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NK 논평] 한국전쟁과 4인의 동상이몽](/data/bbs/kor_issuebriefing/20250702165948559039731.jpg)
신성호 서울대 교수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를 둘러싼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 지도자의 상이한 정치적 목표를 분석하고 전쟁이 오늘날 한반도 정세에 주는 함의를 제시합니다. 저자는 남북한이 통일을 이루기 위한 총력전에 임한 반면, 미국과 중국은 전면전을 피하면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방어적 제한 전쟁을 전개했다고 설명합니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 이해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최대 변수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이 민주주의와 강력한 대북 억제를 바탕으로 종전 및 평화 체제 구축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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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5년이 지났다.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대신 휴전상태로 동결되어 있다. 시카고 대학의 현실주의 대가 존 머샤이머 교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한국전쟁에 비유하며 그 역시 동결된 분쟁(a frozen conflict)으로 남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우크라이나가 영토의 4분의 1을 빼앗긴 상태에서 전쟁이 동결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75년을 분단상태로 동결된 한국 전쟁이 그렇다. 한국 전쟁의 평화적 해결은 남북은 물론 동북아의 모든 당사자에게 중요하다. 그 해결은 한국전쟁이 왜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전쟁론의 대가 클라우제비츠는 모든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고 정의했다. 전쟁의 시작과 끝은 당사자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지배당한다. 한국전쟁의 시작과 끝에 대한 실마리는 주요 당사국의 지도자였던 김일성, 이승만, 트루먼, 모택동의 정치적 목적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전쟁을 시작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의도는 무력을 통한 남한의 흡수통일이었다. 남북에 각자 정부가 수립된 후 임시적 분계선이던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 간에는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정부 사이에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이어졌다. 김일성이 전격적인 남침을 결심한 계기는 미국이 한반도에 군사개입을 하지 않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남침이 있기 6개월 전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기자회견에서 한반도가 빠진 일본 열도와 필리핀을 미국의 일차적 방어선으로 발표한다. 후일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으로 알려진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 방어선에 한반도가 빠진 것으로 해석되었다. 김일성은 미국과의 무력충돌을 우려하던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설득하여 남침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하루만에 참전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참전하게 된 정치적 목표는 무엇이었나? 미국은 한국전쟁 내내 그 기본 목표를 놓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초기에는 공산주의 침공으로부터 남한의 보호와 동시에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한 엄벌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2차 대전 직후 미국은 뉴욕에 유엔 본부를 유치하며 어떤 형태의 침략도 불법으로 규정한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출범시켰다. 김일성의 남침은 유엔의 기본정신과 미국의 리더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한반도가 공산화되면 애치슨이 미국의 핵심 방어선으로 지정한 일본이 위태로워진다는 지정학적·군사적 계산도 작용하였다. 그 후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급변하자 북한 영토로 진격하며 남북통일을 새로운 전쟁의 목표로 추구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북·중 국경지대 접근에 위협을 느낀 모택동이 그해 10월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된다. 이에 다시 전쟁 목표는 남한 영토의 원상복구와 함께 중국 및 소련과의 전면전 방지를 위한 빠른 종전으로 다시금 변경된다.
한편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참전을 이용한 북진통일을 전쟁의 목표로 추구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이 기회에 남한 주도의 북진통일을 꿈꾼 것이다. 연합군이 중국의 개입으로 후퇴한 이후에도 이승만의 이러한 정치적 목표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물론 소련과의 세계대전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군에 핵무기 사용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고 교착상태에 이른 전쟁의 휴전을 서두른다. 트루먼에 이어 새로이 들어선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추진하자 이승만 정부는 휴전협정에 서명을 거부한다. 협정 당사국에서 중국, 북한에 이어 유엔군을 대표한 미국만 있고 정작 한국이 빠지게 된 이유이다. 이후 북한은 핵을 포함한 한반도 군사 문제에서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만 직접 대화하겠다는 통미봉남 정책을 펼치게 된다.
