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민교 교수는 UC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제18차 ARF 회의와 동아시아 해양분쟁

 

전 세계적으로 해양분쟁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을 꼽으라면 단연 북서태평양, 동해, 서해,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으로 구성되는 동아시아 해양지역을 들 수 있다. 지난 해 가을 동중국해의 첨각열도•조어도를 둘러싼 중일 간의 외교적 분쟁은 해양 이슈를 자칫 잘못 다루었다가는 힘과 이해관계의 미묘한 역내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보다 노골적인 영유권 주장이 동남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미국까지 자극하고 있는 남중국해 역시 동중국해 못지않게 위험스러운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 종식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미국의 막강한 해양 투사력이 동아시아 해양질서의 안정성을 제공해 왔지만 이제는 중국에 의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5월말 중국 순시선이 남중국해 상에서 베트남의 석유•가스 탐사선 케이블을 절단하면서 야기된 중국과 베트남 간의 분쟁이 무력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또한 최근 이해 당사국들이 동 지역에서 잇따라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져 왔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국내외 외교가에는 지난 7월 22-23일에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제18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 외교장관회의가 개최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과 중국, 그리고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구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남중국해 문제가 최대의 쟁점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항행 자유의 중요성은 자명하며 모든 국가가 그 수혜국이 되어야 한다”는 전향적 입장을 피력하였고, 중국-ASEAN 외교장관 회담에서는 지난 2002년 양자간에 합의된 <남중국해 당사국 행동강령> (Declaration on the Conduct of Parties in the South China Sea)의 실행을 위한 지침(guidelines for the implementation)을 채택하는 등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의 행동을 주목해오던 미국은 중국과 ASEAN이 남중국해 긴장 해소를 위한 행동강령 지침에 합의한 데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는 지난 해 7월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되었던 ARF 회의에서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미 국무장관이 “남중국해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 미국의 국익과 직결된다”고 발언해 미중 간 대립이 촉발되었던 것과 크게 대비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일견 ARF가 중요한 성과를 올렸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른 해양분쟁의 평화적인 해결 원칙을 천명한 2002년 행동강령은 구속력이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번에 합의된 행동강령 지침도 선언적 의미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향후에 남중국해 문제가 원만하게 수습되리라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오히려 다자간 포럼에서 자국이 집중적인 표적이 되는 경우 중국은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숨을 고른 뒤 다자회담 이후에 진행되는 양자관계에서 다시 강압적인 모습을 보였던 전례에 비추어 이번 ARF 회의의 성과에 큰 의미를 두기 어려울 수도 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역학관계와 해양질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힘과 이해관계의 복잡한 균형은 더 이상 한 국가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이웃 강대국들 사이에서 제한적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균형을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해왔다. 반면 일본은 미국을 통해 지역패권의 경쟁자인 중국을 견제 하면서 자국의 입지를 확립하기 위해 애써왔다. 그런데 중국이 최근 들어 더욱 공격적인 해양정책을 펼치고 해군력을 증강하면서 지역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중국은 지역 해양질서의 새로운 균형을 찾고 있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설계하지 않은 제도나 규범에 얽매이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미국이 이전의 미온적 태도에서 탈피하여 최근에 다시 동아시아 해양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사를 비춤으로써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동아시아 해양질서는 역내의 유동적인 지정학 및 지리경제학적 요인들로 인해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부상하는 동시에 더욱 독단적인 중국과 다시 관여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미국이 있다. 