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역시 권리의 주체임을 인정하고 그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공존할 수 있는 근거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정체성 정치와 관련한 주장들 중 일부에서 정체성 집단주의라고 볼 수 있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정체성 집단주의의 구체적인 예로는 정체성에 대한 강조가 지나쳐 정체성 집단 내부에서 이견을 억압하는 문제가 나타나기도 하고, 또한 정체성의 경계에 있는 개인들에 대한 배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은 각자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지만, 정체성 그 자체는 권리의 주체가 아니다. 정체성은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구분하는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최근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정체성이 마치 하나의 권리 주체인 것처럼 뒤바뀌어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정체성에 속한 개인 중 다른 의견을 억압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 다른 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고 자신만을 내세운다면 권리는 특권으로 변질되어 버릴 것이다. 또한, 후자의 경우에 권리의 주체인 개인을 정체성의 이름으로 압박한다면 권리는 사라지고 권력만이 남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일부 페미니즘의 배척, 그리고 급진적 페미니즘 내부에서의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체성 정치와 주장의 집단주의적 편향을 극복하는 방향은 소수자의 정체성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이 자유와 권리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할 자유와 권리의 주체는 우리 각자 개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체성이 불균형과 배제를 낳는 상황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논의를 통해 각자의 권리주장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충분한 협의와 합의를 시도하면서, 각자 개인이 아닌 정체성 집단 자체를 권리의 단위로 간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유주의 관점에서 정체성 정치에 수반되는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정체성이 또 다른 특권화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백진아. 2009. “한국의 가족 변화: 가부장성의 지속과 변동”. 현상과인식, 33(1·2), 204-224. 삼성경제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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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rrosion of Character: The Personal Consequences of Work in the New Capitalism. W.W.Norton & Company. Whyte, William H. 1956. The Organization Man. Simon & Schuster.     ■ 저자: 한준_EAI 미래혁신연구센터 소장,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미국 스탠포드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사회과학자료원 원장, 국민경제자문회의 민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삶의질학회 회장이다. 주요 논저로는 『4차 산업혁명, 일과 경영을 바꾸다』(2018), 『커넥트 파워: 초연결 세상은 비즈니스 판도를 어떻게 바꾸는가?』(2019)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Recognition in Art World as Social Process: The Case of Oscar and Daejong Film Awards(Korean Social Science Journal, 2017)”, “사회과학에서의 복잡계 연구: 창발과 적응 지형을 중심으로”(새물리, 2017), “문화예술교육의 가치 분석 연구”(2017), “평가 지표는 대학의 연구와 교육을 어떻게 바꾸는가: 사회학을 중심으로”(2017)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하은_EAI 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8) | hyoon@eai.or.kr  

한준 2022-03-16조회 : 16962
워킹페이퍼
[EAI 워킹페이퍼] 자유주의 시리즈 ②_ 사회적 자유주의와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 문제

I. 서론: 만인 평등사상인 자유주의와 그 구현 방안   국가 혹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자유를 누리는 일이 과연 가능한 걸까? 이상에 불과한 거라면,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그 이상에 근접할 방안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이 글에서는 적어도 한국의 경우에서는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방안일 거라고 주장한다.[1] 왜 그렇다는 것인지 그 논거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형성된 자유주의는 만인 평등사상에 의거한 시민혁명을 통해 절대군주제와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평등한 시민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한 진취적인 사회사상이었다(이근식 2009). 그런데 19세기에 들어 그 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자유시장주의로 변질되면서, 즉 자유주의란 곧 경제적 자유 지상주의인 것처럼 왜곡되면서 자유주의의 평등 지향적이며 역동적인 정신은 시장과 자본가들에 의해 결박되었다. 자유주의는 무기력해졌고, 그것은 그저 권력과 돈 많은 사람들을 더 이롭게 하는 수구 이념으로 전락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이 터무니없는 상황을 바로잡고자 자유주의의 진보성 회복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존 스튜어트 밀, 토머스 힐 그린, 레너드 홉하우스 등이 앞장섰던 ‘사회적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수정주의의 부상이 그것이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시대라고 불리던 19세기의 전 기간 동안 유럽 선진국들에서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국부는 엄청나게 늘었으나 빈부격차의 심화로 인해 노동자 등 시민의 대다수는 오히려 더욱 비참한 환경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사회적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시민 대다수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빈곤, 실업, 대자본가의 횡포, 공공재 부족 등과 같은 자본주의의 폐해인 세상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시장 개입이 필수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경제적 자유주의로 변질된 ‘고전적 자유주의’로부터 벗어나 사회적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독자적 자유주의 노선이 탄생한 것인데(Kloppenberg 1986), 그것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의 빈곤과 소외,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 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이념이었다. 이후 최소정부주의 혹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앞세우거나 수용하는 그 이전의 자유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 사회적 자유주의류의 사상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부르기도 했다.   사회적 자유주의의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인 J. S. 밀이 『자유론』에서 강조했던 그 유명한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를 서병훈의 번역문을 통해 상기해보자(밀 2013 177). “각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에 해를 주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칠 때 사회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각 개인의 자유는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을 때에만 허용된다는 것인데, 이근식은 이를 밀이 천명한 자유주의의 제 1원칙이라고 하였다(이근식 2011 38-39).   밀의 이 원칙은 자유는 만인 평등사상을 전제로 하는 가치임을 다시 한번 명확히 밝힌 것이다. 만인이 평등하게 중요하므로, 누구의 자유도 부당하게 침해 되서는 안 되는 것이며, 따라서 각 개인의 자유는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원칙대로라면, 과거 유럽에서 일반 시민들이 왕족과 귀족들이 전유했던 정치권력 혹은 정치권력 행사의 자유를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시민혁명을 통해 제한했듯이,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한 19세기에는 부자와 대기업 등 경제권력자들의 시장에서의 자유를 사회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규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젠 (과거 민주주의 이전 시대의 정치권력자와 비슷한 양상으로) 경제권력자의 무제한적인 권력 행사가 일반 시민들에게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사회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는 이제 경제권력자들의 자유를 민주적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 사회적 자유주의 사상은 널리 퍼져나갔고, 그 결과 적어도 구미 선진사회에서는 자유주의란 곧 사회적 자유주의를 의미하는 진보적 이념인 것으로 인식될 정도가 되었다. 영어 단어 리버럴(liberal)이 진보적인 혹은 진보주의자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자유주의는 그렇게 본래의 진보성을 회복해갔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그 진보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복지국가 혹은 수정 자본주의 체제가 선진 각국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상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주의는 어느 때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다른 때에는 경제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다. 경제적 자유를 외치던 고전적 자유주의가 사회적 자유를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그리고 심지어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로까지 발전해가는 까닭이다. 강조점은 이처럼 시의에 따라 적절히 달라지나,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늘 동일하다.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자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의 자유 수호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지상과제이다. 이 자유를 훼손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집단이나 조직의 권력은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제한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 권력은 정부일 수도 있고, 대기업이나 언론, 혹은 종교 집단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가 그리도 중시하는 만인의 평등한 자유는 무엇으로 수호하는가? 