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워킹페이퍼] 코로나 위기 이후 세계정치경제질서 시리즈⑩_ 코로나19 위기와 유럽 통합의 전환
ISBN 979-11-6617-334-9 95300
I. 서론: 코비드19 위기가 유럽연합에 미친 영향
코비드19 위기는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일상의 질서에 심각한 충격을 가하며 국가의 대응을 촉구했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었다(Schmidt 2020). 다만 유럽의 경우, 일상의 질서라 부를 수 있는 정치경제체제가 특별한 양상을 띠고 있다. 어느 지역에서나 심각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대응을 책임지는 것은 주권을 보유하는 국가의 몫이다. 물론 단일/연방 국가나 정치·행정체제의 중앙집중적/분산적 성격에 따라 차이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유럽은 이와 같은 복합성에 덧붙여 다층통치(Multi-Level Governance)체제라는 특징을 보여준다(Hooghe and Marks 2002).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중앙/지방정부의 구조에 덧붙여 초국가/중앙/지방정부라는 추가의 복합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유럽은 복합성을 강화하는 유동성도 안고 있다. 유럽의 다층통치체제는 한번 만들어진 규칙을 통해 유지된다기보다는 계속 변화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유럽 통합 운동은 1950년대 공식적으로 시작된 이후 초국가 차원의 지역통합을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서 통용되는 주권국가라는 개념은 유럽에서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이라는 초국가 단위는 주권의 더하기(pooling)로 형성된 정치 단위이기 때문이다(Peterson 1997). 유럽 정치질서의 유동성이란 더하는 주권의 영역과 양이 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한다는 의미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만들어진 ‘하나이자 불가분의 공화국’(La République une et indivisible)이 오래전 사라진 셈이다. 각 회원국의 주권을 조금씩 나누어 유럽으로 이전해왔기 때문이다.
코비드19 위기의 충격은 유럽지역 정치 질서가 갖는 복합성과 유동성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의 목표는 코비드19 위기가 유럽 통합에 미친 영향을 파악함으로써 세계 정치경제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유럽지역의 특수성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위기와 지역통합의 상호 관계는 유럽 통합 초기부터 중요한 인식론적 기초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유럽 통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장 모네(Jean Monnet)는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통합이 이뤄진다고 주장했고, 결국 유럽이라는 존재는 위기에 대한 해결책의 집합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Monnet 1976). 물론 모네의 이런 주장은 비단 초국가 지역통합뿐 아니라 모든 정치 질서에 적용될 수 있다. 주권국가도 초기에는 위기를 극복하는 권력집중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모네는 위기가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기능적 측면을 부각하면서, 동시에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매우 구체적 정책을 통해 찾아야 한다는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유럽=해결책의 집합’이라는 등식의 의미는 거대한 담론도 필요하나 유럽 통합의 핵심은 역시 공동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부분은 국가와 유럽의 형성과정에서 드러나는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국가가 상당 부분 물리력을 동원하여 거시적 주권을 선포하면서 일시에 헌정질서(Constitution 즉 건립을 통한 단위의 창출)를 만들었다면, 유럽 통합은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들을 조금씩 설득하면서 사안별로 주권을 끌어모아 차근차근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모네의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접근법은 지역통합의 이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사회적으로 어떤 필요가 존재할 때 이를 해결하는 제도나 정책이 만들어진다는 기능주의 이론은 유럽 통합이라는 변화를 설명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국제화 시대에 국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국제적 정치 단위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1950, 60년대 등장한 신기능주의는 한 영역의 통합이 최대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영역의 통합으로 연계·발전되어야 한다는 연쇄작용(Spillover)의 개념을 개발하여 제시하였다(Deutsch et al. 1957, Lindberg and Scheingold 1971). 심지어 통합의 지체가 오히려 새로운 통합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논리까지 제공하였다(Corbey 1995). 신기능주의 이론은 통합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로 많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지난 70여 년 동안 계속되어온 유럽 통합의 근본 동력을 설명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Schimmelfennig 2018).
