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는 국가이익뿐 아니라 국민의 삶과도 직결되는 외교안보 분야의 어젠다 설정과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2004년 6월에 18명의 외교안보 전문가로 국가안보패널(National Security Panel: NSP)을 구성하였다. 이후 국가안보패널은 《21세기 한국외교 대전략: 그물망국가 건설》(2006), 《동아시아 공동체: 신화와 현실》(2008), 《21세기 신동맹: 냉전에서 복합으로》(2010), 《위기와 복합: 경제위기 이후 세계질서》(2011), 《2020 한국외교 10대 과제:n복합과 공진》(2013), 《1972 한반도와 주변 4강 2014》(2015), 《미중의 아태질서 건축경쟁》(2017) 등 일곱 권의 책을 출판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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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연구보고서] 미-중간 해양경쟁과 아태지역 안보질서 전망

초록 본 연구는 미-중 양국의 전략논의와 군사력 증강 양상에 대한 검토를 통해 군사 측면에서 미-중 간 패권경쟁의 현황을 파악하고 경쟁구도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인을 식별하며 이를 바탕으로 향후 전개를 전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미-중간 국가지도자와 정책결정자들이 표방하는 대외전략 및 해양전략 논의는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둘째, 미-중간 군사력 증강과 군사전략의 성격, 특히 아시아태평양 해역에 배치되고 있는 해군력의 증강과 그 운용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셋째, 미-중 양국이 관여하고 있는 양자간 안보협의, 혹은 다자간 해양안보 레짐은 미-중간의 해군력 증강과 분쟁 가능성을 제어할 수 있는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처한 국가들은 어떤 대응을 보이고 있고, 한국은 어떤 외교정책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통해 도출되는 결론에는 미-중관계에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히 존재하며 어느 쪽이 더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느냐는 양국 지도부의 인적 구성, 대전략, 상대의 전략 및 행태에 대한 인식과 해석이 주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양국과 정치, 군사, 경제의 모든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견국으로서 양국이 서로의 전략을 보다 긍정적이고 온건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외교적, 군사적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며 이것이 중견국 외교의 성공 가능성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본문 I. 문제의 제기   미국과 중국 간의 외교 및 군사전략에 관한 기존 연구들은 양국의 전략이 전통적 문화의 차이, 서양과 동양의 문화차이를 반영한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컨대 애런 프리드버그(Aaron Friedberg)는 프랑스 사상가 프랑수아 쥘리앙(Francois Julien)의 관찰을 인용하면서, 서구의 외교 및 군사전략은 목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경향이 강한 데 반해, 상대적으로 동양의 전략은 목표 제시가 모호하며, 상황 중시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Friedberg 2011, 123-124).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도 서양의 전략이 상대편 국왕을 움직일 수 없는 국면까지 몰아붙여 결정적이고 전면적 승리를 추구하는 체스판을 닮았다고 한다면, 중국의 전략은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주변을 장악하고, 상대적 이득을 축적하는 바둑판에 비교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Kissinger 2011, 23-25). 중국 국방대학의 류밍푸(刘明福, Liu Mingfu) 교수도 서구세계의 전략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제시된 것처럼 결정적 지점에서의 공세를 중시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데 반해, 중국의 군사전략은 손자병법에서 강조한 것처럼, 군사적 승리보다는 술책과 외교에 의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을 중시하는 방어적 성격을 갖는다고 지적한다(Liu 2010, 99). 물론 문화와 전통의 요인이 국가의 대외전략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나, 동양과 서양, 중국과 미국의 전략문화 차이를 강조하는 견해는 문화적 결정론의 오류를 가질 수 있다. 기본적으로 국가의 대외전략은 해당 국가가 보유하는 국력자원의 규모, 그리고 그에 따른 국제질서 속에서의 국가적 위상에 의해 보다 깊은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19세기 후반기 독일의 국력자원과 국제적 위상이 증진하면서,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기의 국가전략에서 벗어나 국제질서상의 양지를 추구하는 전략을 공공연하게 표방한 바 있다. 중일전쟁 전후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이탈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추구하면서, 교토학파 등 일련의 지식인들이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국제협조주의에서 벗어나 일본의 세계사적 사명을 모색하고 국제질서상의 지위 상승을 정당화하는 담론들을 제기한 바도 있다(高坂正顯, 西谷啓治, 高山岩男, 鈴木成高 1943 참고).즉 개별국가의 대외전략은 문화적인 요인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국력 지위 변화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질서상 강대국의 지위로 부상하게 된다면, 국가의 대외전략은 보다 적극적으로, 공세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냉전체제가 미국의 승리로 귀결된 이후 미국 주도 하의 일극체제 양상을 보였던 국제질서는 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급속한 국력 부상에 따라 체제 변화의 계기에 직면하고 있다. 2010년을 기점으로 세계 2위의 경제규모로 부상한 중국은 국방예산 측면에서도 매년 10% 이상을 증액하면서, 미국과의 격차를 좁혀 나가고 있다. 이 같은 중국의 경제력 및 군사력 증강의 추세에 비추어 2020년대 중반 이후 미-중간 국력수준의 역전이 전망되기도 한다. 2010년을 전후하여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미국 다음가는 세계 2위의 수준으로 부상하면서, 중국 내에서도 대외전략의 변화를 모색하는 담론이 활발하게 대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신흥 강대국 중국이 기존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수용하고 현상유지적인 성향을 보일 것인가, 아니면 이에 대해 도전하면서 현상변경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의 여부는 국제정치학자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 두 가지 성향이 복합적으로 지적되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 간에는 특히 2010년대 이후 아태지역의 해양질서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고, 이 해역에 투입할 수 있는 군사력 경쟁 양상도 노정되고 있다. 중국은 동중국해의 센가쿠(尖閣諸島, 중국명 댜오위다오, 钓鱼岛)와 남중국해의 파라셀(Paracel), 스프래틀리(Spratley) 군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해양능력 전개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의 군사적 동향을 반접근 지역거부(anti access/area denial) 전략으로 파악하고, 아태지역에 대한 재균형전략(rebalancing)을 표방하면서, 해, 공군력의 60% 이상을 아태지역에 전진배치하여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역내 동맹 및 파트너 국가들을 지원하겠다는 대응을 보이고 있다. 미-중간의 대립구도가 나타나는 가운데, 현실주의 논자들은 신흥 강대국의 국력이 부상할 경우에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스파르타와 아테네간의 전쟁 현상을 두고 관찰한 것처럼, 기존 강대국과의 무력충돌을 회피할 수 없다는 소위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론을 적용하여 미-중간 무력충돌의 불가피성을 제기한다(Allison 2015; Rosecrance & Miller 2015). 이에 대해 다른 논자들은 미-중간 높은 수준의 협력관계, 공진(co-evolution)의 필요성을 역설한다(Kissinger 2011; Liu Yang 2015). 과연 21세기에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전개되고 있는 이 같은 미-중간의 전략적 경쟁과 군사력 증강 실태는 향후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계속)         저자   국방대학교 안전보장대학원 교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동경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 교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자문위원, 한일신시대공동연구위원회 연구위원, 외교부 자문위원, 하버드대학교 초빙연구원, 국제정치학회 안보국방분과 위원장, 국방대학교 안전보장대학원 군사전략학과장을 역임했으며 주요연구 분야는 일본정치외교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이다. 저서 및 편저로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도입과 한반도》(2016, 공저), 《비교군사전략론》(2014, 공저), 《해군의 탄생과 근대일본》(2014), 《21세기 국제안보의 도전과 과제》(2011, 공저), 《안전보장의 국제정치학》(2010, 공저), 《제3의 일본》(2008), 《일본정치론》(2007, 공저) 등이 있다.    

박영준 2016-11-30조회 : 10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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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연구보고서] 미중 간 사회과학 지식체계에서의 경쟁

