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경제부담 쌓여 단독패권 한계… 지금은 집합패권 시대 초입”[데스크가 만난 사람]
2025-09-12 문화일보 (신보영ㆍ이정우 기자)

■ 데스크가 만난 사람 - 전재성 동아시아연구원장

 

Q. 美주도 자유주의 질서 이후의 세계는?

 

美, 현재 정책은 ‘우선순위 조정’

중국 급부상·AI기술 발전 겹쳐

 

中열병식 ‘권위주의 연대’ 조짐

러시아·인도 등 엄청난 ‘核 연대’

 

미·중 싸움 모순 응집한 한반도

지표국가 韓의 영향력 통할 호기

 

국익중심 외교, 원칙 될 수 없어

추구하는 명확한 목표 제시해야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이 열린 지난 3일 베이징(北京)의 톈안먼(天安門) 성루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질서에 본격적인 반기를 드는 상징적 출발점으로 역사에 기록될 만한 장면이었다. 전재성 신임 동아시아연구원(EAI) 원장도 “지금 우리는 새로운 세계질서 30년의 초입에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 30년간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점차 커졌고, 미·중 전략경쟁과 인공지능(AI) 등 기술적 발전이 겹치면서 “거시이행이 진행됐다”는 것. 특히 이번 전승절에 공식·비공식 핵보유국 9개국 중 북한을 포함한 5개국이 참가해 ‘핵 연대’를 과시한 점을 주목하면서 향후 세계질서가 “단독패권에서 집합패권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 원장은 “한국은 2개 이상의 강대국을 다뤄본 적이 없어 대단히 당황스러운 상황”이라면서도 “미·중이 추구하는 질서를 모두 잘 알고 있는 한국이 외교적 역량을 발휘할 기회”라고도 했다. 인터뷰는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EAI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전 세계가 혼돈이다. 1990년대 냉전 붕괴 이후 유지돼온 자유주의 질서의 위기인가.

“자유주의는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고 열린 시장경제를 강조하면서 국제기구를 통해 다자주의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매우 뼈저리게 느껴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과정에서 국가 간 치열한 거래와 타협이 있었다. 거래와 타협이 자유주의 질서의 핵심 요소인데, 지난 30년간 각국이 이 부분에서 매우 게을렀다. 미국이 유럽에 ‘이제 나 혼자 도저히 안 된다’며 유럽에 국방비를 더 내라고 30년 동안 수차례 얘기했는데 안 됐다. 타협과 거래가 제대로 안 되면서 결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하게 된 것이다.”

 

―자유주의 질서는 왜 망가졌나.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패권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질서였는데, 그 패권이 짊어져야 할 경제적 부담이 지난 30년간 계속 쌓여왔다. 9·11 테러와 2008년 경제위기, 2019년 코로나19 등 10년에 한 번씩 온 3차례 위기에서 미국이 가장 큰 피해를 받으면서 패권적 모델을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두 번째는 1990년대부터 30년간 훨씬 더 근본적 변화가 있었는데, 기후변화와 지구화, 생태 위기가 복합적으로 시작됐다. 소위 국제 공공재에 대한 수요가 너무 급속도로 증가됐고, 반면 질서를 공급하는 미국의 힘은 약화되면서 공백이 생겼다.”

 

―미국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현재 미국의 정책은 미국의 패권 재조정에서 나오는 우선순위 조정전략이라고 본다. 패권 유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기축통화 지위에 따른 경제적 이익과 핵 독점을 통한 안보적 영향력, 국제제도를 일방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힘 등 3가지다. 이를 통해 미국이 구조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어왔는데, 미국은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

 

―중국의 급부상이 미국의 이 같은 대응을 촉발한 게 아닐까.

“패권의 논리와 중국의 부상은 별개다. 중국이 부상하지 않았어도 똑같은 문제가 나타났을 것이다. 우연하게 패권의 재조정이 미·중 전략적 경쟁과 같은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진 측면은 있다. 또 시기가 하필이면 이머징 테크놀로지인 인공지능(AI) 시기와 겹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3대 핵심동력이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것 자체가 완전히 역사적인 현상이다. 미국 사회학자 마이클 만은 정치, 경제, 이념, 군사 논리가 한꺼번에 응집하는 것을 결정화(crystallization)라고 정의했는데, 이때 시대가 바뀐다. 인쇄술·총포 발달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게 했듯이, 지난 30년이 이 같은 거시이행 시기였다고 나는 본다.”

 

―자유주의 시대 이후 세계질서는 어디로 갈 것으로 전망하나.

“일국 패권의 시기는 넘어갔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 미·중 경쟁을 패권 경쟁이라고 하는데, 패권이 되려면 공공재를 다 해결하고 자국의 경제력으로 질서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이 이기든 중국이 이기든 생태 문제나 기후 문제, 글로벌 불평등 문제 등 공공재를 해결할 수 있는 리소스는 없다. 그럼 누가 이기냐는 문제는 집합패권을 누가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열병식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중국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와 전승절 열병식에 사실상 핵보유를 한 국가를 포함해 9개 핵국가 중에 5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중국과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북한이다. 여기에 다음 핵국가가 될 수 있는 이란까지 하면 총 6개 핵국가가 모인, 엄청난 ‘핵 연대’다. 이 국가들이 권위주의 연대를 만든다면 집단패권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다극 질서로 가는 것인가.

