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이숙종 EAI 시니어펠로우(성균관대 교수)는 민주주의 정상회의 인태지역 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가치외교를 본격화한 한국 정부의 노력을 평가하며, 향후 한국이 표방할 수 있는 가치외교 전략과 주요 의제를 제시합니다. 저자는 자유와 인권을 추구하는 가치외교는 필연적으로 그 실현을 위한 민주주의 체제와 결부되며, 민주주의외교는 민주국가들끼리의 외교가 아니라 민주화를 돕는 외교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한국의 가치외교 전략으로 다자기구 활동 및 민주 국가와의 파트너십 강화, 가치외교 수행을 담당할 거버넌스 구축을 제안합니다. 또한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사법부 독립, 선거 과정, 반부패 의제에서 한국의 역할을 증대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 NATO 정상회의 기조연설,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 9월 20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자유”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설파해 왔다. 여기서 자유는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공동체나 국가를 화두로 잡아 온 이전 대통령들의 담론과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한국이 민주주의외교에 나서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불러 왔다. 이를 반영하듯, 백악관은 한국 정부가 민주주의 정상회의 인도-태평양 지역회의를 주최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3월 29일 온라인으로 열리는 글로벌 정상회의에 이어 30일에는 서울서 인태지역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새 정부가 ‘가치외교(value diplomacy)’ 또는 ‘가치기반 외교(values-based diplomacy)’를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삼는다는 것은 여러 통로로 알려져 왔지만 구체적 계획이나 성과는 무엇인가라는 의문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인태지역 민주주의 정상회의 개최는 가치외교의 첫 주요 성과로서 환영할 일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 정부가 가치외교를 이행할 구체적 활동 방안들을 마련하고 실행하게 된다면, 현 정부의 주요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가치외교는 그 추상성과 모호성으로 말미암아 방어적 위치에 있다. 단순히 말하자면, 가치외교란 가치를 외교적 판단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외교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데, 다음과 같은 우려가 종종 따라다닌다. 외교는 국가이익을 실현하는 수단이므로 가치보다는 손익 계산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치는 이익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나중에 무엇이 가치인가라는 문제를 더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가치(value)는 이익(interest)에 대치되는 개념은 아니다. 가치는 이상과 효용 모두 포함하므로, 인권가치와 경제가치가 충돌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가치와 이익이 충돌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가치의 영역을 이념적 · 도덕적으로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만 제한한다 해도, 이러한 가치가 현실 정치나 외교에서 이해관계와 함께 작동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세계가 에너지와 식량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국제사회가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지지하는 것은 영토 주권과 민주주의 보호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관련한 국제법과 규범이 지켜지는 것이 자신들의 안전에도 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옹호하려는 ‘민주주의외교’는 인권외교나 평화외교처럼 가치외교의 특정 형태이다. 서방 민주진영에서 민주주의 진흥과 지원은 외교정책에 스며들어 있었는데, 최근 도드라지게 된 배경에는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 노선이 있다. 미국우선주의와 거래지향적 외교를 추구하던 트럼프 대통령과는 정반대로 바이든 대통령은 선거 캠페인 시절부터 민주주의 수호를 주장해 왔다. 세계를 전제주의 대 민주주의의 경쟁으로 보고,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전제주의보다 우월한 체제라고 말해 왔다. 또한, 국제법을 중시하는 규칙기반 국제질서의 안정을 위해서도 민주국가들이 협력하고 단합할 것을 주문해 왔다. 나아가, 개방성, 투명성, 신뢰성과 같은 가치가 기술동맹이나 공급망 재편의 기준으로 삼아지게 되자 통상이나 투자 문제를 두고 시장원리 못지않게 가치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 글은 한국 정부가 가치외교를 추진하는 데 보다 체계적 개념화를 돕고, 가치외교를 추진할 때 현실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전략이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이 잘 할 수 있는 의제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가치외교

 

정상 간 공동성명이나 정치 지도자 연설 등 외교문서에서 ‘공동 가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것을 막연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체제 차원에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가치는 차원과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고 이해되곤 한다.

