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正手의 정치를 원한다

  • 2003-10-27
  • 이홍구 (중앙일보)

이른바 재신임 정국의 성격은 정치게임의 승패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해돼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제를 "대통령 무책임제"라고 비판해온 우리로서는 국정 혼선에 따른 국민 신임도의 급격한 하락과 대통령 주변 보좌진의 잇따른 부정의혹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본인의 진퇴를 국민투표로 결정짓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을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민주정치에서는 아무리 급한 상황일지라도 법과 제도에 따라 책임있게 일을 대처해 나아갈 때만이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 대통령이 책임지겠다고 이야기해도 책임있는 방법과 절차를 따를 때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盧대통령의 이번 선택은 대통령이 임의로 발의한 국민투표가 "대통령 임기 5년 단임제"를 못박은 대한민국 헌법조항에 우선할 수도 있다는 엉뚱한 발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 처방보다 상식.순리로

 

우리 국민은 대통령에게서 "책임있고 절제된 권력행사"와 "강력하고 효율적인 국가운영"을 동시에 기대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서의 절대권력이 자아낸 갖가지 폐단을 수없이 겪었던 우리 국민은 현실적으로 보다 책임있고 절제된 권력행사를 요구하고 있다. 한편 북한 핵 문제를 비롯해 경제 침체, 노사관계, 교육과 주택 문제 등 시급한 당면과제를 효율적으로 강력하게 처리해 가는 리더십을 요구하는 것도 국민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기에 이러한 국민의 복합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리더십을 어떤 방법으로 창출할 수 있느냐가 바로 한국 민주주의가 겪고있는 시험이며 시련인 것이다. 오늘의 어려운 상황을 단숨에 극복하고자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라는 극단적 처방을 추진하기에 앞서 대통령은 국민의 욕구를 바르게 인식하고 상식과 순리에 기초한 교과서적인 정수(正手)에 의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 헌법에서는 국가의 안정된 운영을 위해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하되 권력의 절대화를 예방하고, 국민과 국회에 대한 책임을 보장하려 책임총리제를 두고 있다. 盧대통령은 국민투표로 국면전환을 꾀하기보다 책임총리제의 장점과 이점을 인정하고 그의 실행을 공약했던 1년 전을 생각하며 더 늦기 전에 책임총리제를 통한 책임정치의 제도화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한나라당 후보도 책임총리제를 공약한 바, 이를 정치개혁의 돌파구로 삼아 여야 합의하에 단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 헌법은 대통령제가 절대권력이나 권력독점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삼권분립이란 "견제와 균형"의 제도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들은 권력의 독점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건설적인 견제와 균형 관계를 정립하는 데 실패했다. 盧대통령 역시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못한 채 재신임 국민투표라는 기발한 발상으로 오히려 정국을 냉각시키고 있을 뿐이다.

 

주말에 열렸던 대통령과 각 정당대표 사이의 연쇄회담이 서로를 불신의 족쇄에서 풀어주고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에 건전한 견제와 균형의 관계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국민의 신임도를 높이는 데는 역시 국민의 대표인 국회와의 건전한 균형관계를 유지하는 리더십의 발휘가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망높은 권력 동반자 키워야

 

강력하고 효율적인 국가운영을 위해서도 역시 상식과 순리를 따르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현실적으로 국정운영의 효율이 떨어지고 혼선이 잦아지는 것은 대통령의 힘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힘의 속성, 즉 권력을 혼자 움켜쥐려 하면 줄어가고 여럿이 나누어 행사하면 늘어나는 이치를 무시한 데서 오는 부정적인 결과다.

 

정치적 힘을 증폭시키는 최선의 길은 최고실력자와 더불어 국민의 신망과 전문가적 경륜이 높은 권력의 동반자를 키움으로써 생산성 높은 그룹운영의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중국의 장쩌민(江澤民)이란 최고실력자도 주룽지(朱鎔基)총리라는 경제총수를 파트너로 확보했기에 정치력을 크게 보강할 수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신현확 총리.남덕우 총리 등을 동반자로 키워가면서 경제발전의 성과를 배가시킬 수 있었던 사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지금 盧대통령이 국민투표로 풀어가려는 한국정치의 현실은 통합보다 분열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아직도 뿌리가 약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좀더 강하게 키우기 위해 인내와 포용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대통령의 리더십이 아쉬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