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다국적 기업과 제국주의

  • 2004-11-30
  • 이근 (한국일보)

필자가 학생이던 1970년대 말, 80년대 초만 해도, 학교 내에 민족주의 정서가 높아 외자와 다국적기업에 대한 경계심이 대단했습니다. 개발독재를 지향한다는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 수교하여 일본 상품과 자본에 대해 문을 열었지만, 민족주의적 정서와 정책을 견지했죠. 당시 자본이 부족한 한국은 외자를 도입해야 했습니다. 차관 방식을 통해 돈을 빌려오거나, 직접투자 방식으로 외국기업이 국내에 들어와 공장을 짓도록 해야 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나라도 작은데 덩치 큰 다국적기업들이 직접 들어와 영업을 하면 나라가 그들 손아귀에 놀아난다고 생각하고 차관 방식을 택했습니다.

 

비록 돈의 원천은 외국이지만 이 돈으로 지은 공장은 우리 것이고 우리 책임 하에 운영되며, 꾼 돈을 갚으면 그만이라는 판단때문이었죠. 사실 다국적기업에게 문을 열었어도 다국적기업들은 별로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남미 처럼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큰 국내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경제에서 직접투자의 주된 흐름은 선진국간의 투자이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가는 흐름이 아닙니다.

 

종래의 보수적(좌파적, 진보적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지만) 시각에서 보면 다국적기업은 후진국에 진출하여 잉여를 유출해가는 제국주의의 앞잡이요, 흡협귀와 같은 존재이죠.그렇다면 세계 최대의 직접투자 유치국이 자본주의의 총본산인 미국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미국이 가장 많이 착취를 당하는 나라일까요. 이 문제를 바로 보는 시각은 우선 다국적기업은 악마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라는 겁니다.

 

우선 어떤 분야이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천연자원쪽이면 고용창출 외에 부등가 교환에 의한 잉여유출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첨단 산업이라면 다릅니다. 기술이전 효과가 있고, 노동자나 기술자의 학습효과가 크며, 경영 노하우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투자유치국의 정책이나 교섭력에 따라 다국적기업을 잘 요리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중국은 거대시장을 무기 삼아, 시장을 내주는 대신 많은 기술과 반대 급부를 받아내고 있습니다. 중국은 개방 초기부터 제조업 직접투자에 대해서는 외국측의 100% 지분을 허용했습니다. 외국 지분이 50% 넘는 것을 막으려고 애써온 한국과는 대조적입니다.

 

덩샤오핑 주석은 키는 작지만 이 점에서는 통이 컸다고나 할까요. 중국은 큰 땅 덩어리를 전제로, "이 땅에 들어오면 다 내 것이지, 자기 것인가"하는 대국적 생각을 가졌던 것이죠. 다국적 기업에 대해 폐쇄적인 정책을 편 탓에 한국에는 다국적기업에 의한 직접투자가 80년대 이후에야 시작됐고, 당시 필자를 포함해서 대학생들은 이 "직접"이라는 말에 놀라 반대를 하고 야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는 다국적 기업의 진출이 97년 외환 위기 때까지 매우 적었습니다. 위기시에 "볼모"로 잡을 외국기업도 없어서 외국자본은 한국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 사이 중국은 한해 300억 달러(최근 500억 달러)가 넘는 외자를 유치했습니다.

 

한국이 단군이래 지금까지 유치한 직접투자보다 더 많은 양의 투자가 매년 중국에 유입, 중국을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한국은 IMF위기 이후에야 외자에 개방적 자세를 취하기 시작해, 국민총생산(GNP) 대비 외국인 직접투자 누적액 비율이 최근에야 세계 평균인 10%를 넘어섰습니다.

 

다국적 기업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도 달라져서, 이제 삼성USA 보다, IBM코리아가 한국에 더 중요한 기업이라는 인식도 생겼습니다.

 

이근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