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는 국가이익뿐 아니라 국민의 삶과도 직결되는 외교안보 분야의 어젠다 설정과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2004년 6월에 18명의 외교안보 전문가로 국가안보패널(National Security Panel: NSP)을 구성하였다. 이후 국가안보패널은 《21세기 한국외교 대전략: 그물망국가 건설》(2006), 《동아시아 공동체: 신화와 현실》(2008), 《21세기 신동맹: 냉전에서 복합으로》(2010), 《위기와 복합: 경제위기 이후 세계질서》(2011), 《2020 한국외교 10대 과제:n복합과 공진》(2013), 《1972 한반도와 주변 4강 2014》(2015), 《미중의 아태질서 건축경쟁》(2017) 등 일곱 권의 책을 출판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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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71] 데탕트 국면에서 박정희 행정부의 선택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부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학교(Pennsylvania State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서울시립대학교 국제관계학과 조교수 및 부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 연구분야로는 국제기구, 한반도와 국제정치 등이 있다. 주요 논저로는 “안보위협을 대처하는 중소국의 선택” (2010), “Bargaining, Nuclear Proliferation, and Inter-state Dispute” (2009, 공저),《고위관료들, ‘북핵위기’를 말하다》(2009, 편저) 등이 있다.         I. 들어가며   1970년대 데탕트 국면에서 박정희 행정부의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대외적으로 보면, 박정희 행정부는 북한은 물론 공산권과의 관계에서 유화국면을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한국 정부는 남북 사이의 무한경쟁에서 벗어나 통일을 염두에 둔 남북대화를 시도했고,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막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산권과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반면, 국내적으로 한국 정부는 남북대결이 임박하며 국가의 생존이 위험에 처한 듯이 행동했다. 국군현대화계획, 자주국방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중화학공업 육성, 핵무기 개발 시도 등이 그 예이다. 더 나아가 “남북 대화의 적극적인 전개와 주변 정세의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선포된 10월 유신으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암흑기를 맞이하였다.   한국이 데탕트 국면에서 국내외적으로 상이한 행보를 보인 원인에 대한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전통적인 견해와 공개된 사료에 토대를 둔 연구에 따르면, 박정희 행정부는 미군 철수와 북한의 도발로 인한 안보불안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내적 통합과 자주국방을 모색하였고(e.g. 김형아 2005; 마상윤 2003, 176-184) 이를 위한 시간을 벌고자 남북대화와 주변국과의 긴장완화를 모색하였다(e.g. 윤홍석 2004, 78;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1998). 둘째, 박정희 행정부의 장기집권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는 데탕트 국면에서 존재했던 안보불안이 과장되었으며, 거대 성장한 군부세력이 안보불안을 활용하여 장기집권을 모색하였다고 해석한다(e.g. 김정주 2008, 483-48; 김지형 2008, 34-36; 임혁백 2004, 235-238; 홍석률 2010, 305-311). 셋째, 한국 내부의 사회적 모순과 경제성장 경로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는 유신체제를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한 강제적 자본집중과 동원의 기제로 파악한다(e.g. 강민 1983, 353-360; 한상진 1988).   이 글은 1960년대 남북한 집권세력의 국가전략에 초점에 맞추어 데탕트 국면에서 남북한의 선택을 조망한다. 이 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국가전략이 엇박자를 보이는 현상을 기술한다. 1950년대 이승만 행정부는 실체가 없는 북진통일론을 내세우면서 군비보강에 국력을 투여하였다. 반면, 북한은 ‘민주기지노선’을 내세우면서 전후 복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남북한의 중점 영역이 뒤바뀌었다. 군사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행정부는 “조국 근대화”를 국가 목표로 정립한 후, 경제성장에 국가 재원을 투자하였다. 반면, 북한은 “병진노선”을 채택하여 국가 재원을 국방비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남북한의 국가전략이 엇박자를 보이면서, 남북한은 진실된 화해를 위한 접점을 찾지 못했다. 둘째, 데탕트 국면에서 박정희 행정부의 위기 인식을 검토한다. 북한과의 대결, 국내 경제성장전략의 단점, 국내정치적 취약성으로 인하여 이미 잠재적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박정희 행정부는 주한미군의 철수 상황에서 심각한 위기감을 가졌다. 셋째, 데탕트 국면에서 박정희 행정부의 생존전략을 항목별로 검토한다. 박정희 행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위험성, 북한의 도발 가능성, 경제성장의 지체, 국내 정치세력의 반발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주국방, 중화학공업 육성, 외교 공세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북한이 도발하지 않으리라 기대하면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박정희 1975/1/14 국가기록원; 국토통일원 1985; 국토통일원, 670). 마지막으로 박정희 행정부의 위기 요인과 대처 방식, 박정희 행정부의 대응책이 남긴 유산을 검토한 후, 현재 한국의 정치세력에 주는 교훈을 정리한다.   II. 민주기지 vs. 북진 통일   이 절은 1950-1960년대 초반 엇박자를 보인 남북한의 국가전략을 기술한다. 1950년대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후원 아래서 전후 복구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을 추진한 반면, 한국은 북진통일론을 채택하였다. 이 시기 북한은 성공적 전후복구와 한국의 경제문제로 인하여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한국은 북진통일을 구호로 외쳤지만 분단상황을 관리하는 데에서 열세에 놓였다.   (1) 북한의 선경(先經) vs. 한국의 북진통일   1953년 6.25 전쟁이 멈춘 후, 남북한은 상이한 국가전략을 채택하였다. 북한은 ‘민주기지노선’을 천명하면서, 전후 복구에 집중했다. 1954년 11월 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에서 김일성은 통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국토통일원 1985a, 261). 조국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두 가지 방면에서 일을 잘 해야 하겠습니다. 한 방면으로서는 남조선인민들에게 꾸준히 우리 당의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미제와 리승만 역도를 반대하여 궐기하도록 해야 하며 다른 방면으로는 북반부 민주기지를 더욱 철옹성같이 강화해야 합니다. 민주기지 노선은 북한의 경제건설에 초점을 맞춘다. 김일성은 (1) 북한을 “낙원”으로 만들 정도로 민주기지를 경제적으로 강화하면, (2) 남한 주민이 북한을 동경하고 남한에서 혁명기세를 높일 수 있고, (3) 북한의 물질적 토대와 남한의 노동운동이 결합되면 통일에 이른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김일성 1957/8/25 국토통일원 1985a, 341). 즉, 민주기지 건설은 한반도에서 “모든 정세변화의 기본적 요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김일성 1957/9/20 국토통일원 1985a, 345). 북한은 민주기지에서 통일로 이어지는 3단계 논리 아래에서 경제건설에 집중했다. 북한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전후복구 3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시기 북한은 구소련으로부터 10억 루블의 경제원조, 중국으로부터의 식량원조, 그리고 북한 주민의 동원을 통하여 괄목할 만한 전후 복구를 이루어냈다. 1955년에는 6.25 전쟁 이전의 경제생산능력을 회복하였다(강인덕 1974상, 468).   북한은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인민경제발전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다. 김일성은 1차 5개년계획의 중심과업을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닦으며 인민들의 의식주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즉, 사회주의적 경제발전을 위한 중공업과 주민들의 소비품을 공급하는 경공업을 균형적으로 발전시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천명한 것이다(김일성 1981a, 106-107). 북한의 1차 경제계획은 외형상 성공을 거두었다. 공업부분의 연평균 성장률은 36.6%였고, 농업부분에서도 수리화, 전기화, 기계화가 진행되었다. 식량문제와 의식주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선언할 정도였다(김일성 1981b, 157-184)...(계속)  

조동준 2014-07-30조회 : 1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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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72] 한국의 동아시아 지역전략과 한반도 전략의 현황과 과제

동아시아연구원 아시아안보연구센터 소장 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숙명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최근 저술로는《정치는 도덕적인가》,《동아시아 국제정치 : 역사에서 이론으로》,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에 대한 탈근대론과 현실주의의 비판 고찰,” “유럽의 국제정치적 근대 출현에 관한 이론적 연구,” “강대국의 부상과 대응 메커니즘 : 이론적 분석과 유럽의 사례” 등이 있다.           I. 서론   이 글은 변화하는 2010년대의 미중관계, 더 크게는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한국의 정부가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어떠한 전략적 구상을 토대로 대처해 나가고 있는지, 그러한 전략이 적절한지를 살펴본다. 특히 1970년대 초반 미중 관계가 소위 데탕트를 기점으로 급변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역시 빠르게 변했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과연 현재의 한국이 어떠한 함의를 추출할 수 있는지도 알아본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부상은 빠르게 지속되고 있는 반면, 미국의 상대적 쇠퇴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두드러진다. 세력균형의 변화와 더불어 양국은 전략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미국은 소위 아시아 중시전략을 2010년 전후로 추진하고 있고, 중국은 시진핑 체제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강대국 전략을 포괄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미중은 2013년 6월 정상회담을 통해 소위 신형대국관계를 선언한 바 있는데, 이는 그간 미중이 각각 추구해온 지역전략의 공통점을 찾아 일정 기간 동안 협력 상태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협력 상태 속에서 경쟁은 지속될 것이고, 미중 두 강대국의 협력 속 경쟁은 주변국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Shambaugh 2013). 과연 미중 신형대국관계가 주변국들의 대강대국 정책에서도 신형관계로 나타날지, 그리고 주변국들 간의 관계도 신형관계로 귀결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Campbell 2013).   대표적인 대상이 한반도다. 미중이 신형대국관계 속에 협력관계를 추진할 때 각각의 동맹국인 한국과 북한도 신형남북관계를 설립할 수 있을 지가 관건이다. 데탕트의 시기를 보면 미중은 상호협력 관계를 수립하면서 남과 북이 소위 미니데탕트를 추진하도록 독려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는 단기간에 걸친 남북 화해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불과 3년이 채 안되어 남북 간에는 다시 대결과 경쟁관계가 복구되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은 강대국들이 큰 영향을 미치는 지역 질서라 하더라도 강대국들 간의 관계 설정이 주변국들 간의 관계에 직접 반영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거꾸로 따져보면 강대국들의 관계 개선이 주변국들에 긍정적으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주변국들 역시 나름대로의 독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은 북핵 문제, 더 나아가 북한 문제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다. 북한 문제는 탈냉전초기, 9.11테러 발생 이후 반테러 전쟁기를 거치면서 그 환경이 변화되었다. 향후에는 미중의 동아시아 세력경쟁 구도 속에서 새롭게 문제가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국은 북핵과 북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데 있어, 미중 관계의 변화를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동아시아 전략과 대북전략을 선순환 구조로 엮을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을 살펴보고, 미중 관계의 변화가 어떠한 측면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정책 제언의 관점에서 함께 분석해 보기로 한다.   II. 한국의 동아시아 지역전략 현황과 과제   1. 미국의 아시아 중시정책 전개   현재 동아시아는 전반적인 세력균형 변화와 더불어 국가중심의 근대 국가체제가 복잡화되는 소위 탈베스트팔리아, 혹은 탈근대 이행을 동시에 겪고 있다. 냉전 종식 유지되어 오던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는 미국이 반테러전쟁과 2008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재정적자가 심각해지고 이어 상대적 쇠퇴, 혹은 전략적 축소(retrenchment)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Brooks, et al. 2012; Beckely 2011). 반면 중국은 9% 전후의 경제성장을 지속하여 왔고, 세계적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도의 경기부양책 으로 두드러진 둔화 없이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간 누려왔던 지도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기술 부문의 뛰어난 선도성과 외교적 지도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Drezner 2013, 52-79). 반면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국은 자국의 경제성장이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지려면 일정 기간 지체현상이 벌어질 것이다(Johnston 2013; Schweller and Pu 2011).   미중 간의 세력균형 변화는 전략의 변화로 이어져 미국의 아시아 중시전략과 중국의 강대국 전략이 본격적으로 교섭하게 만든다. 현재 수립된 신형대국관계 및 그 유지국면은 미국으로서는 패권부활에 필요한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 전략공간을 마련하고 중국으로서는 강대국 부상에 필요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경제발전 환경 조성 및 소강사회 건설을 통한 국내기반 강화의 시간으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이 향후 경제력 회복을 통해 다시 패권국의 지위를 차지할지, 중국이 소강사회 건설 이후 탈소강패권국의 지위에 오를지는 향후 지켜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중 두 강대국의 세력균형 변화 이외에도 동아시아는 전반적인 국제질서의 변화를 겪고 있다. 수많은 FTA 조약 네트워크에서 보듯이 역내 무역량이 증가하고 생산네트워크가 촘촘해지는 등 역내경제통합이 가속화되었다. 민주화되는 국가들이 늘어나면서 국내 시민사회가 발전하고 동아시아 차원의 시민사회네트워크도 성장했다. 