물론 구조적 기능주의의 설명은 행위자의 전략과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설명으로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과 이익에 기반하여 제기되는 문제를 정의하고 조작하면서 통합을 이끌어가거나 이에 반대한다는 정치적 전략이론은 신기능주의를 적절하게 보완하는 이론이다(Jabko 2005).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통합된 정책으로 반영되는 과정을 중시하면서 행위자들이 어떻게 문제를 발견, 정의하고 이를 자원으로 활용하여 정책적 틀을 추진하는지 주시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접근법이다. 이 과정은 많은 행위자가 참여하기에 미시적 분석이 동반되어야 하며, 다양한 흥정과 협상이 이뤄지는 와중에 예상하기 어려운 결과가 도출되기도 하며, 많은 경우 행위자 간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조합을 통해 결실을 얻는다.
신기능주의와 정치적 전략의 두 관점에서 유럽 통합의 주요 성장기를 설명하는 노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1950, 60년대 유럽 통합의 초창기에 냉전과 경제재건이라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미국, 프랑스, 독일 등 국가 행위자들의 노력은 정치·군사통합의 실패와 경제통합으로의 재조정으로 귀결되었다. 1980, 90년대 일본의 부상(Sandholtz 1992)과 탈냉전 시기를 맞아서도 정치적 통합의 추진은 단일시장과 화폐통합이라는 다소 의외의 방향으로 결말을 맞게 되었다. 부연하자면 유럽 통합은 시대가 요구하는 커다란 방향을 따라 이뤄졌다기보다는 시대적 요구를 빙자한 행위자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예측하기 어려웠던 결과라는 뜻이다.
2020년 초부터 유럽을 강타한 코비드19 위기는 유럽연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특히 유럽 통합의 방향을 좌우할 정도로 강한 효과를 발휘했는가. 코비드19 위기의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전 2010년대 유럽연합이 겪었던 다양한 위기와 그로 인한 유럽 통합의 상황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유럽은 2020년대를 시작하면서 이미 존재론적 위기(II.)를 맞고 있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에 코비드19 위기는 역내에 격리와 봉쇄(III.)라는 치명타를 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럽 통합은 시민의 자유로운 통행을 가장 커다란 업적으로 선전해 왔다는 점에서 코비드19 위기는 통합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측면에서 유럽은 코비드19 위기를 계기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는 백신의 공급을 유럽연합이 담당하면서 보건 정책의 새로운 행위자(IV.)로 등장했다. 다른 한편, 위기의 경제적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 차원의 재정 정책(V.)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위기가 시작되고 1년 반 남짓한 기간의 경험을 놓고 미래를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은 유럽연합이 코비드19 위기라는 기회를 적절하게 포착하여 통합을 강화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는 점이다.
II. 배경: 유럽 통합의 전체적 위기 상황
2020년대가 시작하면서 유럽은 안팎으로 가해지는 충격으로 초유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우선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함으로써 유럽을 지탱하던 하나의 기둥이 빠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가했다. 외부적으로는 중국의 놀라운 부상이 세계 지정학에서 심각한 변화를 초래하며 유럽의 위상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전통적 동맹인 미국과의 관계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을 맞았다.
1. 유럽 통합과 브렉시트
영국은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결정했고, 2021년 초 실질적으로 EU 회원국에서 역외국가가 되었다. 브렉시트가 유럽 통합에 미친 부정적 효과와 심리적 타격은 강했다(The Economist 2016). 첫째, 유럽 통합은 1950년대 시작한 이래 계속 회원국의 수를 늘리며 확장세를 유지했고 특정 국가가 통합의 대열에서 탈퇴한 일은 처음이다. 2010년대 그리스를 비롯해 일부 남유럽 국가들의 탈퇴 – 예를 들면 그렉시트(Grexit)라 불리던 – 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었지만 실질적 탈퇴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둘째, 영국은 유럽연합 안에서 가장 큰 국가에 속한다. 일명 ‘빅4’(Big4)라고 불리는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의 유럽 핵심에서 한 축이 무너지는 셈이었다. 셋째, 영국은 단순히 규모가 커다란 회원국일 뿐 아니라 유럽 안에서 자유무역이나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정책 패러다임을 대표하는 나라였다(Rosamond 2020).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 본다면 영국은 의회 민주주의의 본고장이고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세력으로 유럽의 정체성에서 매우 중요한 닻의 역할을 해왔다.
