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지속적으로 연평균 경제성장률 9%를 상회하는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중국의 고속 성장은 국내 및 지역적 차원을 넘어 지구적 변화를 견인하고 있으며, 이는 안보와 경제 등 전통적 이슈뿐만 아니라 에너지와 환경 등 신흥 이슈에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중국의 변화가 인류의 공생과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바람직한 아태 질서 설계도를 마련하고, 한국의 역할을 제시하고자 EAI는 2018년 “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이라는 중장기 연구사업을 기획하여 운영하고 있다.

 

아-태 에너지·자원 협력 구상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중 간의 무역 분쟁은 무역과 기술 영역에 대해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금융과 에너지, 군사·안보 부분에는 아직 대립이 본격화되고 있지 않다. 동아시아 연구원은 아-태 지역에서 에너지·자원 분야의 협력이 미·중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오히려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미완의 영역이자 가능성을 지닌 영역으로 바라보고, 중견국인 한국이 주축이 되어 미·중 간 협력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연구를 진행한다. <아-태 에너지·자원 협력 구상>은 한샘DBEW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 중인 <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 프로젝트(2018-2021)의 제2차년도 사업이다.

논평이슈브리핑
[EAI 논평] <미중 경쟁의 미래 - 기술 편> 미중 기술패권전쟁: 반도체·5G·인공지능 부문을 중심으로

.a_wrap {font-size:14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0px;} 편집자 주 EAI는 중국의 미래 성장이 인류의 공생과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바람직한 아태 질서 설계도를 마련하고 한국의 역할을 제시하고자, 2018년부터 “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이라는 중장기 연구사업을 기획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 사업의 첫 단계 연구가 마무리됨에 따라, EAI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지난 4~5월에 걸쳐 영문 워킹페이퍼 시리즈로 발간하였습니다. 그 후속 시리즈로, EAI는 미중 관계의 미래를 조망하는 4편의 보고서로 구성된 “미중 경쟁의 미래: 4단계 경쟁 동학" 스페셜 이슈브리핑 시리즈를 기획하였습니다.  그 시리즈의 두 번째 보고서로, 배영자 건국대 교수가 집필한 미중 기술패권전쟁에 관한 이슈브리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미중 간의 패권경쟁이 무역 부문을 넘어서 첨단기술 부문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반도체와 5G, 인공지능이 경쟁의 핵심 영역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양국 간의 기술경쟁이 관세 압박, 기업거래제한, 해외투자규제 등과 연계되어 지속될 경우, 글로벌 공급사슬의 양분화로 이어지면서 세계경제질서 재편이라는 결과까지 낳을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특히, 글로벌 공급사슬이 양분화될 경우, 한국처럼 미중 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국가들은 양자택일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 있는 바, 미중 기술 갈등이 보편적 규범을 벗어나지 않은 선에서 관리될 수 있도록 타협점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문제 제기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은 21세기 세계정치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최근 양국 무역갈등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무역갈등의 핵심으로 반도체 및 5G 통신장비 등 첨단 기술이 주목을 받고 있다. 첨단 기술 부문에서 미국이 누려온 견고한 우위에 도전하는 중국과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지하려는 미국이 관세부과, 해외투자 규제, 거래 제한, 지적재산권 논쟁 등의 형태로 날카롭게 부딪치고 있다. 양국 기술 경쟁의 주요 전장인 5G, 반도체, 인공지능 기술은 소위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을 견인하는 핵심 영역이다. 오사카 G20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추가 관세 부가 없이 무역협상을 지속하기로 합의하면서 고조되었던 위기의식은 잠시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첨단 기술 부문에서 갈등의 소지가 남아있고 이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술을 둘러싼 강대국들 간의 경쟁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가깝게는 1980년대 세계 및 미국 시장에서 일본 자동차, 반도체 기업들이 약진할 당시, 미국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의 기술을 훔치고 있으며 군사적으로 민감한 제품들을 소련에 팔고 있다고 비난하였다(Johnson 1991). 1982년 IBM은 히타치가 기술을 몰래 빼냈다고 고소하였고 미국정부는 기술을 소련에 판 도시바를 압박하였다. 미국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을 301조, 덤핑관세, 직권조사 등을 활용하여 공격하였고,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을 통해 100% 관세부과 및 일본 내 미국 기업들의 시장점유율 증대를 관철시켰다. 와중에 일본 후지쯔의 미국 반도체 기업 페어차일드 인수합병을 둘러싸고 미국의 견제와 양국의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결국 일본이 인수합병을 포기하였다. 다른 한편, 1957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닉호 발사에 성공한 이후 미국과 소련은 인류 최초로 달 탐사선을 착륙시키기 위한 치열한 우주기술 경쟁을 벌인 결과, 미국은 1958년 NASA를 창설하고 1969년 달 탐사선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렸다. 근대 국제정치질서에서 기술혁신이 경제적 성장은 물론 군사력의 토대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첨단 기술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세계정치경제 패권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방적기와 증기기관 철도 등 일련의 기술혁신과 맞물린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이 이를 토대로 세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전기, 화학, 자동차 기술혁신의 선두를 달린 미국이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명실상부한 세계 패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패권의 토대로서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은 널리 인식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패권국들 간의 기술 경쟁과 갈등은 이전에는 군사나 경제 갈등에 비해 관심의 전면으로 부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최근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에서 특히 기술이 두드러지는 핵심 분야가 되고 있을까? 현재 양국의 기술 경쟁 및 갈등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미중 기술경쟁이 세계 정치경제질서와 패권 변화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을 중심으로 먼저 미중 기술경쟁과 패권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이후 반도체, 5G, 인공지능 분야에서 미중 기술경쟁 양상을 고찰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중 기술경쟁이 세계정치경제 질서를 어떻게 변화시켜가고 있는지 조망한다.   패권경쟁과 기술 19세기 영국 제국의 확장과 운영에 기술적 토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당시 영국은 스스로를 ‘기술의 거인’(Titans of Technology)이라고 할 만큼 타국에 비해 기술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Kubicek 1999). 그러나 19세기 후반 독일과 미국에서 기술혁신과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양국은 강철, 화학, 전기 등의 부문에서 영국을 추월하게 되고 이는 영국 패권에 대한 도전이 진행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패권의 토대로서 기술의 중요성은 널리 인식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패권국의 부상과 쇠퇴를 기술에 초점을 맞추어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연구는 많지 않다. 강대국의 흥망에 관한 연구들은 패권의 쇠퇴 요인으로 ‘제국적 과대 팽창’(Imperial Overstretch), ‘불관용과 배제’(Intolerance and Exclusivity) 등의 일반적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다(Kennedy 1987; Chua 2007). 올간스키의 세력전이론에서는 국력의 상대적 변화에 따라 국제 정치질서가 변화된다고 보면서 국력 변화를 가장 중요한 변수로 주목한다(Organski 1958; 김영준 2015). 이들은 국력이 국내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며, 인구, 경제적 생산성, 정치 체제의 효율성이 국력의 삼대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경제적 생산성을 측정하는데 GDP나 국가능력종합지수(Composite Index of National Capabilities: CINC)를 사용한다. CINC는 도시인구비율, 철강생산량, 에너지소비량, 군사비 등을 포함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기술혁신 요소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Singer 1980). 세력전이론은 강대국 중 하나가 산업화를 통하여 국력이 신장되어 패권국에 대한 도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체제 내의 위기가 시작되며, 도전 국가의 국력이 패권국을 따라잡는 세력전이 현상이 일어날 때 국가 간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하였다. 세력전이론은 패권국 교체와 전쟁 여부를 중심으로 세계정치경제질서에서 패권국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특정 국가가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조건으로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간단히 언급했을 뿐 이 과정을 잘 설명하지는 못한다. 세계정치 리더십 장주기(Leadership Long Cycle) 이론은 세계정치경제질서의 패권국 교체를 기술혁신 중심으로 설명하였다(Modelski and Thompson 1996). 이들은 패권보다는 리더십(leadership)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1500년 이후 세계질서에서 리더십은 약 100년 주기로 교체되었으며 이는 약 50년 주기로 진행된 기술혁신 콘트라티에프 주기(이하 K-wave)와 공진화(coevolution)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콘트라티에프는 물가, 임금, 저축률 등의 지표를 토대로 세계경제에 불황과 호황의 주기가 40~50년 주기로 반복되어 왔다고 주장하였고, 슘페터는 이 주기가 기술혁신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었으며(Schumpeter 1939) 모델스키는 이를 수용하였다. 즉 이들은 K-wave가 GDP, 가격, 불황 등 일반적인 경기지표가 아닌 선도 부문(leading sector)의 부상과 성장으로 구성되며, 해당 부문에서 혁신이 군집적으로 진행되면서 세계경제의 순환을 이끈다고 보았다. 선도 부문의 기술혁신은 특정 지역 및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며 선도 부문을 이끄는 국가는 세계정치경제질서와 규범체계 재편을 주도하면서 패권국으로 부상한다. 미국은 19세기 후반 이후 전기, 철강, 전자, 석유, 자동차 부문을 선도적으로 이끌고 자국 주도의 세계정치구조와 규범 체계를 구성하면서 세계 패권국으로 등장하였고 1970년대 이후 진행된 정보통신 기술혁신을 주도하면서 패권국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현재의 세계경제는 19번째의 주기의 하강국면이 진행되면서 20번째 주기가 태동하는 시점으로 보았다. 리더십 장주기이론은 기술혁신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군집적으로 발생하고 이를 주도하는 국가가 세계정치 패권국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구체적으로 기술혁신이 리더십 혹은 패권으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메커니즘과 이후 세계정치경제 및 규범질서 재편 과정은 기존 국제정치학과 혁신연구에서 모두 충분히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다. 현재 양자의 고리는 경제위기, 신기술 투자 증가 및 혁신 활성화, 기존 기술체계와의 마찰, 위기, 전쟁 및 세계정치질서 변화, 리더십 교체, 신기술 산업의 확산과 안정화라는 일련의 개념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간단히 ‘기술과 세계정치질서와의 공진화’(coevolution)로만 설명되고 있다(Modelski and Thompson 1996). 이러한 일련의 개념들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관계에는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남아 있다. 예컨대 기존 기술체계와 신기술의 충돌로 인한 위기가 왜 반드시 전쟁을 불러일으키는지, 기술혁신을 이끄는 국가가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치며 패권국으로 부상하는지 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있다(배영자 2016). 국가별 기술혁신능력과 경제성장률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 K-wave를 선도하는 부문을 규정하고 측정하는 것은 국제정치학자들의 작업 범위를 넘는 부분이다. 여기서는 특히 패권과 기술혁신 관계를 탐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동시에 현재 미중 기술경쟁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몇 가지 관점을 제기하고 정리해 본다. 첫째 첨단 기술력에서의 우위와 패권의 관계에 대한 이해이다. 현재 많은 기사나 보고서 등은 첨단 기술력에서의 우위가 곧 패권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가정하고 미중 기술력을 비교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Abrami 2014; Atkins 2019). 이들은 중국 과학기술력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이 기초과학이나 첨단기술혁신에서 견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패권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 주장한다. 혹은 반대로 중국이 특정 분야의 논문이나 특허 수 등을 포함한 기술혁신 역량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기 때문에 곧 중국이 패권국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기술력과 패권에 대한 이러한 단순한 가정은 몇 가지 역사적 사례에 의해 의문시되며 과학기술과 패권의 관계를 보다 넓은 지평에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컨대 1712년 영국의 뉴커먼(Newcomen)이 발명한 증기 기관의 원천 기술은 1691년 프랑스의 파팽(papin)에서 유래한 것이다(김태유 외 2017).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철 생산은 세계 최고였다. 그러나 철 산업의 중심이 강철로 바뀌면서 영국의 철강산업은 미국과 독일에 추월당했다. 강철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 가운데 하나였던 베서머 공법은 영국에서 개발되었다. 하지만 이 공법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대규모 설비투자를 통해 잠재력을 극대화 한 것은 카네기철강 등 미국 기업들이었다. 19세기 중반 전신 기계의 경우도 영국에서 먼저 개발되었으나 그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서 유럽과 대륙간 전신망 부설 사업에서 큰 이익을 거두어 들인 것은 지멘스 등 독일의 기업들이었다. 미국 기술혁신의 역사적 과정에 관한 연구들은 개별 기술에서의 우위 그 자체보다는 소위 ‘미국식 제조시스템’(American Sys-tem of Manufacturing)으로 불리는 신기술에 토대한 새로운 생산방식의 등장과 확산,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대규모 시장과 풍부한 자원 등이 1900년대를 전후로 진행된 미국의 산업적 우위를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고 있다(Chandler 1990; Nelson et al. 1992). 미국은 이러한 산업적 우위에 기초하여 보다 조직화된 연구개발을 수행하면서 과학에서도 유럽을 앞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01년에서 1930년 사이 물리학과 화학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 수는 독일이 33, 영국이 18, 미국이 6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미국은 프랑스, 영국, 독일의 수상자 수를 따라잡았다(Brunnermeier et al. 2018). 최근 인공지능 부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각축전에 대해 대부분의 연구들이 미국의 기술적 우세를 논의하는 것과 달리, 리카이푸는 인공지능의 세계에서는 발견(discovery)보다는 실행(implementation)이, 전문지식(expertise)보다는 데이터가 중요하며, 중국은 실행과 데이터에서 미국을 능가하고 있어 AI 세계질서의 운동장은 중국 쪽으로 기울여져 있다고 주장한다(Lee 2018). 미국은 발견과 전문지식에서 중국을 앞서고 있으나 풍부한 데이터, 굶주린 기업가, AI 과학자, AI 친화적 정부환경의 네 가지 요소가 중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어 AI 세계질서 발전에서 중국의 역할이 주목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 역시 기술 경쟁의 역동성을 기술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넘어, 보다 넓은 맥락에서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새로운 산업이나 생산방식으로 발전되고 있는지는 물론 시장, 정부정책 등 다양한 요인을 함께 고려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최근 미중 패권경쟁에서 기술이 특히 불거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문제이다. 기술과 패권의 역동적 관계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은 기술혁신과 산업발전을 블랙박스나 외재적 변수로만 취급해 온 기존의 연구들을 비판하며 기술혁신을 세계정치경제질서 형성의 내재적 변수로 설명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Kennedy et al. 2018; Mayer 2017). 케네디 등의 연구는 패권 도전국은 기술혁신력을 지속적으로 높여야 하는 소위 ‘혁신 요청’(innovation imperative)에 당면하여 자체 개발(making), 기술이전(transacting), 기술 취득(taking)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기술혁신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기존 패권국이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견제하는 과정 자체가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보다 자세하게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전국의 기술력 향상, 기존 패권국의 기술력 약화는 미리 예정된 결과로서 국제정치질서 밖에 존재하는 외재적 변수가 아니라 도전과 응전의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를 국제정치와의 관련성 속에서 내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현재 국제정치학의 틀 안에서 과연 기술과 세계정치 관계의 내재적인 분석이 어떻게 발전될 수 있는지를 찾는 작업은 쉽지 않다. 이들은 기술의 외부효과(externality)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기술과 세계정치를 연결시키고 있다. 즉, 패권도전국의 지속적이고 다양한 기술혁신 강화 노력은 일정부분 패권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양국 간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이는 기술혁신의 외부효과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첨단 기술은 대부분의 경우 민군겸용(dual use)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패권도전국의 첨단 기술혁신이 군사안보 위협이라는 외부효과(security externality)를 낳아 패권국이 이를 주목하고 무역 투자 규제 등을 통해 기술이전과 기술취득 등을 견제하게 된다. 또 패권도전국이 첨단 기술 이전이나 취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존 패권국에 의해 제도화된 규범과 규칙 등을 위반 하는 경우 기존 질서 침해라는 외부효과(order externality)가 발생하여 패권국이 기존 질서 유지를 위한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양국 간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과거 서구권 국가들 내부에서 진행된 패권경쟁과 달리 이질적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경쟁에서는 첨단 기술의 군사적 함의와 기존 세계질서 도전이라는 외부효과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기술이 갈등의 핵심 영역으로 불거지고 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현재 미중이 마찰을 겪고 있는 반도체, 5G, 인공지능은 모두 최첨단 군사 장비의 핵심 부품이거나 핵심 군사정보 인프라와 관련 되거나 킬러로봇과 같은 새로운 무기의 출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아울러 TRIPs 지적재산권 협정이나 인터넷 자유와 같은 미국이 주관하여 제정한 국제규범에 대한 중국의 도전 및 위반을 둘러싼 갈등이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러나 현재 미중 기술경쟁이 특히 반도체, 5G, 인공지능 영역에서 특히 불거지고 있는 것은 이 기술들이 소위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의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하는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이고, 아직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이 기술들에 토대하여 새로운 산업과 경제 패러다임이 출현하면서 개별 국가 국력의 성쇠는 물론 향후 세계정치경제질서 재편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군사적 외부효과나 세계질서 외부효과와 함께 경제적 외부효과가 더욱 주목되어야 한다. 아울러 새로운 산업과 경제패러다임의 출현은 물론, 군사적 활용, 세계질서와의 관련성을 과연 기술의 외부효과로 개념 설정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도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현재 미중 양국이 경제적으로, 기술적으로 긴밀한 상호의존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과거의 역사적 패권경쟁 사례와 크게 다르다는 점도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영국, 독일, 미국이 경쟁하던 20세기 초반 서구경제 내부의 상호무역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1990년대 이후 가속화된 세계경제 통합의 정도와 비교되기 어렵다. 미국은 1990년대 이후 가속화된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글로벌 생산네트워크(global production network)를 구축해 왔고 중국은 2001년 WTO 가입 후 무역, 해외투자를 통해 네트워크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었다. 글로벌 생산네트워크 안에서 미국과 중국은 각각 우위에 있는 부분을 담당하면서 긴밀한 경쟁 및 협력 관계를 구축하였다. 상업평화론(Commercial Peace)은 국가 간 경제적 상호의존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 갈등이 파국에 이르러 전쟁이 발생할 가능이 낮다고 예측해 왔고, 이는 미국과 중국 관계에 대한 낙관론의 근거가 되어 왔다. 최근 미중 무역 및 기술 갈등 사례는 1980년대 이후 가속화되어 온 세계 경제 내부의 상호의존 관계가 변화하지 않는 상수가 아니라 변수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첨단 기술을 둘러싼 갈등을 지켜보면서 미국과 중국이 엄청난 비용과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기술 및 경제적 상호의존도를 줄이고 별도의 경제 및 기술 권역을 형성할 것이라는 예측들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 귀추가 주목된다(Bremmer et al. 2018; Luce 2018; Orange et al. 2019; Panda et al. 2019). 본 연구에서는 먼저 패권도전국인 중국이 혁신 요청에 따라 자국의 기술혁신력을 증대해 온 과정과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특히 반도체, 5G, 인공지능 분야를 중심으로 양국의 기술 경쟁 과정을 간략하게 고찰한다. 그리고 이러한 양국의 기술 경쟁이 세계정치경제 질서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본다.   미중 기술 갈등 현황: 반도체, 5G, 인공지능 중국은 19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 이후 탈중앙화와 사유화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경제를 개편하면서 현재의 기술혁신 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Fu 2014; Gu and Lundvall 2006; Lewin et al. 2016; Someren et al. 2013; Zhou et al. 2016 등). 1985년 ‘과학기술체제 개혁에 관한 중국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중앙 집권적이고 생산 부문과 분리되어 있었던 연구개발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이 진행되었다. 5천여 개의 연구개발조직들이 인수·합병되거나 생산조직 혹은 기업으로 변모하였고 경제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혁신활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되었다. 아울러 해외직접투자와 정부의 연구개발투자가 급증하면서 혁신활동이 활발해지고 단기간 내에 빠르게 혁신 역량이 제고되어왔다. 2005년 이후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에서 과학기술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양한 과학기술혁신 지원 정책을 발표하였다. 특히 자원형(資源型) 국가발전전략에서 혁신형(創新型) 국가발전전략으로 나가가야 함을 강조하면서 ‘자주창신’(自主創新)에 기반하여 2020년까지 혁신형 국가를 구축한다는 목표 하에 ‘중장기과학기술 발전계획(2006~2020년),’ ‘2050 과학기술리더 전략,’ ‘13-5 과학기술혁신 발전계획(2016~2020)’ 등 일련의 계획들을 내세우고, 세계 과학기술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기술혁신 역량강화를 중점적으로 추진해 왔다. 중국은 ‘혁신형 국가’를 GDP의 2% 이상을 R&D에 투자하고, 과학기술의 경제성장 기여도가 60% 이상이며, 지식집약형 서비스산업 생산이 GDP의 20%, 대외기술 의존도가 30% 이하인 국가로 정의하고 있다(중국 혁신주도형 발전전략 규획강요 2016년). 과학기술 강국 건설은 태산(보기에는 장엄하지만 해발이 1,545m에 불과) 몇 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티벳고원 평지(3,000∼4,000m)를 건설하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윤대상 2018). 2020년 혁신형 국가 대열에 진입하고 2030년 혁신형국가 선두에 진입하며 2050년 혁신강국으로 거듭난다는 계획을 설정해 왔다. 중국의 다양한 과학기술계획 가운데 2015년 발표한 ‘중국제조 2025’가 가장 주목 받고 있다. 이는 제조업 기반 육성과 기술 혁신, 녹색 성장 등을 통해 중국의 경제 모델을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탈바꿈 하겠다는 목적 하에 현재 주요 제조국을 등급별로 1등급(미국), 2등급(독일, 일본), 3등급(중국, 영국, 프랑스, 한국)으로 분류하고, 세계 최고의 제조 강국이 되기 위한 중국 제조업 고도화 계획을 제시하였다. 즉, 1단계(2016~2025년) 시기에는 중국이 강국 대열에 들어서고, 2단계(2026~2035년)에서 중국이 독일과 일본을 넘어 강국 중간 수준에 이르며, 3단계(2036~2049년)에서 중국이 강국 선두에 서겠다는 계획이다. 이 계획에서는 특히 핵심기술의 국산화를 강조하고 있고, 이는 2018년 시진핑의 중국과학원 중국공정원 합동연례회의 연설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핵심기술은 마음대로 받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고 구걸할 수도 없다. […] 핵심기술을 자신의 손에 넣어야만 국가경제와 국방 안전, 국가의 안전을 근본적으로 보장할 수 있으며, 핵심기술의 자주화를 실현하고 혁신과 발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노력해 달라(양정대 2018).” 중국 정부의 의지와 적극적인 지원으로 지난 20년 동안 중국의 과학기술수준은 빠르게 발전하였다. 중국의 WIPO PCT(Patent Cooperation Treaty) 특허 수는 2017년 약 4만 9천 건으로, 5만 6천 건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을 바짝 쫓고 있고, SCI 논문수도 미국의 52만 건에 이어 36만 건으로 2위를 차지했다(한중 과학기술협력센터 2018). 2017년 중국이 세계 상위 500대 슈퍼컴퓨터 중 202대를 보유해 처음으로 미국(143대)을 제치고 최다 보유국이 되었다. 중국은 현재 우주정거장 텐궁(天宮)을 보유하고 있으며 35개 인공위성을 연결해 전 세계를 24시간 내려다보며, 위치 추적, 기상관측, 자원탐사를 할 수 있는 항법시스템 구축에 착수하였고 2045년까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 우주강국이 되겠다는 우주계획을 발표하였다. 중국은 2017년 독자 개발한 대형 여객기 C919의 첫 시험비행 성공을 계기로 세계 항공업계 판도를 ‘ABC’ 구도-Airbus, Boeing, 중국 국영상용비행기회사(国家商用飞机有限责任公司 COMAC-로 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과학기술혁신의 놀라운 성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반적인 혁신 수준과 환경은 그리 높지 않게 평가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여전히 중국이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년 중국의 전반적인 혁신 지수는 세계 17위로, 특히 정부 규제, 혁신 환경, 질적인 성취 측면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있다(Global Innovation Index 2018). 중국의 임금상승과 경제성장률 하락을 감안 할 때, 중국이 소위 중진국함정(middle income trap)을 넘어 패권국으로 등극하기 위해 ‘혁신 요청’(innovation imperative)에 당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연구개발 투자를 늘리는 한편 기술이전, 인수합병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선진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이 과정에서 특히 미국 기업의 기술이전이나 인수합병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O’Connor 2019). 중국 기업의 미국에 대한 해외직접투자(FDI)는 2010년 이후 빠르게 증가하였고 2016년 469억 달러로 정점에 이르렀다가 현재 감소 중이다. 중국의 대미 FDI의 97%가 기업 인수합병이고 특히 정보통신분야와 에너지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의 보고서는 특히 중국 정부의 미국 기업에 대한 기술이전 강요, 차별적인 라이센스 제한 정책, 미국 기업 인수합병, 인터넷을 통한 지적재산권 침해 등을 통해 미국의 선진 기술들을 불법적으로 취득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USTR 2018). 