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기고] 경자년 분수령에 선 한일관계

  • 2019-12-30
  •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매일경제)

2019년 한국 외교가 겪은 최대 사고는 한일 갈등이라 할 수 있다.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이란 역사 문제가 수출규제와 지소미아(GSOMIA) 종료 선언 등 경제와 안보 영역으로 비화된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수습 차원에서 지난 24일 한·일·중 정상회의 자리를 빌려 간신히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만난 것만으로도 성과라 할 정도로 악화된 한일 관계는 새해에 회복될 수 있을까. 

그간 경위를 따져보자. 한일 관계의 파열음은 작년 가을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해체가 결정된 데 이어 징용 판결로 나오기 시작했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는 한국에 보복하겠다는 생각으로 거칠게 압박했다. 대법원 판결은 "폭거이자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며 공세를 펼쳤다. 올 들어 1965년 청구권 협정에 근거해 외교적 협의와 중재를 차례로 요구한 뒤 7월 1일 수출규제를 발표해 보복의 칼을 뽑았다. 수차례 파열음이 굉음으로 이어지자 문재인정부도 예상을 넘는 수위의 맞대응을 했다. 수출규제를 경제침략으로 규정해 당정이 함께 규탄에 나서는 한편, 8월 22일 지소미아 종료 선언이란 초강수를 두었다. 안보 이슈로 미국의 개입을 유도해 일본을 압박하겠다는 의도였다. 정부는 국민 차원의 불매운동으로 일본에 경제적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 공세로 경제 침략을 막고 자립의 길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취한 수출규제가 실질적인 금수(禁輸)로 연결될 것이란 7월 당시의 우려와 예측이 어긋난 것은 한국의 저항과 대응조치 때문이 아니라 경제보복이 지니고 있는 모순이었다. 아베정부는 문재인정부에 국제법 질서 위반 상태를 해소하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징용 판결과 같은 정치 이슈에 대한 보복으로 수출규제를 가해 정경분리 국제규범을 훼손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였다. 이후 세계무역기구(WTO) 무역규범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개별수출허가 신청에 대한 심사를 통해 허가의 길을 터주었고, 무역 불확실성이 상당히 감소했다. 

문재인정부 역시 수출규제에 대한 대응으로 지소미아 종료라는 안보 이슈를 걸었으나, 결국 지소미아 종료 유예를 선언하게 됐다. 일본에 대한 압박 성공의 결과가 아니라 지소미아를 인도·태평양 전략의 주요 부품으로 여기는 미국의 강한 우려 표명 때문이었다. 수출규제와 지소미아는 한일 양자 차원이 아니라 국제질서와 관계되는 문제로서 두 정부 행동을 제약했던 만큼, 갈등 해소를 위한 정부 간 협의도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년 상당한 진전을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강제동원 판결에 대한 해법이다. 국제법 위반 상황을 시정하는 차원에서 한국 측이 해결책을 가져오라는 아베 총리 요구에 과연 문재인 대통령이 응할 수 있을까. 

지난 위안부 합의에서 보듯이 역사 문제는 이해당사자와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한 정부 간 합의로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건은 어둡다.

 

 이번 한일 갈등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는 정부뿐 아니라 민간 수준에서 양국 간 신뢰가 위기 상태에 빠진 일이다. 일본을 불신하고 경원하는 현상이 만연한 가운데 정부가 피해자, 강제동원 지원단체 등과 합의해 일본과 외교적 협의가 가능한 안을 도출하기는 어렵다. 이런 난관은 총리나 외교부 장관이 아닌 오직 대통령이 결기를 갖고 설득의 리더십으로 나설 때 뚫고 갈 수 있다. 2020년은 문재인정부 5년 대일 정책의 성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