  초록현재까지 미중 관계의 분석은 주로 권력, 안보, 전략, 경제 등 경성권력(hard power) 초점을 두고 연구되었지만 연성권력(soft power) 경쟁 역시 언제나 병행되었다. 동일한 앵글로-색슨 문명권으로 분류되는 영국과 미국 간 권력의 전환기에 있어서도 경성권력만이 아닌 연성권력에서의 경쟁과 갈등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서로 다른 문명 간의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는 미-중 경쟁 구도에서는 연성권력에서의 경쟁과 갈등이 특히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특히 이 글은 이러한 연성권력에서의 미중 간 갈등을 미중 간 사회과학 지식체계에서의 갈등과 경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사회과학 지식체계를 살펴보는 이유는 미중 간 경쟁과 갈등 요인이 크게는 국제질서(international order)에 대한 논의일 것이고 이러한 국제질서를 상상하고 연구하는 학문이 국제정치학(international relations)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정치학은 크게 보면 사회과학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회과학 학문 분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우선, 미중 간 연성권력에서의 경쟁과 갈등을 보기 위한 이론적 분석틀을 제공하며 특히 최근 미중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주로 언급되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인 세력전이이론과 국제관계에 있어 가치관과 이념 등 관념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을 연결한다. 다음으로는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와 전망에서 미중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미중 간 국제정치이론에서의 경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미중 간 경쟁이지만 현재까지는 미국 중심의 주류 국제정치학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에 주목하여 살펴본다. 끝으로 이러한 중국의 도전이 가지는 강점과 한계를 분석하고 이로 인한 지식체계에서의 경쟁 구도가 향후 미중관계에 주는 함의를 분석한다.           I. 서론   21세기 국제정치에 있어 미국과 중국이 가장 중요한 두 행위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론이 없다고 볼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광범위하게 퍼진 미국 쇠퇴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 세계적 영향력은 정치, 경제, 군사 및 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지속되고 있다(Zakaria 2012, 41-78). 하지만 중국의 부상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고, 최근 중국이 아시아와 세계에서 드러내는 외교, 경제 및 군사 영역에서의 도전적이고 단호한 모습은 중국이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과 의지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Schweller and Pu 2011, 41-72). 중국은 이미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 기준으로 2010년 세계 2위 국가인 일본을 따라 잡았으며, 2014년에는 국내총생산 구매력 환산 지수(purchasing power parity: PPP)로 이미 미국을 넘어섰다. 군사적으로 중국은 현재 최소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중요한 경쟁자로 부상하였으며, 2035년에는 전 세계적 경쟁자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Jacques 2009). 그러므로 미국의 주도와 중국의 도전이란 국제질서와 구도는 적어도 21세기 중반까지 지속될 전망이다(Joffe 2009; Freedman 2010). 이런 이유에서 미중관계에 관한 많은 전문서적과 대중서적들이 출판되었고,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들은 군사/전략적 측면이나 경제/금융 등의 소위 경성권력(hard power)에서의 갈등을 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까지 미중 관계의 분석은 주로 권력, 안보, 전략, 경제 등에 초점을 두고 연구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역 이외에도 소위 연성권력(soft power)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의 미중 간 경쟁과 갈등 또한 점차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물론 연성권력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의 강대국 간 경쟁과 갈등은 21세기의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동일한 앵글로-색슨 문명권으로 분류되는 영국과 미국 간 권력의 전환기에 있어서도 경성권력만이 아닌 연성권력에서의 경쟁과 갈등이 있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은 이 시기에 노예제/무역, 민주주의(정치체제), 자유무역 규범을 둘러싼 인식의 차이와 경쟁이 있었다(Lorimer 1976; Prochaska 2012). 미국과 중국 간 관계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과 미국의 관계와 다른 점 중 특징적인 부분은 양국관계가 서로 다른 문명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이고 이런 점에서 양국 간 연성권력에서의 경쟁과 갈등은 더욱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현재 국제정치 시스템은 16세기에 태동되고, 18세기에 완성된 모습을 갖춘 유럽 국제정치질서의 전 세계적 확산으로 인해 형성되었다(Bull and Watson 1985). 이런 이유에서 근대 국제정치의 태동 이후 대부분의 세력전이가 모두 유럽 문명 내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세기 구미열강이 처음으로 중국 및 인도 문명과의 충돌했던 과정을 고려하면, 미중 간 패권 이전은 여전히 매우 이질적 문명 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더 많은 충돌의 요소를 지닐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경우를 볼 때, 중국이 서구 근대국제질서로 편입된 이후, 구미국가와 중국 사이에 규범과 가치관의 교류 및 충돌은 항상 있어 왔다(Gong 1984; Hobson 2004; Suzuki 2009; Kang 2013). 하지만 앞으로 진행될 미중관계에서는 기존에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세계관, 가치, 신념, 정체성 등 다양한 ‘관념의 층위’(level of ideas)에서의 갈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될 전망이다. 그러므로 전환기 미중관계를 보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외교, 안보 그리고 경제의 영역도 당연히 보아야 하지만 그러한 요소만큼 중요성을 갖는 가치관, 규범, 지식, 정보와 문화, 기술, 환경 등 새로운 영역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연성권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최근 유출되어 〈뉴욕타임스〉에 공개된 중국공산당의 내부문건이 있다. 이 문건은 공산당 고위간부들의 행동 지침에 관한 지령으로 서구에서 유입되는 체제 전복 성향의 아이디어를 배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서구적 민주주의, 인권이란 보편적 가치의 추구, 언론의 자유와 시민적 참여,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 그리고 공산당의 과거사에 대한 허무주의적 비판 등이다(Buckley 2013). 이 문건을 보면 연성권력에서의 미중 간 경쟁과 갈등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첫 번째 전선은 우선적으로는 서구적 가치와 관념, 원칙 등의 중국 국내 유입을 막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이외에도 최근 중국의 국가보안법 개정에서도 이러한 점은 드러난다. 중국은 최근의 법 개정을 통해 국가보안법 적용 범위를 사이버공간(cyberspace)뿐만 아니라 문화, 교육 영역까지 넓혀 안보를 적용하고 있다(Wong 2015). 이외에도 중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변호사에 대한 체포와 구금, 비정부기구에 대한 감시와 통제 강화 등을 보아도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다(Yu 2015).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국내에서 서구의 아이디어를 막으려는 시도가 가장 1차적인 것이었다면 이를 넘어서 국외에서 연성권력 간 갈등과 경쟁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우선적으로는 서구의 이념과 원칙, 제도와 방식에 대응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최근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결정을 둘러싼 중국의 외교 전략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중국은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관할권 문제를 지적하였고, 필리핀 정부의 배후에 미국이 있고, 중국은 이 분야에 있어서는 절대로 미국 주도의 게임을 하지 않을 것을 명확히 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이로부터 더 나아가 다른 영역에 있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중국적 가치와 원칙을 알리고 전파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2004년 이후 중국이 전 세계적으로 500여 개의 공자학원을 만들어 중국어와 중국적 가치를 전파하려고 노력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이 이미지 개선을 위해 투자하거나 약속한 돈은 현재까지 1조 4,1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최근 중국은 외무부 내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출신의 팀장을 중심으로 국제법팀을 강화하여 영유권 문제, 부패관련 범죄인 인도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Ng 2015). 또한 중국은 최근 시진핑 주석의 영국 방문과 왕이 외교부장의 캐나다 방문에서도 드러났듯이 자국의 인권 상황에 대한 비판에 대해 적극적 공세로 맞서고 있다. 중국의 가치관과 규범을 만들고 그것을 확산하려는 모습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제시하는 규범은, 핵의 선제 사용 금지(no first use)와 같이 상당 부분 정당성을 지니고 있고, 내정불간섭과 불개입, 주권의 원칙의 철저한 존중과 같이 현재 제3세계 국가들의 주장과 공유되는 부분도 많아 설득력을 갖고 전파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중국은 점차 ‘중국적 특색’(Chinese characteristics)을 지닌 다양한 규범을 개발하고 전파하려고 한다(정재호 2011; Foot 2000). 중국은 이미 중국적 특색을 발견해 적용하려는 시도를 경제, 개발 발전, 민주주의,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 그리고 다양한 학문 분과 등에서 시도하고 있다(Haung 2008; Lampton 2008; Tsai 2007; Yan 2011; Chan et al. 2011). 또한 최근 문화부부장을 임용하면서 중국의 문화권력 및 연성권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인사인 류오슈강 당 선전부부장을 임명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Zhuang 2014). 이런 점에서 볼 때 미국과 중국은 다양한 규범 영역의 갈등을 어느 한 방향으로 해소하기보다는 현존하는 가치와 원칙들의 정당성의 원천을 찾아내고 지지 세력을 모아 강화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연성권력에서의 미중 간 갈등을 미중 간 사회과학 지식체계에서의 갈등과 경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사회과학 지식체계를 살펴보는 이유는 미중 간 경쟁과 갈등 요인이 크게는 국제질서(international order)에 대한 논의일 것이고 이러한 국제질서를 상상하고 연구하는 학문이 국제정치학(international relations)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정치학은 크게 보면 사회과학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회과학 학문 분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장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우선, 미중 간 연성권력에서의 경쟁과 갈등을 보기 위한 이론적 분석틀을 제공한다. 특히 이 장에서는 최근 미중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주로 언급되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인 세력전이이론과 국제관계에 있어 가치관과 이념 등 관념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을 연결한다. 둘째,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와 전망에서 미중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미중 간 국제정치이론에서의 경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미중 간 경쟁이지만 현재까지는 미국 중심의 주류 국제정치학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에 주목하여 살펴본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도전이 가지는 강점과 한계를 분석하고 이로 인한 지식체계에서의 경쟁 구도가 향후 미중관계에 주는 함의를 분석한다....(계속)         저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네소타(Twin Cities)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인트올라프 대학(St.Olaf College) 초빙조교수, 그리피스 대학(Griffith University) 부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주요연구 분야는 국제 규범 및 제도, 국제인권 및 윤리이다. 최근 저서 및 편저로는 《평화적 세력전이의 국제정치》(2015, 공저), The Massacres at Mt Halla: Sixty Years of Truth-Seeking in South Korea (Cornell University Press, 2014), Transitional Justice in the Asia Pacif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등이 있다.      

김헌준 2016-11-23조회 : 10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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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연구보고서] 정보·문화 산업과 미중 패권경쟁: 할리우드의 변환과 중국영화의 도전

