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는 국가이익뿐 아니라 국민의 삶과도 직결되는 외교안보 분야의 어젠다 설정과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2004년 6월에 18명의 외교안보 전문가로 국가안보패널(National Security Panel: NSP)을 구성하였다. 이후 국가안보패널은 《21세기 한국외교 대전략: 그물망국가 건설》(2006), 《동아시아 공동체: 신화와 현실》(2008), 《21세기 신동맹: 냉전에서 복합으로》(2010), 《위기와 복합: 경제위기 이후 세계질서》(2011), 《2020 한국외교 10대 과제:n복합과 공진》(2013), 《1972 한반도와 주변 4강 2014》(2015), 《미중의 아태질서 건축경쟁》(2017) 등 일곱 권의 책을 출판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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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6] 국제질서 변환과 전략적 각축기의 미·중관계: 중국의 전략적 입장과 정책을 중심으로

국가안보전략연구소(INSS) 연구위원 겸 지역연구팀장. 상하이 푸단대학교(上海復旦大學)에서 중국정치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도쿄대학(東京大學) 동양문화연구소 외국인연구원 및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대만(臺灣)외교부 초청 타이완펠로우십 방문학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분야는 중국 대외관계 및 동아시아안보이며 한국국제정치학회 연구이사, 중국외교안보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시진핑 지도부의 등장과 중국의 대외정책: '지속'과 '변화'의 측면을 중심으로," "South Korea-China Security Cooperation: Focusing on the North Korean Opening/Reform and Contingencies," "중국의 에너지안보정책과 중미관계 전망," 외 다수가 있다.       I. 들어가는 말   1970년대 초반 미국과 중국의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지던 시기 미국에게 있어서 중국은 결코 전략적 각축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손을 잡아야 했던 선택적 대상의 하나였으며 일종의 대리방어막에 불과했을 따름이었다 (키신저 2012, 270-272).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와 동아시아 아키텍처에서 중국은 일정부분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중국은 몰락한 소련을 대신하여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 다만 20세기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치열한 전략적 경쟁으로 점철되었다면 21세기의 미•중관계는 경쟁과 협력, 갈등과 타협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아가 미국과 중국은 세계질서와 동아시아의 새로운 아키텍처를 형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행위자로 작용하고 있다. 21세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략적 각축의 부담은 도전자의 위치에 있는 중국이 더욱 크게 느끼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기존 패권국은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 자체를 좌절시키거나 또는 부상속도를 늦추기 위해 예방전쟁, 봉쇄 및 관여전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에 대응해 왔기 때문이다.  반면 부상하는 중국은 기존의 세력전이(power transition)이론 혹은 공격적 현실주의(offensive realism) 이론 등이 주장하는 미·중 ‘충동불가피론’과 ‘현상타파론’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적 주장들을 극복하면서 ‘평화발전론’을 실현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즉, 미국의 직•간접적인 봉쇄와 견제를 돌파함과 동시에 주변국이 느끼는 ‘중국위협론’을 해소하면서 자국의 생존과 이익 공간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중국은 자국의 부상이 대내외적으로 기정사실화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른바 “평화발전”(和平發展)과 “조화세계”(和諧世界)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부상이 결코 기존의 국제체제와 주변국에 위협을 가하지 않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중국이 추구하는 미래 국제사회는 조화로운 세계(harmonious world)를 지향한다는 것이다(中華人民共和國國務院新聞辦公室 2011). 이와 같은 중국의 주장 및 전략은 냉전종식 후 ‘평화’와 ‘발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도광양회”(韜光養晦)와 “유소작위”(有所作爲)를 주장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사상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최근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한 시진핑(習近平)은 21세기 “중국의 꿈”(中國夢)과 “중화민족의 부흥”(中華民族的復興)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대외관계의 키워드로 “새로운 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를 내세우면서 특히 미·중관계에서의 상호이해증진과 전략적 신뢰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전략적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기 위한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정치의 두 중심축인 미국과 중국 즉, 주요 2개국 체제(Group of Two: G2)가 아시아•태평양을 무대로 펼치는 패권경쟁이 향후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안보의 판을 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자국의 부상으로부터 기인하는 21세기 국제질서의 변환과 미·중 전략적 각축의 파고를 헤쳐 나가기 위해 어떠한 대외전략과 목표를 수립하고 있을까. 또한 중국은 대미관계는 물론 새로운 동아시아질서의 구축을 위해 어떠한 전략적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은 미•소 냉전시대를 넘어 미•중 양강체제로 굳어져 가는 역사적 변환기에 중국 대외전략의 내용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 다가올 새로운 아키텍처의 모습을 전망하면서 한국의 정책적 시사점과 대응방향을 모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II. 21세기 미•중관계의 기본 구조와 성격   21세기 미•중관계의 구조와 성격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중관계를 가장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용어는 ‘갈등속의 협력’(cooperation amid struggle)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중관계는 1972년 정상화 이후 현재까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갈등속의 협력’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잖은 전문가들이 미·중관계의 성격을 ‘갈등과 협력’이 병존하는 관계로 묘사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미·중관계는 기본적 갈등구조의 바탕 위에서 선택적 필요에 따라 협력을 추구하는 ‘갈등적 협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욱이 오늘날 중국의 국력이 급속히 상승하면서 미·중관계는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적 수준에서 갈수록 경쟁구조가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구체적 이슈와 영역별로 양국 사이 갈등의 형태로 더욱 자주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미·중 양국이 협력을 강조하고 또한 실제로 협력을 추구하려는 것은 갈등에서 증폭된 대립과 마찰이 상호이익 저해와 세계질서 안정 파괴로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오늘날 미·중관계의 구조와 성격은 ‘전략적 불신 속의 협력’(cooperation amid strategic mistrust)이라는 말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중 간에 이루어지는 많은 범위의 협력에도 불구하고 이는 기본적으로 전략적 불신을 저변에 깐 상태에서 현실적 필요에 따라 협력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미국은 중국의 중•장기적인 전략적 의도와 자국의 국가이익에 대한 도전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미국이 자국의 부상을 억제하거나 방해하며 또한 공산당 정치제도를 훼손하려는 한다고 의심한다(Lieberthal and Wang 2012). 일례로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향한 재균형 정책이 이 지역 안정에 기여하고 지역 내 건설적 역할을 확대하며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이를 자국에 대한 견제와 억제전략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지역정세의 불안정을 초래할 뿐이라고 본다(楊潔勉, 2013, 18; 金燦榮•戴維來, 2012, 19-23; 王義危 2012, 66-72). 이와 같은 미·중관계는 하딩(Harry Hrrding)이 주장한 바와 같이 “깨어지기 쉬운 관계”(fragile relationship) 또는 램프턴(David Lampton)이 묘사한 것처럼 “동상이몽”(same bed different dreams)의 관계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Harding 1992; Lampton 2002).   20세기의 미·중관계는 미국이 일방적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중국에 대해 공세적이고 압박적인 양상을 보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와 달리 21세기 들어서 확연히 드러나는 미·중 간 종합국력격차의 축소는 양국관계를 훨씬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규모는 2010년을 기점으로 미국 다음의 세계2위에 올라섰고, 국방비 지출 역시 2009년부터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국가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2012년 말 기준으로 3조 3,000억 달러를 보유한 세계 1위 외환보유국이며, 그 중 1조 달러 이상을 미국 국채매입에 투자하여 현재 세계 최대의 미국 채권 보유국이다. 중국이 미국의 경제력을 좌우할 수 있는 핵심 열쇠를 쥐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중국은 국력이 증대될수록 ‘국제질서의 민주화’, ‘신형대국관계’ 등을 주장하면서 미국에게 중국을 존중하고 대등하게 대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표 1] 중국과 미국의 각종 국력지표 비교(2012년)                  중국       항목           미국 13.51 인 구 3.139억 9,596,961 ㎢ 국토면적 9,826,675 ㎢ 8조2,271억 달러 전체 GDP 15조 6,848억 달러 6,188 달러 1인당 GDP 4만9,965 달러 3조8,700억 달러 전체 무역액 3조8,200억달러 3조3,000억 달러 외환보유액 1,480억 달러 1,024억 달러 국방예산 6,457억 달러 1척 항공모함 11척 2백28만5천명 전체병력 1백58만2백55명 출처: World Bank, United States Census Bureau, CIA’s the World Factbook, IMF.   물론 미국에게 중국의 부상은 위협인 동시에 기회를 제공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미국은 신흥강대국으로 등장한 중국과 협력하여 다양한 국제 현안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짐으로써 이제까지 국제문제 해결에서 미국이 혼자 짊어지던 부담과 비용을 줄이고자 한다. 미국이 중국에게 요구하는 “책임있는 이해상관자”(responsible stakeholder)다운 행동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입장에서는 세계화 시대 ‘G2’의 지위에 올라선 중국과 ‘동반자’로서 상호 협력 해야 하는 사안들이 급증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중국의 협조 없이는 세계금융위기의 극복이나 북한 핵문제 그리고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등 국제사회의 주요 이슈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때문에 2009년 7월 27일 제1차 미중 전략경제대화(U.S.-China S&ED) 개막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중관계는 21세기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양자관계보다도 중요하다”고 했으며,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클린턴(Hillary Clinton)과 재무장관이었던 가이트너(Timothy Geithner)는 “미국이나 중국이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구적 문제는 거의 없지만 미국과 중국이 함께 한다면 지구상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주장했다(Clinton and  Geithner 2009).   그러나 중국의 종합국력 증대 및 그에 따른 책임 및 역할 확대는 중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주요 국제사안에 대한 중국의 목소리를 키움으로써 중국이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중국의 종합국력이 성장할수록 미중 간 세력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으며, 상호 마찰과 대립의 이슈 영역도 그만큼 증대되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비록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서로가 상대방의 기본이익을 위협하는 전략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 미국은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을 채택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중국이 서구식의 자유민주주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중국지도부는 공산당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꿀 생각이 없으며, 체제변환을 요구하는 미국이 중국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외부위협을 제기한다고 본다. 따라서 중국은 서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군사력과 외교적 영향력을 억제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체하는 주도세력이 되고자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국과 중국이 근본적인 지배이념과 정치체제의 차이 그리고 지정학적 대립의 구조 속에서도 사실상 최대한 충돌을 피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경제 성장에 정책적 최우선 순위를 둠으로써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미국과의 충돌은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전면적 소강사회건설’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국가목표 달성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개혁개방초기부터 미국과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 공통인식의 부분을 확대하며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미래를 함께 창조한다”(增進了解, 擴大共識, 發展合作, 共創未來)는 방침을 강조해 왔다(陶堅 1998, 10). 그리고 오늘날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대미관계에서 이른바 ‘신형대국관계’를 주장하고 있는데 외교부장인 왕이(王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새로이 부상하는 강대국과 기성 강대국이 전쟁 같은 직접적 충돌을 통해 국제질서가 재편됐던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두 주요 강대국이 협력의 기반 위에서 공정경쟁을 통해 세계의 평화적 발전을 이뤄나가자”는 개념을 담고 있다(王穀 2013, 4).   한편 미국의 경우에도 중국과 충돌하기보다는 협력을 통해 상호 윈-윈하는 미래상을 강조하고 있다. 