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지속적으로 연평균 경제성장률 9%를 상회하는 고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이러한 중국의 고속 성장은 국내 및 지역적 차원을 넘어 지구적 변화를 견인하고 있으며, 이는 안보와 경제 등 전통적 이슈뿐만 아니라 에너지와 환경 등 신흥 이슈에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중국의 변화가 인류의 공생과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바람직한 아태 질서 설계도를 마련하고, 한국의 역할을 제시하고자 EAI는 2018년 “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이라는 중장기 연구사업을 기획하여 운영하고 있다.

 

아-태 에너지·자원 협력 구상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중 간의 무역 분쟁은 무역과 기술 영역에 대해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금융과 에너지, 군사·안보 부분에는 아직 대립이 본격화되고 있지 않다. 동아시아 연구원은 아-태 지역에서 에너지·자원 분야의 협력이 미·중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오히려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미완의 영역이자 가능성을 지닌 영역으로 바라보고, 중견국인 한국이 주축이 되어 미·중 간 협력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연구를 진행한다. <아-태 에너지·자원 협력 구상>은 한샘DBEW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 중인 <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 프로젝트(2018-2021)의 제2차년도 사업이다.

논평이슈브리핑
[EAI 논평]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세력권 확장을 저지하려는 미국

유엔해양법협약 제7부속서에 따른 중재재판소가 지난 12일 내린 남중국해 분쟁에 관한 첫 판결은 당사국인 필리핀 못지않게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첨예하게 대립해온 미국에게도 큰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중국이 주장하는 소위 ‘구단선’(nine dash line)은 해양법협약에 위배되며, 스프래틀리 군도(Spratly Islands, 남사군도)의 어떠한 지형물도 배타적 경제수역이나 대륙붕을 향유할 수 없다고 한 판결은 미국의 남중국해 정책에 법적 근거를 제공한 셈이다. 미국은 재판에 참여도 하지 않고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중국을 국제 사회의 기본적 책무도 부정하는 나라로 공격해 소프트 파워를 약화시킬 명분까지 얻었다.   물론 남중국해 분쟁은 직접적으로는 중국을 비롯한 필리핀, 베트남 등 역내 국가 간의 분쟁이지만, 그 이면에는 서태평양에서 지배적 지위를 누려온 미국과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 간의 거대한 세력 다툼이 있다. 미국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자체에 대한 개입은 피하면서도, 항행 및 상공 비행의 자유를 내세워 동 해역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해왔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저지하지 못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누리던 미국의 패권적 지위와 역내 국가들의 신임을 잃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남중국해 분쟁은 이미 197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지만, 지난 2009년 중국이 ‘구단선’을 표기한 지도를 첨부한 공한을 유엔에 제출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어 시진핑 체제가 출범하면서 남중국해를 중국의 핵심적 이익으로 간주하고, 동 해역에서 필리핀이나 베트남의 어업 및 해저자원 탐사활동을 저지하는 등 일련의 고압적 조치를 취해왔다. 미국 워싱턴 소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이러한 중국의 단계별 행보를 남중국해를 지배하려는 ‘살라미 슬라이싱 전략’(salami-slicing strategy)으로 명명한 바 있다. 중국의 급속한 군사력 증대를 우려해 온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은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는 지역 국가들이 해경 활동을 강화하고 해양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는 등 긴밀히 협력할 것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간 힘겨루기는 2013년 말부터 중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산호초 등 지형물에 인공섬을 조성하고 비행장이나 군사시설을 건설하면서 가속화되었다. 미국은 분쟁 지역인 남중국해에서 이러한 활동을 동결할 것을 제안했지만 중국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2015년 4월 중국이 파라셀 군도(Paracel Islands, 서사군도) 두 개의 섬에서도 확장 공사를 감행하자 미국과 필리핀은 1만 2천 명의 병력이 참여하는 해상 합동 군사훈련으로 대응하였고, 5월에는 미국과 중국의 함정이 남중국해에서 충돌 직전까지 가는 대립 상황에 이른다. 2015년 9월 25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재확인한 이래, 미국은 10월 27일 구축함 라센호를 남사군도 수비환초 12해리 내로 진입시킨다. 이에 중국은 미국 구축함을 추적하는 것으로 맞대응을 했고, 역외 국가인 미국이 남중국해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며 비난하였다. 2016년에 들어서면서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양국 간의 물리적 갈등은 잦아들었지만, 지난 5월 초 미국 구축함 로렌스호가 남사군도 인근 해역에 진입하는 등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군사 행동을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를 수호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본다. 군사 초강대국인 미국에 있어 항행의 자유는 생명줄과 마찬가지다. 남중국해에서도 당연히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중국의 과도한 영유권 및 관할권 주장으로 이러한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바다의 헌법이라고 불리는 유엔해양법협약은 모든 국가는 공해 상에서 항해의 자유를 누리며 이러한 자유는 연안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에서도 적용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항행의 자유에 군사 훈련이나 정찰 및 정보 수집 등과 같은 군사 활동이 포함되느냐를 두고 미국과 중국의 입장이 엇갈리는데 있다. 미국은 항행의 자유에 당연히 군사 활동도 포함된다고 보는데 반해, 중국은 배타적 경제수역에서의 군사 활동은 반드시 연안국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중국해에서 미 해군의 활동이 어느 선까지 적절하냐를 두고 미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중국의 도발에 대해 강력한 신호를 보내기 위해 분쟁 도서들 수 해리 안까지 군함을 보내야 한다거나 다른 국가들을 설득해 자유 항행에 동참하게 하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남중국 분쟁 당사국들이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하자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에 무기 수출제한을 해제한 데 이어 지난 5월 말에는 공동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한편, 남중국해의 평화적 현상유지를 위해 미국이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중국과 관련 당사국들이 해양자원 공동개발과 같은 협력을 하도록 독려하여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은 필리핀에 이어 베트남이나 여타 분쟁 당사국들도 중국과 양자협상의 틀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국제법적 해결을 추구하길 바란다. 그러나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들은 집행력이 결여된 재판으로 과연 중국의 태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분쟁만 격화시키지는 않을지 고민할 것이다. 이들이 필리핀의 전례를 따라 국제법과 재판에 호소하는 전략을 선택할지는 상당부분 이번 판결 이후의 미국과 중국의 대응에 달려 있다. 앞으로 전개될 워싱턴과 베이징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저자 이숙종 EAI 원장·성균관대학교 국정관리대학원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외교부, 통일부,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The Trilateral Commission, 싱크탱크세계평의회(Council of Councils: CoC)의 회원으로 정책연구와 관련하여 국제적인 네트워크 형성에 힘쓰고 있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 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Johns Hopkins University, SAIS) 교수강사, 독일 German Institute for Global and Area Studies 방문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최근 저술로는 "South Korea Aiming to Be an Innovative Middle Power",Transforming Global Governance with Middle Power Diplomacy: South Korea's Role in the 21st Century (편),《글로벌 개발협력 거버넌스와 한국》(편), "The Demise of 'Korea Inc.': Paradigm Shift in Korea’s Developmental State" 등이 있다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이숙종 2020-06-05조회 : 8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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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선컬럼] 복합화 시대의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

저자 하영선_ EAI 이사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한국평화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자문위원,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위원이다. 저서 및 편저로는《하영선 국제정치 칼럼 1991-2011》,《복합세계정치론 : 전략과 원리 그리고 새로운 질서》,《한일 신시대와 공생복합 네트워크》,《변환의 세계정치》등이 있다.           중국의 빠른 부상과 함께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 논의가 미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에서 본격화되고 있다. 동아시아 질서는 역사적으로 전통 천하질서, 근대 국제질서, 현대 냉전질서를 겪은 후 미래 복합질서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복합화 시대의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은 현재 두 핵심 문제에 직면해 있다. 첫 번째는 ‘팍스-차이메리카’(Pax Chimerica)의 부상이고, 두 번째는 아시아-태평양 복합질서의 미래이다.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역사적 변환   동아시아의 정치 공간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천하질서 속에 짜여져 왔다. 19세기 중반 서구의 근대 국제질서와 본격적으로 부딪칠 때 까지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천하질서의 기원은 서주(1046-771BC)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천명을 기반으로 한 천하국가의 명분체계를 시도하는 기원전 천 년의 전진(前秦)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 5패시대(771-453BC)에는 문화의 우열을 명분으로 하는 화이관이 등장하고 전국 7웅시대(453-2221BC)에는 보다 구체화된 구주도(九州圖)와 오복도(五服圖)의 천하질서관을 만나게 된다. 중국의 중원이 처음으로 통일된 진나라(221-206BC)와 한나라(206BC-220AD)를 거치면서 조공(朝貢)과 기미(羈縻)를 기반으로 한 포괄적 위계질서의 천하질서는 2기에 들어서서 명실상부하게 중국 전역을 포함하였으며, 위진남북조의 분열시기를 넘어 수(581-618)와 당(618-907)의 제국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송(969-1279)의 군사적 약화와 요(907-1125), 진(1125-1234), 원(1271-1368) 제국의 부상으로 “다국질서 속의 중국”(China among equals)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함에 따라 천하질서는 3기를 맞아 힘의 균형에 기초한 다국질서를 세우는 동시에 전통적인 조공제도를 유지하고자 했다. 천하질서는 명(1368-1644)과 청(1644-1911) 시기에 4기로 접어들어 역사이래 가장 복합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구체적으로 18세기 청조의 건륭제는 북쪽의 중가르 제국을 정복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티베트에 대해서는 강력한 매력공세를 펼치는 동시에 한국과는 전형적인 조공 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동아시아의 천하질서는 19세기 중반 유럽의 국제질서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중국은 1840년대에 아편전쟁을 겪었고, 일본은 1853년에 미국의 흑선(黒船)을 맞이했다. 한국은 조금 뒤늦게 프랑스와 병인양요(1866) 그리고 미국과 신미양요(1871)를 치렀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우여곡절 끝에 서양의 근대국제질서를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지역 제국주의의 격렬한 각축에 휩쓸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아시아 질서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질서의 틀 속에서 재건되었다. 1947년 미국은 서유럽에 소련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의 경제원조로 소련에 대한 비군사적 봉쇄정책을 시작했다. 1950년 6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도발로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미국이 개입하면서, 유럽에 한정되어 있던 비군사적 봉쇄정책은 아시아를 비롯하여 전세계에 걸쳐 군사적 수단까지 포함시킨 전면적 봉쇄정책으로 확대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상호 적대적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상호억지체제와 국내정치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일단 긴장완화 국면을 맞이했고 미국과 중국도 키신저-주은라이의 역사적 협상을 통해 긴장 완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은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긴장 완화에 실패하고 냉전의 악순환으로 되돌아 갔다. 1970년대의 데탕트 국제질서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다시 신냉전 분위기로 되돌아 갔으나 1985년에 등장한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내세운 새로운 정책 노선은 결과적으로 냉전 국제질서의 막을 내리게 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단순히 전세계적 냉전질서의 종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냉전질서의 퇴장은 곧 새로운 복합질서의 등장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21세기의 주인공, 무대, 그리고 연기의 역사적 변환은 19세기 동아시아가 경험했던 혁명적 변화에 버금가는 문명사적 변화를 예견하고 있다. 근대 국민국가들이 부강무대에서 벌여 온 치열한 경쟁과 갈등은 여전히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동시에 “네트워크 국가”라는 새로운 주인공들이 부강과 신흥의 복합무대에서 공동진화의 복합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21세기 동아시아 질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속적 경제 성장이 계속되면서 동아시아에서는 ‘팍스 차이메리카’(Pax-Chimerica)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복합화의 세기를 맞이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복합 질서 건축 논의가 새롭게 진행 중이다.     