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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논평 제4호] 글로벌 시대의 한일관계

  • 2020-06-04
  • 이숙종 · 이원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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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일본 총리는 지난 달 23일 유엔 기후변화 정상회의 참석 시 첫 정상회담을 가진데 이어 10월 9일 서울에서 한일정상회담을 진행하였다. 바로 다음날인 10일에는 북경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하토야마 내각이 출범한 지 불과 3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한일 정상이 세 번이나 회담을 가졌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지만, 논의가 글로벌 어젠다, 한중일 협력, 한일 양자관계라는 세 개의 수준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만큼 국제정치가 복잡해지고 복합화되면서 양자관계도 지역 및 범세계적 다자관계와 연결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층적 국제정치에 정상들이 직접 나섬으로써 정상회담 개최 수가 증가하는 것이 오늘날 국제정치의 추세이다.

 

그렇다면 한일 양 정상이 대면할 기회는 1년에 몇 번일까? 우선 매년 2회에 걸친 한일 셔틀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고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도 작년부터 정례화 되었다. 90년대부터 열리고 있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아세안+한중일 정상회의(ASEAN Plus Three: APT), 동아시아 정상회의(East Asian Summit: EAS)에서는 매년 1회씩, 그리고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ia Europe Meeting: ASEM)에서는 2년에 한번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유엔총회는 물론 올 12월에 있을 코펜하겐 기후정상회의 등의 국제기구관련 회의가 있고, 여기에 올해부터 G20 정상회의까지 정례화되었으니, 한일 정상이 직접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일은 아무리 적어도 연 7회 이상이다. 국제정치의 지구화(globalization)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위상 격상도 한몫한 결과이다.

 

10월 9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는 한일 양국의 우호 증진과 아시아 중시를 유난히 강조해 온 하토야마 외교노선의 의지 표명이 담겨 있다. 하토야마 총리가 양자 간 정상회담을 위한 첫 방문지로 서울을 선택한 사실은 한일관계가 일본외교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토야마 총리는 민주당 대표로 취임한 직후에도 최초 해외 방문지로 서울을 찾아 이명박 대통령을 면담하고 한일 양국의 친선과 우의를 다짐한 바 있다. 그동안 일본외교에서 차지하는 대한외교의 비중은 한국외교에서 대일외교의 비중만큼은 크지 않았다. 최근 일본정부가 대한외교의 비중을 늘리고 있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첫째, 너무 커져버린 중국을 혼자 상대하기 보다는 한국과의 협력으로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일본의 동북아 균형전략이다. 둘째, 일본정부가 환경, 개발, 인간안보 등 지구촌 차원의 문제에 기여하는 글로벌 외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고 경제발전 수준도 비슷한 한국이 매력적인 협력자로 보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요인은 한국에게도 적용된다. 한국과 일본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긴 호흡과 멀리 보는 시선으로 우호선린관계를 펼칠 호기를 만난 셈이다.

 

이에 따라서, 한일 정상외교의 어젠다는 영토 및 역사문제, 안보•경제관계의 조정 등 양자 간 현안에 머물지 않고 북핵 문제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안보, 동아시아 경제협력체 구축 등 동아시아 지역 수준의 쟁점들, 그리고 더 나아가 글로벌 차원에서의 한일공조 모색으로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걸맞게 한일 양자관계, 동아시아 지역의 주요 현안,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를 핵심적인 의제로 다루었으며, 양국 정상은 세 차원의 현안들에 대해 대체로 의견 합치를 이루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구체적 개별의제가 별로 없었던 이번 정상회담에서 주목받은 것은 하토야마 총리의 과거사 관련 발언들과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방한문제였다. 하토야마 총리는 과거사 직시를 바탕으로 하여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해 나가겠다는 대한외교의 기본자세를 밝히고 이해를 구했다. 과거 식민지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의 뜻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 무라야마(村山) 담화를 “가슴에 안고 행동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말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재일교포 지방참정권 문제,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거론되고 있는 아키히토 천황의 방한 추진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총론적으로는 과거사 직시와 반성론의 입장을 명확하게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각론에서는 일본국민의 감정과 복잡한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현되기까지는 간단치 않은 장애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특히 천황의 방한 문제는 이른바 천황의 ‘정치 이용’을 금기시하는 일본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일본 국내에서는 매우 첨예하고도 민감한 이슈이다. 1992년 아키히토 천황의 중국 방문이 천안문 사태 이후 외교적 고립상태에 놓여있던 중국의 출구 전략에 이용되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은 천황의 방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한국측에서도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한 공식적 사죄반성의 표명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한국 강제병합의 합법성 여부에 관해서는 여전히 애매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제병합 100년의 해에 천황을 초청하는 것이 적절한 일인지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양측의 현실을 감안할 때 천황의 방한을 과거사 문제의 종결 및 한일 민족 간 대화해의 결정적 계기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나름대로 의미는 있으나, 양국 사회의 이해와 지지가 전제되지 않을 경우에는 역풍이 우려된다.