일례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 4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 3월 7일 미국평화연구소(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에서 행한 연설에서 “중국은 소련이 아니고, 미중 양국은 냉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양국은 경쟁과 협력 사이에서 가장 이상적인 균형을 실현하는 대국관계’라고 규정한 바 있다. 나아가 클린턴은 “역사적으로 기성대국에 신흥대국이 도전하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났으나 우리는 처음으로 적대관계나 전쟁이 되지 않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하고 또 쓸 수 있다”고 역설했다(Clinton March/7/2012). 비록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사이에 세력전이를 둘러싼 충돌의 역사적 사례가 빈번하다 하더라도 이처럼 미국과 중국이 상호 충돌을 회피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공표하고 있다는 점은 21세기 국제질서의 변환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미·중관계가 한·미, 미·일 관계보다 구조적이고 역학적으로 훨씬 더 취약하고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자국의 미래상에 있어서 관건이라 보고 있으며, 미국은 결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중국에 넘길 생각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또는 재균형 정책은 미국의 이러한 의도를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중국은 이른바 “반접근/지역거부”(Anti-Access/Area-Denial: A2/AD) 전략에 근거하여 미국의 대 아시아 개입을 최대한 차단하거나 거부하려 들고 있다(김성걸 2012, 42-67).   그런데 미중 양국의 갈등과 협력은 단순히 양자관계의 범위를 넘어서 지역적, 세계적으로도 매우 커다란 파급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미국과 중국 모두 상대방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그 중요성과 어려움이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미·중관계에는 사회구조와 성격 차원에서 다양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이슈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단선적 전략으로는 양국관계를 풀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그만큼 서로를 상대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냉전시대 미국의 대 소련전략은 안보문제에 그 중점이 있었던 반면 오늘날 중국에 대한 전략은 군사•안보와 경제이슈는 물론이고 인권과 민주화 등 훨씬 더 다양한 사안들에 대한 고려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결국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양자관계는 갈등과 경쟁의 구조를 바탕으로 현실적 필요에 의한 협력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는 갈등과 협력의 혼재로 특징지어진다고 하겠다. 미국과 중국은 국제질서에 대한 ‘동상이몽’의 전략적 고려가 작용하고 있으며,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주도권 경쟁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문제는 향후 21세기의 미·중관계가 경쟁보다 협력의 방향으로 이동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키신저(Henry Kissinger)도 지적한 바와 같이 미·중 양국이 통상적인 갈등과 협력 이슈에 대해 상호 대화하고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비전을 공유함과 동시에 지역 갈등이나 긴장 해소를 위해 양자 수준을 넘어서는 위기관리 차원의 포괄적 협의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Kissinger 2011, 526-530). 그럴 때 비로소 미·중관계는 갈등과 대결의 구조를 벗어나 새로운 공동진화(co-evolution)의 구조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계속)

박병광 2014-03-26조회 : 13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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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8] 미·중시대 북한식 국제정치 독해: 자주외교 불패 신화의 유산

국가안보전략연구소(INSS) 책임연구위원. 북한과 한반도 관련 정책 개발에 대한 자문을 맡고 있다. 통일부 정책보좌관(2006),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행정관(2003-2006년)을 역임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외교사, 한국외교정책, 동아시아 국제관계 등이다. 주요 논저로는《유교적 사유와 근대국제정치의 상상력》, “한국의 근대국가 개념 형성사 연구”, “환재 박규수와 시무의 국제정치학”, “김정은 시대의 북한과 대북정책 아키텍처”, “North Korean Nuclear Threat and South Korean Identity Politics in 2006,” “Rebuilding the in-ter-Korean Relations,” “Understanding the Dokdo Issue,” “2013년 북한의 전략적 선택과 동아시아 국제정치,” “청대 한국의 유교적 대중전략과 현재적 시사점” 등이 있다.       I. 북한식 판 읽기와 전략적 선택   역대 북한 정권의 노선은 국내정치 및 국제정치적 수요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주체노선’은 내부적으로는 1950년대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연안파, 소련파 등 정적을 제거하고 김일성의 권력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외부적으로는 냉전과 1950~60년대 중소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북한의 외교 자원을 극대화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김정일의 ‘선군노선’은 19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을 강행해야 할 정도로 취약했던 북한 체제의 위기 속에서 가장 의존할만한 세력인 군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동시에 선군노선은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한·소수교, 한·중수교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치 환경이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핵을 체제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내포한 것이었다.   김정은 정권이 내세운 ‘병진노선’ 역시 2012년 이후 북한 체제가 직면한 국내외적 도전들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선군노선이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한계를 직시하여 다양한 개혁조치로 경제의 활력을 제고하는 동시에 기성 세력과 신흥 세력의 갈등을 미연에 봉합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말하자면 ‘병진노선’은 상호모순적 수요를 봉합하기 위한 솔루션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등 대국들을 대상으로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렇듯 역대 북한 정권의 노선은 대개 북한 체제가 당면한 국내정치 및 국제정치적 상황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본 연구는 그 중에서 주로 국제정치적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즉, 국제정치에 대한 북한식 판 읽기와 대응이 얼마나 정확하고 성공적이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이른바 미·중시대의 단초가 형성되기 시작한 김정일 정권 말기부터 오늘날 김정은 정권까지, 대체적으로 2009년부터 2013년까지를 다룬다.   결론부터 말해서 김일성의 주체노선과 김정일의 선군노선이 일정하게 국제정치 흐름에 조응하는 판단을 토대로 적어도 북한 체제의 생존을 확보하였다고 한다면, 김정은이 지난 2년여 동안 보여준 모습은 그다지 스마트해 보이지는 않는다. 주체노선과 선군노선이 나름대로 장기간 숙성된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병진노선은 매우 급조되고 설익은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병진노선의 대외적 유용성은 한국, 미국, 중국 등 주변국들의 동시 거부로 처음부터 실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김정은 정권은 주변국들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2012년 12월 장거리 로켓 발사와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을 강행하여 주변국 신정부들의 대응 의지를 시험하였으며,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뒤따르자 급격히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며 한반도 전략구도의 현상변경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2013년 들어 수개월간 지속되었던 북한의 소위 “판가리” 시도는 전략적 실패로 판가름 났으며, 미·중 중심의 대국정치에 대한 북한의 무모한 도전은 굴욕적인 특사 외교와 대화 구애로 귀결되었다.   본 논문은 지난 수년간 북한이 보여준 북한식 판 읽기와 대응 과정을 복기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국제정치적 현실에 조응하고 있는지 평가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 시기가 이른바 미중시대의 도래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북한의 미중 읽기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또한 미·중시대의 도래라는 시기적 변수를 고려하고 김정은 정권과의 비교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김정일 정권 말기부터 검토하기로 한다.   II. 김정일의 마지막 3년: 저무는 선군시대와 생존 외교   김정일은 2008년 하반기부터 지병인 뇌경색으로 인해 건강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본인의 살아생전 업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안정적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을 서두르게 된다. 김정일은 선군시대의 최대 업적을 우주개발과 핵보유국 지위 획득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우선 이를 공고화하는데 주력했다. 소위 2012년 김일성 탄생 1백주기, 강성대국 원년의 해를 맞이하기 이전에 자신의 치적을 충분히 쌓아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북한이 2009년을 “혁명적 대고조”의 해로 명명하고 제2차 핵실험을 강행한 주된 배경이었다.   2008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소위 불량국가들과의 직접 대화 의사를 표명한 오바마(Barak Obama) 대통령이 당선됨에 따라 북핵문제 협상이 가속화되리라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다. 비록 6자회담이 검증 문제로 2008년 12월 중단되기는 했지만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 협상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과정이 끝나기도 전에 2009년 4월 장거리로켓을 발사하고 5월에는 2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는 북한의 국내정치적 수요가 그만큼 절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둘러 선군노선의 업적을 마무리하고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와의 협상은 2차 핵실험 이후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추진해도 늦지 않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기에 접어든 김정일 정권의 이러한 행보가 국제정치적 상황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굉장히 민감한 반응이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김정은 정권 말기가 이른바 미·중시대의 단초가 형성되는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다. 2008년 미국의 리만브라더스 사태 이후부터는 세계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주요 20개국(Group of Twenty: G20)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등 신흥국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그 중에서도 국력이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역할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9년 들어서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등에 의해 주요 2개국(Group of Two: G2) 회의가 주창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개최된 미중 정상회담은 미중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미·중시대는 양국 간의 협력뿐만 아니라 경쟁도 동시에 격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2009년 11월 정상회담 이후에는 오히려 갈등과 견제의 패턴이 부각되었다. 미중 양국은 2010년 이후 대만 무기판매, 달라이 라마 면담, 위안화 절상, 구글 문제 등 이른바 4대 현안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마찰을 노정했다.   이에 김정일은 중국의 국력 급신장과 더불어 미·중시대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지했으며 중국에 베팅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된다.  즉, 김정일은 2010년 이후 본격화된 미·중 간 갈등과 견제를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그 중에서도 2010년 5월 김정일의 중국 방문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이후의 대북제재와 외교적 고립 탈피와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지지 확보로 요약된다. 중국은 실제로 천안함 사건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한미가 서해상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미중 간 경쟁과 견제 관계 속에서 중국에 편승하여 실익을 도모하고자 했던 김정일의 계산이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김정일은 5월 5일 후진타오(胡锦涛)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국력”을 거론하며 중국측을 치켜세웠으며 비핵화 공약과 6자회담 재개 의지를 표명하여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조선중앙통신> 2013/05/08). 2013년 8월 김정일이 4개월 만에 다시 중국을 방문한 것도 5월 방문과 동일한 맥락에서였다. 특히 북한은 동년 가을 제3차 노동당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은 후계구도를 공식화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얻는데 주력하였다. 결국 후진타오 주석은 8월 27일 환영 연회 연설을 통해 김정일이 4개월도 못 되는 사이에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조선노동당대표자회가 원만한 성과를 거둘 것을 축원”함으로써 김정은 후계구도를 사실상 승인했다(<조선중앙통신> 2013/08/30). 미·중 간 갈등이 우세한 정세 속에서 강화된 북한과 중국의 전략적 동맹은 2010년 11월 연평도 사태에서도 재확인되었다. 중국은 북한의 선제 도발이 명백하고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태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으로 관련국들의 긴장고조 행위 자제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촉구하는 등 사실상 북한을 외교적으로 지원했다. 2011 년 1월의 미·중 정상회담은 미·중관계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할만 했다. 