팍스-차이메리카의 등장   탈냉전 이후 21세기 변환기 무대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국민국가 또는 국민제국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무정부적 국제질서 속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은 개별 국가가 우선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국내정치와 달리 국제정치에는 중앙정부가 없고, 생존과 번영을 위한 국제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부상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운데,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맞이하게 될 새로운 시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우선 동아시아 질서에서 군사력 분포를 살펴보면, 전세계 군사비 총 지출액(2014년 기준) 1조 7,800억 달러 중 6,100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는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현재 막대한 정부의 예산 적자 문제로 축소되고 있으나 여전히 세계 군사비 지출 상위 열 나라들의 총액을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미국의 군사력은 핵무기, 재래식 무기, 최첨단 무기 등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한편, 중국의 군사비 지출은 사상 최초로 2,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뒤이어 러시아가 845억 달러, 일본이 458억 달러, 한국이 367억 달러의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   다음으로 국민총생산(GDP)규모를 통해 동아시아 질서의 경제력 분포를 살펴보면, 2014년에 전세계 GDP총액 77.3조 달러 중 미국은 17조 4,000억 달러(22.5%)로 1위, 중국은 10조 4,000억 달러(13.5%)로 2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은 이미 2010년에 GDP 규모에서 당시 5조 달러의 일본을 앞질렀다. 2014년을 기준으로 아세안은 2조 3,000억 달러, 러시아는 1조 9,000억 달러, 한국과 호주는 각각 1조 4,000억 달러의 GDP를 달성하였다. IMF의 2020년 세계 GDP 추정치에 따르면, 미국은 22조 5,000억 달러로 세계 1위를 유지할 것으로 애상되나, 세계 2위의 중국은 미국 GDP의 70% 이상인 16조 2,000억 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세계 3위의 일본과의 격차를 점점 더 크게 벌릴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으로 동아시아질서의 지식력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2014 세계 싱크탱크 톱 20’ 조사에서 상위 20개 싱크탱크들 중 절반 이상이 미국에 위치하고 있어서 미국은 명실상부하게 이 분야의 세계 최강임을 입증했다. 그 밖의 주요 싱크탱크들은 모두 유럽에 소재하고 있으며,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유일하게 일본 국제관계연구소(JIIA)가 선정됐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군사력, 경제력, 지식력의 분포 상황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첫째, 중국의 부상이 무엇보다도 눈에 띄며, 둘째. 미국의 상대적 우위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세에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국 대통령은 2014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이 축사를 했다. “미국은 단연코 세계 최강의 국가입니다.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주장은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당파 정치에 휩쓸린 사람들의 억측일 뿐입니다. 세계 어느 국가도 미국의 국방력을 따라오지 못합니다. 따라서 미국이 외부의 어떤 국가의 위협에 노출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으며, 실제로 우리가 냉전 시기에 겪었던 위험 수준에 미치지도 못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경제는 전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우리의 기업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입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미국의 에너지 자립도 또한 높아지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세계 역사상 어떠한 국가도 필적할 수 없는 초강대국으로서 동맹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바마는 급변하는 세계가 기회일 수 있지만 새로운 위협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미국의 미래 세대가 풀어야 할 질문은 미국이 세계를 주도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어떻게 주도할 것인가에 있으며, 미국은 본국의 평화와 번영을 달성하는 데에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확대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전 국무부장관은 2011년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에 기고한 “미국의 태평양시대”에서 처음으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재균형전략(rebalance strategy)을 소개했다. 재균형전략은 6대 행동 방침으로 양자 안보동맹 강화, 중국 등 신흥세력들과의 관계 강화, 지역 다자기구의 참여, 무역과 투자 확대, 광범위한 해외 주둔군 유지, 민주주의와 인권의 증진을 들었다. 특히 클린턴 장관은 “우리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 서로 두려움과 오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국 일부에서는 중국의 부상을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으며, 중국 일부 역시 미국이 중국의 성장을 막으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번영하는 미국이 중국에 유익이고 번영하는 중국이 미국에 유익하다는 건 기정사실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2008년 개혁개방 선포 30주년 기념식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개혁개방이 신해혁명(1911) 및 사회주의혁명(1949)과 함께 중화민족의 부흥을 이끈 3대 혁명이고,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는 2021년까지 중국은 “높은 수준의 번영을 누리는 사회(高水平的小康社会)”를 건설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100주년을 맞는 2049년까지 “부강하고 민주적이고, 문명과 조화의 사회주의 현대화국가(富强民主文明和谐的社会主义现代化国家)"를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명 중국 2049”의 꿈을 이루려면 중국은 세 가지 딜레마를 극복해야 한다. 첫째, 중국은 지난 30여 년 간의 고도 경제성장에 성공하면서 그 결과 현재 성장과 복지가 충돌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동시에 중국경제가 장기적인 고성장을 달성하려면 공산당 1당 체제를 넘어서서 21세기형 정치체제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중국은 21세기형 선진국이 되려면 기존의 편협한 일국중심의 민족주의 시각을 넘어서서 폭넓은 지구적 민족주의 시각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21세기 중국은 단순한 구미유형의 근대화를 넘어서서 지역화와 지구화를 동시에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 중국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신속하게 세 딜레마를 해결하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시진핑 주석이 제시한 미국과의 ‘신형 대국관계’와 주변국들과의 ‘신형주변외교’를 골자로 하는 ‘신형 국제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중국 외교정책의 첫 번째 원칙으로 천명된 중미 신형대국관계에는 첫째, “분쟁 혹은 전쟁 방지”(不冲突、不对抗), 둘째, “상호존중”(相互尊重), 셋째, “상호 윈-윈을 위한 협력”(合作共赢) 등이 있다. 이는 중국이 적어도 2021년까지는 미국에 대하여 도광양회(韬光养晦) 전략을 유지할 것임을 보여준다. 중국은 21세기 전반기에는 군사적 대결은 회피하고 경쟁과 협력의 경제관계에 주력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지역질서를 구축하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둘 것이다.   중국 외교정책의 두 번째 원칙으로 시진핑 주석은 신형주변국외교를 특별히 강조했다. 주변국 외교는 친(親), 성(誠), 혜(惠), 용(容)의 네 가지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신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의 두 가지 주요 정책을 골자로 하는 개발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장기적인 목표로서 시진핑은 주변국과 ‘아시아 운명공동체’ 건설이라는 용어를 최근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국외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다음의 3대 핵심 이익을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첫째, 중국의 기본 국가체제 및 국가안보를 수호한다(维护基本制度和国家安全). 둘째, 국가주권을 수호하고 영토를 보전한다(国家主权和领土 完整). 셋째, 중국 경제와 사회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추구한다(经济社会 的持续稳定发展).   특히 남중국해의 영토 분쟁, 한반도의 군사적 정치적 문제, 일본과의 영토 분쟁 등의 위험이 존재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은 신형대국관계와 신형주변국외교를 하나로 결합한 신형국제정치 원칙을 추진하려고 한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최근 남중국해의 영토분쟁에서도 영토 주권과 해양에서의 권리와 이익, 국가통합 문제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신복합질서 건축   아시아 태평양에서 미국의 재균형전략과 중국의 신형국제관계론의 만남은 새로운 팍스- 차이메리카 건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은 여전히 근대 민족주의 시대에 편협하게 정의된 국가이익의 이름으로 치열한 세력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팍스-차이메리카는 안보딜레마, 경제위기, 감정적 갈등 및 탈근대적 도전과 같은 위험들을 내재하고 있다. 우선 현재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 형세를 보면, 상호 전략적인 불신으로 미국 주도의 동맹과 중국간에는 안보 딜레마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아시아-태평양 경제에서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 대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 역내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 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Strategic Economic Partnership: TPP)이라는 구도의 비생산적인 경쟁이 벌어질 잠재적인 위험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지역 제국주의와 냉전의 역사적 잔재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 질서는 감정의 국제정치를 쉽사리 벗어나기 어렵다. 동시에 팍스-차이메리카는 환경, 문화, 디지털지식, 지구 거버넌스 등의 분야에서 탈근대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미중 양국이 기성대국과 신흥대국의 깨지기 쉬운 안정성을 성공적으로 유지해 왔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상호 전략적 불신을 감안하면 양국 관계가 전략적으로 악화될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다가오는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신형대국관계’의 신화와 현실에 대해 격론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공화당의 시각에서 볼 때, 중국은 서구문명의 기준을 자발적으로 채택하는 ‘책임있는 이해당사자(responsible stakeholder)’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미국은 21세기 중국 외교정책을 보다 공세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양국의 직접적 군사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전략적 악화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증가하는 안보 딜레마 속에서 중국은 ‘신형 주변국외교’를 추진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국의 핵심 이익을 지키려 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 군사적인 대립의 위험성이 증가할 수 있다.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과 더불어, 미일이 주도해 온 아시아-태평양의 경제질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중국의 성공적인 위기 관리를 보면서, 팍스-차이메리카 경제질서의 가능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이 일본의 GDP를 앞지른 2010년에 이 논의는 본격화됐다. 비록 중국이 ‘신창타이(新常態)’의 경제성장률 목표를 7%로 낮춰 설정하고 미국의 경기가 성공적으로 회복됨에 따라 활발하던 팍스-차이메리카 논의는 한풀 꺾이는 추세이지만 중국이 올해 AIIB를 성공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중국 주도의 새로운 동아시아 경제질서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AIIB가 ADB와 경쟁하고 RCEP은 TPP와 경쟁하면서 지역 경제질서에서 중국의 입지가 확대될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현재 중국 정부가 동아시아의 공동번영을 위해 협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동아시아에서 예상할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복합 네트워크 경제의 새로운 건축일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체성 형성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몇 가지 주요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전통적 세계질서의 영향력이 여전히 중요하다.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호혜공영’으로 이루어진 신형 국제관계는 중국의 풍부한 문화적 전통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둘째, 아시아 국가들의 정체성 형성은 지난 150여 년간 서구 근대 민족주의의 세계적인 팽창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유럽 국가들은 이제 근대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반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아직까지 민족주의적 각축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따라서 19세기와 20세기 초 식민과 전쟁의 경험으로 빚어진 역사적 적대감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동아시아는 여전히 감정의 국제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현재 팍스-차이메리카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한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현재와 미래의 지역질서를 복합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건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첫째, 미중관계는 과거의 냉전적 대결관계를 탈피하여 오늘날 심화되고 있는 미국 주도의 동맹 네트워크와 확장되고 있는 중국 네트워크를 함께 엮어서 새로운 복합관계로 진화해야 한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건축하기 위해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중국과 같은 신흥 강대국과 강력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동아시아 지역기구들에 참여하는 등 과거에 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재균형” 정책은 냉전질서의 봉쇄정책이 아닌 복합질서의 평화정책으로서 틀을 잡아야 한다. 더 나아가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주요 국가들과 함께 복합 네트워크를 설계해야 한다.   동시에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중국의 변화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021년까지 높은 수준의 전면적 소강사회를 건설하고, 2049년까지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의 문명 표준을 제시하려면, 중국은 핵심이익과 함께 동아시아 및 세계의 복합적 이해관계에 맞추어, 발전과 복지의 조화, 정치적 민주화, 그리고 명실상부한 세계화의 3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이 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이러한 노력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다.   