보고서는 특히 중국의 미국 기업 인수합병을 통한 정보통신, 항공, 바이오 등 선진 기술 취득에 대해 자세하게 열거하고 분석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 정부는 1070억 달러의 반도체 기금을 조성하여 운영해 왔고, 2010-2016년 동안 27개 반도체 기업 합병에 370억 달러를 투자하여 필요한 기술들을 취득 하였고 현재와 같이 중국 반도체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현재 미국과 중국의 기술경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반도체, 5G, 인공지능 분야를 중심으로 중국의 기술혁신 증대 노력과 미국의 대응, 양국 간 갈등 양상을 살펴본다.   반도체 2017년도 중국 반도체 수입액은 2,596억 달러로 중국이 2017년 수입한 제품 중 수입액이 가장 큰 품목이다(김수진 2019; 배영자 2011; 이은영 2018; Ernst 2016; Lewis 2019; McKinsey 2018 등). 2017년 수입품목 2위 원유수입(약 1,606억 달러)과 비교하여도 60% 이상이나 더 많다. 2018년 중반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소비하는 규모는 약 44.2%인 반면에 자급률은 13.5%로 상당히 저조한 수준이다. 반도체 산업은 중국제조 2025의 10대 핵심 산업 중 하나이다. 세계 반도체 산업은 크게 비메모리와 메모리 두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장 규모는 7대 3 정도의 비율이다. 반도체 칩을 직접 생산하지 않고 특정 용도 칩의 설계 및 마케팅에 특화된 설계전문(팹리스 Fabless), 생산기술 및 생산비용의 우위를 바탕으로 타 기업이 의뢰한 칩의 생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공정전문(파운드리 Foundry), 조립시험전문(패키징 Packaging & Testing) 등으로 기능이 분리되고, 분업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메모리는 대부분 설계와 공정을 같이 진행한다. 미국은 세계 반도체 생산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비메모리 반도체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는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고도의 설계기술이 경쟁력의 핵심이고, 이 기술을 가진 종합반도체기업이나 설계 전문기업이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네트워크를 주도하는 핵심 기업이다. 미국 반도체 산업은 시장 규모도 크고 부가가치도 가장 높은 설계부문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현재 비메모리부문은 미국 기업이, 메모리부문은 한국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반도체 기업이 아웃소싱한 노동집약적인 조립시험 부문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기술 수준이 높은 공정과 설계 부문으로 확장되어 왔다(배영자 2011). 중국은 반도체부문의 기존 표준-반도체칩의 사양과 구체적인 공정 및 조립시험방식, 반도체 장비에 내재된 생산라인 운영방식, 반도체칩 관련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세계반도체산업 생산네트워크에 진입하였고 발전해 왔다. 중국의 반도체 부문 과학기술혁신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제조공정을 업그레이드하고 기술을 가진 외국 기업들의 인수합병이나 고급인력 스카우트를 통해 핵심 기술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Thomas 2015). 중국 정부는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까지 70%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2015년 ‘중국 반도체 산업 투자펀드’를 조성하였다(이은영 2018). 중국은 특히 팹리스, 파운드리, 메모리 부문에 집중 투자해 왔고, 지난 몇 년간 성과가 두드러졌다. 비메모리 팹리스 시장에서 2010년 약 5%대의 점유율을 기록하였던 중국은 2017년 약 11%대의 점유율을 기록하였다. Hisilicon, Unigroup 등 중국 기업의 약진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Hisilicon은 중국 통신장비회사 화웨이가 2004년 퀄컴, 인텔 등 미 기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전략적으로 육성했다. 팹리스 시장의 고속 성장에 따라 중국 자국 내에서 파운드리 서비스 수요가 증가하면서 중국의 파운드리 부문은 점유율은 2015년 11%, 2016년 12%, 2017년 13%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이은영 2018). 특히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메모리 부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메모리 부문에서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약 80%, 나머지 20%는 미국의 마이크론이 차지하고 있다. 현재까지 중국의 메모리 산업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으나 창창메모리(YMTC), 푸젠진화(福建晋华 JHICC), 허페이창신(合肥長鑫 Innotron) 등이 주목 받아 왔다. 중국은 공격적인 투자와 미국 기업 인수합병 등으로 반도체 산업 내 팹리스, 파운드리, 메모리 부문에서 약진해 왔으나 최근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각종 수출금지, 해외투자 제한 등으로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기업에 대한 공격적인 인수합병이나 불법적 기술유출을 통해 중국 반도체 기술혁신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자국 반도체 산업에 위협적이고 경제적 침략(economic aggression)이라고 판단하고 있다(White House 2018). 아울러 중국 반도체 기술의 발전이 첨단 무기 개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군사적 위협(military threat)이 되고 있다고 인식하면서 관세, 수출제한, 중국의 미국 기업 인수합병 규제, 지적재산권 소송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시도해 왔다. 2017년 12월 미국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은 중국 국영 반도체 업체 푸젠진화와 현지 합작 공장을 건설 중인 대만 UMC가 특허와 영업 기밀을 침해했다며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에 UMC는 중국 법원에 맞소송을 내며 마이크론 제품 판매 중단을 요청하였다(이수환 2018). 중국 푸저우(福州)시 법원은 마이크론이 생산하는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등 26개 제품의 중국 내 판매금지를 명령했다. 2018년 8월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산 수입품에 25% 고율관세를 부과하기로 확정하였는데 특히 '중국제조 2025' 수혜를 받고 있는 품목들, 반도체와 관련 장비를 비롯 전자·플라스틱·철도차량·화학 등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2018년 10월 미국 상무부는 중국 D램 제조업체 푸젠진화에 대한 수출을 제한하였다. 푸젠진화의 메모리 칩 제조 능력이 미국의 군사시스템용 칩 공급업체의 생존에 '심대한 위협'이라고 판단해 미 상무부는 푸젠진화를 소프트웨어와 기술 등의 수출을 제한하는 리스트(Entity List)에 올렸으며, 이에 따라 미 기업들은 푸젠진화 측에 수출하려면 미 당국으로부터 특별 승인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다. 2019년 미 상무부는 화웨이 자회사인 반도체 설계기업 하이실리콘을 거래제한 기업으로 지정했다. 하이실리콘은 미 기업의 반도체 자동화 설계 도구를 이용할 수 없게 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5년 중국 반도체 기업 칭화유니는 메모리 반도체 사업 확장을 위해 세계 3위 메모리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을 인수합병하려고 시도하였다가 좌절하였다. 2017년 중국계 사모펀드인 캐넌브리지가 미국 반도체 회사 래티스 반도체를 인수하려는 시도에 대해 "지식재산 이전 가능성과 (미국에 대한) 반도체 공급망 등을 고려했을 때 국가 안보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승인을 거부하였다. 2018년 중국계 싱가포르 기업 브로드컴이 미국 퀄컴 인수합병 시도 역시 좌절되었다(윤대균 2018). 중국 기업의 미국 기업 인수합병 좌절의 배경에는 미국 외국인투자위원회(Committee on Foreign Investment in the United States, CFIUS)가 놓여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301조 조사를 근거로 미국의 주요 산업이나 기술에 대한 중국의 투자를 제한하기 위한 조치로서 외국인투자위험 심사현대화법(Foreign Investment Risk Review Modernization Act of 2018, FIRRMA)이 국방수권법(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 of Fiscal Year 2019)에 포함되어 2018년 8월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되었다. 본 법은 CFIUS의 심사 범위를 확대하고 국가안보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적용하여 심사하며, 심사 및 조사 중 해당 투자거래를 중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등 권한을 강화하였다. 중국 역시 미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시장 독점 조사, 마이크론 삼성 하이닉스의 중국 내 독점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중국은 지적재산권 보호를 진전시켜왔으며 이로 인해 2011년 34억 달러였던 로열티 지급이 2011년 72억 달러로 증가했다고 항변하면서 중국은 지적재산권법을 위반하지 않고 있다고 방어하고 있다. 2018년 4월 미국이 통신장비업체 ZTE 제재를 가한 직후 시진핑 주석은 중국 반도체 기업 칭화유니 계열 우한신신(武漢新芯⋅XMC)을 방문하여 반도체는 중국몽(夢) 실현을 위한 심장임을 강조하면서 지속적인 기술혁신 노력을 격려하였다. 미중 무역 및 지적재산권 전쟁이 반도체 전쟁으로 구체화되면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도 차질이 예상되고 있다. 푸젠진화는 ‘중국제조 2025’ 프로그램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고 중국은 2019년 푸젠진화, 창장메모리, 허페이창신 등 3사의 약진으로 중국 메모리 반도체 생산의 원년이 될 것으로 예측했었지만 현재 미국으로부터 장비 등의 수입이 제한되면 푸젠진화의 메모리반도체 양산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당분간 중국의 반도체 굴기 노력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김수진 2019). 그러나 세계 반도체 수요의 절반에 육박하는 중국 국내 시장 수요와 중국 정부와 기업의 국산화 의지 및 투자 여력을 고려할 때, 중국은 미국의 공격으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메모리, 파운드리, 기타 팹리스나 후방 반도체 장비산업 등을 중심으로 반도체 부문에 대한 투자와 기술혁신을 지속할 것이다.   5G 새로운 통신기술이 발전하면서 통신 산업 생태계가 변화되어 왔고 기술 표준을 선점하고 시장에서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5G는 새로운 산업과 비즈니스 모델의 창출을 포함한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로서 통신 산업의 재편을 넘어 인공지능 사물인터넷과 결합되면서 많은 국내외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이지윤 2019; 삼정 KPMG 2018; 한국무역보험공사 2018; CGS 2019; Eurasia Group 2018; Kania 2018; Lewis 2019). 5G는 시장에서 통용되는 용어이고, 2015년 ITU-R 전파통신 총회에서 승인된 공식 용어는 ‘IMT-2020’이며 초고속, 빠른 응답속도를 보장하는 초저지연, 수많은 기기기의 대량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초연결을 특성으로 한다. 5G를 둘러싼 산업 생태계는 초기에는 네트워크 장비, 인프라 구축 업체, 단말기, 부품, 서비스가 활성화되다가 가상현실 등의 콘텐츠, 자율주행차 서비스를 넘어 스마트홈, 스마트팩토리, 원격의료, 스마트시티 등으로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2020년 상반기 5G 최종 표준을 채택할 예정이고, 미국, 중국, 유럽 등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5G는 포괄하는 생태계의 범위가 넓어 특정 업체가 주도하기는 어렵다. 현재 5G를 둘러싼 경쟁은 특히 장비, 단말기, 부품, 서비스 등의 영역에서 치열하다. 5G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모뎀 칩을 개발하는 통신칩 제조 부분에서는 퀄컴, 인텔 등 미국 기업의 위상이 압도적이다. 고주파수 대역에서 필요한 각종 통신장비 부문에서는 에릭슨, 노키아, 화웨이 삼성, ZTE 등이 활약하고 있다. 통신단말기 부문에서는 삼성전자와 애플의 양강 구도이나 중국 화웨이, 샤오미가 중저가 제품을 중심으로 추격하고 있다. 현재 5G 관련 지적재산권은 중국이 압도적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어 향후 5G 산업 규모가 확대되면서 중국의 지적재산권수입이 크게 증대할 예정이다(CGS 2019). 중국의 공업신식화부(工業和信息化部)는 2016년 10월 ‘차세대 정보기술 산업 계획’(2016~2020년)을 발표해 중장기 5G 이동통신 산업 발전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다(조은교 2019; Finley 2018; Kania 2018 등). 5G 이동통신을 2016~2018년 1단계(핵심기술 개발 및 시험단계), 2018~2020년 2단계(상용화 제품개발 및 실증)로 나눠 상용화를 추진하면서 과학기술부와 공동으로 'IMT-2020'을 위한 시장, 네트워크, 주파수 등의 기술요구, 국제 표준화 단체 연구교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 육성책에 힘입어 통신 3사(China Telecom, China Unicom, China Mobile)와 양대 통신장비 회사(화웨이, ZTE)가 시너지 효과를 내는 구조가 만들어져 왔다. 즉 통신사는 장비업체의 적극적인 기술 지원에, 장비업체는 통신사의 대규모 발주에 힘입어 5G 인프라를 확장하고 시장을 키워가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미중 기술 갈등의 핵심에 통신장비 및 휴대폰 제공업체 중국 기업인 화웨이가 자리잡고 있다. 1987년 창설된 화웨이는 1999년 글로벌 기업들을 누르고 중국통신장비시장에서 1위를 하고 1996년부터 동남아, 인도, 아프리카 등지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2003년 미국 시장에 진출하였다(Groll 2019; Lin et al 2018). 2010년 이후부터는 적극적인 글로벌 연구개발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급격히 확장되어 온 중국내외 통신시장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성장한 화웨이는 1년 매출액의 평균 15%를 연구개발에 쏟아 부어 기술혁신을 위해 노력했다. 현재 에릭슨, 노키아와 함께 5G 통신장비시장에서 3강 구도를 형성하는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그림 1> Top 5G Standard Essential Patent Countries 출처: CGS 2019 (data from IPlyrics)   지속적인 혁신의 성과로 특허 건수에서 화웨이는 레노버, 하이얼, 샤오미 등의 중국 기업들을 압도하는 것은 물론,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PCT(Patent Cooperation Treaty, 특허협약) 특허 수에서 삼성과 애플을 능가하고 있다(최의현 외 2018). 화웨이 PCT 특허는 2000년 1건을 시작으로 2015년 말까지 2만 722건이고, 2015년에도 세계에서 PCT 특허를 가장 많이 출원한 기업이었다. 삼성전자의 2015년 말 PCT 특허는 모두 1만 402건 정도였고, 애플은 3,335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특허의 질과 직접 관련되는 미국 등록 특허 수와 출원 특허 수에서는 화웨이가 모두 삼성과 애플에 뒤쳐져 있다. 화웨이는 2001년 미국 진출 이후 특허침해, 기술 절도 등으로 여러 차례 소송에 휘말려 왔으며 현재도 지적재산권 침해나 중국공산당과의 불투명한 관계로 심각한 비난에 직면해 있다. 2003년 미국 주요 통신장비 업체인 시스코는 화웨이가 자사 소스 코드를 도용했다며 소송을 냈고, 미국산 부품이 들어간 장비를 불법으로 이란에 공급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화웨이에 대한 의구심이 최초로 공식 표명된 것은 2005년 RAND에서 발간한 보고서에서였다(RAND 2005). 보고서는 화웨이 등 중국 기업들이 중국 군, 국가 연구기관들과 함께 ‘디지털 트라이앵글(Digital Triangle)’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화웨이는 중국 군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군은 화웨이의 중요한 고객이자 정치적 후원자, 연구·개발 파트너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정부와 군은 화웨이를 국가대표로 내세우고 있으며, 이 업체는 현재 중국 최대의, 가장 빨리 성장하는, 또한 가장 인상적인 통신장비 제조사다.” 2008년 화웨이의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 3-Com 인수 시도가 CFIUS에 의해 저지되기도 하였다. 2012년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는 화웨이와 ZTE가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보고서를 발간하였다(SCI 2012). 즉 중국산 통신장비들이 중국 정부의 사이버 공격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는 미국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고, 화웨이와 중국 공산당 관계, 화웨이 보안 위협 문제 등에 관해 투명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화웨이나 ZTE 통신장비를 도입해서는 안 되며, 미국 기업들도 이 업체들의 장비를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2015년 중국제조2025의 공표는 미국에서 중국 기술혁신에 대한 견제 분위기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이민자 2019).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 중국 기업의 미국 기업 인수합병, 미중 불공정무역, 첨단기술과 국가안보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은 일련의 문건인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301조 조사결과 보고서(USTR 2018),’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USCC)의 ‘중국시장왜곡에 대한 청문회 보고서 (USCC 2018),’ 백악관의 ‘중국의 경제침략에 관한 보고서 (White House 2018)’ 등이 발간되었다. 이들은 모두 ‘중국제조 2025’가 중국의 자주혁신 달성과 중국 기업의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미국, EU를 비롯한 선진국 첨단기술 획득을 목적으로 대규모 해외투자 전략을 시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 주도의 기술개발 해외투자는 경제침략(Economic Aggression)의 한 형태로, 이는 주요국의 핵심 기술 및 지재권을 획득하고 첨단기술을 탈취하는 것이라 비판하고 있다. 미중 무역 갈등이 심화되면서 2019년 5월 미국 상무부는 차세대 이동통신 5G 선두기업인 중국 화웨이와 68개 계열사를 ‘수출통제 기업 명단’(Entity List)에 올렸다고 발표했다. 본 리스트는 미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이 미국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거나 위험요소가 많다고 생각하는 개인, 기업, 연구기관, 민간단체 등을 등록해 놓은 목록이다. 이후 미국 기업들은 화웨이와 거래를 할 경우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구글 앱 같은 소프트웨어, 특허 사용허가권 등 지적재산권 대여도 포함되었다. 이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퀄컴 등이 화웨이에 대한 기술사용 계약을 해지하거나 거래 중단을 발표했다. 미국은 캐나다 호주 영국 뉴질랜드와 같은 동맹국들도 화웨이 통신장비 사용을 금지할 것을 압박해 왔고 현재 캐나다 호주는 이에 동참하고 있다. 미국의 강력한 견제로 현재 화웨이는 핵심 부품 및 소프트웨어를 수입할 수 없게 되어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지적재산권, 중국공산당과의 관계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맞서고 있다. 화웨이는 최근 '지적재산권 존중과 보호: 혁신의 초석' 제하의 백서를 발간하고, 화웨이가 지적재산권(IPR)의 혁신과 보호를 위해 기여한 활동 등을 소개하였다(Huawei 2019). 백서는 혁신과 지적재산권 보호가 지난 30년 이상 이어진 화웨이 성공의 핵심이었으며, 2018년 말 기준 화웨이는 8만 7805개의 특허를 받았고 이 중 1만 1152개는 미국 특허라고 기재했다. 또한 백서는 화웨이가 2015년 이후 14억 달러 규모의 라이선싱 매출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화웨이는 자사 특허를 확보하는 것 외에도 다른 회사의 지적재산권을 합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60억 달러 이상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으며, 이 중 80%는 미국 기업에게 지급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화웨이에 대한 수입 제한을 풀지 않고 있으며 화웨이는 특허소송 등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어 갈등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딥러닝의 세계 최고 권위자인 앤드류 응은 인공지능을 ‘새 시대의 전기(AI is the New Electricity)’로 표현하였다. 그만큼 인공지능은 산업 전반에 활용되면서 국내외에 걸쳐 다양한 정치경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오종혁 2018; 이왕휘 2019; Hass et al. 2018; Horowitz et al. 2018; Lee 2018). 인공지능 부문은 아직 전반적인 산업구조나 글로벌밸류체인(Global Value Chain) 관점에서 분석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인공지능 부문에서의 우위는 활용 가능한 적절한 데이터, 인력, 컴퓨팅 파워, 알고리즘, 활용을 추동하는 다양한 수요와 정책 의지의 존재 등에 의해 결정될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Horowitz et al. 2018). 현재 미국은 인력과 컴퓨팅 파워와 알고리즘 부문에서, 중국은 데이터와 수요 및 정책에서 유리한 상황이며, 특히 중국은 음성 및 안면인식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앞서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CISTP 2018; Ding 2018). 현재 중국은 인공지능 관련 논문과 특허의 수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다(김대정 외 2019; 박승혁 2019).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허의 경우 중국은 자국출원이 13,088건(95.8%)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업(5,824건)보다 대학(6,496건)이 더 많은 특허를 출원하였다. 중국은 대학주도의 학술적인 접근으로 인공지능 특허가 출원되고 있으나, 미국은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5,478건, 87.2%)이 특허 출원을 주도하고 있어 기술 상업화 경쟁력은 미국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이미 AI 기술 측면에서 미국과 양강 구도를 구축하고 있으며, 골드만삭스, 매킨지 등은 중국이 인적자원, 인프라, 산업정책에 힘입어 향후 10년 안에 미국을 제치고 전 세계 AI 기술을 선도할 것으로 전망하였다(Goldman Sachs 2017; McKinsey 2017). 2015년 중국에서 ‘인공지능’(人工智能)이 최초로 정부사업보고에 등장하였다(He 2017). 중국 정부는 2015년 ‘인터넷 플러스’에 이어 2017년 ‘차세대 인공지능 발전 규획’(新一代人工智能发展规划)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전 세계 AI 기술을 선도할 로드맵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인공지능발전의 역사적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경제 사회적 발전은 물론 국가안보 나아가 중국의 전반적인 경쟁력 강화와 도약을 위한 기회(牢牢把握人工智能发展的重大历史机遇,[…] 引领世界人工智能发展新潮流,服务经济社会发展和支撑国家安全,带动国家竞争力整体跃升和跨越式发展)다.” 중국의 주요 IT기업인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가 주도적으로 AI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오종혁 2018; 이왕휘 2019 등). 이들 기업들은 현재 서로 분업하며 중국 인공지능 분야 발전을 이끌고 있다. 바이두는 자율주행자동차 분야의 플랫폼 개발 계획인 아폴로 계획을 출범시켰다. 알리바바는 스마트 도시 건설을 위한 플랫폼인 ‘시티 브레인’ 개발 프로젝트를 맡고 있으며 저장성 항저우에 스마트 도시를 시범 구축한 데 이어 허베이성 슝안신구에 AI 등 첨단기술이 집약된 미래형 스마트 도시를 세울 계획이다. 텐센트는 의료 및 헬스 분야 플랫폼에 주력하고 있다. 중국의 막대한 인구가 쏟아내는 데이터는 전 세계 데이터의 13%를 점유하며 AI 구축에 핵심적으로 필요한 빅데이터 생성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골드만 삭스는 2020년까지 그 비중이 약 20~25%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선진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취약한 개인정보 보호 수준도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언급되고 있다. 중국에서 특히 고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금융, 온라인결제 등 차세대 산업에 필요한 안면 음성인식 기술, 휴머노이드 로봇, AI 헬스케어 기업을 중심으로 투자가 급증하고 있으며, 안면음성인식 같은 AI 기술은 금융, 자율주행 등 중국의 차세대 산업에 적용되어 중국 산업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중국이 막대한 벤처기업 투자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안면 및 음성인식, 헬스 등 일부 응용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으나, 하드웨어, 양질의 인력, 기초연구 등 전반에 걸쳐 인공지능 부문에서 미국의 우위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Ding 2018). 반도체와는 달리, 인공지능 부문에서 표면적으로 네가티브한 견제 전략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미국은 자국 AI 기술 및 기업에 대한 중국의 투자를 억제하고, 이 부문에 대한 CFIUS의 권한을 강화하고 있다(O’Connor 2019). 아울러 AI를 활용한 중국 정부의 통제와 군사적 활용을 비판하면서 중국 AI 기술 발전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Horowitz et al. 2018). 미국은 인공지능 전반에 걸쳐 우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국 인공지능 기술 발전을 위한 투자와 인력 양성 등을 강조하는 상황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임기 종료 직전 AI에 관한 보고서에서 AI 기술개발, 시민교육, 노동자 지원 등 3가지 전략 제시한 바 있다(Obama Administration 2016).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연구개발예산삭감, 반이민법 등 미국 과학기술혁신에 치명적인 조치들이 논의되면서 과학기술계와 갈등이 진행되어 왔으나, AI 연구개발·투자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발표하였다(White House 2019a).  ‘AI 이니셔티브’로 명명된 이 행정명령은 연방정부가 차세대 AI 기술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기술개발에 힘써야 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위해 중장기 연구 지원, AI 연구 증진을 위한 연방정부 정보에 대한 접근권 확대, 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교육 강화 등을 명시했다. 올해 초 국정연설에서 AI 및 5G 통신 투자 확대를 공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서명식에서 “AI 분야에서 지속적인 리더십은 미국 경제와 국가 안보 유지에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향후 중국 인공지능 부문은 막대한 데이터와 기술발전에 힘입어 새로운 응용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미국에 도전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양측은 서로 우월한 부분을 분점하면서 경쟁하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실제로 막대한 데이터와 자본, 그리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특정 부문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미국의 카드가 많지 않다. 다른 한편 미국이 우위를 보이고 있는 기초연구, 양질의 전문가 등을 중국이 단시간에 따라잡기 어렵다. 중국 교육체제, 지역격차 등을 비롯한 국가혁신체제 전반의 개혁이 필요한 부분이다. 최근 미국에서 중국 정부의 AI 기술을 활용한 감시 및 통제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증대되고 있으며(Horowitz et al. 2018; Mozur 2019), 중국의 인권의식이 성장하고 정보 통제가 강화되면서 AI 기술의 근간이 될 대용량 데이터의 수집과 활용이 지속적으로 용이할 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중국의 안면인식 기술은 이미 무단횡단 등 공공질서 위반자, 범죄자 색출 등에 이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인권침해 이슈가 논의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인터넷 통제 강화로 중국 외부 데이터의 축적이 제한되면서 중국 AI 기술의 글로벌 확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예측도 제기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미국의 기술적 우위가 압도적인 반도체 부문에서 미국의 중국 기업에 대한 다양한 제재로 중국 반도체 굴기가 상당히 지연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반도체 부문에서 현재 중국이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카드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세계 반도체 수요의 절반에 육박하는 중국 국내 시장 수요를 감안하고 중국 정부와 기업의 국산화 의지 및 투자 여력을 고려할 때 중국의 반도체 부문에서의 지속적인 혁신이 진행될 것이고 시간이 늦추어지겠지만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실현될 것으로 예측해 볼 수 있다. 인공지능의 경우 현재 산업 발전의 초기 단계이고 미국과 중국 각자의 이점에 기반하여 서로 다른 부문에 주력하고 있어 미국의 전반적인 견제와 군사 및 정부통제 활용에 대한 문제제기만 있을 뿐 갈등의 전면으로 부상하지 않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핵심 기술이나 주력 부문이 겹치면서, 그리고 인공지능의 군사적 활용이 확산되고 인공지능이 정부의 통제나 감시와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양국 간의 인공지능 부문에서 경쟁과 갈등은 치열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 5G의 경우 통신장비부문에서 미국은 핵심 칩 부문에서의 우위를 유지하고 있고 전반적으로 취약한 물리적 인프라를 만회하기 위해 5G 기술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관련 서비스 부문을 발전시키고 있다. 4G LTE 장비의 과다 경쟁과 출혈 속에서 미국이 통신장비부문에서 경쟁력을 상실했고 대신 중국 화웨이와 ZTE가 화려하게 부상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화웨이는 미중 기술 갈등의 핵심 포화를 맞고 있으며 갈등은 단기간 내에 수그러지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2018년 누설된 백악관 보고서는 미국이 5G 인프라에서 뒤처지는 것을 우려하고 중국의 사이버 첩보활동에 대비한 보안 강화를 위해, 통신장비 구매, 설치, 운영 등 절차와 관련된 연방규정을 확립하고, 주/지방정부 별로 난립하는 규정을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최선의 방안으로 국가가 직접 5G 네트워크를 구축/소유하고 이를 서비스 업자에게 임대하는 방식을 제안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었다(Swan et al. 2018). 이러한 해프닝은 5G 부문에서 미국의 초조함과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G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 역시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100여 년 전 영국과 독일은 화학, 전신, 철강 등신 과학기술부문에서 미국에 비교하여 우위를 유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술을 토대로 한 새로운 산업과 생산방식이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미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당시 미국은 넓은 영토, 풍부한 자원, 발명가와 기업가의 도전과 혁신, 정부의 적극적인 제조업 육성 지원 정책이 어우러져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국가였다. 