 

가치는 사전적 의미로는 ‘중요하거나 유용한 것’으로, 도덕적 가치와 효용적 가치를 모두 아우른다. 사회과학에서는 가치를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행동을 규제하는 원칙’으로 개인이나 사회의 목표이자 기준이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Braithwaite [1]는 가치체계를 타인에 의한 억압으로부터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을 보호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안전가치(security values)와, 자원을 공유하고 상호 존중하면서 협력하는 조화가치(harmony values) 두 가지로 구분한 바 있다. 안전가치는 개인의 물리적 안전과 생존으로, 사회적 차원에서는 경제 발전이나 법치와 관련된다. 조화가치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기성찰, 자아존중, 용서, 관용, 사랑과 같은 것들과, 사회적 차원에서는 평화, 환경보전, 시민협력, 국제협력 등과 관련된다. 그는 안전가치는 위험을 줄이고자 자기이익을 계산하게 되어 신뢰관계에서는 ‘교환적 신뢰규범(exchange trust norms)’과 연계되며, 조화가치는 유대를 형성하고 정체성을 공유하게 되는 ‘공동체 신뢰규범(community trust norms)’와 연계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개념 논의에 비춰 보자면, 번영을 추구하는 경제외교도 국가안보를 위한 안보외교도 모두 가치외교가 되어 버린다. 윤석열 정부가 가치외교를 말할 때, 자유, 평화, 번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또는 자유, 인권, 법치로 말하기도 한다. 후자를 ‘보편적 가치’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평화나 번영이 공공재적 가치여서 이를 구분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치가 개인과 집합체(조직, 사회, 국가) 수준에서 이상적 이념과 도구적 효용을 모두 아우르기 때문에 틀린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평화나 번영은 굳이 가치외교라는 표현을 빌리지 않고서도 우리 외교가 추구해온 기본적 공공가치이기 때문에 이를 새롭게 가치외교로 명명하는 일은 어색하고 너무 포괄적이다. 따라서,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자유, 인권, 법치에 한정해 가치외교로 표현하는 것이 모호함을 피하는 길이다. 다행히 최근 발간된 우리 정부의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는 자유, 평화, 번영을 ‘비전’으로, 자유, 인권, 법치를 보편적 가치로 뚜렷하게 구분하면서, ‘법치주의와 인권증진 협력’을 9대 중점 과제의 하나로 꼽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 보편적 가치는 주로 개인 수준의 가치라는 것이다. 자유와 인권에 비하여 법치의 경우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을 모두 내포한다. 법치의 경우는 개인이 공공을 다스리는 법에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사회계약적 요소가 있지만, 그보다는 만인을 법 앞에 평등하게 두어 어떤 권력자도 법의 지배를 받게 하는 개인의 권리 보호 요소가 강하다. 개인의 자유를 대통령 담론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현 정부는 자유주의의 이상을 중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에 대한 철학이 비교적 가장 잘 설파된 문건은 “자유와 연대의 모색: 전환기 해법의 모색(Freedom and Solidarity: Answers to the Watershed Moment)”으로 이름 붙여진 작년 가을 유엔 총회 연설문이다. 연설문은 오늘날의 국제사회를 힘에 의한 현상 변경과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인권의 집단적 유린으로 또다시 세계 시민의 자유와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으로 규정한다. 대통령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자유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연대의 정신으로 해결 가능하며, 유엔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이 연설에서도 자유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그 보편적 자유란 질병이나 기아로부터의 자유, 문맹으로부터의 자유, 에너지와 문화의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로 거론되고 있고, 이에 따라 한국 정부가 글로벌 보건체계의 강화, 사회적 약자 지원 개발원조 확대, 기후위기 대책 탈탄소 녹색원조 등을 약속하고 있다. 이상의 자유 개념은 주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에 초점을 둔 셈인데, 세계 민주주의 후퇴의 큰 특징이 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와 소수자와 반대자에 대한 공포스러운 탄압인 만큼 이러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연대를 호소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사실, 자유가 자유 의지와 자기 결정권과 같은 인간 본성의 내면적인 것이라면, 개인 외적인 정치적,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어야만 이를 향유할 수 있다. 유엔은 개인의 자유권을 기본권으로 천명한 이래, 이를 보호하는 사회적 여건을 만들기 위해 많은 권리조항들을 넣어 국제규약을 정립하였다. 1944년 1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말한 4대 자유—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모든 인간은 존엄성과 가치에 있어 동일함을 천명한 1948년 유엔의 세계인권선언(UN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서 의사표현 및 결사의 자유, 신앙의 자유는 물론, 공평한 재판을 받을 권리, 일할 권리, 적절한 생활수준/보건/교육을 받을 권리 등 많은 기본권으로 천명된다. 이러한 선언이 법적 구속력을 갖도록 유엔은 1966년에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사회권규약 또는 A규약)’과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자유권규약 또는 B규약)’을 채택했다. 한국도 양 규약에 가입하고 1990년 비준한 바 있어 우리 외교가 인간의 사회권과 자유권을 진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은 도덕적 책무와 함께 법적 책무도 있는 것이다.