 

동북아시아의 핵심 현안인 북핵 문제에 관해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제안한 이른바 ‘그랜드 바겐(일괄타결)’에 대한 교감을 만들어 냈다. 동 구상에 대해 하토야마 총리는 ‘정확하고도 올바른 방안’이라고 평가하면서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다. 북핵 문제는 지정학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최대 피해 당사자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긴밀한 정책협조가 필요한 분야이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과 미국에게만 대화의 창을 열어 놓고 한일 양국과의 직접대화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정부로서는 긴밀한 대일 공조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대북정책 주도권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 정부는 일괄타결 안에 일본이 중시하는 납치문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힘으로써 지난 정부보다 일본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미국과 한중일 4국, 나아가 러시아까지 포함하는 5개국이 한국이 주창한 일괄타결안을 본격적으로 조율하기 시작한다면 그 과정에서 납치문제와 같은 안건이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토야마 총리가 주장하고 있는 ‘동아시아공동체’의 경우, 그 방향과 비전은 바람직하나 구체적 내용과 실현 방법에 있어서는 막연하고 애매한 부분이 적지 않다. 자민당 정부 하에서 추구되었던 일본의 동아시아공동체 전략은 초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에 대항하고 이를 견제하려는 일본 나름의 고육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의 문제를 내세우는 한편, 호주, 뉴질랜드, 인도를 포함하는 광역 동아시아지역주의의 주창을 통해 중국 견제를 시도하였던 기존의 입장이 하토야마 정부 하에서도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이와는 다른 새로운 발상과 전략이 나올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 성공하려면 통상, 투자, 개발원조, 환경 등 기능적 영역에서 역내 연결망을 일찌감치부터 구축해 왔던 일본이 왜 동아시아 지역에서 리더십을 공고하게 구축할 수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한국의 ‘실용외교’ 및 중국의 ‘조화외교’에 화답하면서, 한중일 3국이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지역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도록 ‘우애외교’의 비전과 철학,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이제 한일정상이 다루어 나갈 글로벌 차원의 이슈도 다양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 및 금융 분야의 협력에서부터 기후변화, 개발 및 환경, 인권 등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한일은 상당부분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양국 간 공조와 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특히 내년에 한국에서 개최될 G20 정상회의와 일본에서 열릴 APEC 정상회담이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양국의 협력 방안을 깊이 논의하였다. 한국과 일본은 근접한 경제발전 단계만이 아니라 유사한 정치•경제 제도를 지탱하는 규범과 문화를 공유하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두 개의 선진국이다. 양국이 국제적 위상에 맞는 지구촌의 당면과제에 책임감을 갖고 기여하려는 글로벌 외교를 펼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일 양국은 상호협력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국제적 공헌을 할 수 있도록 협력 가능한 글로벌 어젠다에 따라 분업과 협업체계를 고안해 내야 할 것이다.

 

2010년은 한일관계에서 보면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임과 동시에 역사적인 G20 정상회담이 한국에서 개최되는 해이기도 하다. 동시에 한중일 정상회담 역시 한국에서 열리게 된다. 한일 양국은 뜻 깊은 2010년의 도래를 계기로 그 동안 양국관계를 대립과 반목으로 몰아갔던 역사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글로벌 질서의 개편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숙종 (EAI 원장, 성균관대학교)

이원덕 (국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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