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자 건국대 교수는 첨단기술 우위를 지키려는 미국과 디지털 인프라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는 중국의 충돌이 글로벌 혁신 체제의 개방성 저하 및 양국 간 긴장 고조로 이어졌다고 진단합니다. 미중 기술경쟁의 흐름은 2023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대중 규제에 따른 경제적 손실 등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는 견해가 미국 국내 및 우방국에서 표출되고 있어 갈등 관리의 가능성도 감지됩니다. 저자는 한국의 대미 기술협력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세심한 협력과 협상을 수반하는 기술외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국이 기술을 이용해 이루고자 하는 미래 비전을 동류국과 함께 모색하고 실현할 것을 제시합니다.
1. 2022 미중 기술경쟁 돌아보기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컴퓨터 등 첨단기술이 미중 갈등의 핵심에 자리 잡게 되면서 기술지정학적 고려가 세계정치를 형성하고 이끌어 가는 주요 토대가 되어 왔다. 중국이 미국의 기술 우위에 도전하고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며 진행 중인 양국 간 갈등은 기술 신냉전으로 불릴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어지고 있고, 이는 미중관계를 넘어 세계정치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구조적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경제의 심화, 코로나 확산, 미중 패권경쟁 전개라는 굵직한 이슈들이 중첩적으로 얽히며 세계정치경제 구조 변화가 빠르고 깊게 진행되는 와중에 기술이 국가안보와 번영의 토대로서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세계 주요국들 간의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국가간 기술경쟁과 협력은 더 이상 시장 메커니즘이 아닌 국가안보적 관점으로 접근되고 있으며 기술은 군사안보와 경제안보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설정되고 있다.
미중 기술 갈등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첨단기술 수출 규제로 본격화되었고 바이든 행정부 들어 더욱 정교한 방식으로 확장되어 왔다. 2022년을 되돌아보면 미국은 연초부터 연말까지 일관되게 반도체, 양자컴퓨팅, 항공, 인공지능 부문 등에 대한 정밀 타격의 형태로 중국 첨단기업과 연구소에 대한 제재를 확대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2월 미국 상무부는 33개 중국 기업, 연구소, 대학을 미검증 명단에 올려 이들과의 거래를 제한하였고, 8월에 7개 중국 기업과 연구소를 수출규제명단에 추가하였으며, 10월에 다시 첨단 반도체 및 컴퓨터 제조업체 부문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하고 미국산 기술을 사용한 첨단 반도체 칩 및 장비의 대중국 수출 금지 적용 범위를 확대하였다. 다른 한편 미국 의회는 미국내 첨단 반도체 및 친환경 제조 부문을 지원하고 기술혁신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담은 ‘반도체 과학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켜 자국이 가장 취약하다고 판단되는 첨단제조 부문 지원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아울러 미국은 EU와 2차 무역기술위원회(TTC) 회의를 개최하여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 대책과 러시아에 대한 수출통제 공조 확대 등에 합의하였고, 한국, 일본,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 반도체 협력 네트워크 칩4를 주도하고 있으며,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출범시키는 등 중국 기술 굴기를 견제하기 위한 기술협력 네트워크를 확장해 왔다. 미국은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과 같은 자국 IT 플랫폼 기업들의 활약에 힘입어 코로나 와중에 급속도로 확장된 온라인 디지털 공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하는 한편, 중국이 신기술을 권위주의 체제 강화에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기술경쟁을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인터넷 자유 대 인터넷 주권과 같은 규범 갈등의 프레임으로 제시하고 이를 미국이 구축하는 기술협력 네트워크의 구심점으로 활용하였다.
중국은 미국이 첨단기술 수출규제 범위를 확대할 때마다 공식 성명을 통해 이를 비난하였지만, 팃포탯 방식의 대응은 자제하였고 대신 기술 자립자강과 일대일로 전략에 조응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구축에 역점을 두어 왔다. 중국은 미국의 인터넷 자유에 대항하는 인터넷 주권 규범을 토대로 미국 및 유럽 국가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이를 토대로 별도의 디지털 경제 블록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중국 정부는 20차 당대회 문건을 통해 과학기술은 제1의 생산력이고, 인재는 제1의 자원이며, 혁신은 제1의 동력임을 강조하면서 과학과 교육을 통한 국가 부흥 전략, 과교흥국(科教兴国)을 내세웠다.