사회적 자유주의는 일반 시민들의 가난과 불안,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는데, 과연 그 사회적 자유를 이를테면 경제권력자로부터 보호할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유 수호의 구체적 기제에 대한 질문이다.   II. 사회적 자유주의의 방법론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활성화   상기한 바와 같이, 자유주의의 형성기부터 그 주창자들은 자유 수호의 제도적 기제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꼽았다. 즉 모든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전제로 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의해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결정한 법, 제도, 정책 등에 따라 그 범위 내에서 국가가 시장경제에 개입하고 조정함으로써 사회정의와 사회평화를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민주국가 혹은 민주사회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요컨대, 사회적 자유주의의 방법론은 민주주의 확대론 그 자체이다. 자유 시민을 부당하게 옥죌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권력에 대하여 민주적 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결국 민주 정치의 운영을 통해 강자와 부자에 대한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대항력 혹은 ‘길항력’(countervailing power)을 길러주고 유지해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사회적 자유주의 실현의 핵심 기제가 바로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정치적) 길항력의 제공이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사실, 교과서적 개념을 따르자면, 한국의 87년 체제는 제대로 된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라고 하기도 어렵다. 대의제 민주주의란 민주국가의 주인인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그들을 통하여 국가공동체를 간접 운영하는 민주주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수의 시민이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갖지 못하고 있다면, 즉 대표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있다’라고 한다면, 그러한 상태에 있는 국가를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라고 인정하기는 곤란하다. 그런데 한국 시민의 대다수는 자신들의 선호와 이익을 대표하는 유능한 정치적 대리인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그들 중 누가 자신들의 유력한 정치적 대리인을 갖고 있는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본 소임은 일반 시민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줌으로써 그들이 사회경제적 강자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길항력을 갖추게 하는 데에 있다. 노동이 자본과, 중소상공인이 대기업과, 청년이 장년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과 적어도 정치의 장에서는 동등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자유와 평등을 수호할 수 있는 정책과 법, 제도 등은 적절하게 공급될 수 있다. 87년 체제의 수립 이후 만약 대의제 민주주의가 본령대로 활발히 작동하고, 따라서 정치가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시장에서의 길항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왔더라면, 한국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수준, 따라서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자유의 수준은 지금쯤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87년 체제는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했다. 그들을 정치 및 정책 과정으로 포용해내질 못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양극화의 고착이 그 결과였던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국가 구성원의 대다수인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선호와 이익, 즉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기만 한다면, 사회적 자유의 제도적 보장, 곧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은 지금부터 시작해도 충분히 달성 가능한 일이 된다. 단, 그러기 위해선 헌정체제의 개혁이 불가피하며, 그 핵심 목표는 정치적 대표성을 시민들에게 두루 보장함으로써 ‘포용의 정치'(politics of inclusion)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한다(Crepaz and Birchfield 2000).   포용의 정치란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히는, 즉 갈등 관계에 있는 주요 정치 및 사회경제 세력들이 한 정치체제 안에 모두 ‘포용 되어’ 그 내부의 정치 및 정책 과정에 항상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정치를 일컫는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모든 갈등 주체들이 정치 및 정책 ‘권력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간의 갈등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스스로들 풀어가게 하는 정치를 의미한다. 갈등이 심한 나라에서 권력 공유라는 이 해법을 통해 약자의 사회적 자유가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을 막아주고, 그럼으로써 사회통합을 성공적으로 유지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갈등 관계에 있는 집단과 시민들의 정치 및 정책 과정 참여는 기본적으로 정당을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중소상공인, 청년구직자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익과 선호는, 자본가와 대기업 등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을 대변하는 유력 정당들이 존재할 때에만 정책 결정 과정에 효과적으로 반영될 수 있다. 따라서 (경제) 권력에 대한 상시적인 민주적 통제는 이들 약자집단을 포함한 사회의 주요 갈등 주체들을 제대로 대표할 수 있는 복수의 정당들이 의회에 포진해있고, 그들이 정부를 구성하며, 국가를 운영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결국, 정당정치의 발전이 정치적 대표성의 공평한 보장, 대의제 민주주의와 포용 정치의 순작동, 그리고 사회적 자유주의 구현의 전제라는 것이다.   III. 사회적 자유주의의 구현을 위한 정당정치의 발전과 선거제도 개혁 1. 한국의 전근대적 정당 체계와 그 원인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요 상품은 정책, 법, 제도 등이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곳에서) 상품의 주 공급자는 정당이다. 그리고 소비자는 각기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이다. 시장이 공정하고 자유롭다면, 다수의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잘 만들어 적시에 제공하는 정당은 성하고, 그렇지 못하는 정당은 쇠하기 마련이다.   작금의 한국적 상황에서 가장 많이 팔릴 정치 상품은 필경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구직자 등과 같은 소위 ‘약대(弱大) 집단’의 필요와 선호를 겨냥한 정책, 법, 제도 등일 것이다. 그들은 각기 800만, 700만, 600만 명 등으로 헤아려질 정도로 그 규모가 큰 집단들인 데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취약하기 그지없는 약자들인지라 자기들을 보호해줄 정치 상품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구매 의욕이 강렬한 거대 소비자 집단이 여러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시장에는 이들을 주 고객으로 삼는 유력한 정당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기이 하달만큼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87년을 기점으로 정치시장의 자유, 곧 정치 민주화가 선포된 지 3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말이다.   87년 민주주의 체제에서 성하다는 정당은 이 거대 소비자 집단이 원하는 상품을 공급하겠다고 하는 계층 기반 정당들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그저 특정 지역을 대표하겠다고 하는 지역 기반 정당들이다. 성장, 분배, 안보 등과 관련된 주요 정책, 법, 제도 등에 관한 지역별 선호와 그 강도 차이가 크게 다를 리가 없는데도 그러하다. 예컨대, 호남과 영남의 비정규직 노동자나 영세자영업자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에 대한 정책 선호를 서로 달리하면 얼마나 달리하겠는가?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상당한 규모와 세를 갖춘 ‘호남당’이나 ‘영남당’은 있어도 ‘노동자당’이나 ‘소상공인당’ 혹은 ‘청년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은 한국의 정치시장에서 소외 또는 배제돼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자신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품을 구하지 못해 늘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민주화를 이룩한 지 30여년이 지나도록 한국의 정당 체계가 여전히 전근대적이기 때문에 이런 기이하고도 안타까운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데, 정당 체계가 아직 그 모양인 까닭은 87년 헌정체제가 소위 ‘독종’ 다수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최태욱 2014, 82-83). 87년 체제는 기본적으로 양대 정치제도에 의해 운영된다. 하나는 소선거구 1위 대표제 중심의 국회의원 선거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제왕적 대통령제이다. 문제는 이 두 제도 모두 (지역주의와 결합하여) 인물 혹은 지역 중심의 독과점적 정당 체계의 형성 및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2] 이것이 바로 포용이 아닌 ‘배제의 정치’(politics of exclusion)가 작동하는 87년 체제의 핵심 문제이다.   정당정치 차원에서 말하자면, 포용의 정치란 국가의 정치 및 정책 과정에 모든 정당이 (지지율에 비례하는) 참여 권한을 두루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그리하여 각 정당이 대표하는 모든 시민과 이익집단이 정치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강자와 다수자를 대표하는 한 두 정당이 여타 정당 모두를 밀어내고 입법부와 행정부의 정치권력을 독과점하는 배제의 정치 혹은 승자독식 정치와 대립하는 개념이다.   이 포용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이른바 ‘포용 국가’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경제 정책이나 사회 정책 결정 과정에 항상 약자를 대표하는 유능한 정당이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나라라고 한다면, 그 나라에서 약자가 선호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강화 정책 등이 채택될 가능성은 항상 높기 마련이다. 정당정치의 활성화가 포용의 정치를 작동케 하고 그 포용의 정치가 경제의 민주화 수준을 높여 (노동자나 중소상공인 같은 경제적 약자를 중시하는) 포용 경제를 견인하며, 복지국가 발전 수준을 높여 (장애인, 다문화인, 청년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포용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그래서 정확한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포용의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선, 즉 약자의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헌법과 법률의 관련 조항들을 모두 손질하여 현대적 정당 체계가 들어서고 정당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대표성을 보장하는 현실 주체는 결국 정당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다양한 이익집단들을 균형 있게 효과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여러 정당이 포진해있고, 국가의 정치적 결정이 이들 정당에 의해 이루어질 때 포용의 정치가 작동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예컨대 노동이나 중소상공인 등과 같은 주요 이익집단들을 대표하는 정당(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무력한 경우에는 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선호와 요구는 정치과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반면 대기업과 같은 특정 강소집단의 이익은 과도하게 대변될 수 있다. 