또한 여러 형태의 동아시아 지역 다자협력기구들이 만들어지면서 국가들 간의 세력경쟁에 규범적 제약을 가하는 국제환경도 조성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국가 중심, 하드 파워 중심의 근대적 국제정치도 네트워크 거버넌스 형태로 서서히 변화하려는 기운이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정부는 첨예해져 가는 세력균형과 탈근대 이행의 거대 흐름 속에서 양자 모두에 적절히 대비하는 복합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의 역대 정부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부분적으로 시도했으나 이들이 통합된 전략으로 구체화된 경우는 아직까지 찾아보기 힘들다.   2. 박근혜 정부의 동북아지역전략과 과제   박근혜 정부가 현재까지 제시해온 동북아 지역전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주변 강대국에 대한 양자 전략 내용은 있지만 전체 지역전략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관계 강화,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강화,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 관계 강화 및 다각화, 일본에 대한 원칙 중시 외교, 그리고 동북아평화협력구상 등을 지역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전략들이 미중 신형대국관계 수립이라는 양자적 변화,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지역적 변화를 민감하게 의식한 상태에서 제시된 전략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의 여지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 방미하여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지고 이명박 행정부로부터 이어온 포괄적 전략동맹을 이어가기로 합의한 바 있다. 북핵 문제에 대한 공조체제를 다지고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에 대한 지지를 얻는다는 것이었다(외교통상부 2013a). 한국과 미국은 이후 주요 현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협의하여 현재까지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조건, 주한미군 분담금 배분, 원자력협정 개정, 그리고 주한미군 기지이전 등에 관해 논의해오고 있다. 특히 북한이 3월 이후 병진전략을 추진하면서 비핵화를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비핵화 협상 재개를 위한 조건 마련을 위해 한미가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중국의 부상에 대한 한미 간의 전략협의는 여전히 명확한 개념과 비전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아시아 중시전략과 미중 신형대국관계 전략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아시아 중시전략을 통해 아시아에 대한 정치, 외교, 군사, 경제, 사회문화적 개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존의 동맹국 관계 강화를 전략의 핵심에 두고 있다. 아시아 중시전략이 대중전략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향후 미중관계를 어떻게 유지해나갈지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지대하다. 한편 이러한 미국의 아시아 중시전략과 미중 신형대국관계는 양립이 가능하다. 미국은 중국과 상호협력관계 심화를 유지하면서 리더쉽 부활에 필요한 경제, 외교적 힘을 축적하고자 한다. 신형대국관계는 미국에게 이러한 노력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전략인 것이다. 미국이 추진하는 아시아 중시전략에서 한국은 어떠한 대미관계를 수립해야 하는지 점차 입장을 정해야 하는데 이는 미국이 계획하는 동아시아 지역질서와 한국이 추구하는 동아시아 질서 간의 조정을 통해 가능하다. 과연 한국이 명확한 지역질서 구상을 가지고 한미 간의 포괄적 전략 동맹관계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미 간에는 중국을 포함한 지역전략 구상 협의가 활발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1972년과 명확히 비교된다. 데탕트 당시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동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줄이고 대만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협의하면서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을 약화시키고, 남북 간의 화해를 독려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지역전략을 염두에 두고 한편으로는 미국의 대북 협상 권고를 받아들여 <7.4 남북공동성명>을 추진하는 한편, 북한의 대남 노선에 대응하는 군사, 경제 전략을 추구하는 전략적 노련함을 보인 바 있다. 현재 미국은 다가오는 미래의 미중 경쟁관계를 의식하면서 당분간 미중 신형대국관계를 추구하고 있는데 과연 한국이 미중 간의 민감한 전략관계를 의식하고 한미동맹전략을 추구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계속)

전재성 2014-07-30조회 : 14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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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70] 오바마 행정부 등장 이후 미국의 대중정책: 아시아 공존의 상호인정과 지속되는 긴장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미국 미시건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에서 미국정치를 전공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미국정치발전, 미국외교, 미국과 한국의 정치제도 및 과정 등이다. 최근 연구로는 《기후변화 대처와 미국 패권의 딜레마: 국제적 공공재 창출에 대한 국내적 저항》,“미국 의료보험 개혁법안의 최종 통과과정: 하원의 자동실행규칙의 폐기와 오바마 행정 명령의 선택,” “미국정치의 집단적 사회운동으로서 티파티 운동 참여자의 성격과 구성” 등이 있다.         I. 서론   중국의 미래발전양상과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만큼 일반인과 학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역적 혹은 국제정치적 현상은 아마 없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1970년대 후반 개혁과 개방 이후 세계의 어느 지역보다도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해 왔으며, 이러한 축적된 경제력을 배경으로 군사대국으로의 비상을 함께 도모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에 필적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2000년대 초반 이후 약 10년 동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개의 전쟁을 치르느라 국력을 소모한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자와 국내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2000년대 판 미국 쇠퇴론을 다시 경험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상대적 위상 약화와 중국의 급속한 부상은 중국의 미래 및 미중관계의 향후 진로와 관련하여 다양한 질문을 던지기에 충분한 세계사적 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다. 과연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것인가? 과연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성장은 주변국가의 안보와 번영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것인가? 중국의 경제성장은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화로 귀결될 것인가? 미국과 중국이라는 주요 강대국 간의 관계는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귀결될 것인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양국은 결국 군사적 대결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 것인가, 아니면 비군사적 형태의 긴장 속에서 타협을 통해서 갈등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 양국 간 다양한 차원의 상호협력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은 이러한 갈등을 회피하는 방패가 되어 줄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중국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미중관계의 전개양상을 관찰하고 그 패턴에서 전략이나 교훈을 얻으려는 식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이미 지난 20여년 간 다양한 답변들이 제시되어 왔다. 기존의 강대국이 신흥 강대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Levy 1987; Mearsheimer 2001; Schweller 1994; Schweller 1999),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성장에 대한 미국의 현실주의적인 관점 및 이에 근거한 미중관계의 분석(Friedberg 2002, 2011; Mearsheimer 2001; Tellis 2013), 중국위협론의 맹점에 대한 지적과 지속적인 관여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Lieberthal 2001; Lampton 1996; Roy 1996), 중국부상에 대한 포괄적 분석과 특히 세력전이 이론으로 미중관계를 파악하는 경향의 문제점(Ross and Zhu 2008; Levy 2008), 미중관계는 특정한 경로를 걷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다기보다는 협력과 갈등 속에서 양국의 상호 관리와 조정 여부에 달려 있다는 의견(Shambaugh 2002, 2013) 등 다양한 관점과 해석들이 등장하면서 중국의 미래와 미중관계의 향후 전망에 관한 연구가 당대의 문제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논의들은 저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미중관계를 분석하고 진단했다는 점에서 다양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논의의 근본적인 동인은 빠르게 부상하는 중국의 경제력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군사력이 탈냉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단극체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국제적 세력배분현상을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미중관계의 미래상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2009년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미중관계 전개양상의 특성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과제로 등장한다. 빠르게 부상하는 중국을 맞아 국제적 세력배분의 측면에서 상대적인 패권쇠퇴를 경험하고 있고 동시에 정치적으로 거버넌스의 문제와 경제적으로 성장동력의 정체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기존 강대국 미국이, 오바마 행정부 이래 꾸준히 추구한 아시아 중시정책의 내용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어떠한 것인지는 상당한 관심거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오바마 행정부가 추구한 다양한 이름의 대중국 정책—아시아 회귀, 아시아 재균형, 아시아 중시정책—이 어떻게 추진되었으며, 중국의 어떠한 반응에 직면하였고, 이러한 반응에 미국이 다시 어떠한 조정 과정을 밟아 왔는지에 관한 연구는 부상하는 강대국과 기존 강대국 간의 관계가 일방의 승리와 패배가 아닌 장기간의 공존과 공영의 도정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탐색적 분석으로서 매우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샴보(David Shambaugh)가 지적하듯이 양국 간의 관계가 점점 더 협력의 영역을 넓혀가기 보다는 갈등의 영역을 줄이도록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Shambaugh 2013), 그가 편집한 저술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서로 “복잡하게 엮인 두 거인”(tangled titans)의 공존 패턴 가능성에 대한 모색은 매우 중요한 연구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09년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추구한 대중국 정책은 이러한 패턴 분석의 출발점으로서 충분한 연구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서 이 글은 먼저 다음 장인 제II장에서 2009년 출범한 오바마 제1기 행정부의 중국정책을 개괄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제1절에서는 미국의 아시아 중시정책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면서 먼저 미국 최초의 아시아-태평양계 대통령임을 자임한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의 2009년 중국 방문 이후 미중관계의 전개상황과 그 이후의 양국간 갈등 상황이 소개될 것이다. 이어서 중국 인근의 해양도서 분쟁과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속에서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당시 국무부장관이 제기한 “아시아 지역 다자구도론”의 내용과 이후 2011년 후진타오 주석의 미국방문을 통해 양국 간의 갈등관계가 봉합되는 과정이 설명될 것이다. 제2절에서는 미국의 아시아 회귀론 등장배경과 중국이 제시하고 미국이 긍정적으로 화답한 “강대국 관계의 새로운 모델”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 제시될 것이다. 이어서 오바마 제2기 행정부 초반부의 중국정책을 다루는 제III장에서는 먼저 제1절에서 제2기 오바마 외교안보팀 등장 이후 뉘앙스가 변한 미국의 아시아 회귀론과 그 원인이 간략히 검토될 것이다. 이어서 제2절에서는 2013년 중국의 신임 국가주석으로 등장한 시진핑(習近平: Xi Jinping)의 미국 방문 및 그 성과와 그가 주창한 신형대국관계론과 관련한 향후의 미중관계 전개 방향 등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 장인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고 그 시사점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II. 제1기 오바마 행정부의 대중국 정책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가져 올 전략적 이익에 일찍 눈을 뜬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이 1972년 중국방문을 통해서 미중관계와 세계 권력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듯이, 오바마 대통령 역시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이 불러 오고 있는 미중관계에 대한 변화 및 아시아와 세계의 권력구조 변화에 대한 잠재적 충격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미국은 다극화 구도가 시작되던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여전히 강력한 패권국가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으나,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국내경제의 장기침체와 이에 따른 높은 실업률과 성장동력 둔화 및 소위 중국의 급속한 군사, 경제적 성장을 포함한 “나머지 국가의 부상”으로 인해서 패권국가로서의 지위가 실질적으로 위협을 받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환경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질적으로 변화된 환경 속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글로벌 차원의 도전에 대한 시급한 대처가 미국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이 관여하는 다자적인 틀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얻어내고자 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중 간의 양자적 협력관계를 넘어서는 효과적인 다자적인 틀을 구축해야 한다고 전망하고 있었고, 이러한 오바마 대통령의 생각은 이미 그가 대통령 출마를 가늠하고 있었던 시절부터 배태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Obama 2007). 