“다극 질서라기보단 다권역 질서라고 표현하고 싶다. 순수한 우리나라 이론으로, 이용희 전 서울대 교수가 1950~1960년대 만든 이론이다. 자유주의 질서 자체가 붕괴되는 싸움으로 가고 있는데, 저는 궁극적으론 자유주의 질서가 다시 세계화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공동체주의가 더 반영돼야 하고 집단패권 시스템이 장착돼서 중국에 점차 관여하면서 중국도 점차 민주주의화되고 3세계도 관리하면서 신기술이 이를 돌봐줄 수 있는 체제로 가야 한다. 나는 이를 ‘신지구 권역’이라고 하는데, 이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결국 인류는 핵전쟁이나 기후위기 등으로 멸망할 수 있다.”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권위주의적 연대가 형성되면 미국에도 안 좋다는 점을 계속 설득해야 한다. 동시에 다권역 질서하에서 한국 외교정책의 대전략이 있어야 한다. 한국은 미국 권역의 성격을 제일 잘 알고, 과거 중국의 가장 모범적인 조공국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추구하는 질서도 잘 알고 있다. 미·중 싸움에서 지리적 한가운데이자 모든 모순이 응집해 있는 곳이 한반도로, 한국이 어떻게 하느냐를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지켜보고 있다. 제가 쓰는 개념으로 ‘지표 국가’가 한국이다. K-컬처처럼, K-디플로머시(외교)의 표본을 보고 다른 국가들이 저렇게 하면 되겠다고 하면 우리의 영향력이 먹힐 수 있는 역사적 호기다.”

 

―이재명 대통령의 방미 성과와 ‘국익 중심 실용외교’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이번 방미는 단기적 상황외교였다. 실용외교가 단기적 상황외교가 되면 나중에 변명외교가 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한·미, 한·중 사이에 원칙을 설정해야 한다. ‘국익 중심’이라는 것은 원칙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국제질서의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문서화하는 게 중요하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문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협상을 대북 억제 약화 이런 측면으로 보면 안 된다. 미국이 앞으로 지구적으로 하려고 하는 해외 주둔군 재배치와 해외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 수준에서 협상해야 한다. 다만, 대만에서 전쟁이 발발해도 우리가 직접 참전해서 중국과 교전국이 될 순 없다. 억제와 현상 유지를 위해선 도와줄 수 있다.”

 

―일본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나.

“EAI 여론조사를 보면 올해 한국인 응답자에게 한·일 간 안보협력과 과거사 문제 해결 필요성을 물어봤는데, 처음으로 전략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답이 더 많아졌다. 일본 측에서 골든크로스라고 할 정도였다. 앞으로 한·일 협력 강화와 중국 관여 방안에 대한 우리의 원칙적 구상을 만들어서 일본을 설득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전승절에 참석하면서 다자외교 무대에 데뷔했다.

“북한은 개국 이후 제일 전략적 지위가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략적 위치와 경제적 지원을 점검했을 것이고, 미국이 여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생각할 것이다. 우리 역시 진영 외교의 흐름을 보면서 외교 문제로 북한에 접근해야 한다. 핵심은 중국이 북한의 불법적 핵 개발을 인정하면 이 게임은 끝난다고 본다. 중국이 끝까지 자유주의 질서의 기본 규범을 지키게 해놓고 북한을 제어해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이나 미·북 정상회담 가능성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북 정상회담을 하더라도 결국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미·북 대화로 남북관계가 개선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본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비핵화는 반드시 유지돼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 섣불리 대화 자체에 열중하게 되면 레버리지(지렛대)가 소진될 우려가 있다.”

 

국제정치 장기전략 발굴 싱크탱크… “시그니처 보고서 낼 것”

■ 전 원장이 보는 동아시아硏

 

동아시아연구원(EAI)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외교·안보 분야 독립 싱크탱크다.

 

이명박 정부의 초대 대통령실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김병국 고려대 교수가 2002년 창립한 뒤 23년간 4명의 원장이 이끌어왔다. 전재성 신임 원장은 초대 김병국 원장과 이숙종 성균관대 특임교수, 손열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에 이은 4대 원장이다.

 

전 원장은 지난 9일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학술과 정책의 연계 작업 층위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학술적 이론을 정책 언어로 변환시키는 싱크탱크 플랫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전 원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학계가 통계에 기반한 분석 논문에 집중하다 보니 거시적 시각에서 전략을 다루는 연구가 많이 줄었다”면서 “국내 학계 역시 우리의 문제의식 바탕하에 국제정치 이론을 공부해 왔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 원장은 이 같은 문제의식하에 EAI가 장기적 전략을 발굴하는 싱크탱크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전 원장은 “미국 싱크탱크들은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를 작성해주고, 정부에서 이를 일부든 전체든 인용해서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가 갖춰져 있다”면서 “EAI도 매년 세미나뿐 아니라 시그니처 보고서를 만들어서 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약력

 

△1965년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서울대 외교학 석사 △미국 노스웨스턴대 정치학 박사 △숙명여대 정치학과 교수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장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 △한국국제정치학회장 △동아시아연구원 원장


■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