그런 데서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의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약자 배제의 정치가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포용의 정치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의 이익과 선호를 있는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유력 정당들의 상존을 핵심 요건으로 한다는 것이다.   상기한 대로, 87년 헌정체제에서는 호남이나 영남과 같은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거대 정당 중심으로 정당정치가 이루어져 왔다. 정당의 구심점은 이념이나 가치 혹은 정책 기조라기보다는 특정 지역민 즉 호남인이나 영남인 등의 기대와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역 명망가가 제공해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러한 전근대적인 지역 혹은 인물 중심 정당 체계는 (전국에 산재해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당의 주 기반이 사회경제적 계급, 계층, 부문 등이 아니라 단순히 특정 지역이기 때문이다.   현시기 한국의 사회경제 상황에서 정치적 대표성 보장이 가장 시급하고 절실하게 요청되는 집단은 누가 보아도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이다. 그들 중의 상당수가 아직도 가난과 실직, 기타 사회경제적 공포로 인해 불안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에게도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자유를 제공해야 한다. 정치적 해법 말고는 달리 취할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현 정당 체계 내에는 이들을 대표하는 유력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의 헌정체제 아래에서는 앞으로도 그런 정당은 등장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2.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과 선거제도 개혁   한국의 사회적 자유주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헌정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87년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정치제도를 과감하게 뜯어고쳐야 한다. 제도 개혁의 방향은 정해져 있다. 승자 독식형 다수제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권력공유형 합의제 민주주의로 발전해가도록 해야 한다.   상기한 바와 같이, 사회의 주요 갈등 주체들을 대표하는 복수의 유력 정당들이 의회에 (이념과 정책 기조의 차이에 따라) 좌우로 배열해있고, 그들이 (주로 연립의 형태로) 정부를 구성하며, 국가를 (승자독식이 아닌 권력 공유의 방식으로) 운영해가는 것을 정당 민주주의의 활성화와 그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개 다수제가 아닌 합의제 민주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발전상이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적 특성은 정책과 이념 중심의 다당제가 발전해있다는 것인데, 그 다당제는 비례성 높은 의회 선거제도와 연정형 권력 구조와 상호 맞물려 작동한다. 말하자면,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가 정책과 이념 중심의 다당제를 견인하고, 유력 정당이 여럿인 까닭에 어느 한 당이 단독과반을 차지할 수 없는 상황이 일상화되면서 합의제형 권력 구조가 제도화되며, 그것은 다시 다당제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대한 정당 체계 결정 변수는 선거제도이다. 예컨대, ‘뒤베르제의 법칙’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양당제를,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견인한다. 결국,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 간의 비례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우리 사회의 다종다양한 선호와 이익을 제대로 대리할 수 있는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이 공히) 10%대인 정당(들), 20%대인 정당(들), 30%대인 정당(들) 등이 다채롭게 부상함으로써 포용 정치 작동의 전제 조건인 정책, 가치, 이념 중심으로 ‘구조화된 다당제’가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9년의 선거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선거제도는 여전히 비례성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중심의 것이다. 더구나 이 불 비례적 선거제도는 지역주의와 결합하여 작동하고 있다. 그러니 선거제도가 야기하는 민의 왜곡 현상은 심각한 지경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특정 정당에 의한 지역 독과점 체제의 유지가 그 문제의 핵심 중 하나이다.   한국과 같이 지역주의가 여전히 선거 정치의 주요 변수로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이념이나 정책을 중심으로 결성된 전국 정당 후보가 소선거구에서 해당 지역에 뿌리내린 기존의 지역 정당 후보들을 제치고 1위에 당선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영남당이나 호남당 등과 같이 지역에 기반을 둔 거대 정당 출신 후보는 소위 지역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으므로 ‘외지’ 정당이나 전국 정당 출신의 경쟁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늘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반드시 50%가 넘는 득표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자들에 비해 단 한 표라도 더 얻으면 1위로 당선되는 상대다수대표제는 필요하면 언제든 지역감정에 호소하여 지역표의 동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지역 정당 후보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선거제도이다. 요컨대, 지역주의와 결합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가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중심으로 남아있는 한, 이념과 가치, 정책 중심의 다당제가 발전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전면 비례대표제의 도입이나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로의 개혁은 지금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한국의 정치적 과제이다. 2019년의 선거법 개정은 (개악이 아니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미완의 개혁으로 그쳤기 때문이다.   의회 선거제도의 비례성이 낮은 국가들 가운데에서 정책과 이념 중심의 구조화된 다당제가 발전하여 포용의 정치와 합의제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작동한 예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발전 수준이 높은 나라, 곧 사회경제적 약자의 이익과 선호를 제대로 보호하고 보장해주는 나라는 거의 예외 없이 비례대표제-합의제 민주주의 국가이다. 한국에 있어 사회적 자유주의의 구현은 선거제도의 개혁을 필요로 하는 일인 것이다.   IV. 결론: 또다시 선거제도 개혁!   2019년은 한국이 드디어 비례대표제 국가가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충만한 해였다. 그 직전 해인 2018년 12월에는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의 소위 ‘야3당’ 지도자들의 단식과 천막 농성, 그리고 시민사회의 개혁 촉구 운동 등이 혹한 속에서 열흘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그리고 여론은 선거제도 개혁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 현재의 국민의힘인 자유한국당(이하 ‘자한당’)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그 두 거대 정당은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비로소 개혁 논의에 진전이 생겼다. 그리하여 결국 그달 중순에 여야 5당 원내대표가 모여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라는 내용의 합의문을 발표했다. 그 후에도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어쨌든 2019년에 들어서면서 선거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선거법 개정의 취지는 물론 시민사회의 오랜 염원에 부응하여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논의 과정 중에 양대 정당은 끊임없이 정파적 이기주의 행태를 보였다. 그로 인해 법 개정의 취지는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2019년 말에 새 선거법이 도입되긴 했으나, 그 덕분에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례성이 안정적으로 올라가고 그에 따라 다당제가 발전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로 새 법의 내용은 부실했다.   사실 87년 체제에서 양대 정당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도 양당제의 혜택만큼은 공유해왔다. 따라서 두 당은 공히 다당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의 도입을 꺼려왔다. 그런데 2019년에 들어 민주당이 바뀌었다. 공수처법의 통과에 필요한 군소정당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들이 간절히 바라온 선거제도 개혁에 협력할 용의가 생긴 것이다.   실상은 부정적이거나 기껏해야 소극적이기만 하던 민주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드디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자 군소정당은 흥분했다. 민주당의 태도가 바뀌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개혁을 마감해버리자는 욕심이 앞섰다. 그리하여 그들은 선거제도 개혁은 본래 합의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함인데, 그 개혁의 추진을 (합의 과정을 생략하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 붙여보자는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채택한 방식이 소위 ‘패스트트랙 연대’였고, 이른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그 ‘다수파 연대 전략’의 결과물이었다.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함이라는 선거제도가 ‘다수제’적 방식에 의해 상당히 강압적으로 채택된 것이다.   그러니 자한당은 대놓고 반발했고, 온갖 편법을 당당하다는 듯 동원했으며, 개정 선거법의 취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려 들었다. 위성정당 세우기는 그 일환이었다. 그보다 더 가관인 것은 민주당의 태도였다. 군소정당들과 연대하여 선거제도 개혁을 완수하겠다던 민주당이 자한당과 똑같이 위성정당을 만들어 자기네가 앞장서 개정한 새 선거법을 형해화 시켜버린 것이다.   2020년의 총선 결과는 현행 선거제도 아래에서 한국의 정당정치 즉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향후 어떻게 전개되어갈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바로 양당제의 강화, 승자독식 민주주의의 심화, 배제의 정치와 대결 정치의 악화, 민주주의의 정치적 대표성 제공 기능 및 사회 갈등 조종 기능 약화 등이다. 이 상황에서 사회적 자유주의가 발전할 여지는 거의 없다.   