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한국은 명실상부 중견 선진국… ‘눈치외교’ 약소국 사고 버려야”

  • 2022-03-24
  • 권혜숙 기자 (국민일보)

손열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지금 단계에서 신냉전을 얘기하는 것은
이르다”며 “새 정부는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새로운 질서를 짜나갈 것인가 하는 큰 그림 속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현구 기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한 달을 맞았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세계 질서를 영원히 바꿔 놓을 것’이라고 했던 코로나 팬데믹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유럽에서 전면전이 벌어져 국제 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불확실해졌다. 출범을 앞둔 새 정부는 포스트 코로나와 포스트 우크라이나라는 새로운 국제정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안게 됐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과 인터뷰를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의 영향과 미·중 갈등, 최악의 한·일관계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전망과 새 정부의 외교 전략 방향에 대해 짚어봤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아시아 싱크탱크 순위 24위, 글로벌 싱크탱크 순위 67위에 오른 민간 싱크탱크로 2012년 2017년에 이어 세 번째로 ‘2022 신정부 외교정책 제언’을 펴냈다.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 박사인 손 원장은 한국국제정치학회장과 현대일본학회장을 지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의 국제 질서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이라고 보나.

 

“가능성은 세 가지다. 첫째, 미·중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세계 질서를 유지해나가는 G2 체제다. 둘째, 패권국가 없이 각자도생으로 움직이는 G제로라는 예측이다. 셋째, G2보다 조금 더 다극화된 GX다. 다극화된 세력들 간의 협조를 통해 국제 질서를 만들어가는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저는 당분간 미·중의 경쟁과 협력이 공존하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양국의 경제력이 역전되는 2030년 정도부터 두 국가 간의 패권 다툼이 한층 격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신냉전 시대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신냉전을 말하지만 지금은 이념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세계가 나뉘기 어렵다. 그러나 군사 논리가 지배하게 되면 경제 사회 문화 나머지 영역들도 재편되면서 분단이 된다. 냉전은 군사 경쟁까지 불붙는 걸 가리킨다. 중국은 인민해방군 창설 100주년이 되는 2027년까지 현대화된 선진 강군을 만들고 2035년 사회주의 선진국 달성, 그리고 건국 100주년인 2049년 미국을 추월하겠다고 공언했다. 아직 미국이 군사적 우위에 있지만 사회주의 국가로는 최초로 선진국에 진입하면 미·중 간에 본격적인 군사력 경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20년 남았다는 말씀인데.

 

“20년은 긴 시간이고 어떤 변수가 나올지 모른다. 2040년에는 인도가 중국 GDP(국내총생산)의 40%까지 성장할 것으로 본다. 2030년이면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GDP가 일본을 추월하게 된다. 아시아에서 인도와 아세안이라는 두 세력이 부상하면 미·중의 독주에 적잖은 변수가 될 수 있다. 문명적인 변수도 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근대 문명 혹은 현재의 국제 질서가 가진 결함들이 드러나고 있다. 기후위기처럼 세계가 협력하지 않으면 공멸의 길로 가는 커다란 이슈도 있다. 지금 단계에서 신냉전을 얘기하는 것은 이르다.”

 

-궁극적으로 GX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인가.

“예측보다 목표에 가깝다. 한국이 일본이나 유럽 주요국과 같은 동료 ‘미들파워’와 협력을 통해 미·중 갈등이 신냉전까지 치닫는 것을 막고 지구적인 문제에 대해 새로운 거버넌스를 만들어 나가는 역할을 하는 게 장기적인 외교 목표가 돼야 한다. 새로운 세계 질서가 미·중의 경쟁으로 전부 환원돼서는 곤란하고, 한국이 가만히 따라만 갈 수는 없지 않겠나.”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동병상련의 입장으로 보는 이들도 있고, 지금 상황을 구한말에 빗대는 경우도 있다..

 

“경각심을 잃지 말자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중견 선진국인데 약소국처럼 미래를 계산하면 곤란하다. 19세기 말에 그랬듯 계속 눈치 보는 균형 외교나 전략적 모호성 혹은 빨리 줄 서야 한다는 주장은 덩치는 커졌는데 머리는 작은 약소국적인 사고방식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새 정부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크라이나에서 터져 나오는 경제 안보 문제다. 전쟁으로 교란된 공급망과 원자재 수급을 관리하면서 미국이 러시아를 세계 경제로부터 차단하려는 시도가 한국과 세계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한국은 어떤 외교 전략을 세워야 하나.

 

“미·중 경쟁 속에서 한국의 포지셔닝을 말한다면 지금의 미국은 과거의 패권국이던 미국이 아니다. 쇠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중국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대안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의구심이 있다. 동중국해 남중국해 인도에서 주변국과 영토 분쟁을 일으키고, 신장 위구르와 홍콩에서 인권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으며, 문제를 제기하면 경제적으로 강압 외교를 편다. 이런 것들이 중국 스스로 국제적인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질서의 보편성이나 매력의 측면에서 미국 네트워크 쪽이 우위에 있다.”