동아시아 경제 전반에 걸쳐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지는 가운데 경제적 인센티브는 중국과 주변국들 사이의 정치•외교적 긴장을 완화시켜왔다. 반면에 냉전시대의 전략적 통제와 같은 구속이 사라진 상황에서 중국은 이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해양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의 첫 항공모함의 시험운항이 임박했다는 소식은 이러한 추세를 잘 보여준다. 모든 전문가들이 최악의 시나리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추세로 미루어 볼 때 중국이 미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에게 자신의 힘을 직간접적으로 시위함에 따라 그 주변국들은 잠재적인 위험에 대비해 세력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조치, 즉 군비증강에 더욱 박차를 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은 그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만 관심이 있었고 동아시아지역 영토에 대한 열망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떠오르는 지역 패권국으로서 중국은 지정학적 열망과 영토적 열망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동아시아 해양질서에 주는 함의는 매우 크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동아시아 해양분쟁에 대한 중국의 정책은 실지회복주의적 야망(irredentist ambition)에 의해 크게 좌우되어 왔다. 즉 중국은 고유 영토설(inherent territory)에 입각하여 남중국해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U자형 해역의 영유권을 주장해왔고 동중국해에서도 일본과 우리나라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경제적 고려 또한 중국의 마찰적인 해양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에너지와 원자재를 수송하는 해로를 확보하는 것이 중국의 우선순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93년 중국이 원유 순수입국이 되면서 에너지 문제는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중국과 주변국들의 관계 악화는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 재등장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 중일 간의 첨각열도•조어도 분쟁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중국의 깊은 불만을 야기하였지만 일본에게는 미국이 일본 안보이익의 최후의 보루라는 점을 재차 인식시켰다. 이를 계기로 지난 해 초부터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이전을 둘러싸고 불거진 미일 양국의 갈등이 극적으로 봉합 되기도 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베트남은 남중국해에서 최대 라이벌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많은 부분에서 빠르게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다자협상에 다른 국가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분쟁의 국제화를 시도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베트남 정부의 외교적 노력에 부분적으로 부응하여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서사군도와 남사군도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는 미국이 중립을 지키겠지만 미국 항행의 자유가 침해된다면 개입할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동아시아 해양을 둘러싼 미중 간의 새로운 경쟁은 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EEZ)에서 타국이 어떤 형태의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국제법적 논쟁과 맞닿아 있다. 지난 2001년 미 해군의 EP-3 정찰기와 중국의 전투기 간의 충돌, 2009년 미 해군 관측선 임페커블(Impeccable)호에 대한 중국의 도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EEZ에서 행해지는 미국의 군사적 행위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세적 행동은 두 강대국을 위험한 대립으로 치닫게 할 수 있다. 유엔해양법협약상 EEZ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는 국가는 모든 생물과 비생물 자원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고 다른 국가에 의한 과학적 연구를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타국의 EEZ에서 자국 함정이 조사활동을 하는 것은 유엔해양법협약이 보장하는 항행의 자유 원칙에 따라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중국은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중국은 이를 “해양 과학 연구”라고 특징짓고, EEZ에서 그런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연안국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은 일본과 베트남의 EEZ 내에서 이루어지는 중국의 일방적인 조사 및 감시활동과 배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매우 논쟁적이다.

