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배부른 사람들의 단식투쟁

  • 2007-04-09
  • 강원택 (주간조선)

"승부사" 김영삼의 모습이 가장 빛났던 때는 아마도 1983년 그의 단식투쟁 때인 것 같다. 서슬 퍼런 전두환의 철권통치 속에서 김영삼은 정치적 탄압과 가택연금 등에 항의하며 1983년 5월 18일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의 단식투쟁은 당시 신문에서는 "민주인사 관련 건"이라는 애매한 표현 이 외에는 전혀 보도될 수도 없었지만, 23일간 계속된 목숨을 건 그의 승부수는 이후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결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1980년대 초 영국에서는 모두 10명의 아일랜드공화군(IRA) 소속 수감자들이 단식 투쟁으로 사망했다. 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제일 먼저 사망한 보비 샌즈(Bobby Sands)이다. 북아일랜드의 메이즈 감옥에 투옥된 샌즈는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하고 감옥에서의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대처 총리는 이 요구를 거부했고 샌즈는 무려 66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27세의 나이로 1981년 5월 사망했다. 샌즈의 사망 이후 투옥된 다른 IRA 단원들이 46일에서 73일간의 동조 단식투쟁을 통해 잇달아 죽어갔고, 영국 정부는 부분적으로라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 사례 모두 오래전의 일이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비장함이 느껴진다. 이들이 모두 단식투쟁을 선택한 것은 정말 그것 말고 다른 의사표현의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과 감옥에 갇혀 자신의 뜻을 관철할 다른 아무런 방법도 남아 있지 않다는 좌절감과 무기력이 이들을 죽음을 각오한 단식으로 이끌었다.

 

이처럼 단식투쟁은 기존 정치제도 내에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다른 저항의 수단도 봉쇄된 상황에서 자기파괴를 통해 상대방의 양보를 강요하는 극단적 저항 방식이다.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한 김영삼이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 IRA 전사들에게서 보듯이 단식투쟁이 반체제적 속성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한·미 FTA 협정을 두고 정치권 인사들이 단식투쟁에 가담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한·미 FTA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 온 민노당 문성현 대표는 말할 것도 없고, 여권의 대선 주자들로 거론되는 열린우리당의 김근태·천정배 의원도 단식에 가담했다. 미국과의 FTA 협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서로 다를 수 있다. 한·미 FTA가 문제가 많다면 이를 결렬시키기 위한 반대 운동을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미 FTA 찬반의 입장과 무관하게 이들이 단식투쟁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아무리 봐도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얼마 전까지 원내 제 1당을 이끌었던 김근태 의원이나 여당 원내대표와 장관을 지낸 천정배 의원 모두 가택연금하의 야당정치가 김영삼이나 북아일랜드 감옥의 보비 샌즈가 처했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다.

 

호소할 다른 수단을 갖지 못했던 이들과는 달리 김근태·천정배 의원은 국회 내 100석이 넘는 의원을 가진 정당의 지도적 정치인이고, 언론 매체나 인터넷, 홍보물 등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알릴 수많은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결행되었던 어두웠던 과거의 극단적 투쟁이 너무도 "가볍게" 남용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강원택 EAI 시민정치패널 위원장 · 숭실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