  초록이 글은 21세기 선도부문으로서 정보·문화 산업, 그중에서도 특히 영화산업에서 벌어지는 미 중 패권경쟁을 이해하는 분석틀을 제시하였다. 먼저 기술경쟁의 양상을 보면 할리우드가 새로 운 시장을 향한 변환의 전략을 모색하면서 여전히 글로벌 영화산업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국내 시장의 꾸준한 성장과 기술력 향상을 바탕으로 도전하고 있는 모습이다. 둘째, 표준경쟁의 관점에서 볼 때, 할리우드가 업계의 표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시장의 막대한 규모와 자본력을 내세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려는 중국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끝으로, 매력경쟁의 차원을 보면, 영화 콘텐츠의 내용적 매력을 발산하려는 영화 업계의 노력과 이를 지원하는 양국 정부의 정책과 제도 경쟁도 빼놓을 수 없다. 요컨대, 이 분야의 미 중경쟁은 단순히 시장점유율이나 기술혁신을 놓고 벌이는 전통적인 경쟁을 넘어서 표준의 장 악과 매력의 발산, 규모의 변수와 체제의 성격까지도 관련되는 신흥권력 경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경쟁의 결과는, 기존의 세력전이 이론이 상정하는 것과 같이 권력이동의 단순구도에서 어느 한 나라의 단판 승을 논하는 종류의 것이라기보다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네트워크 국가가 서로 공생적인 경쟁을 펼치는 구도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복합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중 패권경쟁의 현재를 진단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작업 은, 최근 한류의 성공으로 인해 정보·문화 산업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세워가고 있는 한국 이 미래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I. 머리말   최근 국내외 국제정치학계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미중경쟁은 두 강대국의 경쟁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 21세기 글로벌 패권경쟁과 거기서 파생되는 권력구조 변환이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미중경쟁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주로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기성무대 위에서의 경쟁에 두어져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부국강병 게임의 승리가 글로벌 패권의 향배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일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화, 정보화, 민주화 등의 복합적인 변환을 겪고 있는 오늘날, 기성무대에서의 승부만으로 전체무대의 판세를 가늠하려는 시도는 너무 단순하다. 21세기 세계정치에서는 기성무대 자체도 복잡해질 뿐만 아니라 기존 국제정치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권력무대들이 창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흥무대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동향을 아는 것은 그 자체의 의미뿐만 아니라 기성무대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글은 신흥무대에서 벌어지는 미중경쟁의 현황을 분석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고자 한다. 여기서 신흥무대라 함은 기존의 군사•경제 영역 이외에 새로운 세계정치 경쟁의 양상이 나타나는 기술, 정보, 지식, 문화, 커뮤니케이션 등의 영역을 뜻한다. 이 글에서 주로 초점을 맞춘 신흥무대는 21세기 선도 부문으로서 ‘정보•문화 산업’이다(Rennstich 2008; Akaev and Pantin 2014). 주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방송, 음악, 영화, 게임 등으로 구성되는 오늘날 정보•문화 산업은 디지털 문화산업, 정보콘텐츠 산업, 창의산업, 인포테인먼트(infortainment) 산업,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E&M) 산업 등으로도 불린다. 이러한 정보•문화 산업은 시장규모가 지난 수년간 계속 증가 추세에 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선도부문이다. 2013년 현재 정보•문화 산업의 글로벌 시장규모는 약 1조 8천억 달러 수준이고, 2014-18년 연평균 5.0%의 성장률을 보이면서 글로벌 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다(KAIST 정보미디어연구센터 2015). 이 글은 정보•문화 산업 중에서도 디지털 환경에서 변환을 모색하고 있는 영화산업에서부터 논의의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선도부문에서 벌어지는 강대국들의 경쟁은 국제정치 구조의 변동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국제정치이론의 오래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글로벌 경제의 선도부문에서 나타났던 경쟁력의 향배는 글로벌 패권의 부침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Gilpin 1987; Thompson 1990; Modelski and Thompson 1996). 가장 비근한 사례로는 20세기 전반 전기공학이나 내구소비재 산업, 또는 자동차 산업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영국과 미국의 패권경쟁을 들 수 있다. 좀 더 가까이는 20세기 후반 가전산업과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의 패권경쟁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21세기 선도부문인 정보•문화 산업 분야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도 이해할 수 있다(Dynkin and Pantin 2012; 김상배 2012). 특히 미중경쟁의 미래를 판별하는 잣대가 될 정보•문화 산업의 패권경쟁은 예전의 선도부문에서 나타났던 것과는 다른 양식의 새로운 권력게임의 출현이 예견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글은 정보•문화 산업 중에서도, 특히 영화산업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세 가지 차원의 경쟁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기술경쟁의 양상을 보면 할리우드가 새로운 시장을 향한 변환의 전략을 모색하면서 여전히 글로벌 영화산업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국내 시장의 꾸준한 성장과 기술력 향상을 바탕으로 도전하고 있는 모습이다. 둘째, 표준경쟁의 관점에서 볼 때, 할리우드가 업계의 표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시장의 막대한 규모와 자본력을 내세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려는 중국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 덧붙여 매력경쟁의 차원을 보면, 영화 콘텐츠의 내용적 매력을 발산하려는 영화 업계의 노력과 이를 지원하는 양국 정부의 정책과 제도 경쟁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복합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중 패권경쟁의 현재를 진단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작업은, 최근 한류의 성공으로 인해 정보•문화 산업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세워가고 있는 한국이 미래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과 중국의 영화산업(또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문화산업)을 다룬 기존 연구는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들 간에는 상당한 공백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 미국 학계의 연구는 대체로 2000년대 초중반 무렵까지의 할리우드 연구에서 멈추고 있으며, 2010년대 할리우드와 중국 영화산업의 경쟁을 다룬 학술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둘째, 중국 학계의 연구는 주로 글로벌화와 시장자유화의 환경에서 변화를 겪고 있는 중국 문화산업의 현황을 소개하는 수준으로만 진행되어 왔는데, 이들 연구는 대부분 학술적 엄밀함을 결여하고 있다. 끝으로 한국 학계의 연구는 주로 중국 지역연구와 국가론의 시각에서 중국의 영화산업과 대중문화를 분석하거나, 영화비평론의 시각에서 중국 영화의 문화코드를 분석한 연구들이 주류를 이룬다. 해외 학계에서 이 글과 유사한 주제를 다룬 학술 연구들이 간간히 있었지만, 이상의 세 그룹에서 발견되는 연구의 공백을 메울 정도로 진행되지는 못했다. 이 글은 영화산업에서 벌어지는 미중 패권경쟁의 미래와 관련하여 세 가지 새로운 주장을 펼치고자 한다. 첫째, 이 분야의 경쟁은 단순히 시장점유율이나 기술혁신을 놓고 벌이는 자원권력 게임이 아니라 표준의 장악과 매력의 발산, 규모의 변수와 체제의 성격까지도 관련되는 신흥권력 게임이다. 둘째, 이 분야의 경쟁은 국가 행위자들만의 경쟁이 아니라 민간 기업들뿐만 아니라 정보•문화 콘텐츠의 소비자들로 대별되는 비국가 행위자들이 관여하는, 국가-비국가 복합 행위자들 간의 경쟁이다. 끝으로, 이러한 경쟁의 결과는 기존의 세력전이 이론이 상정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권력이동의 구도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이 복합적인 권력게임을 벌이는 가운데 발생하는 복합적인 ‘세력망’(network of powers)의 재편이다. 요컨대 이 분야의 미중경쟁은 단순히 어느 한 국가의 단판 승을 논하는 성격의 ‘대칭적 국제정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미국과 중국을 허브로 하는 두 개의 네트워크가 서로 공생적인 경쟁을 펼치는 ‘비대칭 망제정치’(asymmetric inter-network politics)의 구도로 이해해야 한다(김상배 2014). 이 글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제2장은 정보•문화 산업 분야에서 벌어지는 미중 패권경쟁의 분석틀을 기술경쟁, 표준경쟁, 매력경쟁의 세 가지 차원에서 제시하고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규모와 체제의 변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제3장은 기술경쟁의 시각에서 미디어융합 시대 할리우드의 기술•표준 패권의 비결과 이에 도전하는 중국 영화시장의 양적 성장과 기술력 향상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제4장은 표준경쟁의 시각에서 최근 침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 동원되고 있는 할리우드의 변환전략을 중국시장 공략 전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러한 와중에 약진하고 있는 중국 영화 및 인터넷 기업들의 잠재력을 살펴보았다. 제5장은 매력경쟁의 시각에서 미중 영화콘텐츠가 품고 있는 매력의 내용을 비교•설명하고, 영화산업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미중 정부정책의 성격과 한계를 지적하였다. 맺음말은 이 글의 주장을 종합 요약하고 정보•문화 산업의 미중 패권경쟁이 한국에 던지는 의미를 간략히 짚어 보았다.   II. 선도부문과 패권경쟁의 분석틀   1. 기술-표준-매력의 3단 문턱   최근 정보•문화 산업의 경쟁은 단순히 값싸고 좋은 반도체, 성능 좋은 소프트웨어나 컴퓨터, 빠르게 접속되는 인터넷 등을 만들기 위해서 벌였던 예전의 경쟁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제품경쟁이나 기술경쟁과 같이 어느 기업이나 국가가 자원을 확보하거나 역량을 기르는 차원의 경쟁을 넘어선다. 물론 정보•문화 산업의 경쟁에서도 재미있는 드라마나 실감나는 영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경쟁의 중요한 관건이다. 이러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충분한 자본과 첨단의 기술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미디어 융합 환경에서 벌어지는 정보•문화 산업의 경쟁은 정보와 콘텐츠의 제작과 유통 및 마케팅 방식의 표준을 장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객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매력을 발산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도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요컨대, 정보•문화 산업 경쟁은 자본과 기술의 평면적 경쟁을 넘어서 산업의 표준과 매력을 장악하기 위해 벌어지는 입체적 경쟁이다...(계속)         저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외교학전공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국제관계에서 정보, 통신, 네트워크이며 저서로는 <아라크네의 국제정치학: 네트워크 세계정치이론의 도전> (2014), <정보혁명과 권력변환: 네트워크 정치학의 시각> (2010), <사이버 안보의 국가전략: 국제정치학의 시각> (근간), <신흥안보의 미래전략: 비전통 안보론을 넘어서> (2016, 편저), <한국의 중견국 외교: 역사, 이론, 실제> 공편 (2016, 편저), <신흥권력과 신흥안보: 미래 세계정치의 경쟁과 협력> (2016, 편저)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및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미래세계정치센터 센터장이다.        

김상배 2016-11-20조회 : 11078
기타
[EAI 메모] Clear Ruling, Murky Future: the South China Sea Dispute Following the UNCLOS Tribunal Ruling