첨단기술에서 우위를 지키며 중국의 도전을 견제하고자 하는 미국의 확고한 의지와 정책, 중국의 기술 자립자강 노력 가속화와 국내외 디지털 인프라 확대를 위한 대대적인 투자가 서로 부딪치는 가운데 지난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개방적 글로벌 혁신 체제에서 자본, 인력, 기술의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이동에 제한이 걸리기 시작하였다. 미중의 전략기술 갈등이 미중관계는 물론 세계정치경제의 기본 틀로 작동한 2022년 한 해 동안 기술에 대한 안보적 관점은 더욱 확고해졌고, 안보와 관련된 기술의 규제 범위는 점차 확장되었으며, 전략기술 부문에서 부분적인 디커플링이 진행되었고 디지털경제를 주도하기 위한 미중 경쟁이 심화되었다. 미국의 공세로 인해 중국은 반도체를 비롯한 몇몇 첨단 부문에서 애초에 제시했던 야심찬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중국의 기술 굴기 의지는 오히려 강화되어 첨단기술을 둘러싼 양국 간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어 왔다.
2. 2023 미중 기술경쟁 전망
2023년에도 미중 기술경쟁은 지속될 것이지만 경쟁의 톤이 다소 완화될지 혹은 더 강화될지 예측해 보는 것이 전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현재 미중 기술경쟁 전개 양상을 결정하는 칼자루는 미국이 잡고 있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중국의 지적재산권 침해나 산업정책을 비판해 왔는데, 중국 부상이라는 세계정치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중국의 기술굴기에 대한 미국의 대응 방식과 수준이 달라진 배경에는 중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인식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중국제조 2025 공표와 대중 무역적자 누적이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와 만나면서 중국의 기술굴기가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미국은 이를 자국에 대한 경제적 침략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이 내놓은 일련의 대중 견제 조치들에 기반하여 미중 기술 갈등의 톤이 설정되어 왔다.
따라서 현재 미국이 실행하고 있는 다양한 정책들이 2023년에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살펴보는 것이 2023년을 전망하는 데 중요하다. 먼저 미국이 2022년과 같이 새해에도 대중 견제 조치들을 확대할 것인지, 이것이 어느 지점까지 가능할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 좌절과 지연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의 중국 첨단기술 위협 인식은 완화되지 않았다. 첨단기술 부문에서 중국 위협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흐르며 오히려 더 강화되고 중국이 도전해 오는 기술의 범위도 늘어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미국의 대중 첨단기술 수출, 투자, 인력 규제 확대의 지속적인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신임 하원의장에 대중 강경론자인 케빈 매카시가 선출되고 차기 대선을 위한 양당 간 경쟁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대중 견제 강경론이 득세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국의 장기적 국익의 관점에서 보다 신중하게 대중 규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여기저기에서 제기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대중 수출규제는 중국시장 의존도가 높은 미국 기업들과 미국 경제에 부메랑 효과를 가져와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해 왔다. 현재 미국내 대중 강경론자들의 목소리가 큰 상태에서 대중 규제로 인한 미국 기업의 피해와 미국 기술혁신 역량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공식적인 담론 의제로 제기되지 못하고 있지만 지난 수 년 동안 중국과의 수출, 투자, 인력 교류 제한으로 인한 문제들이 누적되고 있어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분출될지 지켜보아야 한다. 이들은 미국의 대중 규제가 일반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예외적이고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현 정부의 규제 확장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세계 및 미국 경제 침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국내 경기 부양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면서 강력한 대중 견제가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요컨대 전반적인 대중 견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이것이 미국 기업이나 경제 및 혁신 활동에 미치는 장단기 부정적 영향을 인식하면서 규제를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가며 조심스럽게 규제와 혁신의 균형점을 모색하는 노력이 진행될 것이다.
