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더 이상 미·중 경쟁의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둬선 안 됩니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EAI) 원장(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은 지난달 30일 중앙일보와 공동 기획 여론조사를 계기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일반 국민은 미·중 경쟁을 비롯한 다양한 이슈에서 특정 정당 지지자나 전문가 집단보다도 훨씬 균형 잡힌 사고를 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손 원장은 여론조사 결과와 관련해 "외교 이슈와 관련한 정파별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치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북핵 대응을 위해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지난 1년 새 크게 떨어졌다. 혼란스러운 미국 대선 국면이 영향을 준 걸까.
미국 대선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마음에는 '불안'(anxiety)이 자리한다. 아직 '두려움'(fear)의 수준은 아니다. 이런 불안 심리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다만 미국의 대외 기조 변화는 꼭 트럼프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패권이 쇠퇴하면서 더이상 혼자서 '지구 공공재'를 제공할 수 없다는 미국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현 집권 민주당 또한 동맹이 충분히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바뀌어가는 미국을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이 확장억제에 대한 불안감은 물론 비현실적인 핵무장론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은 안보와 경제 모두 '한·미 동맹이 중심이 돼야 한다'면서도 미·중 경쟁으로 인한 피해를 우리가 떠안아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응답자의 77.8%는 "한·미 동맹이 북핵 대응을 넘어 지역과 세계 문제 해결에 역할 하는 동맹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다만 '미국이 반도체과학법 등으로 한·일의 대중 무역이나 투자 관계를 제한하는 데 대해선 55.4%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총론적으로는 미국과 함께 서는 데 찬성하지만, 중국이 걸려있는 문제에 있어선 상당히 유보적인 모습이다. 미·중 경쟁에 연루되는 데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불안'이다. 특히 경제와 과학기술 측면에선 대중 투자가 위축될까 두려워하는 심리가 강했다.
미·중 갈등에 어떻게 접근하자는 뜻인가.
우리 사회에는 미국, 일본이 하듯 중국을 '안보 경쟁국'으로 간주해 중국으로부터 '디커플링'(분리)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반중 정서에 휘둘리는 탈중국론자들이 있다. 그러나 여론은 이와 달랐다. 한·중이 안보적으로 충돌한다고 보는 비율은 굉장히 낮았다. 또한 한·미·일 협력이 대중 견제 차원에서 작동하는 데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자 했다.
여론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은 아닐까.
미·중 전략 경쟁이 한국 외교에 대해 발휘하는 '규정력'(영향력)을 과소평가해도, 과대평가해도 안 된다. 모든 외교·안보 이슈를 미·중 경쟁의 프레임에 맞춰 생각해선 안 된다. 한국의 국력과 국격이 최근 상당히 올라간 상황에서 우리가 지레 조심하고 눈치 볼 필요는 없다.
한·일 이슈와 관련해 정파별로 양극화가 두드러졌다.
민주화 이후 역대 모든 정부는 정파와 관계없이 초기에는 일본과 '잘 해보겠다'고 하다가 후반부에 돌아서는 공통된 패턴을 보였다. 한·일 관계 자체가 애초에 정파별로 갈라지는 이슈가 아니었단 뜻이다. 그러다 박근혜 정부 당시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를 기점으로 지난 10년 동안 한·일 문제가 국내적인 정쟁의 소재로 전락했다. 이를 갈라치기의 소재로 활용한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아베 정권과 같은 일본 정치권도 마찬가지이다.
일반 국민은 과거사 문제 해결이 선행돼야 일본과 협력도 가능하다고 본 반면, 전문가들은 과거사 문제 해결 자체가 어렵다고 봤다.
'기능적 협력'과 '역사 인식'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동력을 받으며 굴러가야 하는 이슈다. 협력을 하면 과거사 문제 해결은 따라올 것이라는 건 안일한 생각이다.
일본의 차기 총리로 확정된 '이시바 체제'에서 한·일 관계는 어떻게 전망하나.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신임 총리가 한·일 관계에 있어 상대적으로 전향적이고 한·미·일 협력을 중시하는 건 긍정적이다. 다만 그가 자민당 내 소수파 총재로서 어느 정도 리더십을 발휘할지는 여전히 의문부호다. (이달 말)중의원 선거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후·환경 문제를 북핵 문제만큼이나 큰 위협 요인으로 보는 인식이 늘었다.
현재 어느 정치인도 기후·환경 문제를 제대로 대변하지 않고 있다. 정치권은 과거를 갖고 싸울 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국가 대 전략(grand strategy)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