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赤字 통치 빨리 벗어나라

  • 2003-11-17
  • 이홍구 (중앙일보)

"역사의 교훈을 잊는 자는 깊은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경구를 결코 소홀히 흘려버릴 수 없는 처지에 우리는 서 있다. 나라를 부도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불과 6년 전의 일이건만 국민의 기억에서 혹여 잊히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다. 단 1년 만에 경제성장률을 5%에서 -6.7%로 떨어뜨리고, 실업률을 2%에서 7%로 치닫게 한 외환위기가 남기고 간 쓰라린 교훈을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우리의 뇌리에서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IMF 위기에서 드러난 허점들

 

외환위기의 원인 중에는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으나 분명히 내 탓이라 반성해야 할 사항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선 우리가 잘못한 몇 가지를 되짚어 볼 때, 첫째는 오만이 부른 방심이다.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자부심, 그리고 1995년엔 국민소득 1만달러, 수출 1천억달러의 고지에 도달했다는 성취감으로 이미 한반도를 향해 불어오기 시작한 아시아 금융시장의 붕괴라는 태풍을 대비하는 데 소홀했다.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선진국 대열에 자리를 같이한 흐뭇함도 잠시, 선진국들과의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체제로의 구조조정에 태만했다.

 

둘째는 무지(無知)가 낳은 실책이다. "세계화 내각"이라고 의욕을 보였지만 세계화 과정의 핵심인 자본시장의 세계화가 몰고 온 새로운 다이내믹스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를 노출했다. 더욱이 정치권력의 재벌 및 은행에 대한 영향력 행사의 병리적 관행을 방치함으로써 우리 기업과 금융을 사상누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정치와 경제는 "은행은 망할 수 없다" "재벌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타성으로 표류하게 됐다. 그렇듯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의 자본시장개방은 무모한 실험일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시장의 위험신호에 대처할 정치적 능력의 한계다. 외환위기를 포함한 경제위기의 증상은 우선 시장원리로 이해돼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국가적 대처 방안은 정치권의 논리, 즉 정치적 타산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시장의 원리와 정치적 상황의 논리를 균형있게 연계시키는가가 곧 리더십의 테스트다. 우리의 경우 리더십의 우유부단으로 시간을 허비한 측면이 많다.

 

넷째는 한국에 대한 세계시장의 평가와 신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다. 시장의 원리는 자존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자본이 국경을 초월해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계화시대에는 우리의 정치.경제.안보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에 의해 국가경제가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부나 국민이 철저히 인식하지 못했다.


 

위기 타개 국민적 결의 나왔으면

 

이렇듯 우리의 준비부족과 실수가 통제없이 이동되는 자본시장의 역학과 맞물려 우리는 혹독한 외환위기의 시련을 겪게 됐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가 그 위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개의 긍정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첫째,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국민적 합의다. 어떤 희생을 함께 치르더라도 그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국민적 결의가 회복의 원동력을 만들 수 있었다.

 

둘째, 위기의 도래가 새 대통령의 당선과 겹쳐짐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효과적 대책으로 연계시킬 리더십을 확립시켰으며 이는 국제사회로부터의 신뢰로 직결될 수 있었다.

 

셋째, IMF와의 합의 등을 근거로 과감한 구조조정을 시도할 수 있었다. 우리의 정치권이 손대지 못했던 은행과 대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상당한 정도로 진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외환위기가 가져 온 전화위복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정치개혁의 부진에 따른 적자통치(Governance deficit)라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1백년의 역사는 아니더라도 지난 10년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면서 이번에도 국가적 위기를 획기적인 구조조정의 계기로 삼아 한국정치의 체질을 바꿀 수 있을지 우리 국민과 지도자는 다시 한번 시험대에 서게 됐다. 오만.무지.정치적 계략, 그리고 허황된 자존심을 경계하며 국민의 뜻과 지혜를 한 데 모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