The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in The Hague produced a very clear ruling in the case brought by the Philippines on July 12, 2016. In addition to its ruling on jurisdiction issued in October 2015, the tribunal asserted it had jurisdiction to rule on almost all of the claims brought by the Philippines, save those dealing with military clashes in contested waters. Regarding the classifications of different features, the tribunal declared no feature to be more than a rock, which generates only 12 nautical miles of territorial waters and no 200-mile exclusive economic zone (EEZ). Therefore, regardless of whether or not China has sovereignty over these features, the minerals and resources outside of the territorial waters do not belong to China. Furthermore, the tribunal found that “there was no legal basis for China to claim historic rights to resources within the sea areas falling within the ‘nine-dash line.’” Thus, the tribunal ruled that China had violated the Philippines’ rights in its EEZ, essentially invalidating nearly all Chinese claims in the South China Sea. The court added that it agreed with the Philippines claim that China was causing harm to the marine environment through its land reclamation efforts.   China has consistently asserted that the tribunal’s ruling will be ignored, and many analysts expect short-term deteriorations in the region. China has a variety of means to respond aggressively to the ruling, including dispatching fighter jets to its newly constructed airstrips on reclaimed land in the Spratly Islands, creating some sort of incident with the Philippines by blockading Filipino troops on islands in the region or using Chinese fisherman to create trouble (both techniques having been previously employed), and even taking the more drastic step of declaring the Spratly Islands to have an archipelagic baseline, effectively declaring the waters to be Chinese territorial waters. Another more drastic step may be the Chinese declaring an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 (ADIZ) in the region, which could create tensions similar to those felt in the East China Sea after the declaration of an ADIZ there in 2013. While the exact tactic the Chinese will employ remains a mystery, no one expects Beijing to quietly accept the decision.   Meanwhile, the ruling provides new opportunities and challenges for the U.S. and the Philippines. The clarification of international law surrounding the Spratly Islands provides legal cover for more vigorous and frequent U.S. freedom of navigation (FON) operations in the region. However, the U.S. will have to walk a fine line between asserting the ruling and provoking China after its nationalistic ego has been bruised with analysts having different opinions on the tempo of FON operations in the future. The U.S. also may feel a renewed sense of pressure to ratify the UNCLOS treaty if it wishes to drum up support for the ruling. The Philippines, on the other hand, finds itself in an odd position given that the new President Rodrigo Duterte recently made overtures toward China on joint development of the resources in the region. The ruling effectively gives the Philippines sole control over these resources, but it remains to be seen how Duterte will react given his different approach toward China from that of his predecessor.   If the ruling is to be utilized effectively to create a lasting peaceful resolution to the South China Sea issue, the key will be to use it to pressure the Chinese to abide by international laws and norms. The ruling is a clear and stinging rebuke of Chinese claims in the Spratly Islands, and many believe this ruling will greatly harm the reputation of China if it does not abide by the tribunal’s ruling. Analysts at major U.S. think-tanks expect a war over international opinion to heat up as the Chinese government attempts to convince other countries that a serious injustice has been done to China’s sovereignty, while the Philippines and the U.S. churn up support to force China to abide by international law. This battle for supporters will most likely be the most immediate outcome, as China will not want to force a major incident ahead of the G-20 summit, which will be held in China. If the U.S. and the Philippines are successful in creating a swell of international support for the ruling, then, in time, this could push Beijing to negotiate toward a peaceful resolution in the long-term despite the seemingly inevitable short-term spike in tensions. ■         Author Benjamin A. Engel is a Research Associate/Program Officer in the Peace and Security Research Unit at the East Asia Institute (Seoul, South Korea). He is a Ph.D. candidate in East Asian Studi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 and holds an MA in Korean Studies from the same school. His research interests include modern Korean history, democratization in East Asia, and U.S. foreign policy.         Please acknowledge the source of this article if used as a citation. The EAI is a nonprofit and independent research organization in Korea. The contents of this article do not necessarily reflect the views of EAI.          

Benjamin A. Engel 2016-07-14조회 : 11154
기타
[Keynote Address] Division Management and Unification: Korea vs. Germany

멀티미디어  [한승주 전 외무장관] “미국 적극적 지원 있어야 평화통일”         1. Preface   After 25 years, the German unification still evokes admira-tion and envy among the Ko-reans. Before Germany was unified, the rela-tionships between East and West Germany and those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had shared both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oth countries were divided by the occupation of separate Allied powers in the wake of World War II. Both countries turned into fields of East–West confrontation while being incorporated into the postwar alliance systems. Nevertheless, neither country abandoned their hope for unification for several decades after the division. In neither case did the surrounding powers seem eager to have them unified. Germany’s neighboring countries feared that it might be reborn as a strong unified nation, whereas the countries around the Koran Peninsula were concerned about the possibly unst-able aftermath of unification, and the possibility for a uni-fied Korea to fall into some other nation’s sphere of influ-ence.   At the same time, there have been several differences between the German and Korean divisions. Five such differences stand out. For one thing with the national division, while the Koreans were inflicted with what might be called “victim’s complex,” the Germans on the other part had what might be called a “guilt complex.” Koreans had the sense that they had done nothing wrong to deserve the tragedy of division but were simply the victim of power politics and backdoor understanding between the powers, especially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In contrast, the Germans recog-nized and accepted the fact that their national division was the result of what pre-World War II Germany had done; the invasion of neigh-boring countries, the persecution of some ethnic groups, particularly the Jews, and the preci-pitation of World War II.   Secondly, during the period of national di-vision, while the DDR, East Germany, was un-der effective control and protection by the Soviet Union, it posed no serious military threat on West Germany itself. In contrast, North Korea was a constant security threat to South Korea, with which an all-out military invasion of the South had resulted in the Korean War, a smaller scale of military provocations, including commando attacks, military build-up, de-velopment of nuclear weapons and missiles of various kinds, and subversive activities.   Third, while the devoted and activist movements for unification came mainly from younger generations and from the politically leftist sectors in Korea, the relatively subdued and passive calls and desire for reunification tended to derive from the older generations and more from the conservative spectrum.   Fourth, whereas West Germany was an important member and active participant of multilateral regional and security organizations such as the European Community and NATO, South Korea’s main security link to the outside world was a bilateral alliance with the United States and it enjoyed no membership in regional organizations or communities. So when unification came to Germany, the East Germans were prepared to join not only their Western brethren, but also the European Community and NATO, thereby diluting the sense that East Germany was being taken over by West Germany.   Finally, after 45 years of the German division and 70 years of Korean division since 1945, there is a big dif-ference in the natur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East Germany and North Korea on the one hand, and the Soviet Union and China on the other hand, their respective benefactors and guardians. In 1990, the Soviet Union was a declining and disintegrating empire in need of economic help from the outside after overspending in arms build-up and competition with the West. The Soviet Union was also in the process of internal transition from autocracy and dictatorship to perestroika and glasnost. In 2015, China is a rising economic power still under an effective one party rule, challenging the domination of the United States and territorial status quo in East Asia, even though it has a strong interdependent relationship with the West, and has its own share of risks from rapid economic growth and self-aggrandizement. Nonetheless, East Germany was still under firm control of the Soviet Union and North Korea has been struggling for self-reliance and determination.     2. Status of North-South Korean relations   Roughly speaking, since the end of the Korean War in 1953, inter-Korea relations have gone through seven different phases with various degrees of hostilities and engagements. The post-Armistice period of 1953-1960 can be characterized as one of internal recuperation from the war in both Koreas and estrangement between the two sides. It was a period of a military impasse with each armed forces aligned with the major supporting powers, namely the United States on the part of Sou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and China on the part of North Korea. It was also a period of diplomatic competition whereby in a starkly bipolarized world, both Koreas established and nurtured diplomatic ties with the countries belonging to one of the two main blocs (Western and Soviet bloc) at the exclusion of the other. The so-called nonaligned bloc provided a field of completion for both recognition and votes at the United Nations on resolutions favoring one or the other of the two Koreas.   The second phase (1960-72) is one in which South Korea witnessed the emergence of a military gov-ernment, and North Korea became increasingly belligerent toward South Korea with occasional military (although on a small-scale) provocations both to South Korea and its ally, the United States. A selected list of such provocations would include the 1968 raid attempt of the Presidential mansion by a North Korean armed commando group, the 1968 capture of the USS Pueblo, and the 1969 downing of an EC-121 reconnaissance plane. These provocative acts were committed at a time where the attention and energy of both Sou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were diverted to the war in Vietnam. The third phase (1972-1984) could be characte-rized as a co-existence phase, where a series of dialogues got started as the two governments tried to use inter-Korea dialogue for the consolidation of power in their respective home fronts. The first dialogue of the series occurred as the Red Cross societies of the North and the South met from 1972 through 1973 and discussed possibilities for reunion of families separated by the war. The inter-Korea “Joint Declaration of July 4th, 1972” pledged first to resolve Korean issues by Koreans without the outside intervention of other powers, second to resolve disputes by peaceful means without resorting to military means, and third, work toward a grand unity of all the Korean people. Afterward, both sides set up the North-South Coordinating Committee to discuss reconciliation and unification. However, the dialogue was suspended in 1973 as the North refused to deal with the South.   The dialogue sputtered during the fourth phase (1984-1992), in large part because of the North Korean attempted assassination of the visiting South Korean pres-ident when the North Korean regime planted and exploded a bomb at the Aungsan Mausoleum in Rangoon, Burma in 1983. The North-South dialogue in the mid eighties began as Seoul accepted Pyongyang’s proposal to provide relief goods for flood sufferings in the South. As a result of Red Cross talks, art performance troupes and some fifty families met with relatives living in the other part of the peninsula. The dialogue in the mid-eighties was the one that could not surpass a certain level because of limitations pertaining to North Korea and distrust between the North and the South. The dialogue started mainly out of extra-dialogue motivations of the North, such as recovering international image that had been tarnished by the Rangoon bombing, enhancing the image of Kim Jong Il as successor to Kim Il Sung. Furthermore, faced with the collapse of the Soviet bloc and the unification of Germany, North Korea felt obliged to reckon with South Korea which was broadening its diplomatic horizon starting with the hosting of the 1988 summer Olympics, and thus engage with South Korea in a serious bilateral dialogue. It resulted in such landmark agreements as Basic Agreement on Reconciliation, Non-Aggression, Exchanges and Cooperation (1991), and Joint Declaration on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greement (1992).   But the apparent lunge toward reconciliation was su-perseded by another, at the fifth phase of estrangement (1993-1998) as the North Korean nuclear weapons pro-gram became a focal issue of contention. Additionally, the passing of the “great leader” Kim Il-Song ion 1994 made it impossible for North Korea engage the South in any posi-tive and active way. In the absence of the deceased father, his son and the designated successor, Kim Jong-Il needed time to consolidate his position at home and re-figure his policy and strategy toward the South.   The sixth phase (1999-2008), the phase of “Sun-shine Policy,” was ushered in when Kim Dae-Jung, a long-time advocate of engaging the North became president in 1999. After the end of his five-years’ term, another “Sunshiner” President Roh Mu-Hyun succeeded Kim for the following five-year term until 2008. The ostensible purpose of Kim Dae-Jung’s Sunshine Policy toward the North was three-fold: One, to achieve peace by promoting cooperation, understanding and confidence. Two, to help North Korean people improve their economic conditions so that they can overcome hunger and dire poverty. Three, to induce North Korea to open itself to the outside world and enable the society to change so that ultimately both political and social conditions could improve. Improved relation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culminated in an inter-Korea summit meeting when President Kim Dae-Jung visited Pyongyang in June, 2000, and met his counterpart Kim Jong-Il. The result was large scale economic assistance to North Korea and an increased exchange of people, goods and service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Despite the ten-year period of “Sunshine” rela-tionship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the North Korean military posture vis-à-vis South Korea did not become less aggressive or threatening. In fact, with the collapse of the 1994 Geneva Agreed Framework in 2002, North Korea openly stepped up its nuclear and missile programs with the effect of making the security situation in Korea more dangerous and threatening. In South Korea, criticism of the “Sunshine Policy” which presumably helped finance North Korea’s nuclear and missile programs mounted. Thus, when the conservative government of Lee Myong-Bak took office in 2009, the Sunshine policy was replaced by a more balanced policy which was less unconditional, one-sided and indulgent toward North Korea.   The seventh, and the current phase (2009- ) of North-South Korean relationship can be characterized by contin-uing advancement on several issues, such as: North Korean nuclear weapons program, a deteriorating eco-nomic condition of the North, the start of a third genera-tional dynastic succession process, discontinuation of dialogue and the consequent decrease in exchange, trade and eco-nomic assistance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and the perpetration of provocative acts on the South by North Korea. The phase is also witnessing China seeming to take a more “protective” attitude toward North Korea lest it should collapse on its own weight of poverty and intransi-gence, and the strengthening of U.S. commitment to secu-rity relationship with its allies, South Korea and Japan.     3. Possibility for duplication?   Despite these differences between the divided Germany and Korea, however, South Koreans were hopeful after German unification that they could duplicate the German path to unification. Moreover, German unification provided North Korea with both incentives and perhaps means to prevent a similar process from taking place on Korean Peninsula.   In fact, at the time of German unification, North Korea had plenty to worry about: The Soviet empire was disinte-grating; Both China and the Soviet Union officially recog-nized the Republic of Korea and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 with it, while the United States and Japan did not reciprocate for North Korea;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agreed on a detente; China and the United States agreed on a rapprochement; and North Korea op-posed the application of the German formula to Korea.   In that sense, German unification brought about re-trogression rather than progress in the short term in the North–South Korean relationship, by stiffening the North Korean attitude. This is a very tragic irony for a divided country. That is to say, the stronger the aspiration of one side for unification is and the louder the clamor for unifi-cation is, the lesser becomes practical opportunities or possibilities to achieve it as the other side takes the aspira-tion for a desire to take over and therefore is threatening. While both North and South Korea clamor for unification, neither side would think of turning over power, or sharing it with the other side, in the name of unification. Under such circumstances, unification by either side would mean to absorb or subjugate, if not conquer, the other. Whereas North Korea’s reference to unification meant to South Koreans a North Korean takeover of the South, the South Korean reference to unification sounded to the North to signify absorption of North Korea by the South, thus evok-ing the fear and resistance from Pyongyang.   What evokes North Korea’s concern was not only German unification. As a result of transformations in so-cialist states since 1989 and the promotion of Nordpolitik by South Korea, most of them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 with Seoul. Pyongyang of course showed negative responses to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ties by its allies with Seoul and recalled most of its international students from Eastern Europe and the USSR. North Korea, one of the most closed, if not the most closed, regimes in the world could not but be influenced by the transformation of socialism. As a means to prevent a regime change, North Korea chose to develop WMDs including nuclear weapons and missiles and to further insulate itself from outside influence.   Only during the 10-year period from 1998–2008 of South Korea’s Sunshine Policy, North Korea chose to en-gage South Korea as the latter was eager to provide the former with extensive economic assistance. However, with the election of Lee Myungbak as President, and with the return to power of the Grand National Party in 2008, South Korea’s experiment with the Sunshine Policy had come to an end, and a policy of pragmatism and balance, which emphasized reciprocity, conditionality, and measured engagement with the North became an official policy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North Korea on its part was dissatisfied with the less ge-nerous and less indulgent South Korean government atti-tude following the more generous Sunshine Policy years. Since then, North Korea conducted three nuclear weapons tests and pursued what it named the byongjin policy, de-scribed as a parallel policy to become a nuclear weapons’ state while simultaneously reviving its economy.   In the meantime, the Park Geun-hye government that succeeded Lee Myung-bak’s government, pretty much continued the preceding government’s “measured en-gagement policy” but with greater emphasis on coopera-tion with North Korea and search for “unification,” which would supposedly bring a “bonanza” to Korea and its neighbors. The problem has been that the Park government had to overcome two hurdles to get positive results from its policy for promoting unification. One is the need to overcome North Korea’s suspicion that Park’s unification overtures are nothing less than a call for “unification by absorption,” that is, by the German formula. The other is that it had to find a formula by which North Korea would suspend and then abandon its nuclear weapons program and refrain from conventional provocations.     4. Persuading major powers   Another important task for the Korean govern-ment is to persuade the four major powers, i.e., China, the United States, Russia and Japan, that have strong interests in how the situ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develops, that Ko-rean unification, when and if it comes, will actually be in accord with their respective interests rather than being against them. So, how will Korean unification affect their interests? One can think of both positive and negative perspectives of the major powers on Korean unification.   Let’s first talk about the interest of the United States. There are some positive reasons why the United States will think Korean unification to be in its own inter-est as well.   Positive Reasons: 1. War in or over Korea less likely 2. North Korean threat (WMDs, missiles, etc.) and provo-cations removed 3. Emergence of a unified Korea as a powerful ally 4. Korea’s increased dependence on the United States in the short term––need for economic and security support from the U.S. 5. Expansion of democracy, market economy   But there are some possible reasons why the U.S. could think Korean unification to be against its interest...(Continued)           This Keynote address was prepared for "Preparing for a Peaceful Unification of Korea" Conference which was hosted by the Presidential Committee for Unification Preparation and the Ministry of Unification, and organized by the East Asia Institute.