2009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입성한 오바마 대통령은 이미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이에 맞추어 미중관계를 조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중국 역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실적인 주도세력인 미국의 지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오바마 행정부 등장 이후 미중 양국 사이에는 “미국은 평화롭게 부상하면서 번영하는 중국을 환영한다”라는 입장과,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미국을 지지한다”라는 입장이 상호 조응하기에 이르렀고, 양국관계는 다양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상호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양국 간 상호인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중국에 대해서 강대국의 지위에 걸맞은 “책임 있는 이해당사자”가 되어줄 것을 꾸준히 주문해왔다.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이 시기와 사안에 따라서 강대국과 개도국의 지위를 오가는 “선별적인 이해당사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전폭적인 이해당사자”로 행동할 것을 미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기시켰다. 이와 함께 미국은 중국의 행위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범과 규칙에 따를 것을 주문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과 여기에서 파생하는 양국 간 긴장은 오바마 제1기 행정부 4년 내내 양국 간 갈등의 요인이 된 중국 인근의 해양영토 분쟁, 중국 인권문제, 그리고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 등의 문제에서 더욱 강하게 부각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 중국은 양국관계를 위해서는 물론 아시아-태평양 지역 및 글로벌한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협력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발전했고, 이러한 관계발전은 후일 부상 강대국과 기존 강대국 관계를 새로 정립하는 “강대국 관계의 새로운 모델론” 혹은 “신형대국관계론”이 태동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필연적인 분쟁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양국의 공약에도 불구하고, 양국관계는 미국이 강조하는 “책임 있는 이해당사자”와 “국제적 규칙준수,” 그리고 중국이 주장하는 “핵심이익의 존중” 등을 둘러싸고 여전히 긴장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관계와 갈등이 격화될 경우 양국 관계는 상당한 냉각국면에 접어드는 경향을 보였고, 반면 정상회담 등의 고위급 회담을 통해서 긴장이 해소되고 갈등이 봉합되면서 새로운 우호협력관계 국면이 전개되기도 하였다...(계속)

손병권 2014-05-12조회 : 1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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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9] 적(敵)에서 암묵적 동맹으로: 데탕트 초기 미국의 중국 접근

가톨릭대 국제학부 부교수. 마상윤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과정을 마친 후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 196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국내정치개입에 대한 연구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 국제교류처장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부르킹스연구소 및 우드로윌슨센터에서 방문학자로 선발되어 연구하였다. 주된 연구분야는 미국외교정책, 한미관계, 냉전외교사이다. 최근 출간된 논문으로는 “한국군 베트남 파병결정과 국회의 역할,”“1970년대 초 한국외교와 국가이익: 모겐소의 국익론을 통한 평가,” “‘특수관계’의 해부: 영국 블레어 정부의 자유국제주의 대외정책과 영미관계,” “오바마 행정부의 안보전략과 한미동맹: 현실주의 역외균형론을 넘어서” 등이 있다.             I. 머리말     미국과 중국은 아시아 냉전의 주요 당사국이었다. 두 나라는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기까지 했으며, 그만큼 양국 간의 상호불신과 경계심은 대단히 컸다. 미국에서 중국은 소련보다도 더 교조적인 공산주의 국가로 인식되어왔으며, 냉전의 상황 하에서 적대적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냉전적 불신과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1970년대 초 관계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72년 2월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중국방문은 그 하이라이트였는 바, 이로써 미중관계 개선은 데탕트기 국제정치에서 가장 주목 받는 사건이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1970년대 초 데탕트 국면에서 미국이 중국에 접근하여 외교적 관계를 개선하고자 시도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그 교섭의 과정을 검토하며, 아울러 미중 접근의 국제정치적 결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다. 미중 양자관계는 <미국뿐 아니라 중국의 시각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으나, 이 글은 미국외교에 주로 초점을 맞추면서 다음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미국은 어떤 이유에서 냉전 대립의 주된 당사국이었던 중국과 관계개선에 나서게 되었는가? 적성국과 관계를개선하기 위한 교섭과정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무엇이었으며, 미국은 이를 어떻게 극복하려 했나? 이 과정에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Henry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미중교섭의 결과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오늘날 미국 외교 및 미중관계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미중관계 개선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 자체로서 충분히 의미 있는 역사연구의 대상이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력적인 연구주제이다. 1970년대 초 미중관계의 일대 변화가 오늘날의 미중관계와 그에 따른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첫째,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중국의 급속한 부상과 함께 미국의 상대적 쇠퇴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물론 미국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회복에 가장 큰 국정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대외정책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Nasr 2013). 그런데 이와 같은 미국 국력의 상대적 쇠퇴는 1970년대 초에도 비슷하게 관찰되었던 바, 당시에 미국이 여기에 어떻게 외교적으로 대응했는가는 오늘날 미국의 대외전략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기준점을 제시할 수 있다.   둘째, 오늘날 국제정치의 가장 큰 화두는 미중관계의 향방이다. 과연 기성 패권국인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가? 아니면 양국은 앞으로 보다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고 강화하게 될 것인가? 미래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이상 이 질문에 대해 주관적 의견 이상의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미국이 외교적 접근을 통해 공산주의 적성국이었던 중국을 “암묵적 동맹”(tacit ally)으로 변화시켰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오늘의 문제를 간접적으로나마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한다. 1970년대 초에 제시된 미중관계 방정식의 난이도는 오늘의 문제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당시의 해법에 대한 연구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 또한 미래를 전망하는 데 어느 정도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초의 미중관계와 양국 교섭에 대해서는 영미학계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에야 기밀 해제된 외교문서를 기초로 한 연구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국내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물론 1970년대 초의 미중 데탕트가 당시 한국의 정치 및 국제정치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의 정치와 외교를 다루는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미중관계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진 경우는 있다(홍석률 2012). 하지만 미중관계 자체가 연구의 주된 대상으로 설정되었던 경우는 없으며, 이런 점에서 본 연구가 우리 학계의 현대 미중관계사 연구에도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II. 미중 데탕트의 기원     1. 미국의 상대적 쇠퇴     1969년 1월 닉슨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닉슨은 반공주의자로 유명했다.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행정부의 부통령을 지냈던 시기부터 이미 그는 반공주의자의 이미지를 확고히 굳혔다. 닉슨은 또한 현실 주의자이며 국제주의자였다. 그는 국제정치가 기본적으로 힘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굳게 믿었으며, 미국이 국제질서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미국과 국제질서는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었으나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피로를 가중시켰다. 1965년 존슨(Lyndon Johnson) 행정부가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 무렵 그 누구도 전쟁의 장기화를 예상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대규모 정규 병력을 투입한 만큼 공산세력은 곧 소탕될 것이고 베트남과 인도차이나반도 그리고 나아가 동아시아에서의 반공전선은 유지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미국은 수렁에 빠져든 듯 했다.   1968년 말까지 미국은 536,000명의 베트남 참전병력 중 30,500명의 전사자를 냈다. 165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남베트남 및 북베트남에 쏟아 부었고, 500여대의 항공기가 손실되었다. 연간 200억 달러에 달하는 전쟁비용도 무시 못 할수준이었다.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은 1966년 7.9 퍼센트에서 1967년 9 퍼센트, 그리고 1968년 9.7 퍼센트로 늘어만 갔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경상수지적자와 이에 따른 금 해외유출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베트남전쟁에 따른 재정지출증가는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금 유출이 지속되었고, 인플레 압력 또한 높아져서 1968년 미국 경제는 연 5 퍼센트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되었다(Young and Kent 2004, 348-349).   국내정치적으로도 반전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본래 미국 시민들은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참전 결정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반전운동이 나타나고 확대되었다. 특히 1968년 음력설을 맞아 전개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대대적 공세는 공산세력의 건재를 과시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미국여론의 전환점이 되었다. 기성질서에 대한 청년층의 반감과 저항이 표출되었고(Gaddis 2010, 14), 이에 동조하는 여론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1960년대 말 미국은 국내적으로 가중되는 정치 및 경제적 어려움을 맞이하고 있었다.   국제질서 또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특히 국제적 세력균형 변화가 중요했다. 첫째, 서유럽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파괴를 딛고 경제적 부상을 이루었다. 이중 프랑스와 독일 같은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커진 경제력과 자신감을 배경으로 보다 독자적인 외교행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은 독자노선을 추구하면서 1966년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를 탈퇴했다. 독일도 1966년 12월 기독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대연정이 성립된 이래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외상의 주도 하에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동방정책(Ostpolitik)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는 서방의 단결력 약화를 우려하게 되었다.   둘째, 미국의 입장에서 더욱 중요한 국제적 변화는 소련의 군사력 강화였다. 소련은 1960년대 중반 이후 핵전력 및 운반능력 확충에 집중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1968년경에는 미국과 대등한 수준의 전략무기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미소가 모두 상대방에 대한 제2차 공격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하영선 1989, 232). 이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 상실을 의미했다.   물론 소련도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경제침체가 계속되었고, 공산권 내부의 분열도 표면화되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루마니아가 독자노선을 추진했고, 후술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국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즉 미국의 국력만 일방적으로 약화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이 국제적 위상의 상대적 약화를 겪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도 회복을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1969년 출범한 닉슨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닉슨은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의 국제정치학 교수였던 키신저(Henry Kissinger)를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키신저가 공화당을 지지하고 국제문제에 정통한 학자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그의 임명은 다소 의외로 여겨졌다. 키신저는 닉슨이 아니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록펠러(Nelson Rockefeller)에게 오랫동안 정책자문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닉슨과 키신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며 또한 국제주의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둘은 또한 공개적인 외교 접근보다 은밀한 협상을 통한 타협을 선호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공식적 관료조직을 거치지 않고 계통을 뛰어넘어 일을 진행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미국의 상대적 쇠퇴를 특징으로 하는 국제적 환경변화 속에서 어떻게 하면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미국의 국익을 확보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함께 직면해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외교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Hanhimäki 2013, 37-39).   