중국의 빠른 부상에 직면하여 일본은 미국과 협력하여 19세기의 근대적 세력경쟁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복합시대에 19세기형 근대 모델을 추구함에 따라 일본은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주변국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본도 당면하고 있는 21세기 과제를 21세기적으로 풀려면 동아시아 복합질서 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첫 번째 단계로서, 일본은 독도, 역사 교과서 왜곡, 평화헌법 개정 등의 문제를 비정치화시키기 위해 한국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두 번 째 단계로서 양국은 동시에 환경, 문화, 지식 같은 신흥 무대에서의 협력뿐 아니라 평화와 번영이라는 근대의 무대에서도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 세 번 째 단계로서, 장기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개별 정체성의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동아시아의 지역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현재의 단순한 자립과 협력의 외교 틀을 넘어서서 무대 위 다른 주인공들과의 복합외교를 개발하고 실천에 옮겨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한미일과 중국과의 관계는 냉전질서의 적대관계가 아니라 복합질서의 네트워크 관계로서 엮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심화되는 한미일 네트워크와 확장되는 중국 네트워크를 연결하여 함께 꿰매는 역할을 해야 한다. 더불어 한국은 21세기 복합외교의 일환으로 지역, 지구, 사이버 공간에 보다 촘촘하게 그물망을 넓혀나가야 한다.   북한은 20세기 중반 건국이래 19세기형의 반외세자주를 기반으로 하는 단순한 부강정책을 과도하게 강조해 왔다.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복합화의 21세기를 맞이해서도 김정일의 선군정책에 이어 경제-핵 병진노선을 생존전략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개발과 핵개발의 상호 모순 때문에 병진노선은 불가피하게 핵 없는 경제개발과 핵 있는 경제쇠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유럽과 달리 ‘근대적 사춘기’를 뒤늦게 겪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의 국제관계는 이해와 협력 대신 분쟁의 가능성이 항상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노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국가 안팎의 복합적 주인공들을 엮어 긴밀하고 견고한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국제분쟁의 가능성을 줄이고 협력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둘째,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기존의 부강이라는 단순무대 대신 다보탑과 같은 삼층으로 된 복합무대 건설을 시작하고 있다. 이 복합무대에는 안보, 번영, 환경, 문화와 같은 이슈들이 중심 무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아래층에는 정보•지식의 기반 무대가, 맨 위층에는 정치 무대가 위치하고 있다.   21세기에 군사와 경제의 중심 무대는 국가이익뿐만 아니라 지역으로서의 아시아 태평양과 세계전체의 이해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 더욱이 중심 무대는 국내 시민사회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하는 번영과 안보의 무대로 변화해야 한다. 동시에, 근대 국제관계의 과도한 세력경쟁과 부의 경쟁이 빚어내는 부정적 효과를 완화하기 위해, 문화의 무대를 강화하여 국가정체성 및 지역정체성의 복합성을 양성토록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동아시아 지역이 당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에너지•환경 무대의 중요성 또한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정보기술과 디지털지식의 급속한 발전이 복합 시대를 주도하면서, 지식 무대가 동아시아 ‘3층 복합무대’의 기반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지역 거버넌스를 책임지는 지역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복합 무대들을 성공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역 거버넌스의 무대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셋째, 복합 주인공들은 복합무대에서 복합 연기를 펼쳐야 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여러 주인공들이 공생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무대를 오가며 자조(自助), 협력, 그리고 공진(coevolution, 共進)의 연기를 펼쳐야 한다는 얘기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주인공으로서 펼쳤던 연기를 보면 흡사 자기중심적인 늑대와 대단히 유사했다. 그러나, 세계의 주인공들이 정보혁명으로 인해 급속도로 상호 연결되면서, 주인공들은 보다 깊고 넓은 공간에서 먹이를 성공적으로 잡기 위해 끊임없이 그물을 짜는 거미의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21세기에 성공적 생존을 위해서는 늑대거미의 복합 연기를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아시아-태평양에서 21세기 배우, 무대, 연기가 복합변환에 성공한다면, 아름다운 복합질서가 건축되어 지나치게 편협한 근대 민족주의와 지나치게 광대한 미래 지구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태평양에서 21세기 배우, 무대, 연기가 복합변환에 성공한다면, 아름다운 복합질서가 건축되어 지나치게 편협한 근대 민족주의와 지나치게 광대한 미래 지구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다른 주인공들도 아시아-태평양의 복합질서를 미래 문명의 새로운 표준 모델로 채택하게 될 것이다. ■   ※ 본 칼럼은 저자의 영문 논평인 “The Architecture of the East Asian Order in the Age of Complexity”를 수정 보완하여 국문으로 발간한 글임을 밝힙니다.             [EAI 하영선컬럼]은 국내외 주요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하영선EAI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의 분석과 전망을 통해 적실성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자 기획된 논평시리즈 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하영선 2020-06-05조회 : 8345
논평이슈브리핑
[EAI 일본논평]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과 아태지역 안보질서 전망

저자 박영준_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 일본 도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육사 교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자문위원, 한일 신시대 공동연구위원회 연구위원, 미국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 초빙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일본외교안보정책, 동아시아 국제관계론, 국제안보 등이며, 주요 저작으로는 《제3의 일본》(2008), 《안전보장의 국제정치학》(공저, 2010), 《일본과 동아시아》(공저, 2011), 《21세기 국제안보의 도전과 과제》(공저, 2011), 《해군의 탄생과 근대 일본》(2014) 등이 있다.         지난 4월 27일부터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이 미국을 국빈방문하여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어서 외교 및 방위담당 장관들은 “미일방위협력을 위한 지침”(가이드라인 2015) 등 중요한 문서를 공동 발표하였다. 국내 언론에서는 방미 중 아베 수상의 역사인식 표명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하였으나, 우리로서는 세계 1위와 3위의 경제대국들이 장차 전개될 아시아태평양 질서와 구조 변화를 전망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의 전략방침을 표명한 “가이드라인 2015” 등 양국 합의문서들의 내용을 심층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태지역에 대한 미국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포석은 이미 2010년 전후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양 방면의 안전보장 확보를 자국 외교안보정책의 핵심목표로 간주하였다. 이를 위해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주축이 된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나토)를 결성하였고, 아태지역에서는 한국, 일본, 호주 등과의 양자동맹 체결을 통해 질서안정을 도모하는 전략을 취해 왔다. 역대 미국 정부가 그럼에도 유럽과의 관계를 우선시해 왔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아태지역의 경제적 활력, 특히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전략적 대응의 필요성에서 소위 아태지역에 대한 재균형(rebalancing, 리밸런싱)정책에 중점을 두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의 부상, 그에 따른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로의 진출과 기존 지역질서에 대한 도전, 그에 더해 아프간-이라크 전쟁 종료 이후 지속되고 있는 중동지역에서 ISIS(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와의 분쟁 등은 미국이 우선적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될 도전 요인이었다.   2012년 1월에 발표한 “국방전략지침”, 2014년에 발표한 “4개년 국방검토보고서”, 그리고 2015년 2월에 발표한 “국가안보전략보고서” 등을 통해 미국 정부는 스스로를 아시아태평양 국가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의 중국의 부상과 해공군력 강화,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과 군사적 도발, 그리고 중동지역 정세 불안정 등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본, 한국, 호주 등과의 동맹체제 및 기타 국가들과의 파트너십 강화를 일관되게 표명해 왔다.   이러한 미국의 아태지역 재균형정책에 가장 적극적으로 화답한 국가 중의 하나가 일본 아베 정부였다. 2012년 후반기에 취임한 아베 수상은 한국이나 중국의 입장에서는 역사나 영유권 문제에 관해 말썽만 일으키는 문제아 같은 존재로 비추어졌지만, 아태지역에 대한 인식과 대응정책 측면에서는 미국과 찰떡 같은 보조를 맞추면서 전략과 정책을 추진해 왔다. 2013년 12월에 공표한 일본 “국가안보전략서”와 “방위계획대강”에서 일본도 중국의 해공군력 현대화와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추세를 아태지역에 대한 잠재적 위협요인이라고 규정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통합기동방위력” 개념에 입각한 일본 안보능력의 확충과 미일동맹, 그리고 한국, 호주 등과의 안보협력 확대를 표명하였다. 이 같은 전략에 따라 아베 정부는 그간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설치, 집단적 자위권 용인 결정, 무기수출금지 3원칙의 폐지와 새로운 방위장비이전 3원칙 채택, 우주 및 사이버 공간에서의 안보대응능력 강화 등 전향적인 안보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 같은 정책 패키지들이 한국과 중국에서는 군사대국화의 행보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은 “아미티지-나이 리포트” 등을 통해 이전부터 미국 조야에서 지속적으로 일본에 요구된 정책제안들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상호 조율 속에 미국 정부는 아베 수상에게 국빈급 방문의 기회를 부여하였고, 아베 수상은 하버드대학 및 미국 상하양원 연설, 그리고 외교 및 방위관련 장관들이 서명한 “가이드라인 2015” 공표 등을 통해 일본이야말로 아태지역뿐만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을 도와 국제질서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동맹국가임을 강력하게 역설하였다. 종전에 개정되었던 “가이드라인 1997”과 비교하여 “가이드라인 2015”는 미일동맹의 적용범위와 연합작전태세를 일층 강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가이드라인 1997”에서는 미일동맹 적용범위를 주변사태 및 일본에 대한 직접 공격사태 등으로 상정하였으나, “가이드라인 2015”에서는 이에 더해 일본 이외의 제3국에 대해 무력공격이 가해질 경우, 지역 및 국제안보질서 차원에서의 평화와 안보, 그리고 우주 및 사이버 공간에서의 안보를 위한 협력까지 상호 안보협력의 범위를 확대하기로 하였다. 1997년 가이드라인이 제정되었을 때 당시 일본 정부는 “지구 반대편에서 진행되는 미국의 군사작전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하였지만, 이제는 지구 반대편뿐 아니라 사이버 공간 및 우주 영역에까지 미일 간 안보협력의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또한 “가이드라인 2015”에서 미일 양국은 자위대와 미군 간 작전상의 역할분담을 협의하기 위한 “동맹조정 메커니즘”(Alliance Coordination Mechanism)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한미동맹과 달리 미일동맹은 평시뿐 아니라 전시작전권도 개별 국가가 보유하는 체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연합작전의 효율성에 대한 의문이 종종 제기되어 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본 방위성 내 중앙지휘소에 자위대 및 미군이 공동의 작전협의기구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가이드라인 2015”에는 부상하는 중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 명시적으로 표명되지 않았다. 중국과의 협력관계도 동시에 모색하고 있는 미국의 신중한 대응방침이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가이드라인 2015”와 동시에 발표된 양국 외교 및 국방장관 명의의 “미일안보협의회의 공동성명”에서는 중일 간에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센가쿠제도가 미일안보조약의 적용대상이 된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명시적 대응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일본 측 입장이 가이드라인 본문은 아니지만, 2+2의 공동성명 형태로 표현된 것이어서 양측의 입장이 절묘하게 절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상호 합의를 통해 미국으로서는 평화헌법 하에서 제약되어 왔던 일본의 안보능력 및 역할을 나토동맹 하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이 수행해 온 반열까지 끌어올리게 되었고, 일본으로서는 미일동맹 글로벌화를 통해 앞으로도 평화헌법 개정 등 보통군사국가화를 향한 도정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베 수상의 방미 연설을 통해 역사문제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표현이 얼마나 담길 지가 미국 일각에서나 한국에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 같은 비판적 의견을 의식하여 아베 수상은 상하양원연설이나 하버드대학 질의응답 과정에서 “지난 대전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거나, 역사문제에 대한 이전 수상들의 견해를 계승할 것이라는 점을 표명하였다. 이 같은 설명들이 한국인들의 정서에는 수용되지 못했지만, 미국의 시각에서는 나름의 성의를 다한 것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로서는 아베 수상의 방미와 연설, 그리고 미일동맹 글로벌화에 대해 중국 외교부가 비교적 신중하고 차분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아베 수상은 방미 전인 4월 22일, 반둥회의에 참석하여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간 관계개선 방향에 합의한 바 있다. 시진핑 주석도 지난 3월 28일의 보아오(博鰲)포럼 연설을 통해 2020년까지 한중일 및 아세안 국가를 포함한 경제공동체 건설의 비전을 밝힌 바가 있다. 지난 5월 26일, 중국 국방부가 처음으로 공표한 “군사전략서”(China’s Military Strategy)는 실은 미국이 지난 2월에 발표한 “국가안보전략보고서”와 이번에 미일 양국이 공동발표한 “가이드라인 2015”에 대한 응답을 담고 있는 문서로 볼 수 있다. 이 전략서는 미국이 역내에서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있고, 일본의 안보정책 변화가 지역 내 불안정성을 높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적극방어’(active defense) 개념에 따라 육해공군 및 제2포병의 역할을 확대할 것을 공표하면서도, 미국과는 신형군사관계(new model of military relations)를, 그리고 주변국과는 친성혜용(親誠惠容, friendship, sincerity, reciprocity, inclusiveness)의 정신 하에 군사협력을 추진할 것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전략에 따라 중국은 이미 미중 간에 전략경제대화 및 안보대화 채널을 통해 상호 경쟁 속의 협력을 추진하고 있고, 일본과도 해상안전보장 메커니즘 구축을 위한 국방당국 간 실무대화 등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향후 상당 기간은 미국, 중국, 일본 등 아태지역 주요 국가 간에 상호 결정적인 파국을 방지하면서, 역내에서의 영향력 확보 및 유지를 위한 경쟁과 협력의 게임이 전개될 것으로 보여진다.   역내 주요 국가들 간에 일방적인 대립이나 갈등이 아니라 경쟁과 협력의 공간이 병존하는 것은 한국외교에게 있어 국가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 될 수 있다. 그나마 남겨진 강대국 간 협력의 틈새 속에서 역내 다자간안보협력의 지평을 넓혀가고 북한문제 해결 방향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것이 한국외교가 보다 중점을 두어야 할 중요 과제이다. ■         [EAI 일본논평]은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일본연구센터에 참여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기획하고 발표합니다. 일본에 관한 주요 현안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과 분석을 제공하며, 바람직한 정책 개발을 위한 의견을 개진합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박영준 2020-06-05조회 : 8501