 

보편적 가치로서 자유나 인권을 지키려 하다 보면 자연히 그러한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 노력을 해야 하며, 이는 이들 가치를 실천하는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지원하는 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치외교는 개념적 구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외교로 연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민주주의외교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가치외교라는 용어보다는 민주주의외교라든가 인권외교라고 표현하는데 우리 정부는 자칫 비자유주의 국가들을 배제하는 외교가 될까 우려해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기피 현상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가치외교라는 말 자체를 ‘확장적 외교 지평선 개념’으로 정립했던 1차 아베 신조 내각(2006. 9. - 2007. 8.)은 가치를 자유, 민주주의, 인권, 법치, 시장경제로 적시하면서 이들을 ‘보편적 가치’라고 정의했다. 가치외교하에 유라시아 외곽 주변의 신생민주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자유와 번영의 호(Arc of Freedom and Prosperity, 自由と繁栄の弧)’를 구축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미국, 호주, EU, NATO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아베의 1차 내각의 단명으로 흐지부지 되었던 가치외교는 2012년 12월 2차 아베 내각이 시작한 이후, 2017년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 FOIP)’ 구상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 구상은 미국 행정부의 인도-태평양전략 구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같으면 민주주의외교라고 말할 것을 굳이 가치외교로 표현하는 배경에는 포용성을 유지하거나, 민주주의 대 전제주의라는 이념적 진영 구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노림수가 있는 것이다. 동일한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합시키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중요해지면서 주요국들이 인태전략을 내게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역내 주요 규범으로 말하는 것에 비해, 아세안(ASEAN)의 ‘인도-태평양 전망’ [2]에는 해양안보, 연결성, 개발협력 영역에서의 대화와 협력이 강조될 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는 것을 봐도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외교문서에 사용할 때 주저함이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자국도 민주주의 국가이고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만큼, 모든 나라에 민주적 가치가 존재하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포용적인 민주주의외교에 유용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민주주의 옹호론자들은 민주적 가치가 보편적 가치로서 전제국가의 사회 내부에도 있다고 믿으며, 따라서 그런 보편적 가치를 억압하는 정부로부터 자유 민주 시민들을 보호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제주의 정부마저도 자신들이 민주적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모든 나라가 민주주의가 되어 버려 민주화 투쟁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궤변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민주주의 연구자들은 전제주의 또는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뚜렷하게 구분한다. 개인의 자유, 소수자의 권리, 언론의 자유, 경쟁적 자유선거, 법의 지배 등이 얼마나 잘 구현되느냐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나라를 구별해 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자들은 언급된 민주주의 요소들이 잘 구현되는 국가는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선거를 치르지만 이런 요소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국가는 ‘선거 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 이들 요소들이 아주 나쁘지만 형식적이나마 선거를 치르는 ‘선거 전제주의(electoral autocracy)’, 자유로운 직접 선거 자체가 없는 ‘폐쇄 전제주의(closed autocracy)’로 정치체제를 구분한다. Economist Intelligence Unit도 4가지로 세계 여러 나라를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ies)’, ‘흠결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ies)’, ‘하이브리드 레짐(hybrid regimes)’, ‘권위주의 레짐(authoritarian regimes)’으로 구분해 매년 세계 민주주의 상태를 점검한다. 문제는 2006년을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언론 및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 소수집단 인권 탄압, 반대자에 대한 정치 탄압이 증가하는 등 전제주의화 현상이 커지고 있는 점이다. [3]