미국이 처한 국제정치의 환경 변화에 닉슨과 키신저는 어떻게 대응하려 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닉슨과 키신저가 최고정책결정자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남긴 연설과 글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닉슨은 1967년 7월 29일 보헤미안클럽에서 한 연설을 통해 미소 데탕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국제적 세력균형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련이 핵무기 톤수에서 미국을 앞서기 시작했고, 운반수단에 있어서도 1970년에 이르면 미국과 대등해질 것이며, 중국도 곧 핵 운반능력을 갖출 전망이라고 지적했다. 닉슨은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에 나서야 하며, 소련과 비교해 대등한 핵전력만 보유해도 충분하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닉슨은 경제적으로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보았고, 외교적으로도 “소련 지도자들과 대화를 통해 오판의 가능성을 줄이고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영역을 모색하여 긴장을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닉슨은 또한 1967년 10월 외교 분야의 유력 시사매거진 <포린 어페어즈> (Foreign Affairs)에 기고한 “베트남 이후의 아시아”(Asia after Vietnam)라는 에세이를 통해 새로운 아시아정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닉슨은 미국이 장기화 되는 베트남 전쟁에 사로잡혀있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면서 미국 외교가 베트남에서 벗어난 새로운 아시아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의 아시아는 스스로 안보를 위해 노력해야”하며 미국은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후일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으로 정식화되었다. 이 글에서 또한 주목할 내용은 중국에 대한 것이었다. 닉슨은 10억 인구의 중국이 영원히 국제적 고립 상태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국가를 위협한다면 세계도 안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중국을 국제사회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Nixon 1967, 113-125; U.S. Department of State 2003b).   키신저는 1968년에 출간된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 쟁점들”(Central Issues of American Foreign Policy)이라는 에세이에서 미국 외교의 기본과제를 새로운 다극질서의 출현이라는 국제정치의 구조적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미소 양극질서가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다극질서로 변화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정치적 다극질서 하에서 미국은 더 이상 압도적 힘을 바탕으로 국제질서의 안정을 주도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은 여전히 물리적으로는 초강대국이지만 미국의 역할은 정치적 차원에서 여타 강대국들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있다. 키신저는 또한 미국이 다른 강대국들과 국제질서의 성격에 대한 합의를 형성함으로써 국제적 안정을 도모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 스스로의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키신저는 미국이 이런 역할을 담당하려면 외교적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외교가 도덕주의적이고 법률주의적 경향을 띄는 국내여론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곤란하다는 의미였다(Kissinger 1968; U.S. Department of State 2003c).   닉슨과 키신저의 정세인식은 닉슨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키신저는 1969년 12월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미국외교의 기본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미국 외교정책을 새로운 기반 위에 세워야 하는 시점에 놓여있습니다. 전후 20년간 미국외교는 마샬플랜(Marshall Plan)을 이끌었던 원칙에 따라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크게 변했습니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그들은 자신감을 되찾고 있습니다. 신생국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더 이상 단일한 세력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보다 덜 일방적으로 미국적인 기반 위에 국제관계를 건설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U.S. Department of State 2003d).”   1970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한 “1970년대 미국외교정책: 평화를 위한 새 전략”(U.S. Foreign Policy for the 1970s: A New Strategy for Peace)이라는 보고서에도 키신저의 구상이 반영되어있다. 닉슨은 이 보고서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왔던 국제정치질서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평화의 구조를 갖추기 위한 원칙으로 다른 국가들과 맺은 파트너십(partnership), 미국의 힘(strength), 그리고 협상의지(willingness to negotiate)를 꼽았다(U.S. Department of State. 2003e).   요컨대 닉슨과 키신저는 미국의 상대적 쇠퇴를 맞이한 가운데 이에 외교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대외전략을 구상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련과 경쟁을 완화하여 여러 국내외적 곤란을 타개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소련과의 냉전적 대결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닉슨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지킬 수 있는 투자를 강조했다. 장기적 차원의 대립을 전제한 상태에서 이를 위해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가 강했던 것이다.   새로운 전략구상에는 대외개입 특히 아시아지역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국력 및 위상에 끼친 악영향을 고려할 때 이로부터 명예롭게 탈출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정책목표로 오른 점은 놀랍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닉슨은 중국과 관계 개선이 필요함을 또한 강조했다. 이는 국제질서가 미국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양극질서에서 다극질서로 변환하고 있다는 키신저의 인식과도 어우러질 수 있었다. 키신저의 주 관심은 유럽 및 소련과 미국의 관계여서 그가 닉슨만큼 중국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키신저는 미국 단독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 간 힘의 역학관계를 이용한 국제관계 관리를 구상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중소관계는 미국 외교 전략에 있어서 중요한 기회로 포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MacMillan 2008, 109)...(계속)

마상윤 2014-04-27조회 : 14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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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6] 국제질서 변환과 전략적 각축기의 미·중관계: 중국의 전략적 입장과 정책을 중심으로

국가안보전략연구소(INSS) 연구위원 겸 지역연구팀장. 상하이 푸단대학교(上海復旦大學)에서 중국정치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도쿄대학(東京大學) 동양문화연구소 외국인연구원 및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대만(臺灣)외교부 초청 타이완펠로우십 방문학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분야는 중국 대외관계 및 동아시아안보이며 한국국제정치학회 연구이사, 중국외교안보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시진핑 지도부의 등장과 중국의 대외정책: '지속'과 '변화'의 측면을 중심으로," "South Korea-China Security Cooperation: Focusing on the North Korean Opening/Reform and Contingencies," "중국의 에너지안보정책과 중미관계 전망," 외 다수가 있다.       I. 들어가는 말   1970년대 초반 미국과 중국의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지던 시기 미국에게 있어서 중국은 결코 전략적 각축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손을 잡아야 했던 선택적 대상의 하나였으며 일종의 대리방어막에 불과했을 따름이었다 (키신저 2012, 270-272).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와 동아시아 아키텍처에서 중국은 일정부분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중국은 몰락한 소련을 대신하여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 다만 20세기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치열한 전략적 경쟁으로 점철되었다면 21세기의 미•중관계는 경쟁과 협력, 갈등과 타협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아가 미국과 중국은 세계질서와 동아시아의 새로운 아키텍처를 형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행위자로 작용하고 있다. 21세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략적 각축의 부담은 도전자의 위치에 있는 중국이 더욱 크게 느끼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기존 패권국은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 자체를 좌절시키거나 또는 부상속도를 늦추기 위해 예방전쟁, 봉쇄 및 관여전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에 대응해 왔기 때문이다.  반면 부상하는 중국은 기존의 세력전이(power transition)이론 혹은 공격적 현실주의(offensive realism) 이론 등이 주장하는 미·중 ‘충동불가피론’과 ‘현상타파론’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적 주장들을 극복하면서 ‘평화발전론’을 실현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즉, 미국의 직•간접적인 봉쇄와 견제를 돌파함과 동시에 주변국이 느끼는 ‘중국위협론’을 해소하면서 자국의 생존과 이익 공간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부상이 대내외적으로 기정사실화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른바 “평화발전”(和平發展)과 “조화세계”(和諧世界)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부상이 결코 기존의 국제체제와 주변국에 위협을 가하지 않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중국이 추구하는 미래 국제사회는 조화로운 세계(harmonious world)를 지향한다는 것이다(中華人民共和國國務院新聞辦公室 2011). 이와 같은 중국의 주장 및 전략은 냉전종식 후 ‘평화’와 ‘발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도광양회”(韜光養晦)와 “유소작위”(有所作爲)를 주장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사상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최근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한 시진핑(習近平)은 21세기 “중국의 꿈”(中國夢)과 “중화민족의 부흥”(中華民族的復興)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대외관계의 키워드로 “새로운 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를 내세우면서 특히 미·중관계에서의 상호이해증진과 전략적 신뢰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전략적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기 위한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정치의 두 중심축인 미국과 중국 즉, 주요 2개국 체제(Group of Two: G2)가 아시아•태평양을 무대로 펼치는 패권경쟁이 향후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안보의 판을 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자국의 부상으로부터 기인하는 21세기 국제질서의 변환과 미·중 전략적 각축의 파고를 헤쳐 나가기 위해 어떠한 대외전략과 목표를 수립하고 있을까. 또한 중국은 대미관계는 물론 새로운 동아시아질서의 구축을 위해 어떠한 전략적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은 미•소 냉전시대를 넘어 미•중 양강체제로 굳어져 가는 역사적 변환기에 중국 대외전략의 내용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 다가올 새로운 아키텍처의 모습을 전망하면서 한국의 정책적 시사점과 대응방향을 모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II. 21세기 미•중관계의 기본 구조와 성격   21세기 미•중관계의 구조와 성격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중관계를 가장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용어는 ‘갈등속의 협력’(cooperation amid struggle)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중관계는 1972년 정상화 이후 현재까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갈등속의 협력’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잖은 전문가들이 미·중관계의 성격을 ‘갈등과 협력’이 병존하는 관계로 묘사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미·중관계는 기본적 갈등구조의 바탕 위에서 선택적 필요에 따라 협력을 추구하는 ‘갈등적 협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욱이 오늘날 중국의 국력이 급속히 상승하면서 미·중관계는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적 수준에서 갈수록 경쟁구조가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구체적 이슈와 영역별로 양국 사이 갈등의 형태로 더욱 자주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미·중 양국이 협력을 강조하고 또한 실제로 협력을 추구하려는 것은 갈등에서 증폭된 대립과 마찰이 상호이익 저해와 세계질서 안정 파괴로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오늘날 미·중관계의 구조와 성격은 ‘전략적 불신 속의 협력’(cooperation amid strategic mistrust)이라는 말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중 간에 이루어지는 많은 범위의 협력에도 불구하고 이는 기본적으로 전략적 불신을 저변에 깐 상태에서 현실적 필요에 따라 협력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미국은 중국의 중•장기적인 전략적 의도와 자국의 국가이익에 대한 도전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미국이 자국의 부상을 억제하거나 방해하며 또한 공산당 정치제도를 훼손하려는 한다고 의심한다(Lieberthal and Wang 2012). 일례로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향한 재균형 정책이 이 지역 안정에 기여하고 지역 내 건설적 역할을 확대하며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이를 자국에 대한 견제와 억제전략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지역정세의 불안정을 초래할 뿐이라고 본다(楊潔勉, 2013, 18; 金燦榮•戴維來, 2012, 19-23; 王義危 2012, 66-72). 