현재 반도체, 5G, 인공지능 부문에서 미국의 핵심 기술 우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도전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는 중국 역시 방대한 인구 및 자원, 경제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혁신적인 기업가 군의 도전, 그리고 적극적인 정부 정책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잠재력이 실현될 수 있느냐는 것이고 이를 위해 중국이 넘어야 할 내적 외적 도전들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과의 무역 및 기술 갈등은 중국에게 큰 도전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중국이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중국이 이러한 도전들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기술혁신과 경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 지의 여부, 그리고 미국이 1980년대 초반 소위 IT 신경제의 부상으로 활력을 되찾고 패권을 유지해 온 것과 같이 현재 4차 산업혁명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경제적 활력을 되찾고 다시 한번 도약에 성공할 수 있을 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반도체, 5G, 인공지능 부문에서 미중의 기술경쟁을 간략히 살펴본 결과, 기술 발전이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서 진행되며 특히 세계정치경제적 요인과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기술 발전의 동기는 물론 기술 발전의 속도와 경로가 세계정치경제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며 이러한 기술 발전은 세계정치경제 질서의 변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술과 세계정치경제질서의 공진화라는 틀에서 양자의 상호관계를 보다 면밀하게 분석하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세계 정치경제질서의 블록화? 미국이 중국 기술제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고 기업 거래를 제한하며 해외투자를 규제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되어 온 자유주의 세계정치경제 질서의 변화가 예측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재화와 서비스 생산을 위해 국경을 넘는 촘촘한 네트워크, 글로벌 밸류체인(Global Value Chain, GVC) 안에서 긴밀히 연결되었던 공급체인(Supply Chain)이 미국 측과 중국 측으로 양분화될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실제로 이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의도하는 전략이라고 인식되고 있으며, 이 과정은 ‘Decoupling,’ ‘Bifurcation,’ ‘Economic Iron Curtain,’ ‘Balkanization,’ ‘Cold Tech War’ 등 다양하게 명명되고 있다(Bremmer  et al. 2018; Luce 2018; Orange et al. 2019; Panda et al. 2019). 2018년 화웨이는 92개 핵심 부품 공급자 명단을 공개하였는데, 이 가운데 33개 기업이 인텔, 시린스, TI 등 과 같은 미국 기업이었다(Rollet 2019). 트럼프 행정부가 화웨이와의 거래 금지를 담은 행정 명령을 발표한 직후 인텔, 구글, 퀄컴 등의 미국 기업들이 화웨이와의 거래를 중단하였다. 또한 관세부과 압력으로 중국에 있는 외국 기업들이 규모 축소나 철수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GVC가 재편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전자제품, 의류, 자동차 등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국가들이 연결된 공급체인이 두드러지는 바, 화웨이에 대한 압박이 타 부문에까지 확대되고 아시아 지역 전역으로 확장될 것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박, 기업거래 제한, 해외투자 규제 등이 장기적으로 지속되어 실제로 지난 수 십 년 동안 구축되어온 GVC가 분리되고 기술제품 공급체인의 양분화 과정을 겪게 된다면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이슈를 제기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실제로 트럼프 정부의 의도대로 GVC가 나뉠 것인지, 어느 정도 수준으로 양측의 공급체인이 분리될 것인지에 대한 여부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시장과 정부 정책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온 GVC를 인위적으로 나누는 것은 적지 않은 경제적 비용과 정치적 부담을 가져오게 될 것이고, 뒤따라오는 세계 경제 침체를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예컨대 애플의 경우 지난 십여 년 동안 중국 협력 업체가 급증하였고 중국에 약 380개의 생산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이 가운데 약 30%를 중국 이외의 지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아직 실행여부는 불확실하고 이것이 애플에 큰 부담이 될 것은 확실하다(Kynge 2019). 둘째는 미국과 중국 이외의 많은 국가들이 어느 쪽의 GVC를 선택해야 하는지 압력을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이나 EU와 같이 중국, 미국과 동시에 연결된 GVC 안에 놓여진 국가에게 고통스러운 과정과 결과를 수반하는 선택일 수 밖에 없고 대안을 찾기도 쉽지 않다(CGS 2019; Lucas 2019). 이 국가들이 어느 쪽에 참여하게 될 지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24개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평균 중국 수출 비중이 24%인 데에 비해 미국 수출 비중은 그 절반 수준인 12%이다. 경제적인 논리로만 보면 중국 측을 선택하는 것이 맞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구축해 온 안보 협력, 보편화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축으로 구축된 세계정치경제질서 등을 고려하면 선택이 복잡해 질 수 있다. 21세기 전반부 동안 미중 패권경쟁이 진행될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한국이나 세계 경제를 위해 최선의 길은, 세계정치경제질서가 미국과 중국을 축으로 분리되는 것보다 보편적인 원칙이나 규범을 크게 위반하지 않는 수준에서 미중 기술 갈등이 관리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구축되어 온 GVC 안에서 양대 수혜자였고, 자유주의 세계경제질서 속에서 인력과 자본의 이동을 통해 미국과 중국 양국의 번영에 기여해 왔음을 인지하고 전면적 충돌을 피하고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해야 한다(Thomson and Bremmer 2018). 미중 기술패권경쟁으로 세계정치경제질서가 어떻게 재편될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은 과연 중국이 당면한 여러 가지 국내외적 도전들을 적절히 극복하면서 지속적인 기술혁신과 이에 토대한 새로운 산업과 경제 패러다임을 주도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지의 여부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중국에게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중국이 과연 기술혁신과 경제적 성장에 기반하여 어떤 국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지, 다른 국가에게도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규범을 중국이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 한 연구는 중국이 실현하는 데 실패한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19세기 문제의식의 21세기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Hui 2016). 중국이 미국을 물질적으로 따라잡는 것을 넘어 기술과 물질적 우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도(道)가 무엇인지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가 인용한 장자(莊子)의 ‘포정해우’(庖丁解牛) 고사를 소개해 본다. ‘포정(庖丁)’은 소를 잡아 뼈와 살을 발라내는 사람을 말하고, ‘해우(解牛)’는 소를 잡아 뼈와 살을 발라내는 것을 말한다.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가 소에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려 칼을 움직이는 동작이 모두 음률에 맞았다. 문혜군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어찌하면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포정은 칼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손끝의 재주 따위보다야 우월합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그러면 천리(天理)를 따라 쇠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보통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이 고사는 기술의 뛰어남은 필연적으로 정신적인 道와 결합될 때 성취될 수 있고 기술과 도(道)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미국과 중국의 기술경쟁도 물질적이고 실질적인 힘만을 겨루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이념적이고 정신적인 도(道)의 문제이며 미국과 중국이 새로운 기술을 토대로 하여 형성되는 21세기 세계정치경제질서를 어떤 규범과 이념으로 이끌어 가려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     ■ 저자: 배영자_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국제정치경제, 해외투자의 정치경제, 과학기술과 국제정치, 인터넷과 국제정치, 과학기술외교이다. 주요 저서 및 편저로는 《네트워크와 국가전략》(2015 공저), 《네트워크로 보는 세계 속의 북한》(2015 공저), 《중견국의 공공외교》(2013 편저)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최수이 EAI 선임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6) I schoi@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배영자 2020-06-05조회 : 9401
논평이슈브리핑
[EAI 논평] <미중 경쟁의 미래 - 무역 편> 미중 무역전쟁: 다차원적 복합 게임

.a_wrap {font-size:14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0px;} 편집자 주 EAI는 중국의 미래 성장이 인류의 공생과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바람직한 아태 질서 설계도를 마련하고 한국의 역할을 제시하고자, 2018년부터 “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이라는 중장기 연구사업을 기획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 사업의 첫 단계 연구가 마무리됨에 따라, EAI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지난 4~5월에 걸쳐 영문 워킹페이퍼 시리즈로 발간하였습니다. 그 후속 시리즈로, EAI는 미중 관계의 미래를 조망하는 4편의 보고서로 구성된 “미중 경쟁의 미래: 4단계 경쟁 동학" 스페셜 이슈브리핑 시리즈를 기획하였습니다.  그 시리즈의 첫 번째 보고서로, 이승주 EAI 무역•기술•변환센터 소장(중앙대 교수)이 집필한 미중 무역전쟁에 관한 이슈브리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미중 무역전쟁이 단일 쟁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러 쟁점과 연계되어 전개되고 있고, 미중 양자 차원뿐만 아니라 우방국을 포함한 다자 차원에서 협력과 갈등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차원적 복합 게임’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미중 무역전쟁이 복합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은 그 근저에 ‘패권경쟁’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양국 간 무역전쟁이 점차 세계경제질서 재편을 위한 시스템 경쟁으로 확대되면서 지구화,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합니다.     들어가며 트럼프 행정부가 공세를 취하는 측면이 부각되고 있지만, 미국과 중국이 전개하는 게임의 내면은 매우 복합적이다. 이는 문제의 원인이 복합적인데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다. 현재까지 전개된 무역전쟁에서 미중 양국은 전선을 확대하고 주요 쟁점에 대하여 자국의 입장을 강경하게 고수하여 갈등 수위를 높이면서도, 결정적 파국에 이르는 선택은 회피하는 ‘투이불파’(鬪以不破)의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 무역 불균형 문제에서 시작하여 전선을 기술 및 산업정책, 기술 탈취, 발전모델의 문제로 확대하고, 이 과정에서 수차례 무역협상을 결렬시키는 등 미중 양국은 확전을 과감하게 선택하기도 하였으나, 결정적 순간에는 다시 협상을 재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중 무역전쟁은 일차적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의 분쟁이지만, 경제적 파급 효과와 세계 경제 질서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구적이다. 현재의 무역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게임이지만, 동시에 주요국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지구화된 게임임을 의미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들에게 화웨이 장비를 설치하지 않도록 요청하고(Sanger 2019/1/26), 중국이 이에 대응하여 화웨이(华为技术有限公司: Huawei)와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주요 다국적 기업들에게 요청한 것은 이미 미중 무역전쟁이 지구화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Corera 2019).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대로 중국산 수입품에 25%의 관세가 부과되고, 중국 역시 미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5~25%로 인상할 경우, 2021년 미국과 중국의 GDP는 각각 0.2%, 0.5%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역 전쟁이 자본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경우, 미국과 중국의 GDP 감소폭은 0.7%와 0.9%까지 확대되고, 세계 경제를 약 6,000억 달러 감소시키는 효과를 초래할 것으로 추산된다(Holland and Sam 2019). 이처럼 미중 무역전쟁은 양국 간 무역 불균형을 완화·해소하는 차원을 넘어서 미래 경쟁력의 선제적 확보와 세계무역질서의 개혁을 둘러싼 갈등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회성 현상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미중 무역전쟁은 갈등의 지구화와 상시화를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  이 글은 미중 무역전쟁이 ‘다차원적 복합 게임’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데 주목한다. 다차원적 복합 게임은 미국과 중국이 단일 쟁점이 아니라 여러 쟁점을 긴밀하게 연계하고 갈등과 제한적 타협이라는 이중 동학을 전개하는 동시에, 양자 협상을 중심축으로 하되 향후 다자 수준의 협상과의 연계를 고려하여 진행하는 게임을 말한다. 다시 말해, 미국과 중국은 (1) 무역 불균형의 시정, 공급 사슬의 재편, 기술경쟁 등 다양한 쟁점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제기하고 있으며, (2)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투사된 패권경쟁을 무역전쟁에 투사하며, (3) 경쟁과 갈등의 장으로서 양자/지역/다자 구도를 긴밀하게 연계하여 자국에 유리한 세계경제질서를 구축하는 게임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에는 무역 불균형, 첨단 기술의 지적재산권 탈취, 정부 보조금과 규제 장벽을 포함한 불공정 무역 관행, 미래 경쟁력, 중국 발전 모델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 패권 경쟁 등 다양한 요인들이 혼재되어 있다. 미중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갈등과 경쟁이 비교적 단기간에 광범위한 쟁점 영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후 미국과 소련의 경쟁의 경우, 체제 경쟁의 성격을 가졌으나 기본적으로 군사안보 분야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된 미일 무역분쟁에서 미국은 양자 차원에서 공세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궁극적으로 G7이라는 글로벌 거버넌스 안에서 일본과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취했다(Beeson and Bell 2009). 반면, 미중 무역전쟁은 경제와 안보 분야의 경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 분야 내에서도 무역 불균형 및 기술혁신, 산업정책, 발전모델 등 다양한 쟁점에 대한 갈등이 짧은 기간 내에 압축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면에서 과거 사례와 차별화된다. 갈등의 압축적·동시다발적 진행은 갈등의 효과적 관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우선, 미중 관계의 불확실성이 증폭될 가능성 높다. 갈등이 압축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초래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에 양국 관계의 불확실성이 커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개별 분야의 갈등 수준과 총체적 갈등 수준 사이에 인식의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다. 갈등이 여러 쟁점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대다수 쟁점에 대해 합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더라도 일부 쟁점에서 이견이 남아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쟁점에 대한 이견이 부정적 영향을 끼쳐 총체적 갈등의 수준을 높이는 예기치 않은 결과가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행정부 무역 정책의 특징과 미국의 대중 위협 인식 현재까지 나타난 트럼프 행정부 무역 정책의 특징은 과정보다는 결과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실용적 결단’(pragmatic determin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TPP 탈퇴, NAFTA 재협상, KORUS FTA 개정 등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실용적 결단은 비전통적 또는 파격적 방식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무역확장법 201조에 근거하여 구제 조치를 허용한다거나 301조를 발동하고, 전통 우방국을 상대로도 중상주의적 접근을 불사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미중 양국 간 무역의 비대칭적 상호의존을 적극 활용하고 중국에 대하여 징벌적 관세를 과감하게 부과하는 등 실용적 결단은 미중 무역전쟁에서도 발견된다. 트럼프 행정부 무역 정책의 두 번째 특징은 국내적 차원에서 의회를 우회하는 수단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는 물론, 미국 정치의 기득권 집단과 불편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확장법 301조, 세이프가드 등을 선호하는 것도 미 의회를 우회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미 의회를 우회하는 것이 신속한 결과를 도출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세 번째 특징은 경제와 안보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에서 미국의 번영을 국가 안보의 문제로 정의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2017). 국가안보전략은 “안보 정책과 마찬가지로 통상 정책도 미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일조해야 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가 주권을 수호하고 미국 경제를 강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2017). 네 번째 특징은 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미국이 디지털 경제의 혁신을 선도해야 하며, 이를 위해 경쟁국이 지적재산권을 탈취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이 미국 기술과 지적재산권을 획득하기 위해 비합리적이고 차별적인 노력(unreasonable and discriminatory efforts)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불공정 관행을 저지하기 위해 301조 발동 가능성을 항상 열어둘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특수성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미국이 무역전쟁을 과감하게 전개하는 이유를 입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공화당의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상원의원(플로리다)과 민주당의 태미 볼드윈(Tammy Baldwin) 상원의원(와이오밍)이 ‘대중국 공정무역 실행법안’(Fair Trade with China Enforcement Act)을 제출한 데서 나타나듯이 대중 무역 정책에 대한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루비오/볼드윈 법안은 국가안보와 관련이 있는 기술과 지적재산권의 대중국 판매 금지, 연방 기관 및 계약 업체들의 화웨이와 ZTE 통신 장비 및 서비스 구매 금지, 중국 제조 2025 관련 분야 중국 투자자의 미국 기업 주식 보유 상한 설정 등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중국 강경책과 궤를 같이한다(Rubio and Baldwin 2018). 이처럼 민주당도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강경책을 적어도 총론 차원에서 부정하지는 않는다. 기술 유출에 대비한 지적재산권 보호, 무역 불균형의 시정 등에 대해 민주당도 기본적으로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고, 전통적 지지 계층인 노동자 집단을 고려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과 중국식 발전모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민주당은 중국을 압박하는데 있어서 양자주의보다는 주요 동맹국들과의 협조를 중시한다는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국내정치적 지형은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의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지 않고 대중국 무역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의회를 우회하는 수단을 빈번하게 활용해도 미 의회가 선언적 차원의 견제에 그칠 뿐, 이를 근본적으로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즉,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과의 양자 갈등 및 협상을 지속하는 한편, WTO 개혁과 다자 차원의 새로운 무역 질서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국내정치적 기반을 확보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 전쟁에서 확전을 불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 국민의 대중국 위협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 2018년 퓨 연구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일반 대중은 중국의 군사력보다 경제적 부상을 더 큰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림 1> 참조). 미 국민의 29%가 중국의 군사력을 위협으로 인식한 반면, 58%가 중국의 경제력을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수치는 2017년보다 6% 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한 미국 일반 대중의 우려가 크다는 것을 반영한다(Pew Research Center 2018/8/28).   <그림 1> 미국인의 대중국 위협 인식(2018) 출처: Pew Research Center 2018.   미중 경쟁의 복합 게임 무역 불균형-공급 체인-기술의 연계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양자 협상을 선호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미국의 무역 불균형 구조와 관련이 있다. 미국 전체 무역 적자의 90% 이상을 중국을 포함한 8개국이 차지하고 있다. 2018년 미국의 무역 적자는 중국이 4,19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여 전체의 65%를 차지하고, 이외에도 멕시코 810억 달러, 독일 682억 달러, 일본 676억 달러를 기록하였다(Amadeo 2019).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미국 무역 적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양자 협상을 전개하는 것이 미국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고, 중국을 무역 공세의 최우선 순위에 놓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양국 간 무역 불균형은 1990년대 초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한층 빠른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무역 불균형은 더욱 확대되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중국의 대미 수출이 일시적으로 감소한 것을 제외하면 2000년대 미중 무역 불균형은 확대일로에 있었다. 무역전쟁이 본격화한 2018년에도 무역 불균형의 규모는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4,190억 달러로 증가하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그림 2> 참조).   <그림 2> 미중 무역 관계의 변화 출처: US Census. 에서 재인용.   그렇다면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역 불균형의 구체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트럼프 행정부가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중국 정부의 불공정 무역 행위는 수입과 경쟁으로부터 국내 기업 보호, 세계 시장에서 중국산 제품의 점유율 확대, 핵심 자원의 확보와 통제, 전통 제조업에서 지배력 확대, 핵심 기술 및 지적재산권 탈취, 폐쇄적인 금융시장 등 매우 다양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이 불공정 무역 행위가 기술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 핵심 기술 분야에서 대외 의존도를 낮추고, 미래 경쟁력을 견인할 첨단산업을 육성하는 정부 주도의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산업화 전략의 일환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불공정 무역 행위의 본질은 중국의 ‘경제적 침공’(economic aggression)이라는 것이다(White House Office of Trade and Manufacturing Policy 2018). 미국의 입장에서 낮은 소비 비중과 높은 저축율과 같은 중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도 무역 불균형을 초래하는 주 요인이다. 2016년 기준 중국 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GDP의 39%로 미국은 물론 주요 국가들과 비교할 때 상당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문제는 중국의 낮은 소비 비중이 개인 소비 성향의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부 정책 및 규제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며, 따라서 무역 불균형을 초래하는 구조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무역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왔을 뿐 아니라, 무역 불균형이 초래된 데에는 미국 자체의 문제도 있기 때문에 중국에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일방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은 대미 무역 흑자 규모가 절대 액수 면에서 증가해 온 것은 사실이나, GDP 대비 2007년 9.9%로 정점을 기록한 이후, 2017년 1.7%까지 감소하는 등 상대적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것은 미중 무역 불균형이 미국의 주장과 달리 적정 수준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그림 3> 참조).   <그림 3>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 변화 추이(GDP 대비)       출처: Ha (2018).   또한 중국 정부는 무역 불균형을 초래하는 구조적 원인으로 지구적 가치 사슬(global value chain)의 영향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미국 및 EU에 대해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는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2018년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 규모는 4,195억 달러를 기록하였고, 2019년 5월까지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도 1,370억 달러(수출 1,800억 달러, 수입 429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 대만, 일본, 독일에 대해서는 무역 적자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전체 무역 흑자 규모는 483억 달러 규모로 감소한다. 중국은 미중 무역 불균형을 글로벌 가치 사슬 내에서 중간재 중심의 무역이 증가하는 구조적 문제로 보고 있다. 중국의 전체 무역에서 중간재 교역 비중이 전체 무역의 약 1/3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이 글로벌 가치 사슬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가운데 미국 등 특정 국가들을 대상으로 무역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가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주요 다국적 기업들이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중국으로 생산 설비를 이전한 것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90년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무역 적자의 75%를 차지하였으나, 2017년 12% 수준으로 감소한 반면, 미국의 무역 적자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10%에서 2013년 73%까지 증가하였다(World Trade Organization 2019).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미중 무역 불균형은 세계 주요국들이 경쟁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최적의 입지를 선택하여 지구적 가치 사슬을 형성한 결과이기 때문에 중국을 문제의 근원으로 보는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미중 무역전쟁은 기술경쟁으로 전화하고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양적 성장에 그치지 않고 질적 업그레이드가 필수적이다. ‘중국 제조 2025’는 주요 첨단 산업에서 대외의존도를 낮춰 자립도를 높이려는 시도이다. 구체적으로 중국 제조 2025는 차세대 정보기술, 로봇, 항공우주, 해양공학, 고속철도, 고효율·신에너지 차량, 농업 기기, 신소재, 바이오 등 미래 핵심 10대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노동집약산업 위주로 성장하였던 중국 경제를 고부가가치 산업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중국 정부는 첨단 컴퓨터 기반 기계의 자급율을 80%까지 높이고, 산업용 로봇의 연간 생산량을 10만대까지 늘리며, 빅데이터 및 클라우드 컴퓨팅을 IoT와 통합하는 중국 기업의 자립 능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려는 계획을 중국 제조 2025를 통해 공식화하였다(U.S. Chamber of Commerce 2017). 중국의 부상은 2000년대 초반까지 전통 제조업에 기반하여 이루어져 왔으나, 2010년대 들어 중국의 추격은 첨단산업 분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1년 중국이 중상위 기술 산업(medium high technology industries) 분야에서 미국을 추격하는 데 성공한 것이 이러한 변화의 전조이다. 