이처럼 브렉시트는 유럽 통합이 항상 진보하는 운동이 아니며 후퇴할 수도 있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브렉시트는 예상하지 못했던 부수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Ricard 2021). 일단 브렉시트가 결정되고 지난(至難)한 과정을 겪으면서 추진됨으로써 유럽연합 내부에서 탈퇴의 목소리가 오히려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국민연합(RN, Rassemblement National)이나 이탈리아의 레가(Lega) 등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주장하던 유럽탈퇴론은 수그러들었다. 또 영국이 유럽에서 사라지면서 유럽연합의 정책 결정 과정이 수월해졌다. 영국은 여러 가지 역사·문화적 이유로 원래 유럽 통합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세력이 아니라 마지못해 참여하는 미온한 태도의 회원국이었다. 새로운 정책을 유럽 차원에서 실시하는 통합에 대부분 반대했는데, 이런 영국이 탈퇴하자 정책 결정은 그만큼 쉬워졌다. 코비드19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브렉시트가 복합적인 효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2. 중국의 부상과 유럽의 반응
2010년대 세계 무대에서 중국의 부상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다. 2013년 구매력평가기준(PPP)으로 중국의 국내총생산 규모가 미국을 넘어서면서 중국은 명실공히 경제력 G2로 올라섰다. 2020년대는 중국이 명목 국내총생산에서도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경제 최강국으로 부상을 예측하고 기대하는 시기가 되었다. 유럽 통합은 역사적으로 외부적 위협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대 유럽의 통합을 촉진한 명시적인 위협은 소련과 공산권의 군사·안보적 팽창전략이었다. 유럽은 또 미국에 잃어버린 경제·문화적 리더십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통합을 고려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는 일본의 부상이 유럽 통합을 촉진하는 요소였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의 중심을 자부했던 유럽이 볼 때 중국의 부상은 소련이나 미국, 일본에 이은 또 다른 심각한 위협이다(Biscop 2020).
유럽연합은 2019년 중국을 ‘체계적 경쟁자’(sys-temic rival)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전략적 방향을 선택했다(Small 2020). 중국은 이제 유럽이 지원하는 거대한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세계 정치경제 질서를 놓고 유럽과 경쟁할 정도로 성장한 세력임을 인정한 셈이다. 게다가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개방이나 자유화보다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화하는 중국의 양상은 이런 전략적 인식이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물론 유럽의 내부적 사정은 전략적 담론이 보여주는 대립이나 경쟁보다 훨씬 복잡하다. 브렉시트의 영국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유럽을 대신할 수 있다는 ‘글로벌 브리튼’의 꿈을 안고 있고, 수출 대국 독일도 중국과 관계의 악화를 두려워한다. 코비드19 위기는 중국에 대한 유럽의 의존을 부각하면서 유럽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기회가 되었다.
3. 트럼프 행정부와 유럽 통합
2016년 6월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에 이어 11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유럽 통합에 중요한 충격을 안겼다. 트럼프는 후보 시절부터 유럽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자랑해 왔으며 국제적 통합을 추진하는 유럽연합을 폄하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Shapiro 2020). 보다 근본적으로 미국은 유럽 통합의 역사적 후원자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 통합 초기부터 국제적 반공(反共) 계획으로 미국은 유럽을 지원했고, 탈냉전 시기에도 유럽 대륙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데 EU의 역할을 인정했다. 물론 경제적 경쟁의 측면이 있었으나 미국-유럽의 확고한 안보 동맹을 위험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00년 이상 계속된 유럽-미국의 확고한 동맹 관계를 뒤흔들었다. 특히 70년 가까이 미국과 서유럽을 안보공동체로 묶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의 핵심 조항인 집단안보 개념이 자동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동맹에 대한 신뢰를 위협했다(The Economist 2019a). 유럽에서는 미국에 의존하는 안보가 불안해지자 유럽의 독자적인 방어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안보의 유럽주의 담론이 확산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유럽주의보다 대서양 관계를 중시하던 영국의 탈퇴 결정은 이런 경향의 확산에 힘을 실었다. 물론 소련에 이어 러시아의 위협에 노출된 중·동유럽에서는 불확실한 유럽주의보다는 미국에 대한 신뢰가 여전히 더 강하지만 말이다.
2020년 초 코비드19 위기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나 동아시아를 넘어 곧바로 유럽으로 전파되어 확산하였다. 당시 유럽연합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이었다고 진단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이라는 중요한 회원국이 처음으로 탈퇴를 선언하여 안정과 균형이 무너진 데다, 중국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세계 질서에서 유럽의 위상을 더욱 아래로 짓누르며 부상했고, 전통적 동맹인 미국은 유럽을 친구보다는 적 또는 경쟁세력으로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보였다.