모두 6개 부문 41개항으로 구성된 방대한 공동성명이 상징하듯 양국은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합의를 도출했다. 2009년 11월의 공동성명은 미·중관계의 발전을 위한 “전략적 신뢰”를 강조하는데 머물렀으나 2011년 1월의 정상회담은 미·중관계를 “협력적 동반자관계”로 명확히 정의했다. 또한 양국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 역사문화적 배경, 경제발전 수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협력적 관계의 ‘사례’를 형성했다고 평가하고 새로운 유형의 강대국 관계를 지향해 나갈 것임을 시사했다(The White House January/19/2011). 말하자면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 이후 미·중관계의 새로운 패턴이 시작되었으며 이른바 “신형대국관계”의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형대국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미·중 간의 협력적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이는 한반도 문제가 인권, 군사, 경제 등 여타의 핵심 이슈에 비해 미·중 간 합의 도출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1년 1월의 정상회담에서도 양국 정상은 이례적으로 한반도 문제 논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남북대화와 6자회담 재개 등 한반도 문제에서의 합의를 정상회담의 핵심적 성과로 소개했다. 북한은 2011년 1월의 미·중 정상회담을 예의주시했으며 그 결과를 비교적 신속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했다(<조선중앙통신> 2011/01/22). 당시 북한은 미·중관계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협력 경향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중시대의 도래에 대응한 김정일의 선택은 북중관계 강화였다. 미중관계는 경쟁적 요소와 협력적 요소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어떤 경우이건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만이 북한 체제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김정일이 2010년 5월과 8월에 이어 2011년 5월까지, 일년 사이에 세 번째 중국을 방문했던 주된 배경이었다. 그의 마지막 중국 방문은 2010년 9월 당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체제를 공식화한 이후의 방문으로서 향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을 위해 북·중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행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는 고리는 비핵화 공약, 그리고 경제중시 노선으로의 전환이었다.   김정일 체제하 북한은 2006년, 2009년 2차례에 걸친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비핵화 공약을 유지했다. 주지하듯이 김정일의 선군노선에서 핵심은 핵선군이었으며 반복적 기만 전술과 합의 파기로 진정성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비핵화 공약 자체를 폐기한 적은 없다. 6자회담을 통한 비핵화 공약은 중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으며 2010년 5월, 8월과 2011년 5월 정상회담에서의 핵심적 합의 사항이었다. 특히 2011년 5월 정상회담에서는 “전조선반도의 비핵화 목표를 견지하고 6자회담의 재개 등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며 장애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전반적 이익에 부합된다고 인정하면서 이를 위해 의사소통과 조율을 잘해 나가자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고 공언하는 등 매우 강한 톤으로 비핵화 공약을 재확인하였다(<조선중앙통신> 2011/05/26). 또한 김정일의 육성 신년사를 대신하는 신년공동사설은 2차 핵실험이 있었던 2009년을 포함하여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까지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김정일 생전 마지막 육성 기록인 2011년 10월 13일 이타르-타스 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위대한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우리 공화국 정부의 시종일관한 입장입니다”고 밝히고 있다(<조선중앙통신> 2011/10/19). 비핵화 공약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김정은 체제가 등장한 2012년 신년공동사설에서부터였다. 이어 2012년 4월에는 사회주의헌법 서문에 핵보유국을 명기하게 된다....(계속)

김성배 2014-03-26조회 : 1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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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5] 1972년 중국의 대미 데탕트 배경과 전략

동덕여자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중국 북경대학교 국제관계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과 현대중국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동아시아연구원 중국연구 패널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 대외관계, 중국 소수민족, 중국의 민족주의 등이다. 최근 연구로는"시진핑체제 외교정책의 변화와 지속성,"  "중국 민족주의 고조의 대외관계 및 한중관계 영향," “China’s policy and influence on the North Korea nuclear issue: denuclearization and/or stabil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중국 미래를 말하다》(편저), 《중국의 영토분쟁》(공저), 등이 있다.                 I. 서 론   2012년 2월 시진핑(習近平) 당시 중국 부주석은 미국을 방문하여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 라는 중미관계의 새로운 구상을 제시했다. 1972년 2월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통해 미중 데탕트의 새로운 역사를 창출한지 40년이 되는 시점에 공교롭게도 중국이 선제적으로 중미간 ‘신형 데탕트’를 제안한 것이다. 시진핑은 방미중에 40년 전 닉슨의 중국 방문이 수십 년간 양국을 단절시킨 두꺼운 얼음벽을 깨트린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미중이 21세기 두 번째 10년을 맞이하는 새로운 시기에 ‘신형대국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하자는 화두를 제시한 것이다.   시진핑이 구상하고 있는 신형대국관계의 속내는 “중국은 미국이 아태지역의 평화, 안정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환영하며, 동시에 미국이 중국과 역내 국가들의 이익과 관심을 분명하게 존중해주기를 희망한다”는 시진핑의 언급에서 엿볼 수 있다(<中国日报网> 2012/02/16). 요컨대 아태지역에서 상호 핵심이익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존•공영하자는 것이다.   40년 전 중국은 미소 양 초강대국으로부터 협공의 위협에서 탈출하고자 미국의 데탕트 제안을 수용하는 전략적 도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국은 자국의 부상 일정을 완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특히 반(反)중국 연대 형성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미국에게 새로운 데탕트를 제안하고 있다.   40년 전 중국이 두려움과 의구심 속에서 미국이 내민 데탕트 손길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역으로 미국과 국제사회가 중국이 내민 신형대국관계라는 새로운 데탕트 제안에 의구심을 가지고 주저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 글은 2012년 중국이 제안한 신형대국관계가 어떠한 의도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중국의 부상과 새로운 데탕트 제안이 국제질서와 세력관계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할지, 그리고 미중의 신형대국관계 논의가 한반도에는 어떠한 함의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현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40년 전 역사적 사건을 복기하려는 것이다. 1972년 전후의 역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재검토가 현재의 문제에 분명한 해답을 주지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적 맥락에서 중국의 의도와 전략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 역시 1972년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고자 하는 만큼, 2012년 중국이 제안한 신형대국관계가 40년 전과 비교하여 어떠한 변화와 연속성이 있는지 발견하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 글은 1972년 상해공동성명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 중국의 렌즈에 초점을 맞춰 복기하고자 한다. 우선 중국이 어떠한 국내외적인 배경과 인식에서 미국의 데탕트 요구에 응답하게 되었는지를 재검토한다. 둘째, 보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중국이 1969년부터 1972년 약 2년여의 기간 동안 미국과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내부적 논의와 전략적 판단을 가지고 협상을 진행했는지를 검토한다. 끝으로, 이러한 복기를 바탕으로 중국에게 1972년의 역사적 경험이 현재에 어떤 영향과 의미를 가지는지 탐색한다. II. 냉전시기 중국 ‘반패권주의’ 외교의 의미   냉전시기 중국외교는 이데올로기와 안보가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은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한 직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양극체제가 고착화되는 국제환경에 직면하여, 외교정책을 결정할 때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주의주의(主意主義)를 통해 혁명의 열기를 국가통치의 주요 근간으로 견지해왔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입장에서 1960년대까지 대외관계에서 세계 공산주의 혁명과 이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태생적 대외정책 목표의 하나였다. 따라서 중국은 건국과 함께 소련과 동맹을 맺어 ‘소련 일변도’(對蘇一邊倒) 외교를 전개하고, 제3세계 국가 내 공산당 또는 친공세력의 민족해방운동과 혁명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냉전시기 중국이 세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실제 대외정책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국가 안보였다.  이는 냉전시기 중국 외교전략과 외교이론의 변화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냉전기 중국 외교전략의 변화에 따른 시기 구분이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매 10년 단위로 변화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외교이론’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는 양대진영론에 따른 소련일변도외교, 1960년대에는 세계혁명론에 근거한 반제반수(反帝反修)의 반미반소전략(反美反蘇戰略), 그리고 1970년대 3개 세계론을 기치로 한 반소 국제통일전선전략으로 변화가 진행되었다.    중국은 안보에 최대의 위협이 누구인가 하는 판단을 바탕으로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우적(友敵)을 명확히 구분하는 ‘우적개념’(友敵槪念)의 변화에 따라 대외정책을 결정하였다. 냉전시기 중국이 대외 관계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주된 이데올로기였던 ‘반패권주의’ 역시 주변 안보환경에 대한 중국지도부 인식의 표출이었다. 즉 반패권주의의 주 대상은 수사적인 의미나 내용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해도 실질적인 내용상 항상 중국의 주된 위협세력이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국 직후인 1950년대에 마오는 혁명시기부터 누적된 소련과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반미(反美)•반패권주의를 주창하고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하며 전폭적인 소련일변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당시 최대의 위협으로 인식했던 미국으로부터 제기되는 안보 위협을 상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오의 입장에서 미국은 국공내전 중에 국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내전종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대만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고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을 펼친 주적(主敵)이었다. 심지어 한국전을 통해 직접 교전을 벌이기도 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 소련과 불거진 갈등이 국경분쟁으로까지 악화되자 미국에 더하여 소련에 대한 위협인식까지 고조되었다. 이로인해 대외적으로 세계혁명론과 반미 제국주의, 반소 수정주의 기치를 내세우며 미국•소련 양 초강대국 모두를 패권주의로 규정하고 이 들 양 강대국에 대항하며 독자노선을 견지하는 외교전략을 전개했다. 세계혁명론 자체는 이데올로기 성향이 강한 담론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대소련 관계악화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관계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불가피하게 ‘두 개의 전선’(兩條線)이 형성되어 협공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수사적 성격이 강하다(张小明 1997, 7-10).   중국은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의 극심한 혼돈기를 거치며 1970년대에 외교적 고립과 위협에서 탈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3개 세계론’을 주창하며 미소 양 패권국에 대항할 수 있는 견제세력으로 제3세계국가들과 반패권 통일전선을 기치로 관계발전을 모색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1969년 소련과 국경충돌을 경험한 중국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위기의식이 최고조에 이르며 소련을 최대의 위협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중국은 소련의 위협을 상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미국과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즉 당시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있던 미국보다는 소련이 더욱 현실적 위협이라는 인식하에 미국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이른바 반소패권주의의 ‘연미항소’(聯美抗蘇) 전략을 전개해 갔다.   이와 같이 중국은 냉전기간 사실상 안보적 고려에 의해 미소 양극체제와 이른바 미-중-소 전략적 삼각관계라는 초강대국 관계에 깊숙이 개입되어 세계적 강대국이 아니면서도 마치 세계적 강대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냉전시기 중국 대외정책은 미소 양 초강대국 중에서 어느 쪽이 중국에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하는 판단을 기준으로 주적을 설정하고 이러한 주적으로부터 제기된 위협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외교는 표면적으로는 강대국 관계에 깊숙이 개입되어 마치 강대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상 내용적으로는 약소국 외교의 전형인 안보를 위한 반응적•수세적 양상을 띠는 기형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던 냉전시기 전반에 걸쳐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반제국주의’, ‘반수정주의’, ‘반패권주의’ 등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대외전략 기치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본질적으로는 마오 등 주요 지도자들의 안보위협에 대한 인식이 대외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로 작동했다. 당시 마오의 안보위협 인식은 실체보다는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었으며,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2만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장 국경을 지닌 취약한 물리적 안보 환경, 소위 ‘100년 치욕’ 로 대변되는 근대 피침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내부 체제 및 국력의 취약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50년대 결과적으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던 소련과 동맹조약 체결을 통한 일변도 외교를 선택하여 국가발전과 안보 이익 확보를 추구했고, 1960년대 외교적 고립을 경험한 이후 1970년대 초 냉전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주적이었던 미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안보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계속)