Han Sung-Joo 2015-12-06조회 : 10670
단행본
1972 한반도와 주변4강 2014

언론에서 본 EAI  [세계일보] 美·中간 전략을 보면 꼬인 남북관계 보인다   언론에서 본 EAI  [조선일보] 한줄읽기: '1972 한반도와 주변 4강 2014' 외 언론에서 본 EAI  [한겨레] 6월 19일 학술 · 지성 새책           한국 ∙ 북한 ∙ 미국 ∙ 중국 ∙ 일본 ∙ 소련/러시아 여섯 대의 카메라 데탕트와 탈냉전 한반도와 국제정치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에서 동북아 국제정치로   이 책의 시작은 국제정치와는 특별히 관련이 없는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이다. 2012년 당시 하영선 교수(현 EAI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는 세계정치학회 참석을 위해 마드리드를 방문하던 중 현대 팝아트의 대가인 데이비드 호크니 특별전을 찾게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특히 시선을 끌었던 작품이 있었는데, 비디오아트인 “Nov. 7th, Nov. 26th 2010, Woldgate Woods, 11.30 am and 9.30 am”였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고향인 영국 동요크셔의 월드게이트(Woldgate) 숲을 캔버스에 입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 아홉 대의 비디오카메라를 활용하여 고향 숲길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촬영했다.   아홉 대의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의 풍경. 각각의 카메라는 고유한 장면을 담아내면서도 전체적으로 커다란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와 주변을 둘러싼 국제정치도 하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해보는 것이 어떨까? 제각기 다른 이해를 가진 당사자들 고유의 시선에 집중하여 살펴본 다음, 이들을 다시 하나로 장면으로 종합한다면, 행위자와 맥락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릴 수 있다. 이렇듯 현대미술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미술적 시도가 동북아 국제정치를 새롭게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남북한의 퇴행적 냉전체제, 벗어날 길은 없는가?   1990년을 앞두고 세계는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냉전의 종식을 선언하였고 해빙기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25년의 시간의 흘렀다. 이제 누구도 오늘의 국제정세를 논할 때 냉전을 말하지 않는다. 이념은 퇴색했고 갈등은 세속적이며, 협력과 공존을 위한 새로운 기회들이 대두되고 있다. 세계는 이미 냉전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졌다.   그러나 한반도는 다르다. 한국과 북한은 여전히 대치상태에 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의 시점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관계가 회복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일시적이었을 뿐 이내 엄습한 퇴행을 벗어날 수 없었다. 세계는 변했는데,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환경 또한 과거와는 다른데, 어찌하여 남북한은 여전히 냉전의 올가미에 묶인 채 제자리인가?   과거의 경험, 전세계적 화해 무드도 한반도에서는 좌절되었던 바 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세계는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이 이념,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분에서 극렬히 대립하고 경쟁하며 단절되어 있던, 전쟁처럼 치열했지만 화염은 없었던 냉전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핑퐁외교를 시그널로 하면서 미국의 국가원수가 반대 진영의 대국인 중국을 방문한 것은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이념적 대립이라는 견고한 틀에 균열의 조짐이 나타날 수 있음을 점치기도 했다. 데탕트의 개막이었다. 이로써 세계는 냉전의 긴장에서 다소 벗어나 해빙의 무드를 맛보게 되었다.   전세계적인 데탕트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외 여러 이해가 맞물려 남북한은 7∙4남북공동성명에 합의함으로써 남북한 긴장완화와 화해를 위한 첫 단추를 맞추는 듯했다. 어쩌면 한반도의 미니데탕트가 실현될 수도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남북한 당국자들은 서로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기에 전세계적인 화해와 해빙의 무드가 한반도에서는 자리잡을 수는 없었다. 한반도의 미니데탕트는 좌절되었다.   여섯 대의 카메라 렌즈, 데탕트와 탈냉전의 한반도를 촬영하다   《1972 한반도와 주변4강 2014》는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소련/러시아라는 여섯 대 카메라를 사용하여 1972년 한반도 미니데탕트의 좌절과 2014년 한반도 탈냉전의 어려움을 대비적으로 촬영함으로써 한반도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6개 국가의 카메라를 1972년과 2014년으로 나누어 각기 촬영할 12인의 전문가를 촬영감독으로 영입하였다.   공동작업은 첫 단계로서 역사적 현실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촬영자의 주관적 시야에서 발생하는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관련 당사국들의 핵심 외교문서들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합의하고, 1970년대의 키신저-저우언라이 협상록, 남북한 7∙4남북공동성명 관련 회의록과 2010년대 6개국의 핵심 관련 문서 등을 함께 읽었다. 다음 단계로서 호크니처럼 먼저 1970년대의 데탕트와 한반도를 입체적으로 그리기 위해서 6개의 초벌 촬영 화면을 엮어서 하나의 큰 화면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2010년대의 탈냉전과 한반도의 큰 화면을 구성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삶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제, 지역, 한반도라는 공간 복합성과 1970년대의 데탕트와 2010년대 탈냉전의 시대 복합성의 의미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서 열두 편의 완성된 초고들을 기반으로 해서 1970년대에 강대국들의 데탕트가 왜 한반도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의 추진과 폐기라는 좌절의 역사로 전개됐으며 2010년대에 강대국들의 탈냉전이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탈냉전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있는가를 보다 분석적으로 토론한 다음에 모든 원고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했다.   국내의 한국현대사 연구와 한국외교정책 연구가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된 문제의식과 방법론의 답답함 속에서 자기만족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해, 《1972 한반도와 주변4강 2014》는 한반도와 주변 국제정세를 다각적이고 통시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시공적 복합성을 보여주려는 야심찬 시도이다. 이 책을 통해 21세기 신한반도 정책과 담론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목차   서문   제1부 1972년   1장 적(敵)에서 암묵적 동맹으로 : 데탕트 초기 미국의 중국 접근 ■ 마상윤 2장 중국의 1972년 대미 데탕트 : 배경, 전략, 역사적 함의 ■ 이동률 3장 미중 데탕트와 일본 :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교섭의 국제정치 ■ 손 열 4장 미중 데탕트와 소련 : 국제정세 인식과 대응 ■ 강윤희 5장 북한 1972 진실 찾기 : 7•4공동성명의 추진과 폐기 ■ 하영선 6장 데탕트 국면에서 박정희 행정부의 선택 ■ 조동준 제2부 2014년   7장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대중정책 : 아시아 공존의 상호인정과 지속되는 긴장 ■ 손병권 8장 국제질서 변환과 각축하는 미중관계 : 중국의 전략적 입장과 정책 방향 ■ 박병광 9장 21세기 일본 외교전략의 변화 : 보통국가의 변환과 다차원 외교의 대두 ■ 이승주 10장 동북아 세력구도 변화와 러시아의 신(新)동방정책 ■ 신범식 11장 미중시대 북한식 국제정치 독해 : 자주외교 불패 신화의 유산 ■ 김성배 12장 한국의 동북아 및 한반도 전략 : 현황과 과제 ■ 전재성