 

미중 간의 이러한 대립은 지난 해 3월 천안함 폭침 사태 이후 한미 양국의 합동 해상훈련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천안함 사태 발발 후 미국과 한국이 일본 열도와 한반도 주벽 수역에서 핵항모 조지 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를 포함한 대규모 해상 합동훈련을 실시할 것을 발표하였다. 양국은 원래 서해에서도 훈련을 실시하기로 계획했으나 중국의 극렬한 항의로 갑작스럽게 훈련이 취소되고 말았다. 중국은 대부분이 중국의 군사 작전지역과 EEZ에 포함되는 이 지역에서의 해군 훈련에 미국이 참가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선제적인 해군 훈련을 실시하였다. 사실 중국은 서해에서 한국과 EEZ 경계에 대해 공식적으로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EEZ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한편, 지난 해 11월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갑작스런 포격 후에 미국과 한국은 중국의 큰 방해 없이 서해에서 조지 워싱턴호를 포함한 합동 해군 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침묵은 앞으로의 행동변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일련의 미중 간 외교적 마찰은 동아시아 반폐쇄해(semi-enclosed sea)에서의 상호 수용 가능한 군사적 행동의 범위를 두고 이해당사국들 모두가 만족스러운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자주의적 해법의 모색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 해양문제는 경계획정, 자원, 영유권, 해로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어느 한 국가의 일방적 또는 양자적 노력만으로 해결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동시에, 역내 여러 해양분쟁의 공통분모인 중국의 협조와 양보가 없다면 다자적 해법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은 해양분쟁의 해결을 위하여 양자협상을 고집해 왔다. 중국은 해양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다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채널을 총동원해 “당사국 간 대화를 통한 해결과 미국의 불개입” 입장을 적극 설파하는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태도는 당장은 우월한 전략으로 보일지 몰라도 양자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당위성을 훼손시키지 못한다. 다자주의적 해법의 모색이 곧 국제사법재판소나 국제해양법재판소와 같은 제3자에 의한 중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강압 없이 다양한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모든 분쟁 당사국들에 의한 협력적 외교 과정”으로 묘사한 다자적 지역주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오바마 정부가 동아시아의 해양 문제에 대한 다자회담의 개최를 반복적으로 암시해온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미국이 올해 처음으로 참가하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에서 남중국해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과거 동아시아 해양분쟁은 각각의 분쟁들이 서로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는 결국 모든 당사국들의 완전한 참여 없이는 효과적인 해양질서를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해양 경계 문제, 영유권 문제, 자원 문제 등을 다자적으로, 그리고 순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내 공동이해가 공유되어야 한다. 남중국해의 예에서와 같이 구속력은 없지만 상징적인 행동강령의 채택은 현상을 유지하면서 상호이해를 촉진하기 위한 좋은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공동의 이해관계와 상호신뢰 구축만으로는 부족하다. 보다 구속력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 1994년부터 시작된 ARF 외교장관 회의가 매년 영유권•EEZ 분쟁을 포함한 지역 안보정세 등에 관해 논의해 온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ARF 회원국 구성이 너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채택되는 의장성명 등도 구속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동아시아 해양문제를 다루기에는 부적합하다.

 

