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정치개혁의 정치화' 경계해야

  • 2003-11-17
  • 모종린 (동아일보)

대선자금 수사로 시작된 정치자금 정국을 탈피하기 위해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정치개혁을 약속했으나 실제로 국회에 제출하기 위해 준비한 개혁안을 보면 실망스럽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선거공영제 등 정치 비용을 납세자에게 전가하는 방안에는 모든 정당이 적극적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협하는 사안에서는 당초 약속한 수준의 개혁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다.

 

당내 정쟁으로 순수성 떨어져

파행적인 정치개혁 과정의 후유증은 적지 않을 것이다. 우선 개혁의 적기를 놓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정치개혁의 순수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떨어져 개혁 피로 현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직접적인 원인은 정치개혁을 둘러싼 당내 내분이다. 정치개혁 논의가 당내 정쟁의 대상이 되면서 지나치게 정치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으로서는 사익을 위해 정치개혁을 추진하는 정치인이나 사회 세력을 판별해내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다. 그렇다면 어떠한 세력을 견제해야 하는가.

첫째, 법과 제도 탓만 하는 정파와 정치인들이다. 불법 정치자금 기부와 모금 행위가 비현실적인 법과 제도 때문이라는 주장이 이러한 ‘면피용’ 개혁론의 대표적인 예다. 일반 국민이 법과 규제를 성실하게 준수하는 이유는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지 결코 쉽기 때문이 아니다. 이번 정치자금 수사에서도 밝혀지고 있지만 현행 제도 하에서도 막대한 규모의 기부와 모금이 가능하다. 대기업은 계열사, 협력사, 임원을 동원하면 원하는 만큼 정치자금을 ‘합법적으로’ 기부할 수 있다. 정당도 필요한 만큼 ‘합법적으로’ 모금할 수 있다. 선거가 있는 해에 전국 규모의 정당이 중앙당, 시도지부, 지구당 후원회를 통해 합법적으로 모금할 수 있는 정치자금은 무려 2400억원에 이른다. 이렇게 관대한 현행 제도 하에서도 불법 기부와 모금이 이뤄졌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기부자와 모금자의 도덕적 자질 문제다.

둘째, 정당 내부의 문제를 공익적 개혁 이슈로 확대하는 시도를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개혁세력이라는 정치인들이 지난해까지 정당개혁의 상징으로 내세우던 상향식 공천을 지금에 와서 반대하거나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 이들이 정당개혁을 내부 정쟁 차원에서 추진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정당개혁의 방향은 새로운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진입 장벽을 제거하는 등 정치시장의 경쟁성 강화에 중점을 두고 정당 거버넌스와 인적 구성에 대한 판단은 궁극적으로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맡겨야 한다. 현행 정당법도 정치의 자유와 경쟁 차원에서 정당 내부 운영에 대한 상당 수준의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다. 정치시장이 경쟁적으로 작동하면 정당은 자율적으로 유권자가 요구하는 제도와 후보를 선택하게 된다. 정당 내부의 밥그릇 싸움에 국민이 말려들 필요가 없다.

셋째, 제도개혁의 모든 해법을 갖고 있는 것처럼 자신감에 차 있는 세력은 일단 조심하는 것이 좋다. 특히 검증되지 않은 외국 제도를 만병통치약처럼 받아들이는 시대적 조류도 문제다. 제도와 결과의 관계는 원천적으로 불확실하고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약분업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순수한 의도로 추진한 제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가져올 수도 있다.

 

검증안된 제도도입 改惡 될수도

정치개혁도 마찬가지다. 현재 대안으로 제시되는 모든 제도를 도입한다고 하여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과연 지구당을 해체한다고 해서 지역구 관리비용을 줄일 수 있는지, 중앙당을 없애고 원내로 들어간다고 해서 정책정당을 만들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리적, 경험적 근거가 부족하다. 더 크게 보면 내각제 개헌을 한다고 해서 1인 중심의 권위적 조직문화를 바꿀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적정 수준의 논의와 국민적 합의를 통해 만든 제도라도 충분한 준비기간을 통해 시행착오의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총선을 5개월 앞둔 시기에, 그리고 정치개혁을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정치개혁이 아닌 개악의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