이동률 2014-03-26조회 : 12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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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7] 북한 1972 진실 찾기: 7.4 공동성명의 추진과 폐기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위원.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한국 핵 문제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국제문제연구소 초청연구원,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초청연구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한국평화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하영선 칼럼”을 7년 동안 연재하였으며, 한국외교사 연구 모임, 전파 연구 모임, 정보세계정치 연구회, 동아시아연구원 모임 등을 이끌어 왔다. 저서 및 편저로는 《2020 한국외교 10대 과제: 복합과 공진》,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2》, 《복합세계정치론: 전략과 원리 그리고 새로운 질서》, 《하영선 국제정치 칼럼 1991-2011》, 《역사 속의 젊은 그들》, 《위기와 복합: 경제위기 이후 세계질서》, 《12시간의 통일 이야기》, 《네트워크 세계정치》, 《북한 2032: 선진화로 가는 공진전략》, 《21세기 신동맹: 냉전에서 복합으로》, 《근대 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동아시아공동체 : 신화와 현실》, 《변환의 세계정치》, 《네트워크 지식국가》, 《21세기 한국외교 대전략: 그물망국가 건설》, 《21세기 평화학》, 《국제화와 세계화》, 《한반도의 핵무기와 세계질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I. 머리말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악몽 같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고 한국전쟁이라는 세계적 규모의 비극을 맞이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질서는 본격적으로 지구 차원에서 군사 대결의 모습으로 건축되기 시작했다. 미소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새 건축물은 단단하게 지어져서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질서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축의 변화를 겪게 된다. 지구 차원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긴장관계의 완화라는 데탕트를 시도하고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역사적 관계개선에 접어들고 중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를 이루게 된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휴전상태에 머물러 있던 한국과 북한도 1971년 8월부터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서 다음 해인 1972년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에 기반을 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미니 데탕트는 오래 가지 못했다. 공동성명 실천을 논의하기 위해 10월에 열린 제1차 남북 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부터 커다란 시각 차를 보이기 시작하여 결국 세 차례의 공동위원장회의와 조절 위원회를 통해 상호 이견을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1973년 8월 28일 북한은 사실상 <7.4 남북공동성명>의 폐기를 선언했다. 한반도 미니 데탕트의 추진은 2년 만에 한 여름 밤의 꿈같이 깨졌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을 뒤늦게나마 21세기에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미니 데탕트의 핵심이었던 <7.4 남북공동성명>이 어떻게 추진되고 또 폐기되었는가를 제대로 복원해 보려는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연구는 <7.4 남북공동성명>의 추진과 폐기를 복원하기 위해서 현대 팝 아트의 대가인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고향인 영국 동요크셔의 월드게이트(Woldgate) 숲길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 쓴 방법을 빌려 왔다(Hockney 2010). 호크니는 2010년 11월 자동차 앞에 부착한 아홉 대의 비디오 카메라로 각각 각도를 달리하여 고향 숲길을 한 화면으로 구성해서 연속 촬영한 후 최종적으로 맑은 날과 눈 내린 날의 두 화면을 대비시키는 시도를 했다. “1972 한반도 2014”의 공동연구도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소련 그리고 일본이라는 여섯 대 카메라를 사용하여 1972년 한반도 미니데탕트의 좌절과 2014년의 상황을 대비적으로 촬영하여 오늘날의 한반도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려는 것이다. 이 글은 여섯 대의 카메라 중에 북한 카메라의 시야에서 1970년대 초 한반도 미니데탕트의 촬영을 시도한다. 다른 카메라에 비해서 찍을 수 있는 피사체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폐쇄적인 북한 정치권력이 남겨 놓은 최소한의 자료들을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시야 융합(fusion of visions/Horizontverschmelzung)을 원용한 해석학적 렌즈로 촬영하여 1972년 북한의 진실 찾기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Gadamer 1989, 298-306; 578-579). 그 첫 단계로 1971-1973년 김정일을 주축으로 한 북한 정치권력의 시야 형성에 핵심적 영향을 미친 1964년 이래 3대 혁명역량의 과거시야를 요약하고, 둘째, 1970년대 초반 북한이 당면하고 있던 3대 혁명역량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을 선택했으며, 셋째, 북한이 3대 혁명역량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면서 <7.4 남북공동성명>을 폐기했는가를 해석하게 될 것이다.   II. 3대혁명역량 시야의 영향   1972년 7월 4일 아침 10시. 서울과 평양은 지난 5월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그리고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한 것을 각각 동시에 밝히며,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천명하고, 긴장상태를 완화하며 다방면의 교류를 실시하고,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는 내용의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국가로서 양국 핵심 권력의 만남은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북한이 제의한 통일의 3대 원칙에 한국이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우선 북한이 <7.4 남북공동성명>을 추진하게 된 배경적 진실을 찾기 위해서 1970년대 초 북한 시야가 1960년대 3대혁명역량 시야의 영향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추적하기로 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적대 관계는 쉽사리 개선되기 어려웠다. 통일을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남북한의 공통된 인식은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서 새로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64년 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8차 총회에서 “조국통일의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혁명역량을 백방으로 강화하자”라는 연설에서 처음으로 3대 혁명역량 강화로 조국통일을 실현하자고 선언하고(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64) 구체적 방법을 1965년 4월14일 인도네시아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조선 혁명에 대하여”라는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김일성 1965/04/14). 우리 조국의 통일,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는 결국 3대력량의 준비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잘하여 우리의 혁명기지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더욱 강화하는 것이며, 둘째로, 남조선인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튼튼히 묶어 세움 으로써 남조선의 혁명력량을 강화하는 것이며, 셋째로, 조선인민과 국제혁명력량과의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다.   북한의 전쟁통일이라는 시야가 1960년대의 새로운 상황을 맞이해서 혁명통일이라는 시야로 변모 하게 된 것이다. 김일성은 이어서 보다 구체적으로 3대 혁명역량 강화를 기반으로 한 통일 방안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민족적 량심을 가진 민주인사가 정권에 들어앉아 미군 철거를 주장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하며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이라면 그들과 언제 어디서나 평화적 조국통일문제를 가지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루차 표명하였습니다. …… 우리는 남조선에서 미제 침략군대를 몰아낸 다음 남북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고 서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데 대한 협정을 맺으며 남북 사이의 경제 문화 교류와 인사왕래를 비롯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며 조선인민의 자주적 의사에 따라 평화적 방법에 따라 조국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이 마련될 때 자유로운 남북조선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주주의 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남조선 당국에 여러 번 제의하였습니다. …… 남조선에 미제 침략군대와 현 괴뢰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나라의 평화통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조국의 통일을 가로 막는 기본장애물인 미제침략자들을 남조선에서 몰아내고 그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며 현 군사파쑈 독재를 뒤짚어 엎고 혁명의 승리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남조선에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 서면 공화국 북반부의 사회주의 력량과 남조선의 애국적 민주력량의 단합된 힘에 의하여 우리 조국의 통일은 순조롭게 실현될 것입니다.   북한의 1970년대 초 통일방안은 첫 단계로, “미제침략군대와 현 괴뢰들”을 몰아낸 다음, 둘째 단계로, 민족적 양심을 가진 민주정부와 군비축소, 무력불사용협정, 다양한 교류협력 조치를 취하고 자주 의사에 따라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본조건을 마련하며, 마지막 단계로 한국에 인민정권이 수립되면 북한의 사회주의 역량과 한국의 애국적 민주역량의 단합된 힘으로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허담 외무상은 1971년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제4기 5차 회의에서 “현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통일을 촉진 시킬데 대하여”라는 보고에서 다음과 같은 ‘통일 8개항’을 제시했다(허담 1971/04/12). 첫째,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을 철거시키는 것입니다. 둘째, 미제침략군이 물러간 다음 남북 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는 것입니다. 셋째, 남조선괴뢰정권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매국적이며 예속적인 조약들과 협정들을 폐기하며 무효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넷째, 자주적으로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적인 중앙정부를 세우는 것입니다. 다섯째,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위하여 정치활동을 벌릴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며 남조선에서 체포, 투옥된 모든 정치범들과 애국자들을 무조건 석방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완전한 통일에 앞서 필요하다면 현재와 같은 남북의 각이한 사회제도를 그냥 두고서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조선연방제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남북간의 통상과 경제적 협조, 과학, 문화, 예술, 체육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호상교류와 협조를 실현하며 남북 간의 편지거래와 인사래왕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여덟째, 이상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각 정당, 사회단체 들과 전체 인민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써 남북조선 정치협상회의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1971년 6월 10일 평양을 방문한 루마니아 당정대표단에게 남북한의 분쟁 발생은 반드시 소련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미국을 개입시킬 것이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아시아 분쟁은 지구 규모의 전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유관국 모두가 전쟁을 조심스러워 하고 있으므로 북한은 전쟁적 방도로 통일을 추진하는 대신 혁명적 방법의 ‘통일 8개항’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박정희가 무너지면 우리는 우리나라의 통일을 이를 원하는 누구와도 협의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남조선 상황의 전개는 남조선 민주세력과 인민의 투쟁에 달려 있다.”라고 강조했다(Woodrow Wilson Digital Archive 1971-1972). III. 7.4 남북공동성명의 추진   김일성 수상은 빠르게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남조선혁명의 실현과 조국 통일을 위한 평화공세”를 취하고자 1971년 8월 6일 연설에서 한국의 집권당인 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단체들과 협의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국제혁명역량의 강화를 위한 평화공세로 “아시아인끼리 그리고 한국인끼리 싸우도록 하려는 닉슨 독트린을 좌절시키고, 한국군 근대화를 지원하고 한반도 분단을 지속하고 한국을 군사기지화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맞서고, 일본의 한국 침투를 좌절시키고, 한미일의 협력을 막을 것”이라고 설명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h). 