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정치학자들 역할을 기대한다

  • 2003-07-14
  • 이홍구 (중앙일보)

정치의 파탄에 의해 국민이 고생하는 것은 그 일차적 책임이 정치인에게 있다. 그러나 정치상황을 분석하고 설명하며 국가발전의 길을 처방하고 평가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정치학자들도 부차적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지난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세계정치학총회에서는 학자들 간에 자책과 자성의 분위기가 완연했다.

 

3년마다 열리는 세계정치학대회를 아프리카에서 개최한 것은 정치학의 세계화라는 차원에서 좋은 기회였지만 날로 그 증세가 심해가는 "병든 아프리카 대륙"의 딱한 실상은 정치학자들의 가슴을 우울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자유와 평등사이 원초적 갈등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열악한 실상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절대다수의 아프리카인이 극심한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날로 확산되는 에이즈 감염률은 대륙전체를 삼켜버릴 기세다.

 

그런 가운데 인종간.종족간.국가간.계층간의 갈등은 피비린내 나는 내란과 전쟁으로 폭발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들의 역사적 과오와 현재의 무관심을 저주하고 비판하면서도 그들로부터의 지원과 협조를 애원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아프리카의 딜레마"가 오늘날 아프리카의 처지를 더욱 서글프게 만들고 있다.

 

이런 아프리카의 어려움을 날로 악화시키는 제일 큰 원인은 정치의 혼미와 리더십의 빈곤이다. 나라와 국민은 병들어 가는데 권력과 특혜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많은 정치인이 아프리카의 앞날을 계속 어둠 속에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의 실패는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그러기에 정치학의 한계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지난 반세기에 걸친 정치학자들의 노력이 결코 만족할 만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1950년대로부터 비롯된 정치학의 중심과제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통해 빈곤과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러한 목표를 향해 상당한 진전이 이뤄졌다고 자부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물결은 수많은 국가의 모습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더반에 모인 정치학자들이 자축보다 자성의 분위기로 빠져든 것은 자유와 평등 사이에 존재하는 원초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현실을 인식하기 때문이었다.

 

지역간.국가간.계층간의 빈부격차는 전체주의 및 권위주의 체제로부터의 해방, 즉 어렵사리 성취한 민주화의 업적을 빠른 속도로 퇴색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아프리카 및 라틴 아메리카에서 두드러진 것이지만 어느 지역의 국가도 완전한 예외지대는 아니다. 민주화의 후퇴,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 심지어는 독재로의 회귀가 현존하는 위협으로 도처에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21세기형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학의 시급한 당면과제를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발전과 효율적 국가체제의 강화를 어떻게 균형있게 관리하느냐는 것이다.

 

만병통치의 묘약으로 믿어졌던 민주화가 가져온 민주화 이후에 산적한 문제, 특히 지속적 경제성장과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분배의 정의를 동시에 실현시키는 체제적 효율성이 시급히 요구된다.


국민 합의로 민주주의 제도화를

 

그러나 시민 사회의 활성화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다보면 국가체제의 약화를 초래하고 이익집단 간의 갈등만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성급하게 국가체제의 강화만을 기도하면 민주주의의 원칙, 특히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위축되는 위험을 초래한다. 지금 우리도 겪고 있는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고 민주국가의 효율성을 높이는 묘안은 과연 무엇인가?

 

모든 국가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정답은 없다. 민주주의의 제도화는 결국 각자가 자기 실정에 맞는 방법과 유능한 지도자를 선택하는 국민적 합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서 분단의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각별한 지혜와 용기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한국의 정치인은 물론 정치학자들의 분발과 이들을 지켜보는 국민적 관심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