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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 한국국제정치학회장 겸 동아시아연구원장
韓, 독립운동 근간 ‘저항적’
日, 군사·경제 향수 ‘복고적’
586민족주의론 갈등 못풀어
경제·안보 의존하는 韓·日
관계의 상한가·하한가 존재
지금은 하한가 근접한 상태
日 많이 공부하고 나왔는데
韓은 벼락치기로 준비 미흡
WTO 제소 등 실효성 한계
결국 고위급 대화로 풀어야
손열(58) 한국국제정치학회장 겸 동아시아연구원(EAI) 원장은 일본의 강제징용 관련 경제보복 조치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 간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와 일본의 ‘복고적 민족주의’의 격돌”로 진단했다. 손 학회장은 문화일보와의 파워 인터뷰에서 “한·일 갈등은 구조적으로 민족주의의 충돌”이라면서 “한국에서는 3·1운동부터 시작돼 올해 100년을 맞은 저항적 민족주의, 일본에선 2012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취임 이후 복고적 민족주의가 나오면서 양측이 7년째 충돌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손 학회장은 이 같은 민족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586세대가 “세대 독점의 의식구조와 승자독식의 정치제도로 신세대와 신사고의 진입을 제약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동시에 일본에도 “한국은 피를 철철 흘려도 무릎은 안 꿇는 나라이며, 한국을 무릎 꿇게 하려면 후환이 너무 크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손 학회장은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안보·경제 관계로 인해 좋아도 ‘상한가’가 있고, 나빠도 ‘하한가’가 있다”고 규정한 뒤 “한·일 양국 정부가 ‘타개의 묘’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손 학회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로 국제기반 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한국 외교가 보다 구조적 측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며 아쉬워했다. 손 학회장은 “미·중 갈등에서 북핵 문제, 다시 한·일 관계 악화까지 몰아닥치면서 우리가 ‘벼락치기’를 하고 있다”면서 “근본적 질서가 변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외교력을 북한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제대로 배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부활의 리더십’(2013년), ‘동아시아 지역 질서 이론 : 불안전 주권과 지역갈등’(2018) 등 다수의 저서를 쓴 동북아 전문가답게 손 학회장과의 인터뷰는 정확하게 일본 반(半), 중국 반으로 갈렸다. 손 학회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8일 EAI 회의에서 진행됐다.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경제보복 조치를 꺼내 들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우리가 지금 신중히 대응한다고 하는데, 이 싸움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명분싸움, 즉 외교전(戰)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물리적 충돌이다. 명분전 측면에서 보면 결국 일본의 보복조치가 국제질서 위반이냐 아니냐다. 이게 봉합되면 천만다행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한 단계 더 나가게 되면 논쟁이 본격화할 것인데, 일본은 상당히 공부하고 나온 상태다. 우리는 북핵 문제 했다가 미·중 전략 경쟁에 집중했다가 이 문제가 닥치니까 또 ‘벼락치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분 전쟁 벌이기에는 준비가 좀 더 필요하다. 게다가 현재 미·중 전략 경쟁으로 자유주의 질서 기반이 동요를 넘어 혼란 상태인 상황에서 명분 전쟁이 가능할까. 명분 전쟁은 국제 질서가 있어야 가능한데, 이게 지금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국제 질서 유지자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오히려 질서를 흔들고 있다.
“아베 총리 입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안보 목적으로 경제를 활용한다는 건 국제규범에 어긋나는 것이며, 동아시아에서 중국 외에 그런 행동을 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 미국이 지난해 무역확장법 제232조를 근거로 철강·알루미늄 수입 규제를 한국에도 들이댔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조치는 국내법에 근거한 것인데, 우리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지 않고 미국에 엄청난 로비를 했다. 근데 미국 조치는 WTO 위반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만 WTO 위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 현재 국면에선 이 문제로 명분 전쟁을 펼치기 어렵다. 두 번째로 우리가 싸울 수 있느냐다. 국내총생산(GDP)이 19조 달러인 미국과 14조 달러의 중국이 맞붙는데도 중국이 지금 질질 끌려가고 있다. 일본은 지금 GDP가 5조 달러이고, 우리는 1조6000억 달러로 일본의 3분의 1도 안 된다. 미국이 중재하지 않는 것은 이게 명분 싸움이 아니라고 보는 것으로, 우리가 지금 명분으로 친구를 얻을 수 없는 상태에서 일본과 일대일로 붙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제징용 등에서 일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가 일본에는 또 항복하지는 않는다. 죽을 때까지 싸운다. 아베 총리도 알아야 한다. 일본이 그렇게 팬다고 해도 한국은 피를 철철 흘려도 무릎은 안 꿇는 나라라는 사실을.”