 

이러한 민주주의 후퇴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들이 나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이는 것은 순리라 하겠다. 민주주의외교가 대두된 배경에는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전제주의 국가들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동기보다는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다시 복원시켜야 한다는 동기가 강하다. 민주주의를 위한 다자적 정부 간 연합이 21세기 들어 생긴 것으로는 2000년 바르샤바선언과 함께 창립된 ‘민주주의공동체(Community of Democracies)’가 있다. 31개 민주주의 국가들이 멤버이고 여타 국가와 각국의 시민사회를 함께 초청하면서 지금까지 아홉 차례 회의를 열었다. 가장 최근의 회의를 트럼프 행정부가 2017년 소극적으로 주최한 것과는 반대로,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12월 110여개 국가를 초청해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크게 열었다. 전자가 민주국가들 간의 연합체라면 후자는 민주국가들만이 아닌 민주주의를 위한 회의라는 성격을 부여했다. 물론 어느 국가는 빼고 어느 국가는 넣었다는 비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민주주의외교는 민주국가들끼리의 외교가 아니라 민주화 수준의 스펙트럼을 넓혀 많은 나라들을 참여시켜 민주화를 돕는 외교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민주주의외교가 비민주적 국가를 배제한다고 염려해 이런 용어를 기피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체제중립적’ 가치외교가 특정 국가들의 체제를 넘어 공유하는 수준과 범위에 맞추어 포용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되, ‘옹호적’ 민주주의외교도 최소한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했거나, 심지어는 전제주의 국가 내 시민사회를 겨냥해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가치외교와 가치외교의 한 가지 그러나 매우 중요한 형태로 민주주의외교를 동시에 추진할 수 있다.

 

3. 한국의 가치외교 전략 및 주요 의제

 

세계 민주주의가 지난 16년 간 후퇴하고 있는 시기임을 고려할 때 아시아의 역동적 민주주의 국가로서 경제 기적 못지않게 민주주의 공고화를 성공적으로 성취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외교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식민지 경험, 남북한 전쟁 및 분단 고착, 권위주의 시대,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이러한 경험은 발전과 민주화 양대 목표를 갖고 있는 많은 개도국들에게 풍부한 스토리를 제공한다. 특히 민주화 역행의 위기 국면들이 더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탄력성이 높은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2003년 민주주의공동체 2차 회의와 2015년 세계민주주의대회(World Movement for Democracy)를 주최한 바 있고, 2021년 영국 콘월에서 개최된 민주주의 10개국 정상회의 참여에 이어 2023년 민주주의 정상회의 인태지역회의도 주최하게 되었다. 이제, 단순한 회의 소집자의 역할을 넘어서 한국이 잘 할 수 있는 민주주의 어젠다를 발굴해 유사입장국들과 협력해 민주주의의 보호와 회복에 가치외교의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전략을 취하는 것이 가치외교나 민주주의외교를 이행하는 데 현실적일 것인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다자기구 내 확장적 관여와 역내 플랫폼을 만드는 전략이다. 보편적 가치와 규범 옹호를 위해서는 다자기구에서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은 유엔의 민주주의기금에 기여하고 여성과 평화 의제에 능동성을 보이면서 다자기구를 통해 가치외교를 펼쳐 왔다. 그러나 그 활동 범위는 미미한 편이므로 이를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 · 태평양 지역에는 동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민주주의 진흥을 위해 EU 회원국들이 2013년에 만든 유럽민주주의기금(European Endowment for Democracy, EED)과 같은 지역기금이 없다. 역내 유사입장국들 간에 기금을 만들어 관련 기관들 간의 컨소시엄을 만들어 운영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세안 국가들의 연합체 내에서 보편적 가치의 강화를 위한 법, 제도화 노력을 견인할 수도 있다.

