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력의 미래비전 시리즈] ① 한일 신시대 2.0을 향하여: 한일 미래비전 공동연구 서문
한일협력의 미래비전 | 워킹페이퍼 | 2023-03-27
손열
동아시아연구원 원장, 연세대학교 교수
손열 EAI 원장(연세대 교수)은 한국의 관계 개선 노력에 대한 일본의 상응 조치 유무에 치중한 강제동원 해법 논쟁에서 탈피하여, 한일관계 개선에 따른 편익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다자 공간에서의 한일협력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과거사 갈등에 가로막혀 정체되는 동안, 탈세계화와 미중 전략경쟁 심화라는 새로운 도전이 부상하여 한일 양국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일협력의 미래비전 연구팀은 공동 연구를 통하여 규칙에 기반한 미중 전략경쟁 관리, 한중일 간의 상호 인식 개선을 통한 이해와 협력, 자유무역 질서와 국제 개발협력을 위한 경제협력 등의 과제를 분석합니다.
Ⅰ. 관계 개선의 실타래
한일관계는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다. 3월 6일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안이 나오고 3월 16일 한일 정상회담 개최로 관계 회복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2012년 위안부 합의 좌초, 지소미아 체결 연기, 한일 통화스와프 폐기 등 역사-안보-경제 3중 위기로 본격화된 한일 갈등은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 후폭풍을 거쳐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에 따른 외교 마찰, 일본의 반도체 수출규제,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선언 등으로 2차 위기에 돌입하여 최악의 상황을 초래했다. “잃어버린 10년”의 역사가 초래한 “신뢰의 위기”는 윤석열 정부의 일련의 노력으로도 쉽사리 극복되기 어렵다. 그런 맥락에서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을 놓고 정치권과 언론, 학계가 벌이는 뜨거운 찬반 논란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강제동원 해법안을 둘러싼 편익 논쟁이 지나치게 좁은 시야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대립하고 있는 “굴종 외교론”이나 “미래 지향 외교론” 모두 강제동원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주고받기 프레임 즉, 한국측 해법에 대한 일본측의 상응 조치 논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과거 직시 없이는 관계 개선 없다는 주장에 대해 미래지향적 협력을 추진하면 과거를 넘을 수 있다는 (즉, 상응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상응 조치 변수는 큰 틀에서 한일관계 개선이 가져다 줄 편익 계산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국익 차원에서 한일관계 개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한일관계는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가, 어떤 협력을 해야 하는가. 격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일관계의 가치, 위상, 역할에 대해 면밀한 재검토와 재평가를 내리고 그 속에서 한일관계 개선의 편익을 종합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한일협력이 10년 정체 상태인 동안 세상은 크게 변했다. 첫째, 미중 전략경쟁은 무역에서 시작하여 첨단기술, 체제와 가치, 군사 부문으로 확산되며 날로 치열해 가고 있다. 둘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진전이 소득 격차를 확대하고 공동체 유대를 약화시켜 경제민족주의와 보호무역주의의 부활을 가져온 데 더하여, 미중간 경제안보 경쟁이 가속화되어 공급망 재편과 기술 디커플링이 진전되면서 자유주의적 국제경제질서는 대혼란 상태에 빠졌다. 셋째, 코로나19 대유행과 기후 위기 등 인류 공통의 초국경적 위협이 전면 부상하고 있는 반면 지구 차원의 거버넌스는 취약해져 국제적 공동 대응이 어려운 처지이다. 개방적 통상국가로서 강대국 전략경쟁의 단층선에 위치한 한국과 일본은 이상과 같은 공통의 도전에 직면하여 오히려 협력의 분면이 넓어지고 협력의 필요성이 커지는 상황을 맞고 있다. 양국은 공통의 의제를 설정하고 국제 규칙과 규범을 제정하여 국익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한일관계 개선의 방정식은 역사화해와 같은 양자 관계 차원의 변수뿐만 아니라 지역적, 지구적 공간에서의 협력 유인 변수들을 포함하여 풀어가야 한다. 한미일, 한미일호, 쿼드 플러스, 인도-태평양, 지구 거버넌스 등 복수의 층위에서 한일 안보협력, 경제협력, 개발협력의 필요성과 방향성, 실현 가능성을 엄밀히 검토하는 작업이다. 이는 결국 한일관계의 미래비전을 설계하고 이에 따라 관계 개선의 실타래를 푸는 수순이라 하겠다.