논평이슈브리핑
[EAI 논평 제35호] 아시아 공진질서 건축의 새 장을 열자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현재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을 국빈 방문했다. 이번 방문이 단순히 화려한 잔치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 만남으로 자리매김하려면 한중 양국의 3중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탈냉전적 공진 시각을 통한 새로운 한•미•중 관계 구축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형성된 아시아 냉전질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 소련의 해체와 함께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아시아의 세력판도에서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여전히 수성대국(守城大國)인 미국과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신흥대국(新興大國)인 중국은 과거처럼 갈등과 충돌로 치닫지 않고 신형 대국관계를 건축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정책이 냉전질서의 봉쇄정책과는 전혀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중국은 신형 대국관계론이 국강필패론(國强必覇論: 국력이 강해지면 반드시 패권을 추구한다)과 거리가 멀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은 서로 상대방을 완벽한 친구로서 받아들이는 신뢰를 구축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양 대국은 본격적 신뢰구축의 강화책으로서 한중미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냉전질서에서 한중 관계와 한미관계는 불가피하게 상호 갈등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시아가 냉전질서를 하루 빨리 졸업하고 새로운 공진질서(共進秩序)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이 모두 한중 관계와 한미관계를 이분법적 갈등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 복합관계로 이끌어 가려는 본격적 노력을 해야 한다.   중국은 한중 관계의 강화를 위해서는 동시에 한미관계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탈냉전적 공진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동시에 미국도 새로운 한중 관계의 진화가 전통적 한미관계를 퇴화시킬 것이라는 기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새로운 한미중관계 속에서 한국은 과거의 진부한 “친미론”과 “친중론”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한미일 전통 네트워크의 심화와 한중 신생 네트워크의 확대를 복합적으로 추진하게 될 것이다.   한•중•일 공진질서의 건축: 핵심이익에서 공생이익으로   한중이 함께 노력해야 할 또 다른 과제는 한중일 공진질서의 건축이다. 중일관계의 공진 가능성은 대단히 어둡다. 중국은 친성혜용(親誠惠容: 친하게 지내며 성의를 다하고 베풀고 포용한다)을 기반으로 하는 주변외교를 천명하고 있으나 대일관계에서는 관련 도서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첨예한 핵심이익을 두고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한편 일본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안보전략을 내걸었지만 중국의 부상을 패권대국의 길로 해석하고 19세기 이래의 근대국제정치적 시각에서 대응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시장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한국이 함께 중국의 패권대국 부상을 막아야 다고 주장하고 있고, 중국은 20세기 상반기 일본 제국주의의 아픔을 공유하는 한국이 공동으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야들은 새롭게 진화해야 한다. 19세기 동아시아가 서양의 근대국제질서의 긍정적 경쟁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해서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면 21세기 동아시아가 근대 국제질서의 부정적 갈등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면 또다시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한국과 중국은 미국의 후원 속에 일본을 이끌고 동아시아 3국의 공동비전을 마련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전통적 정치, 경제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호 핵심이익의 갈등을 국내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억제해야 하며, 다음으로 환경, 문화, 지식 같은 신흥무대에서 공생이익을 최대한 키워 나가며, 보다 장기적으로는 3국의 미래를 짊어 질 젊은 세대들이 열린 민족주의의 기반 위에 개별 국가, 아시아, 그리고 지구를 함께 품을 수 있는 복합 아이덴티티를 공유하도록 해야 한다.   한•중 대북공조: 비핵화•평화정착의 공진노력   마지막으로 한국과 중국은 북한이 21세기 아시아 무대에서 당당한 주인공으로서 자신있게 설 수 있도록 공동으로 지원해야 한다. 북한은 신년사에서 핵무기와 경제발전의 “병진로선”에 기반해서 선군정치의 황금기를 맞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핵비확산 체제의 국제정치 현실에서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는 한 21세기 세계경제 무대에 본격적으로 설 수 있는 수준의 경제발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21세기 선진북한의 미래를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관련 당사국들이 함께 노력해서 북한이 핵 없는 안보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하는 “병진로선 2.0”을 새롭게 마련할 수 있도록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구축을 본격화하고 동시에 세계적 규모의 경제 지원체제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 첫 걸음으로 한국과 중국의 정상은 북한, 한반도, 동아시아, 세계 모두에게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북한의 제4차 핵실험을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밝히고, 6자회담을 재개해서 북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진의 노력을 본격화해야 한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아시아가 당면하고 있는 3대 난제를 21세기의 새로운 시각에서 풀어보려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시진핑 주석의 한국 방문은 한반도와 아시아 공진질서 건축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이다. ■         본 논평은 환구시보(環球時報) 7월4일 자에 게재된 필자 시론의 한글 번역본임을 밝힙니다. (출처: http://opinion.huanqiu.com/opinion_world/2014-07/5047260.html)   동아시아연구원(EAI)은 미국 맥아더 재단(The John D. and Catherine T. MacArthur Foundation)으로부터 중견국 외교 연구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EAI 논평]은 국내외 주요 현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해 깊이 있는 분석과 적실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AI 논평]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하영선 2020-06-05조회 : 8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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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논평 제31호]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 나아갈 길 : 해양영토분쟁과 한국의 신뢰외교

이숙종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국정관리대학원 교수 및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으로 재직중이다. 현재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하 동북아구상) 정책을 구체화하기 위해 외교부 내에 연구팀을 발족했다고 한다. 대북정책에서 신뢰를 강조했던 현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한 과제였던 동북아구상에서도 신뢰를 강조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신뢰가 있게 되면 불신으로 인해 과장되기 쉬운 위협인식을 완화하거나, 또는 상대방의 의도를 오판하여 작은 갈등이 큰 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동아시아에서 역내 국가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안보나 역사 문제에 있어 갈등과 분열이 상존하는 상황을 “아시아 패러독스”라고 지칭한 바 있다. 박대통령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고, 이 구상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과제로 자리매김되어 있었다. 정부는 동북아구상의 논리를 다듬는 대로 국내 전문가와 시민사회에서 공감대를 얻고, 내년부터는 주변국에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동의를 이끌어 낼 계획인 모양이다. 일부에서는 현 정부 임기 내에 동북아정상회담 개최 및 동북아평화협력 선언, 사무국 유치 등의 로드맵도 제안하고 있다. 본 구상에 포함되는 국가들은 일단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고를 포함하여 총 6개국(북한 포함시 7개국)이다.   동아시아에서 협력을 제도화하려는 노력이 한동안 계속된 결과 이미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아세안지역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 아세안+3(ASEAN Plus Three: APT),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 등 많은 협력체들이 만들어졌다. 통상분야에서는 양자간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이 거미줄처럼 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 등 보다 큰 지역단위의 다자간 자유무역지대 창설도 활발히 논의 중이다. 이처럼 많은 협력체들이 난무하지만 오늘날 중국과 일본,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 사이의 해양분쟁, 독도문제를 둘러싼 한일간 갈등은 매우 위험스러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과거 식민지 침탈의 역사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일본은 진실규명과 반성 및 배상 문제를 둘러싸고도 주변국과 화해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 못하다. 협력체가 부실하니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안보 ‘아키텍쳐’를 만들자는 논의도 있지만 무엇을 만들자는 논의 자체가 피로감을 불러오면서 제도주의 노력에 힘이 빠진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신뢰라는 담론을 들고나온 것은 참신해 보인다. 그런데 동북아 국제관계의 차가운 현실에 어떻게 신뢰를 구축하겠냐는 방법론에 들어서면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포괄적•우회적 협력보다 영토 및 해양분쟁 의제화를 통한 신뢰구축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제안되겠지만 우선 지양할 일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구상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 2007년 12월 집권한 호주의 케빈 러드(Kevin Rudd) 총리는 2008년 6월에 아시아태평양공동체(Asia-Pacific Community: APC)구상을 제안해서 관심을 끌었으나 2010년 6월 사임까지 이 구상을 별로 진전시키지 못했다.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도 2009년 9월 집권을 전후해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제시했으나 다음해 6월 사임하면서 담론만을 남겼다. 집권 2년 차에 들어서면서 이명박 대통령도 2009년 신아시아구상을 발표했으나 순방외교 수사에 그쳤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보장되어 단명한 내각책임제 총리들보다는 여건이 나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장 내년부터 이 구상이 본격화된다 해도 주어진 시간은 4년에 불과하다. 동북아구상이 앞선 정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포괄적인 협력이나 섣부른 공동체론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가지 핵심적 문제에 초점을 두어 동북아구상을 정책화하라고 주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에 초점을 둘 것인가? 이에 대해 쉽게들 동의하는 생각은 동북아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뚜렷하게 갈리는 전통적인 안보 쟁점에서 협력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환경•자연재해•사이버안보 등 비교적 이해갈등과 불신의 정도가 낮은 문제들에서 협력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여러 분야에서 협력이 습관화되면 언젠가 신뢰도 구축될 것이라는 것인데, 이는 경제적 교류협력으로 상호의존이 심화되면 국가들이 평화를 선호하게 된다는 기능주의적 평화론에 가깝다. 이와 같은 접근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지금까지 동아시아지역 내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심화가 평화를 담보하는 신뢰구축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토나 역사문제에 관한 외교마찰이 경제협력을 지연내지는 무산시키는 경우가 훨씬 많았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997년 시작된 한일자유무역협정 논의는 긴 연구 끝에 정부간 협상단계에 들어갔다가 2003년 독도문제로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중단되었고, 아직도 양국간 협정은 이뤄지고 있지 못하다. 경제에서 안보로의 낙수효과(spill over effect)보다는 안보에서 경제로의 냉각효과가 한일간에 자주 일어났던 셈이다. 오늘날의 중일간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를 둘러싼 첨예한 갈등을 보고 있자면 향후 의미있는 중일간 협력이 가능할지 우려된다. 이렇듯 동북아의 해양영토문제로 불거지고 있는 갈등과 분쟁 가능성은 신뢰구축을 장기적인 시각에서 우회해서 나아가기에는 너무 급박해 보인다. 따라서 동북아구상에서 평화를 담보하기 위한 신뢰구축을 원한다면 마땅히 상호불신과 갈등의 진원지를 겨냥해야 한다.   동북아지역 내 신뢰가 가장 없는 문제에서 신뢰구축을 시작하자면 당연히 해양영토 분쟁과 역사 갈등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역사문제는 과거 제국주의 침략사를 둘러싸고 일본이 한국 및 중국과 화해하는 일이다. 그동안 역사해석의 격차를 줄이고 편향적 역사교육을 지양하기 위해서 한일간 역사공동연구나 교과서 공동집필의 노력이 있어 왔고, 종군위안부와 같은 피해자의 인권문제는 다자적 해결방식 추구로 진화해왔다. 역사문제는 세대가 지나면서 그야말로 ‘장기적’으로, ‘자발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이는 국민 정서 차원에서 상호불신의 뿌리는 되겠지만 국가간 관계를 대결적으로 몰고가 상호 평화를 해치는 수준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해양영토분쟁은 자칫 전쟁국면으로 확산될 수도 있는 화약고와 같아 역내 평화를 해칠 가능성이 있는 가장 중대한 위협이다. 따라서 동북아구상이 평화협력을 위해 몰입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해양영토분쟁이다.   해양영토문제가 동북아,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를 해칠 가능성은 구조적으로 증대할 전망이다. 중국을 보자. 중국이 해양분쟁 문제를 양보하기 어려운 이유는 군사력에서 오는 자신감보다는 국내정치 사정이 더 커 보인다. 경제사회적 격차가 커지면서 실용주의 개혁개방파와 공산주의 이념파 간의 갈등은 증대될 것이고 이념파는 집권 개혁파를 영토문제 유약성으로 공격할 것이다. 이념파의 애국주의 공세가 드세지면 일본의 센카쿠 섬 국유화 이후의 현 상황을 중국이 타개해야 할 정치적 필요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일본을 보자. 센카쿠 열도에 영유권을 실효적으로 갖고 있는 일본은 현재의 법체제로도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지만 내년도에 집단적 자위권을 통과시키면서 중국과 혹여라도 군사적 충돌이 생기면 미국에게 개입할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워싱턴의 지도자들은 센카쿠섬을 둘러싼 중일간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우연히 발생한 사고가 군사적 행동을 추동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상황전개 가능성에 대해 매우 우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독도문제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일본이 국제재판소 제소 공세를 펼치면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고 나아가 특정 우익세력이 돌출적인 물리적 행위를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와 일본의 북방4개섬 반환문제는 지역 해양영토분쟁 가운데 물리적 충돌 가능성이 가장 낮은 조용한 분쟁이지만 양국간 가장 중요한 외교현안의 하나로 존재해 왔다.   