 

-중국과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해야 하고 무엇보다 한국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라는 점을 가볍게 볼 수 없지 않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 때처럼 경제 보복의 위험성도 염두에 둬야 할 텐데.

 

“만일 시비가 붙는 경우 당당하게 대응해도 게임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점을 인식했으면 한다. 호주가 비근한 예다. 호주가 코로나19 기원 조사를 놓고 중국과 갈등을 빚은 뒤 중국의 규제로 소고기 석탄 철광석 같은 핵심 수출이 막혔다. 호주는 맞대응하면서 상계 관세를 매기고 국제사회에 중국을 비판하며 공세 외교를 펼쳤다. 미국이 호응해 중국에 경고 조치를 했고 유럽연합(EU)이 반(反)강압 수단 입법화에 나섰다. 호주의 중국 수출의존도는 한국보다 높은 31%다. 필요할 땐 당당하게 나가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선택이 전략적 경제적 이해득실을 냉정하게 계산한 결과여야 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미국 일본 영국 호주 인도 정상과 통화하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하지 않았다. 공약으로 반중 협력체인 쿼드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했고 사드 추가 배치를 공언했다. 중국과 거리를 두는 외교 행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쿼드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부속품으로 중국의 지역적 영향력을 제어하는 데 중요하게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새 정부가 쿼드 협력을 강화하겠다면 중국과도 새로운 협력의 동력을 찾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차기 정부가 당면할 과제는 미·중관계와 관련된 게 많다. 대통령은 미·중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식견을 갖춰야 한다. 달리 말하면 정상회담에서 A4를 보고 읽는 ‘A4 대통령’을 가급적 빨리 졸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보다 더 외교에 능숙한 ‘외교 대통령’이 필요한 시기다.

“임기 초반에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외교야말로 다른 전문가에게 맡길 수 없는 분야다. 1년에 20번 가까운 정상회담에 누굴 대신 내보낼 수 없지 않은가. 바이든 시진핑과 직접 대화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오직 한 사람이다. 대통령이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청와대 참모들에 의존하게 된다. 캠프부터 함께한 청와대 참모들은 영원한 캠페인을 하는 사람들이다. 대통령의 인기를 염두에 두고 국내 정치를 의식해 외교 이벤트를 만들고 메시지를 만들게 된다. 이번 정부의 대일 정책이 그렇게 흘렀다고 본다.”

 

-문재인정부의 외교정책 중 최저점을 받는 게 한·일관계 아닌가.

 

“몇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배타적 민족주의에 너무 휩쓸렸다는 게 하나고, 일본을 국내 정치의 시각에서 다뤘다는 점이 두 번째다. 방금 언급한 외교정책의 국내 정치화다. 현 정부는 또 북한 우선주의 때문에 모든 외교를 남북관계의 프리즘으로 봤다. 한·일관계에서도 일본은 북한 문제에 중요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방해꾼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전략적 위상을 낮게 잡으니 관계가 악화되는 것에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고 본다.”

 

-윤 당선인은 일본과 관계 개선 의지를 보이는데, 새 정부가 출범하면 달라질 여지가 있을까.

 

“가장 큰 압박은 미국이다. 지난 2월 백악관이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를 내면서 한·일관계 개선이 미국의 국익에 직결된다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줬으니 일본도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일본은 7월 초 선거를 앞두고 있고 우리도 6월 지방선거가 있다. 쿼드 정상회의가 5월 말이나 6월 도쿄에서 열리고 그 직후 바이든 대통령이 서울에 온다면 선거 전에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띄우고 싶어하는 양측 모두 관계 개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경제 외교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신냉전이 아니라 경제 안보라고 말씀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전쟁이나 재난이 발생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사드 도입으로 중국에 경제 보복을 당하고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로 일본에 의해 반도체 핵심 소재 공급난을 겪었듯이 외교 문제로 시비가 생길 수 있다. 호주의 경우처럼 미·중 간의 경쟁이 지속되면 우리가 상시적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일들이다.”

 

-효과적인 경제 외교를 위한 국제 협력 방안을 제시한다면.

 

“한국 정부는 그동안 경제외교에 큰 조직적 역량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새 정부는 적절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한·미·일 협력이 특히 유용할 수 있다. 중국의 경제 보복을 저지한다는 공통의 이익과 함께 미국과 일본이 우리에게 경제 강압 조치를 사용하려는 유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대외의존형 경제구조를 가진 중견국들과 손잡고 외교적 연대를 주도하는 방안도 있다. 한국이 더 적극적이고 선제적으로 외교 노력을 펼칠 공간이 열려있다는 뜻이다.”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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