―문제는 우리가 입을 경제적 피해가 더 크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번에 원인을 치료해야 한다. 저기서 싸우고 나서 경제적으로 이렇게 하니 경제 주체들도 억울해하는 것 아닌가. 결과적으로 정치·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 지금의 한·일 관계 상황과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양국 간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실제 치고받는 ‘팃포탯(tit for tat·맞대응)’으로 가면 안 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만큼의 명분전을 펼치되,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 현재 ‘신뢰 위기’의 첫 단추이자 가장 큰 단추는 강제징용 문제다. 이에 대한 본질적인 노력이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뢰 회복 조치가 필요하고, 신뢰 회복 조치는 경제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징용문제를 풀겠다는 비상한 각오를 갖고 고위급 대화를 추진해야 한다.”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정상이 해야 되냐, 안보실장과 만나야 하냐는 기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한·일은 경제적으로도 불신의 관계로 갈 수 없고, 디커플링(탈동조화)할 수 없다. 안보적으로도 EAI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일 동맹이 ‘한국 안보에 필요하다’는 응답자가 58.6%다. 한·미 동맹이 일본 안보에 중요하다는 응답률도 40.4%, 한·미·일 삼각 군사안보협력에 대해서도 한국 국민 66.2%가 찬성하고 있다. 한·일이 안보, 경제, 문화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려운 관계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회복단계로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이 제3국 중재위 제안의 한국 답변 시한을 오는 18일로 정한 상태에서 양국이 절충안들을 내놓고 있지 않을까.
“어떻게 협의하느냐, 그게 정치를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 아닌가. 이렇게 프레임(frame)을 갖고 사안에 들어가면 승패가 딱 갈리는 게임만 가능하다. 지금 이 문제를 타협(compromise)해서 좋은 쪽으로 가는 해법을 찾기보다는 ‘내가 이겼다’ ‘내가 안 졌어’ 이런 식으로 보고 있다. 한·일관계는 승자 패자를 가리는 관계는 아닌 것 같다. 위안부 문제도 미제 비슷하게 돼 버렸는데, 지금의 정치구조나 양국 간 정치관계로 봤을 때는 정말 해결하기 어렵다. 그러니 정치가 이런 양국 현안들을 타개할 수 있는 ‘타개의 묘’를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 왜냐면, 첫째 양국 간 경제적으로 상당히 상호의존돼 있어서 사고가 났을 때 한국도 절대 백기는 안 들며, 그러다 보면 일본도 매를 맞게 된다. 결국 서로 다치는데, 양국 정부가 그렇게 어리석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문재인 정부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형해화에서 출발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 정부의 위안부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에도 참여했는데.
“한·일 관계는 좋아도 ‘상한가’가 있고, 나빠도 ‘하한가’가 있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좋아도 역사 문제 때문에 너무 좋을 순 없고, 상한가 치자마자 바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한가는 경제나 안보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에 그걸 때리면 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위안부 합의는 상한가를 칠 수 없는 조건에서 너무 상한가에 근접했기 때문에 급격히 하락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다.”
상한가와 하한가가 명확한 한·일 관계가 이처럼 최악의 상황으로 추락하게 된 근본 원인은 뭘까. 손 학회장은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동북아 3국에서 커지고 있는 민족주의 목소리. 특히 3·1운동에 뿌리를 둔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 아베 총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복고적 민족주의’가 맞붙고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최소한 청년세대의 저항민족주의나 복고민족주의에 덜 세뇌된 목소리를 담은 그런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않는 한 근본적 문제 해결은 어려운 게 아닐까 한다”고 손 학회장은 전망했다.
―한·일 갈등의 근본적·구조적 원인은 뭔가.
“현재 한국 정치나 일본 정치를 볼 때 지금 이 모습으로는 상한을 칠 수가 없다. 이는 민족주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족주의라는 게 3·1운동을 시작으로 해서 올해가 100주년인데, 민족이 하나 돼서 자주와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였다. 그러다 보니 특히 일본에 대해서 저항적 성격을 갖게 됐다. 한국 민족주의를 보면 1919년을 기점으로 20년 전까지만 해도 한쪽에는 위정척사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애국개화파, 또 다른 한쪽에는 동학이 있었다. 소위 민족이 셋으로 쪼개져 있던 것이 1919년 하나가 돼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으로, 민족을 단위로 해서 독립·자주를 쟁취해야겠다는 의식이 확산한 계기가 1919년이다. 그래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측면에서의 민족주의로 계속 발전돼 왔던 것 아닌가. 반면 다른 한쪽인 일본은 ‘복고적 민족주의’라는 게 나와 있다. 세계 2위 경제 대국까지 갔는데 서서히 주저앉고 쇠퇴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선 민족주의적 방식으로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처럼 일본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되살리고 싶어 하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민족주의가 일본에서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가 대표적으로,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것은 교육 때문이라면서 1945년 전후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에 의해 작성된 일본 근대사는 자학사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부흥을 위해 역사부터 새로 쓰고, 헌법도 스스로 쓰자고 하는 것이다.”
