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생물’이라고들 하는데 집회시위 역시 생물이다. 한국의 집회시위는 전문가들마저 당혹케 하는 속도로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촛불시위는 주체도, 지도부도, 구심점도, 일정한 형식이나 의제도 없고 분명한 종결도 예정되어 있지 않은 역사적 실험이다. 당연히 해석이 분분하다. 다양한 정치세력이 촛불시위를 아전인수격으로 활용하고자 했으나 배척 당했다. 이제 한국 민주주의에서 집회시위는 일상화, 대중화, 보편화되었다. 집회시위는 희생을 각오하고 떠나는 전장이 아니라 시민의 의견과 이익과 열정을 표출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되었다.
이번 EAI 연구결과는 민주화 이후에 한국에서 집회시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 한국정치에서 집회시위가 차지하는 위치는 남다르다. 대중동원은 한국에서 권위주의의 해체와 민주주의로의 이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대규모 집회시위의 경험이 ‘추억’이 되어버린 많은 신생민주주의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 대중동원의 신화는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현재형이다.
하지만 집회시위의 양태와 방식에 의미심장한 변화도 관찰되고 있다. 거리시위가 늘고, 시위의 주체가 변하고, 제도정치에서의 불평등은 비통상적 시위정치에도 재생산된다. 정치적 성격의 대정부시위가 계속되고, 대규모·장기·불법시위가 유효하다는 것이 ‘근거있는’ 속설이며, 조정과 협상은 여전히 부족하다.
집회시위로 초래되는 경제적 피해를 강조하여 ‘시위공화국’을 푸념하는 ‘집회시위 무용론’은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열악한 경제상황에서도 집회시위에 대한 여론은 별로 나쁘지 않다. 집회시위는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에서 제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수적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은 극명하게 갈린다. 집회시위를 제도권 대의정치로 수렴되어야 할 기형적 현상으로 보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역동적인 에너지를 가진 변혁의 장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전자는 ‘정당정치의 조속한 복원’을 촉구하며, 후자는 대의민주주의와 ‘거리민주주의’의 ‘이중권력’을 꿈꾼다.
아마도 한국 민주주의에서 집회시위의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과소평가와 과대평가의 사이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집회시위가 정당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도정치의 정상화만을 교과서적으로 되뇌기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 너무 절박하고 집회시위가 가진 역사적 무게가 버겁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자기혁신하는 한국의 집회시위를 백안시하거나 이상화하기보다는 겸허한 자세로 성찰하고 시민사회의 열정을 제도화하여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알차게 일구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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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총선 연구 시리즈] 양극화 시대 상충적 유권자의 선택: 정권견제론 VS. 정권안정론
유성진 | 2024-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