북한은 평화공세의 목적을 국제혁명역량의 강화와 더불어 남한의 혁명역량강화에 두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평화공세의 또 하나의 목적은 남한 파시스트 억압의 제거다. 남한괴뢰정부는 북한의 남침계획을 핑계로 남조선인민들에게 파시스트 억압을 강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북한은 남침 의도가 전혀 없다. 이것을 남조선 인민들에게 증명해야 한다. 동시에 남조선 정부에게 인민과 민주세력들을 억압하려는 구실을 주지 말아야 한다. 남한 혁명역량은 가능한 한 빨리 강화돼야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한 반동세력의 억압 수단과 반공 신경질이 금지돼야 한다. 북한은 평화공세로 남북의 문호를 개방해서 남조선인민들에게 북한사상의 영향을 미쳐서 남한의 민주화를 달성하려는 것이다(Woodrow Wilson Digital Archive 1972a).   남북한은 1971년 9월 20일 남북적십자 1차 예비회담을 개성에서 개최하고 회담을 계속했으나 쉽사리 의제선정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난항을 거듭했다. 11월 20일 남북대화의 실무를 맡고 있던 한국의 정홍진과 북한의 김덕현이 별도로 비공개 만남을 합의하고 판문점에서 시작해서 평양과 서울을 거치는 어려운 협의를 통해 72년 3월말 최종적으로 이후락과 김영주의 남북교환방문을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이후락 정보부장은 1972년 5월 2일 역사적 평양방문을 하게 된다. 이후락 부장은 김영주와 두 번의 회의를 했고 5월 4일 0시 15분부터 1시 30분까지 평양 만수대 김일성 관저에서 김일성 수상을 만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이후락 부장이 먼저 자주적으로 통일을 해야 하는 것이 박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한 다음에 김일성 수상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 통일 3대원칙”을 반복해서 강조했고 이후락 부장은 “세가지 원칙을 통일의 기둥으로 삼고 통일은 꼭 이룩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박대통령의 생각도 동일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이후락 부장은 4일 오후 1시에서 2시10분까지 다시 김일성 수상을 만났다. 김일성 수상은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이 외세배격하고 외세에 의해서 통일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러한 우려가 없어졌고 또 남조선은 우리가 남침한다고 우려했는데 내가 전쟁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런 우려 없어졌고 남은 문제는 민족단결을 위해서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다음에 다시 한 번 “이제 두 가지 오해 풀었습니다. 첫째, 미국, 일본과 결탁하여 전쟁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 남침, 적화 통일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 오해 풀렸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단결문제인데 이것은 더 연구하고 토의하면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김일성 1992-2012b; 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b; 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c).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은 5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여 이후락 부장과 가진 1차 회의에서 지난 5월초 이후락-김일성 회의 결과를 다시 한 번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d). 우리는 남조선에서 집권하고 있는 분들이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여 살아가려 한다고 생각했으며 남에서는 우리가 남침을 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남북이 서로 오해하고 불신한 근본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번의 평양회의에서 그 쪽에서는 외세에 의존할 생각이 없고 절대로 대미 대일 관계에서 자주성을 잃지 않겠다는 것을 말씀하였고 우리는 애당초 남침할 의도가 없고, 우리 제도를 남조선에 강요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언 하였습니다. …… 조국통일의 근본적 입장에 대해서 원칙적 합의를 본 조건에서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이미 합의된 원칙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구제적인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풀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성철 부수상은 이후락 부장과의 두 차례에 걸친 회의에서 구체적인 문제들로서 조절위원회의 설치, 기타위원회, 합의내용의 공개문제 등을 논의했다. 또한 그는 5월 31일 저녁 7시에 40분간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여 “조국통일 3대원칙에 평양회의에서 합의했으며, 오해와 불신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였고, 서로 신임을 두터히 하고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하자”는 준비된 원고를 낭독하였으며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 3개 원칙의 합의를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협의기구를 만드는 것은 찬성이나 추진방법은 현재의 상호불신을 고려하면 단계적으로 해야 하며, 합의내용의 공개는 반대하였다 (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i). 남북한 실무 팀은 6월 21일부터 30일까지 남북공동성명 합의서를 준비하여 7월 4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으로 발표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e). 북한 외무성 부상 이만석은 7월 17일 사회주의 우방국들에게 <7.4 남북공동성명>의 추진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공동성명의 내용을 요약했다(Woodrow Wilson Center for International Scholars 2009f). 그리고 성명의 핵심인 통일 3대 원칙은 김일성 수상이 이후락을 만났을 때 처음 제안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완벽하게 동의했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정부의 패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만석 부상은 <7.4 남북공동성명>의 영향을 남한 혁명역량 강화와 국제 혁명역량의 측면에서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선 남한의 혁명역량강화를 바람직하게 평가했다. “남조선 인민들은 만장일치로 공동성명을 대사건이라는 것에 동의했고 기쁨과 열정으로 이를 지원”했으며 “남한의 야당과 주요인사들은 정부가 제정당의 참여 없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재개한 것에 항의”했고 “야당들은 반공법과 비상조치들의 철폐를 요구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남한지도자들이 눈에 띄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그가 남북한의 사회단체, 개인, 체육인들의 교류 방문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것과 더불어 이후락 부장이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대화를 확대하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고 새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두고 한 얘긴데, 김종필 총리는 이러한 논의에 관해 국회질의 응답에서 반공법과 비상법들을 바꿀 필요가 없고, 북한을 아무나 여행할 수 없으며, 북한방송 청취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성명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국제혁명역량 강화의 평가에 대해 이만석은 “미국은 수사적으로는 성명을 환영했으나 다른 한편 으로는 괴뢰정부를 지원하고 돕기를 원하고 있다.”며 조금 더 신중했다. 7월 5일 미 국무부는 공동 성명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근대화는 계속된다고 선언했고, 미군 규모는 줄지 않을 것이며, 통일은 유엔 감독하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성명의 영향을 조심스럽게 분석한 북한은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남조선 지도자들이 모두 미래 협상에 참여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남한을 미국과 일본에서 떼어 내고, 그들로부터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 하나 북한의 초점은 미국과 일본이 더 이상 한반도 내부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적극적 조치로 남북한 간에 현존하는 장벽을 제거하고 폭넓고 포괄적인 연대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이만석 부상은 최종적으로 사회주의 우방들이 남한이 북한과 포괄적 협상을 하도록 만들고 결과적으로 남한을 “국내적 그리고 국제적으로 고립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남한의 추가적 고립화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계속)

하영선 2014-03-26조회 : 1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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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3] 미중데탕트와 일본: 1972년 중일국교정상화 교섭의 국제정치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겸 원장. 미국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도쿄대학교, 와세다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방문교수를 거쳤고, 현재 동아시아연구원 일본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주 연구분야는 일본 및 국제정치경제, 동아시아 지역주의, 글로벌 거버넌스 등이다. 최근 연구업적으로는 “지역공간의 개념사 : 한국의 ‘동북아시아’”, “한미FTA와 통상의 복합전략”, “동아시아에서 지역다자경제제도의 건축경쟁”, “Japanese Market Opening Between American Pressure and Korean Challenge” 등이 있다.         I. 들어가며   중화세계의 변방인 일본이 메이지유신과 근대화로 급부상하면서 시작된 중국과 일본 사이의 백년 경쟁은 1972년 국교정상화로 역사적 전기를 맞이하였다. 주은래(周恩來)의 표현에 따르면 진나라 이래 2000년의 우호관계란 긴 “정상상태”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신시대를 모색해온 양국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전략적, 군사적 경쟁을 벌이는 “비정상 상태”로 빠져들고 있고 따라서 동아시아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협하는 주요인으로 자리잡았다.   1972년 이전 일본의 대중관계는 1945년 패전 6년후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동아시아에 냉전체제가 형성되면서 미국의 대중정책, 미일관계에 의해 구속받았다. 일본은 미국의 대중포위 전초기지화 압력에 직면하여 대만과 중국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해야 했다. 1952년 대만(중화민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지만 대만과 국교관계를 기본으로 하되 대륙중국과는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경제적 관계를 축적해가는 실용주의 정책을 함께 펼쳤다. 그러나 1957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수상의 타이베이 방문으로 중국은 정경분리 원칙을 파기하였다. 60년대 장기집권한 사토 에이사쿠(佐藤英作) 정권은 기본적으로 친대만파인데다가 당시 최대 외교과제인 한일 국교정상화교섭과 오키나와 반환에 몰두하여 문화대혁명으로 혼란스런 중국과 관계개선에 나서지 못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바꾼 역사적 사건은 1971-1972년 미중 데탕트이다. 전후 중일관계의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미중대립이었기에 미중관계의 신국면이 열리면서 일본과 중국은 신시대를 열 기회의 창과 마주하게 된다. 중소관계의 악화에 따라 중국의 주적이 미국에서 소련으로 교체되면서 새로운 안보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중국 정부와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상대적 쇠퇴의 추세를 돌려놓으려는 미국의 닉슨(Richard Nixon) 정권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데탕트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1971년 7월 15일 키신저(Henry Kissinger) 방중 발표는 미국의 급속한 대중접근을 전혀 예상치 못한 당시 일본사회에 ‘닉슨쇼크’라 불릴 정도의 충격을 주었고 친대만, 친미성향 사토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또한 10월 26일 중국대표권 문제 표결로 대만이 유엔(United Nations: UN)에서 축출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동시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선정된 사건은 국내정치적으로 일본에 큰 반향을 가져왔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변화 속에서 1972년 7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정권이 탄생하고 중일관계 개선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러나 정작 교섭을 주도한 측은 주은래(周恩來) 수상을 필두로 한 중국이다. 1971년 미중 간(키신저과 주은래) 진행된 상당히 솔직한 대화 속에는 주은래의 적나라한 일본관과 강한 대일경계의식이 표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본과 수교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전략적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일본은 무엇을 원하였는가? 중일수교가 갖는 역사적, 전략적 의미는 무엇인가? 기존의 여러 중일국교정상화 연구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해 왔다(Lee 1976; 金熙德 2002; 添谷芳秀 2003; 毛里和子 2006; 高元明生•服部龍二 2012; 손기섭 2012; 최은봉•오승희 2012). 이 글은 중일수교 교섭 과정에서 미중 양국의 대일전략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FRUS)와 일본측 수교교섭문헌으로 《記錄 考證 - 日中國交正常化ㆍ日中平和友好條約締結交涉》(石井明 外 2003) 두 일차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하여 중일접근이 썩 달가울 수 없는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 다루기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일본과 중국은 이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분석한 다음, 1972년 일-중-미 관계의 현재적 함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II. 중국의 대일전략   1971-1972년 미중 대화에서 일본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는 주은래이다. 그가 이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미국이 아시아로부터 철군하는 경우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여기서 양국 지도자들이 토로한 대일전략은 대단히 흥미롭다. 주은래는 일본위협론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일본인에게는 팽창주의적 경향이 있다. 일본의 경제적 확장은 필연적으로 군사적 확장으로 이어질 것이어서 […] 미국이 아시아에서 군대를 모두 철수시키면 아시아를 통제할 전위로서 일본의 능력을 강화하는 게 미국의 목적인 것이 아닌가 (毛里 2004, 1971/07/09)   주은래는 “일본군국주의자의 야망”을 걱정했다. 일본이 대만으로부터 자국의 생명선인 말라카 해협까지 군사적으로 진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국으로부터 미군철수 이후 일본군이 한반도로 진출하지 않을까 등 수차례에 걸쳐 우려를 표명한 후, 일본위협론을 간단히 펼친다. 