이와 같은 미·중관계는 하딩(Harry Hrrding)이 주장한 바와 같이 “깨어지기 쉬운 관계”(fragile relationship) 또는 램프턴(David Lampton)이 묘사한 것처럼 “동상이몽”(same bed different dreams)의 관계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Harding 1992; Lampton 2002).   20세기의 미·중관계는 미국이 일방적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중국에 대해 공세적이고 압박적인 양상을 보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와 달리 21세기 들어서 확연히 드러나는 미·중 간 종합국력격차의 축소는 양국관계를 훨씬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규모는 2010년을 기점으로 미국 다음의 세계2위에 올라섰고, 국방비 지출 역시 2009년부터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국가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2012년 말 기준으로 3조 3,000억 달러를 보유한 세계 1위 외환보유국이며, 그 중 1조 달러 이상을 미국 국채매입에 투자하여 현재 세계 최대의 미국 채권 보유국이다. 중국이 미국의 경제력을 좌우할 수 있는 핵심 열쇠를 쥐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중국은 국력이 증대될수록 ‘국제질서의 민주화’, ‘신형대국관계’ 등을 주장하면서 미국에게 중국을 존중하고 대등하게 대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표 1] 중국과 미국의 각종 국력지표 비교(2012년)                  중국       항목           미국 13.51 인 구 3.139억 9,596,961 ㎢ 국토면적 9,826,675 ㎢ 8조2,271억 달러 전체 GDP 15조 6,848억 달러 6,188 달러 1인당 GDP 4만9,965 달러 3조8,700억 달러 전체 무역액 3조8,200억달러 3조3,000억 달러 외환보유액 1,480억 달러 1,024억 달러 국방예산 6,457억 달러 1척 항공모함 11척 2백28만5천명 전체병력 1백58만2백55명 출처: World Bank, United States Census Bureau, CIA’s the World Factbook, IMF.   물론 미국에게 중국의 부상은 위협인 동시에 기회를 제공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미국은 신흥강대국으로 등장한 중국과 협력하여 다양한 국제 현안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짐으로써 이제까지 국제문제 해결에서 미국이 혼자 짊어지던 부담과 비용을 줄이고자 한다. 미국이 중국에게 요구하는 “책임있는 이해상관자”(responsible stakeholder)다운 행동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입장에서는 세계화 시대 ‘G2’의 지위에 올라선 중국과 ‘동반자’로서 상호 협력 해야 하는 사안들이 급증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중국의 협조 없이는 세계금융위기의 극복이나 북한 핵문제 그리고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등 국제사회의 주요 이슈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때문에 2009년 7월 27일 제1차 미중 전략경제대화(U.S.-China S&ED) 개막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중관계는 21세기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양자관계보다도 중요하다”고 했으며,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클린턴(Hillary Clinton)과 재무장관이었던 가이트너(Timothy Geithner)는 “미국이나 중국이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구적 문제는 거의 없지만 미국과 중국이 함께 한다면 지구상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주장했다(Clinton and  Geithner 2009).   그러나 중국의 종합국력 증대 및 그에 따른 책임 및 역할 확대는 중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주요 국제사안에 대한 중국의 목소리를 키움으로써 중국이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중국의 종합국력이 성장할수록 미중 간 세력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으며, 상호 마찰과 대립의 이슈 영역도 그만큼 증대되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비록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서로가 상대방의 기본이익을 위협하는 전략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 미국은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을 채택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중국이 서구식의 자유민주주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중국지도부는 공산당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꿀 생각이 없으며, 체제변환을 요구하는 미국이 중국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외부위협을 제기한다고 본다. 따라서 중국은 서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군사력과 외교적 영향력을 억제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체하는 주도세력이 되고자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국과 중국이 근본적인 지배이념과 정치체제의 차이 그리고 지정학적 대립의 구조 속에서도 사실상 최대한 충돌을 피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경제 성장에 정책적 최우선 순위를 둠으로써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미국과의 충돌은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전면적 소강사회건설’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국가목표 달성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개혁개방초기부터 미국과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 공통인식의 부분을 확대하며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미래를 함께 창조한다”(增進了解, 擴大共識, 發展合作, 共創未來)는 방침을 강조해 왔다(陶堅 1998, 10). 그리고 오늘날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대미관계에서 이른바 ‘신형대국관계’를 주장하고 있는데 외교부장인 왕이(王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새로이 부상하는 강대국과 기성 강대국이 전쟁 같은 직접적 충돌을 통해 국제질서가 재편됐던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두 주요 강대국이 협력의 기반 위에서 공정경쟁을 통해 세계의 평화적 발전을 이뤄나가자”는 개념을 담고 있다(王穀 2013, 4).   한편 미국의 경우에도 중국과 충돌하기보다는 협력을 통해 상호 윈-윈하는 미래상을 강조하고 있다. 일례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 4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 3월 7일 미국평화연구소(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에서 행한 연설에서 “중국은 소련이 아니고, 미중 양국은 냉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양국은 경쟁과 협력 사이에서 가장 이상적인 균형을 실현하는 대국관계’라고 규정한 바 있다. 나아가 클린턴은 “역사적으로 기성대국에 신흥대국이 도전하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났으나 우리는 처음으로 적대관계나 전쟁이 되지 않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하고 또 쓸 수 있다”고 역설했다(Clinton March/7/2012). 비록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사이에 세력전이를 둘러싼 충돌의 역사적 사례가 빈번하다 하더라도 이처럼 미국과 중국이 상호 충돌을 회피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공표하고 있다는 점은 21세기 국제질서의 변환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미·중관계가 한·미, 미·일 관계보다 구조적이고 역학적으로 훨씬 더 취약하고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자국의 미래상에 있어서 관건이라 보고 있으며, 미국은 결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중국에 넘길 생각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또는 재균형 정책은 미국의 이러한 의도를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중국은 이른바 “반접근/지역거부”(Anti-Access/Area-Denial: A2/AD) 전략에 근거하여 미국의 대 아시아 개입을 최대한 차단하거나 거부하려 들고 있다(김성걸 2012, 42-67).   그런데 미중 양국의 갈등과 협력은 단순히 양자관계의 범위를 넘어서 지역적, 세계적으로도 매우 커다란 파급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미국과 중국 모두 상대방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그 중요성과 어려움이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미·중관계에는 사회구조와 성격 차원에서 다양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이슈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단선적 전략으로는 양국관계를 풀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그만큼 서로를 상대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냉전시대 미국의 대 소련전략은 안보문제에 그 중점이 있었던 반면 오늘날 중국에 대한 전략은 군사•안보와 경제이슈는 물론이고 인권과 민주화 등 훨씬 더 다양한 사안들에 대한 고려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결국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양자관계는 갈등과 경쟁의 구조를 바탕으로 현실적 필요에 의한 협력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는 갈등과 협력의 혼재로 특징지어진다고 하겠다. 미국과 중국은 국제질서에 대한 ‘동상이몽’의 전략적 고려가 작용하고 있으며,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주도권 경쟁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문제는 향후 21세기의 미·중관계가 경쟁보다 협력의 방향으로 이동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키신저(Henry Kissinger)도 지적한 바와 같이 미·중 양국이 통상적인 갈등과 협력 이슈에 대해 상호 대화하고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비전을 공유함과 동시에 지역 갈등이나 긴장 해소를 위해 양자 수준을 넘어서는 위기관리 차원의 포괄적 협의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Kissinger 2011, 526-530). 그럴 때 비로소 미·중관계는 갈등과 대결의 구조를 벗어나 새로운 공동진화(co-evolution)의 구조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계속)

박병광 2014-03-26조회 : 1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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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8] 미·중시대 북한식 국제정치 독해: 자주외교 불패 신화의 유산

국가안보전략연구소(INSS) 책임연구위원. 북한과 한반도 관련 정책 개발에 대한 자문을 맡고 있다. 통일부 정책보좌관(2006),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행정관(2003-2006년)을 역임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외교사, 한국외교정책, 동아시아 국제관계 등이다. 주요 논저로는《유교적 사유와 근대국제정치의 상상력》, “한국의 근대국가 개념 형성사 연구”, “환재 박규수와 시무의 국제정치학”, “김정은 시대의 북한과 대북정책 아키텍처”, “North Korean Nuclear Threat and South Korean Identity Politics in 2006,” “Rebuilding the in-ter-Korean Relations,” “Understanding the Dokdo Issue,” “2013년 북한의 전략적 선택과 동아시아 국제정치,” “청대 한국의 유교적 대중전략과 현재적 시사점” 등이 있다.       I. 북한식 판 읽기와 전략적 선택   역대 북한 정권의 노선은 국내정치 및 국제정치적 수요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주체노선’은 내부적으로는 1950년대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연안파, 소련파 등 정적을 제거하고 김일성의 권력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외부적으로는 냉전과 1950~60년대 중소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북한의 외교 자원을 극대화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김정일의 ‘선군노선’은 19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을 강행해야 할 정도로 취약했던 북한 체제의 위기 속에서 가장 의존할만한 세력인 군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동시에 선군노선은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한·소수교, 한·중수교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치 환경이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핵을 체제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내포한 것이었다.   김정은 정권이 내세운 ‘병진노선’ 역시 2012년 이후 북한 체제가 직면한 국내외적 도전들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선군노선이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한계를 직시하여 다양한 개혁조치로 경제의 활력을 제고하는 동시에 기성 세력과 신흥 세력의 갈등을 미연에 봉합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말하자면 ‘병진노선’은 상호모순적 수요를 봉합하기 위한 솔루션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등 대국들을 대상으로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렇듯 역대 북한 정권의 노선은 대개 북한 체제가 당면한 국내정치 및 국제정치적 상황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본 연구는 그 중에서 주로 국제정치적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즉, 국제정치에 대한 북한식 판 읽기와 대응이 얼마나 정확하고 성공적이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이른바 미·중시대의 단초가 형성되기 시작한 김정일 정권 말기부터 오늘날 김정은 정권까지, 대체적으로 2009년부터 2013년까지를 다룬다.   결론부터 말해서 김일성의 주체노선과 김정일의 선군노선이 일정하게 국제정치 흐름에 조응하는 판단을 토대로 적어도 북한 체제의 생존을 확보하였다고 한다면, 김정은이 지난 2년여 동안 보여준 모습은 그다지 스마트해 보이지는 않는다. 주체노선과 선군노선이 나름대로 장기간 숙성된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병진노선은 매우 급조되고 설익은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병진노선의 대외적 유용성은 한국, 미국, 중국 등 주변국들의 동시 거부로 처음부터 실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김정은 정권은 주변국들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2012년 12월 장거리 로켓 발사와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을 강행하여 주변국 신정부들의 대응 의지를 시험하였으며,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뒤따르자 급격히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며 한반도 전략구도의 현상변경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2013년 들어 수개월간 지속되었던 북한의 소위 “판가리” 시도는 전략적 실패로 판가름 났으며, 미·중 중심의 대국정치에 대한 북한의 무모한 도전은 굴욕적인 특사 외교와 대화 구애로 귀결되었다.   