III. 봉쇄와 격리
중세부터 전염병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사람들을 격리함으로써 전염의 가능성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쿼런틴’(quarantaine)이라는 표현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사람들을 40일 동안 격리한다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다. 코비드19에 대한 대응도 예외가 아니었고 격리와 봉쇄는 보건 위기를 관리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부상했다. 문제는 유럽 통합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이동이 제일 대표적인 성과였다는 점이다. 유럽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다양하지만 복잡한 공동정책들보다는 “여권도 필요 없이 신분증이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라는 단순한 사실이 더 쉽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1. 유럽 통합의 퇴보?
2020년 코비드19 위기가 유럽을 강타하기 시작했을 때 영국은 유럽연합 탈퇴의 과정에서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적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브렉시트가 유럽연합의 외형적 축소였다면 코비드19 위기는 유럽 통합의 내부적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효과를 가졌다. 코비드19 위기는 일률적으로 유럽에 확산한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띠었기 때문이다. 중국 관광객이 이탈리아에 전파한 코비드19는 지중해 관광 중심 국가에 제일 먼저 확산했고, 이어 이곳을 거쳐 간 유럽인들을 통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으로 퍼졌다. 유럽연합의 회원국들은 코비드19 환자가 다수 발생하는 특정 지역과의 이동을 금하는 결정을 내렸다가 동시다발적으로 환자의 수가 대폭 증가하자 아예 국가 간 이동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국내에서의 이동도 통제하는 봉쇄 조치를 남발하게 되었다(Stroobants 2020).
유럽연합은 통합의 가장 가시적인 효과로 자유롭게 “여행하고 일하고 생활하는 공간”으로서의 유럽을 선전해 왔다(European Commission 2021b). 마치 한 국가라도 되듯이 유럽 시민이라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는 논리다. 실제 1985년 솅겐(Schengen) 조약은 유럽인들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길을 열었고, 1986년 유럽단일의정서는 유럽 차원의 단일시장(Single Market)을 추진하면서 노동도 자본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이어 유럽연합은 한 회원국의 사회보장제도를 다른 회원국에서도 인정받도록 정책 조정의 노력을 기울였다. 국경의 통제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책이 코비드19 위기로 급속하게 확산하자 유럽 통합이 30년 이상 노력해 만들어온 공간이 다시 분할되는 효과를 낳았던 셈이다.
스웨덴의 사례는 코비드19 위기가 얼마나 유럽내 국경을 다시 세우는 데 복합적으로 작동했는지를 보여준다. 스웨덴은 다른 회원국에 비해 시민의 일상적 자유를 유지하는 정책을 고집했다(Steinglass 2020). 경제활동에 줄 수 있는 제약을 최소화하고 마스크 착용과 같은 조치도 되도록 피했다. 당장 전염병의 피해자가 다수 발생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집단면역을 추구하는 독특한 정책을 택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특수한 정책은 이웃 국가가 스웨덴과의 이동을 통제하는 정책 반응을 낳았다.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 노르웨이는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니지만 솅겐 조약을 통해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해 왔다 – 등 스웨덴 주변 국가는 모두 이동을 금지했다. 코비드19 자체보다 코비드19 대응의 차이가 국경을 다시 세운 사례다.
2. 난민 위기의 전례
유럽이 자랑하는 자유로운 이동의 원칙이 심각하게 무너진 경우는 2015년 난민 위기 때다(Caporaso 2018). 말하자면 코비드19 위기 이전에 이미 자유로운 이동의 자유는 정지된 경험이 있다는 뜻이다. 당시 시리아 내전의 여파로 10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터키를 통해 그리스로 진입했고, 그리스에서 다시 유럽연합 전역으로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단 그리스, 즉 유럽연합 영역에 진입하면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난민들에게는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는 일이 일차적 목표였다. 그러나 대량 난민의 행렬이 집중적으로 늘어나자 일부 회원국들은 긴급 조치라는 명목으로 국경 검색을 다시 시작하며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은 바 있다.
물론 2020년 이후 코비드19로 인한 국경 통제는 2015년 난민 사태 때보다 더 포괄적이고 강력했다. 단순히 국경 검색을 부활하여 난민의 이동을 막은 것이 아니라 유럽 시민의 이동까지 제한한 조치였기 때문이다. 2015년의 난민 위기는 유럽연합과 터키의 협력으로 제한할 수 있었다. 시리아와 유럽 사이에 있는 터키가 EU의 경제적 지원을 조건으로 난민의 이동을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키로 하면서 난민의 행렬을 막았다(Vallet 2021).
