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제왕적 대통령 이렇게 바꾸자] 7. 비리낳는 규제 과감히 개혁해야

  • 2002-10-15
  • 최병선 (중앙일보)

EAI "성공한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

 

차기 정부의 국정시스템 개혁의 요체는 분권화와 통합이다. 무한경쟁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에 분권은 대량 실패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통합 없는 분권은 일관성을 해친다.

 

우리는 지난 십수년간 금융.기업.노동.교육.의료.규제.공공부문 개혁 등 경제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수많은 개혁을 추진해 왔다. 이처럼 숨가쁘게 개혁의 길을 달려왔건만 우리가 추구하는 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확실하게 뿌리 내렸다고 믿는 국민은 별로 없다.

 

우리 주변에는 국민이 혀를 차는 각종의 경제사회 문제들이 넘쳐 나고 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민간은 정부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나무라면서도 정부에 더 크게 의존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정부는 그런 민간을 불신하면서 풀었던 고삐를 다시 죄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가 변했다고 믿을 국민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차기 대통령은 이 점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국가발전 전략상 새로운 개혁 아이템을 찾는 일도 중요하겠으나 그동안의 개혁의 일관성과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일만큼 절실한 일도 없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대통령이 규제개혁을 차기 정부 국정개혁의 중심에 놓기를 제안한다.

 

규제개혁은 단순히 기업의 부담을 줄여 경제를 활성화하는 수단이 아니다. 규제개혁의 핵심 관심사항은 정부와 민간의 적정한 역할분담이다. 규제개혁이야말로 민주화와 시장경제체제 확립이라는 우리 사회의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풀어나갈 수 있는 강력한 제도개혁, 시스템 개혁의 수단이다.

 

또한 규제개혁은 우리가 숙원하는 부패척결의 필수요건이고 지름길이다.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규제야말로 부정부패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규제는 어떤 형태로든 민간에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보이지 않는 조세(hidden tax)라는 점에서 재정개혁과 병행해야 한다. "작은 정부"를 앞세운 정부조직과 기능의 개편도 규제개혁이 선행되지 않는 한 큰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차기 대통령이 진정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규제개혁을 국정개혁 시스템의 최상위에 위치시켜야 한다.

미국의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나 레이건 전 대통령, 영국의 대처 전 총리가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되고 있는 것은 그 시대의 문제 해결의 열쇠를 정부의 역할과 책임의 획기적 전환에서 찾고 이를 통해 확실하게 새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장기간 정부 주도의 기획.명령.통제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 정부와 국민에게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부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관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 분야마다 특수성을 고집하고 인정하는 한 원칙이 원칙으로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현행 규제개혁위원회는 우리나라에서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개혁원리를 일관되게 고수해 온 거의 유일한 개혁기구다. 금융감독위원회도, 공정거래위원회도 이 면에서는 규제개혁위원회를 따르기 어렵다. 이 위원회가 국정개혁의 일관성을 담보하는 보루가 돼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만 현재와 같은 민관합동위원회의 조직 형태는 재고돼야 한다. 규제개혁의 성패는 궁극적으로 규제관료의 의식과 행태의 변화 여부에 달려 있다.

 

이제 관료 스스로가 규제개혁의 추진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민관합동 비상설 위원회의 한계와 문제점이 뚜렷이 드러난 이상 현행 규제개혁위원회는 공정거래위원회와 유사한 형태의 정규 행정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개편된 규제개혁위원회의 사무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회원국의 예를 좇아 규제의 질을 획기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 규제영향평가(RIA)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기관, 규제개혁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기관으로 키워 나가야 한다.

 

잘못된 규제 하나를 제대로 고치면 수백억~수천억원의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음에도 예산과 인력지원에 인색하다면 이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같은 이치로 앞으로의 규제개혁은 모든 중앙행정기관.지방자치단체가 스스로 발벗고 나서게 해야 한다. 장.차관이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 이전에 부처 소관 산업.업계.민원인의 고충을 헤아리고 편의를 도모하며 봉사하는 일을 최우선 책무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민주행정의 첫걸음이건만 우리의 장.차관들은 이 일에 소홀했다.

 

"살 만한 사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은 모든 국민, 모든 기업이 원하는 바지만 이 일에 발벗고 나설 사람은 별로 없다. 규제개혁은 생색을 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설이지만 바로 여기에 규제개혁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돼야 하고 대통령 프로젝트가 돼야 할 필연적 이유가 있다. 의회는 기득권 세력과 집단의 이해에 반하는 일을 할 유인이 거의 없다.

 

고위관료는 관료집단의 반발을 무릅쓸 용기가 별로 없다. 오로지 대통령만이 이들의 저항과 반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고, 바로 여기에 국민이 힘있는 대통령을 원하는 진정한 이유가 있다.

 

이 어려운 일을 대통령 혼자 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규제개혁에 의지가 있다면 우리가 제안하는 정책기획실에 규제개혁 담당 수석비서관을 두고, 대통령 자문기구로서 민관 합동의 "규제개혁 추진회의"를 운영해 규제개혁에 탄력을 불어 넣는다면 좋을 것이다. 여기에 국책연구기관을 연결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최병선 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