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민주주의의 꽃과 적(敵)

  • 2004-04-13
  • 모종린 (매일신문)

총선이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각 정당은 막판 표심 잡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유권자들도 마음을 정할 때다. 그러나 지금의 선거정국은 유독 혼란스러워 무엇을 기준으로 마음을 정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혼란스러울 때는 기본에서 시작하자.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하나의 제도이자 이념이다.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지선(至善)이다. 권력의 횡포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이념으로서 민주주의는 복음이다. 권력의 횡포와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은 그 정신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맞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투표하고자 한다. 무엇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가? 민주주의는 인간세계의 제도이다. 따라서 그 성패는 인간의 본성에 달려 있다. 한편으로 인간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닌 동물이다.

그래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이유는 바로 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상과 역사와 제도에서 민주주의는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을 전제로 한다. 즉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국민들이 이성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곧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냉철히 계산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한다는 뜻이다.

이성적 국민은 정당의 공약을 자신의 이익에 비추어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 공약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정당의 정치적 색채, 즉 이념에서 공약을 유추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

물론 각자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국민개개인의 이익도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국가사회 속에서 국민들의 이익은 수렴한다. 무엇보다 국가사회의 유지와 발전이 개인 발전의 기본을 이룬다는 이성적 판단 덕분이다. 그리고 수렴하는 국민의 이익에 호소하는 각 정당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국가사회의 통합을 유지하는 마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지선이요, 복음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의 선거정국은 우려스런 측면이 있다. 각당이 이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은 야당이 여성대표들의 눈물로 감성정치를 펼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만으로 선거를 꾸려가려고 한 여당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 무엇보다 정책공약이 정치공세 속에 묻혔고, 정당의 색채가 승리를 노린 마구잡이식 영입과 공천으로 인해 흐려졌다는 점이 이번 선거의 특징이다.

국민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어진 것이다. 이성이 작동하지 못하면 감정이 대신한다. 이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었다는 비난으로부터는 어느 정당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감정의 지배보다 더욱 무서운 민주주의의 적이 있다. 감정은 기본적으로 이성의 통제 아래에 있다. 이성이 분노를 지배하고 애증의 감정도 궁극적으로는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성을 부정하는 정치가 있다. 곧 영(靈)에 의한 정치가 그것이다.

영에 의한 정치는 이성을 부정하고 오도한다. 그래서 영에 호소하는 신정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고, 정교의 분리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원칙의 하나다. 물론 역사적으로 정교일치의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신정정치가 반드시 악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성을 전제로 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 이성을 흐리게 하는 정치적 시도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스러운 적은 상징의 조작을 동원한 대중정치이다. 이것은 마치 사이비종교와 같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광기가 지배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치독일의 히틀러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영상이미지를 동원해 상징을 조작하고, 정치행사가 종교행사의 형태를 띤다.

같은 언론이라도 활자매체와 영상매체는 다르다. 되새김이 가능한 활자는 이성에 호소하지만, 흘러 지나가는 영상은 감정에 호소한다. 민주주의 정치행사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의 정책토론이라야 마땅하다.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정치행사는 건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 막판에 야당과 여당의 슬로건은 "거대여당의 출현 견제"와 "거대야당의 부활 견제"로 모아졌다. 권력의 집중을 경계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은 슬로건이다. 이 얼마나 현명한, 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한 국민인가? 이런 국민들을 상대로 감성의 정치, 광기의 정치를 펼치는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민들의 현명함에 기대를 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