―한·일 양국의 민족주의의 충돌이라는 진단인가.
“구조적으로 민족주의의 충돌로 본다. 한쪽은 저항 민족주의, 한쪽은 복고 민족주의가 7년 동안 충돌하고 있다. 상한가를 풀려면 이걸 풀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 좋아지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아슬아슬하게 하한가에 근접하는 일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하한가에 근접한 한·일 관계가 돼 왔는데, 이걸 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박근혜 정부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을 했고, 지금도 계속 역사 새로 쓰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 역시 우리 사회의 복고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넘으려면 기성세대에 오염되지 않은 청년세대가 역사의 주역으로 나오거나, 혹은 최소한 청년세대의 저항 민족주의나 복고 민족주의에 덜 세뇌된 목소리를 담은 그런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않는 한, 어렵지 아닐까 싶다.”
―586세대가 민족주의적인 것도 문제의 한 측면일 수 있나.
“제가 속한 세대이기도 한 586이 민족주의적인 건 맞는 것 같다. 저항 민족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고, 이 세대는 저처럼 1980년대에 유학을 가기도 하고 1990년대 세계화 물결을 탄 세대이기도 하며, 동시에 운동하면서 감옥에 갔다가 시민사회를 통해 권력으로 들어온 그룹도 있다. 양쪽 다 상당히 저항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성향이 강하다. 물론 민족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다.”
손 학회장이 두 번째로 꼽은 원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미·중 전략 경쟁에 따른 국제 질서의 변화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전후에 만들어놓은 국제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중 전략 경쟁마저 겹치면서 동북아에 외교적 진공 공간이 열린 측면이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특히 손 학회장은 “미국의 대중 저지 전략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과거 펠로폰네소스 전쟁처럼 수십 년, 더 나아가 100년의 패권 전쟁 서막이 열렸다는 점에서 “지금 당장 미국이 승자냐, 중국이 승자냐 정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경쟁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디서 싸움이 붙을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고민해야 한다”면서 “미국도 인도·태평양 전략을 짜면서 ‘전(全) 정부적 접근’을 강조하는데, 우리의 외교전략 캘린더(달력)는 5년도 안 짜져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7월 초 열린 학회 세미나 주제가 미·중 관계 40년이었다. 일본의 부상을 잠재운 것으로 평가되는 1985년 ‘플라자 합의’ 같은 결말이 가능할까.
“플라자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미국이 일본을 다루면서 국제 협조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캐나다·독일·프랑스·일본 등 5개국이 일본으로 하여금 수입을 더 많이 하게 하고, 미국은 재정적자를 해소하게 한 것이다. 국제적 합의를 통해 일본을 일차적으로 장악하려고 했고, 여기에 더해 양자적으로 일본을 배싱(bashing·때리기)했다. 이게 결말 난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고 일본에서는 대형 은행이 무너지면서 장기 불황에 들어가게 됐고, 미국의 무역적자 문제가 저절로 해소됐다. 반면 지금의 미국은, 일단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 질서를 통해 구조적으로 부상국을 억제하고 관여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또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트럼프 대통령은 양자적으로 상대를 거칠게 다루면서 국제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는, 로널드 레이건부터 시작해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 연결되는 미국의 기존 리더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980년대 미국 패권 도전국으로 보였던 일본과 지금의 중국은 다른가.
“일본은 기존 미국 중심의 국제 체제에 순응하면서 그 안에서 2등이 됐다. 1등으로 갈 만한 힘이나 상상력이 부족했던 반면, 중국은 그냥 부상(rise)이 아니라 재부상(re-rise)이다. 19세기 중반까지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고, 반면 19세기에 중국의 ‘중화질서’가 깨지면서 제국주의적 질서에 가장 빠르게 적응했던 나라가 결국 일본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2000년여에 걸친 제국의 통치 경험이 있고, 이게 지금 와서 다시 드러나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과거의 리더십이기도 하다. 중국이 21세기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어내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물리적·규범적 힘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선 많은 논의가 있다. 지금대로 가면 중국의 경제성장이 6% 초반인데, 미국이 2∼2.3%의 GDP로 계속 성장한다 해도 2030년에는 미·중이 백중 상태가 된다. GDP 규모는 미국이 19조 달러, 중국이 14조 달러다. 이게 28조 달러 정도에서 수렴한다고 보면 2050년 정도 되면 중국 군사력이 미국 군사력을 넘어선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중국이 패권 국가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인가.