중국의 모택동은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참모진의 의견을 물리치고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라는 명분으로 참전을 결정하였다. 2차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함께 싸운 북한을 미 제국의 침략에서 구원한다는 형제 공산국의 의리가 강조되었다. 중국이 한국전쟁을 항미원조 전쟁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북·중 국경선을 향해 진격해오던 한미 동맹군에 대한 자신들의 안보 우려가 있었다. 보가위국, 북한을 돕는 것이 결국 나의 가정과 국가를 지킨다는 것이다. 남한 주도로 통일이 될 경우 북한이라는 전략적 완충지대가 사라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은 마오쩌둥의 유일한 아들 마오안잉을 포함 18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위시해서 9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다. 이후 미국의 직접 위협을 막는 완충지대로써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지키고자 한 모택동의 의도는 지금까지 북·중 관계를 유지하는 기본 토대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남북한과 미국, 중국 4개국의 지도자가 가진 각기 다른 전쟁의 정치적 목표가 충돌한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의 무력통일과 전쟁 말기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상대 체제를 무너뜨리고 흡수하기 위한 총력 전쟁의 성격을 가졌다. 그 기본 동학은 오늘에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70년이 넘게 평화협정 대신 휴전협정이 이어지는 배경이다. 한국전쟁이 언제 다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은 여전히 총력전의 위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남북의 후견인 역할을 한 미국과 중국 지도자의 셈법은 달랐다. 트루먼과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매우 부담스러운, 그러나 냉전의 대결 구도 속에서 자국의 안보이익을 위해 내버려 둘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전면 대결은 피하면서도 한반도의 주도권을 서로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이었다. 트루먼의 전쟁 참여와 미군의 북진 이후 모택동의 전면 군사개입은 남과 북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전략적 완충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동시에 한국전쟁은 미·중 간의 총력전을 피하기 위한 방어적 제한 전쟁의 성격을 가졌다. 전쟁이 교착상태를 이루자 서둘러 휴전협정을 타결한 이유이다.
한국전쟁이 1953년 누구의 승리도 아닌 휴전으로 끝나면서 남북분단이 고착되었다. 그런데 한반도의 남북분단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여러 번 논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마지못해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는 전쟁의 빠른 해결을 위해 조선을 남북으로 나누어 휴전하는 방안을 일본과 논의하였다. 구한말 동북아에서 일본과 패권경쟁을 벌이던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 직전에 일본에 타협안으로 조선반도를 39도선을 경계로 나누어 분할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러시아와 미국이 38선을 합의한 것도 역사적 우연이 아닐 수 있다. 남북분단이 부담스러운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강대국의 세력 균형 전략에 유용한 타협 장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휴전협정은 남북의 총력전과 미·중의 제한전에 대한 서로 다른 목표가 충돌하고 타협한 산물이었다. 오늘날 한반도에 대한 미·중의 계산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사실 미·중은 제2의 한국전쟁이 초래할 군사개입에 남북 당사자보다 더욱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이 너무나 치열하고 그 희생이 컸기 때문이다. 남북 간의 군사적 위기 때마다 중국이 한반도의 안정과 대화를 강조하고 미국은 남한의 절제된 대응을 바라는 이유이다. 21세기 미·중은 한반도를 넘어 지역과 세계 차원의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다. 무섭게 부상한 중국과 초강대국 미국의 정치·군사적 이해가 한반도의 전쟁과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라는 사실은 지금도 여전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란 이스라엘 전쟁에 미국이 뛰어들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란 이스라엘 사이에 휴전을 종용하고 있다. 지역국가의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강대국의 속셈이 보인다. 문제는 휴전과 종전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75년 전의 한국 전쟁이 주는 교훈이 21세기 지정학적 패권경쟁에 새롭게 다가온다. 3년의 치열한 전쟁 후에 평화협정이 아닌 정전협정으로 끝난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둔 남북의 군사 대치 상황은 기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민주주의와 강력한 대북억제를 바탕으로 종전선언과 남북평화협정,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주도할 대한민국의 적극적인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
■ 신성호_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 담당 및 편집: 오인환_EAI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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