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편가르기 부추기는 ‘적대적 민족주의’ 경계

  • 2019-09-07
  • 정승욱 선임기자 (세계일보)

민족주의 경쟁 격화… 폭발할 위험성 커 / 韓·日, 韓·中 싸움 커지면 더 큰 손해 겪어 / 비대국 해법은 ‘공진’… 복합적 대응 필요 / 미국의 북한 핵문제 협상 논리 계속 실패 / 김정은의 내면세계 해석 방법 터득해야

전쟁과 평화/하영선/한울(한울아카데미)/4만3000원(왼쪽), 전통과 근대/하영선/한울(한울아카데미)/3만2000원

사랑의 세계정치 - 전쟁과 평화/하영선/한울(한울아카데미)/4만3000원

한국 외교사 바로보기 - 전통과 근대/하영선/한울(한울아카데미)/3만2000원

 

“국제정치학은 한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다. 당장 일본과의 갈등 접근에서도 여론과 (국가)정책을 지배하는 것은 편가르기다. 국제질서 속에서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찾는 국제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상대를 적대시하고 편을 가르는 민족주의적 관점이 그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열쇠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동안 강대국에 너무나 오래 짓눌린 채 살아온 탓인가. 아니면 하루하루 개개인의 삶이 팍팍했기 때문인가.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국제적 관점에 제약을 받아서인가. 우리의 시야는 한 세기 넘게 여전히 한반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보수적 성향의 국제정치학자로 독보적 입지를 갖고 있는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의 지적이 새롭게 와 닿는다. 북핵 문제와 격화되는 한·일 갈등, 중국이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내는 상황에서 우리의 갈 길은 안갯속이다.

 

하 명예교수의 50여년간 강의록 가운데 수작을 골라내 한울아카데미 김종수 사장이 두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수십년 전의 강의임에도 동아시아를 비롯한 현실 국제정치에 응용할 수 있는 탁월한 견해가 적지 않다.

 

하 명예교수는 향후 한층 격화될 편협한 민족주의를 경계하라고 강조한다. 

 

“(지금 국제적 현실에서는)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이버 민족주의’를 포함해서 민족주의 갈등이 더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지능으로 발달할수록 민족주의 경쟁으로 연결돼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할 위험성이 있다. 한·일 그리고 한·중의 싸움이 일국 중심의 민족주의로 커지면 결국 더 큰 손해를 겪는 것은 우리다. (중략) 대국들은 각진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비대국들은 공진해야 살 수 있다. 복합적 대응이 필요하다. 닫힌 민족주의를 졸업하지 못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에 적절하게 대응해, 그들을 ‘열린 민족주의’로 끌고 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시진핑 국가주석도 단순히 중화민족보다 더 큰 아시아태평양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도록 해야 한다.”

하영선 명예교수는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 등 100여년 전의 위인들이 조선을 어떻게 개화하려 했는지 되돌아 보라”고 권장했다.

미국의 북핵문제에 대한 견해는 흥미롭다.

 

하 명예교수는 “구조에 갇힌 주인공의 의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려면 주인공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면서 미국의 대북 정책을 지적한다.

 

“미국 국제정치학은 북한 핵문제를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제재 및 억제의 논리나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6자회담 같은 협상의 논리로 풀어보려고 하지만 계속 실패하고 있다. 북한은 객관적 국제정치 형세를 주관적으로 재구성하는 국제정치 심상이 다르다. 주인공이 외면세계를 어떻게 내면화하고 기세를 드러내는지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주인공(김정은 또는 북한)이 외면으로 드러내는 언행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야 했다.”

 

미국의 대북 정책을 실패하고 있는 연유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제시했다.

 

“북한 김정은의 기본 원칙을 찾으려면 북한의 대표적 일차자료인 ‘로동신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로동신문’은 사실 전 세계 신문 중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신문이다. 한국어를 아는 것만으로는 ‘로동신문’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중략) 한국 학생(또는 지식인)들은 북한어도 제대로 모르면서도 ‘로동신문’을 대강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보다도 더 못 읽을 수 있다. CIA 같은 정보기관 취업을 희망하는 미국 학생들은 한국어를 상급까지 배워도 ‘로동신문’을 읽기 어려워서 북한어를 따로 배우고 있다.”

하 명예교수는 “조선이 국제정치 무대에서 사라진 원인으로 문명의 표준을 제때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라고 했다. 서양의 문명 표준을 제때 받아들인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러시아를 격파했고 이는 조선의 비극이 되었다. 사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한국의 결정적 위기였다.

 

“일본은 유럽의 대국 러시아와 싸워 이김으로써 비로소 구미 중심의 국제정치 무대의 명실상부한 새로운 주인공으로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 국제정치 무대도 새로운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팽팽했던 세력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결국 한반도는 일본의 독자적 영향권 속에 편입됐다. 한국이 사실상 국제정치 무대에서 사라진 배경이다.” 

 

그는 “19세기 역사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번에는 역사의 그네를 제대로 굴려야 한다. 100년 전을 되돌아보고 동시에 100년 앞을 내다보면서 오늘의 그네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