 

둘째는 포용적 · 개방적 연대 추진 전략이다. 미국 주도의 민주주의외교 참여가 미중 경쟁 속의 체제 선택이 아님을 명확히 하기 위해 유럽 및 아시아 민주국가들과 이슈별로 소다자 협력을 꾀함으로써 가치외교나 민주주의외교 파트너 국가의 외연을 넓힌다. [4] 영국이 G7 정상회의의 일환으로 주도했던 주요 민주주의 10개국 정상회의(D10), 외교부가 참여해 온 1.5트랙의 또 다른 D10 회의, 스웨덴이 주도하는 Drive for Democracy 최근 참여 경험들을 살려 유럽의 주요 민주국가들과 협력을 추진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를 주요 협력 파트너로 상정할 수 있다. 쿼드 플러스(Quad plus) 협력 네트워크에 가치외교 의제를 특정해 한국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도 있겠다.

 

셋째는 가치외교를 조율하고 확장할 국내 정책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다. 국내에 가치외교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부서가 분산되어 있어, 외교 비전을 공유하거나 정책적 조율을 할 수 없다. 행정안전부 산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있으나 국내 민주화 기념사업이 주관 업무이며, 외교부 산하 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은 한국을 해외에 알리는 공공외교가 주된 미션인 만큼 가치외교를 추진하기에 적절치 않다. 정부 간 무상원조를 집행하는 국제협력단(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의 경우, 굿 거버넌스 역량강화 사업을 확대할 수는 있지만 가치외교나 민주주의외교를 담아내기에는 제약이 많다. 미국의 민주주의재단(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5]이나 대만의 민주주의재단처럼 의회가 초당적 지원을 하는 기관을 새로 만드는 것은 한국 정치의 대립적 상황을 고려할 때 어려워 보인다. 순수 민간 차원의 재단이나 기금이 마련되어 유사 활동을 한다는 것도 아직은 비현실적이다.

 

가치외교를 수행할 독립기관을 새로 만든다면 외교부 산하에 가칭 ‘민주주의 재단’ 같은 것을 만들어 민주적 거버넌스를 위한 국제적 지원을 도모할 수 있겠다. 공공기관으로 정부 지원이 들어가되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여 국내외 민간단체들과 협력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재외동포재단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겠다. 새로운 독립기관을 만들기 어렵다면, 외교부 내 미 국무부의 민주주의와 인권 및 노동 분과(Bureau of Democracy, Human Rights and Labor)와 유사한 것을 만들어 외교정책에 가치 의제를 격상시키고, 국제교류재단이나 국제협력단 등 유관기관들에 관련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조율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외교의 주요 의제로는 한국이 비교적 잘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첫째, 법의 지배를 구현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연구들이 사법부의 독립을 중시한다. 행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문제가 많은 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다. 견제와 균형을 위해, 최후의 정의로운 판단자로서 사법부가 제 역할을 해야 행정부의 전제주의화를 막을 수 있다. 민주주의 역행을 방지하는 데 사법부의 독립이나 주변국들로부터의 민주주의 확산효과가 큰 만큼, [6] 역내 국가들의 사법부 독립성을 위해 교류협력이나 연수과정 등을 확장할 수 있다. 해외원조의 사법부 교류사업이 일부 운영되고 있지만 규모나 범위가 적은 만큼 이를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둘째, 민주주의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선거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선거진실성에 대한 규범 강화와 개표 과정 기계화와 같은 기술 지원에 주력할 수 있다. 한국의 선거관리위원회가 세계선거기관협의회를 만들어 개도국들의 자유민주주의 선거 발전을 돕고 있지만 예산과 인력의 부족으로 성과를 크게 내고 있지 못하다. 기왕에 만들어진 협력체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외원조와 결합해 재정적으로 지원해 볼 수 있다.

 

셋째, 민주주의 정상회의 인태지역회의를 주관하면서 채택된 반부패 의제를 향후에도 이끌고 확장할 수 있다. 부패방지는 권력자나 특정 계층이 부패사슬을 통해 자원과 돈을 갈취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고루 투입되게 함으로써 경제 발전을 돕는다. 또한 청렴한 정부에 대한 믿음은 정부 신뢰를 가져오며, 청렴사회에 대한 기대는 사회 통합을 도와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 한국 정부는 열린정부파트너십(Open Government Partnership) 협력체를 통해 정부 투명성 증대와 부패 척결, 시민사회 참여를 위해 앞장서 왔다. 특히 한국의 개도국 전자정부 원조는 부패방지 효과를 가져와 호응을 얻고 있다. 외교부는 반부패 기구인 국민권익위원회 및 법무부와 함께 할 수 있는, 반부패협약의 강화를 위한 국제협력에 나서야 한다. 또한, 민간단체들이 국제투명성기구(TI)와 같은 국제적인 비영리단체들과 함께 협력해 반부패 옹호 활동에 나서도록 지원할 수 있다.