선거제도 개혁은 다시금 추진돼야 한다. 그리고 그 개혁은 반드시 비례성 강화를 목표로 한 개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지역에 기반을 둔 작금의 독과점적 정당 체제를 혁파하고 민의 반영이 충분히 이루어지는, 즉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대표할 수 있는 포용적 정당 체제, 그리고 그에 기반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확립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국은 이른바 ‘독종’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이다. 승자독식-패자전몰의 대결 정치가 난무한 한국의 정치에서 약자와 소수자의 자유가 효율적이고 지속적으로 보장되길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사회적 자유주의 수준이 유의미하게 높아질 가능성은 작금의 87년 다수제 민주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매우 낮다는 의미이다. 다수제 국가가 합의제로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가기 위해선, 그리하여 국민 누구나가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승자독식형 선거제도를 권력공유형 선거제도로 바꾸어야 한다. 제대로 된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사회적 자유주의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효과적인 방안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   참고문헌 이근식. 2009. 『상생적 자유주의: 자유, 평등, 상생과 사회발전』. 서울: 돌베개 이근식. 2011. “진보적 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 최태욱 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서울: 폴리테이아 최태욱. 2011. “한국형 조정시장경제와 합의제 민주주의” 최태욱 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서울: 폴리테이아 최태욱. 2014.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 서울: 책세상 밀, 존 스튜어트. 2013. 『자유론』. 서병훈 옮김. 서울: 책세상   Crepaz, Markus M., and Vicki Birchfield, 2000. “Global Economics, Local Politics: Lijphart's Theory of Consensus Democracy and the Politics of Inclusion." eds., Markus Crepaz et al. Democracy and Institutions: The Life Work of Arend Lijphart.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Kloppenberg, James. 1986. Uncertain Victory: Social Democracy and Progressivism in European and American Thought, 1870-1920.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Lijphart, Arend. 2012. Patterns of Democracy: Government Forms and Performance in Thirty-Six Countri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 이 글은 필자의 편저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의 서문과 8장에서 관련 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수정․보완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는 레이파트(Lijphart 2012)가 분류한 민주주의의 양대 유형의 한 축을 이루는 개념이다. 다른 축인 ‘다수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를 승자독식형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이 합의제 민주주의는 권력공유형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2] 따라서 포용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는 선거제도의 개혁과 권력 구조의 개편이 양대 과제일 터이나 이 글에서는 선거제도 개혁 문제에 집중한다.     ■ 저자: 최태욱_한국리버럴아츠센터 센터장. 미국 UCLA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동대 교수,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창비 편집위원,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복지국가의 정치경제, 동아시아경제통합 등이다. 주요 저서로는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편저), 《복지한국만들기》(편저),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 《청년의인당》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하은_EAI 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8) | hyoon@eai.or.kr  

최태욱 2022-03-16조회 : 17015
워킹페이퍼
[EAI 워킹페이퍼] 자유주의 시리즈 ①_ 자유주의를 위한 변명

I. 자유주의의 현주소: 과잉과 결핍의 역설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양극화가 노골화하면서 자유주의는 여러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자유주의는 모든 사회적 부조리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 국내외적으로 편차가 있긴 하지만, 21세기 들어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담론이 거세다.[1] 이제 자유주의는 이념으로서 그 수명을 다한 것일까?   그런데 자유주의 비판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비판의 대상은 자유주의 이념 자체라기보다 그 이념과 친화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회제도 혹은 사회 현상에 관한 것이다. 이념과 사회 현상 간의 인과관계를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은 채, 불만족스러운 사회 현상을 전제로 이념을 비판하는 것은, 이념의 목적을 왜곡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를 부당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자유주의 비판에는 이러한 징후가 보인다.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종종 사회적으로 이목을 끄는 불공정 이슈나 불평등 이슈를 자유주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자유주의라는 이념을 희생양 삼아 자신의 정파적 이익을 추구한다. 이들에게 자유주의는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의 이념에 불과하다. 물론 자유주의를 열심히 변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유주의의 원초적 가치를 변호하기보다 자유주의 비판자들의 반대편에서, 역시 정파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자유주의를 활용할 뿐이다.   이념이 현실정치에서 정파적 도구로 쓰이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념이 전적으로 정파적 도구로 전락하게 되면 그 이념은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의 경우도 그 근본 가치는 후퇴하고, 정치적인 유불리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재단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가 왜 지금껏 자유주의를 옹호해 왔는지, 그리고 그 가치가 헌법에 담겨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잊어버릴 수 있다. 모든 이념은 적당한 때가 되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이념을 통해 수호해야 할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에 대한 편견으로 그것을 놓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자유주의의 근본 가치에 대한 재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현 상황에서 제기해볼 만한 첫 번째 질문은,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불만이 과연 자유주의 이념 자체, 혹은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가치 자체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의 적용 방식, 즉 자유주의가 적용되어야 하는 범위와 정도에 대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일견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혐오와 탄식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경쟁과 이익 추구라는 ‘시장 논리’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과 경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경제 영역에서 시장 논리를 수용하더라도, 정치, 교육, 문화의 장에서까지 시장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지나친 확대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 비판의 공통분모는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자유주의의 ‘지나친’ 확대, 자유주의의 ‘과잉’에 대한 불만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의 ‘지나친’ 확장을 자제하고 그것의 ‘적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자는 자유주의의 과잉에 대한 우려와는 정반대로 자유주의의 결핍을 문제 삼는다. 마땅히 지켜져야 할 자유주의의 가치가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면 자유주의가 오롯이 유지되어야 하는 영역은 어디인가? 무엇보다도, 유지되어야 할 자유주의의 가치는 무엇인가? 시장 논리로 대표되는 경제적 자유주의 이외에 어떤 것들이 자유주의의 가치인가? 이 글은 이러한 자유주의의 과잉과 결핍과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을 짚어 보면서 궁극적으로 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와 국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이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한때, 자유주의가 이념으로서의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낼 때가 있었다. 전체주의가 전 세계를 위협했던 2차 대전 전후의 얘기다. 당시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의 비인간적 행태에 대항할 인류의 이념적 보루였고, 정치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이상으로 여겨졌다. 이후 냉전기에는 공산주의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이념으로서 자유주의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제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위협은 상존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를 이념적으로 선명하게 내세울 만한 ‘사악한’ 이념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이념적 유용성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유주의의 가치와 그 유용성을 설득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자유주의의 정치사상적 기원을 살펴봄으로써 자유주의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로써 자유주의에 대한 학술적 엄밀성을 추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논하는 것은 학술적 엄밀성과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그보다는 우리가 왜 자유주의를 비판하거나 옹호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로서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기원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는 자유주의의 정치사상적 기원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주의가 어떤 가치를 갖고 출발했는지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 가치를 계속 존중하고 유지할 것인지, 21세기에는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두 번째는 자유주의와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다른 이념과의 관계를 논하면서 자유주의의 유용성을 타진하고자 한다. 