“양쪽 경제가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선 그렇다. 하지만 패권국과 도전국과의 동학이라는 게 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신흥 강대국이 부상하면 기존 강대국이 이를 두려워해 이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는 이론)’이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나. 패권국은 도전국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해 각종 정책을 펴는데, 지금 무역에서 이미 시작했고 기술로 넘어가고 있다. 이게 앞으로는 에너지, 자원, 금융을 넘어 결국 군사까지 쭉 가게 된다. 다양한 미국의 대중 저지전략이 작동할 경우에는 30년 후의 군사력에서 변화가 있는 게 아니라 좀 더 길게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억제할 가능성이 높다. 즉, 미·중 간 세력다툼은 훨씬 길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한 세대의 경쟁이 아니라 두세 세대의 경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10∼20년 지나면 미·중 간 승패가 결정될 수 있으니 한쪽으로 편승해야 한다는 사고를 갖고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
―미·중 전략 경쟁이 10∼20년보다 훨씬 길어질 수 있다는 전망인가.
“미·일도 15년을 싸웠다. 1980년대 초반부터 1997년에 일본이 본격적으로 주저앉을 때까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중 간 싸움은 이제 3년 차에 접어든 것이다. 이게 15년이 아니라 30년, 또는 60년 전쟁으로 가게 되면 지금 외교전략 수립이 외교부 내에서 장·차관이 모여 전략회의 여는 수준으로 될 일이 아니다. 무역·기술·에너지·금융·군사까지 가는 5개 국면이 있는데, 미국은 최근 발간한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에서도 밝혔듯이 “전 정부 차원의 접근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 외교부가 미·중 관계를 다루는 것도 외교부에서 단기적으로 현안 차원에서 할 게 아니라 전 정부적 접근이 필요하다.”
―정부가 너무 북한 문제에만 ‘올인’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지금 보면 북한에는 어떻게 관여해서 한반도를 평화로 이끌 거냐에 대해 굉장히 많은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외교 자산이라는 건 한정돼 있고, 현명하게 배분해야 한다. 아무래도 평화의 문제가 현 정부 들어 미·북 간에 상당히 험악한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남북이 통일돼도 문제는 똑같다. 통일돼도 GDP가 2조 달러도 안 되는데, 미국은 19조 달러, 중국은 14조 달러다. 통일된다고 해도 팔자가 전혀 안 바뀐다. 그렇다면 외교적 자산을 상당 부분 북한에 써야겠지만, 동시에 미·중 경쟁 속에서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일 관계도 지금 상황이 전개되는 것으로 봐선 남북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일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정된 외교자산을 다 모아도 부족하니까 전 정부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어떻게 배분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재편이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혹은 한반도 남쪽에서 우리가 앞으로 두 세대에 걸친 60년 동안의 삶을 규정하는 도전과제를 식별하고 이 속에서 어떤 전략을 마련할 것이며, 이에 따라 어떻게 자원을 분배할 것인지가 된 다음에 미시적으로 남북문제는 이렇게 해결하겠다 하는 게 필요한 듯하다.”
―중국이 결국 패권국이 된다는 가정하에 한·미 동맹을 강화하거나 중국으로 빨리 넘어가야 한다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중국이 패권국으로 등장할 거냐 아니냐의 문제를 예측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중국이 궁극적으로 세계 무대에서 단일 주역으로 등장하는 데까지는 굉장히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가 몇 세기 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미리 베팅(내기)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투키디데스 함정이 언급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도 15년 전쟁하고 15년 휴전 뒤 다시 30년을 전쟁한, 총 60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60년 뒤 스파르타가 이긴다는 것을 미리 안다고 해서 당시 상황에서 뭐가 다르겠나. 당장 치열하게 치고받는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미국이 승자일까, 중국이 승자일까가 중요한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 누군가가 승자가 될 테니 그때 베팅하자는 것도 올바른 관점이 아니지만, 당장 치고받는 이 경쟁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디서 싸움 붙어서 어디로 갈 것인지, 그 싸움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뭔지, 이를 막기 위해 어떤 국제·지역 질서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 피해를 상대적으로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인지를 찾는 게 중요한 일 아닐까.”
―하지만 당장 실제 현상에서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상황에 따라 우리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선택을 찾아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무력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강대국 정치인데, 미국의 패권이 과거와 달랐던 것은 미국이 규칙·규범을 만들고 그 질서 속에서는 미국의 이익이 좀 훼손된다고 해도 당장 무력을 동원해 질서를 바꾸진 않았다는 점이다. 이 틀 속에서 다른 국가들도 협상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한국과 같은 중견국(미들파워)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들이 힘의 충돌에 의해 해결되는 국제시스템은 안 된다. 규칙이 존중되는 동시에 규칙이 필요하면 새로 만들어서 변화하는 세력균형을 일정 반영하는 형태가 돼야 하는데, 우리가 이를 마련하는 데 외교적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아직 미·중이 본격적인 패권 싸움으로 간 상황이 아니라서 여전히 미들파워로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인터뷰 = 신보영 정치부 차장 boyoung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