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얄타 시대의 종언

  • 2004-05-24
  • 이홍구 (중앙일보)

얄타시대의 종언(end to Yalta)이란 환호성이 5월의 유럽을 뒤흔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2월 초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 등 세 전승국 지도자들은 흑해 연안의 휴양지 얄타에서 전후(戰後) 처리방안을 협상, 타결했다. 그 얄타협정의 결과로 유럽과 독일은 동서로 분단됐으며, 한국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됐다. 그로부터 60주년이 가까워 오는 올해 5월 1일 한때 소련의 위성국으로 묶여있던 동구 10개국을 유럽연합(EU) 새 회원국으로 영입, 확장함으로써 동.서 유럽의 재결합이 성취돼 얄타시대의 막을 내린 것이다.

 

브레진스키, 조국 폴란드에 경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5년 만에 이뤄진 동.서 유럽의 통합을 가장 열광적으로 환영한 나라는 아마도 폴란드인 것 같다. 그것은 EU에 새로 가입한 10개국 중 폴란드가 제일 큰 나라라는 이유보다는 지난 세월 겪어온 순환의 역사가 유난히 처절했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코페르니쿠스.쇼팽.큐리부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 많은 뛰어난 인물을 배출한 나라다. 그러나 폴란드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했다는 지정학적 운명 때문에 침략과 수모를 수없이 겪어온 불행한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18세기 말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 말까지 100년 넘도록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에 나라가 세 조각으로 나뉘어 통치받은 슬픈 역사의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1918년 어렵사리 성취한 독립도 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면서 또다시 강대국 간 흥정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그렇듯 온갖 풍상을 겪어온 폴란드가 소련권으로부터의 해방에 이어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회원국이 됨으로써 정통성과 자존심을 되찾은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바르샤바의 축제 분위기 속에 열린 북미.유럽.아시아 3자협력위원회에서의 브레진스키 박사의 만찬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소년 시절 전운이 감도는 폴란드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한 그가 국제정치 학자로서, 그리고 대통령 안보특보로서 보여준 탁월한 식견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는 44년 독일 점령군에 대한 바르샤바 시민의 63일에 걸친 영웅적 항쟁을 상기하면서 유럽의 중심국으로 부상한다는 꿈에 부푼 폴란드 국민에게 과도한 낙관론보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경고했다. 폴란드의 EU 가입은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무수한 불안요인을 내포한 역사의 재출발을 뜻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경을 맞닿은 강국 러시아에 여전히 권위주의와 제국주의의 전통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세계화 시대의 국가안보는 주변 강국과의 관계뿐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위험요소에 적절히 대응할 때만 보장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브레진스키가 열거한 세계적 안보의 위험요소 가운데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으로는, 첫째 앞으로 국제정치의 가장 위험한 화약고는 수에즈로부터 신장(from Suez to Xinjiang) 이르는 세계적 발칸(Global Balkans)지역이 된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란.팔레스타인 문제 등의 해결을 병행 추진하는 데 국제사회가 실패한다면 세계는 큰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며, 둘째 중국의 고도 성장이 수반하는 사회적 다원화와 지지부진한 정치개혁 사이의 괴리는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국가안보는 끝없는 주의 요구

 

얄타협정이 가져온 분단의 아픔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우리는 폴란드의 행운에 부러움과 선망의 감정을 감출 수 없다, 멀지 않은 가까운 날에 우리에게도 행운의 여신이 찾아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폴란드와 한국처럼 강대국 사이에서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숙명적인 입장에선 평화와 개혁에 대한 꿈 못지않게 국가안보에 대한 부단한 주의가 필요함을 절감하게 된다. 나라는 이사를 갈 수도 없고 이민을 갈 수도 없다. 우리는 하늘이 정해주고 조상이 가꾸고 닦아온 바로 이 한반도에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고 지켜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