예컨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공정 문제와 자유주의의 관계를 검토해 볼 것이다. 어느 사회든 공정은 중요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공정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횡행하는 것처럼 최근 공정의 문제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공정을 주장하는 이들 간의 갈등과 대립의 불씨가 되었다(김석호 외 2021). 이 글은 공정의 경우처럼 논란의 중심이 되는 이념과 자유주의와의 관계를 논할 것이다. 공정 이외에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있으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가치들에는 민주주의, 법치, 보수주의 같은 것들이 있다.[2]   현재 우리 사회는 여러 이념의 적용 범위와 정도, 그리고 가치 간의 우선순위 등을 두고서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여러 이념과 자유주의의 관계를 논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이념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자유주의의 거울에 비춰보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가 다른 모든 이념과 가치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이념이라거나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을 검토하고, 다른 가치들과의 관계를 설정해 봄으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우리 자신의 이념적 자화상을 그려보자는 것이다.   II. 자유주의의 정치사상적 기원: 홉스, 로크, 밀의 자유주의   자유주의가 서구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 서구의 사상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의 사상적 가치를 우리가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자유주의의 가치를 공감하는가? 그 가치는 어떤 사상적 기원을 갖는가?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으로 지목할 수 있는 첫 번째 인물은 17세기 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다. 절대 왕정을 옹호한 것으로 잘 알려진 홉스의 정치철학을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례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철학자인 레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홉스야말로 자유주의의 지평을 새롭게 연 인물이다(Strauss 2007).   홉스를 자유주의 사상의 명실상부한 사상적 기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가 근대국가의 성립을 개인들 간에 맺어진 신약, 즉 사회계약의 결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렇게 사회계약의 결과로 출현한 리바이어던은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가진 괴물이다(Hobbes 1996). 따라서 리바이어던 치하에 사는 개인들은 밀이 옹호하는 소극적 자유를 누리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이 리바이어던의 존재 이유가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들의 의사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게 절대권력을 부여한 것도 최악의 상태로 묘사된 자연상태로 되돌아가지 않겠노라고 판단하는 개인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다. 자연상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상태에서 개인은 자유는커녕 생존조차 보장받기 힘들다. 국가권력이 부재한 자연상태가 홉스가 사고한 대로 전쟁상태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홉스가 개인의 생존과 자유의 보장을 국가의 존립 근거로 삼는 최초의 근대적 사회계약론자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실질적으로 개인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국가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 이유는 바로 개인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홉스의 구상에 동의한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나타나기 이전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국가의 존재 이유는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 혹은 자연의 은밀한 목적(telos)을 수행하기 위한 경로로 이해됐다(Strauss 1965). 홉스 이전에는 개인의 존재보다 국가의 존재가 우선했다. 홉스에 와서 비로소 개인의 권리를 전제로 국가의 성립을 논하게 된 것이다. 홉스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개인의 생존과 자유로 규정함으로써 자유주의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근대국가가 탄생한 이래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의 문을 연 장본인이 홉스라는 사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홉스적 자유주의는 국가는 결코 개인보다 선행할 수 없고, 개인의 의사에 따라 만들어진 인공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개인은 결코 국가의 일부분이거나 부속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적어도 암묵적으로 국가의 존재보다 개인의 존재를 우선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홉스적 자유주의와 같은 진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홉스적 자유주의는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해 줄 명분으로 국가가 성립했지만, 절대권력을 가진 주권자가 언제든지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홉스에게는 이러한 절대권력의 탄생은 그가 가정하는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결과다. 절대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개인은 결코 최악의 상황인 자연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존재를 국가의 존재 보다 우선시하면, 역설적으로 홉스적 국가의 탄생이 불가피한 것인가? 또 다른 근대 사회계약론자 존 로크는 개인의 생존과 자유를 우선시하는 홉스적 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절대권력을 가진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방안을 고심한 정치사상가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 국가권력을 법에 귀속시킨다. 법은 국가권력에 권한을 부여함과 동시에 제한도 규정한다. 현대인에게는 법치를 통해 국가권력의 제한을 명문화하고 있는 로크의 자유주의는 홉스의 자유주의보다 친숙하다. 홉스적 자유주의가 개인의 권리를 강조했다면, 로크적 자유주의는 그것의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법을 통한 국가권력의 제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절대권력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부정해야 한다. 홉스가 국가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한 근거는 자연상태의 비참함이었다. 홉스에게 자연상태는 최악의 상태이므로 그것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든 정당화될 수 있다.   로크는 홉스가 지정한 자연상태의 성격을 수정한다. 로크의 자연상태는 상시적인 전쟁상태가 아니라 대체로 평화로운 상태이며 자연법이 작동하는 상태다. 다만 종종 자연법을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하므로 이를 저지하고 또 침해된 권리를 회복시키기 위한 판단자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입법자가 맡아야 하고, 입법자는 사실상의 주권자로서 국가권력의 행사를 제한한다. 그런데 이러한 로크적 자연상태론은 다분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르면, 자연상태의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므로 신이 허락하는 한 인간 상호 간에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또한 자연상태는 완벽하게 조화롭지는 않지만, 인류 전체를 소멸시킬 정도로 파괴적인 속성을 지니지도 않았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인류 전체를 스스로 보존할 수 있는 내적인 능력 즉 이성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고, 이 이성을 통해 인간은 타인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서는 안 되는지를 규율하는 자연법을 알 수 있다. 홉스적 자유주의와 로크적 자유주의가 상정하고 있는 자연상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에서 벗어난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제한이라는 로크적 자유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성을 통해 자연법이 발견되고 준수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아울러 인간에게는 인류 전체의 보존이라는 기독교적 가치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Locke 1996).   로크적 자유주의의 한 축이 법치주의라면, 또 다른 축은 개인 소유권의 인정이다.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이미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은 자연 전체를 인간에게 공유물로 부여했고 여기에 개인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귀속된 노동을 투하해서 나온 결과물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Locke 1996). 로크는 나아가 이 소유권을 개인이 국가로부터 보장받아야 할 핵심적인 권리로 삼았다. 국가는 사인 간의 관계에서 소유권 보장해 줘야 할 뿐 아니라, 개인에게 치안과 안보 이상의 비용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로크적 자유주의가 토대로 삼는 것이 국가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법치주의 그리고 개인의 소유권 보장이라면 이러한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제한된 정부,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이런 맥락에서 로크적 자유주의는 복지국가와 거리가 멀다.   작은 정부에 의한 개인의 소유권 보장은 부의 축적을 조장하고 결과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 로크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이러한 결과의 불평등은 같은 조건으로 개인이 행한 선택과 노력의 결과이므로 정당하다.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대한 평가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장에 의해서 결정된다. 누군가 이러한 시장의 논리에 개입하는 것은 인위적인 간섭에 해당하므로 그것이 사인에 의해서 이뤄지든, 국가에 의해서 이뤄지든 부당한 것이다. 시장주의는 개인에 정당하게 자신의 몫을 가져가는 원리일 뿐 아니라, 공동체를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원리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개인의 자유를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이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의 공존을 고려할 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자유 추구는 타인의 자유 추구와 충돌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개인의 자유 추구는 곧바로 자유의 제한과 맞물리고, 개인의 자유 보장은 결국 자유의 제한을 제한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무엇이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동시에 보장하는 기준이 되는가? 