미국이 반도체 과학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첨단 제조 지원 실행 방안을 구체화하면서 미국 기업과 외국 기업들의 미국 내 첨단 제조 투자가 대규모로 증대되어 왔다. 삼성과 SK 등 한국 기업은 물론 대만 TSMC, 미국 인텔, 마이크론 등이 모두 미국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며 첨단 제조 부문의 미국 내 투자를 결정하고 제조 시설을 확장하고 있다. 2023년에는 지원금을 어떤 방식으로 배분하고 활용할지 논의가 구체화될 것이다. 지원금 집행 결정에 미국 의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상황에서 미국 의회와 정부가 지원 과정에서 산업부문 간, 외국 기업과 미국 기업 간 균형을 어떻게 잡아 갈지, 지원금이 시장과 기술혁신 전반을 활성화시키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할지가 주요 관전 포인트이다.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아웃소싱했던 첨단 제조 부문에서 미국이 다시 경쟁력을 되찾게 될 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렵게 만드는 많은 장벽들이 존재한다. 첨단 제조 부문의 지원 양상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미국이 첨단 제조에서 자국 및 외국 기업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해 나갈지, 첨단 제조 지원의 실질적인 성과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인지를 희미하게나마 가늠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이 첨단 제조 부문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미중 기술경쟁에서 우위를 지킬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기 때문에 정부 지원의 전개 및 효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이 중국 기술 견제를 위해 유럽 및 아시아 국가들과 긴밀한 협력을 지속할 수 있을지 여부도 미중 기술경쟁 전망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와 자국의 압도적인 기술력을 토대로 중국을 견제하는 기술협력 네트워크 구축에 공을 들여 왔고 양자 간 기술협력은 물론 EU와의 기술무역위원회(TTC), 칩4,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오커스(AUKUS), 쿼드(QUAD) 등 다양한 다자 간 기술협력 플랫폼을 발전시켜 왔다. 중국이 세계 경제성장 동력과 시장을 제공하는 상황에서 미국에 편향된 기술협력 강화를 선택하는 것은 많은 국가와 기업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와 기업들이 부담을 일정 부분 감수하고 있지만 미세한 균열의 틈새도 감지되고 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의 협조는 미국의 중국 반도체 굴기 지연을 위해 가장 중요했던 부분이었는데, 최근 ASML은 공공연하게 미국의 중국시장 수출 규제에 대한 항의성 비난과 중국 수출 증대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지난 연말 독일 숄츠 총리는 폭스바겐, BMW, BASF, 바이엘, 도이체방크 등 자국 기업을 이끌고 베이징을 방문하여 이목을 끌었다. 중국 방문 한 번으로 미국과의 동맹 관계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방문에서 숄츠 총리는 중국과 기술협력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현명한 다양성으로 한 국가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도를 줄여나갈 것’이라고 말하였고 이는 많은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드러낸 것이었다. 2023년에도 미국이 주도하는 협력 네트워크가 유지되는 가운데 중국 견제 동조를 위해 우방국들을 끌어 당기는 미국의 구심력과 이로 인한 리스크, 특히 중국과의 관계를 국익을 중심으로 관리하려는 우방국들의 원심력 사이의 긴장이 국가와 기업 수준에서 더 다양한 형태로 표출될 것이다.
아울러 미국은 대중 첨단 기술 견제를 다자협력의 틀로 진행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예컨대 미국은 42개국이 가입한 다자 전략물자 기술통제 바세나르 체제 안에서 만장일치제로 결정이 이루어져, 중국에 우호적인 러시아의 반대로 대중 기술 통제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우방국들을 묶어 새로운 기술통제 체제를 만들고자 하는 미국의 노력이 구체화될 것이고 이는 미중 기술경쟁으로 인한 블록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원천 기술을 보유한 미국의 공세에 수세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중국은 미국을 공개적으로는 비난하지만 미국을 자극하는 조치를 자제하면서 기술 자립 노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다. 중국은 특히 미국이 중국의 목을 조르는 핵심 기술인 ‘차보즈(卡脖子) 기술’, 기술 공백을 뜻하는 ‘돤반(短板) 기술’ 등 자립을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기술 리스트를 만들고 이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면서 기술 및 산업 생태계 자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차 당대회 이후 시진핑의 3연임과 코로나 봉쇄 해제가 중국 디지털 경제 성장과 과학기술 혁신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지 주목된다. 지난 수 년 동안 중국 디지털 경제 성장을 견인해 온 대표 IT 기업에 대한 중국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어 왔다. 중국 정부가 경제 침체 대응으로 시장 활성화를 위해 민간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시진핑 및 공산당 권력 강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것이 시장 활성화 및 기술혁신 친화적인 사회문화 확산과 공존할 수 있는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풀어가야 한다. 일대일로 전략에 조응하는 중국 주도의 해외 디지털 인프라 확장 시도와 독자적인 디지털경제 블록 형성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는 가운데 중국이 이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상대국과의 마찰을 관리하면서 더욱 거세지는 미국의 견제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도 지켜보아야 한다.