하영선 편 2015-05-27조회 : 14733
워킹페이퍼
[NSP Report 74] 러시아 신(新)동방정책과 동북아 지역정치: 지역 세력망구도 변화와 러시아의 가능성 및 한계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신범식 교수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슬라브학회 총무이사를 역임했다. 주요 연구분야는 러시아 외교정책과 유라시아 국제관계다. 주요 논저로는 《21세기 유라시아 도전과 국제관계》(2006, 편저), 《러시아의 선택: 탈소비에트 체제전환과 국가•시장•사회의 변화》(2006, 공저), Russian Nonproliferation Policy and the Korean Peninsula (2006, 공저), “Russia’s Perspectives on International Politics” (2008) 등이 있다.         I. 문제 제기   현재 동북아 지역질서 구축 주도권을 잡기 위한 미중 간 경쟁이 동북아 지역정치의 기본적 단층면을 형성하고 그 경쟁구도가 양국을 상호 속박하게 되면서, 이 경쟁구도가 역내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신장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지 아니면 양국 간 경쟁으로 주변국들의 입지가 위축될지는 불확정적이다. 급변하는 동북아 지역정치 구도에서 각국은 최소한 자국의 입지를 방어하거나 적극적으로는 그 영향력을 신장할 기회를 얻기 위해 새로운 전략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한 두 국가의 힘으로 신(新)아시아 질서를 구축하거나 주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가운데, 역내 갈등을 조절하고 지역정치를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지역적 안보협력 기재를 구축할 필요와 요구는 날로 높아가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지구 및 지역질서의 전환기적 특성과 맞물려 동북아 지역의 다양한 변화가능성과 충돌하는 가운데, 탈냉전 이후 동북아 지역 무대에서 급속한 영향력 약화 및 단기간의 회복을 경험한 러시아의 역할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과 중국이 “동맹의 연루”에 따른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과 달리 러시아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서 한반도 문제에서 좀 더 자유로운 행보를 취할 수 있는데, 어쩌면 러시아는 이런 가능성을 기반으로 한반도 문제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을 고양시킴으로써 잃어버렸던 동북아 전략적 행위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회복하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관련 러시아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은 전쟁이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며, 한반도 분단 구조 속에서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 조심스럽게 회복해 온 동북아 이해당사자 및 6자회담 당사국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급속한 부상(浮上)과 영향력 확대로 인해 러시아의 부담이 커가는 가운데, 러시아는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관계를 미중 양극 구도로부터 미-중-러 3극 내지 준(准) 3극 구도로 변화시키기 위해 가용 자산을 최대한 동원하여 미중 경쟁의 틈새를 ‘파고들고’ 싶은 욕심이 날 법도 하다. 물론 러시아에게 이를 추진할 충분한 내적 역량과 의지가 얼마나 있는지 확답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러시아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러시아가 ‘피하고’ 싶은 한반도 갈등 내지 분쟁 상황이 현재까지도 어렵사리 관리되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가 ‘지키고’ 싶은 한반도 문제 당사자로서 일정한 지위는 어쨌든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러시아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이 지역에서 무엇을 더 ‘얻어’ 낼 수 있는가?”이다(신범식 2013a).   탈냉전 이후 동북아에서 러시아가 지향해 온 외교는 “기회주의적 약진”을 추구하는 형태로 표출되곤 했다. 이를 위해서 중국과 관계를 잘 관리하고 북한과 관계를 회복•강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책 옵션이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 및 일본과 실질협력을 증진하려는 노력은 러시아의 역내 영향력뿐 아니라 미래 성장동력을 찾아내는 전략과 결부되면서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동북아에서 미국과 협력기재를 마련하는 것은 러시아의 역내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축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가 동북아에서 입지를 강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부상에 따른 부담 증대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동북아 행위자로서 위상 강화는 바라지 않는 듯하다(Севастьянов 2008).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은 지구적 수준에서 대러시아 제재를 서서히 강화시켜 나가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여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유라시아 통합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물론 아시아 방면에서 중국과 전략적 협력을 한층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략 틀을 조정해 가고 있다.   이 글은 러시아가 동북아 지역정치 구도 속에서 경험한 위상변동과 새롭게 직면하게 된 도전,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을 지역정치 주요 행위자들 간 관계 속에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우선 1) 러시아 주요 외교안보 관련 문건들에 나타난 러시아의 동북아 정책 원칙을 지속과 변화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2) 최근 푸틴 3기 정부의 신동방정책으로 불리는 전략적 시도가 동북아 지역정치 구도 속에서 어떤 지향점과 성과 및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지 분석한 뒤, 3) 이런 러시아 신동방정책이 가지는 의미를 동북아 세력망 구도를 바탕으로 해석해 봄으로써 지역정치 내 러시아의 존재와 위상, 그리고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해 볼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분석이 한국외교에 대해 지니는 시사점을 동북아정치의 미래와 연관하여 적시해 보고자 한다.   II. 기본문건 분석: 외교정책 개념, 안보 개념, 군사 독트린   러시아 외교정책, 안보정책, 군사정책의 주요한 기본 원칙과 그에 따른 정책적 사고(思考) 동향을 보여주는 주요 문서들로는 외교정책개념(Концепция Внешней Политик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국가안보개념(Концепция Националь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군사독트린(Военная Доктр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등이 있다. 이 문서들은 러시아 정부 내 주요 관계부처 관료들의 오랜 토의 끝에 작성되는 결과물로서, 단순한 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외교, 안보, 군사 정책의 전략적 지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각 문서들은 외교, 안보, 군사라는 다른 영역을 다루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하나의 세계관 위에서 작성되고 있으며 또한 공통된 정책 지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외교정책개념은 러시아의 기본적 국제정치관은 물론 외교정책 목표와 각 지역별 정책방향을 보여주는 문서다. 최근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2000년 및 2008년 외교정책개념 문서를 보면 러시아의 주요 관심사가 기존의 냉전 시기 군사적 대립과 핵무기에서 경제, 정치, 과학, 기술과 같은 비군사적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Концепция внешней политик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28 июня 2000 года 2000/6/28; Концепция внешней политик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15 июля 2008 года 2008/7/15). 또한 러시아는 테러리즘, 조직범죄와 같은 비전통 안보 영역의 위협과 도전들이 거세지고 있음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국제정치에서 UN 역할의 중요성과 이에 대한 존중 역시 강조되고 있다.   2000년 문서는 러시아 외교정책의 핵심적 목표로 총 7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국가 안보, 주권, 영토 통합성 보전; 둘째, 안정적이고 공정한 민주적 세계 질서 확립; 셋째, 경제 발전을 위한 긍정적 외부 환경 조성; 넷째, 주변 국가들과 우호적 관계 유지; 다섯째, 타 국가들과 조화적 관계 구축; 여섯째, 해외 러시아인 및 러시아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 보장; 일곱째, 러시아의 긍정적 이미지 증진 등이다. 지구적 차원의 문제 해결을 위한 러시아 정부의 우선순위로는 첫째, 새로운 국제 질서 형성; 둘째, 국제 안보 증진; 셋째, 국제 경제관계 발전; 넷째, 인권 관련 국제 관계 관리 및 안정; 다섯째, 외교 정책 활동을 위한 정보 지원 등을 들고 있다.   2008년 외교정책개념 문서에서는 2000년 내용들이 유지되는 가운데 드러나는 중요한 차이점들을 통해 러시아 외교정책의 최근 변화를 보여준다. 첫째, 2008년 러시아 외교정책개념에서는 경제문제가 이전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2000년 당시 러시아 외교의 두 번째 주요 목표였던 안정적이고 공정한 민주적 세계 질서 확립은 2008년에 와서는 세 번째 목표로 물러나고 그 자리에 경제 발전과 근대화를 위한 긍정적 외부 환경 조성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의 경제 발전, 근대화를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내적 역량 강화에 대한 관심과 그 한계에 대한 국내적 위기의식이 더욱 고조되는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다극질서에 대한 강조 및 미국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 어조가 누그러졌다. 2000년 문서에서는 다극질서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는데, 앞서 언급한 안정적이고 공정한 민주적 새로운 국제질서의 수립이 당시 러시아 외교정책의 두 번째 주요 목표였다는 점과 “미국의 경제와 힘의 지배를 통한 일방적 국제질서의 수립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라고 주장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를 노골적으로 비판한 점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2008년 문서에서는 다극질서 자체에 대한 언급이 줄어들었고, 국제정치 무대에서 어느 특정 국가의 일방적 행동에 대해서는 비록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지언정 이를 미국이라 명시하지는 않고 있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일방적 국제 질서에 대한 노골적 비판 역시 자제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미국에 대한 불만을 자제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다른 식으로 보면 강대국으로서 자신감을 회복해 가는 러시아가 새로운 행동의 자유를 지향하고자 함을 암시했는지도 모른다.   