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생사 갈림길 선 한나라당

  • 2004-02-13
  • 이내영 (조선일보)

대통령제 아래에서 총선은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갖게 마련이다.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평가가 좋으면 여당(黨)이, 나쁘면 야당이 총선에서 약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 1년간 노무현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해 과반수 이상의 국민들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오는 4월 총선에서 여당이 고전하고 야당이 약진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아이러니는 현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당 지지도에서는 신생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을 지난 1월부터 줄곧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한나라당이 방향 감각을 잃고 표류하면서 노무현 정부에 대해 실망한 국민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나라당은 대규모 불법자금 수수가 밝혀지면서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공언해 왔지만, 실제로 적극적인 변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느끼는 국민은 많지 않다. 다수의 국민들에게 한나라당은 여전히 변화를 거부하고,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는 수구(守舊)세력으로 비치고 있다.
 
최근 국회에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과 이라크 파병 동의안의 본회의 표결이 다시 무산되는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무소신·무능력·리더십 부재라는 한계를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대통령이 국제 사회에 약속한 파병안을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나서서 통과를 지연시키는 행태도 한심스럽지만,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당론으로 지지하기로 한 파병안과 FTA 비준안을 통과시킬 적극적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못하는 모습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많은 국민들은 이런 정치권에 나라의 장래를 맡겨도 되는지 우려하고 있다.
 
심대한 국익이 걸린 법안 표결이 무산되는 와중에, 한나라당이 개인 비리로 구속된 서청원 의원 석방 동의안을 다수의 힘을 무기로 일사분란하게 통과시키는 모습에 국민들은 다시 한 번 분노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과연 국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깨끗한 정치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11일 한나라당의 소장파 모임인 미래연대가 당의 혁신적 재탄생을 위해 당 지도부의 퇴진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겠는가.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표류하는 모습은 한나라당 지지자만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의 변화가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변화하려면 우선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인한 피해의식부터 버려야 한다. 검찰의 편파수사에 대한 의혹 제기와 대통령 측근 비리 폭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버리고, 정치제도 개혁과 당내(黨內)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추락한 도덕성과 지지도를 회복하는 길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당의 변화를 주도할 개혁의 리더십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당의 근본적 변화를 공언해 왔지만, 민심의 향방보다는 비주류 세력과의 당내 갈등을 더욱 두려워했기 때문에 당의 변화와 개혁이 지연돼 왔다.
 
한나라당이 현재와 같은 피해의식, 정체성의 혼란, 리더십의 부재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번 총선의 결과는 물론, 당의 미래마저 밝지 않다. 한나라당이 건강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진정한 변화와 개혁에 빨리 나서기를 기대한다. 유권자들은 한없이 기다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