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정치 하한기(夏閑期)가 아닌데 …

  • 2006-07-31
  • 이홍구 (중앙일보)

급할수록 쉬어가라 했듯이 세상이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숨을 돌리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과 여유는 필요하다. 5.31 지방선거, 월드컵, 북한 미사일 발사로 이어진 흥분과 극심한 폭우 피해로 격앙된 민심을 가라앉힐 때가 됐다. 정치권도 여야 모두 새 대표와 새 지도부를 출범시켰으니 가까이는 9월 정기국회, 멀리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당내의 정리정돈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처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우리는 한시도 잊을 수는 없는 처지다. 나라 밖에서는 대한민국을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시킨 모범 국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지만 정작 우리 내부에서는 걱정스러운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국민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민주정치의 중심이 되는 의회의 대표성에 대한 불신이 널리 확산하고 있다. 국민이 자유로운 선거로 뽑은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 의원, 한걸음 더 나아가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보다 내가 전 국민의 뜻을 더 정확히 대변한다는 "범국민"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는 것은 제도화된 민주정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민주정치 과정에 있어 특정 목표를 추구하거나 이익을 대변하는 시민조직의 활동은 필요한 요소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지닌 당위성의 여부와 관계없이 초법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상황이 도를 넘어 벌어질 때 민주정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둘째, 종교적 믿음이나 이념적 소신을 내세워 기존의 법 질서가 지닌 정당성을 부인하고 법을 어겨 가며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초법적 풍조가 만연한다면 민주정치를 지탱하는 기본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국민의 기본권은 심각한 위협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민주헌법을 무시하고 임의로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가. 그러나 지금과 같이 국민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언론과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사회에서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독선이 묵인된다면, 그리고 정부의 기본 질서 유지 능력에 대한 국민의 믿음이 흔들린다면 민주체제는 혹독한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또한 오늘의 우리 사회에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순기능적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과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몇 해째 계속되고 있는 경제 침체와 그에 따른 국민 생활의 어려움은 과연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경제 선진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난 10여 년의 민주화 과정에서 국가, 특히 경제를 효율적으로 발전시키는 운영 능력에 비해 다양하고 무조건적인 국민의 요구를 대변하는 대표 능력의 신장이 앞서감으로써 생긴 위험한 불균형이 경제 선진화의 발목을 잡았다는 장훈 교수 등의 지적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다고 하겠다.

 

이렇듯 우리 내부에서 걱정이 쌓여 가는 가운데 발사된 북한 미사일은 남북 관계와 4강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역학 관계를 더욱 어렵고 어지럽게 만들어 버렸다. 북한체제의 한계와 위험성은 새삼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 말끝마다 지도자의 위상과 권력이 체제 안전은 물론 나아가 민족의 운명과 일치한다는 딱한 시대착오적 환상을 거리낌없이 토로하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눈부신 속도로 변화하는 미.소.중.일 4강의 역학 관계 속에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외교정책의 전략적 공간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국가 리더십의 판단이나 국민적 합의가 불투명한 데 있다.

 

이처럼 내우외환이 겹치는 상황에서 국가의 진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이 선거나 정당 운영에 오히려 유리하다는, 우리 정치권의 고질적 무책임성은 더 이상 용납돼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대표성과 효율성, 법과 질서의 유지와 국민 생활의 안전 등 국내과제는 물론 남북 관계, 한.미 및 국제 관계에 대한 분명한 기본 입장을 각 정당과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이번 여름이 정치인들에게는 휴가의 계절이기보다 정말 어려운 숙제의 시간이 됐으면 한다.

이홍구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