Ⅱ. 한일 신시대의 좌절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 한국과 일본은 주로 양자 간 정치, 경제, 안보 사안을 중심으로 외교관계를 이루었다. 양국은 식민지 지배자-피지배자란 특수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선진국-개도국 관계로서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한 무역-투자 관계를 형성하였고, 미국의 반공연대 틀 속에서의 양자 안보 관계를 확대해갔다. 이러한 특수주의적 양자 관계는 냉전 종식 등 전략환경이 변화하고 경제적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여러 도전에 직면하였다.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중국이 고도성장을 거듭하여 한일 양국의 최대 무역 파트너로 등장하였고, 경제력에 비례하는 군사력 신장으로 안보 핵심국으로 부상하였다. 중국의 전략적 비중이 증대하면서 상대적으로 한일 양자간 경제적, 안보적 상호이득은 점차 줄어들었다. 또한 세계화의 지역적 재현으로서 지역 다자주의 추세가 강화되어 APEC,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아세안 + 3(APT),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등 지역 제도화가 진전되고 지역을 단위로 한 자유무역협정과 통화스와프 등이 결성되었다. 이에 따라 다자틀 속에서 한일의 만남이 증가하였다.
한국과 일본은 양자 관계 틀을 넘어 지역과 지구 차원의 다자 공간에서 협력을 모색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2011년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공동연구 결과인 《한일 신시대를 위한 제언》은 시간축으로는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읽고 공간축으로는 한일-동아시아-지구 공간을 품는 “공생의 복합네트워크 구축” 방안을 제시하였다. 한일 양자 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정치 및 국제경제의 다면적 영역에서 미국, 중국, 동남아, 비정부행위자 등 다양한 행위자 간 네트워크 구축으로 평화와 번영, 공생을 이루는 미래 기획이었다.
그러나 미래는 과거에 발목 잡혔다. 2011년 7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위안부 문제가 외교 현안으로 불거졌고, 이듬해 위안부 합의안 불발, 지소미아 추진 실패,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천황 사죄 요구 발언, 한일 통화스와프 폐기로 이어졌다. 양국 정치권을 중심으로 배타적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었고, 역사 문제가 안보와 경제갈등으로 확산되면서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였다. 그 와중에 신시대 보고서는 예상치 못하였던 구시대의 전면적 부활로 빛을 잃었다.
신시대 보고서가 충분히 예상하지 못했던 미래의 걸림돌은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세계화의 후퇴이다. 세계화의 진전을 전제로 한 보고서의 번영 구상은 2010년대 교역의 축소, 노동력 이동의 제한, 지구 공급망 축소 재편 등 탈세계화(deglobalization)의 도전에 직면했다. 냉전 종식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지구 전체에 번영을 가져다 주었지만 시장경쟁의 과잉으로 인해 국내적으로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양극화, 정치적 분열을 초래하며 포퓰리즘과 경제민족주의를 불러왔고 그 결과 자유주의 국제경제 질서는 크게 동요하고 있다. 통상국가로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일본과 한국은 이렇듯 심대한 도전에 마주하여 구상과 전략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에 따른 지정학적 도전이 지역질서와 한일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점이다. 신시대 보고서는 중국에 대한 다소 건설적 전망에 기초하여, 공생을 위한 복합네트워크 구축의 핵심 주역으로 한국, 일본, 중국을 설정하고, 한일 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급성장하는 중국을 보편적 규범과 관행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국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등지에서 주장적이고 강압적인 외교 행태를 드러냈고, 독자적인 지역제도 이니셔티브를 주창하였으며, 일대일로와 같은 제국적 기도(企圖)로 미국 주도 기성 질서에 도전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에 따라 미중 전략경쟁이 본격화되었고 경제와 첨단기술의 미중 분단이 현실화되고 있다.