난민 위기의 전례는 유럽연합에 미묘한 교훈을 남긴 셈이다. 하나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유럽이 신속한 공동 대응책 마련에 실패하면서 회원국의 산발적 대책이 통합의 업적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단기적 무기력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이런 회원국의 조치들은 결국 일시적이고 시간이 지나면 유럽 차원의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정상화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국경 통제와 같은 유럽 통합을 부정하는 조치도 위기로 인한 일시적 대응일 뿐 그렇다고 유럽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3. 공동 대응의 모색
코비드19 위기가 자유 이동이라는 유럽 통합의 업적을 단숨에 붕괴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임을 유럽에 전가하기는 어려운 성격의 사태였다. 물론 유럽 통합을 세계화의 한 부분으로 보는 세력은 대규모 관광이나 광범위한 교역이 코비드19 사태를 가져왔다며 유럽과 세계화를 함께 비난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유럽의 일반적 반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격리와 봉쇄와 같은 조치는 일시적이며 불가피한 대응일 뿐이라는 시각이 더 보편적이었다. 특히 격리와 봉쇄에 관한 결정은 회원국 정부의 권한이었고, 유럽 내 국가 간 이동뿐 아니라 국내 이동에도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유럽에 책임을 묻기는 어려운 사안이었다.
코비드19가 서유럽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동 유럽을 포함한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다. 이처럼 한편으로 코비드19 위기의 범위는 확산했지만 동시에 같은 국가 내에서도 지역별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총체적 범위의 확산과 지역 간 차별화의 인식은 코비드19 위기에 대응도 유럽, 회원국, 지역 등의 다층적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Krastev and Leonard 2021).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일부에서는 코비드19 위기가 유럽 국가 간 협력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2020년 봄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환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독일은 상대적으로 병원 시설의 여유가 있었다. 따라서 국경 지역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환자를 독일 병원에서 수용하여 치료하는 협력 체제가 만들어졌다(Wieder 2020). 통제하기 어려운 일반인들의 이동은 막더라도 소수 환자의 치료를 위한 월경(越境)은 오히려 장려하는 사례가 만들어진 셈이다.
2020년 4월 유럽연합이 역외 지역과의 인적 교류를 금지하는 데 합의한 조치는 코비드19에 대한 공동 대응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European Commission 2020a). 역사적으로 유럽의 역할을 회원국 사이에 국경을 낮추거나 없애는 일이었지만, 코비드19를 통해 대외적 국경을 높이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셈이다. 이는 유럽공동체 시기 상품의 교역에서 유럽이 역외에 공동관세를 적용하면서 공동통상정책을 수립했던 경험의 초기와 유사하다.
코비드19로 인한 유럽의 격리와 봉쇄 조치가 다양한 국가와 지역에서 늘어나면서 유럽 통합이 퇴보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퇴보가 일시적이고 불가피했다는 인식 또한 강했다. 게다가 그 책임은 전통적으로 보건 정책을 담당하는 회원국 정부들의 몫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유럽은 책임은 피하면서도 새로운 정책을 모색하는 기회의 창이 열렸다고 볼 수도 있었다.
IV. 백신의 정치
코비드19 위기는 유럽연합이 보건 정책의 한 부분에 직접 개입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회원국 정부가 아닌 유럽 차원에서 백신을 구매하여 배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원래 보건 정책은 전통적으로 회원국의 권한에 속하는 영역이었고 유럽 차원의 개입은 간헐적이고 간접적이었을 뿐이다. 코비드19처럼 새로운 정책 쟁점을 제기하는 위기가 아니었다면 유럽이 이처럼 중대한 분야의 권한을 신속하게 차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요인들이 유럽의 권한 확대를 가능하게 했는지 살펴본다.