중상위 기술 산업에서 2016년 중국이 1조 달러를 상회하는 매출을 기록한 반면, 미국은 2011년 이후 매출의 절대 규모가 감소하는 등 미중 양국의 제조업 기반은 매우 대조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National Science Foundation 2018). 중국의 추격은 전세계 ICT 산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할 경우, 전세계 ICT 산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4%로 24%를 기록한 미국과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그림 4> 참조). 더욱이 컴퓨터, 통신, 반도체 등 주요 ICT 산업에서 중국은 미국을 추격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통신 분야 등에서는 오히려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National Science Foundation 2018).   <그림 4> ICT 산업 국가별 비중 출처: National Science Foundation (2018).   중국의 미래 경쟁력은 연구개발 분야에서도 감지된다. 2017년 미국과 중국의 연구개발 규모는 각각 4,960억 달러와 4,080억 달러로 전세계 연구개발 지출 가운데 26%와 21%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개발비의 증가 속도를 보면, 중국의 연구개발 액수는 2000년 이후 10배(연평균 18%) 증가하였고 2008년에서 2012년 사이에도 2배 증가하였다. 반면, 미국의 연구개발비 규모는 39%(연평균 4%) 가량 증가한 데 그치고 있다. 앞으로 중국과 미국의 격차는 더욱 벌어져 2024년 중국의 연구개발비는 6,000억 달러를 돌파하는 반면, 미국의 연구개발비는 500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측된다(<그림 5> 참조). 첨단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벤처 캐피털의 규모에서도 중국은 2013년 30억 달러에서 2016년 340억 달러로 증가하여 세계의 27%를 차지하였다. 특허 출원 건수에서도 연평균 13.4% 증가하여 2017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가 되었고, 2018년 세계 1위의 특허 출원국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림 5> 주요국의 연구개발 지출 규모 변화 추이 및 전망 (2000~2024, 백만 달러) 출처: OECD Science, Technology and Industry Outlook 2014.   미국은 중국 정부의 이러한 시도가 국내 기업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중국 정부가 첨단 산업 분야에서도 보조금 지급 등 기존의 산업정책을 지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와 기업의 특수 관계를 기반으로 첨단 산업을 육성하고, 때로는 해외 기업에 차별적 조치를 부과하는 등 포괄적 불공정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문제를 제기하는 산업정책의 사례는 매우 다양하다. 신에너지 차량(new energy vehicles: NEC)은 정부 주도로 성장한 대표적인 산업이다. R&D 지원, 구매 지원금, 조세 감면, 정부 구매, 충전 인프라 건설을 위한 자금 지원 등을 모두 포함한 중국 정부의 지원 규모는 약 585억 달러 규모로, 이는 민간 기업이 투입한 재원의 약 42%e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Kennedy 2018, VI). AI 산업 역시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산업이다. 중국 정부는 13차 5개년 계획, 인터넷 플러스(互联网+), 차세대 AI 발전계획(新一代人工智能发展规划) 등 일련의 정책을 통해 AI 분야를 체계적으로 육성해왔다. 이를 통해 중국 정부는 2020년까지 1조 위안(1,500억 달러) 규모의 국내 AI 시장을 형성하고, 2030년까지 AI 선도국으로 부상하겠다는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 알리바바, 바이두, 텐센트 등 민간 기업들도 자율주행 자동차, 스마트시티, 의료 이미지 등의 분야의 AI를 개발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에 가세하고 있다(McKinsey Global Institute 2017). 이러한 노력의 결과, 중국 정부는 음성 인식과 이미지 인식 기술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 있고, 적응적 자율 학습, 직관적 인식, 집단 지성 분야는 교차 개발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정보 처리, 산업용 로봇, 서비스 로봇, 무인 주행 등은 실용 가능한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는 내부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State Council 2017). 디지털 무역 분야 역시 중국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분야이다. 중국 국가통계국(国家统计局)에 따르면, 중국의 온라인 소매 시장의 규모는 2018년 1조 3,300억 달러에 달하였는데, 이는 2017년에 비해 23.9% 증가한 수치이다. 중국은 국내적으로 온라인 상거래 규모가 급속도로 증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무역에 대해서는 보호주의적 접근을 하고 있다. 미국 통상대표부가 2016년 대외무역장벽보고서(2016 National Trade Estimates of Foreign Trade Barriers)에서 지적하였듯이 중국 정부가 인터넷 필터링을 통해 사실상 해외 공급자들을 차단함으로써 국내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실질적으로 조성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중국 당국은 세계적으로 인터넷 트래픽이 가장 많은 25개 사이트 가운데 8개를 차단하였는데, 이는 디지털 무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USTR 2016). 또한 중국 당국이 애플 아이튠즈 영화와 아이북스 스토어, 디즈니라이프 서비스를 구체적 설명 없이 중단시키는 등 인터넷 시장의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데 대한 미국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CRS 2017). IT 기술 도용 역시 디지털 무역의 저해 요인이다. 중국은 지적재산권의 최대 도용 국가로 파악되고 있다. 미국 측은 미국 기업에 대한 중국 측의 지적재산권 도용 규모는 2천 4백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이승주 2018).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이 국내 기업에 대한 철저한 보호, 미국 기업의 기술 탈취, 미국 기업에 기술 이전 강요 등 불공정한 방법을 통하여 기술 추격이 이루어졌다(White House Office of Trade and Manufacturing Industry 2018). 물론 특허의 질적 측면에서는 아직까지 미국이 우세하기 때문에 혁신을 선도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미국이 기술 혁신과 시장 선도 능력을 얼마나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가 향후 미중 경쟁의 관건이 될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무역 불균형에 대한 갈등을 넘어 기술전쟁으로 확전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러한 인식의 일단은 2018년 4월 미국 통상대표부(United States Trade Representative: USTR)가 1,300개 품목에 대한 관세 부과를 발표하면서 ‘중국 제조 2025’를 통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품목을 선별적으로 포함시킨 데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중국 정부는 중국의 기술 혁신은 자국 기업들의 자체 역량에 기반한 것일 뿐, 지적재산권의 탈취나 강요된 기술 이전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国务院新闻办公室 2019). 이처럼 미중 양국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뿐, 입장 차이를 전혀 좁히지 못하고 있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가 기술 혁신과 주요 산업에서 중국의 부상에 직면하여 AI, 5G 네트워크, 로보틱스, 빅데이터 등 첨단 산업 분야의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선제적 조치를 취하는 것은 어쩌면 예견된 선택일지도 모른다. 장기적으로 미국과 중국은 미래 경쟁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독자적 플랫폼을 형성하고 이를 확대하기 위한 경쟁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첨단 산업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별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을 연계하는 플랫폼을 형성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은 자국의 표준을 확대하는 제도적 기반으로서 새로운 세계 무역 질서를 주도적으로 수립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펼칠 것이다. 협상 전술 면에서 미국과 중국은 현재의 문제 해결과 미래의 경쟁력 확보라는 복합 게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국산 수입품에 대하여 301조를 발동한 데서 잘 나타나듯이, 단기적으로 미국은 무역 불균형을 감축하기 위한 직접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 견제를 통해 미중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접근법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미국은 무역 전쟁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정책 조합을 찾기 위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같은 맥락에서 미국대외투자위원회(Committee on Foreign Investment in the United States: CFIUS)를 통해 중국의 대미 투자 제한을 강화하고 있다. 미 재무부 또한 미국대외투자위원회가 해외 기업의 대외 투자를 직접 관리하도록 권고한 데서 나타나듯이, 미국 정부는 앞으로도 새로운 입법을 통해 미국대외투자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는 일차적으로 중국 기업들이 미국 기업과의 합작, 불공정 라이센스, 미국 기술 기업 인수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미국의 핵심 기술을 불공정하게 획득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또한 미국대외투자위원회의 제도적 강화는 중국이 첨단 산업 분야의 가치 사슬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로 상향 이동하려는 중국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 목표가 있다. 미국대외투자위원회의 권한 강화가 핵심 기술 보호는 물론, 국가 안보와 미래 미국의 경제적 번영을 위협하는 약탈적 투자 관행에 대처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Lawder and Chiacu 2018).   경제-안보 연계 미중 무역전쟁은 주로 현 시점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처럼 보이나, 그 근저에는 기술 경쟁이 작용하고 있다. 화웨이 사태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듯이 미중 양국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치열한 경쟁을 전개하고 있다. 기술 경쟁은 무역 불균형의 한 원인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문제인 동시에, 미래 산업 경쟁력의 기반이라는 점에서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미국과 중국이 무역 불균형을 넘어선 기술경쟁으로 전선을 확대하는 것은 첨단 기술과 산업 분야의 경쟁력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미래 경쟁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안보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Navarro 2018). 화웨이에 대한 미국 측의 문제 제기는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미 의회는 2012년 화웨이와 ZTE에 관하여 작성한 보고서에서 기업지배구조의 불투명성,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 백도어 문제 등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 결과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Rogers and Ruppersberger 2012). 미국 내에는 기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경제와 안보를 통합하는 전략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강력하게 대두하고 있다. 중국의 기술 추격이 무역 불균형과 산업 경쟁력의 문제로 이어질 뿐 아니라, 미국의 국가 안보에도 위협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지정학적 목표를 위해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야 할 필요성이 점증하고 있음에도 과거 행정부들은 경제와 안보의 통합 전략을 수립·실행하는 데 있어서 국내적으로 제도적·정치적 제약에 직면했던 것이 사실이다(Blackwell and Harris 2016).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은 기존 행정부의 비판적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기업이 미국의 핵심 기술을 획득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국가안보검토(national security review)를 강화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미중 경쟁의 다차원화: 양자-다자 연계와 시스템 경쟁 이중 동학과 양자-다자 연계 미중 무역전쟁은 일대일 양자 게임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자국에 유리한 세계경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전초전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중 무역전쟁은 다차원화하고 있다. 즉, 미국과 중국은 양자 차원에서 위협과 보복을 포함한 치열한 경쟁을 전개하는 한편, 세계경제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치열한 전략적 경쟁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최근까지 유지되고 있다. 우선, 양자 차원에서 2019년 5월 9일 미중 양국은 상당수 쟁점에 대하여 견해가 좁혀지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지방 정부 보조금, 사이버 보안법, 외국인 투자법 등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 결과 협상이 결렬되었다. 2019년 5월 10일 미국 통상대표부가 2,000억 달러 규모의 중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10%에서 25%로 인상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중국 정부 역시 600억 달러 규모 미국산 수입품 5100여개 품목에 대하여 5~25%의 보복 관세 부과를 선언하는 등 무역 전쟁은 확전의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2019년 6월 29일 G20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추가 관세 부과를 잠정적으로 연기하고 무역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한 데서 나타나듯이 미국과 중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갈등의 확전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결정적 파국은 선택하지 않았다(Liptak 2019/6/29). 미국과 중국이 협상 타결 실패 이후 무역 전쟁의 수위를 높여 나가면서도 협상을 재개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무역 전쟁의 장기화는 미중 관계가 갈등과 협상의 이중 동학을 유지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향후에도 미중 양국은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나 파국보다는 협상과 갈등, 타협과 충돌과 같은 모순이 공존하는 게임을 상당 기간 지속하게 될 것이다. 미중 양국이 협상 과정에서 특정 쟁점에 대해 타협에 도달할 수도 있으나, 타협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갈등과 협상의 이중 동학은 다자 차원에서도 전개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이익을 투사하는 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지속하는 한편, 세계경제질서 자체의 붕괴 가능성을 완화하는 데서 최소한의 공통 분모를 찾을 것이다. 다자 차원에서 미중 양국이 경쟁 일변도가 아니라 경쟁과 협력의 이중 동학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 경제 체제를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자국의 기술 및 산업 경쟁력이 향상됨에 따라 추격 성장의 시대와는 다른 이해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외국 기업의 기술 탈취보다는 자국 기업의 기술 보호, 자국 기업의 해외 진출 촉진, 해외 투자의 보호 등 일정 수준 미국과 이해를 같이 할 수 있는 쟁점의 영역이 점차 확대될 것이다. 내수 중심의 경제로의 전환, 서비스 부문 자유화, 외국 기업에 대한 친화적 정책 등을 중국 정부가 미국의 압박이 아니더라도 점진적인 변화를 추진할 분야가 있다. 리커창 총리가 하계 다보스 포럼에서 증권, 보험 등 금융 부문의 외국인 지분 투자 제한을 원래 계획보다 1년 앞당긴 2020년에 개방할 것을 시사하고(Financial Times 2019/7/2),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国家发展和改革委员会)가 네거티브 리스트를 40개로 축소하여 외국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기로 한 것이 중국의 점진적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XinhuaNet 2019/6/30). 물론 정부-기업 관계의 변화, 데이터의 초국적 이동, 개인 정보 보호, 사회적 안정을 위한 시민 및 기업 활동의 제한과 모니터링 등의 쟁점에 대해서는 미국과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국제 규범화하는데 있어서 심각한 갈등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미국이 양자주의만 고수하기 어려운 이유는 중국을 양자 차원에서 장기간 압박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것은 미중 양국 간 무역 불균형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공세적 압박을 통해 무역 불균형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게 되면, 미중 양국 간 무역 불균형의 규모가 감소하게 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 불균형을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으나, 미국이 원하는 대로 무역 불균형이 축소될수록 압박의 효과가 감소하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미중 경쟁이 ‘상호의존적 경쟁’(interdependent competition)이었다면(Wright 2017), 앞으로의 미중 경쟁은 상호의존의 수준을 낮추어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는 가운데 경쟁의 수위를 높이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축소 균형 전략이다. 현재와 같은 높은 수준의 경제적 상호의존은 미국 정부가 확전을 선택할 경우 미국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미국이 단기적 차원에서 양자 협상을 통해 중국을 압박하되, 공급 사슬의 재편과 세계경제질서의 재편과 같은 중장기적 차원의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기치로 미국 기업의 본토 회귀(reshoring)를 유도하는 정책에서 나타나듯이 미국은 자국 기업들의 공급 사슬(supply chain)을 재구성하여 독자적인 경제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미중 경제의 상호의존도를 낮추어 나가려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협상 타결에 이르더라도 양국 기업들이 이미 새로운 공급 사슬의 형성에 착수하였다는 점에서 무역전쟁의 영향은 단기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업들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에 대처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중 무역전쟁은 국내적으로 상당한 반향을 초래할 수 있다. 공급 사슬의 재편 또는 다양화를 시도할 수 있는 대기업들과 달리, 상당수 중소기업들은 공급 사슬을 신속하게 재편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Petty 2019). 또한 공급 사슬의 재편이 의도한 정책적 효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화웨이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수출 규모가 연간 110억 달러에 달하는 등 화웨이에 대한 제재가 미국 기업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인텔 등이 미 상무부의 제재를 피하여 화웨이에 우회 수출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더욱이 제재 리스트가 화웨이에 대한 수출을 전면적으로 차단할 만큼 구체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법 규정을 위반하지 않고 제3국을 통해 수출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의 화웨이 제재가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낼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일관성 있게 펼치기 위해서는 공급 사슬의 재편을 점진적으로 추구하는 한편, 양자주의와 다자주의를 긴밀하게 연계하는 전략을 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하드파워가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궁극적으로 일방주의의 효과 역시 감소할 것이므로 EU, 일본, 한국 등과의 협력에 기반한 다자 질서의 개혁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미국으로서도 유리하다. 중국의 부상 자체를 억제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에서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근본적인 딜레마가 있다. 따라서 미국은 미중 양국 간 무역의 외형적 균형을 확보하는 한편, 혁신 능력을 선도함으로써 중국과의 질적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미국은 양자적 차원에서 중국을 압박하는데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 대외적으로는 미중 무역전쟁 이후 자국의 이해관계를 보다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다자경제질서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첨단 기술에 대한 지적재산권 및 디지털 보호주의 문제와 관련해 양자 협상에 주력한 반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에서 탈퇴하고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미국이 세계경제질서의 재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한 인도의 조치에 대하여 2019년 7월 트럼프 행정부는 GATT 규정 위배를 근거로 WTO 분쟁 협의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12월 디지털 무역 관련 향후 협상에서 논의될 주요 쟁점들을 검토하는 회의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는 등 필요할 경우 WTO를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동을 고려할 때, WTO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비판은 WTO 탈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WTO 개혁을 위한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WTO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반복적으로 드러내왔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WTO 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민주당이 전통적으로 다자주의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는 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주요 선진국들과 협력하여 WTO를 개혁하고 새로운 세계 경제질서를 수립하는 전략이 국내정치적 장애도 크지 않다. 다자 경제질서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미국의 핵심 목표는 국영기업 규제, 보조금 지급에 대한 투명성 확보, 개도국 지위의 세분화와 같은 현안 문제뿐만 아니라, 미래 경쟁력의 확보와 관련된 디지털 무역에 관한 쟁점을 규범화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행정부가 한미 FTA 개정과 USMCA 재협상을 신속하게 타결한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미국이 양자 협상의 결과를 향후 진행될 다른 양자 협상의 준거점으로 삼고, 더 나아가 새로운 무역 질서의 표준으로 설정하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정부는 향후 일본과 EU 등 주요 선진국들과 첨단산업 규칙을 포함한 양자 FTA 협상을 추진하고, 이를 기반으로 중장기적으로 주요 선진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을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틀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양자와 다자 협상을 긴밀하게 연계하는 양면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은 향후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고 세계경제질서를 재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비록 탈퇴 결정을 내리기는 하였지만, TPP는 디지털 무역 분야의 세계경제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준거점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 통상대표부가 ‘TPP에서 합의된 규칙들을 디지털 무역 관련 프레임워크를 구축하는 데 활용하겠다.’고 천명한 데서 미국의 의도가 드러난다. 2018년 10월 타결된 USMCA에서도 TPP보다 지적재산권 규정을 한층 강화하고, 한 회원국이 비시장경제국과 FTA를 체결할 경우 다른 2개 회원국들은 USMCA를 종료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등 미국의 전략적 의도는 재확인되었다. 중국과의 양자 협상과 동시에 세계경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표준을 선점하겠다는 의도이다. 중국 역시 양자 차원에서 미국의 공세에 보복 관세를 부과하는 등 강경한 대처를 하는 동시에, 다자 차원의 문제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입장은 2018년 8월 3일 중국 국무원 관세세무위원회가 공고한 ‘미국산 일부 수입 제품(제2차)에 대한 추가 관세 징수 결정’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정부는 미국이 ‘WTO 원칙과 규칙을 위반하고 있고,’ ‘미국이 수 차례 협상으로 달성한 합의를 위반, 일방적으로 무역마찰 심화시킴으로써,’ ‘글로벌 가치 사슬과 자유무역체제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国务院关税税则委员会办公室 2018). 중국은 기존의 다자무역질서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 미국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무역전쟁을 양자 게임이 아니라 다자 차원의 게임으로 전환하려는 전략이다. 이와 관련, 중국 정부가 무역전쟁의 지속이 ‘미국을 포함한 세계경제의 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우선 강조하고, ‘중국 국가와 인민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침범’한다는 점을 함께 밝히는 방식을 취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역전쟁의 해결이 세계 경제의 발전과 세계경제질서의 안정에도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다른 국가들로부터 동조를 구하려는 것이다. 중국의 국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부가적으로 밝히는 방식을 통해 미국의 무역 공세에 직면하고 있는 국가들로부터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려는 의도이다.   시스템 경쟁의 복합성 미중 무역 전쟁의 이면은 시스템 경쟁의 복합성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근본적으로 전략경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주요 선진국들과 협력을 강화하는 시스템 경쟁을 추구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무역 전쟁이 미중 양자 관계를 넘어 미국이 주요 동맹국들과 공동 전선을 구축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정부는 양자주의를 통해 중국에 압박을 가하는 기존의 전략에 더하여 주요 동맹국들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중국 정부의 ‘불공정 무역 행위’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이는 전략을 병행할 것이다. 이 경우, 미국과 중국은 양자 간 경쟁을 넘어 시스템 경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최근 타결된 미국-멕시코-캐나다 자유무역협정(USMCA FTA)은 32조 10항에서 협정 당사국이 비시장경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국가와 FTA 협상을 개시할 경우 사전에 다른 두 국가에게 통보하고, 상대국들은 FTA 협상이 타결될 경우 USMCA FTA를 종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FTA 안에 이러한 규정이 포함된 것은 유례없는 일일 뿐 아니라 캐나다가 중국과 FTA를 추진할 경우 미국이 사실상 거부권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양자 차원을 넘어 지역 및 다자 수준에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와 기타 동맹국들을 대상으로 ‘반화웨이’(anti-Huawei) 연대를 형성하려는 데서 시스템 경쟁의 초기 형태가 발견된다. 미국이 전통 우방국들과 ‘패권 연합’(hegemonic coalition)을 형성할 경우, 중국 경제력에 대한 양적 우위와 그에 따른 리더십 동맹을 최소 20년 이상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미중 경쟁 구도의 변화가 초래될 것으로 예상된다. 패권 연합의 유형은 미국이 유럽,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과 연합 집단 1(Coalition Group 1)과 한국과 일본을 추가한 연합 집단 2(Coalition Group 2)로 구분할 수 있다(<그림 6> 참조). 미국이 연합 집단 2를 성공적으로 구성할 경우, 중국은 빨라야 2040년에 미국 진영의 경제력을 추월할 수 있게 된다.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6% 이하로 감소할 경우, 이 시기는 2050년 이후로 늦춰지게 될 것이다(Bergsten 2018). 그러나 시스템 경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전에 미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 역시 만만치 않다. 미국과 EU는 첨단 산업 관련 이슈들을 국제 규범화하는데 있어서 일부 핵심 사안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시스템 경쟁에 돌입하기 전에 유럽과 입장 차이를 좁히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한편, 중국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회피하는 가운데 경제력을 활용하여 개별 국가들을 설득 또는 압박함으로써 미국 주도의 패권 연합의 형성을 저지하는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양자 차원의 갈등과 협력을 지속하면서 패권 연합의 형성과 저지를 둘러싼 시스템 경쟁을 동시에 전개하는 것이다. 시스템 경쟁의 복합성은 세부 쟁점 수준에서도 나타난다. 디지털 무역 관련 쟁점이 대표적이다. 디지털 기반 경제와 무역은 미중 무역 전쟁을 구성하는 핵심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전세계 디지털 무역의 규모는 28조 달러로, 최근 5년 간 약 44% 성장하였다(USTR 2018). 미국 통상대표부가 2019년 ‘무역장벽보고서’(2019 National Trade Estimate Report on Foreign Trade Barriers)를 통해 디지털 무역 분야의 무역 장벽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에는 데이터의 초국적 이동과 데이터 국지화에 대한 제한, 클라우드 컴퓨팅 제한, 인터넷 필터링과 차단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USTR 2019).   <그림 6> 미국의 연합 집단(Coalition Groups)과 중국의 GDP 변화 전망 출처: Bergsten (2018).   EU는 인터넷 검열과 디지털 산업 정책 등 기본적으로는 중국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개인 정보 보호, 기술 기업에 대한 조세 부과, 데이터의 초국적 이동에 대해서는 미국과 상이한 입장을 취하는 등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독자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유럽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때로는 차별화된 입장을 견지함에 따라 미중 경쟁이 일대일 단순 구도에서 복합 게임으로 변화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견제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 유럽과의 견해 차이를 좁혀나가야 하는 반면, 중국은 대안적 패러다임을 유지하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이 공고한 패권 연합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유럽 국가들을 개별적으로 압박, 회유하는 복합 게임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데이터 국지화는 미국, 중국, EU 사이에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 기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82%와 52%가 데이터 국지화를 무역 장벽으로 꼽을 만큼 국지화의 의무화는 기술 기업들의 초국적 활동을 저해하는 장애 요인이다. 반면, 중국 정부는 주요 정보 인프라(critical information infrastructure) 사업자들이 중국 국민의 개인정보 및 중요 데이터를 중국 내에 저장하는 것을 의무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관점에서 데이터의 초국적 이동은 클라우드 컴퓨팅과 인터넷 기반 서비스의 제공 비용을 감소시켜 디지털 무역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EU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인터넷 안전법이 디지털 무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EU가 미국의 입장에 일방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EU는 개인 정보의 이전 등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규칙은 무역 협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상당한 제한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EU의 일반데이터보호규제(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 GDPR)가 데이터를 받는 국가가 GDPR에 부합하는 수준의 보호를 보장하고, 데이터 처리 주체가 적절한 보호 조치를 제공하며, 관련 개인이 데이터 이전에 구체적으로 동의할 때 데이터 이전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초국적 기술 기업에 대한 과세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과 유럽 사이에 입장 차이가 발견된다. EU는 초국적 기술 기업들이 유럽 각국에서 매출과 이익을 거두고 있음에도 세금을 사실상 회피하는 것은 시장 경쟁의 관점에서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전세계 매출이 7억 5000만 유로 또는 EU 내 매출이 5,000만 유로를 초과하는 기술 기업에 대하여 매출의 3%를 세율로 책정하는 방안을 놓고 협상을 진행 중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미국의 4대 기술 기업의 이름을 딴 GAFA(Google, Amazon, Facebook, Apple)세 도입에 특히 적극적이다. 프랑스 정부는 EU 차원의 협상 결과와 상관없이 2019년 GAFA세를 도입하기로 하였고, 영국 정부 또한 2020년 4월부터 “전세계 매출 규모가 5억 파운드(약 7400억 원)를 초과하는 기업에 대해 디지털 서비스 세금을 부과”할 방침을 정하였다. 이처럼 유럽 주요국들이 미중 경쟁 국면에서 독자적 입장을 추구하는 데서 시스템 경쟁의 복합성이 증가하고 있다.   나가며 지금까지 미중 무역전쟁의 기원, 전개 과정, 향후 전망을 다차원적 복합 게임의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 불균형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중국뿐 아니라 주요 무역 상대국에 대하여 양자적 접근을 신속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양자적 접근은 오바마 행정부가 주도하였던 메가 FTA를 중심으로 수립되기 시작한 세계경제질서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놓았다는 점에서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지대하다. 규모와 수준 간의 차별성을 감안할 때, 미중 관계는 양자 차원에서 구체적 쟁점을 둘러싼 갈등과 제한적 타협을 모색하는 한편, 다자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수립을 둘러싼 경쟁을 동시에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 규모 면에서 미국과 중국의 격차가 좁혀짐에 따라 중국은 미국의 견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미중 양자 차원의 경쟁은 상당 기간 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단기적으로 미국과 중국은 양자 차원에서 갈등을 고조시키는 가운데 제한적 타협을 통해 문제를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관리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궁극적인 문제 해결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은 세계경제질서의 재편을 위한 경쟁과 제한적 협력 게임을 함께 전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미중 무역 전쟁은 양자와 다자 차원의 협력과 갈등이 동시에 진행되는 양자-다자 게임의 성격을 갖는다. 미국과 중국은 또한 하나의 쟁점이 아닌 다양한 쟁점을 때로는 연계하는 게임을 전개하고 있다. 거시적으로는 경제와 안보를 긴밀하게 연계하며, 경제 영역 내에서도 무역-생산-기술을 상호 연계하는 전략을 앞으로도 추구할 것이다. 향후에는 미중 무역전쟁은 패권경쟁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스템 경쟁의 모습을 띠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 수준 면에서 미중 양국의 격차가 아직 상당하기 때문에, 미국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유럽 및 일본 등 주요국들과 협력을 통해 새로운 세계 질서를 재설계하는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주요국들과 이견을 조정하는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양자적 차원의 시도뿐 아니라 전통 우방국들과 협력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립하는 다자 전략을 병행할 것이다. 무역전쟁의 지구화는 한국에게 어떤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가? 무역전쟁의 지구화가 세계 주요국들이 참여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중견국들에게 일정한 역할 공간이 주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국과 중국은 향후 세계경제질서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설계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이 제3국들에 대해서도 양자-다자 연계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한국은 미중 무역전쟁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유사 입장 국가들(like-minded countries)과 연대와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초불확실성의 시대’(Age of Hyper-uncertainty)로 진입하고 있는 세계경제질서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다자주의의 회복이라는 평범한 사실에 공감하는 국가들과의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     ■ 저자: 이승주_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EAI 무역•기술•변환센터 소장.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아시아 정치경제, 동아시아 지역주의, 글로벌 FTA 네트워크, 동아시아 국가들의 제도적 균형 전략 등이다. 주요 저서 및 편저로는 ≪Northeast Asia: Ripe for Integration?≫(공편), ≪Trade Policy in the Asia-Pacific: The Role of Ideas, Interests, and Domestic Institutions≫(공편)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최수이 EAI 선임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6) I schoi@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이승주 2020-06-05조회 : 9872
논평이슈브리핑
[EAI 특별기획논평] 기로(岐路)에 선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 공생을 위한 한일 협력 모색해야

.a_wrap {font-size:14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0px;} 편집자 주 "샹그릴라, 그 이후: 가속화되는 '인도·태평양 VS 일대일로' 구도와 한국의 전략" 특별 논평 시리즈의 세 번째 보고서로, 미중 경쟁 구도에서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분석한 손열 EAI 원장(연세대 교수)의 논평이 발간되었습니다.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개념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사용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상 공식 외교 전략으로 이 용어를 먼저 사용한 국가는 일본이라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일본에게 인도·태평양 지역은 전통적으로 상업적 공간이었으나, 중국의 부상으로 역내 세력권이 확장되면서 지정학적 경쟁의 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덧붙입니다. 더욱이 최근 동 지역에서의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의 인태 전략은 전통적 동맹국인 미국과 최대 교역국인 중국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는 바, 일본은 유사한 입장에 처해있는 한국과의 협력을 통해 규칙기반질서를 공동 건축하는 창조적 외교를 모색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샹그릴라의 조용한 파장 인도·태평양(이하 인태) 전략은 아베 신조 총리의 간판 외교정책이다. 그는 2018년 1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FOIP)”을 일본 외교정책의 핵심 전략개념으로 설정하였고, 2019년 1월 이를 재천명하였다. 인태 개념이 국제무대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11월 아시아 순방 중 이 개념을 공식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지만, 실제 공식 외교전략 언어로 가장 먼저 사용한 국가는 일본이라 할 수 있다. 아베 총리는 2016년 아프리카개발회의(TICAD)에서 두 대양, 두 대륙을 결합하는 지리적 공간을 설정하고, 여기에 민주주의, 법치, 시장경제 등 자유와 개방성이란 규범적 성격을 부여하였다. 이어 2017년 《외교청서(外交靑書)》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전략을 특집으로 다룬 바 있다. 아베 자신은 제1차 아베내각 시절인 2006년 인도 방문 연설에서 두 해양을 연결하는 초보적인 형태의 지역개념을 발신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인태 개념을 자신의 외교 브랜드로 여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이 밀고 있는 인태 개념 설정은 일본외교가 당면한 구조적 현실 즉, 부상하는 중국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라는 전략적 문제와 관련된다. 인태는 중국의 주위(周圍)를 엮는 지리적 공간이고 중국의 대전략인 “일대일로”의 해양실크로드(=일로)와 지리적으로 중복되는 전략적 공간이다. 따라서 일본에게 인태 전략은 강대국 중국의 세력권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두 해양 네트워크의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지정학의 재현이다. 이는 곧 지역 내 주도국(즉, 미국, 일본, 호주, 인도) 중심으로 설정된 규칙과 규범의 네트워크 속에 중국을 편입시켜 변화를 추동하거나, 네트워크로부터 배제하여 길들이는 이중 전략을 드러낸다. 이 전략의 성패는 지경학적 수법을 중심으로 인태 전략의 핵심 축인 미국과 공조를 어디까지 해 나갈 수 있는지, 한국 등 의지국 연합(coalition of willing)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문제는 샹그릴라 회의를 통해 미국의 인태 전략은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와 외교 3면에서 중국과 본격적인 경쟁을 선언함으로써 일본의 경제(지경학) 중심 노선에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다루기에서 미국과 미묘한 편차를 보이는 일본은 전략적 조정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는 한국과 협력의 계기를 부여하는 상황이고, 한국은 이를 포착하여 보다 넓은 외교적 활동 공간을 확보해 가야 한다.   인도-태평양의 지정학 인태가 두 대양을 연결하는 해양의 공간이라면, 일본에게 해양은 전통적으로 상업적 개념의 공간이었다. 19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메이지 정부 핵심 인물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으로 대표되듯 일본에서는 안보 확보를 위해 한반도로 팽창하고자 하는 대륙의 지정학이 지배적이었던 한편,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상업과 이민으로 식민주의를 실천하는 평화적 팽창주의도 부상하였다.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등은 군사력으로 대륙을 점유하고자 하는 지정학에는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고 성공 가능성도 낮으므로 교역과 투자, 이민,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해군력을 통해 태평양 무대를 적극 활용하자는 논의를 펼친 바 있다. 1920년대 국제협조주의로 이어지며 미국과의 교역과 평화공존을 강조한 태평양 개념은 1930년대 동아협동체 및 대동아공영권 등 대륙의 지정학에 압도당하면서 2선으로 밀려났다가 패전 후 화려하게 부활한다. 전후 일본은 태평양을 선진 공업국간 상업과 교류의 장으로 개념화하였고, 태평양 자유무역지대 등을 거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에 이르기까지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해양 네트워크를 생활공간으로 강조하였다. 특히 아태 공간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태평양의 선진경제권과 아시아의 신흥경제권을 묶고 일본이 가교 역할을 담당하는, 따라서 일본의 이익과 정서에 부합하는 지역으로 정착하였다. 비즈니스, 투자, 협력의 공간으로서 해양 개념은 중국의 부상으로 동요하게 된다. 일본은 1991년 중국이 APEC 가입을 계기로 자유주의 지역질서에 편입되어 적응해 갈 것이라 믿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이 동아시아 개념을 내걸고 아세안과 협력을 강화하며 아태 공간을 잠식하자, 당시 고이즈미 총리는 아세안과 한중일 등 동아시아 13개국에 더해 호주, 뉴질랜드, 인도를 초대하는 확대 동아시아 구상을 주창하였다. 자유민주주의, 인권, 시장경제, 법치 등 가치를 담는 지역개념을 내걸며 3개국을 끌어들여 중국의 주도권을 견제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어 2006년 아소 외무상과 아베 총리는 일본 열도로부터 동남아, 인도, 서남아, 중동을 거쳐 동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잇는 이른바 “자유와 번영의 호(弧)” 전략을 내어놓았다. 이 역시 보편적 가치를 매개로 중국을 견제하는 지역 공간을 모색하는 것으로서, 일본이 전후 외교의 실용주의적, 경제중심적, 반응형 외교 태세를 넘어, 지정학적 외교경쟁을 시도한 본격적인 사례라 하겠다. 인태 개념은 이런 지정학적 상상력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상상력을 개념과 구상, 전략으로 전환시킨 계기는 2010년 센카쿠 해역에서 중국과의 분쟁이다. 중국이 해양강국론을 내걸면서 공세적인 태도로 나오자 일본은 중국에 대항하는 해양안보 차원에서 동적 방위력 개념에 기초하여 남서 해역을 중시하는 《방위계획대강》 수립으로 맞대응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 호주, 인도 등 4개국이 인도양에서 서태평양에 이르는 해역의 안보를 추구하는 이른바 다이아몬드 협력 전략을 선언하였다. 아베 총리는 미국과 공조하여 미-일-호, 미-일-인 3자 정상회담 및 국방 당국 간 협의를 거듭하면서 4개국 안보협력(QUAD)에 힘을 기울였고,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항하여 질(質) 높은 개발협력 모델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 연장선상에서 공식 등장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FOIP)’의 지정학은 ① 중국의 확대되는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② 해양안보를 중심으로 해양 네트워크를 조성하고 ③ 보편적 가치를 지역 개념으로 설정하여 ③ 역내 국가들과 개발·무역·투자 등을 통한 연계성(connectivity) 증진과 ④ 해양법 집행 능력구축, 인도적 지원, 재해구조 등 비전통 안보협력을 추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미일 공조 모색 2017년 가을 미국이 인태 구상을 공식화함으로써 미일 양국은 인태 공간을 공동 관리하는 체제 구축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미국은 10월 틸러슨 국무장관의 CSIS 연설, 11월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연설, 12월 《국가안보전략(NSS)》 등을 통해 역내 주요 위협으로 중국의 행태를 지적하고,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 증진”이란 ‘비전’을 내걸었다. 중국 견제를 위해 인태 공간을 단위로 하여 규범과 규칙을 제정하고 이에 기반한 국제질서 건축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는 트럼프 정부 초기 내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 만으로는 지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어렵다는 판단의 결과라 할 수 있다. 2018년도에 들면서 미국은 인태 ‘전략’으로 명칭을 수정하고, 주권 존중, 선정(good governance), 기본권 보장, 항행의 자유와 개방, 분쟁의 평화적 해결, 공정·상호적 무역, 투자환경의 개방, 연계성 증진 등 공통의 가치와 원칙을 강조한 후 보다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제시하였다.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 ‘디지털 연계성 및 사이버안보 파트너십’ 에너지 분야에서 ‘아시아 EDGE,’ 인프라 분야에서 ‘인프라 거래 및 지원 네트워크’ 등에 총 1.13억 달러 규모 신규 투자를 약속하고, 의회에서 개발지향 투자이용 향상법(BUILD) 통과, 국제개발금융공사(IDFC) 신설 및 개발금융 규모 확대(600억불)를 선언하였다. 미국의 인태 전략이 경제, 투자, 개발 분야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미일 양국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구상은 내용적으로 거의 수렴하게 된다. 이런 속에서 미일 양국은 미일 전략 에너지 파트너십(JUSEP) 기반 LNG 공급 및 관련 인프라 구축 협력, PNG 전력 공급 확대 및 개발금융 협력을 위한 파트너십 구축 등을 추진하고 있다.   지정학적 상상과 지경학적 현실의 거리 그러나 트럼프와 아베 간의 찰떡궁합이 인태전략 추진에서도 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베 정부는 트럼프 정부의 인태전략에 대해 몇 가지 우려를 표하고 있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의 거래중심적 접근과 일방주의적이며 예측불가능한 외교행태이다. 동맹에 대한 거래중심적 접근은 모든 동맹국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으며 일본도 국가안보 위협을 무기로 한 무역보복(232조)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과의 전격적인 타협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도 상존한다. 예컨대, 중국이 미국에 대담한 수입확대조치를 제공하는 대신 미국이 중국의 불공정 관행(국영기업에 대한 보조금, 해외기업의 기술이전 강요 등)을 용인하는 빅딜이 이루어진다면 자유주의 무역질서 복구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미국의 거래중심주의와 일방주의에 대한 헷징으로서 다자적 규칙을 강조하는 인태전략을 내걸고 있다.  더 큰 우려는 2017년 12월 《국가안보전략》이나 2018년 10월 펜스 부통령의 연설에서 반복적으로 표현되듯이 미국이 인태 지역을 중국의 억압적 질서에 대항하여 자유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공간 즉, 상호 공존할 수 없는 강렬한 가치관 대립의 공간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주권 침해, 약탈적 행위에 공동 대응을 주문하고 있으나, 실제로 전방위적 압박에 나설 경우 일본의 입지는 크게 축소된다. 화웨이 공세 사례에서 보듯이 미국이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 기술, 인적자원 이동을 제한하는 경우 일본경제에 주는 타격은 상당하다. 일본은 끊임없이 중국과 경제협력을 통해 관계 개선을 추진해 왔다. 특히 미국의 일방주의와 미중 무역분쟁이 지속되면서 헷징 차원에서도 중국과의 협력에 방점을 두고 있다. 2018년 10월 중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은 제3국 인프라 투자에 중국과 협력하면서 “개방성, 투명성, 경제성, 대상국 재정의 건전성” 등 4개 조건부 협력을 천명하였는데, 이는 인태와 일대일로와의 접점을 추구하는 행보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2018년 12월 발표한 《방위계획대강》 역시 인태지역에서의 ‘다층적, 다각적 안보협력 강화’와 ‘해양질서의 안정’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중국견제라는 전통적 지정학 색채는 약화시켰다. 2018년 《외교청서》에서 인태 ‘전략’을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2019년 들어서 일본 정부는 전략이란 표현을 피해 ‘구상(비전)’으로 바꾼 것도 중국을 의식한 처사이다. 요컨대, 중국 경제와의 디커플링(decoupling)이 불가능한 일본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 혹은 가상적(敵)으로 규정하지 않는 가운데 그 세력권 확장을 억제하는 동시에 경제적 협력과 양립할 수 있는 인태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이번 샹그릴라에서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를 요약한 섀너한(Patrick Shanahan)의 연설은 미국에 대한 일본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기왕의 인태 전략이 우회적으로 중국의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포용성(‘어느 국가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명기)을 강조하고 인프라 투자(특히 에너지 인프라) 등 경제·개발·거버넌스 분야에서 일대일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수준이었다면, 이번 보고서는 중국을 현상변경 세력이자 역내 국가들의 사활적 이익에 대한 최대 장기적 위협 세력(greatest long-term threat)으로 적시하고 경제, 군사, 외교 3면에서 본격적 경쟁을 선언하고 있다. 미국은 “경제안보가 국가안보이다(economic security is national security)”라는 명제 하에서 인태의 자유와 개방성을 추구하는 다양한 정책목표와 수단을 제시하는 한편, 군사면에서 막대한 예산 투자를 통해 기술혁신에 기반한 막강한 군사력 증강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나아가 외교면에서는 동맹국 및 우호국과의 전략적 관계, 지역 수준의 소다자 및 다자 안보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장기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구체적 정책 목표를 열거하고 있다. 미국이 BUILD 등 법안 통과와 기관 설립으로 신규 투자를 끌어 모아도 그 규모가 일대일로의 십 분의 일에 불과하여 지경학적 수단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군사와 외교카드를 풀가동하여 본격적으로 중국을 길들이겠다는 의도이다.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표현으로 중국의 핵심이익을 건드리는 데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미국의 입장은 단단하다. 이쯤 되면 일본의 인태전략은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제 미국과의 공동보조를 맞추려면 중국을 안보 위협국으로 간주하고 군사적 견제 함의를 담는 지경학적 수단으로서 보편가치의 확산, 경제적 연계, 개발협력과 거버넌스, 비전통안보 협력으로 전환하는 데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 대해 안보·외교 목표를 위해서 경제적 이익을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 미중 대립의 장으로 변질되는 속에서 일본은 미국의 노선을 추수할 것인가, 기존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포용적 질서 건축을 견지할 것인가.   규칙기반질서 건축과 한일 협력 요컨대, 일본판 인태전략은 경제, 개발 및 비전통 안보 분야에서 역내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조성하여 중국에 대한 제도적 균형을 이루는 동시에, 제한적으로 중국을 포용하며 안정적 경제관계 확보를 위하여 보편가치를 담는 규칙과 규범에 기반한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 미국 역시 역내 국가들과 연대하여 자유롭고 개방된 질서를 만들고 이를 통해 중국의 약탈적, 수정주의적 행동을 억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규칙기반 국제질서를 추구한다. 중국도 최근 개방성, 투명성 등 국제규범에 기초한 일대일로 추진을 약속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국제질서는 국제체계의 구조적 속성(즉, 세력배분구조)을 반영하는 동시에 공유된 규범을 담는 국제적 정당성의 산물이다. 따라서 질서를 지배하고 유지하는 강대국은 자국의 불평등 권력(unequal power)을 하위 국가들이 수용하도록 만드는 물리적 권력과 함께 정당성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 인태를 단위로 한 규칙기반질서를 건축하려면 역내국가들로부터 사회적 정당성과 (준자발적) 동의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인태지역 국가 다수는 미국의 관여를 희망하면서도 중국을 본격적으로 견제하는 전략에 참여하는 상황은 피하고자 한다. 특히 아세안은 미중 대립 속에 아세안이 와해될 가능성을 우려하며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를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바 있다. 인도는 인도양에서 중국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위협의식을 토로하고 있으나 반중(反中) 연합전선 구축에는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으며, 일본도 중국에 대한 군사적 견제는 인태전략과 다른 결(layer)로서 미일동맹 및 4국협의(Quad)를 통한 안보협력으로 대처하고자 한다. 한국 역시 인태 전략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보여왔다. 2017년 가을 FOIP를 내건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 속에서 당시 정부 관계자는 참여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고, 이후 미국이 전략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입장 표명을 요구 받고 있는 상황이다. 미중 사이에 끼어 있는 국가들 가운데 일본과 한국은 대외의존적 체제 속성으로 강대국의 일방주의적 횡포에 특별히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규칙기반 질서를 강력히 지지해야 한다. 비록 규칙과 규범 역시 강대국 주도로 제정되는 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된 규칙과 규범의 네트워크 속에서 주고 받기 식 국제정치가 이루어진다면 중견국과 약소국의 행동 반경은 확대되고 강대국 정치의 비극을 피할 여지가 생긴다. 일본 외교가 상승기임에는 분명하지만, 한국을 건너뛰고(Korea passing) 역내 국가들의 협력을 전략적으로 결집할 만큼의 역량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한국 역시 일본과의 협력 공간을 비워두고, 신남방정책으로 인태전략과의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나, 이는 가래로 막을 일을 호미로 막는 격이다. 한국이 직면한 전략환경은 아태의 분단을 예고하는 거대한 질서 변화를 담고 있다. 비즈니스 확대와 외교다변화 발상으로 나온 신남방정책 차원에서 경협·개발 프로젝트 구색 맞추기로 대응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난제를 맞이할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는 위안부, 강제징용 등 역사문제, 초계기 레이더 조사(照射) 문제, 정상회담 개최문제로 대립의 나날을 지샐 겨를이 없다. 서로를 탓하고 감정적으로 배척하며 잘잘못 따지기를 넘어서, 인태와 일대일로가 공생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국제 규범과 규칙 제정을 위한 창조적 협력외교에 나서야 할 때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중 간 대결적 구조를 협력적 구조로 전화하는 단초를 마련해야 한다. 샹그릴라는 한일 양국에 관계개선의 전기를, 양국 외교의 활동 공간을 확대하는 발상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     ■ 저자: 손열_ _ EAI 원장·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장, 언더우드학부장, 현대일본학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정치경제, 일본외교정책, 동아시아 국제관계 등이다. 최근 저서로는 Japan and Asia's Contested Order (2018, with T.J. Pempel), 한국의 중견국외교 (2017, 김상배, 이승주 공편), Understanding Public Diplomacy in East Asia (2016, with Jan Melissen)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최수이 EAI 선임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6) I schoi@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손열 2020-06-05조회 : 8652
논평이슈브리핑
[EAI 특별기획논평] 중국 일대일로의 진화와 그 역설: 확대되는 경쟁 속 중국의 전략적 딜레마