적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나의 행위는 자유롭게 보장받아야 하지 않는가? 이런 사고의 흐름에 동조한다면, 우리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밀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개인이 보장받아야 할 자유를 강조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인의 삶의 방식이나 개성, 무엇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광범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밀의 자유주의는 설령 이러한 자유의 보장이 당사자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개인이 내린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나 사회는 이미 성인이 된 개인에게 후견인 노릇을 해서는 안 되고, 개인의 행복은 전적으로 개인의 결정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국가나 사회로부터의 간섭받지 않을 자유, 즉 소극적 자유다. 공리주의자인 밀은 이러한 소극적 자유의 보장이 궁극적으로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이바지한다는, 즉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진한다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적용한다(Mill 2007).   우리도 소극적 자유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국가나 사회가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는 것은 이러한 사고의 반영이다. 그러나 현대인이 밀이 주창하는 만큼 소극적 자유의 보장을 엄격히 지키고 있는가는 의심스럽다. 이미 현대 국가는 광범위한 차원에서 개인의 행복을 책임지고 있다. 국방이나 치안과 같은 전통적으로 부여된 책임을 넘어 개인의 교육, 보건, 노년의 삶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개인의 복지를 책임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상당한 정도의 개인 정보를 관리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국민 보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권한은 훨씬 강화됐다.[3] 이런 상황에서 적어도 밀이 주창한 전통적인 자유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한 듯하다. 그러나 소극적 자유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소극적 자유의 포기는 곧 전체주의를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국가의 책임과 권한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소극적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라는 밀의 원칙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조건만 갖춰지면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남에게 해를 끼친다’라는 것의 판단은 보기에 따라서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전적으로 행위자 개인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위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밀은 마약과 도박이 개인의 삶을 피폐하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들이게 함으로써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한 어느 것도 남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소극적 자유를 보장하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밀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 혹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매우 좁게 정의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극적 자유는 언제든지 국가나 사회에 의해서 간섭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밀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국가의 책임과 권한은 우려할만한 수준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현대 국가의 책임과 권한의 확대는 20세기 이래 개인들이 끊임없이 국가에 대해서 요청한 결과다. 문제는 이로 인한 소극적 자유의 위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의 회복을 위해서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개인의 삶에 관해 더 큰 책임을 요구할 때, 소극적 자유의 축소가 뒤따른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에 개인의 삶과 복지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에는 계산서가 따라온다. 밀의 자유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국가의 권한과 책임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소극적 자유의 보장을 얼마나 확보하길 원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특히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 어디까지 개인의 건강, 나아가 삶과 죽음을 책임지라고 요구할 것인지, 이로 인해 우리가 지급할 수밖에 없는 소극적 자유의 축소라는 계산서는 어느 정도 용인할 것인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유주의에 대해 여러 ‘불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붙들고 있는 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을 통해서 확인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홉스는 국가권력의 절대성을 주창했지만, 그의 절대주의에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 전제되어 있다. 로크는 법치주의를 통해 국가권력의 제한하고 개인의 소유권 보장을 국가의 주요 역할로 삼았다. 밀은 소극적 자유의 보장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의 권력 남용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적 기원이 있는 자유주의적 요소들이 우리가 여전히 자유주의를 버릴 수 없는 이유다. 홉스적 자유주의, 로크적 자유주의, 밀의 자유주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근본 이유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자유주의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한편으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간섭을 거부하지만, 다른 한편 국가권력의 최고성, 국가의 주권성을 인정한다. 한편으로 국가의 주권성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 국가의 권력 행사는 법에 의해서 제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편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권리, 특히 소유권 보장에 있다고 여기지만, 다른 한편 그로 인한 극심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국가가 재분배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역할의 균형점은 어디에 있는가? 소극적 자유, 국가의 주권성과 제한, 개인 소유권의 보장은 자유주의의 중요한 가치이며 나름대로 사상적 기반을 갖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것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자유주의의 여러 요소가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것인가는 자유주의와 다른 가치와의 관계를 조율할 때 좀 더 분명해진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자유주의뿐 아니라, 공정, 정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도 우리 사회가 반드시 따라야 할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 이제 자유주의가 이러한 가치들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좀 더 밝혀 보고자 한다.   III. 자유주의의 실천과 적용: 보수주의, 민주주의, 공정   홉스, 로크, 밀에 정치사상적 기원을 두고 있는 자유주의의 가치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띤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가치의 실천과 적용은 시대적으로 또 각국의 사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미국의 자유주의가 건국 초부터 공화주의와 대조를 이루며, 진보적이며 다원적인 사회 이념의 흐름을 대표한다면, 유럽의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대조를 보이며, 개인주의적이고 시장중심적인 흐름을 대표한다. 또한, 미국의 자유주의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고 ‘큰 정부’를 용인하는 반면, 유럽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역량을 강조하고 국가의 간섭을 견제하는 성격이 강하다.[4]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가 완전히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맥락에서 자유주의의 적용 방식은 전혀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정치사를 돌아볼 때, 한국의 자유주의도 시대적 맥락에 따라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자유주의는 전통적인 국가관에서 벗어난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국가관 그리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대표 이념으로 이해됐다. 민주화 시기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동일시되거나, 비민주적인 국가 기제에 저항할 수 있는 이념적 도구로 받아들여졌다(문지영 2011). 한편 민주화 이후 한국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흐름과 더불어 뉴라이트 운동과 연결되고, 대체로 보수주의와 보수 정당의 이념적 토대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선망의 이념으로 간주되는가 하면, 기득권을 영구화하는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간주되기도 했다.   한국 자유주의의 현 상태가 보수주의와 상당부분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관계를 논할 필요가 있다(강정인·김현아 2006). 우선, 보수주의가 단순히 보수 정당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나름의 독특한 정치이념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보수는 무언가를 유지하고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정치적으로 제도나 가치, 이념 등을 보수하려는 태도나 성향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수적 성향은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버크의 보수주의를 원형으로 삼자면, 보수주의는 기존의 제도와 전통을 인간 이성에 의해 산출된 합리적 결과물로서 존중하고, 그것에 대한 변화를 매우 신중하게 접근한다. 이러한 태도는 명백한 개선이나 진보를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혁명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선호한다(Kirk 1986).   