본 논문은 지난 수년간 북한이 보여준 북한식 판 읽기와 대응 과정을 복기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국제정치적 현실에 조응하고 있는지 평가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 시기가 이른바 미중시대의 도래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북한의 미중 읽기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또한 미·중시대의 도래라는 시기적 변수를 고려하고 김정은 정권과의 비교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김정일 정권 말기부터 검토하기로 한다.   II. 김정일의 마지막 3년: 저무는 선군시대와 생존 외교   김정일은 2008년 하반기부터 지병인 뇌경색으로 인해 건강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본인의 살아생전 업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안정적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을 서두르게 된다. 김정일은 선군시대의 최대 업적을 우주개발과 핵보유국 지위 획득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우선 이를 공고화하는데 주력했다. 소위 2012년 김일성 탄생 1백주기, 강성대국 원년의 해를 맞이하기 이전에 자신의 치적을 충분히 쌓아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북한이 2009년을 “혁명적 대고조”의 해로 명명하고 제2차 핵실험을 강행한 주된 배경이었다.   2008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소위 불량국가들과의 직접 대화 의사를 표명한 오바마(Barak Obama) 대통령이 당선됨에 따라 북핵문제 협상이 가속화되리라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다. 비록 6자회담이 검증 문제로 2008년 12월 중단되기는 했지만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 협상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과정이 끝나기도 전에 2009년 4월 장거리로켓을 발사하고 5월에는 2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는 북한의 국내정치적 수요가 그만큼 절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둘러 선군노선의 업적을 마무리하고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와의 협상은 2차 핵실험 이후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추진해도 늦지 않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기에 접어든 김정일 정권의 이러한 행보가 국제정치적 상황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굉장히 민감한 반응이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김정은 정권 말기가 이른바 미·중시대의 단초가 형성되는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다. 2008년 미국의 리만브라더스 사태 이후부터는 세계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주요 20개국(Group of Twenty: G20)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등 신흥국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그 중에서도 국력이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역할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9년 들어서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등에 의해 주요 2개국(Group of Two: G2) 회의가 주창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개최된 미중 정상회담은 미중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미·중시대는 양국 간의 협력뿐만 아니라 경쟁도 동시에 격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2009년 11월 정상회담 이후에는 오히려 갈등과 견제의 패턴이 부각되었다. 미중 양국은 2010년 이후 대만 무기판매, 달라이 라마 면담, 위안화 절상, 구글 문제 등 이른바 4대 현안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마찰을 노정했다.   이에 김정일은 중국의 국력 급신장과 더불어 미·중시대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지했으며 중국에 베팅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된다.  즉, 김정일은 2010년 이후 본격화된 미·중 간 갈등과 견제를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그 중에서도 2010년 5월 김정일의 중국 방문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이후의 대북제재와 외교적 고립 탈피와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지지 확보로 요약된다. 중국은 실제로 천안함 사건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한미가 서해상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미중 간 경쟁과 견제 관계 속에서 중국에 편승하여 실익을 도모하고자 했던 김정일의 계산이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김정일은 5월 5일 후진타오(胡锦涛)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국력”을 거론하며 중국측을 치켜세웠으며 비핵화 공약과 6자회담 재개 의지를 표명하여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조선중앙통신> 2013/05/08). 2013년 8월 김정일이 4개월 만에 다시 중국을 방문한 것도 5월 방문과 동일한 맥락에서였다. 특히 북한은 동년 가을 제3차 노동당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은 후계구도를 공식화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얻는데 주력하였다. 결국 후진타오 주석은 8월 27일 환영 연회 연설을 통해 김정일이 4개월도 못 되는 사이에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조선노동당대표자회가 원만한 성과를 거둘 것을 축원”함으로써 김정은 후계구도를 사실상 승인했다(<조선중앙통신> 2013/08/30). 미·중 간 갈등이 우세한 정세 속에서 강화된 북한과 중국의 전략적 동맹은 2010년 11월 연평도 사태에서도 재확인되었다. 중국은 북한의 선제 도발이 명백하고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태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으로 관련국들의 긴장고조 행위 자제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촉구하는 등 사실상 북한을 외교적으로 지원했다. 2011 년 1월의 미·중 정상회담은 미·중관계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할만 했다. 모두 6개 부문 41개항으로 구성된 방대한 공동성명이 상징하듯 양국은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합의를 도출했다. 2009년 11월의 공동성명은 미·중관계의 발전을 위한 “전략적 신뢰”를 강조하는데 머물렀으나 2011년 1월의 정상회담은 미·중관계를 “협력적 동반자관계”로 명확히 정의했다. 또한 양국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 역사문화적 배경, 경제발전 수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협력적 관계의 ‘사례’를 형성했다고 평가하고 새로운 유형의 강대국 관계를 지향해 나갈 것임을 시사했다(The White House January/19/2011). 말하자면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 이후 미·중관계의 새로운 패턴이 시작되었으며 이른바 “신형대국관계”의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형대국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미·중 간의 협력적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이는 한반도 문제가 인권, 군사, 경제 등 여타의 핵심 이슈에 비해 미·중 간 합의 도출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1년 1월의 정상회담에서도 양국 정상은 이례적으로 한반도 문제 논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남북대화와 6자회담 재개 등 한반도 문제에서의 합의를 정상회담의 핵심적 성과로 소개했다. 북한은 2011년 1월의 미·중 정상회담을 예의주시했으며 그 결과를 비교적 신속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했다(<조선중앙통신> 2011/01/22). 당시 북한은 미·중관계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협력 경향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중시대의 도래에 대응한 김정일의 선택은 북중관계 강화였다. 미중관계는 경쟁적 요소와 협력적 요소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어떤 경우이건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만이 북한 체제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김정일이 2010년 5월과 8월에 이어 2011년 5월까지, 일년 사이에 세 번째 중국을 방문했던 주된 배경이었다. 그의 마지막 중국 방문은 2010년 9월 당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체제를 공식화한 이후의 방문으로서 향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을 위해 북·중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행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는 고리는 비핵화 공약, 그리고 경제중시 노선으로의 전환이었다.   김정일 체제하 북한은 2006년, 2009년 2차례에 걸친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비핵화 공약을 유지했다. 주지하듯이 김정일의 선군노선에서 핵심은 핵선군이었으며 반복적 기만 전술과 합의 파기로 진정성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비핵화 공약 자체를 폐기한 적은 없다. 6자회담을 통한 비핵화 공약은 중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으며 2010년 5월, 8월과 2011년 5월 정상회담에서의 핵심적 합의 사항이었다. 특히 2011년 5월 정상회담에서는 “전조선반도의 비핵화 목표를 견지하고 6자회담의 재개 등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며 장애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전반적 이익에 부합된다고 인정하면서 이를 위해 의사소통과 조율을 잘해 나가자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고 공언하는 등 매우 강한 톤으로 비핵화 공약을 재확인하였다(<조선중앙통신> 2011/05/26). 또한 김정일의 육성 신년사를 대신하는 신년공동사설은 2차 핵실험이 있었던 2009년을 포함하여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까지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김정일 생전 마지막 육성 기록인 2011년 10월 13일 이타르-타스 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위대한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우리 공화국 정부의 시종일관한 입장입니다”고 밝히고 있다(<조선중앙통신> 2011/10/19). 비핵화 공약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김정은 체제가 등장한 2012년 신년공동사설에서부터였다. 이어 2012년 4월에는 사회주의헌법 서문에 핵보유국을 명기하게 된다....(계속)

김성배 2014-03-26조회 : 1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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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5] 1972년 중국의 대미 데탕트 배경과 전략

동덕여자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중국 북경대학교 국제관계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과 현대중국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동아시아연구원 중국연구 패널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 대외관계, 중국 소수민족, 중국의 민족주의 등이다. 최근 연구로는"시진핑체제 외교정책의 변화와 지속성,"  "중국 민족주의 고조의 대외관계 및 한중관계 영향," “China’s policy and influence on the North Korea nuclear issue: denuclearization and/or stabil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중국 미래를 말하다》(편저), 《중국의 영토분쟁》(공저), 등이 있다.                 I. 서 론   2012년 2월 시진핑(習近平) 당시 중국 부주석은 미국을 방문하여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 라는 중미관계의 새로운 구상을 제시했다. 1972년 2월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통해 미중 데탕트의 새로운 역사를 창출한지 40년이 되는 시점에 공교롭게도 중국이 선제적으로 중미간 ‘신형 데탕트’를 제안한 것이다. 시진핑은 방미중에 40년 전 닉슨의 중국 방문이 수십 년간 양국을 단절시킨 두꺼운 얼음벽을 깨트린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미중이 21세기 두 번째 10년을 맞이하는 새로운 시기에 ‘신형대국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하자는 화두를 제시한 것이다.   시진핑이 구상하고 있는 신형대국관계의 속내는 “중국은 미국이 아태지역의 평화, 안정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환영하며, 동시에 미국이 중국과 역내 국가들의 이익과 관심을 분명하게 존중해주기를 희망한다”는 시진핑의 언급에서 엿볼 수 있다(<中国日报网> 2012/02/16). 요컨대 아태지역에서 상호 핵심이익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존•공영하자는 것이다.   40년 전 중국은 미소 양 초강대국으로부터 협공의 위협에서 탈출하고자 미국의 데탕트 제안을 수용하는 전략적 도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국은 자국의 부상 일정을 완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특히 반(反)중국 연대 형성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미국에게 새로운 데탕트를 제안하고 있다.   40년 전 중국이 두려움과 의구심 속에서 미국이 내민 데탕트 손길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역으로 미국과 국제사회가 중국이 내민 신형대국관계라는 새로운 데탕트 제안에 의구심을 가지고 주저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 글은 2012년 중국이 제안한 신형대국관계가 어떠한 의도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중국의 부상과 새로운 데탕트 제안이 국제질서와 세력관계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할지, 그리고 미중의 신형대국관계 논의가 한반도에는 어떠한 함의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현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40년 전 역사적 사건을 복기하려는 것이다. 1972년 전후의 역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재검토가 현재의 문제에 분명한 해답을 주지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적 맥락에서 중국의 의도와 전략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 역시 1972년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고자 하는 만큼, 2012년 중국이 제안한 신형대국관계가 40년 전과 비교하여 어떠한 변화와 연속성이 있는지 발견하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 글은 1972년 상해공동성명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 중국의 렌즈에 초점을 맞춰 복기하고자 한다. 우선 중국이 어떠한 국내외적인 배경과 인식에서 미국의 데탕트 요구에 응답하게 되었는지를 재검토한다. 둘째, 보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중국이 1969년부터 1972년 약 2년여의 기간 동안 미국과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내부적 논의와 전략적 판단을 가지고 협상을 진행했는지를 검토한다. 