.a_wrap {font-size:14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0px;} 편집자 주 "샹그릴라, 그 이후: 가속화되는 '인도·태평양 VS 일대일로' 구도와 한국의 전략" 특별 논평 시리즈의 두 번째 보고서로, 미중 경쟁 구도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을 분석한 이동률 EAI 중국연구센터 소장(동덕여대 교수)의 논평이 발간되었습니다. 일대일로는 초기 중국 내 지역균형발전과 과잉 생산 설비 해소 등과 같은 경제적 동기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으나, 자금원인 AIIB의 성공으로 탄력을 받아 그 범위가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시진핑 정부의 핵심 대외 프로젝트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국의 견제가 본격화되자, 시진핑 정부는 이를 중국 공산당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일대일로를 정권의 사활이 걸린 사안으로 상정하면서 중국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미중 경쟁을 확장하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더욱이, 이러한 경쟁이 양국이 주도하는 네트워크에 더 많은 참여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네트워크 경쟁'으로 확대될 경우, 아태 지역 내 여러 국가들이 '선택의 압박'에 직면하게 되겠지만, 이는 동시에 강대국 간 경쟁 속에서 외교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한국 정부가 유연한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심한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시진핑 정부에게 일대일로는? 웨이펑허(魏鳳和) 중국 국방부장이 5월 31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안보회의에 중국 국방부장으로는 8년 만에 참석했다. 미국과의 통상마찰이 격렬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국방부장의 참석은 그 자체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의 패트릭 섀너한(Patrick Shanahan) 국방장관대행이 웨이 부장의 참석을 의식한 듯 “어느 한 국가가 인도·태평양 지역을 지배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라며 작심하고 중국을 겨냥해 날선 공세를 펼쳤다. 그런데 웨이 국방부장은 ‘중국과 국제안보협력’이라는 주제의 연설에서 의외로 ‘인류운명공동체’ 건설이라는 화두로 미국의 공세에 대응했다. 웨이 국방부장도 대만문제에 관해서는 “중국군의 결심과 의지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남중국해에 대해서는 아세안 국가들을 의식하며 비교적 신중하게 대응했다. 즉 “현재 남중국해는 전반적으로 안정화되고 있으며, 평화를 지키기 위한 남중국해 주변 국가들의 지혜와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반박했다. 인류운명공동체는 ‘신형국제관계’와 더불어 시진핑 정부의 핵심 외교담론인 ‘중국특색의 대국외교’를 구성하는 양대 요소이고, 일대일로는 바로 인류운명공동체 구상을 실천하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시진핑 정부는 미국과의 경쟁이 무역마찰을 시작으로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류운명공동체’를 역설하고 있다. 4월에 열린 제2차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 5월 아시아문명대화대회에 이어서 아시아안보회의에서 다시 인류운명공동체를 역설한 것이다. 중국이 인류운명공동체를 역설하는 이유는 중국의 부상이 위협과 도전이 아님을 국제사회에 설득하는 한편, 미국과의 힘겨운 경쟁 과정에서 우군을 확보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보인다. 중국은 추상적 담론인 인류운명공동체론을 실천적으로 입증해 줄 수 있는 정책으로 일대일로에 기대를 걸고 있다. 결국 중국 정부가 인류운명공동체론을 역설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일대일로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미중 경쟁 속에서의 일대일로의 진화 일대일로는 2013년 시진핑 주석이 해외 순방 과정에서 직접 제기한 것으로, 사실상 이제는 시진핑 정부의 국정 브랜드라 할만하다. 일대일로가 장기 프로젝트임을 감안하더라도 6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에도 이미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고 부침도 있었다. 일대일로는 등장 초기에 그 성격과 내용, 목적이 모호하다는 차원에서 ‘전략’, ‘구상’, ‘제안’, ‘프로젝트’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질 정도로 개념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 정부는 제안 초기에 ‘시진핑 의제’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전략’ 또는 ‘대전략’이라는 공세적 화법을 통해 과감하게 홍보하고자 했다. 그만큼 초기에는 일대일로의 흥행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출발했다. 그런데 일대일로 추진의 자금원으로 주목받았던 AIIB가 기대 이상으로 성공하면서 일대일로는 탄력을 받게 되었고 주변 연선(沿線) 국가들이 배제를 우려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심지어 일대일로가 중국의 패권전략의 일환이라는 경계심마저 초래했다. 이후 중국 정부는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가면서 일대일로는 ‘구상(構想)’, ‘발의(倡義)’라는 신중한 표현으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일대일로의 내용은 초기의 국내 지역균형발전과 과잉설비의 해외 인프라 시장 개척이라는 경제적 동기에서 이제는 인류운명공동체 실현이라는 거대한 실천 프로젝트로 확대되었고, 참여 대상도 주변 연선국가에서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심지어 제2차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은 그야말로 일대일로의 확장과 성취를 국내외에 과시하는 대규모 행사로 진행되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40여명의 국가 및 국제기구 지도자들이 참석했고, 이 자리에서 640여억 달러(약 74조 300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 협력 및 협의 체결을 과시했다. 한때 소강국면에 있던 일대일로가 미국과의 경쟁이 고조되면서 오히려 중국 정부가 화려하게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미국의 견제에 대한 중국의 반발과 저항 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우선 미국은 일대일로가 연선국가들을 ‘부채의 함정’에 빠트리고 있다고 흠집내기 공세를 폈다. 2018년 3월 미국 글로벌 개발센터(Center for Global Development)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은 몇몇 국가들의 경제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중국에 대한 채무 불이행도 우려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동 보고서는 일대일로에 참여한 68개 국가 중 23개 국가의 재정상황이 취약해졌고, 이 중 파키스탄, 지부티, 몰디브, 라오스, 몽골, 몬테네그로, 타지키스탄, 키르키스탄의 경제 상황을 심각한 것으로 분류했다. 이 과정에서 말레이시아 경우처럼 일대일로 사업에 대한 재검토를 카드로 중국에게 더 많은 경제지원과 양보를 얻어내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예컨대 말레이시아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협력한다는 합의문에 동의케 하면서, 통화 스와프를 3년 연장하는데도 합의했다. 경제위기에 직면한 파키스탄 측에도 차관 지원을 약속했다. 이제 중국 정부는 경제적 실익 여부를 떠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활성화시켜야 하는 정치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11월 아시아 순방 과정에서 중국의 일대일로를 견제하기 위해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 전략’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2018년 7월말 ARF에 참석하기에 앞서 미국 상공회의소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상세하게 발표하기도 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 자리에서 다분히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을 의식하면서 1억 1300만 달러를 인도·태평양 지역에 투자할 것임을 밝혔다. 중국은 미국이 제안한 투자 액수는 일대일로를 통한 중국의 투자 제안 액수의 1/10에 불과하다면 평가절하했다. 그럼에도 중국의 일대일로가 아시아 지역에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제안을 했다는 것은 다분히 중국을 의식하고 이 기회에 역내 국가들의 일대일로 참여를 억지하여 일대일로의 발전을 막고자 하는 의도라고 중국은 판단했다. 중국 정부는 다방면에 걸친 미국의 대중국 압박공세를 이제는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물러서기 어려운 수준에 이른 것으로 점차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일대일로 진화의 역설과 국제질서의 새로운 양상에 대한 희망 일대일로에 대한 미국의 견제가 본격화되면서 시진핑 정부는 오히려 일대일로를 정권의 사활이 걸린 이슈로 상정하고 추진 의지를 강화해 가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무역경쟁에서 출발하여 일대일로에 대한 견제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미국의 공세가 중국 공산당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실제 그렇게 몰아가는 분위기이다. 시진핑 정부는 일대일로가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시진핑 의제’로 알려진 일대일로 사업이 미국의 견제에 의해 무산되는 상황을 인정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시진핑 주석이 아시아문명대화대회 등 대규모 행사를 주도하고 직접 참여하며 ‘인류운명공동체’를 주창하는 것은 중국 국내 인민들을 향해 미국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진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일대일로는 초기의 의도와 목적과는 달리, 시진핑 체제의 안정과도 연결되는 핵심적인 과제로 부각되면서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전략과의 경쟁이라는 소용돌이로 빠져들어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시진핑 정부의 일관된 핵심 과제는 점진적이고 장기적인 부상 일정, 해양 강국화를 진행하고 이를 통해 공산당 체제를 더욱 공고화해 가는 것이다. 중국은 해양 강국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대일로라는 지경학적 접근을 통해 기성 해양 패권국인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과 갈등을 우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즉, 중국은 일대일로가 인접 국가들에게 실질적 혜택을 줄 수 있는 ‘공공재’임을 역설하면서 인접 국가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경제협력 기반을 강화하면서 점진적으로 부상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코자 했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미국이 중국의 지경학적 접근에 대해 본격적인 견제를 시작하면서 일대일로는 중국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미국과의 경쟁을 확장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비롯한 주변 국가와의 갈등은 완화되지 않고, 일대일로 사업도 곳곳에서 난관에 봉착하면서 참여 확대를 유도하는 데도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의 꿈’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권력 강화를 모색하고 있는 시진핑 정부는 강국화 일정을 후퇴시키고, 미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영토를 양보하는 유연한 전략적 선택을 하기에는 어려운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이제 미국과의 경쟁이 더욱 격화된다 하더라도 일대일로 건설을 조정하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시진핑 정부는 중국인민, 미국, 그리고 주변국들을 동시에 고려하는 복합방정식을 풀어가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일대일로 진화는 중국의 의도와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국제질서에서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경쟁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비록 중국이 강대국화를 향한 발전전략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이지만, 연선국가들의 적극적 참여와 동의 없이는 중국이 의도하는 방향과 목표로 일방적으로 전개할 수만은 없는 특성이 있다. 최근 중국이 아시아 주변국가들을 향해 ‘문명대화’ 등 매력공세를 새롭게 전개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이 향후에도 일대일로라는 연계협력 방식을 통해 발전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상대적으로 연선국가들이 지니고 있는 ‘상대적 약자의 힘’으로부터 제약을 받을 가능성은 커질 수 있다. 이처럼 강대국 간 경쟁이 냉전시기의 진영 간 경쟁과는 다르게 ‘네트워크 구성을 위한 경쟁’이라는 새로운 패턴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 국가도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에 기인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네트워크 구성 경쟁이 여전히 강대국들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일대일로와 인도·태평양 전략 간의 경쟁이 심화된다면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은 겹치는 협력 대상국을 견인하기 위한 상호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결과적으로 네트워크를 일방적으로 형성하고 주도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게 될 가능성도 있다. 향후 장기적으로는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구성하는 지역 국가들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역설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물론 초기 단계에서는 파키스탄의 사례처럼 이들 네트워크 간의 경쟁 구도에서 지역 국가가 압박 속에 선택의 딜레마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런데 동시에 말레이시아의 사례처럼 강대국 간 경쟁을 활용하여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과 기회가 생성될 수 도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미중 경쟁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일본 아베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의외의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인도 모디 정부 역시 중국에 대한 전통적 경계심을 지니고 있음에도 인도·태평양 전략의 전면에서 중국과 대립적 관계가 조성되는 것은 주저하고 있다. 향후 강대국 간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선택의 압박이 지속될 경우 공통의 어려움에 직면한 지역 중견국가들 간의 연대와 협력이 활성화되어 오히려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새로운 변화를 추동할 수 도 있다는 희망적 기대를 갖게 한다. 물론 한국의 경우는 지정학적 특수성, 분단의 현실, 북핵문제 등이 중첩되어 있어 ‘약자의 힘’을 발휘할 여지가 매우 협소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향후 한국이 지속적으로 미중 간 경쟁에 따른 압박의 파고에 시달려야 하는 운명을 직시한다면, 무엇보다 정부가 유연성 있는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전국민적 합의 기반을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심한 전략을 구상해 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     ■ 저자: 이동률_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AI 중국연구센터 소장. 중국 북경대학교 국제관계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대중국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 대외관계 및 중국 소수민족, 중국의 민족주의 등이다. 최근 연구로는 "시진핑 체제 외교정책의 변화와 지속성," "China’s policy and influence on the North Korea nuclear issue: denuclearization and/or stabil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중국 미래를 말하다》(편저), 《중국의 영토분쟁》(공저)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최수이 EAI 선임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6) I schoi@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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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특별기획논평] 인도·태평양을 둘러싼 미중의 포석 전개와 한국의 4대 미래 과제

.a_wrap {font-size:14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0px;} 편집자 주 "샹그릴라, 그 이후: 가속화되는 '인도·태평양 VS 일대일로' 구도와 한국의 전략" 특별 논평 시리즈의 첫 번째 보고서로, 하영선 EAI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과 전재성 EAI 국가안보센터 소장(서울대 교수)이 공동 집필한 논평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본 논평에서 저자들은 미중 경쟁의 진화 양상 및 특징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첫째,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21세기 아태 신질서 형세를 제대로 읽고 한반도의 생존 번영 전략을 마련해야 하며, 둘째, 미중 간 전략적 선택을 서두르기보다는 핵 비확산과 같은 규범 외교가 작동될 수 있는 사안을 개발해야 하며, 셋째 미중 대립 구도에서 유사 상황에 처해 있는 아시아 국가들 간 협력을 도모하고, 마지막으로 국내적으로는 분열된 역량을 결집하여 국가 차원의 협력을 도모해야 한다고 집필진은 강조합니다.     인도·태평양 전략과 일대일로 전략 21세기 아시아·태평양 질서는 미중의 본격적 포석 전개에 따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2013년 6월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서니랜드(Sunnylands) 정상회담에서 서로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핵심 이익을 존중하며, 공동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신형대국관계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신형대국관계를 표방한지 6년 만에 미국과 중국은 인도·태평양 전략과 일대일로 전략이라는 전략적 경쟁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5월 31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개최한 아시아안보회의에서 미국의 패트릭 섀너한(Patrick Shanahan) 국방장관대행과 중국의 웨이펑허(魏鳳和) 국방장관은 향후 양국이 추구할 지역전략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날선 공방을 주고 받았다. 같은 시기에 발간된 미 국방부의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Indo-Pacific Strategy Report)”와 중국의 “무역협상에 관한 중국의 입장(关于中美经贸磋商的中方立场)” 백서는 양국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실천 전략 간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신형대국관계를 추구하기 시작하던 2013년에 신형주변국관계의 핵심으로서 일대일로 전략을 발표하였다. 이 전략은 일차적으로 아시아의 인프라 건설 네트워크를 조성하는 한편, 유럽, 아프리카 국가들을 연결하는 통상, 투자, 사회문화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업이 진행되면서 중국은 100여개에 달하는 국가들과 공동사업을 추진하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하여 1조 달러 이상의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또한 2차 포럼을 통해 640억 달러의 추가 기금을 출연한 것으로 발표된 바 있다. 40개국에 달하는 국가들의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들을 초청하여 일대일로 전략의 원칙과 성과, 중요성을 피력하는가 하면, 관함식을 동시에 개최하여 중국의 증강된 군사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일대일로 전략은 단순한 해외경제개발 지원전략이 아니라 중국이 강조하고 있는 신형국제관계에서 신형대국관계와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신형주변국관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많은 공동사업들 중에, 중국의 자본을 빌려 대규모 사업을 벌인 국가들이 부채를 청산하지 못하는 경우도 출현하고 있다. 소위 “부채의 덫”에 빠진 고위험 국가들은 주요 항만 등 주권적 자산의 일부를 중국에 양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논란에서 중국이 지원 대상국가의 경제발전보다 중국 기업의 이익을 더 중시하고, 상대국 환경을 해치는 공동 사업방식도 문제로 제기되었다. 중국의 부채외교를 보면서 많은 국가들이 중국과의 사업을 취소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중국의 의도가 단순한 지원 건설을 넘어 지정학적 팽창이 아니냐는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 중국은 이러한 비판을 의식하여 질적으로 향상된 투자와 개방성을 추구하고, 환경을 보호하고 투명한 일대일로(green and clean BRI)를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상당한 시간을 거치면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에 따라 기존의 다자주의 제도에서 탈퇴하고 중국과 무역분쟁을 치르는 가운데, 2017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은 아시아 순방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의 안전, 안보, 그리고 번영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비전을 밝히면서 인도·태평양 지역 개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도나 호주에서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하나의 전략공간으로 보려는 노력이 이루어져 왔고, 일본의 아베 총리도 2007년 인도 연설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2018년에 들어서서 미국은 군사, 경제, 외교 무대에서 인도·태평양 전략 개념을 활발하게 사용했다. 2018년 5월 미국은 기존의 태평양사령부를 인도태평양사령부로 개칭하여 인도·태평양의 군사적 전략 개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인도·태평양 사령관은 이 개념이 경제적 함의만큼 군사적 함의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다. 따라서 인도·태평양 전략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봉쇄하거나 본격적으로 견제하려는 개념은 아니라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2018년 7월 30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윌버 로스(Wilbur Ross) 미 상무장관, 릭 페리(Rick Perry) 미 에너지장관, 카를로스 구테레즈(Carlos Gutierrez) 전 미 상무장관, 카란 바티아(Karan Bhatia) GE 회장 등 15명의 정부 및 산업 대표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한 인도·태평양 비즈니스 포럼(Indo-Pacific Business Forum)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의 보다 구체적인 경제적 내용을 제시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미국이 과거 기초 분야에 기금을 공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경제, 에너지, 사회기반시설 등 미래의 토대가 되는 새로운 구상에 1억 1,3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이 자금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미국의 새 시대에 대한 착수금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이 미국 기업의 투자를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하여, 국가 주권, 법의 지배, 지속가능한 번영이 뿌리내리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우선, 디지털 연결성 및 사이버보안 파트너십에 대한 투자로 시작된다. 협력국의 디지털 연결성을 제고하고 미국 기술의 수출 기회를 확대하고자 미국은 2,500만 달러의 투자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기술 원조와 민관 합동 파트너십을 통한 통신 인프라 개발을 지원하고 시장에 기반한 디지털 규제 정책을 확대하며 공동 위협에 대처하는 협력국의 사이버 보안 능력을 구축할 계획을 제시하였다. 둘째, 에너지를 통한 아시아 개발 및 성장 구상(Asia EDGE: Enhancing Development Growth Energy Initiative)으로 2018년 한 해 동안 5,0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인도·태평양 파트너 국가들이 자국의 에너지 자원을 수출·생산·이전·저장·구현하는 내용이다. 미국은 방대한 천연 자원, 세계를 선도하는 민간 기업, 정교한 개발금융 수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 전문성을 포함하는 풍부한 에너지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량을 총동원해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모색하고 에너지 시장을 확보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미국은 셰일 혁명 이후 에너지의 자급자족은 물론 수출국이 됨에 따라 에너지 수입국인 중국에 대해서 비교 우위를 확보하고 이러한 전략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사회기반시설 개발 촉진을 위한 인프라 사업 및 지원 네트워크로, 3,000만 달러의 자금을 투입하고, 프로젝트 발굴, 파이낸싱, 기술 원조를 지원하는 수단을 조율하고 강화하며, 이를 공유하는 부처 간 기구를 신설하고, 파트너 국가들이 민간 법률 및 금융 자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인도·태평양 사업 자문 기금도 신설하는 계획이다. 펜스 부통령은 2018년 11월 APEC 회의에서 전략적 해외 민간 투자를 지원할 목적으로 미국 정부의 개발 금융 규모를 600억 달러로 두 배 이상 증액하는 ‘개발 유도 투자 활성화 개선법(BUILD: Better Utilization of Investments Leading to Development)’을 소개했다. 또한 일본과 협력해서 출연하여 100억 달러를 지역에너지에 투자하고, 미국-아세안 스마트시티 파트너십, 파푸아뉴기니의 전기제공을 위한 5개국 파트너십 체결 등의 사업도 소개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최근 격화되고 있는 무역 분쟁에서, 미국은 6월 1일부터 20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물품에 25%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6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제품에 최고 25% 관세를 부과하였다. 트럼프 정부는 관세 인상 조치에 더해 이미 화웨이 및 68개 계열사를 국가안보라는 명목 하에 거래제한 기업 리스트에 올렸고 인텔, 구글 등 많은 기업들이 화웨이와 거래를 중단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은 동맹국들과 전략적 협력국에게도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향후 중국도 관세 인상에 더해 시행할 수 있는 추가 조치들, 즉, 미국 제품불매 운동, 희토류 수출 제한, 미국 국채 매각 등의 수단을 고민할 것으로 보여 양국 간의 대치는 심화될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외교 무대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 개념에 관심을 가져온 일본, 호주, 인도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과 호주는 중국의 부상을 염두에 두고 인도·태평양 전략 개념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2017년 이전에 이미 국방백서 등 정부 문서들을 통해 인도·태평양 개념을 사용했고, 관련 국가들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었다. 인도 역시 인도·태평양 지역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중국과 다양한 협력관계를 추구하고 있었으므로 명백한 견제 개념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미국은 중국, 호주, 일본 등과 함께 이미 2007년 4개국 전략 협력을 추구한 바 있다. 그러나 호주가 중국과 우호관계를 추진하면서 중국의 견제로 4개국 협력에 미온적 반응을 보이면서 4국 전략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7년 이후 미국은 일본, 호주, 인도와 새로운 4국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네 국가는 적극적인 상호 협력은 물론 인도·태평양 전략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다자구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미 국무부의 정책기획국장인 키론 스키너(Kiron Skinner)는 최근 중국의 부상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보여준다. 스키너 국장은 중국이 비서구 세력으로서 미국의 전략과 대결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국가이익의 충돌이 아닌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 간의 문명의 충돌이라는 견해를 밝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은 중국과 무력대결이나 적대적 충돌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치열한 경쟁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년부터 진행된 미중 무역경쟁은 물론, 에너지를 축으로 한 아시아 개발전략, 중국의 기술발전전략에 대한 강력한 견제, 그리고 중국의 남중국해 팽창에 대한 자유항행작전의 본격화 등이 이러한 변화의 배경이 되고 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이 점차 본격적인 대중 견제전략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있으며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새너한 국방장관 대행은 샹그릴라 대화의 기조연설에서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의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군사 분야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전략의 전체적 포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우선 머리말의 결론에서 이 인도·태평양 전략의 경제, 외교, 안보의 세 기둥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 서론에서 미국이 역사적으로 인도·태평양 세력이었던 것을 지적한 다음에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의 비전을 보다 구체적으로 주권과 독립의 존중, 분쟁의 평화적 해결, 자유롭고 공정하며 호혜적인 무역, 투자관계 및 지적재산권 보호, 자유항행과 상공통과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규범과 규칙의 수호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보고서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당면하고 있는 4대 핵심 도전으로서 수정세력(revisionist power)인 중국, 다시 소생한 악의 주인공인 러시아, 부랑(rogue) 국가인 북한, 테러같은 초국가적 도전을 들고 있다. 