보수주의가 점진적 개혁을 전제로 한 전통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보수주의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주로 지배 권력이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런 이미지로 인해 보수주의는 종종 공격의 대상이 되고, 보수주의를 지지한다고 밝히는 것을 꺼리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조성된다. ‘샤이 보수’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용어다. 그런데, 단순히 지배 권력의 기득권 보호를 보수주의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소위 민주화 세대, 586으로 일컬어지는 민주화 세대가 기득권을 주장하는 행태도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이들은 분명 보수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이들이 기득권자로 여기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 앞세대 소위 권위주의 세대이고, 이들과 뿌리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이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여러 차례 민주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기득권도 순환되고 있다. 그런데도 상대 진영에게 보수주의의 ‘나쁜’ 이미지를 덮어씌우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것은, 그들이 만든 나쁜 보수주의에 스스로 빠져 있는 것이다.   보수주의의 근본 문제는 누가 기득권자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수할 것인가, 무엇이 보수의 가치인가의 문제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보수의 가치는 내용으로 정해진 것이 없다. 한국정치사에서 보수주의는 반공, 한미동맹, 산업화 등을 대변해 왔지만, 이것 자체가 보수의 가치라고 할 수는 없다. 보수주의는 어떤 고정된 가치를 지향한다기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급진적인 변화를 거부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하는 태도와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급진적인 변화를 거부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앞서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을 통해 확인했듯이,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규정해 온 가장 보편적인 가치이며, 현대 국가가 전통적 가치로 삼을 만한 이념적 요소를 갖고 있다. 되풀이하건대, 보수주의는 무작정 이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다. 즉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결합하면 자유주의의 원칙을 지키되, 현실적으로 그것의 변용할 수 있는 개혁이 가능하다. 예컨대, 국가의 권한과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원칙이지만, 얼마나 제한하고 허용할 것인지는 현실에서 자유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응책으로 국가의 사생활 간섭을 얼마나 허용할 것인지,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 국가의 시장 개입을 얼마나 허용할 것인지는 자유주의냐 반자유주의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자유주의를 어떻게 실천하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불만을 개선하기 위해서 자유주의를 어떻게 보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렇게 보면,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의 원칙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서 수용되고 또 개선되어야 하는가를 말해 주는 자유주의 변용의 한 방식이다. 또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어떤 가치를 지킬 것인가를 말해 주는 자유주의의 콘텐츠다. 예컨대 국가가 개인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의 안전뿐 아니라 복지를 책임지고 나아가 불평등의 개선을 위해서도 책임이 맡겨진다면 개인 소유권의 제한은 불가피하다. 자유주의의 변용은 국가가 개인의 소유권을 제한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그 정도와 범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국가가 경제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개인의 소유권을 어느 정도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개인의 소유권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급격하게 제한하는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 자유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보수주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변화의 정도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제될 수 있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의 변용을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반면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에 본질적 가치를 제공하면서 상호의존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이념이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조화로운 이념적 조합으로 이해된다. 민주주의를 전제정치나 독재와 대립되는 정체, 즉 국민이 주권을 가진 정체로 이해한다면, 민주주의야말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정체의 종류로서가 아니라, 다수의 의사에 따라 공동체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다수의 지배 정치 이념으로서 이해하면,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다수의 지배는 다수의 횡포나 인기영합주의와 혼동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횡포나 인기영합주의는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민주주의가 다수의 정당한 지배를 넘어 다수의 횡포가 되는지를 가려내기는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또한, 민주적 정당성의 획득을 위한 여론 정치와 인기영합주의가 선명하게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가치는 민주주의 남용과 탈선의 시점을 자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에서 확인한 바 있듯이 자유주의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그 제한의 근거를 법치에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와 법치는 긴장 관계에 있다(Maravall and Przeworski 2003). 무엇보다 현존하는 다수의 의사가 과거의 죽은 자에 의해서 제정된 법에 따라서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에서 그러하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법이 무시된다면, 법은 더 이상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해 줄 수 없다. 그래서 법치의 최후의 보루로 헌법이 존재한다. 물론 민주적 의사에 의해서 헌법도 개정될 수 있지만, 그 절차는 매우 까다롭고 헌법의 기본 정신을 바꾸는 것은 종종 혁명을 수반한다. 우린 헌법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원리로 삼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헌법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민주적’ 의사라는 명분으로 법치를 무시하고 헌법에 담겨 있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훼손하려 든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남용과 탈선이 시작된다는 징표로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는 공동선을 위한 국가의 간섭을 허용한다. 그런데 이 공동선에는 치안과 국방과 같이 최소주의적 공동선뿐 아니라, 복지와 불평등 해소, 지구적 가치 실현과 같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확대된 공동선도 포함될 수 있다. 공동선의 확대는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남용과 탈선은 자칫 공동선의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 법치를 토대로 헌법에 내재한 자유주의적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다수의 횡포나 인기영합주의로 전락하거나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을 막아 줄 것이다. 자유주의는 엄연히 우리 헌법이 추구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사회구성 원리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문지영 2019).   마지막으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는 공정과 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어느 사회든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공동체는 붕괴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공정과 정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위기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공정을 둘러싼 사회적 위기에 어떤 시각을 제공할 수 있는가?   공정은 기본적으로 공동의 목표를 향한 경쟁에서 그 규칙과 과정이 모든 참가들에게 공평한가를 문제 삼는다. 과정의 공정은 경쟁의 규칙이 참여자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일관되고 유지될 것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과정의 공정은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균등한 기회를 얻느냐가 중요하다. 누군가 남보다 앞선 출발선에 서 있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처음부터 참여가 배제된다면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자유주의는 공정한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경쟁의 속성상 모든 참가자가 각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각자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서 차등적인 이익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행동했으나 원하는 만큼의 이익을 얻지 못한 개인은 결과에 대해서 애석해할지언정, 규칙과 과정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도, 낮은 성과를 얻은 이들이 여전히 공정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것은 원래 공정의 개념이 경쟁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평등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자유주의는 이에 대해 한편으로 긍정적으로 답하면서도 단서를 단다. 과연 기회의 평등이 제대로 주어졌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는 개인이 기회의 평등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보이는 기회의 평등은 개인이 처해 있는 다양한 환경과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매우 제한된 평등일 수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하게 사교육의 혜택을 받은 입시생과 불우한 환경에서 고학하는 입시생이 동등한 출발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과연 기회의 평등을 완벽하게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개인의 타고난 성향, 자질, 재능 등은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경제적 수준뿐 아니라, 가족의 분위기나 환경도 경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모든 경쟁자를 완벽하게 동일한 출발선에 세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맹점이 있다. 