일본의 천황제는 “군국주의를 지탱하는 시스템의 기초”로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일정책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런 인식하에 미일안보체제 강화를 강하게 비난하였다.   주은래의 일본 군국주의론은 단순한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끊임없이 일본위협론을 제기하며 1970년대 초반 일본이 군국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음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 군국주의 세력과 절연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류 정치세력 즉,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주도한 보수본류는 전전의 군국주의 전통과 거리를 두는 한편 미일동맹으로 안보를 미국에게 위임하고 대신 경제성장을 신보수의 핵심 이념으로 삼고 매진하는 창조적 전략을 추구해 왔다는 점은 분명하다(Pyle 2008). 다만 1970년대 들어 사토 정권이 요시다 노선으로부터 탈선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 예컨대 1969년 닉슨-사토 코뮤니케와 당시 일본에서 진행 중이던 제4차 방위력정비계획 등을 전전회귀의 징표로 볼 수도 있었는데, 이조차 후일 역사를 비추어 볼 때 그릇된 판단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미일동맹과 전수방위의 틀 속에서 제한된 군비확장의 경우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래가 일본을 군국주의 부활로 경계하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대만문제에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이래 일본은 대만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사토 정권은 대만에 총액 1억5천만달러 규모의 엔 차관을 공여하여 대만의 수출지향형 산업화를 견인하였고 양국간 무역규모도 급속히 확대되었는데, 중국정부는 이를 “경제침략”이라 비난하였다. 안보 측면에서도 오키나와 반환을 확정한 닉슨-사토 코뮤니케 제4항에서 미일 양국은 대만지역에 대한 평화와 안전의 유지가 일본의 안전에 극히 중요한 요소라는 이른바 ‘대만조항’을 천명해 아시아지역 내 미국의 군사적 역할을 일본이 분담하려 한다는 인식을 중국에 줌으로써 반발을 샀다. 대만문제에 있어서 미국의 축소(retrenchment)에 따른 힘의 공백을 일본이 메울 가능성을 중국은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만 등 이 지역에서 미국이 철퇴하기 전 일본의 무장세력이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일본과 대만은 장개석(蔣介石)이 맺은 조약, 이른바 평화조약을 유지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이를 강조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毛里 2004, 1971/07/07).   요컨대, 중국이 미중 데탕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중일국교정상화는 직접적으로 걸리는 과제가 아니었다. 반면, 미군철수에 의한 힘의 공백을 일본이 메우게 될 때 초래될 대만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고, 따라서 미국의 대만방위를 일본이 대신 담당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여 일-대만 관계를 단절시키는 과제가 중요하게 떠오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일본의 잠재적 위협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했다.   주은래의 집요한 일본위협론에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내가 대학에서 가르친 이론에 따르면 우리[미국]가 일본으로부터 철수하면 일본의 재무장을 허락하고 태평양 저편에서 일본과 중국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의 정책은 아니다. 사실 일본이 대대적으로 재군비에 나서면 1930년대 정책을 되풀이할 지도 모른다(毛里 2004, 1971/07/09).   미국의 정책은 “일본이 공격적 정책을 취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다는 이른바 ‘병마개(bottle cap)론’을 펼쳤다. 1972년 2월 22일 닉슨은 정상회담에서 “보증은 할 수 없지만 우리[미국]는 일본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정책으로 일본이 한국 및 대만에 대해 모험을 걸지 못하도록 저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반복했다(毛里和子 2006, 64 재인용, 1972/02/22).   반면 주은래는 평화를 원하는 ‘일본인민’에 기대를 걸면서 동맹에 의한 병마개론이 아닌 일본의 중립화를 역설하였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주은래와 키신저]는 일본의 팽창주의가 위험하다는 데 합의하였으나 이를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 중국은 이 문제에 대해 강한 선입관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모호한 입장을 보인다. 일본의 재군국주의화를 우려하면서 미일간 군사협력을 견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 나[키신저]는 그들이 원하듯 일본이 중립화하면 조악한 민족주의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毛里和子 2006, 65 재인용) 사실 키신저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듯이 일본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세계적 시야를 갖고 있으나 일본의 시야는 부족에 머물러 있고 장기적 비전이 없기 때문에 강한 일본과 강한 중국 중 후자가 팽창주의적이지 않다”며 자신은 “일본에 [순진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고 확언하였다(毛里和子 2004). 그에게는 일본보다 중국이 신뢰할 만한 국제정치 게임의 파트너였던 것이다.   닉슨의 일본관도 다르지 않았다. 1972년 2월 베이징 방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로부터 변화하기를 희망한다. 만약 미국이 일본에 안보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일본은 첫째 생산성 높은 경제에 기반해 전쟁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채 자국 군사력 증강을 경주할 것이고, 둘째 미국의 대체제로 소련에 접근하는 선택지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毛里和子 2006, 64 재인용). 미국은 자국과 안보관계를 맺고 경제지원을 받아 온 일본 및 기타 국가들이 중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정책을 취하지 못하도록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은래는 수차례에 걸쳐 일본을 불신하는 키신저와 닉슨의 태도를 확인하였고, 미국이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므로 일본의 야심을 통제하려 나설 것이라 믿었다. 이 가운데 주은래는 대일전략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일본 인민들에게 거대한 변화가 있기 때문에 현재 일본이 1930년대의 일본과는 다르다며, 미중이 일본정부의 팽창주의 정책을 좌초시키고 평화정책을 돕는다면 사태는 개선될 것이라 말하였고, 또한 미일동맹이 병마개 역할을 하는 한 일본이 대만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는 크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이제 중국은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동시에 대만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중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주은래의 기본인식은 미중 데탕트와 같았다. 중소대결 구도 속에서 미소 상호견제를 이용하여 미중관계를 풀어 나아갔듯이 중일관계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따라서 국교정상화 실현의 최대 과제는 일본의 의향에 있었다. 과연 일본이 미국이 하지 못한 대만과 단교를 선언하면서 중일 수교로 나올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계속)

손열 2014-02-16조회 : 1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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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4]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21세기 외교전략: 보통국가의 다차원화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통일연구원 연구원, 미국 버클리대학교 APEC 연구소 박사 후 연구원,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최근 저작으로는 Northeast Asia: Ripe for Integration? (공편), Trade Policy in the Asia-Pacific: The Role of Ideas, Interests, and Domestic Institutions (공편) 등이 있다. 그 외 〈한국정치학회보〉,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 The Pacific Review, Asian Survey 등의 저널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주된 연구 분야는 동아시아 지역주의, 글로벌 FTA 네트워크, 동아시아 국가들의 제도적 균형 전략이다.         I. 21세기 일본 외교의 도전: 세계적 세력재편과 국내정치의 변동 사이에서   2010년대 일본 외교는 중대한 기로에 있다. 2012년 취임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헌법 개정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추구하는 한편, 외교안보정책의 포괄적 기본 지침인 국가안보전략의 채택과 그 제도적 기반으로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발족시키는 등 매우 의욕적인 외교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아베 내각은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 영국, 러시아, 호주는 물론 아세안(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 ASEAN)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등 상당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에서 북핵 위협에 이르기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한 가운데 독도와 센카쿠(尖閣)/댜오위다오(釣魚台)에 대한 한국 및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 2013년 4월 무라야마(村山) 담화 수정을 시사하는 아베 총리의 발언, 2013년 12월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에서 나타나듯이 최근 일본 외교는 주변국과의 갈등은 물론 국내외의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보수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베 내각의 이러한 행보는 중국의 부상으로 상징되는 세계 및 지역 질서의 재편과 국내정치적 변화의 국면에서 일본 외교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설정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외교의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일본 국내의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된 적은 1980년대 말을 포함하여 과거에도 수차례 있었다. 전후 일본 외교정책의 기조로 오랜 기간 견지되었던 요시다(吉田茂) 독트린은 고도 경제성장과 국제적 쟁점에 대한 수동적 태세를 요체로 하였다. 요시다 독트린이 장기간 일본 외교정책의 기조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고도 경제성장을 지탱하는 외교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이를 체계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1990년대 세계 2위의 경제력에 걸맞은 외교력을 국제무대에서 행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걸프전(Gulf War)을 계기로 경제외교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시기 일본 외교가 ‘무임승차론,’ ‘수표책 외교’(checkbook diplomacy), ‘카라오케(カラオケ) 외교’ 등으로 비하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일본은 미국이 결정한 정책 노선의 테두리 안에서 정책을 실행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경제적 기여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이 국내에서 치열하게 제기되었다(Inoguchi and Jain 2000). 세력 재편의 변화에 대한 불안, 국제정치의 근본적 성격 변화, 급변하는 지역 안보 환경, 새로운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열망 등이 고도 경제성장과 외교정책의 수동성을 축으로 하는 요시다 독트린의 전면적 변화를 촉진하였던 것이다.   경제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일본은 지역과 국제 차원에서 자신의 입지를 적극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Green 2001). 오자와 이치로(小沢一朗)가 “보통국가론”을 주창하면서 탈냉전 시대의 일본 외교 방향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물꼬를 틀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이다. 오자와는 “군사를 포함하여 적극적인 국제 공헌을 추구함으로써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小沢一郞 1993).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1999년 주변사태법 제정, 2001년 테러대책특별조치법, 평화유지활동(peacekeeping operations: PKO)협력법 개정, 그리고 2003년 이라크지원특별조치법 제정 등을 통해 국제적 공헌을 증대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발 빠르게 마련해 나갔다. 그러나 1997년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 등에서 나타나듯이 보통국가화의 귀착점이 미일동맹의 강화였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드러냈다.   2013년 재집권한 아베 내각은 일본 외교정책 기조의 변화를 다시 한번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아베 내각이 직면한 도전은 국내 정치변동과 국제정치적 차원의 세력 재편이 동시에 전개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국내적으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이념 지형에 기반한 “새로운 대전략”(new grand strategy)을 수립할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으며(Samuels 2007), 대외적으로도 탈냉전 시대에 중국의 부상과 북핵 위협에 대한 외교적 적응이 절실하다(Pyle 2007). 또한 탈냉전 초기의 국제 및 지역의 지정학적 상황이 구조적이고 점진적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면, 21세기 일본이 직면한 도전은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2000년대 초 중국의 부상에 대한 우려가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언젠가 중일관계의 변화를 초래하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다소 막연한 우려였다면, 센카쿠/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영토분쟁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2010년대 일본이 대처해야 할 대중국 문제는 매우 구체적일 뿐 아니라, 즉각적이면서도 전략적인 대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북한의 핵문제 역시 6자 회담이 가동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도 하였던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상황은 판이하다. 이처럼 2010년대 일본은 구조적 변동에 대한 깊은 전략적 고려를 하는 가운데, 현안 문제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엄중한 현실에 처해 있다.   