1. 회원국 담당의 보건 정책
유럽에서 연합과 회원국의 권한 배분은 무척 복잡한 양상을 띤다. 정책 쟁점이 상호 밀접하게 연결된 현대 사회에서 명확한 권한의 구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유럽연합은 단일시장 즉 상품의 이동과 관련된 쟁점과 영역에서 거의 독자적 권한을 행사한다. 반면 복지국가라는 할 수 있는 부분의 기능은 회원국들이 전담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정책의 분업 체계에서 보건 정책은 복지국가, 즉 회원국의 권한에 일단 속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Brooks and Geyer 2020, 1059). 실제 보건·의료 분야의 정책은 여전히 회원국 정부 차원에서 내려진다. 예를 들어 코비드19 위기에서 중요한 격리·봉쇄와 관련된 정책 및 백신 접종 정책은 회원국 정부가 결정권을 갖고 있다.
유럽이 개입했던 영역은 보건·의료와 단일시장이 중첩되는 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의약품에 관한 평가와 허가를 담당하는 역할은 유럽 차원에서 유럽 의약품청(EMA, European Medicines Agency)이 담당했다. 약품은 특수하기는 하지만 상품이었고 그 허가와 유통은 단일시장의 자유로운 이동의 대상이었기에 유럽 차원에서 관리가 필요했다. EMA는 유럽 단일시장이 형성되면서 1995년 영국 런던에 설립되었으나, 브렉시트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전했다.
유럽 의약품청은 2020년 말 백신의 허가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새로운 질병에 대한 급속한 백신 개발이었던 만큼 안전에 관한 우려가 심각했으며, 러시아나 중국 등에서 개발한 백신에 대한 허가 여부는 민감한 외교적 쟁점이었기 때문이다. 2021년 8월 현재까지도 EMA는 러시아나 중국의 백신은 공식 허가하지 않았으며 이 정책은 유럽 내부에서 백신의 정치에 중요한 다툼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2. 유럽의 부상: 백신 공동 구매
2020년 봄 유럽은 코비드19의 빠른 확산으로 거의 모든 회원국이 전국 봉쇄라는 강력한 조치를 결정했고, 그 결과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았다. 그해 여름 유럽 집행위원회는 백신의 공동 구매와 배분이라는 보건 정책의 중요한 부분을 스스로 담당하면서 새로운 권한을 확보하는 모습을 보였다(European Commission 2020b). 유럽 차원에서 약품을 허가하는 권한과 새로운 질병을 통제하는 데 결정적인 백신을 구매하고 배분하는 권한은 큰 차이를 드러낸다. 전자가 시장 관리의 부수적인 한 부분이라면 후자는 보건 정책의 결정적인 중심축이다. 보건 위기가 유럽 통합을 촉진하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유럽연합이 놓였던 시대적이고 구조적인 위기는 새로운 정책을 통해 존재 이유를 확인해야만 하는 동기를 제공했다. 브렉시트는 유럽 통합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주의를 불러왔었고 중국의 부상이나 미국과의 불협화음은 유럽의 상대적 무기력함을 강조했다(van Middelaar 2020). 난민 위기에 대한 유럽의 대응이 회원국 중심으로 분산됨으로써 결국 실패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강했다. 코비드19 위기 발생 이후에도 마스크 확보를 둘러싼 유럽 국가 사이의 경쟁은 분열의 한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안이다.
EU 집행위원회는 특히 정통성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2019년 임명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유럽 의회와 회원국 정상들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부상한 후보였다(The Economist 2019b). 의회의 주요 정치세력인 기독교 민주주의와 사회 민주주의가 지지하는 대표 후보들이 일부 회원국의 반대로 줄줄이 낙마하면서 프랑스가 제안해 등장한 위원장이다. 폰 데어 라이엔은 정치에 오래 몸담았으나 원래는 의사라는 특징도 가졌다. 부족한 민주적 정통성을 보완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정책에 대한 강한 의지로 표명될 수 있었다. 의사-집행위원장의 백신 구매 정책은 이런 관점에서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
명확한 유럽의 권한이 아닌데도 집행위원회에서 구매 정책을 추진하려면 회원국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회원국이 적어도 유럽 차원의 공동 구매에 반대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2020년 여름만 해도 백신의 개발은 불확실했고 특히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된 백신 개발이 난해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었다. 회원국 입장에서는 새로운 영역의 불확실한 쟁점을 유럽이 담당한다는 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크지 않았다.