셋째, 러시아 정부의 직접적인 자신감도 드러난다. 2008년 러시아 외교정책개념 문서의 두 번째 장인 ‘현대세계와 러시아 외교정책(Современный Мир и Внешная Политика РФ)’은 “새로운 러시아가 국익에 대한 확고한 바탕을 마련하고 국제정치에서 온전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기조로 시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신감은 2000년 외교정책개념 문서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특성으로, 러시아 외교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결국 러시아가 그루지야 전쟁, 크림사태 등에서 보여준 행동이 힘에 기초한 자국 이익 관철임을 예견케 하는 단초가 되었다는 판단은 크게 그르지 않을 것이다.   넷째, 러시아 정부는 지속적으로 국제법과 UN 역할에 대해서 강조해왔는데, 2008년 외교정책개념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때 지구적 차원 문제 해결을 위한 두 번째 우선순위로서 “국제관계에서 법의 지배”를 추가했다. 이는 2000년 문건에서는 거론되지 않았던 항목이었는데, 세부적으로는 UN안보리 및 헌장의 중요성과 국제법 준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주권 및 내정불간섭 원칙과 더불어 국제적인 문제의 일방적 해결을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지향점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국가안보개념 문건은 러시아 안보정책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문건이다. 1997년 12월, 2000년 1월에 각각 국가안보개념 문서들이 발표된 바 있으며 2009년 5월에 새롭게 발표된 ‘국가안보전략 2020’(Стратегия националь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до 2020 года)은 기존의 국가안보개념 문서를 대체하게 되었다(Концепция националь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1997/12/17).   2000년 국가안보개념 문서는 앞서 살펴 본 2000년 외교개념 문서와 비교했을 때 기본적인 국제정치관과 정책 지향점 측면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는 2000년 국가안보개념이 문서 첫 부분부터 일방주의를 비판하고 다극질서의 출현을 강조했다는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러시아를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면에서 약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국가들이 있다”고 노골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특히 2000년 국가안보개념 문서에서는 러시아의 “국가 이익”을 개인, 사회, 국가의 수준에서 국내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국제, 정보, 군사, 국경, 환경 등 제(諸)분야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이익의 총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안보개념 역시 단순한 군사적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등 다른 분야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안보(comprehensive security)” 개념에 입각하여 제시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경제, 인구, 환경, 문화 등 세부분야에서 러시아 정부가 취해야 하는 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의 국가 이익이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통해서만 실현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경제적 기반 확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000년 국가안보개념 문서에서 제시된 안보개념과 주요 정책방향은 상당 부분 ‘국가안보전략 2020’에서도 유지되고 있다(Стратегия националь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до 2020 года 2009/5/12). 하지만 차이점 역시 발견되는데, 이는 2000년과 2008년의 외교정책개념 문서가 보였던 차이와도 같은 맥락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국가안보전략 2020에서도 2008년 외교정책개념에서 발견되는 러시아의 자신감과 좀 더 낙관적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다. 국가안보전략 2020에 나타난 러시아의 국제정치관은 2000년 안보개념의 그것보다는 낙관주의와 자신감이 더 잘 표현되어 있다(Dimitrakopoulou•Liaropoulos 2010, 38). 러시아는 2020 문서에서도 한 국가의 일방주의적 행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나, 미국에 대한 언급을 피하면서 이를 나토(NATO)에 대한 비판으로 새롭게 구체화하고 있다. 특히 나토가 러시아에게 중요한 이익이 되고 있는 지역 내 국가들에게 군사적 인프라를 확장하는 것을 가장 첫머리에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또한 러시아는 나토가 중요한 국제법상 원칙들을 무시하고 위반하는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미국과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면서 러시아의 국익이 어떻게 침해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되 여타 부분에서의 협력 가능성까지 닫지는 않으려는 러시아의 국가안보적 근심과 고려를 잘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2020 문서는 2000년 국가안보개념 문서에서와 같이 러시아를 방해하려는 국가들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없다.   둘째, 2000년 안보개념 문서에서 드러났던 포괄안보가 2020 문서에서는 더 구체화되어서 나타나고 있다. 2020 안보전략문서는 경제 발전의 중요성과 러시아 시민들의 삶의 질 그리고 사회 경제 발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3장에서는 민주 국가, 시민사회 건설, 국가 경제 경쟁력 향상이 장기적 국익으로 상정되고 있다. 국가 안보의 주요 구성 요소로서 국방, 국가와 공공의 안보, 러시아 국민들의 삶의 질 개선, 경제 성장, 과학•기술•교육의 강화, 보건의료 강화, 문화 창달, 생태계 보존, 전략적 안전성과 전략적 동반자와 평등한 관계 등의 순으로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국가안보의 주요 지표로서 실업률, 소득불평등 지수, GDP 대비 부채율, 공공 지출, 무장 쇄신 등을 제시함으로써 이전과는 달리 포괄안보에 대한 구체적인 사유가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러시아 외교정책개념, 안보개념 및 안보전략은 각 문서들이 다루고 있는 영역이 다르더라도 공통적인 세계관과 정책 지향을 공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 군사 독트린 역시 앞 문서들과 많은 공통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안보 중심적 분야로서 러시아의 군사정책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러시아 군사 독트린은 1993년, 2000년에 각각 발표된 바 있으며, 최근 2010년 2월 5일에는 새로운 군사 독트린이 발표되었다.   2010년 군사 독트린은 먼저 러시아의 안보 환경을 평가하면서 정치 및 군사적 위협이 부분적으로는 감소했지만 새로운 분야에서는 증가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De Haas 2010, 3). 특히 1993년, 2000년에 발표된 각각의 군사 독트린에서는 “군사적 위협”(военные угрозы)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2010년 문서에서는 “군사적 위험”(военные опасности)을 같이 언급하면서 ‘위험’이 ‘위협’보다 우선적이고 구체적으로 기술되고 있다(De Haas 2010, 3).   군사 독트린 상 위험은 위협보다 좀 더 구체적인 사항들로서, 각각 8, 9 항목을 통해 외부와 내부 위험으로 나누어 기술되고 있다. 외부 위험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나토의 위험이고, 다음으로는 개별 국가들의 전략적 안정을 해치려는 시도, 러시아 접경지 내 군사력 확장, 전략 무기 및 미사일 배치, 러시아와 동맹국들의 영토 침해와 내정 간섭, 대량 살상 무기•미사일 기술 확산, 개별 국가의 국제 협정 위반, 테러리즘 등 총 11가지 사항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Военная доктр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2010/2/5). 러시아가 처한 내적 위험으로는 러시아의 정체(政體)를 바꾸려는 시도, 러시아의 영토 통합성과 주권에 대한 침해, 국가기구의 작동 방해 등 일반적인 사항이 언급되고 있고, 안보개념 문서에서 다루어졌던 에너지, 인구, 사회 경제 발전 등의 문제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편 러시아가 처한 ‘위협’으로는 군사 및 정치적 상황의 급격한 악화 등과 같이 ‘위험’보다는 좀 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내용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인식은 좀 더 실제적인 “위험 인식”으로 구체화되면서, 이 위험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응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러시아의 구체적인 위험 인식은 결국 대응책 마련 간에 군사적 조치가 수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군사 독트린 상 러시아가 군사 및 정치적 협력을 해야 할 대상의 우선순위로는 벨로루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독립국가연합(CIS), 상하이협력기구(SCO), 국제연합(UN)이 지목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나토 확장에 따른 자국의 군사적 위협 및 위험에 대한 인식 수준이 대단히 높으며, 동시에 다자주의적 군사 안보에 대해 높은 기대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신 군사독트린이 특이한 점은, 2010년을 전후로 나온 외교정책 및 안보 관련 문건들과는 다르게 러시아가 중국, 인도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De Haas 2010, 4). 러시아에게 군사적으로 중요한 동맹은 CSTO 국가들로서 러시아는 CSTO 국가들에 대한 공격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의 동맹 범위를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상의 분석은 러시아의 외교안보 정책이 점차 초기의 국제주의적 기조에서 벗어나 강대국 위상 회복을 희구하거나 과시하기 위한 독자적 정책노선 강화로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루지야 전쟁 발발과 함께 이러한 변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 섞인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크림합병 조치에 의해 좀 더 확실한 정책으로 현실화됐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러시아의 정책적 선회는 탈냉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국제질서가 좀 더 심각한 변화 압력과 직면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가능케 한다.   III. 푸틴 3기 러시아의 동북아 및 한반도 정책   러시아의 동북아 정책은 안보, 군사, 외교 정책 원칙 측면에서 매우 어려운 고민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최근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 푸틴 대통령 시기 러시아의 동북아 및 한반도 정책에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신범식 2013a, 151-152)...(계속)