영토 해양분쟁에서 신뢰구축을 위한 한국의 이니셔티브   동북아 영토 및 해양분쟁에서 한국이 이니셔티브를 취하기 어렵다는 통상적인 주장에는 두 가지 논거가 있다. 첫째는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강대국이 자국보다 힘이 약한 한국의 리더십을 수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만이 남지나해에서 아세안(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 ASEAN) 국가들과 해양분쟁의 수위를 높여나가지 못하게 중국의 공세를 억제할 수 있고, 일본이 과한 반응을 못하도록 관리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물리적 충돌을 억지하려는 네가티브(negative) 처방이지 신뢰구축을 통해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는 포지티브(positive) 처방이 아니다. 중국은 자국 영토 가까이에서 미국이 이러한 포지티브 역할을 하는 것을 계속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일 중 어느 한 국가가 센카쿠 분쟁에서 더 이상의 충돌을 막고 현상유지를 위한 대타협을 할 수 있을까. 각국의 지도자들이 국내 정치적 비판을 감수하면서 이러한 타협안을 내놓기도 지난해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중일 양국간 분쟁에 한국이 직접 나설 수는 없지만 해양영토문제에 관한 역내 다자간 대화 구축에 나설 수는 있다.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국력이 약해 위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일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호감도보다 각국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호감도가 더 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독도문제나 어업협정, 불법어업 등의 이슈에서 주변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다자대화에 나서야 한다.   한국이 해양영토문제에 있어 이니셔티브를 취하기 어렵다는 두 번째 논거는 이 문제가 전통적인 안보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성격상 한국은 물론 어느 국가도 실질적 협력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양영토문제는 다면적이다. 양보하기 어려운 영유권이나 군사전략과 관련된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업을 비롯한 해양자원의 이용은 배타적 수역과 공동 수역의 문제로 나뉘어지고, 해저자원은 공동개발이 도리어 편익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양 환경보전은 다자간 협력을 절실히 요구한다. 따라서 영유권 갈등의 경우 해결 자체보다는 이것이 군사적 분쟁으로 치닫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다자협력의 주요 목적이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동북아 국가들은 아세안 국가들이 노력해 온 신뢰구축(confidence building) 과정에서 배울 점이 많다. 동남아 국가들의 신뢰구축이 법적•공식적 규칙으로서 구속력이 약하다고 비판받지만 동남아 국가들은 조약이나 다자대화를 통해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규범을 나름대로 구축했다. 해양자원의 이용 문제는 형평성 있는 규칙을 만들어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므로 영유권 갈등보다는 협력이 수월할 것이다. 해저자원의 공동개발이나 환경보전은 아마도 비교적 가장 수월하게 다자간 협력을 실행해 나아갈 수 있는 영역일 것이다. 이렇듯 해양영토문제는 난이도가 다른 의제들을 포함하고 있어 수월한 의제부터 협력을 시작해 신뢰를 쌓아 가면서 어려운 의제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정치 지도자간 신뢰형성을 시작으로 하는 제도화   신뢰연구자들 사이에서 신뢰는 다면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경제적 시각에서는 위험을 축소하려는 전략으로 비용과 편익의 관점에서 신뢰의 결과를 중시하는가 하면, 윤리적 시각에서는 규칙의 구조하에서 사회화를 통해 생기는 정서적인 상태를 중시하였다. 전자의 관점에서 흔히 인용되는 신뢰의 정의로는 러셀 하딩(Russell Hardin) 의 “A trust B to do x”가 있다. 이는 B가 x를 할 것이라는 A의 지식이나 믿음대로 B가 행동하는 것으로, 이렇게 A가 신뢰를 주는 것은 A의 이해(interest)와 일치하도록 B가 행동하는 것이 B의 이해에도 맞다고 A가 전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타인을 다룰 때 신뢰를 주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유를 이러한 이해방정식으로 설명하는 이들은 신뢰가 집합행동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유익함에 주목한다. 기질적이거나 정서적인 신뢰를 중시하는 후자의 시각에서 흔히 인용되는 정의로는 데니스 루소(Denise Rousseau et als.) 등의 정의가 있다. 그들에 의하면 신뢰는 “타인의 의도나 행동에 대한 긍정적 기대에 근거하여 취약성(vulnerability)을 감수하려는 의지의 심리적 상태”이다. 신뢰와 비슷한 개념으로 믿음(confidence)이 있는데 이는 기대한 행동이 실현될 것이라는 예측에 기반하여 대안의 고려없이 기계적으로 상대방의 의견이나 행동에 따라주는 것이다. 반면에 신뢰는 상대방의 동기, 의도, 미래 행동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대안을 고려한 끝에 선택된 믿음이기 때문에 철회가 가능하고 깨질 가능성도 있다. 반복되는 교환의 긍정적 경험과 감시 및 제재를 갖춘 제도는 신뢰의 지속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제도화 이전의 상황에서는 신뢰자(trustor)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신뢰를 주는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국가관계도 결국은 정치 지도자, 곧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따라서 동북아구상을 신뢰외교의 차원에서 성찰하자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먼저 신뢰를 주는 신뢰자의 강한 의지나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갈등을 줄이고 평화를 담보하려는 목적의 신뢰외교는 기능적 협력을 통해 여건이 조성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정치 지도자들이 먼저 상대방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해양영토문제에 있어 양자•삼자•다자간 정상외교가 다층적으로 쌓이고 깊어지면서 신뢰형성이 선행되어야 인식공동체의 조성, 관리기제의 형성, 공통된 규범의 창출 등 일련의 제도화 노력들이 힘을 받을 수 있다.   동북아구상 실행을 위한 박근혜 정부의 자산   지금까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지역정책이 구상되고 추진되었다. 지역의 범위는 물론 지역협력체 내에서 한국의 위치설정도 달랐다. 김대중 정부는 동아시아,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무대에서 각각 한국의 위치를 협력 촉진자로, 핵심 이해당사국간의 균형자로, 입장이 다른 국가군 사이를 잇는 가교자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 박근혜 정부는 최근 다자무대에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물려받았다. 박대통령이 집권 첫 해 상반기 동안 미국,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 거둔 성과도 괄목할만하다. 특히 현재 중국이 가지고 있는 박대통령 개인에 대한 존중과 호의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해양영토문제 관련 동북아 다자대화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중국을 참여시키는 데 유익할 것으로 여겨진다. 작년부터 최악으로 치달았던 일본과의 외교도 정상화시켜 역내 다자대화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박대통령의 국내외적 이미지는 원칙, 청렴, 호의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요인을 잘 갖추고 있어, 동북아 역내 다자대화에 나서기 좋은 자산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신뢰성’(trustworthiness) 자산은 박대통령이 다자대화에 나서면서 먼저 주변국 지도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리더십에 사용될 수 있다. 첫 신뢰자가 되는 길은 두 가지 위험부담을 수반한다. 첫째는 신뢰를 담은 동북아구상 제안에 대해 주변국 지도자들이 호응하지 않거나 나아가 더 불신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박대통령이 잃을 것은 없는 결과이다. 둘째는 해양영토문제의 관리를 위해 다자대화에 나서는 행보가 국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일이다. 최근 안정적으로 높아진 박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을 고려할 때 이는 가능성이 낮은 전망이다. 오히려 지지율 상승이 박근혜 정부 등장 이후 그간 보여준 외교안보분야의 리더십 때문이었기에, 의미있는 동북아구상 제안 역시 국내에서 크게 환영받을 공산이 크다.   이러한 위험에 대한 계산을 넘어서 신뢰외교의 징표로서 동북아구상을 제안하는 것은 시민교육에 유익한 효과가 있다. 공감(empathy)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현상을 보는 역지사지의 태도를 일컫는 말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다. 공감이 상대방의 입장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동감’(sympathy)을 반드시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와 다르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이해하여 대화를 계속하면서 신뢰를 쌓아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박대통령이 솔선수범해서 보여주는 공감의 실천은 한국민은 물론 주변국의 시민들에게도 감동과 협력의지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동북아구상이 신뢰외교로서 이전의 지역평화정책과 구별되려면 제도보다는 지도자의 신뢰 리더십이 핵심이다. ■         동아시아연구원(EAI)은 미국 맥아더 재단(The John D. and Catherine T. MacArthur Foundation)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EAI 논평]은 국내외 주요 현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해 깊이 있는 분석과 적실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AI 논평]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숙종 2020-06-05조회 : 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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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특별논평 시리즈 - 코로나19 쇼크와 중국] ④ 코로나19로 변화하는 당국가체제의 양면성

.a_wrap {font-size:16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6px;} [편집자주] EAI는 코로나19 사태로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 선 중국에 대한 전문가의 분석과 전망을 담은 “코로나19 쇼크와 중국” 특별논평 시리즈 총 4편을 아래와 같이 게재합니다.   1. 이동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중국 대외관계와 한중관계 [보고서 읽기] 2. 최필수: 코로나19 사태로 중국 경제의 위상은 강화될 것인가? [보고서 읽기] 3. 하남석: 코로나19와 중국 사회의 반응 [보고서 읽기] 4. 양갑용: 코로나19로 변화하는 당국가체제의 양면성   EAI 특별논평 시리즈 “코로나19 쇼크와 중국”의 네 번째 보고서로, 코로나19 이후 변화하는 중국의 중앙·지방관계를 분석한 양갑용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의 특집 논평이 발간되었습니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선포 이후 미국과 유럽이 ‘사회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과는 달리 비민주적 통제로 문제를 키웠던 중국은 당국가체제의 강력한 통제로 안정된 국면을 조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국가체제의 경직성과 권위성이 전염병 확산의 위기와 통제의 효율성을 동시에 드러낸 가운데, 초유의 재난으로 당국가체제에 대한 신뢰에 일정한 금이 발생한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중국의 당국가체제가 세대교체를 통해 기존의 지위를 강화하는 한편,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제고하여 변화하는 민심의 체제 적응력을 높일 것으로 전망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새로운 중앙·지방관계가 당국 입장에서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중앙의 권한이 강해야만 한다는 신화적 믿음을 가지는 중국에서 지방의 자율성이 지나치게 강화된다면 사회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최적의 중앙·지방관계를 모색 중인 중국이 어떠한 행보를 보일지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I. 코로나19와 중국 정치 영향 전염병과 당국가체제의 양면성 코로나 발생 초기 중국의 대응은 정교하지 못했다. 전염병 발발 가능성에 주목하기보다는 관련 소식의 확산을 막고 내부 제보자 색출에 더 관심을 보였다. 전염병 관련 정보의 공개를 통한 사회적 예방과 통제의 합의 거버넌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염병 관련 정보의 공개를 차단하고 통제했다. 당국가체제의 권위주의적 접근이 오히려 화를 키웠다. 중국의 이러한 초기 대응은 전염병 확산의 빌미를 제공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팬데믹을 선언하고 코로나19가 일부 국가의 문제가 아닌 전 인류의 문제라고 공식화할 때는 이미 전염병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다음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초기 대응과 달리 중후반기로 넘어가면서 강력한 봉쇄를 앞세운 당국가체제의 권위적인 통제 방식으로 전염병을 일국 단위에서 차단하기 시작했다. 유럽이나 미국 등이 전염병으로 ‘사회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과 달리 중국은 빠르게 전염병을 차단하고 안정된 국면을 조성해나갔다. 비민주적 통제로 초기에 문제를 키웠던 중국의 당국가체제가 강력한 통제와 효율적 동원으로 전염병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당국가체제의 이러한 양면성은 오히려 전염병 등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강력한 효율적 통제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중국에서는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당국가체제가 갖는 특유의 동원형 시스템은 이동과 차단 및 봉쇄에서 강력한 효율성을 보였다. 중국의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비민주적 통제와 효율적 동원이 공존하는 당국가체제의 양면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권위적인 당국가체제는 초기 대응에 실패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오히려 강력한 통제가 효율적이었다는 논리가 확산되었다. 중국의 당국가체제의 효율성이 높게 평가받고 중국 당국은 이를 선전하고 있다. 이는 코로나19가 중국 당국에 당국가체제의 양면성을 통치 과정에서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체제와 지도자에 대한 ‘결집 효과(rally effect)’ 코로나19는 외부 시각과 달리 중국 내에서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았다. 체제의 혼란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지도력의 훼손도 눈에 띄지 않는다. 당국가체제는 잘 작동하고 있으며 시진핑 주석의 지도력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즉 체제 불안이나 유동성은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체제 적응력 제고 기회로 활용되고 있다. 외부의 비판과 달리 코로나19는 오히려 중국의 체제와 지도부를 중심으로 모이는 이른바 ‘결집 효과(rally effect)’가 나타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지도력을 높이는 효과를 보고 있고 당조직과 당원을 동원하여 사회를 관리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국가체제에 대한 신뢰에 일정한 금이 발생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003년 사스와 달리 이번에는 개인 기반 SNS가 활발히 움직였다. 리원량(李文亮) 의사의 죽음에 관련된 소식이 SNS를 달궜으며 심지어 인터넷 분향소까지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국은 이들을 탄압하기보다는 매우 유연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일종의 ‘민심의 이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여 민심의 움직임이 체제와 지도력 훼손으로 직접 연결되지 못하게 관리했다. 우한시 정부가 리원량 의사를 포함하여 14명을 ‘열사’로 추대한 것도 민심 이반을 체제 내로 포섭하여 관리하기 위한 능동적 대응의 결과이다. 