일본 외교는 국내정치 변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2009년 8월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480석 가운데 208석의 절대안정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면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종식시킬 때만 하더라도 새로운 정치가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선거 때 내세운 공약을 정책화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면서 2012년 12월 다시 자민당에게 정권을 내주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일본 정치는 빈번한 총리 교체로 ‘정치 리더십의 실종’(political leadership deficit)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5년 6개월 간 재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퇴임 이후, 2006년 9월 1차 아베 내각에서부터 2012년 12월 2차 아베 내각이 재출범하기까지 6년여의 기간 동안 모두 7명의 총리가 교체되었으며, 평균 재임 기간은 1년에 미치지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9년 이후 중의원과 참의원의 다수당이 엇갈리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국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른바 “뒤틀린 국회”(ねじれ国会)에서 중의원과 참의원의 의결이 상이하여 법안 통과가 되지 않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해 국회가 입법 기능 부전에 빠지는 현상이 초래되었던 것이다(Ohya 2008).   이러한 국내정치적 상황에서 민주당의 외교적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외교 면에서 민주당의 집권기에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정부가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에서 벗어난 대미자주노선과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표방한 데서 나타나듯이, 일본 외교는 자민당의 전통적 외교 노선과 차별화된 새로운 외교적 가능성을 시험하는 데 주력하였다(김젬마 2012). 그러나 하토야마 정부는 후텐마(普天間) 미군 기지 이전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역량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는 곧 민주당 정부의 외교적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은 미국과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사실상 과거 자민당의 외교정책으로 회귀하였다.   아베 내각의 국내정치적 기반은 고이즈미 내각 이후 가장 견고한 것으로 평가된다. 아베 내각은 취임 초기 지지율이 70퍼센트에 달하였을 뿐 아니라, 자민당이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294석을 획득하여 여당으로 복귀하는 데 이어, 2013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115석을 획득하고 20석을 획득한 공명당(公明党)과 연합함으로써 양원 다수당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등 그 국내정치적 기반이 매우 탄탄했다. 아베 내각의 외교정책은 이러한 상황에서 가동되었다.   그렇다면 아베 내각 외교정책의 성격과 방식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외견상 아베 내각의 외교는 일본의 군사안보 능력 증대와 미일동맹의 강화라는 보통국가론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아베 내각의 외교적 수단과 방식은 보통국가론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던 과거에 비해 훨씬 다차원적인 것으로 보인다. 즉, 기존 보통국가론은 미일동맹을 재규정함으로써 일본 외교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비교적 단순한 방식에 의존하였다. 반면, 아베 내각의 외교는 미일동맹의 강화를 여전히 기본 축으로 하되, 미국의 동맹 파트너로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향후 일본은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지역과 세계 안보 체제를 연결하는 적극적 공헌자가 될 것”이라고 피력한 것도 미국 추수(追隨)에서 벗어나 일본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것으로 이해된다(每日新聞 2013/12/11). 또한, 일본은 국내 차원에서는 자체 외교 및 군사안보 역량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는 한편, 지역 차원에서는 아세안 등 주변 국가들과의 전략적 호혜관계를 구축하고, 지구적 차원에서는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외교적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2013년 10월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과의 인터뷰에서 아태 지역 내 일본이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군사와 안보 등 다양한 차원에서 리더십 행사를 요청받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 평화주의를 표방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Wall Street Journal 2013/10/25).   결국 아베 내각의 외교정책은 목표와 지향 면에서 보통국가론의 확대 발전, 수단과 방법 면에서 다차원적 접근으로 요약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아베 내각의 외교정책의 초점이 궁극적으로 중국으로 좁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중국의 부상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라는 차원에서 미일동맹을 재편하고, 국내적으로는 외교안보 역량을 강화하는 제도적 정비를 시행하는 동시에, 중국의 부상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과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지구적 차원의 협력을 추구하는 다차원적인 외교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II. 세계질서의 변화와 국내정치 변동   중국의 부상은 세계질서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구조적 변동을 초래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 촉발된 세계 및 동아시아 차원의 변화에 대응하는 일본의 대외전략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의 부상을 대하는 일본의 입장은 매우 복합적이다. 중국은 경제 규모 면에서 2010년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 약 5조 9천억 달러를 기록하여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자 동아시아 최대의 경제국이 되며 일본을 추월하였다. 외환보유고에 있어서도 중국은 2006년 이미 일본을 추월하였고, 2011년 기준으로 중국이 약 3조 2천억 달러, 일본이 약 1조 1천억 달러를 각각 기록하였다. 중국은 이처럼 거대한 경제규모와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세계질서에 일정한 변화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 중국의 대외투자 규모가 2010년 기준 500억 달러를 상회하였다는 점이 이러한 변화를 시사한다. 이처럼 중국이 경제적으로 부상한 2000년대 이후에도 중국과 일본 양국의 경제관계는 한층 긴밀해져왔다. 2005년 양국 규모가 1천 840억 달러를 기록한 이래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11년 약 3천 490억 달러에 달하였다(People’s Daily Online 2012/02/21).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일본과 중국의 교역 규모가 2천 290억 달러에서 2011년 3천 430억 달러로 약 50퍼센트 가까이 증가하였다. 일본 국내경제가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초유의 경제 상황 속에서 중국과 일본 양국의 경제관계는 지속적으로 확대•심화 되었던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 중국의 부상은 동아시아 및 세계 차원의 세력 재편을 촉진하는 변화의 요인인 동시에 양국의 경제적 상호의존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위한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는 기회 요인이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계속)

이승주 2014-02-16조회 : 1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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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국가안보패널 보고서] 2020 한국외교 10대 과제 : Executive Summary

2011년 3월부터 국가안보패널(위원장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이 진행해 온 “2020 한국외교 10대 과제” 프로젝트의 핵심 정책제안을 담은 Executive Summary 보고서가 발행되었습니다. 국가안보패널은 2010년대 한국외교가 직면한 과제들을 중장기적으로 전망•분석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제안하기 위하여 ‘거버넌스,’ ‘안보.’ ‘경제.’ ‘환경’의 4개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이슈들 간의 네트워크적인 연결을 고려한 복합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본 보고서는 아래 NSP Report 시리즈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거버넌스클러스터   미중관계의 변화와 한국의 미래 외교 과제 전재성(서울대학교), 주재우(경희대학교)   안보클러스터   아시아의 미래 안보질서와 한국의 대응전략 이동선(고려대학교)   중국 정치·경제의 변화와 안정성 전망 이동률(동덕여자대학교), 서봉교(동덕여자대학교)   김정은의 북한과 공진·복합의 대북정책 김성배(국가안보전략연구소)   2010년대 한국 해양정책의 과제와 전망 구민교(서울대학교)   경제클러스터   아시아 FTA의 확산과 한국의 전략 : 양자주의의 다자화 가능성을 중심으로 김치욱(울산대학교)   변화하는 세계금융질서와 한국의 선택 : 지역과 글로벌의 다자주의 연계 이용욱(고려대학교)   21세기 개발협력 아키텍처의 변화와 한국 이승주(중앙대학교)   환경클러스터   환경 및 기후변화 국제 정치와 한국 외교 신범식(서울대학교)   인구노령화와 동북아 안보 신성호(서울대학교)   신 글로벌 에너지 아키텍쳐와 한국의 에너지자원협력 외교 방향 김연규(한양대학교)           2020 한국외교 전략 목표와 10대 강령   3대 전략 목표   1. 동아시아신질서를 위해 “공생 복합네트워크”를 건축한다. 2. 북한문제를 “공진전략”으로 해결하고 새로운 남북관계를 마련한다. 3. “중견국 외교”로 지구·지역 거버넌스 설계에 적극 참여한다.   10대 강령   1. 동아시아 세력균형 변화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체제적 유연성’을 확보한다. 우선, 한미동 맹을 21세기 세계질서 변화에 맞게 전략적 복합동맹으로 변환하여 활용도를 극대화하고 한반도, 지역, 지구 차원에서 한국의 위상을 확보한다.   2. 동시에, 중국과 다양한 영역의 협력망을 확대한다. 미중 “신형대국관계”의 형성 과정에서 한미 복합동맹 심화와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의 내실화를 동시에 추구한다.   3. 일본과 근본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3단계 접근법을 시도한다. 단기적으로 현안의 비정치 화, 중기적으로 복합력에 기반한 양자관계 주도, 장기적으로 협력제도화와 정체성 공유를 추진한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지역 내 역할 및 한반도 평화번영체제구축 과정상 역할에 주목하여 한러전략협력관계를 심화한다.   4. 지역 중견국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한국의 영향력을 제고한다. 아세안국가, 호주 및 인 도 등과 협력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대안적 건축을 제시한다.   5. 지역 해양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영유권 문제에 대한 동결 선언을 기초로, 자원공동 개발·해양환경 보호·항행안전 등 비전통안보 영역의 다자협력을 증진하여 해양문제 전 반에 관한 다자 컨센서스를 도출한다.   6. 대북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공진전략”을 추진한다. 1단계로 북한 스스로 핵선군 대 신 비핵안보체제로 진화하도록 돕는다. 북한의 비핵 선경제 모델로의 전환에 남북, 미중, 유엔을 엮는 한반도 복합평화체제 구축을 동조화한다.   7. 공진전략 2단계로 인도적 지원 및 체제전환 지원을 포괄하는 체계적 대북지원을 추진한다. 북한의 정상국가화 및 새로운 남북관계를 도모한다.   8. 한국 및 세계경제의 안정적이고 균형적인 성장을 위해 무역, 금융, 개발협력 부문을 중심 으로 지식기반 네트워크 외교를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9. 환경/에너지/인구, 문화, 정보/지식 등 신흥 이슈영역에서 지구촌 공생을 위한 거버넌스 설 계에 적극 참여하여 한국의 세계적 위상을 높인다.   10. 외교의 주체가 국내외적으로 복합화되므로, 다양한 행위자들과 쌍방향 소통을 구축하는 맞춤형 공공외교를 지향한다. 대외적으로는 지식, 경제발전 경험, 한류 등 소프트파워 자 산을 활용하여 보편적 이익과 한국의 영향력을 확대한다. 대내적으로는 중견국 외교에 걸 맞은 외교문화를 정립하고, 남남갈등을 넘어 국내 통합을 이룩한다.   향후 한국은 한반도 차원은 물론, 지역 및 지구 차원에서 한국 스스로의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외 교전략을 정립해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전략적 비전은 동아시아 공생복합네트워크 건설을 위해 미중 간 전략적 불신을 낮추고, 향후 10년 간 동아시아 세력전이를 평화적으로 흡수 발전시킬 수 있는 체제적 유연성을 확보하며, 새로운 지역제도 기반으로 평화적 세력전이 과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과 정에서 한미동맹을 전략적 복합동맹으로 변환시켜 활용도를 극대화하고 한반도, 지역, 지구 차원에서 한국의 위상을 확보해야 한다. 동시에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에서 구체적 이슈에서 협력을 내실화하고 정부 간 관계를 넘어 다차원의 연결망을 확대해야 한다. 이를 통해 미중이 “핵심이익” 들의 갈등으로 상호 간 전략적 불신이 증폭되고 안보딜레마에 빠지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는 동북아 세력균형의 구조적 변화, 북한 위협의 상존, 미국과의 동맹을 축으로 한 한일 간접협력관계, 그리고 지역 및 지구 차원의 인간안보 부문 협력 등을 고려할 때 중요한 사안이다. 단기 적으로 과거사, 영토 문제 등이 정치화되어 양국 간 협력을 저해하는 상황을 방지하는 한편, 중기적으 로 군사, 경제 등의 하드 파워, 지식, 문화, 제도 등의 소프트 파워, 그리고 네트워크 파워 등을 강화하 여 주도적으로 한일 협력 관계 설정을 위해 노력한다. 장기적으로는 동아시아 지역의 협력 제도화와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고 공유하도록 노력하여 닫힌 민족주의적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한다.   러시아는 동아시아 협력네트워크 형성에 협력촉진자 또는 안정자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자원, 북러 관계 등 정책수단을 기초로 한반도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호주, 인도, 아세안 국가들 역시 지역과 한반도에 중요한 협력 대상이며 중견국들과의 협력 강화를 위해 중요한 파트너이다. 미중 간 전 략 경쟁에서 중견국들이 원하는 지역 전체의 이익을 위해 협력구도를 강화하는데 한국이 주도적 역할 을 해나가는 한편, 지역 다자주의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동아시아 다자주의 협력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제도적 균형의 모습을 띠어왔는데 이를 극복하고 공동의 목적을 위한 제도들 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해양 문제는 경계획정, 자원, 영유권, 해로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어느 한 국가의 일방적 또는 양자적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따라서,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영유권 문 제에 대한 동결 선언에 기초하여 자원의 공동개발, 역내 해양환경 보호, 항행의 안전 도모 등 비전통적 안보의 확보를 위한 역내 다자협력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때, 영토 문제, 어업 문제, 해저자원 개발 문제, 그리고 환경문제를 가능한 한 분리하여 접근하되, 이러한 각론에서의 협력을 바탕으로 궁극 적으로는 해양문제 전반에 관한 상생의 다자간 컨센서스를 이끌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계속)