유럽은 주요 제약회사들과 협상에 나섰고 유럽연합의 백신을 선구매하여 충분히 확보하는 데 전반적으로 성공했다. 협상 과정을 종결하는 데 영국이나 미국보다는 늦었고 실제 백신이 공급되는 데도 상대적으로 늦었으며 일부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The Economist 2021). 백신의 공급 과정에서도 회원국 사이에 신경전에 벌이지는 일도 있었다. 이런 기술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유럽 집행위의 백신 공동 선구매 전략은 저렴한 가격에 다량의 백신을 확보하는 데 효과적이었고 그 결과에 대해 유럽 여론의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백신 배분의 정치
2020년 12월에 유럽은 백신 접종을 시작했고 2021년 상반기 빠른 속도로 시민의 접종을 실행했다. 백신의 정치에서 제기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동 유럽에서 뒤늦게 발생한 코비드19 환자의 폭발적 증가였다(The Economist 2021). 2020년 코비드19 확산은 주로 서유럽 중심이었기에 중·동 유럽은 상대적으로 준비가 부족했는데, 2021년 질병이 갑자기 확산하면서 충격에 빠졌다. 국가별로 예정된 백신이 중·동 유럽은 턱없이 부족했다.
헝가리나 체코 등은 급기야 중국이나 러시아의 백신을 도입하는 선택까지 하게 되었다(Kauffmann 2021). 유럽 통합에 대해 계속 비판적 목소리를 내 왔던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정부는 처음부터 저렴한 중국 백신을 활용을 권장했다. 체코의 경우 다급한 정부가 러시아 백신을 도입하겠다고 결정했다가 연합정부가 붕괴하는 정치 위기로 연결되었다. 연정 파트너였던 정당이 러시아 백신 도입을 반대하며 탈퇴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이들 중·동 유럽 국가의 상황 변화에 대해서도 연대의 원칙을 나름 적용해 대응했다. 사정이 나은 회원국들이 중·동 유럽으로 백신을 양보하는 합의를 만들어냈다(Malingre et Chastand 2021). 또 끝까지 새로운 배분을 반대하는 회원국의 의사도 존중했다. 원칙과 양보와 타협을 적절히 조화시키는데 상당 부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4. 보건 여권: 보건과 이동의 결합
2021년 7월부터 유럽연합은 시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조화롭게 재개하기 위해 보건 여권을 적용하고 있다. 보건 여권이란 유럽 차원에서 이동을 허용하는 기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이며 이미 2021년 3월 백신 접종의 초기 단계부터 유럽 집행위원회의 계획에 따른 결과다(Malingre 2021). 예를 들어 백신 접종 여부, 코비드19 검사 결과, 질병 병력 등을 담은 공동의 증명서를 만들어 이동을 쉽게 하자는 생각이다. 다만 회원국마다 이동을 허용하는 정책이 워낙 다르다 보니 어떤 정보를 여권에 담을지만 합의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다양한 변이의 발생으로 대응은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유럽 통합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유럽의 새로운 백신 권한이 사람의 이동에 관한 전통 권한과 결합하여 보건 여권이라는 또 다른 영역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코비드19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유럽연합은 보건 정책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다(Brooks and Geyer 2020). 지구적 차원의 전염병이니 회원국 차원에서 전담하는 보건 정책보다는 유럽 수준에서 대응을 마련하는 것이 기능적으로 더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런 기능적 수요가 실질적 권한으로 반영될 수 있었던 과정에 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개연성에 기초해 몇 가지 가설을 제공했을 뿐 정확한 확인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V. 재정 연방주의
2020년 7월 유럽연합은 코비드19 위기의 경제·사회적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7,500억 유로에 달하는 유럽 차원의 다년간 경제 지원 재정 패키지를 결정했다. 수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 정부의 코비드19 위기 대책에 비교하면 유럽의 지원 규모는 초라할 정도다. 회원국 차원에서 동원되는 위기 극복 재정 지원과 비교하더라도 유럽의 결정은 오히려 작은 규모로 돋보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코비드19 위기가 초래한 가장 극적인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니다(Ladi and Tsarouhas 2020). 유럽이 재정적으로 통합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출발점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 유로 위기의 경험
2015년 난민 위기의 전례가 코비드19 위기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듯이 2010년대 반복되었던 유로 위기의 경험은 보건 위기에 대처하는 중요한 기준과 배경으로 작동했다(Schimmelfennig 2014). 2010년 시작하여 2012년, 2015년 등 반복해서 유럽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유로의 위기는 유럽 통합의 불균형을 가시적으로 드러냈다(Pisani-Ferry 2014). 유럽은 유로라는 하나의 화폐를 보유하기에 같은 통화정책의 대상이나 재정정책은 각 회원국이 담당하기에 위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유럽은 1999년 유로라는 화폐를 출범시켰고 유럽중앙은행(ECB, European Central Bank)이 통화정책을 담당한다. 하지만 회원국마다 경제적 조건과 상황은 다르다. 유럽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제대로 작동하려면 회원국 사이의 차이를 조정해 줄 수 있는 공동의 재정정책이 있어야 한다. 경쟁력 있는 지역, 부자 회원국이 뒤처진 지역과 가난한 회원국을 돕는 재정 기제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연방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유럽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전자는 유럽 차원, 후자는 회원국 차원으로 분리되어 위기 발생의 원인이자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비판이 국제적으로 제기되었다.
