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앞으로 다가온 2007년은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2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그러나 20년 전 온 국민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민주화"나 "민주주의"는 더이상 우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민주화는 급속히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민주화를 "추억"으로 만들자고 주장해온 우리 사회 일각의 끈질긴 요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해방의 추억" "전쟁의 추억" "보릿고개의 추억" "근대화의 추억" 등 수많은 "왕년의 추억들"과 나란히 박물관에 전시된 민주화는 모든 추억이 그러하듯이 이미 "완료"된 것이며 아무런 현재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민주화가 "추억"으로 밀려나고 민주주의가 냉소의 대상이 되어버린 더 큰 이유는 아무래도 민주화 이후 역대 민주정부들의 실망스러운 모습, 특히 현 참여정부의 절망스러운 실패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눈씻고 찾아보아도 별로 보이지 않는 "참여", 그리고 "능력"은 고사하고 "의지"조차 발견하기 힘들었던 현 정부의 "개혁"정책이 보여준 총체적 난맥상은 국민들에게 "민주주의 해서 과연 뭐가 좋다는 건가"라는 자조와 분노만을 가져왔다. "개혁"은 시장근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맹종으로, "복지"는 극심한 사회양극화로, 햇볕정책의 평화번영 정책으로의 "계승"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대미 자주외교는 "수용소" 발언으로, 동북아 균형자론은 이라크 파병으로, 동북아 공동체론은 한·미FTA의 졸속 추진으로, 작통권 환수는 북핵실험 이후 핵우산의 구걸로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민주화는 "추억"이, 그리고 민주주의는 공허한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민주화가 "추억"이 되고 민주주의가 공허한 단어가 되어가고 있는 틈을 비집고 권위주의가 소생하고 있다. 많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집권정부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구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향수"와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러시아와 동유럽의 경우 과거 공산주의 체제 하의 "그 시절 그 추억"을 그리워하는 경향은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중대한 위협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재갈 물린 언론에 의해 전혀 보도되지 않았던 조직적인 인권탄압, 체계적인 부패, 시민배제적인 정책결정은 "질서" "안정" "행복"인 반면, 민주화 이후 자유로운 언론에 의해 알려지는 민주주의의 일상은 "혼란" "무질서" "불행"으로 오해된다. 이 같은 "민주주의적 현재"와 "권위주의적 과거" 간의 부당한 비교가 수구반동 정치인에 의해 증폭되어 민주주의에 실망한 대중의 마음을 파고든다.
하지만 동유럽 구 공산주의 국가의 경우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향수"는 상대적으로 그 해악이 덜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대체로 나이 든 세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 권위주의 체제와 신 민주주의 체제 간 혁명에 가까운 단절적 민주화를 통해 참시(斬屍)당한 권위주의는 이미 그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했고 따라서 매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에 비해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간 단절성이 크지 않던, 다시 말해 비교적 완만하고 연속적인 민주화를 경험한 우리의 경우 권위주의는 별로 손상되지 않은 외양을 보존하고 있다.
6월 민주화항쟁 20주년이 되는 내년에 우리는 새 대통령을 선출한다. 민주화 20주년을 축하하는 민주주의의 개가(凱歌)가 울려퍼져도 시원치 않을 판에 대선을 앞두고 다양한 모습으로 권위주의가 소생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작금은 처연하다. 독재자가 "국부"로 추앙되고, 쿠데타가 "혁명"으로 격상되며, 권위주의 리더십이 찬양되고, 개발독재가 "국가능력"으로 칭송되며, 밀어붙이기식 정책결정이 미화되고, 권위주의 시대의 경력이 "실력"으로 둔갑되는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진정 "민주화 이후" 시대인지 자문케 한다.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권위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서 배회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민주화가 결코 "추억"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민주정부에 대한 실망을 이겨내는 방법은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실현이지 권위주의 되살리기가 아니다. 민주화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김선혁 EAI 분권화센터 소장 · 고려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