신범식 2014-08-25조회 : 1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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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73] 미중 데탕트와 소련: 국제정세 인식과 대응

국민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학부 러시아학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영국 글라스고우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세계지역연구소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 연구분야로는 러시아정치 및 역사, 여성정치 등이 있다. 저서 및 편저로는 《러시아의 미래와 한반도》(2009, 공저), 《러시아의 선택: 탈소비에트 체제전환과 국가•시장•사회의 변화》(2006, 공저), 《한•러관계사료집 1990-2003》(2005, 공저), “러시아 체제전환:민주화 이행과정에서의 시민사회의 역할과 한계”(2012), “스탈린의 산업화 전략과 소련 공산당 기능의 변화, 1928-1932: 레닌그라드의 사례연구”(2002) 등이 있다.         I. 머리말   1969년 소련 외교에서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모스크바와 워싱턴 간 비밀외교루트(back channel)가 만들어지고 전략핵무기제한협정(SALT) 교섭이 시작된 것, 서독에서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집권하자 서독과의 불가침조약 교섭에 들어간 일, 그리고 우수리 강 다만스키 섬에서 중소간 무력 충돌이 발생한 것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1970년대 소련 외교의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즉 소련은 미국 및 서유럽에서 적극적인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중국과의 분쟁을 해결하지 않은 채 방치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중소 분쟁이 제공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국을 끌어들여 미중 화해라는 극적인 변화를 도출해냈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 전반 데탕트 시기에 일어난 일련의 국제정세 변화는 냉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기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정책으로서의 데탕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고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더불어 끝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데탕트 시기에 이루어진 미중 화해 및 국교정상화는 1980~199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의 중국의 부상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세계질서 재편에 중요한 초석을 놓은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1970년대 당시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슈퍼파워로 전세계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데탕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미중 화해를 얼마나 자국에게 위협적인 사건으로 이해했었는가? 소련은 중국의 부상 가능성을 간과하였던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렇게 오판을 하였던 것인가? 본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970년대 전반기 소련 지도부의 대외 인식과 외교 정책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1970년대 소련 지도부의 대외 인식이나 외교정책 결정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러시아 내부 1차 자료를 활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적, 재정적 제약으로 인하여 본 연구는 2차 자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데탕트 시기의 국제관계를 보여주는 1차 자료로는 러시아연방대통령문서고(APRF), 러시아연방외교정책문서고(AVPRF) 등이 소장하고 있는 회의록 및 공식문서 , 1971년과 1976년에 각기 열렸던 24차, 25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 회의록, 소련 정부 및 공산당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였던 프라브다, 이즈베스치아 등의 신문 사설 등이 존재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 중 소련공산당 전당대회 회의록만을 참조하였다.   한편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가 제공하는 웹사이트(The National Security Archive),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의 국제냉전사프로젝트(CWIPH: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등에서 러시아 문서고의 일부 자료와 미국 국무성 등의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 외에 미국에서 출간된 냉전사 관련 단행본들도 본 연구에 주요 자료를 제공하였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주미대사였던 도브리닌(Anatoly Dobrynin)의 회고록(Dobrynin 1995), 미국 및 러시아 문서고 자료를 활용한 냉전사 연구서(Zubok 2009), 키신저 회고록(Kissinger 1982) 및 녹취록(Burr 1998), 가토프 (R. Garthoff)의 데탕트 및 냉전사 연구(Garthoff 1994)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본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전반기의 소련 지도부의 국제 정세관이나 대중국 인식을 살펴보기에는 자료가 여전히 부족하여 많은 부분에서 추측에 의존하거나 의문점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추후의 연구가 이를 보완하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II. 중소 분쟁의 심화와 소련 지도부의 대중국관   1969년 중소 국경 분쟁이 발발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소련과 중국 관계는 균열되기 시작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 이후 견고해 보였던 중소 관계는 1950년대 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1959년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의 중국 방문 이후 양국 지도자 간의 인신공격이 시작되었고,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毛泽东)은 후르쇼프의 소련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이에 소련은 중국에 근무하던 자국 전문가를 소환함으로써 중국 경제에 압박을 가하였으나, 중국은 ‘자력갱생’을 외치며 소련과는 다른 사회주의 길로 들어섰다.   이처럼 중소 갈등 초기 양국의 대립 양상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갈등으로 비추어졌지만, 그 내면에는 현실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Zang 2010; Radchenko 2010). 무엇보다 중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에 대해 소련이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중국의 소련에 대한 불만과 의혹이 커졌다. 소련은 원자폭탄 기술의 중국 이전을 거부하였고, 1963년에는 미국이 제안한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중국의 불만을 샀다. 이에 더하여 후르쇼프의 스탈린(Joseph Stalin) 격하운동은 중국 내 마오쩌둥의 위상에 부정적 함의를 주는 것이었기에 마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몹시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1964년의 말리놉스키(Rodion Malinovsky) 사건 이후 마오쩌둥은 소련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한편 1965년 소련의 베트남 쿤밍 공군기지 건설계획,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사건 등은 중국 지도부가 소련의 대 중국 군사개입의 가능성을 실질적 위협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1969년에는 중소 국경에서 무력분쟁까지 일어났으니 소련과 중국의 양자 관계는 최저점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당시 소련은 왜 중국과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분쟁이 고조되게 만들었을까? 사실 소련이 중국 지도부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유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주복(Vladislav M. Zubok)의 연구에 따르면, 후르쇼프 실각 후 성립된 소련 집단지도체제 시기(1964-1968)에 소련 지도부는 소련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자본주의 서구와의 데탕트가 아니라 “형제”국가인 공산주의 중국과의 화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Zubok 2009, 197). 그러나 소련 지도부는 중국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격변 상황(문화혁명으로 치닫고 있는)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베이징의 소련 외교관들이 현지 상황에 대한 보고를 모스크바에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보고서는 적절한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이다. 1965년 체르보넨코(Stepan Chervonenko)를 대신하여 주중대사가 된 라핀(Sergey Georgyevich Lapin)은 냉소적인 당 관료 출신으로서 현지 상황에 대한 적절한 분석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Zubok 2009, 197). 한편 1965년 코시긴(Alexei Kosygin) 수상은 하노이 방문 시 2차례에 걸쳐 베이징을 방문하여 각기 저우언라이(周恩来)와 마오쩌둥을 만났으나 회담 결과는 낙담할만한 것이었다. 중국 대표는 매우 완고했고 이념적으로 공격적이었으며,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였다. 코시긴 수상은 베트콩에 대한 원조 문제를 두고서도 중국과의 정책 조정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1969년 중소 국경지역 분쟁 발발 초기 소련은 중국에 대해 군사•외교적 수단을 모두 동원해 대응하였다. 3월 최초의 교전 발생 이후 소련은 중국의 군사행동에 대해 군사보복을 가하는 한편, 코시긴 수상은 중국 지도부와 전화통화를 시도하였으나 중국 지도부는 정상적인 외교채널을 통해 연락을 하라며 통화를 거부하였다. 소련은 1964년에 중단된 중소 국경문제에 대한 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 중순 중국 신장과 카자흐스탄 간의 국경지역에서 갑작스럽게 발발한 교전 이후 소련의 태도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8월 28일 프라브다(Pravda)지는 중국의 모험주의로 인해 중소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것은 핵전쟁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와 더불어 극동•시베리아 지역 소련군 증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9년 25개 사단이었던 소련군은 1973년 45개 사단으로 증강되었으며 전술전투기는 200개에서 1200개로 증가하였고, 이 지역에 있었던 50여 개의 SS-4, SS-5 중거리 탄도미사일들은 120개의 신형 SS-11로 대체되었다. 이에 대해 가토프는 소련이 극동-중앙아시아 지역 내 모든 군사 전력을 증강함으로써 위기가 발생할 경우 유럽과 아시아 양쪽 2개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것을 결정했다고 해석하였다(Garthoff 1994, 231-232).   이처럼 소련은 외교적 노력을 포기하고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방향으로 대 중국 외교 정책 방향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국경분쟁 후 소련 지도부가 가지고 있었던 중국의 비합리적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이 주요하게 작동했다. 주복에 따르면, 당시 모스크바에서 다음과 같은 농담이 돌았다고 한다. “극동의 소련 사령관이 급하게 크렘린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5만 명의 중국인이 방금 국경을 넘어와 항복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Zubok 2009, 210) 종합적 국력에서나, 핵 전력에서나 전혀 비교할 바가 되지 않는 중국이 소련을 상대로 군사 분쟁을 일으킨 사실은 소련인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비합리적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소련인들이 중국을 두려워했다면 그것은 공격성(혹은 공격 능력)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비합리성”에 방점이 있는 것이었다.   결국 1969년 국경분쟁에 대한 소련 측 태도는 중국을 겁주어서 중국인들이 다시는 소련 국경에서 도발하지 못하도록 억지하는 것이었다. 1969년 코시긴이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났을 때, 저우언라이는 소련의 선제 핵 공격에 관한 “소문”을 언급하였고 당시 배석하였던 소련 외교관은 이를 중국이 소련의 핵 공격 가능성에 대해 매우 겁을 먹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이 소련에 대해 전쟁을 계획하거나 시작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였다. 이 대화가 있은 후, 소련 지도부는 중국에게 위협적인 시그널을 다시 보냈고, 중국은 소련과의 비밀 불가침조약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핵 위협을 통해 중국을 억지하려는 소련의 전술은 잘해야 절반의 성공이었다. 소련의 핵 위협은 결국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미국과의 화해를 추구하고 북쪽의 북극곰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을 추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고전적인 의미의 안보딜레마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미중 화해를 주도했던 키신저(Henry Kissinger)의 녹취록을 보면,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 인해 야기되는 중국의 안보 불안감은 상당히 컸고 미국은 이를 중국을 미국 측으로 끌어당기는 카드로 사용하였다.   한편 소련 측의 중국과의 관계개선 노력이 1969년 중소 국경분쟁 발발 이후에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9년 코시긴 수상과 저우언라이 회담 당시 양국은 대사급 외교관 교환을 합의하였고 , 1970년 톨스티코프(V. S. Tolstikov) 소련 대사가 베이징에, 리힌구안(Li Xinguan) 중국 대사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양국 간 무역도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1972년에는 2억 9천만 달러 규모에 달하기도 했다(Garthoff 1994, 241). 그러나 양국 관계는 상호 불신과 적대감이 지배하였고, 결코 미중 화해가 그랬던 것처럼 전격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았다. 1972년 미중 화해 직후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삼각외교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중국에게 불가침 및 국경문제 해결을 위한 “건설적” 제안을 하였지만, 중국은 이미 더 이상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이 필요하지 않았다(Garthoff 1994, 242). 그 결과 데탕트 시기 내내 소련은 삼각외교에서 불리한 한 축으로 남게 된다.   III. 미중 화해와 소련 지도부의 국제정세 인식   그렇다면 소련 지도부는 중국이 소련에 대항하여 미국과 결속할 가능성에 대해 왜 우려하지 않았을까?.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면, 첫째, 중국이 이념적 요인 때문에 미국과 결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가능성, 둘째, 중국이 미국과 화해하더라도 양국 간에 현존하는 현실정치적 문제 때문에 미중 화해의 실질적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가능성, 셋째, 미중 화해가 소련을 적대시 하는 군사적 동맹이 되지 않는 한 소련에 대한 위협 요인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가능성, 넷째, 중국 및 미국의 외교 현황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한 오판 가능성 등을 상정해 볼 수 있다...(계속)

강윤희 2014-08-25조회 : 14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