끝으로, 이러한 복기를 바탕으로 중국에게 1972년의 역사적 경험이 현재에 어떤 영향과 의미를 가지는지 탐색한다. II. 냉전시기 중국 ‘반패권주의’ 외교의 의미   냉전시기 중국외교는 이데올로기와 안보가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은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한 직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양극체제가 고착화되는 국제환경에 직면하여, 외교정책을 결정할 때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주의주의(主意主義)를 통해 혁명의 열기를 국가통치의 주요 근간으로 견지해왔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입장에서 1960년대까지 대외관계에서 세계 공산주의 혁명과 이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태생적 대외정책 목표의 하나였다. 따라서 중국은 건국과 함께 소련과 동맹을 맺어 ‘소련 일변도’(對蘇一邊倒) 외교를 전개하고, 제3세계 국가 내 공산당 또는 친공세력의 민족해방운동과 혁명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냉전시기 중국이 세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실제 대외정책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국가 안보였다.  이는 냉전시기 중국 외교전략과 외교이론의 변화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냉전기 중국 외교전략의 변화에 따른 시기 구분이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매 10년 단위로 변화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외교이론’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는 양대진영론에 따른 소련일변도외교, 1960년대에는 세계혁명론에 근거한 반제반수(反帝反修)의 반미반소전략(反美反蘇戰略), 그리고 1970년대 3개 세계론을 기치로 한 반소 국제통일전선전략으로 변화가 진행되었다.    중국은 안보에 최대의 위협이 누구인가 하는 판단을 바탕으로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우적(友敵)을 명확히 구분하는 ‘우적개념’(友敵槪念)의 변화에 따라 대외정책을 결정하였다. 냉전시기 중국이 대외 관계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주된 이데올로기였던 ‘반패권주의’ 역시 주변 안보환경에 대한 중국지도부 인식의 표출이었다. 즉 반패권주의의 주 대상은 수사적인 의미나 내용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해도 실질적인 내용상 항상 중국의 주된 위협세력이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국 직후인 1950년대에 마오는 혁명시기부터 누적된 소련과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반미(反美)•반패권주의를 주창하고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하며 전폭적인 소련일변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당시 최대의 위협으로 인식했던 미국으로부터 제기되는 안보 위협을 상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오의 입장에서 미국은 국공내전 중에 국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내전종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대만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고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을 펼친 주적(主敵)이었다. 심지어 한국전을 통해 직접 교전을 벌이기도 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 소련과 불거진 갈등이 국경분쟁으로까지 악화되자 미국에 더하여 소련에 대한 위협인식까지 고조되었다. 이로인해 대외적으로 세계혁명론과 반미 제국주의, 반소 수정주의 기치를 내세우며 미국•소련 양 초강대국 모두를 패권주의로 규정하고 이 들 양 강대국에 대항하며 독자노선을 견지하는 외교전략을 전개했다. 세계혁명론 자체는 이데올로기 성향이 강한 담론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대소련 관계악화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관계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불가피하게 ‘두 개의 전선’(兩條線)이 형성되어 협공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수사적 성격이 강하다(张小明 1997, 7-10).   중국은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의 극심한 혼돈기를 거치며 1970년대에 외교적 고립과 위협에서 탈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3개 세계론’을 주창하며 미소 양 패권국에 대항할 수 있는 견제세력으로 제3세계국가들과 반패권 통일전선을 기치로 관계발전을 모색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1969년 소련과 국경충돌을 경험한 중국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위기의식이 최고조에 이르며 소련을 최대의 위협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중국은 소련의 위협을 상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미국과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즉 당시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있던 미국보다는 소련이 더욱 현실적 위협이라는 인식하에 미국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이른바 반소패권주의의 ‘연미항소’(聯美抗蘇) 전략을 전개해 갔다.   이와 같이 중국은 냉전기간 사실상 안보적 고려에 의해 미소 양극체제와 이른바 미-중-소 전략적 삼각관계라는 초강대국 관계에 깊숙이 개입되어 세계적 강대국이 아니면서도 마치 세계적 강대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냉전시기 중국 대외정책은 미소 양 초강대국 중에서 어느 쪽이 중국에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하는 판단을 기준으로 주적을 설정하고 이러한 주적으로부터 제기된 위협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외교는 표면적으로는 강대국 관계에 깊숙이 개입되어 마치 강대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상 내용적으로는 약소국 외교의 전형인 안보를 위한 반응적•수세적 양상을 띠는 기형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던 냉전시기 전반에 걸쳐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반제국주의’, ‘반수정주의’, ‘반패권주의’ 등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대외전략 기치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본질적으로는 마오 등 주요 지도자들의 안보위협에 대한 인식이 대외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로 작동했다. 당시 마오의 안보위협 인식은 실체보다는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었으며,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2만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장 국경을 지닌 취약한 물리적 안보 환경, 소위 ‘100년 치욕’ 로 대변되는 근대 피침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내부 체제 및 국력의 취약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50년대 결과적으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던 소련과 동맹조약 체결을 통한 일변도 외교를 선택하여 국가발전과 안보 이익 확보를 추구했고, 1960년대 외교적 고립을 경험한 이후 1970년대 초 냉전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주적이었던 미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안보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계속)

이동률 2014-03-26조회 : 1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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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7] 북한 1972 진실 찾기: 7.4 공동성명의 추진과 폐기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위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한국 핵 문제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국제문제연구소 초청연구원,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초청연구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한국평화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하영선 칼럼”을 7년 동안 연재하였으며, 한국외교사 연구 모임, 전파 연구 모임, 정보세계정치 연구회, 동아시아연구원 모임 등을 이끌어 왔다. 저서 및 편저로는 《2020 한국외교 10대 과제: 복합과 공진》,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2》, 《복합세계정치론: 전략과 원리 그리고 새로운 질서》, 《하영선 국제정치 칼럼 1991-2011》, 《역사 속의 젊은 그들》, 《위기와 복합: 경제위기 이후 세계질서》, 《12시간의 통일 이야기》, 《네트워크 세계정치》, 《북한 2032: 선진화로 가는 공진전략》, 《21세기 신동맹: 냉전에서 복합으로》, 《근대 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동아시아공동체 : 신화와 현실》, 《변환의 세계정치》, 《네트워크 지식국가》, 《21세기 한국외교 대전략: 그물망국가 건설》, 《21세기 평화학》, 《국제화와 세계화》, 《한반도의 핵무기와 세계질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I. 머리말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악몽 같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고 한국전쟁이라는 세계적 규모의 비극을 맞이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질서는 본격적으로 지구 차원에서 군사 대결의 모습으로 건축되기 시작했다. 미소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새 건축물은 단단하게 지어져서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질서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축의 변화를 겪게 된다. 지구 차원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긴장관계의 완화라는 데탕트를 시도하고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역사적 관계개선에 접어들고 중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를 이루게 된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휴전상태에 머물러 있던 한국과 북한도 1971년 8월부터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서 다음 해인 1972년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에 기반을 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미니 데탕트는 오래 가지 못했다. 공동성명 실천을 논의하기 위해 10월에 열린 제1차 남북 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부터 커다란 시각 차를 보이기 시작하여 결국 세 차례의 공동위원장회의와 조절 위원회를 통해 상호 이견을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1973년 8월 28일 북한은 사실상 <7.4 남북공동성명>의 폐기를 선언했다. 한반도 미니 데탕트의 추진은 2년 만에 한 여름 밤의 꿈같이 깨졌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을 뒤늦게나마 21세기에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미니 데탕트의 핵심이었던 <7.4 남북공동성명>이 어떻게 추진되고 또 폐기되었는가를 제대로 복원해 보려는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연구는 <7.4 남북공동성명>의 추진과 폐기를 복원하기 위해서 현대 팝 아트의 대가인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고향인 영국 동요크셔의 월드게이트(Woldgate) 숲길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 쓴 방법을 빌려 왔다(Hockney 2010). 호크니는 2010년 11월 자동차 앞에 부착한 아홉 대의 비디오 카메라로 각각 각도를 달리하여 고향 숲길을 한 화면으로 구성해서 연속 촬영한 후 최종적으로 맑은 날과 눈 내린 날의 두 화면을 대비시키는 시도를 했다. “1972 한반도 2014”의 공동연구도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소련 그리고 일본이라는 여섯 대 카메라를 사용하여 1972년 한반도 미니데탕트의 좌절과 2014년의 상황을 대비적으로 촬영하여 오늘날의 한반도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려는 것이다. 이 글은 여섯 대의 카메라 중에 북한 카메라의 시야에서 1970년대 초 한반도 미니데탕트의 촬영을 시도한다. 다른 카메라에 비해서 찍을 수 있는 피사체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폐쇄적인 북한 정치권력이 남겨 놓은 최소한의 자료들을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시야 융합(fusion of visions/Horizontverschmelzung)을 원용한 해석학적 렌즈로 촬영하여 1972년 북한의 진실 찾기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Gadamer 1989, 298-306; 578-579). 그 첫 단계로 1971-1973년 김정일을 주축으로 한 북한 정치권력의 시야 형성에 핵심적 영향을 미친 1964년 이래 3대 혁명역량의 과거시야를 요약하고, 둘째, 1970년대 초반 북한이 당면하고 있던 3대 혁명역량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을 선택했으며, 셋째, 북한이 3대 혁명역량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을 폐기했는가를 해석하게 될 것이다.   II. 3대혁명역량 시야의 영향   1972년 7월 4일 아침 10시. 서울과 평양은 지난 5월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그리고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한 것을 각각 동시에 밝히며,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천명하고, 긴장상태를 완화하며 다방면의 교류를 실시하고,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는 내용의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국가로서 양국 핵심 권력의 만남은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북한이 제의한 통일의 3대 원칙에 한국이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우선 북한이 <7.4 남북공동성명>을 추진하게 된 배경적 진실을 찾기 위해서 1970년대 초 북한 시야가 1960년대 3대혁명역량 시야의 영향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추적하기로 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적대 관계는 쉽사리 개선되기 어려웠다. 통일을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남북한의 공통된 인식은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64년 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8차 총회에서 “조국통일의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혁명역량을 백방으로 강화하자”라는 연설에서 처음으로 3대 혁명역량 강화로 조국통일을 실현하자고 선언하고(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64) 구체적 방법을 1965년 4월14일 인도네시아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조선 혁명에 대하여”라는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김일성 1965/04/14). 