Ⅲ. 한일 신시대 2.0을 향하여
2023년 한국과 일본은 한일 신시대 2.0을 마련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2050년을 겨냥한 장기적 견지에서 한일관계를 볼 경우,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 세계화의 역진에 따른 자유주의 세계경제질서의 혼란, 인류 공통의 초국경적 위협의 대두 등 지구적 변환이 가속화될 것이다. 따라서 양국은 특수한 양자 사안을 조심스럽게 관리해 나가는 동시에 공통 과제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 방향성, 가능성을 탐색하고 비전과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동아시아연구원은 강제동원 논란을 넘어 한일협력의 미래비전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한일 양국의 전문가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2021-22년 6회의 온라인 토론회를 거쳐 원고를 준비하였다. 공동연구의 첫 번째 과제는 미중 간 전략경쟁이 군사력을 동원한 충돌로 귀결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규칙에 기반한 경쟁을 하도록 한일 양국이 기여하는 것이다. 이시다 아츠시 도쿄대 교수는 주요국 간 대규모 무력분쟁 없이 ‘허용 가능한 행동의 한계점’에 대한 인식을 합치시키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전재성 서울대 교수는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 중국 및 북한의 군사적 위협 증대에 따른 한일 안보협력의 과제와 협력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모리 사토루 게이오대 교수는 전통적으로 북핵 대응 조정 메커니즘으로 발전해 온 한미일 안보협력이 기능 분야(기후변화, 보건안보, 첨단기술 등)로 확대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분야에서 전략적 협력 강화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박재적 연세대 교수는 인태 지역 정보 네트워크 구축 사례를 통해 한-미-호-일 4개국 협력을 분석하고 있다.
두 번째는 한중관계, 일중관계, 한일관계 등 세 양자관계를 상호인식의 차원, 그리고 미중관계 차원에서 분석하는 과제이다. 다카하라 아키오 도쿄대 교수는 중국의 강대국 외교가 한일협력의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고, 이동률 동덕여대 교수는 한중간 상호인식의 악화가 한일관계에 주는 함의를 분석하고 있으며, 아사노 토요미 와세다대 교수는 한일간 감정, 가치, 기억의 상이를 지적하고, 역사화해를 위해서 양국 국민간에 역사문제의 기원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깊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세 번째 과제는 한일경제협력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보호무역주의가 부활하고 미중 전략경쟁에 따른 경제-기술적 디커플링이 진전되는 가운데, 이정환 서울대 교수는 한일 양국간의 경제협력에서 양국경제에 도움을 주는 글로벌 협력으로 발전해야 하며, 특히 자유무역질서를 지키는 지구적 규범 구축을 강조한다. 고조 요시코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교수 역시 한일 양국이 미중 갈등에 깊이 휘말리는 것을 회피하고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공급망 재편을 도모하는 한편, 지역 다자협력의 틀을 확대,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한일 경제협력의 단기과제로서 아시아 디지털 인프라 구축을 위한 한일 ODA 공조, 저출산-고령화 공동대응, 북한 경제개발을 위한 한미일 협력체 설립을 제안하고 있다. 김태균 서울대 교수는 글로벌 남반부(Global South)의 인프라와 개발을 위한 한일협력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소다자협력체인 쿼드와 글로벌 플랫폼인 B3W를 통한 한일협력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강제동원 해법 제시는 한일 관계 개선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양국은 미중 전략경쟁, 세계화의 역진, 초국경적 위협의 증대 등 국제질서의 거대한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양국의 협력 필요성을 증대시키고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관계 개선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을 넘어 한일 신시대 2.0를 향한 미래 비전 설계를 마련하는 데 지력을 모아야 한다.■
■ 저자: 손 열_ EAI 원장.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시카고대학교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중앙대학교를 거쳐 현재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재단법인 동아시아연구원(East Asia Institute) 원장이다.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원장과 언더우드국제학부장, 지속가능발전연구원장, 국제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하였고, 도쿄대학 특임초빙교수, 노스캐롤라이나대학(채플힐),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방문학자를 거쳤다.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2019)과 현대일본학회장(2012)을 지냈다. Fullbright, MacArthur, Japan Foundation, 와세다대 고등연구원 시니어 펠로우를 지내고, 외교부, 국립외교원,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국제교류재단 자문위원, 동북아시대 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전공분야는 일본외교, 국제정치경제, 동아시아국제정치, 공공외교이다. 최근 저서로는 『2022 대통령의 성공조건』(2021, 공편), 『2022 신정부 외교정책제언』(2021, 공편), 『BTS의 글로벌 매력 이야기』(2021, 공편), 『위기 이후 한국의 선택』 (2021, 공편), Japan and Asia's Contested Order (2019, with T. J. Pempel), Understanding Public Diplomacy in East Asia (2016, with Jan Melissen), “South Korea under US-China Rivalry: the Dynamics of the Economic-Security Nexus in the Trade Policymaking,” The Pacific Review 23, 6 (2019), 『한국의 중견국외교』(2017, 공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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