그 중에도 역시 중국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 중국은 규칙기반 국제질서를 저해하는 국가로 다양한 강제수단을 동원해 주변국가 등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활동을 방해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국제규범 준수의 약속을 어기는 것도 문제이지만 애초에 규범 준수의 약속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중국에 대해서 미국은 필요하다면 규칙에 따라서 중국과 ‘반드시 충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은 새로운 인도·태평양 전략 지평 속에서 미 국민을 보호하고, 미국의 번영을 증진하고, 힘을 통한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 핵심 국가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미국 본토를 방어하고,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의 위치를 유지하고 핵심 지역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안보와 번영을 위한 국제 질서를 건축하기 위한 국가안보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4배 이상 큰 사령부를 중심으로 37만의 미군을 배치하고, 강력한 무기 체계와 다면전투작전으로 만반의 준비태세를 취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더해서 미국은 일본, 한국, 필리핀, 호주, 태국에 이르는 군사동맹국들의 연합군사력과 인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몽골리아, 대만, 팔라우 등의 전략적 파트너, 그밖에 프랑스, 캐나다,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유럽과의 안보협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안보질서 건축의 핵심 개념으로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역 형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8년 만에 국방장관을 샹그릴라 대화에 보낸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인류운명공동체 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웨이 장관은 미국이 군사블록을 만들거나 중국의 이익을 저해하려는 노력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미국이 일방주의적 보호주의 하에 세계 회의 흐름을 반대하고, 국제조약과 기구에서 탈퇴하고 자국 이익을 앞세우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일대일로에 현재 150개 이상의 국가들과 국제기구들이 참여하고 있고 2차 포럼에는 150개 국가와 92개의 국제기구에서 6천명 이상의 대표단이 참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에 최근 개최되었던 아시아문명대화회의를 언급하면서 문명다원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은 타국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며 평화적 발전을 추구하며, 패권을 추구하거나 영향권을 만들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중국의 군사전략은 적극 방어전략이며 모든 군사력은 방어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시에 웨이 장관은 주요 현안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무역 분쟁에서 중국이 대화와 경쟁 모두에 준비되어 있으며, 대만문제에서 분리를 조장하는 미국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겠고,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를 지지하며 미국의 개입은 중국의 영토주권에 대한 도전이며, 북핵 문제에서 중국은 지속적인 기여를 해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미중 군사관계에서도 실용적인 부분에서 협력을 유지해 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중국 국무원은 6월 2일 웨이장관의 연설에 맞추어 ‘무역협상에 관한 중국의 입장’ 백서를 발간했다. 무역전쟁의 책임은 온전히 미국에게 있고 관세 전쟁은 미국의 경제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백서는 미중 경제관계가 양국 관계의 축으로 관세 전쟁은 양국은 물론 세계의 안정과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데, 트럼프 정부가 관세 인상을 무기로 위협을 가했고 파트너들과 긴장을 조성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무역전쟁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지키면서 앞으로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중 전략 포석의 전개 방향 21세기 아태 신질서의 건축을 위한 미중의 포석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첫째,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추상적인 지역전략이 아니라 전략적 경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 섀너한 장관대행의 연설이나 인도·태평양전략보고서는 중국을 규칙기반 질서의 저해세력, 현상변경세력으로 명시적으로 부르면서, 2017년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에서 규정했던 전략적 경쟁자보다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명확히 했다. 중국 역시 미국이 시진핑 주석의 미래 운명공동체 비전에 위해를 가하는 세력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미국은 패권을 지향하며 다른 국가들의 주권을 침해하고 일방주의적으로 무역보복을 단행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강대국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국제질서에서 탈퇴하고 국제규범을 무시하는 세력이며 규칙기반 질서를 저해하는 것은 오히려 미국이라고 비판한다. 웨이 국방장관이 논하듯이 무역경쟁, 대만, 남중국해 등 중국의 중요한 이익을 미국이 저해할 때 중국은 강력하게 미국에 저항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둘째, 미중 간의 경쟁이 무역 분야를 넘어 직접적 군사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펜스 부통령은 2018년 10월 4일 허드슨 재단 연설을 통해 중국의 다면 공세를 지적한 바 있다. 펜스 부통령은 미국이 중국을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포용하고자 WTO 가입, 미국 시장 개방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권위주의를 유지하며 국민 감시, 인권탄압 등을 시행한다고 주장한다. 고관세 및 쿼터 유지, 환율조작, 기술이전 강요, 지적재산권 절도, 외국투자자본 유치를 위한 산업보조금 지급 등 비자유주의 정책을 지속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더 나아가 국방력 강화를 통한 주변국 위협, 부채 외교를 비롯한 미국의 정치과정에 대한 개입, 문화, 학술 영역에서의 친중 영향력 강화 등 전방위 전략을 시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작년 한 해 동안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경제, 인프라, 개발협력, 에너지 지원 등 범정부적 경제지원 전략을 발표하여 출범시켰고, 이번 샹그릴라 대화에서 국방장관대행은 인도·태평양 전략의 국방, 안보적 골간을 발표하였다. 중국도 경제무대에서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보호무역 요구에 대응하면서도 미국이 대결을 원한다면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중미 무역협상에 관한 백서를 발간하여 미국의 관세압박을 비판하는 한편, 장기적인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일대일로 2차 포럼에서 보이듯이 한편으로는 국제적 비판을 수용하면서 참여 국가를 늘리고 더 많은 프로젝트 계약을 체결하여 시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대일로에 기존의 참가국들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로는 이탈리아가 참여의사를 새롭게 밝혔고, 20여개 주변국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으며, 7개국과는 위안화 결제에 합의하였고, 과학 기술, 교육, 대외원조 등에서도 성과가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중국은 상대적으로 열세인 군사 무대에서는 국방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 강군몽(强軍夢)을 장기적으로 꾸준히 추구하고 있으며, 대만, 남중국해, 동중국해 등 지역 분쟁 지역에서는 중국의 군사력을 투사하기 위해 항공모함 개발, 대함탄도미사일 개발, 초음속 비행체 개발 등의 첨단 무기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운명공동체라는 장기적 명분 외교를 강조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미중 경쟁은 모든 분야에서 같은 수준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 정도는 크게 세 분야에서 다르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미중 상호 간에 공동 이익 또는 공동 손해를 볼 수 있는 무역분쟁은 어느 한 국가의 일방적 승리로 끝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이 비대칭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군사무대에서는 중국은 상당 기간 직접적 군사충돌이나 대항을 회피하는 화평발전 원칙을 지킬 것이다. 다만 미중의 직접적 군사 대결로 확대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역적 군사 긴장의 위험성은 충분히 상존한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무대에서는 보다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에너지와 첨단기술 무대를 특별히 중시하고 있고, 중국은 희토류나 농산물과 같은 천연자연 무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미중 간의 경쟁이 가열되면서 아시아 국가들은 선택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샹그릴라 대화를 개최한 싱가포르의 리센룽 수상은 기조연설에서 미중의 본격적 대결의 막이 오르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양국 간의 근본적인 신뢰부족이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의 딜레마를 절감하면서 싱가포르와 같은 작은 나라들도 연대를 이루어 경제협력 심화, 지역통합 강화, 다자주의 제도 건설과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는 아시아 국가들 모두가 절실히 체감하고 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동맹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이들 국가들과 긴밀한 연대를 이루어가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 이어 한국을 언급하고 있는 보고서는 한미일 3각협력, 미일호 3각 협력, 미일인도 3각 협력도 차례로 명시하고 있다. 중국 역시 아세안 국가들과 협력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과의 긴밀한 협력 등을 강조하면서 아시아 국가들과 공조를 이루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을 제외하고 동맹국이 있지는 않지만 친성혜용(親誠惠容)의 정신에 입각하여 주변국에 위협을 가하지 않으면서 기회를 제공하고 평화로운 경제발전을 함께 이루겠다는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넷째, 미중의 각축이 본격화되고 있지만 양국 모두 다른 국가들의 주권 존중, 국제사회와 함께 만들어온 다양한 규칙의 준수, 개방적이고 공정한 국제경제질서의 수호 등을 강조하고 있다. 섀너한 장관대행은 중국과의 경쟁을 피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도 규칙에 기반한 경쟁을 추구할 것이며 대결을 피하는 것을 중시한다는 뜻을 비추고 있다. 중국 역시 미국이 다자주의에서 이탈할 때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하는 강대국이 되겠다는 견해를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언급들이 적나라한 세력경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이제 경제, 안보 아키텍처 건설에서 다른 국가들의 지지와 동의가 중요한 시대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중 양국이 서로를 비판할 때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같은 비전을 기준으로 비판하고 있으며, 상호 협력 가능성과 미래 신뢰구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군사력과 동맹 및 파트너십의 지원 등 군사적 분야, 무역분쟁과 환율, 기술혁신과 같은 경제분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중국의 문명공동체 등 철학과 이념의 분야에서 경쟁하면서도 기존의 규칙을 원용한 경쟁을 강조하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이루는 요소들과 내용에 대한 미중 간의 견해가 모두 같을 수는 없지만 적나라한 대결보다는 규칙에 근거하여 국제사회의 눈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세력전이와는 다른 양상을 읽을 수 있다.   한국의 4대 미래 과제 심화되고 있는 미중의 경쟁 구도 속에 한국은 빠른 속도로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한국의 개별 이익을 챙기면서 장기적으로도 미중 모두와 협력할 수 있는 묘수를 찾으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미 한국은 화웨이 5G 기술의 사용 여부,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에 대한 입장, 그리고 사드 실전 배치에 대한 정책 등과 같은 미중 양국의 경쟁 분야에서 한국은 계속해서 입장 표명을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이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골몰해서 한반도 문제를 풀면, 한반도가 21세기 아태 신질서 무대에서 훨씬 유리한 배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는 버려야 한다. 한국은 당면한 4대 미래과제를 하루 빨리 제대로 풀어야 21세기 아태 신질서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반도 문제보다 훨씬 시급한 21세기 아태 신질서 문제를 제대로 풀어야 한다. 한국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신질서 바둑판의 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자중지란의 어리석음을 겪으면서 이미 역사적으로 두 번의 뼈아픈 매를 맞았다. 한국은 19세기 후반의 서세동점이라는 문명사적 변화 속에서 건축된 제국주의 신질서 하에서 20세기 초에 국망의 비극을 맞이한 바 있다. 20세기 중반에는 새로운 냉전질서가 동북아에 자리잡으면서 미국은 한국을 제외하고 일본을 거점으로 하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설정하고, 소련은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으나, 마오쩌둥의 중국 통일과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이라는 국제적 환경 변화에 따라 북한 김일성의 전쟁통일론을 조심스럽게 지원하면서 한반도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었다. 21세기에 세 번째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21세기 아태 신질서 건축을 위해 빠르게 전개되고 있는 미중 포석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고 그 속에서 한반도의 21세기 생존 번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미중 간 전략적 선택을 서둘러서 개별 사안에서 한국의 입지를 좁혀서는 안 된다. 한국은 중견국으로서 보편 규범에 입각한 외교를 추구해온 전력이 있는 만큼, 미중 어느 한 쪽에 치중하는 이익 외교를 넘어서 동시에 21세기 규범외교를 추구하는 공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미중은 경쟁구도 속에서도 규칙에 기반한 경쟁과 포용적 국제질서와 규범을 중시하는 만큼, 한국의 규범 외교가 설 땅도 마련할 수 있다. 한국은 수출에 의존해서 번영해야 하는 국가로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유주의적 국제경제질서를 지지하고 추구하는 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미중 양국의 이기주의를 넘어서서 한국의 이익에도 부합하고 규범적으로도 옳은 외교사안을 개발해야 한다. 특히 미중이 합의할 수 있는 규범과 규칙의 영역 중에 한국이 중요한 이해관계상관자(stake-holder)가 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의 문제는 미중 양국에게도 중요한 문제이자 한국이 참여하여 문제 해결의 규범을 제시할 수 있는 이슈이다. 한국이 단지 자의 이익만을 위해 단기적으로 해결을 도모할 수도 있지만 해결 과정에서 미중의 협력 규범을 부분적으로라도 이끌어 내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미중은 핵 비확산 규범에 기초하여 양국의 경쟁과 대결이 심화되는 중에도 협력을 계속하고 있고, 북핵 문제 해결과정이 더 진행되면 한반도 평화문제를 함께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비핵화된 북한의 외교지향,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는 미중 협력체계, 한미동맹의 미래와 같은 핵심 과제가 포함될 것이다. 이때 미중이 단기적인 국가이익을 넘어 동북아 지역질서를 위한 공동의 규범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한국의 외교력이 발휘돼야 한다. 셋째, 미중 대립 구도에서 같은 위치에 있는 국가들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섀너한 장관대행은 아세안의 중심성을 말하고 있고, 중국도 이웃 국가들의 주도권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물론 이 발언들이 자국의 지원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미중 경쟁구도 속의 아시아 국가들이 협력해서 미중의 협력 공간을 넓히는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한국은 상호 이익이 되는 이슈에서 미중이 협력할 뿐만 아니라 합의할 수 있도록 협력의 규범과 합의 규칙을 제정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미국이나 중국의 일방적 주도가 아닌 미중을 비롯한 공동 주도의 아태 신질서를 건축해서 모든 구성원들의 포괄적 이익이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 넷째, 이슈별로 보편 규범을 추구하고 논리를 개발하려면 국내의 21세기 역량을 총 결집해야 한다. 미중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이슈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분쟁의 해결을 주도할 표준을 설정하려는 포석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 속에서 한국이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여 미중 뿐만 아니라 다른 중견국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어 규범의 역 전파를 성공시키려면 지구적 차원의 지식 추적과 논리 개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20세기 구세대들의 이분법적 진영논리를 뛰어 넘어서 21세기 신세대들의 복합적 공동진화 논리를 추진하도록 하는 미래지향적 세대 청산이 시급하다. ■   ■ 집필: 하영선_ EAI 이사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한국평화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 및 편저로는 《복합세계정치론: 전략과 원리 그리고 새로운 질서》, 《한일 신시대 와 공생복합 네트워크》, 《변환의 세계정치》, 《미중의 아태질서 건축경쟁》 등이 있다. ■ 저자: 전재성_ EAI 국가안보연구센터 소장, 서울대학교 교수.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외교부 및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정치이론, 국제관계사, 한미동맹 및 한반도 연구 등이다. 주요 저서 및 편저로는 《남북간 전쟁 위협과 평화》(공저), 《정치는 도덕적인가》, 《동아시아 국제정치: 역사에서 이론으로》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최수이 EAI 선임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6) I schoi@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하영선, 전재성 2020-06-05조회 : 8577
논평이슈브리핑
[EAI 논평]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중국의 한반도 비핵, 평화 프로세스에서의 역할과 전략

.a_wrap {font-size:14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0px;} Editor's Note 지난 2월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한반도 비핵화 협상에서 중국의 역할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의외로 과거보다도 더욱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중국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첫째 중국은 북핵 문제를 장기적인 맥락에서 관리해야 하는 이슈로 상정하고 있고, 둘째 지속적인 경제성장 및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안정된 국제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 바 현상변경보다는 '현상유지를 통한 안정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동률 EAI 중국연구센터(동덕여대 교수) 소장은 분석합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비핵화 협상에서 중국의 역할이 점차 부각되겠지만, 당분간은 중국이 향후 북미 간 협상 진행 상황을 주시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관리하는데 집중할 것으로 보여, 한국의 바람대로 중국이 비핵화 및 평화 구상 실현을 위한 적극적 중재자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저자는 덧붙입니다.     하노이 정상회담 ‘노딜’ 에 대한 중국의 ‘조용한’ 대응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예상 밖으로 결렬되면서 한반도 비핵화 협상에서 중국의 역할이 새삼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 평화 프로세스에서 ‘중국 소외론’(China passing)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건설적 역할’ 수행 의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의 구체적인 역할과 행보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해석과 억측이 혼란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대북 제재 국면에서 ‘중국 역할’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고조되었고, 심지어는 역할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 중국 책임론, 압박론까지 제기된 바 있다. 2018년 남북한, 북미 정상회담이 연이어 성사되고 남북미 3자간 종전선언 가능성이 논의되면서 이른바 ‘중국 소외론’ 도 등장했다. 그리고 돌연히 북중 정상회담이 잇따라 이루어진 이후에는 미국 정계를 중심으로 ‘중국 배후론’이 제기되었다. 중국 역시 ‘건설적 역할’을 역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2차 북핵 위기 이후와 비교할 때 구체적인 역할이 포착되지 않으면서 중국 역할에 대한 논란은 증폭되고 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비핵화 협상이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임에도 중국이 보여준 가장 두드러진 외교 행보는 북한과의 4차례의 연이은 정상회담이었다. 그런데 이 역시 네 번 모두 북한의 요청에 의해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 형태로 이루어진 만큼 중국이 주도적으로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예상 밖의 노딜(no deal)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원론적이고 담담한 공식 반응을 내놓은 채 구체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도 의외라 할 수 있다. 중국은 그동안 북핵 문제는 북미 양자 간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고, 실제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적극적으로 환영과 지지를 표명해 왔기 때문에 그만큼 ‘노딜’에 대한 당혹감도 컸어야 한다. 비록 북한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배후’ 의심을 받으면서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전과 직후, 그리고 하노이 회담 직전에 북중 정상회담을 연달아 가지면서 역할에 대한 주목을 받았던 중국이었기에 정작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의 ‘조용한’ 행보가 뜻밖인 것이다. 중국의 예상 외의 신중한 행보는 미중 간 무역분쟁 등 갈등 국면에서 전개되고 있는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는 중국의 복잡한 의중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왕이(王毅) 외교부장과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2019년 양회(兩會)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을 복기해 보면 이러한 중국의 복잡한 속내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은 공히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대화가 재개될 수 있다는 낙관론을 적극 피력했다. 그러면서 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이 단번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우며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관련 당사국들은 인내심을 갖고 쉬운 것부터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하노이 정상회담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이유와 배경에 대해 국제사회에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국은 이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심지어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대화 재개에 대한 강한 희망과 기대를 피력했지만 과거처럼 셔틀외교를 하는 등 대화재개를 위한 실질적인 중재자 역할을 모색하고 있지 않다.   중국은 북미 협상의 결렬이 혹여나 다시 한반도에 긴장을 초래할 가능성을 우려하면서 협상 재개의 희망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것일 수 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 북미 양국이 신속하게 협상을 진전시킬 가능성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요컨대 중국은 북미협상이 파국으로 이어져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는 것도 원치 않지만, 동시에 협상이 급진전되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의 현상변경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사실 북미 정상회담을 지지하면서도 내심 협상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 유보적인 견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트럼프 정부의 의도와 의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비핵화 과정이 단기간에 완료되기 어렵다는 현실을 고려하여 트럼프 정부 임기 이후 정책의 연속성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했다. 중국은 여전히 북핵 문제를 상당히 장기적인 맥락에서 관리해야 하는 이슈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 역할 변화와 패턴 중국은 지난 26년간 북핵문제에 대한 대응과 역할에서 일정한 패턴을 보여 왔으며,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중국의 반응 역시 그 패턴과 일정한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 이후 현재까지 중국은 기본적으로는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협상과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면서도 점차 자신의 역할을 확대하면서 전략적 입지를 넓혀왔다. 즉, 중국은 1993년 1차 북핵 위기 시에는 ‘조용한 관찰자’ 또는 ‘막후 조정자’라는 제한적인 역할을 한 반면에, 2003년 2차 북핵 위기 이후 중국은 북미중 3자회담을 주선했고, 이어서 6자회담의 주최국으로서 실질적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그리고 2017년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에 중국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고강도 대북 제재에 참여하면서 결과적으로 미국과의 협력도 강화해 갔다. 중국이 2003년과 2017년 각각 대화 중재와 제재 강화라는 상이한 행보를 통해 역할을 수행했지만, 두 시기는 북핵 문제에서 미국의 군사적 행동 가능성이 높아지고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중국은 비핵화는 결국 북미 간 문제이므로 중국의 역할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중국이 지니고 있는 ‘레버리지’ 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에 한반도 위기가 고조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는 북한에 대해 일정한 압박과 설득을 병행하여 대화로 견인하고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체제가 불안정해지거나 위기가 고조되고 북중관계가 파국에 이를 정도까지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지 않는 신중함도 유지했다. 중국은 북한체제의 위기 역시 한반도의 주요한 불안정 상황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북핵 6차 실험이후 고강도 제재에 참여하면서도 제재의 목적은 대화를 견인하는데 있음을 강조해 왔다. 중국이 북핵문제에서 점차 역할을 확대해 온 지난 26년의 시간은 사실상 중국의 부상 일정과 맞닿아 있으며 그런 까닭에 중국은 북핵 문제에서 ‘미국 변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되었다. 중국은 북핵은 북미 간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이슈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등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면서도, 북핵 문제로 인해 미국과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오히려 중국은 가능한 북핵 문제에 관해서는 미국과의 협력 기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중국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항상 ‘비핵화 원칙’에 합의했고, 2017년 9월까지 9차례의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 채택에도 미국과 협조했다. 요컨대 중국은 이전에도 북핵 문제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점진적으로 확대시키기는 했지만 주도적이고 선제적이었다기보다는 미국, 북한과의 관계를 함께 고려하면서 대응해 왔다. 즉, 중국의 북핵에 대한 대응과 전략에서 미국과의 관계, 북한체제의 안정성, 그리고 한반도 정세 등이 주요한 변수로 작용하며 전략과 역할을 변화시켜 왔지만, 북한이라는 지정학적 완충지대를 관리하려는 정책 기조는 유지되어 왔다.   시진핑 정부의 한반도 비핵,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전략과 역할 시진핑 정부에서도 기존의 북핵 정책 기조는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진핑 정부가 직면해 있는 복잡한 국내외적 상황을 고려할 때 한반도 정책은 기본적으로 ‘현상유지를 통한 안정화’, ‘남북한에 대한 균형 외교’ 기조를 유지해 가는 것인 합리적이다. 중국이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시진핑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는 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저비용의 안정된 국제환경이 여전히 중요하다. 특히 현재와 같이 미국과의 관계가 불확실하고, 불가측한 복합적인 상황에서 한반도 세력관계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한편, 시진핑 정부가 직면한 현실은 녹록하지만은 않다. 2018년 이후 한반도 비핵, 평화프로세스가 북미 간 협상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그동안 중국이 수행해 왔던 ‘중재자’의 역할과 ‘북한에 대한 압박과 설득’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중재자의 역할은 한국이 일정 부분 소화하고 있고, 북미 간 직접 대화가 성사됨으로써 북한에 대한 압박과 설득의 수요도 감소하였다. 비핵화 협상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전되고 요동치면서 협상을 견인하고 중재하는 중국의 위상과 입지가 일시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2018년 이후의 전개 양상은 중국에게도 분명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대응이 필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견제는 강화되고 있는 반면에 북미 간의 대화와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중국 측 운신의 폭이 제한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의 한반도 정책 또한 성공적이지만은 않다. 한국과는 사드(THAAD) 배치 문제로, 북한과는 핵무기 개발로 인해 한반도 안정화와 ‘투 코리아(two Korea)’ 정책이 도전 받고 있다. 한반도 주변 4강 가운데 남북한 모두와 일정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강국이라는 전략적 위상이 도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지향하고 있지만 동시에 한반도의 현상변경보다는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위상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중국에게 북핵 문제가 중요한 안보 현안이기는 하지만, 초미의 과제로 상정하고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북핵 문제를 상당히 장기적인 차원에서 관리해야 하는 이슈로 상정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불안정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중국의 전략적 입지가 약화되지 않도록 하는 차원에서 북한과의 관계 복원을 시도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중국의 복잡한 셈법은 비핵화 협상과 연동될 수밖에 없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와 관련이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이라는 민감한 사안을 불거지게 할 수 있다는 현실을 중국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미중 간의 갈등 상황에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올라오게 될 경우 한반도는 새로운 불확실성의 상황으로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중국은 가능한 한 이러한 상황을 지연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중국은 향후에도 한반도 비핵, 평화프로세스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향후 북미 간 협상의 진행 상황을 주시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데 우선순위를 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는 비핵화 협상의 그 어떤 시나리오에서도 ‘중국 역할’은 갈수록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3자, 또는 4자 종전선언 논의에 대한 중국의 불만 제기, 10개월간 4차례의 이례적인 북중 정상회담,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배후설’ 제기 등은 바로 중국의 역할이 결코 간과될 수 없다는 저변의 흐름을 충분히 시사해 주고 있다. 비핵화가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국 북미수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한의 개혁개방 체제로의 연착륙 등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 고비마다 중국의 역할은 중요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전략적 우위 하에 전개되고 있는 현재의 미중 경쟁국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 협상을 성사시키려는 의지가 확고하다고 하면 북미 간에 전개되는 비핵화 협상 단계까지는 미중 갈등이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핵화 프로세스가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 질서 전환과 관련된 이슈로 빠르게 진전될 경우 미중 경쟁이라는 요소가 장애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로 인해 심지어는 비핵화 프로세스의 진전까지도 역진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요컨대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국내외의 정세를 감안할 때, 중국이 한국이 희망하는 비핵, 평화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하는 ‘촉진자’ 또는 ‘적극적 중재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현실에 있다. 따라서 한국은 북미협상을 중재해야 하는 과제 못지 않게 중국이 ‘긍정적 역할’을 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난제도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     ■ 저자: 이동률_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AI 중국연구센터 소장. 중국 북경대학교 국제관계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과 현대중국학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 대외관계 및 중국 소수민족, 중국의 민족주의 등이다. 최근 연구로는 "시진핑 정부 '해양강국' 구상의 지경제학적 접근과 지정학적 딜레마", "Deciphering China’s Security Intentions in Northeast Asia: A View from South Korea", 《중국 미래를 말하다》(편저), 《중국의 영토분쟁》(공저)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최수이 EAI 선임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6) I schoi@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이동률 2020-06-05조회 : 8529