우리 조국의 통일,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는 결국 3대력량의 준비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잘하여 우리의 혁명기지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더욱 강화하는 것이며, 둘째로, 남조선인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튼튼히 묶어 세움 으로써 남조선의 혁명력량을 강화하는 것이며, 셋째로, 조선인민과 국제혁명력량과의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다.   북한의 전쟁통일이라는 시야가 1960년대의 새로운 상황을 맞이해서 혁명통일이라는 시야로 변모 하게 된 것이다. 김일성은 이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3대 혁명역량 강화를 기반으로 한 통일 방안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민족적 량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정권에 들어앉아 미군 철거를 주장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하며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이라면 그들과 언제 어디서나 평화적 조국통일문제를 가지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루차 표명하였습니다. …… 우리는 남조선에서 미제 침략군대를 몰아낸 다음 남북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고 서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데 대한 협정을 맺으며 남북 사이의 경제 문화 교류와 인사왕래를 비롯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며 조선인민의 자주적 의사에 따라 평화적 방법에 따라 조국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이 마련될 때 자유로운 남북조선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주주의 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남조선 당국에 여러 번 제의하였습니다. …… 남조선에 미제 침략군대와 현 괴뢰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나라의 평화통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조국의 통일을 가로 막는 기본장애물인 미제침략자들을 남조선에서 몰아내고 그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며 현 군사파쑈 독재를 뒤짚어 엎고 혁명의 승리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남조선에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 서면 공화국 북반부의 사회주의 력량과 남조선의 애국적 민주력량의 단합된 힘에 의하여 우리 조국의 통일은 순조롭게 실현될 것입니다.   북한의 1970년대 초 통일방안은 첫 단계로, “미제침략군대와 현 괴뢰들”을 몰아낸 다음, 둘째 단계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정부와 군비축소, 무력불사용협정, 다양한 교류협력 조치를 취하고 자주 의사에 따라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을 마련하며, 마지막 단계로 한국에 인민정권이 수립되면 북한의 사회주의 역량과 한국의 애국적 민주역량의 단합된 힘으로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허담 외무상은 1971년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제4기 5차 회의에서 “현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통일을 촉진 시킬데 대하여”라는 보고에서 다음과 같은 ‘통일 8개항’을 제시했다(허담 1971/04/12). 첫째,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을 철거시키는 것입니다. 둘째, 미제침략군이 물러간 다음 남북 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는 것입니다. 셋째, 남조선괴뢰정권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매국적이며 예속적인 조약들과 협정들을 폐기하며 무효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넷째, 자주적으로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적인 중앙정부를 세우는 것입니다. 다섯째,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위하여 정치활동을 벌릴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며 남조선에서 체포, 투옥된 모든 정치범들과 애국자들을 무조건 석방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완전한 통일에 앞서 필요하다면 현재와 같은 남북의 각이한 사회제도를 그냥 두고서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조선연방제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남북간의 통상과 경제적 협조, 과학, 문화, 예술, 체육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호상교류와 협조를 실현하며 남북 간의 편지거래와 인사래왕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이상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각 정당, 사회단체 들과 전체 인민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써 남북조선 정치협상회의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1971년 6월 10일 평양을 방문한 루마니아 당정대표단에게 남북한의 분쟁 발생은 반드시 소련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미국을 개입시킬 것이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아시아 분쟁은 지구 규모의 전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유관국 모두가 전쟁을 조심스러워 하고 있으므로 북한은 전쟁적 방도로 통일을 추진하는 대신 혁명적 방법의 ‘통일 8개항’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박정희가 무너지면 우리는 우리나라의 통일을 이를 원하는 누구와도 협의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남조선 상황의 전개는 남조선 민주세력과 인민의 투쟁에 달려 있다.”라고 강조했다(Woodrow Wilson Digital Archive 1971-1972). III. 7.4 남북공동성명의 추진   김일성 수상은 빠르게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남조선혁명의 실현과 조국 통일을 위한 평화공세”를 취하고자 1971년 8월 6일 연설에서 한국의 집권당인 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단체들과 협의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국제혁명역량의 강화를 위한 평화공세로 “아시아인끼리 그리고 한국인끼리 싸우도록 하려는 닉슨 독트린을 좌절시키고, 한국군 근대화를 지원하고 한반도 분단을 지속하고 한국을 군사기지화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맞서고, 일본의 한국 침투를 좌절시키고, 한미일의 협력을 막을 것”이라고 설명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h). 북한은 평화공세의 목적을 국제혁명역량의 강화와 더불어 남한의 혁명역량강화에 두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평화공세의 또 하나의 목적은 남한 파시스트 억압의 제거다. 남한괴뢰정부는 북한의 남침계획을 핑계로 남조선인민들에게 파시스트 억압을 강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북한은 남침 의도가 전혀 없다. 이것을 남조선 인민들에게 증명해야 한다. 동시에 남조선 정부에게 인민과 민주세력들을 억압하려는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 남한 혁명역량은 가능한 한 빨리 강화돼야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한 반동세력의 억압 수단과 반공 신경질이 금지돼야 한다. 북한은 평화공세로 남북의 문호를 개방해서 남조선인민들에게 북한사상의 영향을 미쳐서 남한의 민주화를 달성하려는 것이다(Woodrow Wilson Digital Archive 1972a).   남북한은 1971년 9월 20일 남북적십자 1차 예비회담을 개성에서 개최하고 회담을 계속했으나 쉽사리 의제선정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난항을 거듭했다. 11월 20일 남북대화의 실무를 맡고 있던 한국의 정홍진과 북한의 김덕현이 별도로 비공개 만남을 합의하고 판문점에서 시작해서 평양과 서울을 거치는 어려운 협의를 통해 72년 3월말 최종적으로 이후락과 김영주의 남북교환방문을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이후락 정보부장은 1972년 5월 2일 역사적 평양방문을 하게 된다. 이후락 부장은 김영주와 두 번의 회의를 했고 5월 4일 0시 15분부터 1시 30분까지 평양 만수대 김일성 관저에서 김일성 수상을 만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이후락 부장이 먼저 자주적으로 통일을 해야 하는 것이 박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한 다음에 김일성 수상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 통일 3대원칙”을 반복해서 강조했고 이후락 부장은 “세가지 원칙을 통일의 기둥으로 삼고 통일은 꼭 이룩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박대통령의 생각도 동일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이후락 부장은 4일 오후 1시에서 2시10분까지 다시 김일성 수상을 만났다. 김일성 수상은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이 외세배격하고 외세에 의해서 통일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러한 우려가 없어졌고 또 남조선은 우리가 남침한다고 우려했는데 내가 전쟁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런 우려 없어졌고 남은 문제는 민족단결을 위해서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다음에 다시 한 번 “이제 두 가지 오해 풀었습니다. 첫째, 미국, 일본과 결탁하여 전쟁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 남침, 적화 통일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 오해 풀렸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단결문제인데 이것은 더 연구하고 토의하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김일성 1992-2012b; 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b; 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c).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은 5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여 이후락 부장과 가진 1차 회의에서 지난 5월초 이후락-김일성 회의 결과를 다시 한 번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d). 우리는 남조선에서 집권하고 있는 분들이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여 살아가려 한다고 생각했으며 남에서는 우리가 남침을 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남북이 서로 오해하고 불신한 근본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번의 평양회의에서 그 쪽에서는 외세에 의존할 생각이 없고 절대로 대미 대일 관계에서 자주성을 잃지 않겠다는 것을 말씀하였고 우리는 애당초 남침할 의도가 없고, 우리 제도를 남조선에 강요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언 하였습니다. …… 조국통일의 근본적 입장에 대해서 원칙적 합의를 본 조건에서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이미 합의된 원칙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구제적인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풀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성철 부수상은 이후락 부장과의 두 차례에 걸친 회의에서 구체적인 문제들로서 조절위원회의 설치, 기타위원회, 합의내용의 공개문제 등을 논의했다. 또한 그는 5월 31일 저녁 7시에 40분간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여 “조국통일 3대원칙에 평양회의에서 합의했으며, 오해와 불신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였고, 서로 신임을 두터히 하고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하자”는 준비된 원고를 낭독하였으며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 3개 원칙의 합의를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협의기구를 만드는 것은 찬성이나 추진방법은 현재의 상호불신을 고려하면 단계적으로 해야 하며, 합의내용의 공개는 반대하였다 (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i). 남북한 실무 팀은 6월 21일부터 30일까지 남북공동성명 합의서를 준비하여 7월 4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으로 발표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e). 북한 외무성 부상 이만석은 7월 17일 사회주의 우방국들에게 <7.4 남북공동성명>의 추진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공동성명의 내용을 요약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f). 그리고 성명의 핵심인 통일 3대 원칙은 김일성 수상이 이후락을 만났을 때 처음 제안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완벽하게 동의했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정부의 패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만석 부상은 <7.4 남북공동성명>의 영향을 남한 혁명역량 강화와 국제 혁명역량의 측면에서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선 남한의 혁명역량강화를 바람직하게 평가했다. “남조선 인민들은 만장일치로 공동성명을 대사건이라는 것에 동의했고 기쁨과 열정으로 이를 지원”했으며 “남한의 야당과 주요인사들은 정부가 제정당의 참여 없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재개한 것에 항의”했고 “야당들은 반공법과 비상조치들의 철폐를 요구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남한지도자들이 눈에 띄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그가 남북한의 사회단체, 개인, 체육인들의 교류 방문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것과 더불어 이후락 부장이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대화를 확대하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고 새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두고 한 얘긴데, 김종필 총리는 이러한 논의에 관해 국회질의 응답에서 반공법과 비상법들을 바꿀 필요가 없고, 북한을 아무나 여행할 수 없으며, 북한방송 청취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성명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국제혁명역량 강화의 평가에 대해 이만석은 “미국은 수사적으로는 성명을 환영했으나 다른 한편 으로는 괴뢰정부를 지원하고 돕기를 원하고 있다.”며 조금 더 신중했다. 7월 5일 미 국무부는 공동 성명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근대화는 계속된다고 선언했고, 미군 규모는 줄지 않을 것이며, 통일은 유엔 감독하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성명의 영향을 조심스럽게 분석한 북한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남조선 지도자들이 모두 미래 협상에 참여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남한을 미국과 일본에서 떼어 내고, 그들로부터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하나 북한의 초점은 미국과 일본이 더 이상 한반도 내부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적극적 조치로 남북한 간에 현존하는 장벽을 제거하고 폭넓고 포괄적인 연대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만석 부상은 최종적으로 사회주의 우방들이 남한이 북한과 포괄적 협상을 하도록 만들고 결과적으로 남한을 “국내적 그리고 국제적으로 고립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남한의 추가적 고립화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계속)

하영선 2014-03-26조회 : 13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