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평화체제 구축, 말은 좋지만…

  • 2007-08-23
  • 하영선 (조선일보)

남북 정상회담이 수해로 한 달 연기되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가 확정되자 정상회담의 시기와 의제에 대한 시비가 여야 간에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답답한 노릇은 시비가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물러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평화론과 김정일 위원장의 선군평화론의 만남이 한반도 비핵평화체제 구축의 작은 징검다리라도 마련할 수 있느냐는 데 있다.

정상회담 합의서는 두 정상이 한반도의 평화, 번영,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의 시각에서 다룰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선군평화론의 김 위원장이 실질적으로 100일밖에 남지 않은 노 대통령과 정상회담의 판을 벌이는 것은 세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기에 나쁘지 않은 시기라는 상황 판단 때문이다. 미국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진검승부의 협상을 앞두고 북한은 늘 주장해 온 북미, 남북한의 이중 수령체제 옹호 구상을 구체화해야 할 때다. 마의 늪에 빠져 있는 북한경제의 회생을 위해 한국의 경제 지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때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때다. 경제평화론의 노 대통령은 임기 5년을 마무리하면서 대규모의 경제 지원 약속으로 ‘핵(核) 있는 평화체제’의 초보적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으면 정권 재창출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기 어렵다.

동상이몽의 두 정상이 만남을 통해서 옥동자를 낳을 것인지 기형아를 낳을 것인지를 미리 알기 위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검진이 필요하다. 검진의 잣대가 비핵평화체제의 구축이라고 강조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비핵평화체제, 한반도 경제 번영, 대통령 선거의 간접지원은 같은 크기의 토끼가 아니다. 비핵평화체제의 구축 없는 한반도 경제 번영 구상과 대통령 선거의 간접지원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국제정치 역량과 국내 시민 역량들이 비핵평화체제의 기반 없는 한반도 경제공동체와 통일대통령 논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정상회담을 오랫동안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내외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백가쟁명의 시끄러운 논의들이 진행되어 왔다. 논의를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곤혹스럽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은 새로운 논의가 아니다. 20년 전 탈냉전의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한반도 평화의 문제도 새로운 시각과 언어로 다룰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북한의 대단히 정치적인 3단계 군비축소 방안에 대해 정치, 법, 군사적 신뢰구축을 거쳐 군비통제, 군비축소로 이르는 5단계 방안을 궁리하면서 처음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표현을 썼다. 90년 7월에는 스탠퍼드 대학교 국제안보군비통제연구소의 중매로 남북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치열한 토론을 한 주일 동안 계속했다. 정치적으로는 92년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비준하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하게 된다. 6·15 공동선언에 비해서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합의와 비핵화 공동선언은 15년이 지난 오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의 합의일 뿐이다. 당시 부지런히 쓰고 발표했던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방안’이라는 제목들의 빛바랜 논문들을 다시 읽어 보면 어느 한 순진한 국제정치학자의 꿈같은 얘기들이다.

10월의 정상회담이 ‘15년 전의 악몽’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토록 공들였던 남북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이 한 장의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역사적 현실에 대한 철저한 자기 성찰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군평화론과 경제평화론의 결합은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옥동자를 낳기보다는 기형아를 출산할 확률이 높다. 경제가 아무리 소중해도 선군평화론의 기본 방향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비정치적 기대는 무리다. 동시에 선군평화론 위에 한반도 공동번영론이 설 수 있는 현실성은 희박하다. 공동번영이 평화를 가져오기 전에 평화의 조짐이 있어야 공동번영의 현실화가 가능하다. 평화와 번영 관계는 햇볕정책의 제한적 성과로 이미 답이 나와 있다. 마지막 남은 숙제는 민주평화론 문제다. 체제의 이질성 극복 없이 현실적 평화체제 구축은 어렵다. 긴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2000년대 두 번의 정상회담은 수렴되기 어려운 이질적 체제 위에 평화체제의 구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가르쳐 주는 값비싼 역사적 교훈의 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영선 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