그동안 중국은 사회 불안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 체제 효율성에 천착한 권위적인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전염병과 같은 원인불명의 사회 불안이 증대할수록 관련 정보를 숨김없이 공개하는 투명성에 기초한 사회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듯 중국에서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권위적 대응과 함께 민심에 귀를 기울이는 새로운 사회거번넌스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코로나19 방역 기간 중국은 민심의 변화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당국가체제의 경직성을 이완시키는 방향으로 사회 거버넌스체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9기 4중전회에서 제시된 이른바 거버넌스 문제를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해 보는 첫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민심에 기초한 사회거버넌스의 새로운 실험이 코로나19로 현실화하고 있다.   ‘조괴관계(條塊關系)'의 변화 코로나19의 발생은 우한(武漢)에서 시작되었다. 우한에서 중국 전역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한시 당국이 비판의 중심에 등장하고 후베이성(湖北省) 그리고 중국이 등장하였다.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중앙·지방관계를 규정하는 조괴관계(條塊關係)에 입각한 접근의 결과이다. 그러나 코로나19 기간 우한시 당국은 자발적인 판단과 대응을 주동적으로 할 수 없었다. 상부에 보고하여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책임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당국가체제에서 책임 소재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조괴관계는 조(條)의 관계를 중시할수록 수직적 통제에 익숙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하급 기관은 상급 기관의 처분 결과를 받아 집행할 뿐 자율적으로 일을 도모하지는 않는다. 책임질 일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이 보고되고 사회적인 유동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중국 당국은 1월 23일 우한시를 봉쇄하고 바이러스 차단에 나섰다. 그리고 이를 지휘할 중앙 기관으로 1월 25일 당중앙 코로나 대응 영도소조를 구성했다. 바이러스 대응을 위한 중앙 차원의 수직적 위계체제를 강화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비상시국이라 하더라도 쉽게 조직적 통제에 익숙한 체제로 돌아가게 하면서 수평적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덜 중시하게 했다. 초기 바이러스 발생 당시 주변 지역이나 지방과의 협력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상호통제와 상호협력이 덜 중시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대신에 전통적으로 익숙한 조(條)의 관계 지향성은 수평적 협력의 자율적 기제보다는 수직적 통제에 입각한 중앙이나 상부의 명령에 기대는 거버넌스를 반복했다. 물론 수직적 명령 체계에 기초한 일사불란한 봉쇄한 통제의 메커니즘이 방역 효율성에는 매우 매력적이다. 그러나 지방의 문제는 지방이 가장 잘 안다는 점에서 효율적인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지방정부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지휘체계와 협력체계를 개선해나가야 한다. 수직적 통제가 효율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비상시국에만 제한적으로 작동하게 하고 수평적 협력체계의 ‘괴(塊)’의 관계가 활성화되도록 중앙과 지방관계 거버넌스를 개선해나가야 한다. 이번 코로나19는 우한시의 관련 정보의 왜곡이나 숨김 현상이 수직적 통제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우한시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코로나19는 자율적인 판단이 가능한 수평적 협력관계, 즉 ‘괴’의 관계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새로운 ‘조괴관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즉, 전통적인 ‘조괴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높이는 새로운 거버넌스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II. 코로나19와 중국 정치 전망 당국가체제의 적응력 제고 코로나19는 앞서 살펴본 대로 중국 당국가체제가 가진 양면성을 충분히 드러냈다. 체제 경직성과 권위성은 전염병 확산이라는 위기 상황을 초래했고, 그 권위성으로 인해서 위기를 발 빠르게 통제하고 관리했다. 유럽과 미국의 전염병 확산과 달리 현재 시점에서 보면 중국은 오히려 당국가체제의 권위성이 방역에서 강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변화하는 민심은 중국 당국이 기존 체제로 사회 불안정 요인에 접근하는 데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다. 일각의 의심대로 중국의 당국가체제가 부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도 없지 않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매우 높은 수준의 적응력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중국 당국가체제의 적응 사례는 이미 적지 않게 중국 역사에 드러나 있다. 봉건왕조를 대체할 공화정을 희구하거나, 사회주의가 어려운 경우 과감하게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하거나, 필요할 경우 자본가도 공산당원으로 수용한 사례가 있다. 따라서 코로나19로 민심이 이반하고 당국가체제가 부식한다면 매우 과감한 방식으로 폭넓게 변화하는 민심을 체제 내로 끌어들여서 체제의 적응력을 높일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새로운 관리 모형으로 제시된 거버넌스 문제를 구체적인 문제와 결합해 새로운 거버넌스 실험으로 현재의 위험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당국가체제의 거버넌스 혁신을 통한 적응력 제고에도 불구하고 체제 자체에 대한 불신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특히 정부가 통제하던 인터넷에서 개인이 자율적으로 접근하는 SNS의 발달은 기존 방식에 입각한 체제 적응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즉 일방적인 선전 방식으로 여론을 선점해 나가는 거버넌스 방식은 변화하는 개인 사회관계망 시기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따라서 체제의 적응력 제고는 반드시 자율적 공간의 확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비판적인 개인 언론의 문제를 어떻게 체제 내화(內化)할 것인지가 당국의 과제로 남을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지도력 강화 코로나19 과정에서 시진핑 주석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여러 번 정치국 회의와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관련 지침을 하달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을 뿐 직접 현장에 나간 것은 2월 10일 베이징 현지 시찰, 3월 10일 우한 현지 방문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진핑 주석의 지도력이 유지되는 것은 중국 특유의 중앙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라는 일종의 중앙 권력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기간 후베이성이나 우한시 관계자가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부가 건재한 것은 중앙이 갖는 신비로운 ‘신앙’적 믿음에 기반한다. 대신에 문제의 책임 소재는 지방에 집중되고 지방 지도자가 교체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한다. 최고 지도자로서 시진핑 주석은 2020년 코로나19 대응과 함께 경제사회발전을 본 궤도에 올려 ‘결정적 성과’를 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전염병을 통해서 3,000여 명이 넘는 ‘인민’이 목숨을 잃은 것은 정치적 책임이며 인도적 책임이다. 이는 비록 어쩔 수 없는 재난이라고 치부하더라도 ‘인민’의 안녕을 책임져야 하는 최고 지도자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이다. 당국가체제를 통해서 당조직과 당원을 동원하여 위기 대처에는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할지라도 ‘민심의 이반’은 지도력 유지에 부정적인 요인이다. 특히 최고 지도자의 지도력에 일정한 의구심의 발현은 당국가체제 통치 정당성을 부식하기 때문이다. 중앙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믿음과 달리 각급 간부들에게 대한 신뢰는 매우 취약하다. 특히 분노가 이들을 향할 때 중앙은 대부분 인물 교체를 통해서 그 충격을 완화해왔다. 시진핑 주석의 입장에서 코로나19로 야기된 분위기를 혁신하고 새로운 발전 동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세대교체를 통한 간부군(幹部群)의 안배가 필요하다. 특히 각급 지방정부 관원들을 대상으로 코로나19 극복 과정의 공과 사를 분명히 하여 혁신하는 것으로 ‘충원’ 카드를 쓸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세대교체와 혁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과감한 젊은 간부, 특히 ‘70후’들의 중용이 예상된다. 이들은 시진핑 주석의 집권 연장 가능성과 맞물려 매우 중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당의 역할을 강화하고 ‘핵심’ 지위를 굳건히 하는 사상과 이데올로기, 선전이 강화될 것이다.   지방정부의 적극성 제고 2018년 3월 제13기 전국인대 제1차 전체회의에서는 지급시 정부에게도 법률 제정권을 부여하는 조치가 통과되었다. 외자도입이나 특구 건설 등 지방정부가 필요한 경우 법률 제정을 통해서 지방정부 사무를 자율적으로 결정, 추진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코로나19를 통해서 비단 외자나 특구뿐만 아니라 사회 여러 문제에 대한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높이는 요구가 높아졌다. 당국은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지방정부의 자율성의 범위를 과감하게 확대할 가능성이 커졌다. 우한시의 바이러스 대응 조치가 미흡했다고 판단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중앙의 부담을 덜거나 중앙으로 향하는 비난을 지방 차원에서 묶어두기 위해서도 지방정부의 자율적 판단 범위를 좀 더 폭넓게 허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는 기존 ‘조괴관계’로 대표되는 중앙과 지방관계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조괴관계’ 변화를 통한 새로운 중앙·지방관계 거버넌스는 지방정부 자율성의 제고로 현실화하는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법적, 제도적 완비 작업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앙의 부담을 더는 동시에 지방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높이는 조치로 나타날 것이다. 이미 지방정부 차원에서 지방채를 발행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지나치게 중앙의 조치만 바라보는 지방의 자율성을 적극적으로 높여 중앙 권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전국인대 전체회의에서 입법을 통해서 제도화 단계를 밟아갈 것으로 보인다. 지방정부 자율성 증대는 중앙과의 수직적 통제 관계(條)를 점차 줄여나가고 지방 간 수평적 협력관계(塊)에 기초한 자율적 통제 기제 구축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정부의 적극성 혹은 자율성 제고는 당국의 입장에서는 양날의 칼과 같다. 중국은 중앙의 권한이 강해야 한다는 일종의 신화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방의 지나친 자율성 강화는 오히려 사회 혼란을 부추긴다는 우려의 시각도 존재한다. 따라서 코로나19로 두드러지게 나타난 수직적 통제 중심의 중앙·지방관계의 약점을 지방정부의 자율성 증대로 조정해 나가는 데는 일정한 위험성이 있다. 그런데도 ‘조괴관계’에서 지나친 ‘조’의 편중이 ‘괴’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광범위하게 확산하는 상황에서 중앙과 지방관계 최적의 대안을 만드는 게 중국 당국의 작금의 문제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대안이 지방정부의 자율성 증대로 나타날지 관찰이 필요하다. ■   ■ 저자: 양갑용_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중국 푸단대학에서 중국정부와 정치 전공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 연구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최근 역서로는 <현대중국정치>(공역), 저서로는 <중국의 통치 정당성과 엘리트 정치>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준일 EAI 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3) junilyoon@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양갑용 2020-06-05조회 : 8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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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특별논평 시리즈 - 코로나19 쇼크와 중국] ② 코로나19 사태로 중국 경제의 위상은 강화될 것인가?

.a_wrap {font-size:16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6px;} [편집자주] EAI는 코로나19 사태로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 선 중국에 대한 전문가의 분석과 전망을 담은 “코로나19 쇼크와 중국” 특별논평 시리즈 총 4편을 아래와 같이 게재합니다.   1. 이동률: 코로나19의 중국의 대외관계 및 한중관계 영향과 전망 [보고서 읽기] 2. 최필수: 코로나19 사태로 중국 경제의 위상은 강화될 것인가? 3. 하남석: 코로나19와 중국 사회의 반응 [보고서 읽기] 4. 양갑용: 코로나19로 변화하는 당국가체제의 양면성 [보고서 읽기]   EAI 특별논평 시리즈 “코로나19 쇼크와 중국”의 두 번째 보고서로, 코로나19 사태와 중국의 위상 확대에 대한 대응과 전망을 분석한 최필수 세종대학교 교수의 특집 논평이 발간되었습니다. 코로나19 발생 초기에만 해도 세간의 관심은 중국의 위기에 있었지만,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된 이후 미국과 유럽은 방역에 실패한 반면 중국은 바이러스 확산을 성공적으로 통제하고 경제 문제로의 확산 마저 최소화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은 과거에도 글로벌 위기를 발판 삼아 상대적 부상을 이룬 경험이 있지만, 중국이 코로나 사태와 같은 초유의 재난 또한 위상 증진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본 논평에서 코로나 사태로 중국이 받은 경제적 충격과 중국의 경제 체질을 분석한 저자는 중국이 전염병의 대유행 속에서도 정책 대응 능력이 있다고 분석하며, 향후 중국 경제의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합니다. 또, 논평에서 저자는 앞으로의 한중관계에 대해, 향후 한국이 중국의 일대일로와 서방이 추진하는 WTO 개혁을 두고 어느 정도 참여할 것인지는 불투명하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균형 잡힌 시각과 접근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I. 서론: 2009년에 벌어졌던 중국의 부상 2020년 3월까지만 해도 코로나 사태로 인한 중국의 위기에 관심이 집중됐다. 그러나 감염이 전 세계로 확산된 4월 중순 현재, 중국 경제가 상대적으로 양호해 보이기 시작했다. 만약 현재와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다. 우리는 2009년 무렵에 이와 같은 경험을 한 바 있다. 미국이 서브 프라임 위기로, 이후 유로존이 재정위기로 휘청거리자 중국은 세계 경제의 유일한 성장엔진으로 활약했다. 위안화는 가치가 올라가고 지역 결제통화로 등극했다. 중국의 자본이 세계 인수합병 시장에서 수많은 기업을 쓸어 담았다. 중국은 달러를 대신하여 IMF의 특별인출권(SDR)을 기축통화로 만들자고 주장하기도 하고, 과소평가 돼 있던 국제기구에서의 지분 재조정을 이뤄냈다. 2012년 이런 분위기에서 출범한 시진핑 지도부는 일대일로(一帶一路)와 같은 그랜드 플랜을 선포했다. 과연 2020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를 판단하기 위해 코로나 사태로 중국이 받은 경제적 충격을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고, 중국의 경제적 체질을 분석한 후 중국의 정책 대응 능력을 판단할 것이다.   II. 코로나 사태의 충격 비교 중국의 경제봉쇄 기간은 약 3개월이었다. 1월 20일에 시진핑이 총력전을 선언하고 1월 23일에 우한을 전면 봉쇄했다. 통제의 강도는 매우 높았다. 아파트 단지는 동별로 출입자를 체크했고 도시 간 이동은 거의 전면 금지였다. 4명이 모여 앉아야 하는 마작도 금지했다. 이렇게 강력한 통제 덕분에 3월 10일 무렵 조업 재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4월 8일 우한 봉쇄 해제는 코로나 사태의 종식을 선포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한편 이제 봉쇄를 시작한 미국이나 EU의 상황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뉴욕이 재택근무를 선포한 것이 3월 20일이었는데 4월 중순 현재 과연 사태가 정점을 찍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또한 봉쇄 기간을 단순히 비교하기에는 여러 여건이 다르다. 우한 봉쇄 당시 중국의 감염자는 확진자 598명에 의심 환자 393명으로 1천명 미만이었다. 반면 뉴욕의 재택근무 선포 당시 미국의 확진자는 이미 2만6900명이었다. 현재 뉴욕시 하나의 사망자 수가 중국의 총 사망자 수보다 많다. 