2023년에도 미중 기술경쟁을 추동하는 구조적 흐름이 지속되는 가운데 첨단 기술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과 긴장은 더욱 심화될 것이며 첨단 전략기술 부문의 부분적인 디커플링이 계속될 것이다. 디지털경제의 블록화와 기술 규범 경쟁 역시 완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미중 양국의 국내정치 상황 역시 강대강 대치 쪽으로 기울고 있다. 다른 한편 기술경쟁 와중에 양국의 경제 및 혁신 체제의 상호의존 정도가 여전히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혁신 체제의 상호의존 토대 위에서 진행되는 기술 갈등은 양국 모두에게 혁신 비용과 불안정성을 증가시키고 있다. 미중 기술경쟁의 심화와 함께 양국 모두 디커플링과 갈등의 대내외적 비용을 관리하고 고려해야 할 필요성이 점차 증대하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3. 한국의 기술외교 전략
미중 첨단기술 경쟁은 당분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예정이며 세계 각국은 지정학적 고려와 선택 속에서 안보, 경제, 기술 규범이 촘촘하게 연결된 전략을 짜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미중 기술 갈등의 심화는 미중 양국과의 동시적 협력을 위한 공간을 축소시키면서 안미경중 입장을 취해 온 한국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다른 한편 이는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지에 대해 보다 깊게 성찰하고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과 기술 협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예상되는 중국 위험과 불확실성 증대를 관리하고 대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기술 부문에서 미국과의 협력이나 중국의 불확실성에 대한 대응의 중심에 우리의 기술혁신 역량 강화라는 뚜렷한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진행 중인 한국 기업의 미국 내 첨단 제조 투자와 미국과의 기술협력이 한국의 기술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한국은 미국의 여러 기술협력 대상국 가운데 하나이지만, 한국에게 미국은 가장 중요한 기술협력 대상국이다. 한국의 미국 패싱 비용은 미국의 한국 패싱 비용을 훨씬 능가하는 비대칭관계이다. 한국 기업의 미국 내 투자 이후 진행 과정과 다양한 한미 기술협력을 우리가 주도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우리의 기술혁신 역량 강화의 기회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세심하게 협력하고 협상하는 기술외교가 절실하다. 2023년 미국 정부의 첨단 제조 지원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한국이 기술적으로 무엇을 주고받을 것인지, 한국이 지속적으로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은 어떻게 이루어가야 하는지, 협력자이자 동시에 경쟁자인 미국과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어떻게 설정해 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법을 대미 기술외교를 통해 찾아 나가야 한다.
미중 경쟁 속에서 중국과의 기술협력이 위축되고 중국발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다. 중국과 비전략 부문에서 기술협력을 지속하며 소통의 채널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한편 전략기술 부문에서 탈중국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중국의 기술 도전에 대해 우리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도록 대중 기술외교도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EU나 인도, 아세안 국가들과의 기술협력에도 보다 무게를 두면서 기술협력 대상을 확장하는 기술외교도 요청된다. 한국판 기술 동맹은 미중 양자 사이의 선택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 중층적으로 다양한 협력 채널을 넓게 확보하여 미중 기술경쟁 심화로 인한 위험을 분산시키면서 동시에 한국의 기술혁신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미중 기술경쟁 시기 한국 기술외교는 세계에 설득력 있는 기술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확장해 나가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기술을 지속적으로 세계시장에 내 놓을 수 있을지와 함께 신기술에 토대하여 어떤 미래사회를 선택하고 만들어 가고자 하는지 기술비전에 대한 논의도 활성화되어야 한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내세우는 인터넷 자유는 진정한 자유 구현을 위한 가치라기보다는 강자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레토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중국이 내세우는 인터넷 주권과 기술의 국가 통제 역시 보편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미국과 중국이 내세우고 있는 기술비전보다 더 설득력 있고 매력적이며 실행해 볼 만한 기술비전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중견국 한국은 다양한 구성원들의 역동적인 경쟁과 협력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 번영 지속가능성 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 기술비전을 동류국들과 함께 모색하여 제시하고 실현하고 확장하는 기술외교를 주도해야 한다
한국의 기술 동맹과 기술비전 모색 및 실현을 위해 개방적이고 협조적인 혁신 생태계의 유지가 중요하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기술혁신과 성장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글로벌 혁신 체제 안에서 가능했다. 미래 한국의 기술혁신 발전과 경제 성장도 개방적인 글로벌 혁신 체제 안에서 진행되는 자본 기술 인력의 자유로운 흐름에 토대한 역동적인 경쟁과 협력을 통해서 지속될 수 있다. 국가 간 치열한 첨단기술 경쟁 가운데에서도 경쟁이 개방적이고 공정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특히 AI, 사이버, 양자컴퓨터 등 신기술 분야의 규범과 규칙 형성에 적극 참여하면서 규칙기반 질서가 공고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경쟁과 배제 및 배타적 선택의 논리가 압도적인 기술지정학 시대에 한국은 포용적이고 협력적인 기술 생태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확장해 나가야 한다. 한국 기술외교는 구성원 모두가 함께 번영할 수 있는 포용적이고 협력적인 글로벌 기술혁신 생태계 유지와 발전을 지지하면서 공동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 저자: 배영자_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국제정치경제, 해외투자의 정치경제, 과학기술과 국제정치, 인터넷과 국제정치, 과학기술외교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과학기술의 세계정치 연구: 현황과 전망》(2021), 《국제정치패권과 기술혁신: 미국 반도체 기술 사례》(2020), 《중국 인터넷 기업의 부상과 인터넷 주권》(2018), 《미중 패권 경쟁과 과학기술혁신》(2016), 《과학기술과 공공외교》(2013)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박한수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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