 

넷째, 정치적 의사표현과 반대자 억압, 대중적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탄압하는 행위, 종교적, 인종적 소수집단의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다자적 관여의 방식으로 규탄과 제재로 맞서야 한다. 다자적 관여 방식은 권위주의 정부가 내정간섭이라는 비난의 대상을 한국으로만 특정하기 어렵게 만들고, 다수의 정부와 함께 공동 행동을 취할 시 그 효과가 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에 다자적, 독자적 제재로 대응한 것은 좋은 경험이 되었다.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자들의 2022년도 민주주의보고서(Democracy Report)는 세계 인구의 13%, 34개 국가만이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다고 보고한다. 한국은 자유 민주주의 수준이 세계 17위로 꼽혀, 미국이나 일본보다 높고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순위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민주주의 국가가 된 만큼 이 소중한 자산이자 가치를 다른 나라의 시민들과 공유하도록 지지하고 지원해 주는 가치외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1] Valerie Braithwaite. 1998. “Communal and Exchange Trust Norms: Their Value Base and Relevance to Institutional Trust,” in V. Braithwaite and M. Levi, Trust And Governance (Russell Sage Foundation 1998). 46-74.

[2] “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 https://asean.org/asean2020/wp-content/uploads/2021/01/ASEAN-Outlook-on-the-Indo-Pacific_FINAL_22062019.pdf

[3] Varieties of Democracy (V-Dem)는 1972년과 2020년 사이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20개국에서 32개국으로, 선거민주주의 국가도 16개국에서 60개국으로 증가했으나, 선거전제주의 국가가 36개국에서 62개국으로 증가하고, 폐쇄전제주의는 86개국에서 2010년 20개국으로 줄어들었다가 2021년 25개국으로 증가함을 보고한다.

[4] Lee, Sook Jong. 2021. “Beyond the US-China Rivalry: Developing a Shared Democratic Vision for the Indo-Pacific.” East Asia Institute. January 15; 이숙종. 2021. “G7에서 D10으로: 미중경쟁과 다자질서 내 체제경쟁의 복합성.“ EAI 이슈브리핑. 7월 7일.

[5] 미국 민주주의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은 미 의회에서 초당적으로 예산을 지원하는 민간기관으로 1984년에 설립되어 최근 기준으로 연 4000억 원 가량의 예산을 쓰고 있다. 이 예산의 절반은 NDI, IRI, CIPE, ACILS 등 관련 민주주의 지원 기관들에 배분되는데 이들은 전 세계의 민주주의 보호와 진흥을 위해 시민단체들이나 개인들을 직접 지원하고 있다.

[6] Vanessa Boese et als. 2021. “How democracies prevail: democratic resilience as a two stage process.” Democratization 28, 5: 885-907; Melis G. Laebens, Melis G. and Anna Lührmann. 2021. “What halts democratic erosion? The changing role of accountability.” Democratization. 28, 5: 908-928,

 


 

저자: 이숙종_EAI 시니어펠로우·이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객원 연구원, 존스홉킨스대학교 교수강사, 현대일본학회 회장,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EAI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세계민주주의대회(WMD) 운영위원을 맡고 있고, 아시아민주주의연구네트워크(ADRN)를 창설하고 운영하고 있다. 최근 편저에는 Populism in Asian Democracies: Features, Structures, and Impacts (공편, 2021), Collaborative Governance in East Asia: Evolution Towards Multi-stakeholder Partnerships (공편, 2020), 《함께 풀어가는 사회문제: 갈등과 협력사례》(공편, 2019), Transforming Global Governance with Middle Power Diplomacy: South Korea’s Role in the 21st Century (편), Public Diplomacy and Soft Power in East Asia (공편), 《세계화 제2막: 한국형 세계화와 새 구상》(공편), 《2017 대통령의 성공조건》(공편) 등이 있다.

 


 

담당 및 편집: 박한수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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