미국은 대응도 늦었고 피해도 더 커 보인다. 4월 14일 발표된 IMF의 세계 경제 전망에도 이러한 관점이 반영돼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인도와 함께 세계 주요국 중 올해 마이너스 성장을 모면할 것으로 보이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코로나 피해의 상대적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2019년 대비 2020년 성장률 차이에서도 중국(-4.9%p)은 인도(-2.4%p)와 한국(-3.2%p)에 이어 상당히 양호한 수준이다. 반면 미국과 독일 등은 7~8%p 이상의 성장률 낙폭이 전망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그 폭이 9~10%p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III. 중국 경제 체질의 특징과 변화 1. 고용구조 - 돌아오지 않은 농민공 이렇게 중국의 경제 전망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이유를 알아보자. 먼저 농민공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고용구조가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농촌호적 보유자를 지칭하는 농민공은 총 2억9천만명이다. 그런데 이들 중 1억3천만명이 2020년 춘절에 고향에 돌아갔고, 이 중 40%인 5200만명이 3월 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1] 도시의 실직자와 달리 고향에 내려가 있는 농민공들의 처지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며, 정부는 이들을 위해 재정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 중국의 2월 조사 실업률은 6.2%로 전월대비 0.9%나 증가했지만[2] 15%(Oxford Economics) ~ 30%(세인트루이스 연방은행장)에 달할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실업률보다는 월등히 양호하다. 단, 이는 취업 상황이 양호한 것이 아니라 통계수치 속에 숨어 있는 농민공 실업자의 사회안전망(즉 고향)이 양호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2. 산업구조 - 서비스업 비중은 낮고 유망 산업에 강점 중국은 코로나 충격에 취약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주요 선진국들에 비해 낮다. 중국의 서비스업은 정부의 육성 방침에 따라 과거에 비해 많이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54%로 미국(80%)이나 유럽(71%)에 비하면 크게 낮다. 중국이 보유한 제조업 중 일용잡화류는 경기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다. 세면도구ㆍ문구류ㆍ화장품ㆍ기초의류 등이 그렇다. 내구소비재는 경기회복과 함께 미뤄둔 소비가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가전과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중화학공업도 느리긴 하지만 경기와 함께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 철강과 석유화학, 건축자재 등이 그렇다. 그러나 항공ㆍ여행ㆍ숙박ㆍ요식 등 서비스업은 코로나의 영향이 더 크고 길며, 경기가 돌아오면 소비가 회복되긴 하겠지만 과거보다 더 많이 소비될지는 미지수다. 장차 비대면 경제(Untact Economy)의 확산이 가져올 성장 유망 산업이 모두 중국이 강세를 보이는 분야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로봇, 5G, 인공지능 등이 그렇다. 중국은 이들을 “新인프라(新型基础设施)”로 규정하고 투자를 크게 확대할 예정인데, 이는 전 세계의 트렌드를 이끌 적절한 투자이며, 향후 시스템 수출과 해외수주의 가능성이 크다. 한편 우리나라도 이러한 분야에 강점이 있고 중국과 밸류체인이 엮여 있으므로 향후 경제 회복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3. 재정여건과 부채구조 개혁 코로나 사태로 각국은 모두 대규모 재정 투입을 계획하고 있다. 2020년의 재정적자가 2019년보다 얼마나 느는지를 살펴보면 나라별 재정 투입의 상대적 규모를 비교할 수 있다. IMF의 추산을 바탕으로 계산한 아래 [표]에 따르면 중국은 2019년 대비 4.9%p 증가한 재정적자가 예상되고 미국은 9.7%p 증가가 예상된다. 중국의 재정 확장 폭은 여타 선진국들에 비해 적은 편이다. 참고로 한국 역시 2.7%p로 매우 소극적인 재정 운영이 계획되어 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중국의 재정 운용은 중국의 정부부채 총량이 원래 적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깊다. 누적 정부부채 대비 GDP 비중이 일본은 238%, 미국은 107%인 반면 중국은 50.5%이다. 즉 코로나 사태로 중국의 상대적 재정 건전성은 더 좋아질 것이다. 2015년부터 이뤄진 지방채권 발행 허용으로 불투명하던 부채 위기 요인이 사라진 것도 중국의 경제 체질이 강화된 요인 중 하나이다. 과거 중국은 공공투자의 80%가 지방정부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이들에게 채권발행 기능이 없어서 불투명한 각종 융자 플랫폼(이른바 LGFV, Local Government Financial Vehicle)이 횡행했다. 이것이 가진 리스크가 불거지자 중국 정부는 지방정부들이 채권을 발행하여 투자재원을 조달할 수 있도록 개혁에 착수했다. 이 개혁은 수년간의 준비를 거쳐 2015년에 결실을 맺었는데 이때부터 지방채 발행액이 국채 발행액을 넘어섰다. 이는 과거 지방채권 발행이 금지됐던 시절의 불투명하던 부채 위기 요인을 없앤 획기적인 변화이다. 즉 과거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재정을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 통화정책 여건 각국이 모두 금리인하와 양적완화에 나서는 중인데 금리 수준이 높을수록 이러한 통화정책의 효과가 더 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유럽과 일본의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상태로 이른바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있다. 금리를 더 낮추기도 어렵고 더 낮춰도 경기확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국의 금리는 주요국들에 비해 높은 수준이므로 금리인하의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5. 정치적 여건와 경기회복 중국은 선거 등의 이유로 당장 급하게 경기를 부양해야 할 정치적 이유가 없다. 코로나로 인한 경기침체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기보다 오히려 정부의 분투를 홍보하는 기회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022년 말에 시진핑이 두 번째 임기를 마무리하는 20차 당대회가 열리는데 아직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다. 또한 중국의 경기는 이미 반등하고 있으며 업종별로 60~70%의 조업 재개율을 보이고 있다 (단, 코로나 이전부터 ‘가동률’은 낮은 편이었다). 베이징 등 주요 도시들의 외출 수준도 모두 증가하고 있으며 휴교령도 곧 해제될 것이다. 즉 중국의 코로나 사태는 먼저 시작해서 먼저 끝났고 그만큼 불확실성도 해소됐다. 6. 리스크 요인 – 민영기업의 부채 그러나 민영기업의 부채 문제가 악화될 경우 중국 경제에 심각한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 서비스업과 (민영)중소기업들이 국유기업에 비해 더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에 대한 대출이 많은 지방은행들이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전반적인 중국 은행들의 건전성(BIS 부채비율)은 국제수준에 비추어 매우 양호하다. 그러나 소규모 지방은행은 그렇지 않다. 이미 국지적으로 뱅크런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다행히 아직 그 규모는 전체 은행자산 규모에 비해 미미하다.   IV. 향후 전망 1. 세계화의 퇴조와 WTO 개혁 코로나 위기가 끝난 후 더욱 가속화될 세계화 퇴조 현상은 중국에게 있어 코로나 사태보다 더 큰 시험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2011년 이후 세계 교역 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하회하고 있다. 즉 세계화의 퇴조 현상이 10년가량 진행되어 온 것이다. 중국도 수출 비중을 줄이고 내수를 확대하는 정책을 같은 기간 동안 추진해 왔지만, 글로벌 밸류체인의 최대 수혜국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중국으로서는 현 상태의 WTO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세계화를 확대하는 것이 좋다. 코로나 사태는 글로벌 밸류체인의 형성에 기여했던 국제교류 자체에 치명타를 가했다. 바이어 미팅, 업종별 전시회(EXPO), 여행 촉발 소비 등이 모두 위축될 것이다. 세계 최대 전시회로 불리는 광동페어(Canton Fair)나 세계 최대 일용잡화 컴플렉스인 절강성 이우(義烏) 시장이 앞으로 어떻게 운영될지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얼굴을 마주 보고 직접 물건을 만져보며 이뤄지는 국제무역이 위축될 것이다. 또한 많은 나라가 마스크나 의약 등 보건용품과 식량까지 수출 규제에 나섬으로써 자유무역 체제의 기반인 신뢰와 믿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최근에는 反세계화 세력이 정치적으로 집결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이 미중 경제분쟁의 핵심 배경이다. 이러한 정치세력의 지원을 받는 리쇼어링 현상도 증가할 것이다. 이는 곧 외국인투자(FDI)의 감소를 의미한다. 특히 코로나 진원지로서 중국의 평판이 큰 상처를 입었고 이로 인한 외국인 투자의 감소는 불가피하다. 단, 리쇼어링 현상의 본질은 모국으로의 복귀(“back to the mother country”)가 아니라 시장으로의 복귀(“back to the market”)이므로 세계 최대의 시장으로서 중국의 매력이 코로나로 인한 부정적 평판을 일부 상쇄할 것이다. 현재 중국이 처한 최대의 리스크는 WTO 개혁이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들이 힘을 합쳐 현재 WTO 체제와 조항들을 개혁하려 하고 있고 중국은 이에 저항하고 있다. 개도국 지위를 박탈하고, 보조금 등에 대한 통지 의무를 강화하는 개혁은 중국의 경제체제를 정면으로 겨냥한 칼날이다. 미국과 관세 부과를 둘러싼 일대일 싸움이 코로나로 인해 소강상태에 빠질 수 있지만 타임 테이블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진행될 WTO 개혁 시도는 중국이 유야무야시킬 수 없다. 2. 중국의 상대적 위상 강화 이상을 통해 보면 일단 중국 경제의 상대적 위상은 강화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중국이 “세계 경제총량의 1/6이자 세계 경제성장의 1/3”을 차지한다는 리커창 총리의 자랑을 당분간 더 들어야 할 것 같다. 중국의 양적완화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으므로 위안화의 상대적 가치는 높아진다. 중국은 절상된 통화가치를 무기로 해외 자산을 인수하려 할 것인데 이에 저항하는 각국의 움직임도 있을 것이다. 중국이 힘써 추진하는 일대일로는 확장 요인과 축소 요인이 모두 있다. 일대일로의 본질은 개도국의 인프라 건설 수요와 중국의 자금 공급이다. 이 중 수요 요인은 감소할 것이다. 경기가 위축된 가운데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추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경기를 호전시키고자 역으로 인프라 투자를 시도할 수도 있다. 그랬을 때 중국의 자금이라는 공급 요인은 상대적으로 더 강해질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일대일로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하는 “인태전략”이나 “아시아ㆍ아프리카경제회랑”이 제대로 추진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개도국이 중국의 의료지원을 받고 있는데 이것이 인프라 투자 지원으로 이어지면 그것이 곧 일대일로이다.   V. 한중관계 제언 한국과 중국은 이번 코로나 사태를 조기에 종식시켰고 재정 여건이나 산업구조에서 모두 상대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다. 당분간 비대면 경제의 활성화로 인한 정보통신 제품의 수요 증가로 두 나라 모두 혜택을 입을 것이다. 이런 분야에서 두 나라의 협업 관계는 서로에게 유익하다. 단 화웨이 등에 대한 미국의 제재가 외통수로 작용하지 않도록 非배제ㆍ非의존 전략을 써야 할 것이다. 코로나 이후 중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의 입장 선택은 WTO 개혁과 일대일로에서 있을 것이다. 과연 서방이 추진하는 WTO 개혁에 한국이 어느 수준으로 참여할 것인가? 이미 개도국 지위는 앞장서서 포기했는데 산업보조금 이슈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조심스럽다. 한국이 중국정부 보조금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산업과 연계된 수혜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대일로에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참여할 것인가? 한국은 건설장비 수출이나 LNG선박 수주 등으로 일대일로의 간접적인 수혜를 입어왔다. 그러나 해외건설 수주와 경제적 저변 확대와 같은 직접적인 효과는 그리 크게 얻지 못했다. 동북아에서 한반도와 연계되는 새로운 교통ㆍ경제회랑을 탄생시키지도 못했다. 앞으로 일대일로를 둘러싸고 중국에 대한 반감도 커지고 중국의 영향력도 커지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될 터인데 이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 수립과 접근법이 요청된다.■   [1] 7800万农民工已返城复工,占返乡农民工总数的60%(2020. 3. 7.) [2] 농민공을 포함하지 않은 도시등록실업률은 5.3%이다. [3] 2019년 GDP는 추정치   ■ 저자: 최필수_ 세종대학교 국제학부 부교수 . 일본 히토츠바시 ICSICSICS에서 MBA MBA를, 중국 칭화대학 경제관리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취득했으며 취득했으며 취득했으며 취득했으며 ,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중국팀장으로 근무했다. 주요 연구분야는 연구분야는 연구분야는 연구분야는 연구분야는 중국의 경제체제 변화 , 중국 기업 지배구조 , 일대일로 등이다 .   ■ 담당 및 편집: 윤준일 EAI 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3) junilyoon@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최필수 2020-06-05조회 : 8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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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특별논평 시리즈- 코로나19 쇼크와 중국] ③ 코로나19와 중국 사회의 반응

.a_wrap {font-size:16px; font-family:Nanum Gothic, Sans-serif, Arial; line-height:26px;} [편집자주] EAI는 코로나19 사태로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 선 중국에 대한 전문가의 분석과 전망을 담은 “코로나19 쇼크와 중국” 특별논평 시리즈 총 4편을 아래와 같이 게재합니다.   1. 이동률: 코로나19의 중국의 대외관계 및 한중관계 영향과 전망 [보고서 읽기] 2. 최필수: 코로나19 사태로 중국 경제의 위상은 강화될 것인가? [보고서 읽기] 3. 하남석: 코로나19와 중국 사회의 반응 4. 양갑용: 코로나19로 변화하는 당국가체제의 양면성 [보고서 읽기]   EAI 특별논평 시리즈 “코로나19 쇼크와 중국”의 세 번째 보고서로, 코로나19 사태와 변화하는 중국 사회 내 민심을 연구한 서울시립대학교 교수의 특집 논평이 발간되었습니다. 본 논평은 체제 위기로 발전될 수도 있었던 초유의 코로나19 사태와 사스(SARS) 당시의 상황과의 비교를 통해 중국 당국의 위기 대처법과 민심의 연속성과 변화를 분석합니다. 저자는 정보의 통제가 일상화되어 있는 중국에서 은폐된 국난의 실상을 폭로하는 것은 언제나 내부고발자였다고 주장합니다. 내부고발로 민심이 흔들릴 때마다 당국은 ‘희생양 만들기’과 ‘영웅 만들기’로 성난 여론을 진화해왔습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도 마찬가지로 중국 당국은 문책성 인사를 단행하고 최초에 코로나19가 사스와 유사하다고 폭로하고 감염환자를 돌보다 사망한 리원량(李文亮) 의사를 국가 영웅으로 추대하며 민심을 달랬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방역에 고전하며 코로나로 비롯된 중국의 위기는 체제 자신감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코로나 사태로 시진핑의 지위가 흔들리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나, 사스 때와는 다르게 온라인 민심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에 향후 중국이 코로나 이후 예상되는 경제 및 사회 내 위기들에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민심 회복의 관건이라고 주장합니다.      I.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충격 2019년은 중국에 많은 고난을 가져다준 해였다. 중국 인민들에겐 “9를 만나면 반드시 어지럽다(逢九必亂)”는 말이 회자되어왔는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9로 끝나는 해에는 항상 나라에 큰 어려움이 있어 왔다는 뜻이다. 2019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중 무역분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홍콩에서는 ‘범죄인 인도조례 반대(反送中)’ 시위가 확산되었고, 후베이성 우한시에서는 처음으로 급성 호흡기 질환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12월만 해도 이 바이러스 질환이 인간 사이에는 전염이 되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였고, 이후 급속히 확산되며 해를 넘은 현재 중국을 넘어 세계를 뒤흔드는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동안 중국은 홍콩의 대규모 시위나 신장 위구르 문제 등 체제의 심각한 위기로 간주될 만한 굵직한 사건들이 여럿 있었지만, 중국 내 강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로 인해 커다란 위기로 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코로나19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물론 팬데믹 선포 이후 중국이 회복세에 돌아서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이 방역에 실패하며 체제의 자신감이 회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초기 방역 실패, 우한과 후베이 지역 의료체계 붕괴, 이후 발생한 수많은 사망자로 국가가 봉쇄되며, 코로나 사태가 체제 위기로 발전될 조짐을 보인 것 또한 사실이다. 