구민교, 김성배, 김연규, 김치욱, 서봉교, 손열, 신범식, 신성호, 이동률, 이동선, 이승주, 이용욱, 전재성, 조동호, 주재우, 하영선 2012-12-02조회 : 14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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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 Report 62] 미중관계의 변화와 한국의 미래 외교 과제

전재성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시아연구원 아시아안보연구센터 소장.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숙명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최근 저술로는 《정치는 도덕적인가》, 《동아시아 국제정치 : 역사에서 이론으로》,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에 대한 탈근대론과 현실주의의 비판 고찰,” “강대국의 부상과 대응 메커니즘 : 이론적 분석과 유럽의 사례,” “유럽의 국제정치적 근대 출현에 관한 이론적 연구” 등이 있다.   주재우 경희대학교 중국어학부 중국정치외교담당 교수. 주재우 교수는 미국 웨슬리언대학(Wesleyan University)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국가안보정책연구소, 국립싱가폴대학교, 대만국립정치대학교,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George Washington University) 개스톤 시거 동양학 연구소(Sigur Center for Asian Studies) 등 국내외의 많은 연구소의 방문학자와 연구원을 역임해왔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Asia Times Online(www.atimes.com) 한반도문제 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최근 저서로는 단행본 《중국의 대북미 외교안보정책과 통상전략》과 논문 “China’s Relations with Latin America: Issues, Policy, Strategies, and Implications,” “Ideas Matter: China’s Peaceful Rise,” “Mirroring North Korea’s Growing Economic Community Building,” “북한붕괴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옵션,” “중•러 에너지 안보협력과 한국 : 수송문제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I. 문제제기   짧게는 2010년대, 길게는 21세기 전반기 동안 동아시아 국가들 간 세력균형 변화는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질서는 다자주의 협력기제가 결여된 채 권력에 의해 질서가 만들어지는 세력균형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 간 국력배분구조는 여타 지역, 특히 유럽과 같이 다자주의 협력이 안착된 지역에 비해 매우 중요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더욱 명백해진 중국의 부상은 동아시아 세력균형 변화를 이끄는 핵심 요인이다. 개혁개방 이후 연 9퍼센트 이상의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한 중국은 동아시아 최대 경제규모 국가가 된 이래 세계질서 형성 과정에서 미국과 견줄 소위 G2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축적된 경제력이 군사 및 문화부분으로 전이되어 중국의 영향력은 동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로 점차 확대되어 갈 것이고 이 과정에서 중국은 소위 핵심이익을 새롭게 정의하고 이를 증진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 자원을 이용하고자 할 것이다.   중국의 성장과는 별개로 미국 패권의 쇠퇴 역시 동아시아 지역질서에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을 거치면서 탈냉전기까지 미국은 동아시아에 동맹네트워크와 밀접한 경제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아시아 질서에 중요한 행위자로 자리잡아왔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단극체제가 안착되는 듯 했으나 9.11테러사태와 이후 미 패권에 대한 다양한 비판, 그리고 2008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의 패권기초는 심각하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2011년 향후 10년간 국방예산 4,870억 달러를 감축하기로 결정한 이후 국방전략과 재정계획을 전체적으로 재조정하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의 우세전략 혹은 패권전략은 다자주의에 기반한 선택적 개입전략으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축소(retrenchment)전략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패권의 쇠퇴, 혹은 패권의 교체는 상대적 게임이다. 미국 국력의 절대적 약화와 중국 국력의 절대적 증가가 곧 패권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미중 간의 국력 격차가 줄어드는 것 자체가 동아시아 국가들과 한국의 외교 과제에 많은 도전 요인을 안겨주지만 궁극적으로 미중 간의 패권 교체가 일어난다면 이는 동아시아의 지역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대사건이 될 것이다. 미중 간 세력변화가 어떠한 종류의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분석적으로 잘 구별할 필요가 있다.   미중 이외에 동아시아의 중요한 두 행위자인 러시아와 일본 역시 미중 양국보다는 크지 않지만 국력변화를 겪고 있다. 러시아는 원유에 기반하여 경제를 회복하는 추세를 지속하여왔고, 신성장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푸틴 대통령의 당선 이후 정치리더십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동아시아와의 관계를 다시 강화하여 중국과의 경제관계,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 대한 적극적 개입 등을 강조하고 있고 2012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러시아의 중요성을 환기하려 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지속된 경제침체, 정치리더십 불안, 고령화의 장기적 위협, 그리고 2011년 후쿠시마 사태 이후 전력난 등 많은 어려움에 처해 기존의 경제강국의 모습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급기야 중국에게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 규모 세계 2위의 자리를 내주고 국력회복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세력균형 변화가 동아시아 질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이것이 한국의 외교전략 과제를 형성하는데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세력균형 변화는 정치, 군사, 경제,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외교이슈에 공통된 중요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과연 탈냉전기 미국 단극체제에서 미중 양극대결구조로 변화할 것인가, 중국패권구조로 결국 귀결될 것인가, 다극체제의 협력과 경쟁의 모습을 보일 것인가, 혹은 다자협력체제가 자리잡아 현실주의적 세력균형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미국과 중국의 동아시아 질서 구상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며, 세력전이의 최종적 귀결점이 동아시아지역 모든 국가들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다가 2011년 1월 정상회담 이후 각자가 원하는 동아시아 질서건축, 혹은 아키텍처를 본격적으로 실현하려는 구조적 경쟁관계에 돌입하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미중의 직접 경쟁과 아키텍처를 둘러싼 구조적 긴장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로서 평화롭고 발전적인 경쟁과 협력이 지속되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할 처지에 있다.   II. 중국의 부상과 미중세력균형의 변화   동아시아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국가들의 국력발전 속도의 상이성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세력균형 논리가 압도하고 있는 체제 속에서 국력의 상대적 발전 속도는 체제속성의 변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절대적 국력의 변화 중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중국의 국력증강으로, 경제적•군사적 국력이 GDP와 국방비 부문에서 눈에 띄게 향상되고 있다. 상대적 국력으로 보더라도 중국은 GDP로 산정해 볼 때 2000년 세계 6위, 2005년 세계 5위로 세계 2위 자리를 유지한 일본에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2010년부터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2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방비 지출에서도 일본을 제치고 이미 2위 국가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과의 격차인데 격차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불문가지이고 대략 2020년대 중반 이후 GDP 추월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현재 미국의 국방비 감축 추세로 볼 때 국방비 역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이라는 현상은 분석적으로 볼 때, 21세기 국제정치에서 중요해진 소프트 파워, 권력 자원의 추세, 국제정치에서 구조적 권력, 국가전략의 변화 등을 모두 포함한 개념이므로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힘의 증강이 지역질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는 좀 더 분석이 필요한 일이다.   1. 경제적 발전   중국은 1978년 경제개혁개방 이후 9퍼센트 이상의 경제성장을 계속해 왔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도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빠르게 경제를 회복하여 향후에도 5퍼센트 이상의 경제성장을 지속할 전망이다. 2010년 현재 중국이 일본의 GDP를 추월해 세계 2위의 지위에 올라섰다는 것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이 경제적으로 일본을 다시 앞서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중국은 2007년 독일을 제치고 세계 3위로 올라선 이후 3년 만에 다시 일본을 제쳤다. 2010년 중국의 경제규모는 5조 5,880억 달러로 미국의 14조 8,400억 달러에 비해 38퍼센트 수준이지만,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의 예측에 의하면 2015년에는 미국의 18조 달러에 이어 10조 달러를 기록해 대략 2/3 수준에 접근할 것으로 전망된다. 1인당 GDP로는 미국이 4만 7,920달러인데 비해 중국은 4,170달러로 아직 힘겨운 중하위권 개도국 수준이다.   그러나 명목 GDP가 아닌 구매력평가지수로 보면, 중국의 GDP는 대략 9조 달러로 이미 미국의 60퍼센트 수준이다. 국제시장 환율로 보더라도 양국 간 시장규모 격차는 2000년 8.3배로부터 2010년 2.6배, 그리고 2014년에는 2.1배로 좁혀지는 추세인데, 더욱이 구매력평가지수로는 미국을 따라잡을 날도 머지않았다고 볼 수 있다.   장기 전망에 관해서는 1940년대부터 세계 각국의 경제 관련 정보를 분석해온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 EIU)의 2006년 보고서를 보면, 2020년엔 구매력평가지수에 의한 중국의 국내총생산이 29.6조 달러로 미국의 28.8조 달러를 능가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2020년의 국내총생산을 시장환율로 계산하면 중국은 10.1조 달러로 미국의 28.8조 달러에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일본의 6.9조 달러와 독일의 5.0조 달러보다는 훨씬 앞설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006; 이재봉 2007).   중국의 경제적 부상은 한반도와 중국 간의 경제적 관계에서도 보다 명확히 나타난다. 1992년 이후 15년간 한중간 교역 규모는 22배 늘어났으며 2007년 교역액은 전년대비 22.8퍼센트가 늘어난 1,450억 달러에 달하였다. 이는 같은 기간 중국의 수출총액이 849.4억 달러에서 1조 2,181.5억 달러로 13배 늘어난 것에 비해 괄목할만하다. 2007년 한국의 대중 수출은 820억 달러, 수입은 630억 달러로 무역수지 흑자는 190억 달러를 기록하였는데 무역 흑자는 2005년 233억 달러를 기점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다(최의현 2009).   중국의 경제적 부상은 동아시아 경제아키텍쳐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간 동아시아 및 아태지역의 경제통합 모델은 미국이 추진해왔던 APEC 중심의 아태지역을 아우르는 ‘환태평양 경제통합’(Asia Pacifism), 중국이 미국이 참여하지 않는 형태의 동남아시아국가연합+3(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 Plus Three: ASEAN+3)를 중심으로 추진해온 ‘동아시아국가들만의 경제통합’(East Asianism, or East Asia only grouping),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며 호주, 인도, 뉴질랜드 등 아시아지역 민주시장경제국가들을 포함시켜 ASEAN+6 중심으로 하면서 동아시아 정상회의(East Asian Summit: EAS)를 모태로 추진하는 ‘범아시아 경제통합’(Pan Asianism)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지난 10년 동안 가장 많은 발전을 이룬 것은 ASEAN+3 중심의 경제협력이며, 미국이 지지하는 APEC 중심의 경제통합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여 왔다.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은 1997년에서 1998년까지의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간 매우 급속하게 경제협력의 수준과 폭을 확대해 왔으며, 특히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제적 영향력을 급속하게 확대해 왔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라 지난 10년간 중국은 일본, 한국, 대만, 호주 등 아시아 주요국의 제1 무역상대국으로 부상했고, 필리핀과 말레이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액에서 미국을 추월하였다. 한국의 경우, 2009년 대중 무역액이 대일 및 대미 무역액 총액을 넘어설 정도로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심화되었다. 중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생산네트워크 중심기지 역할을 넘어 막대한 외환보유고와 금융력을 바탕으로 역내 경제적 주도권을 보다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은 1990년대 말부터 공세적인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 정책을 추진하여 아세안(ASEAN), 호주, 뉴질랜드, 홍콩/마카오, 대만, 칠레 등과 FTA를 이미 체결하였고, 한국 및 한중일 FTA 논의를 시작하는 등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아태지역 경제통합 전략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중국의 아시아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아시아지역과의 경제적 연계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이미 2009년 11월 일본 방문시 도쿄의 산토리 홀에서의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정책을 발표했는데, 이를 통해 한국•일본•호주 등 주요 동맹국 및 아세안과의 관계 강화 및 동아시아 정상회의 참여 공식화 등의 방침을 밝힌바 있다. 즉, TPP를 기반으로 아시아태평양지역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Area of the Asia Pacific: FTAAP)를 형성하고자 하는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고자 하는 것이다. 향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중국이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향하는 방향을 보여줄 것이다...(계속)

전재성·주재우 2012-10-18조회 : 15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