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위협 요인에 꼽힌 양극화
이념·정책 대결 선진국과 달리
韓은 반대편 성공 저지가 우선
정파적 양극화, 국익마저 훼손
10명중 6명 '나는 중도'라는데
'승자독식' 선거 양당체제 강화
망국적 극단정치 끝내기 위해
비례·대표성 키울 '개혁' 절실
최근 미국 싱크탱크인 시카고 국제문제위원회는 국제문제 오피니언 리더 600여 명에게 미국의 최대 위협 요인을 물었다. 무려 73%가 정치 양극화를 최고로 꼽아 전통적 위협인 북한, 중국, 러시아를 크게 앞질렀다. 양극화가 의회정치를 마비시키고 정책 발전과 혁신을 저해해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크게 손상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한국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정치 세력 사이에 분노와 혐오, 대립, 반대를 위한 반대가 일상화된 양극화 국가다. 양 진영은 상대방을 비도덕적·비애국적 집단으로 적대시하고 나아가 정치권에서 퇴출을 꾀하는 권위주의적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가운데 정책에 대한 초당적 지지가 이뤄지지 않아 일관된 정책 수행이 어려워졌고, 외교안보정책이 국내 정치화돼 대외적 신뢰도의 하락을 가져오고, 반대편의 성공을 저지하는 것이 국익 추구보다 우선시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양극화의 폐해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은 이런 추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는 상대 정당 지도자 및 후보에 강한 비호감을 보인 반면, 지지 정당의 지도자와 후보에게는 높은 호감도를 보였다.
지지 정당에 대한 호감도와 상대 정당에 대한 비호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드러나는 전형적인 양극화 현상이다.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에서 나타나는 양극화가 보수·진보 이념과 정책을 둘러싼 대결 구도라면, 한국의 경우는 이념보다 진영과 지역의 지도자에 대한 감정적·정파적 양극 구도라 할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야당의 정권심판론은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 방향이나 성과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과 같은 개인적 성향에 대한 심판이고, 여당의 거대 야당 심판, 혹은 이·조 심판 역시 인물 심판이었다.
이념적 양극화가 아니라는 점은 유권자의 중도 성향이 폭넓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연구원이 한국리서치와 함께 전국의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528명을 대상(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2.5%포인트)으로 4·10 총선 후 지난 4월 12일부터 16일까지 실시한 패널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이념 성향을 묻는 질문에 61%가 중도라 대답했다. 진보와 보수는 각각 20%와 19%였다. 구체적으로 국민의힘 지지자는 보수 52%, 중도 45.4%, 진보 2.7%로 구성돼 있으며, 민주당의 경우는 중도 49.1%, 진보 46.9%, 보수 4.1% 순이었다. 양당은 이념 정당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보수와 진보, 중도가 혼재돼 있다.
중도층은 거대 양당에 대한 비호감에도 불구하고,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하에서 제3당에 표를 던지면 사표(死票)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양당 중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양극화 구도의 완충 역할을 할 제3당은 쪼그라들었다. 민주당과 공조를 천명한 조국혁신당을 제3당에서 제외한다면 제3지대는 총 300석 중 5석에 불과해 역대 최소 숫자를 기록했다. 소수 정당의 득표를 보정해준다는 취지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또다시 위성정당 출현으로 오히려 거대 양당제가 강화됐다.
유권자는 승자독식·패자전몰의 대결정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유권자의 58.7%는 현행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중 39.2%는 지지 정당과 무관하게 '거대 정당의 양극화된 대립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서'를 이유로 꼽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유권자 지형 특징은 자산 보유가 많을수록 보수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이번 패널조사에서 수도권 응답자들을 자산 규모에 따라 5단계(상위 9억원 이상, 중상위 5억~9억원, 중위 3억~5억원, 중하위 1억~3억원, 하위 1억원 미만, 설정 기준은 2023년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로 분류하고 자산 규모와 투표 성향의 관계를 조사했다(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김수인 분석). 그 결과 상위 자산 집단에서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지지가 다른 집단에 비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하위 집단에서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당 아파트 매매가가 높은 지역일수록 보수정당에 투표했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이런 경향은 국민의힘이 갈수록 '부자들만의 정당'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가 자산·경제 양극화에 영향을 받는 동시에 '가진 자들의 정당' 이미지가 공고화되면 보수진영과 국민의힘의 선거 승리나 집권은 더욱 어려운 지형에 내몰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대선 때 나타났던 20대 이하 유권자의 성별 지지성향 격차도 다시 한번 뚜렷하게 드러났다. 남성은 보수정당 지지 경향을 보였으나 국민의힘(국민의미래)과 개혁신당으로 분산됐지만, 여성은 민주당(더불어민주연합)으로 결집했다(구본상 충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분석).
20대 이하 유권자들은 현재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 특히 강하게 비호감을 느끼는 정당과 정치인이 존재하고, 이 점은 여성에게서 뚜렷하게 발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을 비롯한 남성 정치인에 대한 강한 비호감, 보수정당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20대 여성 전반에 확산됐고, 이는 다른 연령대와는 달리 민주당에 대한 강한 지지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전반적으로 지난 20대 대통령 선거와 22대 총선을 거치면서 유권자들의 양극화 성향은 갈수록 커지고 있고 이런 영향은 '제로섬' 방식의 극단의 한국 정치 지형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망국적 정치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국민은 선거제도 개혁과 함께 비례정당의 제도적 규제를 지지하고 나아가 권력구조 개혁에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제22대 국회는 정치적 양극화 해소, 비례성 강화, 국회의 국민에 대한 사회경제적 대표성 강화를 바라는 여론에 부응해 비례제도를 포함한 선거제도와 권력구조 개혁을 향한 중차대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