코로나 발생 이후 중국 인민들의 민심도 21세기 들어 중국이 겪었던 여러 재난과 안전 문제들인 원촨(汶川)대지진이나 멜라민 분유 사건, SARS 당시와 비교해서도 더 안 좋은 상황으로, 우한발 사상 초유의 전염병 사태는 시진핑 집권 이후 최대의 리스크로 여겨졌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체제의 심각한 위기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역병을 보는 동아시아적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코로나 발생 이후 중국의 한 농촌에서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해 “외부인 출입 금지”라는 팻말과 함께 창을 들고 외부인을 통제하는 남성의 모습이 SNS상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해외에서는 중국의 후진적인 방역을 풍자하는 것으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염병을 뜻하는 역(疫)의 한자 풀이는 질병(疒)을 창이나 몽둥이(殳)를 들고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습은 중국의 오래된 문화적 전통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질병을 막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절실함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인 천명(天命)사상에 따라 통치자들이 덕치(德治)로 천지를 균형 있게 다스리고 화합을 이끌어야만 한다고 여겨왔다. 이를 크게 어길 경우, 하늘의 뜻을 거스른 것으로 간주하어 지진과 홍수, 가뭄, 전염병 등 재난이 발생한다고 믿어왔다. 이러한 믿음은 현대의 사회주의 체제에도 이어져 1976년의 탕산(唐山) 대지진이 마오쩌둥 시기의 종말의 징조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II. 2003년 SARS 당시와의 비교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확산된 이후 동아시아 지역은 방역에 비교적 성공하며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있는 반면, 미국과 서유럽 선진국들이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상황과 관련해 여러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문명적 차원의 차이를 짚는 큰 담론부터 각국의 의료 체계에 대한 세밀한 분석, 디지털 감시체제와 관련한 문화적 차이 등 여러 층위의 분석들이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분석이지만, 동아시아 지역이 방역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이유는 21세기 들어 코로나 바이러스를 호되게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을 비롯한 대만, 홍콩, 싱가폴 등은 2003년 SARS를, 한국은 2013년 MERS를 겪었다. 현재 G7 국가 중 캐나다가 다른 서구 선진국들 보다 비교적 방역에 성공하고 있는 것도 2003년 SARS 당시 동아시아 국가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피해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기존 SARS나 MERS를 겪으면서 쌓였던 방역의 실패와 수습과 관련한 경험이 현 코로나19의 국면에서 정부, 의료진, 시민사회가 이를 대처하는 데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을 두고 SARS 당시의 상황과 현 코로나19 국면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1. 정보의 통제와 내부고발자(whistleblower)의 존재 SARS의 경우 2002년 11월경부터 이미 중국 광둥성에서 미지의 치명적인 호흡기 질환이 있다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었고 중앙정부가 이를 확인한 것은 2003년 1월부터였으며, WHO에 보고된 것도 2월이 되면서부터였다. 이에 따라 중국 보건 당국은 춘절 인구의 대이동 시기에 감염 확대를 위한 조치는 취할 수 없었고, 3월에는 베이징을 비롯해 홍콩, 베트남, 싱가포르, 캐나다 등지로 감염이 확산되며 사망자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중국 당국은 SARS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고 사태를 은폐, 축소시키고 있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인민해방군 301병원의 고위직이었던 의사 장옌융(蔣彦永)은 중국 내의 CCTV와 홍콩의 펑황타이(鳳凰臺) 방송, 미국의 TIME지에 내부 상황을 고발하였다. 이는 결국 당국이 실책을 인정하고 강력한 방역대책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의 경우에도 SARS 때와 마찬가지로 당국의 정보 통제와 내부고발자가 존재했다. 우한에서도 2019년 12월부터 이미 심각한 폐렴이 발생했다는 정보가 있었으나 지역 보건 당국은 이에 관한 내용을 통제하고 있었다. 12월 30일에 우한 중심병원에 근무하던 의사인 리원량(李文亮)은 이 질병이 SARS와 유사하다는 보고서를 보고 이를 의대 동창생들의 위챗방에 공유했다. 이 내용은 중국의 SNS를 타고 확산되었고 2020년 1월 3일 우한 공안국은 그를 소환하여 인터넷에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는 이유로 경고하고 훈계서를 쓰게 했다. 리원량은 이후 병원에서 코로나19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2월 7일 사망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며, 중국에서는 그를 추모하며 정보를 통제하는 중국의 행정당국을 비판하는 움직임이 크게 확산되었다.   2. 희생양 만들기와 영웅 만들기 은폐 축소되고 있던 상황이 알려지며 민심이 흔들렸을 때 당국이 처한 조치는 바로 희생양 만들기와 영웅 만들기였다. SARS 당시에는 정보 은폐와 부적절한 대처를 이유로 당시 위생부장(한국에서는 보건복지부 장관에 해당)이었던 장원캉(張文康)과 멍쉐농(孟學農) 베이징 시장을 해임했고, 이번 코로나19와 관련해서는 마찬가지 이유로 후베이와 우한의 보건 정책 담당자들을 해임하고 장차오량(蔣超良) 후베이성 당서기와 마궈창(馬國强) 우한시 당서기를 경질했다. 이는 중국 특유의 중앙-지방 관계와 관련이 있는데, 중국은 민심이 이반하고 있을 때 실책의 문제는 지방의 책임자에게 돌리고 중앙은 오히려 그에 대한 심판자의 위치에 처하면서 중앙의 최고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인민들도 정책에 불만이 발생했을 때 “탐관오리에게만 반대하지 황제에게는 반대하지 않는다(只反貪官, 不反皇帝)”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중앙이 전횡을 부리는 하급 지방 정부를 통제하는 것이 옳다는 심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희생양 만들기를 통한 책임 소재의 완충 장치를 만드는 방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행해졌다. 한편, 인민들의 비판을 완화하기 위해서 취한 또 다른 방식은 영웅 만들기였다. SARS 당시에도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질병과의 전쟁에 나서는 희생을 매일같이 강조했다. 게다가 최고 지도자들이 현장에서 지휘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리커창 총리가 우한을 방문하면서 당 지도부들이 방역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 모습들을 연출했다. 다만 시진핑 주석이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두고 비판 여론이 높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방역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여겨진 3월 10일 우한을 방문했고, 4월 4일 청명절을 맞이하여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애도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연출하면서 그간의 부재를 만회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당국의 정보통제와 실책에 대한 비판의 상징이었던 리원량 의사를 국가열사로 추대하고 영웅으로 만들어 비판의 목소리를 체제 내부로 흡수해버렸다.   III. 리원량 추모와 중국 민간사회의 반응 상술한 바와 같이 당국이 리원량 의사를 체제 내의 영웅으로 추대하기는 하였으나 그에 대한 추모와 체제 비판의 글들은 중국 온라인상에서 계속해서 검열당하고 삭제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SARS 당시와 달리 인터넷이 폭넓게 보급되었기 때문에 인구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위챗을 비롯한 여러 SNS를 통해 비판의 목소리들이 퍼져나가고 있다. 실제 리원량 의사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사망하기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건강한 사회에서는 하나의 목소리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던 것이 알려지면서 당국에 대한 거센 비난 여론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중국 네티즌들은 SNS상에서 훈계서의 두 항목, “당신은 앞으로 위법활동을 중지할 수 있겠는가”와 “앞으로 위법활동을 할 때는 법적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겠는가”에 리원량이 당국에 답해야 했던 “할 수 있다(能)”와 “알겠다(明白)”에 대하여 “할 수 없다(不能)”, “모르겠다(不明白)”는 문구를 공유하는 캠페인을 벌여 저항했다. 그리고 중국 네티즌들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내부고발자(whistleblower)였던 리원량을 기리기 위해 휘파람을 불거나 호루라기를 부는 영상들을 올리기도 했다. 지식인들 또한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지는 정부 비판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것은 3건인데, ①우한지역 10명 교수의 호소문, ②변호사, 교수, 독립지식인 등 28명의 전인대와 국무원,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공개서신, ③인민대학 동문, 쉬장룬, 장첸판 등 8인의 전인대 상무위원회에 제출하는 공개서신이었다. 이 호소문 및 공개 서신들의 공통적인 내용은 리원량 의사의 명예회복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언론의 자유 등 중국 헌법 가치 수호였다. 실제 중국의 헌법의 35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언론, 출판, 집합, 결사, 행진, 시위의 자유를 가진다”이며, 51조는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자유와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국가, 사회, 단체의 이익과 다른 공민의 합법적 자유와 권리에 손해를 끼치지 못한다”이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움직임이 현재 체제 전복이나 서구식 정치제도 수용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의 민주운동의 전통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에 대한 추모와 복권, 그리고 사회주의 민주와 중국 헌법 가치 수호였다. 이는 1989년 천안문 사건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흔히 당시 시위대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당시 학생들은 자신들을 ‘애국적 사회주의자’로 호명했으며, 억울하게 죽은 후야오방의 복권과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언론의 자유를 당국이 지켜줄 것을 요구했었다. 현재의 움직임들도 당시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한편, 중국의 온라인에서는 주로 좌파 성향의 일부 지식인들의 글이 공유되고 있는데, 주된 내용은 의료보건의 시장화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리링(李玲) 북경대 교수의 인터뷰 기사로 온라인상에서 빠르게 공유되며 의료보건의 시장화와 코로나 사태와의 연관성이 화제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2017년 기준 우한의 공립병원은 96곳이고 민영병원은 258곳으로 민영비율이 72.9%였는데, 전국 평균인 64%보다 현저히 낮다는 내용이었지만 현재는 중국 온라인에서 전부 삭제 조치되었다. 중국의 신좌파 지식인으로 중국의 국가능력을 강조해왔던 왕샤오광(王绍光)의 10여년 전 논문인 “중국 공공 보건의 위기” 등이 많이 공유되기도 했다. 이 논문은 2003년 SARS 위기 당시를 분석하며 의료의 시장화가 어떻게 국민 건강의 질을 약화시켰는지 여러 통계를 들어 보여주는 글이었다.   IV. 향후 전망 다시 정리하자면, 중국의 민심은 코로나 사태 발발 이후 당국이 방역에 일차적으로 실패하면서 크게 악화하였지만 3월 이후로는 안정세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서구 국가들이 위기에 빠지면서 중국 체제에 대한 비판의 태도는 약해지고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회복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중국 온라인 상에서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중국이 서구와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글들이 많이 공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의 코로나 사태는 일차적 방역의 문제를 넘어선 상태에 있기 때문에 코로나 이후 악화된 각종 경제 및 사회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현 상황에서 다른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 바이러스에 대한 방역은 비교적 잘 해낸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경제 회복이나 민생 지원과 관련하여 어떤 대책들을 마련하여 민심을 회복할지도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올해 두 개의 백 년이라는 장기 목표 중 하나인 2020년 전면적 소강사회 건설을 위해 적어도 6% 규모의 경제 성장이 필요하지만 거의 모든 예측에서 이는 달성하기 힘든 목표가 되고 있다. 심지어 가장 최근의 IMF 전망에 따르면 중국은 1.2% 성장이 예측되며, 이 역시 코로나19 국면이 글로벌 차원에서 장기화된다면 더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이다. 특히 두 달이 넘는 긴 시간 동안의 방역 통제와 경제 위축, 실업 문제 등으로 인민들이 많이 지쳐있는 상황이며, 향후 서구 사회의 급격한 수요 위축으로 인한 수출 경제 타격 등이 현재 농민공을 비롯한 노동계급에 미칠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한 중국의 실업이 1억 명을 넘어 2억에 달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도 한다. 게다가 매년 800만 명에 달하는 대학 졸업자가 신규로 노동 시장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들의 취업 예상도 크게 악화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체제에 대한 불만이 커질 우려가 있다. 한편, 4월 16일 중국의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를 보면, 총 3,342명 중 대다수인 3,212명이 후베이성, 특히 우한에 집중되어 있다. 우한과 후베이성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가 매우 큰 상황이고 중국 국내에서는 우한에 대한 차별과 혐오마저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3월 27일 후베이성에 대한 봉쇄가 해제되면서 후베이와 장시성을 잇는 주강장강(九江長江)대교에서 일자리를 찾아 다리를 건너려는 후베이 주민들을 장시 지역의 공안들이 막아서면서 대규모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후베이 주민들은 경찰차를 전복시키고 “후베이 힘내라(加油)”를 외치며 강하게 저항했다. 후베이와 우한은 코로나19로 의료체계가 붕괴하면서 많은 목숨을 잃게 되었고 당국의 강력한 봉쇄 정책으로 일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상황이다. 중국 당국이 후베이와 우한 주민들의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해당 지역의 민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향후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위기로 시진핑의 지위를 비롯해 중국 공산당 일당 통치 체제가 붕괴하거나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은 적다고 할 수 있지만, 향후 발생 가능한 2차 팬데믹과 경제 문제에 대응하며 어떻게 민심을 회복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   ■ 저자: 하남석_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중국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연구영역은 중국의 체제변동과 대중저항, 지식인 사회, 톈안먼 사건 등이다. 주요 저역서로 <애도의 정치학: 근현대 동아시아의 죽음과 기억>(공저), <도시로 읽은 현대중국>(공저),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 (공역)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준일 EAI 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3) junilyoon@eai.or.kr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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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석 2020-06-05조회 : 8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