오히려 (가칭) ASEAN+5(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다자포럼이 공동의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구속력 있는 합의를 도출해내기에 더 적합할 것이다. 즉 중국과 ASEAN 간의 행동강령 지침을 이끌어낸 ASEAN+1과 같은 변형된 양자주의적 접근과 이를 ARF와 같은 다자포럼에서 선언적으로 확인하는 형식적 다자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핵 6자회담과 같이 모든 이해당사국이 한 자리에 모여 기선(baseline)에 대한 원칙, 경계획정에 대한 원칙, 자원공유의 원칙 등에 관해 구속력 있는 합의를 한 후 현재의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는 한시적으로 동결조치를 취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ASEAN+5와 같은 다자포럼이 한반도에서만의 비핵화를 추구하는 비대칭적 6자회담과 다른 점은 모든 당사국들이 고르게 양보를 해야 하고, 또 그 편익을 고르게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각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분쟁 도서의 영유권에 대해서는 동결 선언을 한 후 그러한 도서들은 EEZ나 대륙붕의 기선이 될 수 없고 경계가 중복되는 해역에서는 우선 잠정적인 중간선을 먼저 그은 후에 필요한 경우 세세한 부분들에 대한 조정을 한다는 “등거리 및 특수한 사정의 원칙” (equidistance-special circumstances principle)에 대한 다자간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각국은 한 해역에서의 양보를 다른 해역에서 보상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칭적 이익의 균형(balance of interests)을 확보하는 것이 보다 용이해질 것이다. 또한 다자의 틀 속에서는 위신비용(reputational cost)이 높아지기 때문에 각국 내 극우집단의 도발적인 행동에 대한 억지력이 높아지게 되고, 따라서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해양관련 분쟁은 중국의 “평화적 부상” 원칙에 대한 중요한 시험이 될 것이다. 중국이 자신의 실지회복주의적 야망과 관련한 이웃국가들의 우려를 효과적으로 불식시키지 못한다면 지난 30년간 획득한 외교적 신뢰를 급격히 상실할 수 있다. 중국은 지난 해 일본과의 도서분쟁에서와 같이 “따끔한 교훈”을 주기 위해 경제적 관계를 외교적 압력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도 불사해왔다. 즉 희토류의 대일수출을 규제함으로써 구금된 중국 선장의 석방을 유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적나라한 외교 행태는 중국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국제적 경계심을 유발했다. 중국은 공세적 외교전략이 결국 자국의 이해를 해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은 다자적 해양 체제를 형성함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정치적 의지와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보여왔다. 동경에서 1,700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남태평양에 위치한 두 개의 작은 바위로 구성된 오키노토리시마에 대한 기이한 주장에 의하여 가장 잘 상징되는 일본의 광범위하지만 모호한 해양 경계 및 도서 영유권 주장은 일본을 하나의 탐욕스러운 부자처럼 보이게 할 뿐이다. 지진과 원전사태에도 불구하고 추진되고 있는 역사 및 사회과 교과서 문제나 최근 일부 야당의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도발은 단기적으로 국내정치적 지지를 조금 더 확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동아시아 공동체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의 일본의 장기적인 국익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일본 정부는 보다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역학관계와 도전 속에서 한국과 ASEAN 국가들은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서 안정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들 중소 국가들이 중국의 급속한 세력 팽창에 맞서 미국에게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중국과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것은 좋은 정책 대안이 되지 않는다. 한국과 ASEAN 모두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최근 ARF 회의를 앞두고 우리 정부는 “남중국해 문제는 한국이 깊이 관여할 사안이 아니다. 다만 국제해양법상의 자유로운 항해는 존중되어야 한다”라며 원론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우리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은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고려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남중국해는 한국 경제의 생명줄과 같은 해로일 뿐만 아니라 서해와 동해 및 동중국해에서 한국도 유사한 영유권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도 보다 적극적인 다자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강 건너 불 보듯 할 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등거리 및 특수한 사정의 원칙”은 우리 정부가 그 동안 일관되게 주장한 내용으로 이를 지역 규범화하기 위해 외교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북핵 6자회담, ASEAN+3, EAS, APEC 등과 같은 역내 다자포럼에서 축적한 경험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의제설정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ASEAN의 경우 일면 일관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하여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베트남과 필리핀이 중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반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은 중국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다자적 해결을 위해서는 ASEAN의 보다 적극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

 

미국 역시 이제 역내의 역학관계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 동안 미국은 항행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중국 지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지만, 중국은 아직 이러한 시각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고 있다. 이번 ARF 회의에서 양제츠(楊潔篪) 중국 외교부장은 “(남중국해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지침 마련으로 이 지역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국가들 사이의 분쟁을 적절히 다루는 데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존중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관련하여 비당사국인 미국의 불개입을 재차 요구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의 힘의 확대에 분명한 제한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면서도 중국 정부가 책임 있는 이해당사자로서 행동한다면 중국의 영토문제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부상을 환영할 것임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공동번영에 필수적인 평화로운 해양문제 해결을 위한 완벽한 기회는 판도라의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종류의 진퇴양난의 문제를 다 푼 후에만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

 

 


 

 

동아시아연구원(EAI)은 미국 맥아더 재단의 ‘아시아안보이니셔티브’(Asia Security Initiative) 프로그램 핵심 연구기관으로 선정되어 재정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EAI 논평]은 국내외 주요 현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해 깊이 있는 분석과 적실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AI 논평]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본 원고는 집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동아시아연구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본 논평은 저자의 “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 The Future of the East Asian Maritime Order” EAI Issue Briefing No. MASI 2010-08 (December 27, 2010)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6대 프로젝트

미중관계와 한국

세부사업

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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