논평이슈브리핑
[EAI 논평] 한중 미세먼지 저감 협력의 첫 단추: 공동의 인식과 조사

.a_wrap {font-size:14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0px;} [편집자주] 미세먼지농도 확인이 일상이 되어버릴 정도로 미세먼지는 이미 우리의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더욱이 미세먼지와 같은 대기오염 물질의 경우, 국경을 초월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일국의 노력만으로는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 간 협력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경우, 90년대부터 환경오염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초미세먼지를 연구 대상에 포함한 이후에는 양측 간 실질적인 공동 연구나 발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이태동 연세대 교수는 지적합니다. 실제 국가 간 공동 대응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기오염이 초국적 문제임을 인식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공동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연구 결과가 실제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한국의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온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문제는 과학적 태도에 따라야 한다." (루캉 중국 외교부 대변인 2019. 3. 6) "미세 먼지, 중국발 원인이 있는 것은 사실" (강경화 외교부장관 2019. 3. 7) "중국 생태환경부 장관이 중국발 미세먼지가 한국에 영향을 주는 부분을 분명 시인했다." (조명래 환경부장관 2019. 3. 7)   대기환경 문제의 특징 중 하나는 대기오염 물질이 국가 간 경계를 고려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이동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기오염 물질을 관리하는 데 있어, 국가 간 관할권(jurisdiction)을 정하고 시행하는 데 어려움을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월경성 대기오염(transboundary air pollution)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가 간 협력이 필수적이라는 것도 의미한다. 그러면 국가 간 협력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미세먼지, 황사와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우선 대기오염 물질이 어디에서 발생해서, 어떻게 이동하며, 어디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과학적 사실에 대한 공동의 인식이 필요하다. 환경정치학자인 피터 하스(Peter Haas)는 지구 환경 문제에서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인과적 과정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 과학자 네트워크인 인식 공동체(epistemic community)가 국제기구와 국가가 당면한 환경 문제에 대한 정책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자들 간에도 연구 방법과 결과, 이론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며, 이를 줄이기 위한 지속적이고 다양한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 공동 연구가 필요하다. 앞서 살펴본 한중 간 외교 수사는 오랜 한중 협력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세먼지를 비롯한 월경성 대기오염 물질의 원인, 이동 경로, 결과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90년대 중반부터 한국과 중국은 환경오염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2000년부터는 ‘한중일 장거리이동 대기오염물질 공동연구사업’(Long-range Transboundary Air Pollution: LTP)을 시작했으며, 대기 모델링 시스템 구축, 황산화물, 질소산화물에 대한 배출원-수용지 관계 분석, 미세먼지 국가 간 상호 영향 평가가 이루어졌다. 특히 LTP의 일환인 2013년 미세먼지 배출원-수용지 영향분석 모델링의 결과, 계절적 변화에 따른 증감이 있지만, 한국 미세먼지 중 47% 가량이 국내 요인이고, 나머지는 중국과 북한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환경부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세먼지의 국외 영향은 평상시에는 30-50% 정도이지만, 고농도 시에는 60-80%로 높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초미세먼지를 공동연구 대상에 포함시킨 후, 중국 측은 세부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실질적 공동 연구와 공동 연구 결과 발표 부재로 인한 과학적 불확실성은 동북아 월경성 오염물질 환경 협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미세먼지 등 월경성 대기오염 물질을 저감하기 위한 동북아 협력을 저해하는 다른 요소는 인식의 차이이다. 이는 정책을 결정하는 정책 결정자뿐만 아니라 학자들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월경성 오염 물질에 대한 한중 간의 인식차이는 크다. 김상규와 김동연(2018)의 연구에 따르면, 1990-2017년 한국의 국내 학위 논문 및 국내 학술지 논문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산성비, 황사, 미세먼지, 환경오염, 대기오염과 중국을 핵심어로 사용한 논문은 적게는 0.75%(해양오염 695편 중 해양오염+중국 5편)에서 3.44%(산성비 261편 중 9편)에 다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같은 기간 중국의 학위논문과 중국 국내 학술지 논문에서 황사와 한국을 연결하여 연구한 논문은 1편(1,966편의 황사 관련 논문 중)에 불과하며, 미세먼지를 연구한 논문 중에서도 한국을 언급하여 관련 짓고 있는 논문도 1편(4,328편의 미세먼지 관련 논문 중) 밖에 없었다. 이는 중국의 환경오염이 심각해 질수록 중국의 환경과 대기오염 관련 연구는 늘어나지만, 이를 한국과 연결 지어 연구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반시민의 경우, 한국에서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미세먼지 유입과 관련해 중국의 책임을 물을 것을 요구하는 청원이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던 것과 비교해, 중국에서는 미세먼지와 한국 및 기타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듣기 쉽지 않다. 월경오염물질의 원인, 이동 경로, 결과에 대한 정량화된 과학적 분석 결과는 국가 간 협약에서 오염자부담원칙(Polluter Pay Principle: PPP)에 의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기제로 작용하여 오염국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월경성 대기오염에 있어 순전한 오염자나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국은 몽골로부터 월경성 오염 물질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으며, 일본은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월경성 오염물질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월경성 오염 물질에 대한 동아시아 국가의 공동 연구와 분석은 비난이나 책임 회피의 근거이기보다는, 동아시아 지역의 대기질 향상을 위한 기초 자료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 대기오염에 대한 인식 공동체가 실질적으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함께 발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발표 결과를 토대로, 동아시아 정책 결정자들과 일반 시민들이 공동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연구자들이 과학적 방법론으로 공동 연구한 결과가 도출되어 공유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정책 결정자들이 간과하면, 문제 해결의 첫 단추와도 같은 문제에 대한 ‘공동 인식’이 어려워진다. 그렇게 될 경우, 미세먼지를 비롯한 월경성 오염물질저감협력 효과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신뢰할만한 정보와 데이터 분석을 제공하는 초국적 연구 결과가 정책 결정 및 협력 단계에까지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과학자와 정책결정자 간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다행히 최근 들어 한중 간 양자 협력과 동북아 지역 월경성 대기오염 저감을 위한 다자간 협력의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있다. 양국 당국은 한중 환경협력계획(2018-2022)을 통해 한중 간의 환경 협력계획에 대한 서명과 함께 ‘한중환경협력센터’를 공동으로 설치,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센터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대기질 공동연구단’과 ‘환경기술 실증지원센터’를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환경협력 컨트롤 타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환경부 2017). 그 밖에도 2018년 10월에는 동북아 6개국(한, 중, 일, 러, 몽골, 북한) 다자 협력틀로서 동북아청정대기파트너십(North-East Asia Clean Air Partnership: NEACAP)이 출범하였고, 이는 미세먼지 등 역내 대기오염 저감을 위해 정책결정자-과학기술 전문가 간 네트워크 형성을 표방하고 있다. 한중 간 미세먼지 협력의 첫 단추는 문제에 대한 공동의 인식과 연구이다. 특히 자국 내의 대기오염 문제에 대한 인식을 넘어, 대기오염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인식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공동의 연구가 시민들의 문제 인식과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될 때 국제 환경 협력 강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해 자국 내 저감 조치를 자발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동시에 국내적 노력이 국제적인 환경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양자 간, 다자 간 협력 채널을 활용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모든 시민에게 자유롭게 깨끗한 공기를 숨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   ■ 참고자료 김상규·김동연. 2018. “월경성 환경오염문제에 관한 한중 인식 차이와 협력 분석: 평화적 갈등 해결 논의를 중심으로.” «평화학연구» 제19권 제1호: 253-277. 남상민. 2019. "미세먼지, 동북아 협력은 가능한가." «참여사회» 4월호. 통권 264호. 신범식 외. 2018. «지구환경정치의 이해». 서울: 사회평론아카데미. 원동욱. 2008. "과학적 불확실성과 동북아 환경협력의 딜레마." «한국정치학회보» 제42집 제4호: 367-385. 이태동. 2017. «토론으로 배우는 환경-에너지 정치». 서울: 청송미디어. 이태동·정혜윤. 2019. "한중 대기 환경협력의 정치: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비교연구." 기후변화학회발표논문. 이혜경. 2017. «동북아 장거리 대기오염물질 공동연구(LTP)». 서울: 국회입법조사처. 환경부. 2017. "정상회담 계기 〈한∙중 환경협력계획〉 서명." 환경부.     ■ 저자: 이태동_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동 대학 환경·에너지·인력자원 연구 센터장. 연세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 및 지역계획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세계 도시와 기후변화(Global Cities and Climate Change: the Translocal Relation of Environmental Governance, Routledge)를 주제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관심사로 도시의 기후변화와 에너지 정책을 국제관계와 비교정책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으며, 환경-에너지 정치, 마을학개론, 시민사회와 NGO 정치 등의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마을학개론»(2017), «우리가 만드는 정치»(2018)와 같은 저서를 학생들과 함께 출판하였다. ■ 담당 및 편집: 최수이 EAI 선임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6) I schoi@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2020-06-05조회 : 8805
논평이슈브리핑
[EAI 논평] 제13기 전국인대 제2차 회의의 정치적 해석

.a_wrap {font-size:14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0px;} [편집자 주] 지난 3월 15일 막을 내린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안건은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작년과 달리 시진핑 주석에 비해 리커창 총리의 목소리가 높아진 점에 주목하면서 합의 정치의 부활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고 양갑용 박사는 분석합니다. 특히,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배경으로 저자는 미중 무역갈등에 주목합니다. 미중 무역갈등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시 주석에게 부담으로 작용했고, 이에 시 주석은 '당과 인민'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는 '몸을 낮추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반면, 이러한 외부 변수에 대한 대응으로 리커창 총리는 '시장화'와 '민영화'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목소리 높였고, 이는 시진핑 주석의 '핵심 지위' 획득으로 부각됐던 일인지배체제에 미세하지만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시 주석의 권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기존의 권력 강화 노력이 예상치 못한 외부 변수에 의해 '합의'를 통한 방식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덧붙입니다.     논의를 시작하며 전국인민대표대회는 헌법 제3장 국가기구에서 제1절에 지위와 역할이 규정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구이다. 헌법 57조에 따르면 전국인대대표대회는 중국의 최고국가권력기관이며, 국가 입법권을 행사하는 헌법 기구이다. 이는 당의 결정을 국가의 결정으로 바꾸는데 매우 중요한 기제라는 의미이다. 헌법 61조 규정에 따라서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매년 1회 전체회의를 개최한다. 물론 전국인대 상무위원회의 요청이나 전체 대표 1/5 이상이 소집을 요구하는 경우 임시 전체회의가 개최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매우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번 제13기 전국인대 제2차 회의도 역대 전체회의 개최 관행에 따라 열렸다. 그러나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함축적 의미는 기존 제2차 회의의 성격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행의 지속과 변화 이번 전국인대 전체회의는 지난해 개최된 1차 회의와 비교하여 특별히 중요한 안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총리의 <정부업무보고>가 있었고, 중국외상투자법이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장롱순(張榮順)의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직 사임 안건 등이 다뤄졌다. 헌법 제62조는 전국인대 직무 권한으로서 헌법 수정, 헌법 실시 감독, 기본 법률 제정 등 16가지를 적시하고 있다. 16가지 임무 가운데 이번 전체회의에서는 법률(외상투자법) 제정과 인사(장롱순 사임 건) 안건 처리 등이 주목을 받았다. 전국인대 제2차 회의는 구조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 없는 회의라는 사실을 이번 회의에서 잘 보여주었다. 만약 지난 해 하반기 기존 관례대로 19기 3중전회가 열려서 집권 2기 청사진을 제시했다면 정책 논쟁이 벌어지는 등 회의의 성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19기 3중전회가 앞당겨지고 내용이 바뀌면서 집권 5년의 구체적인 정책 의제가 부각되지 못했다. 중국은 여전히 2017년 10월에 개최된 19차 당대회 <보고>에 기초한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당의 정치일정의 변화와 달리 전국인대는 예정된 의사일정을 소화했다. 이는 여전히 중국에서 예측 가능한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해는 헌법 수정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올해 전국인대 전체회의는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지나갔다. 정치 일정을 무난하게 소화했다는 의미이다. 예측 가능한 정치가 작동하고, 전국인대 전체회의가 일탈 없이 개최된 것은 제도의 지속 측면에서는 충분히 긍정할만하다. 예측 가능한 제도화된 정치의 일면을 잘 보여주었다. 헌법에 규정된 의사일정을 변경하면서까지 무리수를 둘 정도로 전국인대가 당대회와 비견될 정도로 의미 있는 정치 행사가 아니라는 점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작년 제1차 회의와 비교하여 리커창 총리의 주목도가 올라가고 시진핑 주석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이례적이며 일종의 조용한 변화이다. 작년 전국인대 전체회의가 시진핑 주석에 의한, 시진핑 주석을 위한 회의였다는 비판적 평가와는 사뭇 다르다. 중국 관방 언론도 리커창 총리의 <정부업무보고>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부업무보고>에 대한 긍정적 관심은 상대적으로 시진핑 주석을 덜 주목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전국인대는 헌법 수정을 통해서 이른바 ‘시진핑 사상’을 헌법 전문에 넣었다. 국가주석의 연임 제한 규정도 철폐했다. 그러나 총리의 연임 제한 규정은 그대로 두었다. 결과적으로 시진핑 주석의 개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회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중국 주요 언론도 권력 강화와 집중에 대한 당위성을 선전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는 리커창 총리로 상징되는 다른 목소리에 비교적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흐름의 변화는 당장 시진핑 주석 개인 권력 집중 완화 내지 약화를 불러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었던 집단 권력의 작동 가능성에 다시 관심을 돌리게 했다. 이것이 이번 회의의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당과 인민, 시장화와 민영화 전국인대 전체회의는 각급 인민 대표들이 참여하는 회의이다. 형식적으로는 인민의 대표성을 가지고 인민의 수요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 다투는 정치 경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행위자들의 쌍방향 소통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중앙 지도자들에게는 기층의 다양한 요구에 정책으로 답하는 자리이다. 인민 대표들에게는 자신들의 요구를 중앙에 표출하고 전달하는 유용한 자리이다. 전국인대 개최 기간 중앙 지도자, 특히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각급 대표단 전체회의에 참석한다. 기층의 요구와 상황을 청취하고 중앙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오랜 관행이다. 시진핑 주석도 이번 회의 기간 네이멍구 대표단 전체회의 등 6개 대표단 회의에 참석했다. 리커창 총리도 광시자치구 대표단 전체회의 등에 참석했다. 특히 리커창 총리는 <정부업무보고>와 폐막식 후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회의 기간 두 최고 지도자들의 강조점이 약간 달랐다. 이번 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회의 기간 시진핑 주석은 당과 인민을 강조했다. 리커창 총리는 시장화와 민영화를 강조했다.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라는 외부변수를 대응하는 시각에서 두 사람은 약간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물론 이 두 사람이 파벌적 성격을 갖는 당파적 정략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볼 필요도 없다. 상호 협력이 정치적 이익을 가장 극대화한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외부 변수가 중국 국내정치에 깊숙이 그리고 현저히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의 엇박자가 중국 외부로 표출될 가능성은 없다. 당내 합의를 통해서 당과 국가의 시각과 관점, 입장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극단적 대립 구도를 갖는 파벌적 이익에 경도되어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정책의 우선순위와 경중에서는 약간 결을 달리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진핑 주석은 군중주의적 방식으로 난관을 돌파하는데 관심이 높고, 리커창 총리는 국내수요 창출과 국내시장 활성화를 통해서 외부변수에 대응하려는 듯 보인다. 시진핑 주석은 대표단 회의에 참석하여 자신의 견해를 설파했고 리커창 총리는 <정부업무보고>와 폐막식 기자회견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이번 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의 키워드는 당과 인민이었다. 3월 4일 문화예술계, 사회과학계 대표단 회의에서는 ‘인민’을 대변할 것을 주문했다. 3월 5일 네이멍구 대표단 회의에서는 ‘생태환경’을 거론했다. 3월 7일 깐수성 대표단 회의에서는 ‘빈곤문제’를 거론했다. 3월 8일 허난성 대표단 회의에서는 ‘향촌진흥전략과 삼농(三農)’을 강조했다. 3월 10일 푸젠성 대표단 회의에서는 ‘양안’ 문제를 언급하고 대만 사람들을 내국인과 동등하게 대할 것을 주문했다. 3월 12일 해방군과 무장경찰부대 대표단 회의에서는 빈곤탈출 업무에 군이 나설 것을 주문했다. ‘인민’을 중심에 둔 군중주의적 작풍을 재차 강조했다. 외부변수의 영향을 당과 인민의 결속을 통해서 뚫고 나가려는 의지로 읽힌다. 반면에 리커창 총리는 국내시장과 국내수요 증진을 통해서 외부변수에 대응하고자 했다. 국유기업 개혁, 자본시장 확대, 취업의 거시전략화 등을 주장했다. 그 방법으로 시장화와 민영화를 강조했다.   일인지배에서 다시 합의의 정치로 ‘신시대’를 표방하고 출발한 시진핑 집권 2기는 2018년 4월부터 본격화된 미중 무역 갈등이라는 암초를 만나 방향을 잘 잡지 못하고 있다. 단기간에 끝날 줄 알았던 미중 갈등은 해를 넘기고 1년여를 끌고 있다. 이번 전국인대 전체회의는 사실상 미중 갈등으로 불리는 외부변수를 국내에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중국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여기에 이러한 국면이 비교적 상당히 오래 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더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진핑 주석은 자신이 주창했던 신형국제관계, 인류운명공동체, 일대일로 등에 대해서 다시 사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당장 무역 갈등으로 촉발된 경기 위축 혹은 하강 압력은 당의 통치 정당성을 위협하고 시진핑 체제의 연착륙에도 의구심을 자아내게끔 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몸을 낮추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번 전국인대 전체회의에서 보여준 시진핑 주석의 움직임은 매우 조심스럽다.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에 리커창 총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다시 합의의 정치 가능성을 부활시키고 있다. <정부업무보고>와 기자회견을 보면 리커창 총리는 예전에 비해서 공급 측 구조개혁, 중국의 꿈 등 시진핑 주석이 강조했던 워딩보다는 시장화, 민영화, 민생 등 자신이 강조했던 워딩을 비중 있게 거론했다. 그리고 매우 상세하게 민생 부분을 챙기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예컨대, 취업우선 정책을 거시 정책 차원에서 다루겠다고 선언하고, 대규모 SOC 건설 등 국가투자를 늘려 경기를 진작시키고, 국내수요 창출 및 국내시장 활성화를 위해서 민간 투자를 증대하고, 도시 호구가 없어도 도시 상주 주민에게 도시 주민과 동등한 혜택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이데올로기로서 민생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으로서 민생에 중점을 두겠다는 리커창식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리커창 총리의 개인적인 소신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당내 합의가 전제되어야만 표출될 수 있는 의제이다. 다시 말해 리커창 총리가 주장하는 여러 가지 국내시장 활성화 조치들이 사실은 당내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번 제13기 전국인대 제2차 회의는 과거 시진핑 주석으로 집중되었던 ‘핵심’의 정치가 다시 ‘합의’의 정치로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한 회의라는 점이다. 이는 외부 변수가 심대하게 국내정치에 영향을 미친 결과의 한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미세한 변화가 시진핑 주석의 ‘핵심’으로서의 권위 약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기존의 일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 외부 변수로 인해서 다시 합의의 정치 부활로 연결되는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전국인대, 특히 두 번째 열리는 제2차 회의는 밋밋하고 특별할 게 거의 없는 회의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 외부변수의 국내정치 영향은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의 움직임에 미세한 변화를 이끌었다. 이것이 ‘핵심’에서 다시 ‘합의’로의 회귀를 불러오는 정치 변화를 촉발할지 지켜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글을 마치며 전국인대 제2차 회의는 제1차 회의에 비해서 긴장감이 떨어진다. 제1차 회의에서 설계한 대로 첫 해를 보낸 것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루고 대부분 그 성과를 높이 평가하는 의례적인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회의 개최 시기와 다루는 내용은 관행의 지속성에 따라 큰 변화가 없다. 이번 회의도 마찬가지였다. 관행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제1차 회의에 비해서 시진핑 주석이 덜 주목받고, 리커창 총리가 더 주목 받은 것은 미세한 변화이다. 제1차 회의를 압도했던 시진핑에 비해서 이번 회의에서는 리커창 총리의 움직임도 주목 받았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은 여전히 ‘핵심’ 지위를 통해서 군중노선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당’과 ‘인민’의 강조는 이것이 여전히 중국에서 중요하고 관건이 되는 의제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리커창 총리도 과거와 달리 자신의 색깔을 드러낸 ‘시장화’와 ‘민영화’에 대해서 주목 받는 목소리를 냈다. 이는 ‘핵심’ 지위 확보, 헌법 수정, 집권 연장 제한 조항 철폐 등 그 동안 일인 지배 권력을 꾸준히 강화시켜오던 시진핑식 거버넌스와는 약간 결을 달리한다. 외부변수의 영향으로 중국 정치가 일인 지배에서 다시 합의의 정치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 제13기 전국인대 제2차 회의는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     ■ 저자: 양갑용_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대외젼략연구실. 중국 푸단대학교(復旦大學) 국제관계와 공공사무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공산당 집권의 내구성과 간부, 엘리트 정치 등 집권의 내적 동력과 메커니즘이다.    

양갑용 2020-06-05조회 : 8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