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국제정치의 흐름을 타라

  • 2003-04-21
  • 이홍구 (중앙일보)

"이라크 전쟁은 분명 전환의 고비다... 이해·대처능력 따라 미래가 좌우될 것" 싸움에선 시작에 못지않게 끝내기가 중요하다. 이라크 전쟁이 마무리에 들어가면서 국제사회에선 저마다 새로이 전개될 전후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고자 치열한 적응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제정치의 중요한 전환의 고비마다 그 변화의 성격을 제때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엄청난 손해를, 때로는 치명적 손해를 본다는 역사의 교훈을 저마다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서울에서 개최된 3자위원회에서도 미국.유럽.아시아의 지도자들이 이라크 전쟁으로 표출된 국제정치의 원천적 성격 변화를 진단하는 데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다.


전쟁 전후 혼란이 야기된 까닭

 

우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뉴욕 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의 붕괴가 지닌 역사적 의의를 되새겨야 한다는 지적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냉전의 종식은 미국을 유일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 2001년 뉴욕 쌍둥이빌딩이 붕괴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미국은 새로운 전쟁상태로 돌입했다.

 

역사상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미국이 새로운 종류의 전쟁상태로 들어갔다는 단순한 사실을 많은 나라가 외면하거나 수긍하지 못한 데서 이라크전을 전후한 혼란이 야기된 것이다.

 

미국이 말하는 테러와의 전쟁은 단순히 주민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을 건 총체적 전쟁인 것이다. 그러한 긴박감은 미국만이 홀로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이라크전에 임하는 미국의 입장은 국제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라크 전쟁의 막이 내리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분위기는 여전히 뒤숭숭하다. 미국과 유럽 사이의 불편한 감정이나 유럽 내부의 불협화음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시리아.이란, 특히 북한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점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의 국제정치가 직면한 세 가지 기본과제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가다듬어야 한다.

 

첫째, 전쟁에서의 승리가 자동적으로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압도적 군사력으로 적군을 격멸하기는 쉬워도 많은 국가와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국가의 힘은 군사력을 토대로 한 강성(hard power)과 명분 및 정당성에 의거한 연성(soft power)이란 두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힘의 극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어떻게 군사력과 정통성을 조화시켜 새 국제질서를 만들어 가느냐가 당면 과제다.

 

둘째, 독립국가의 주권은 절대적으로 존중돼야 한다는 국제법의 기존원칙과, 반인륜적 폭력행위나 사태는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새로운 입장 사이의 괴리와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예리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을 명분으로 국제사회가 특정 국가에 무력개입을 단행한 최근의 예는 코소보 사태였다. 그 결과로 밀로셰비치는 국제법정의 심판을 기다리는 죄수의 몸이 됐다.

 

그러한 "인도주의적 개입"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은 자국과 국제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선제공격"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입장이 충분한 힘과 명분으로 뒷받침될 수 있을지, 그러한 경우에 전통적 국가주권 존중의 원칙은 수정이 불가피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이 바꿔놓은 동맹국 개념

 

셋째, 이러한 국제정치의 원천적 성격 변화는 국가간 동맹의 의미도 바꿔놓게 되는 것 같다. 이미 미국은 "동맹국(coalition)이 작전(mission)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전에 따라 동맹국을 결정한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국제정치에선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오랜 경구(警句)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동맹국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우리가 직면한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이나 민족 통일로의 전진은 국제정치의 흐름과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국제정치의 급격한 성격 변화를 적절히 이해하고 대처하는 지혜와 능력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역사적 테스트를 피할 수 없는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