결과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은 출발선이 동일하지 않다는 과정의 불리함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과연 결정적이었는가를 밝히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좋은 가정환경에서도 실패하는 사람들, 어려운 조건에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해법은 자명하게 드러나는 차별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기회의 평등을 주되, 그것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결과로 나타나는 불평등을 가급적 보상하려고 노력한다. 결과적으로 나타난 불평등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불공정한 과정에 의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대부분이 결과는 그것들이 혼합된 결과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는 모든 결과를 정의롭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결과의 부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과의 부정의를 전제하고서, 모든 사회 체계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한다. 대학 입시의 예를 들자면, 자유주의는 될 수 있으면 모든 수험생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결과를 완벽하게 정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 때문에 완전한 경쟁 방식이 아닌 약자 우대 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약자 우대가 완벽하게 정의를 회복하는 것은 아니다. 약자 우대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그렇다고 입시의 기본 원칙인 경쟁 시스템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사회적으로 합의된 만큼의 보상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결과로서의 부정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차적으로는 과정상의 공정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결과적으로 드러난 부정의를 보상해 주는 것이다.   무엇을 결과적으로 드러난 부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최근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금융 소득의 비중 상승, 부동산 가격의 불균등한 상승, 경영자와 노동자 임금의 극심한 불평등 등이 지목된다. 자유주의는 이렇게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불평등을 온전히 정의롭게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자유주의는 불평등한 상태에 놓인 계층, 집단, 개인을 보상하는 것을 허용한다. 문제는 이러한 보상의 범위와 정도이다.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사회가 수용하고,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대체로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인정할 만큼,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구축될 수 있을 정도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어떤 계층이나 집단, 개인의 목소리가 보상의 대상으로 지정되어야 하는가는 논란의 대상이 된다.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그 기준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신뢰의 조성이 될 것이다. 공정한 과정이 완벽하기 정의로운 결과를 낳진 못하지만, 적어도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유지될만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IV. 결론   현실 정치에서 정치이념이 정파적 투쟁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자유주의라는 이념의 정파적 이용 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자유주의는 결국 정치사상사(史)의 유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정치이념은 우리가 몸담은 사회와 공동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사용되는 사유의 틀이자 가치관이다. 이런 맥락에서 만일 자유주의라는 이념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이념으로서의 가치를 다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것을 걱정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자문해 볼 것이 있다. 현시점에서 자유주의는 이념으로서 그 효용을 다했는가? 자유주의는 더 이상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곳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유용한 이념이 아닌가? 이 글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이념이 담고 있는 가치에 대한 재성찰해 봤다.   앞에서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으로 홉스적 자유주의, 로크적 자유주의, 밀의 자유주의를 지목하고, 그로부터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들을 재확인했다. 홉스의 자유주의가 외견상 드러난 것과는 달리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지평을 열었다면, 로크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소유권 보장을 중심으로 국가의 책임과 권한을 인정하되, 국가의 권한이 법치로 제한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밀의 자유주의는 이러한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후견인 주의를 배제하는 개인주의를 재확인했다.   이러한 사상적 기원을 가진 자유주의는 그 실천과 적용에서는 여러 변용이 불가피하다. 특히 보수주의, 민주주의, 공정 이슈와 같은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념이나 가치와 연결될 때, 자유주의는 순수하게 자유주의적 가치만을 추구할 수 없으며 여러 도전에 직하게 된다. 그런데도, 현재 정치 이념의 혼란과 혼재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는 일정한 유용성을 제공한다. 보수주의와의 관계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실질적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를 제공하고, 반면 보수주의는 자유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변형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해 준다. 민주주의와 법치는 사실 이론적으로 오랜 긴장 관계가 존재해 왔는데, 자유주의적 가치는 그 중심과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 준다. 최근 공정성 논의에서도 자유주의는 건설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다. 여러 정치이념이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자유주의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우리 사회가 나갈 길이 어디인가를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Berkowitz, Roger & Taun N. Toay. eds. 2012.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Global Financial Crisis. NY: Fordham University Press. Brown, Wendy. 2019. In the Ruins of Neoliberalism: The Rise of Antidemocratic Politics in the West.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Deneen, Patrick J. 2018.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Hartz, Louis. 1955. 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 an Interpretation of American Political Thought since the Revolution. NY: Harcourt Brace. Hobbes, Thomas. 1996 (org. 1651). Leviathan. ed. Richard Tuck.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Kirk, Russell. 1986. The Conservative Mind: From Burke to Eliot. Washington DC: Regnery Publishing. Locke, John. 1988 (org. 1689). Two Treatises of Government. ed. Peter Lasket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Maravall, José & Adam Przeworski. eds. 2003. Democracy and the Rule of Law.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Mill, John Stewart. 2007 (org. 1851). On Liberty and the Subjection of Women. ed. Alan Ryan. NY: Penguin Classics. Strauss, Leo. 1965. Natural Right and Histor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Strauss, Leo. 2007 (org. 1929). “Notes on Carl Schmitt,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in Carl Schmitt.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trans. George Schwab.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강정인·김현아. 2006.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로의 수렴?” 『사회과학연구』 14(2). 김도균. 2020.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우리 헌법에 담긴 정의와 공정의 문법』 아카넷. 김석호 외. 2021. 『공정한 사회의 길을 묻다』 시공사. 문지영. 2011. 『지배와 저항: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 후마니타스. 문지영. 2019.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한국의 헌법 이념 : 헌법 전문 개정의 쟁점을 중심으로” 『인간 환경 미래』 23호(가을). 박성우. 2021.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인간성, 국가성, 세계성에 대한 성찰”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워킹페이퍼     [1] 2008년 금융위기와 자유주의의 연관성을 정치사상적으로 검토한 편집본으로 Berkowitz & Toay (2012)를 참조. 특히 신자유주의가 반민주적 정치 집단과 연계될 가능성을 비판한 연구서로 Brown(2019)을 참조. [2] 우리 헌법에 담긴 공정과 정의의 가치에 대해서는 김도균(2020)을 참조. [3] 코로나 사태 이후 국가의 권한의 확대와 이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서는 박성우(2021)를 참조. [4] 미국 건국에서 자유주의적 토대에 대해서는 하츠(Hartz 1955)를 참조.     ■ 저자: 박성우_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시카고대학교 강사, 중앙대학교 부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정치사상과 고전정치철학이다. 저서로 《영혼 돌봄의 정치: 플라톤 정치철학의 기원과 전개》가 있고, 대표 논문으로 ‘이라크 전쟁의 레오 스트라우스 책임론에 대한 정치철학적 비판’, ‘국익추구의 도덕적 한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의 정치’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하은_EAI 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8) | hyoon@eai.or.kr  

박성우 2022-03-15조회 : 18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