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권력의 함정을 극복하라

  • 2003-06-03
  • 이홍구 (중앙일보 )

곧 장마가 시작될 이번 여름은 어려운 선택의 계절이 될 것 같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신당을 조직해 총선에서 승리하는 대통령이 될 것인가, 또는 국민적 합의로 전환기의 시련을 극복한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될 것인가. 그 어느 쪽에 무게를 실어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할 시점에 부닥친 것이다.

 

이미 盧대통령은 역사에서 평가받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본인의 바람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런 바람을 실현하려면 우리가 처한 지금의 이 시기가 참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역사적 전환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갈등과 도전의 역사적 전환기

 

첫째, 우리는 민주화 이후의 시대로 진입했다. 이른바 군사정권에 의한 권위주의 시대를 어렵사리 탈피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났고, 민주화를 이끌었던 두 지도자가 차례로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던 10년도 지나갔다. 이제 盧대통령이 이끌어갈 5년은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제도화하느냐는 전환기적 과제와 씨름해야 되는 시기다.

 

오늘날 한국의 정당정치가 보여주는 난맥상이나 여러 이익집단이 물리적 행동으로 표출하는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바로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가 당면한 전환기적 진통을 반영하는 것이다.

 

둘째, 한국이 근대화 이후의 정보사회로 진입한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나갔다. 8년 전인 1995년 국민소득 1만달러의 고지를 넘어서면서, 그리고 선진국들의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 되면서 "조국 근대화"의 기치 밑에서 추진된 산업화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노사관계나 복지제도가 산업화 이후 시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데서 오는 갖가지 전환기적 사회갈등이 오늘날 도처에서 빚어지고 있다.

 

셋째, 동서 두 진영이 대결하던 냉전의 시대가 가고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국제정치의 전환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소련의 해체, 동유럽의 해방, 중국의 개방과 시장경제로의 전환 등 냉전 이후의 세계 질서가 어떤 모양으로 형성되느냐는 전환기적 불안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북한은 그러한 역사적 전환에 적응하는 데 가장 뒤떨어진 상대로 한반도와 민족의 장래를 모색해야 할 우리의 입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산업화 이후, 민주화 이후, 냉전 이후의 역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으며 그 전환기가 내포한 갈등과 불안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시련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산업화 시대, 민주화 시대, 냉전 시대에 지녔던 이념.지표.상황인식 등을 과감히 수정하고 폐기해야 한다. 지난날의 소신과 꿈을 고집하다 보면 독선과 아집으로 흘러갈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적으로 제도화하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바탕으로 당선된 대통령이다. 이승만으로부터 김대중에 이르는 역대 대통령의 한계와 실패를 보아온 국민은 민주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는 인물보다도 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정당총재의 관행을 타파하는 제도적 개혁, 특히 책임정치 구현을 위한 헌법 개정도 추진할 수 있다는 盧대통령의 약속에 국민은 적지 않은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少數 지지받고 합의 착각 말길

 

盧대통령은 취임 초 외교활동을 통해 국제정치의 전환기에 적절히 대처하는 실용주의자임을 선보였다. 우리 경제를 2만달러 시대로 향한 도약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진통을 감내할 각오도 보이고 있다. 이제는 의회 민주주의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출 때가 왔다.

이 모든 노력의 성공은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와 통합을 전제로 하며 이를 위한 대통령의 리더십을 국민은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소수의 지지 안에서 다수의 합의를 얻은 듯 착각하는 "권력의 함정", 역대 지도자들이 쉽게 빠져들던 그 함정을 盧대통령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