통화·재정정책의 불균형은 유럽연합 내부의 지리적 불균형으로 반영되었다.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과 동유럽의 국가들은 재정적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으나 대개 남유럽의 국가들은 대개 만성 재정적자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안고 있었다. 재정적자를 의도적으로 추구한 것은 아니더라도 재정적자와 공공부채의 부담이 역사적으로 높았거나 유로 위기를 통해 악화된 상황이었다(Matthijs and McNamara 2015). 통화 및 재정정책에서 유럽 남북의 대조적 양상은 어쩌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된 일종의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 중심의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도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반복되는 화폐의 평가절하를 경험했고, 반대로 독일은 도이치 마르크의 평가절상을 반복했다. 이런 경향은 1979년 출범한 유럽통화제도(EMS, European Monetary Sys-tem)에서도 다시 확인되었다.
유럽이 단일화폐를 추진하면서 독일이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남유럽 정부의 ‘무책임한’ 지출로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는 현상이었다.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단일화폐의 추진을 결정하면서 독일은 강한 유로의 발판을 마련했다(Degner and Leuffen 2021).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추진하도록 조약에서 못을 박았다. 또 유로에 동참하려면 안정적인 통화·재정정책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국가들은 1990년대 긴축 정책의 노력 끝에 간신히 마스트리히트 기준을 충족시켰고, 유로 출범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독일의 관점에서 유로 출범 이후 남유럽 정부의 재정정책 기조가 느슨해진 것이 유로 위기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2010년대 독일은 남유럽 위기를 지원하면서 항상 더욱 강한 긴축 재정을 요구한 배경이다.
이때 제시된 해결 방안이 유럽 차원의 재정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회원국들의 국채가 문제라면 유럽이 공동의 채권(eurobond)을 발행하여 위험 부담을 분담하면서 위기를 넘기자는 제안이었다. 독일은 그 경우 재정 관련 남유럽 국가들의 도덕적 해이가 반복되거나 심화할 것이라며 명확하게 반대했다(Matthijs 2016). 달리 말해 유럽의 재정·통화정책 불균형은 남·북의 지리적 불균형과 중첩되면서 유로 위기의 원인 및 배경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2. 재정 패키지의 내용과 의미
2020년 7월의 재정 패키지는 지출 부분도 의미가 나름 있으나 재원 마련에서 획기적인 유럽 채권의 원칙을 세웠다는 점에서 놀라운 변화다(European Commission 2021a). 우선 지출을 살펴보면 다년간 예산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중장기 계획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유럽연합은 이미 다년간 예산의 원칙을 적용하여 시행하고 있었다. 다수의 회원국이 참여하는 정책 결정이라 중장기 계획이 없으면 매년 결정이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재정 패키지는 ‘일시적’ 위기에 대응하는 특별 예산임에도 중장기라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한 점이 특이하다.
재원 마련은 두 가지 방식을 동원한다. 하나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적용되었던 회원국 재정 기여의 원칙을 따른다. 다른 하나가 유럽 차원의 채권을 발행하여 필요한 회원국에 지원해 준다는 새로운 재원 마련 방식이다. 유로본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유로의 위기나 유럽 통합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번 재정 패키지의 재원 마련 방식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 치부될 수 있다. 그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수십 년 동안 재정 문제를 남유럽과 통합하기 거부하던 독일이 보여준 태도와 정책의 변화는 놀랍다(Malingre 2020).
3. 재정 통합의 정치
기존 유럽의 재정 통합과 관련된 회원국의 입장은 한편에 통합을 원하는 남유럽 국가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 통합에 반대하는 나머지, 즉 북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이 있었다(Busse et al. 2020). 2010년대 유로 위기란 남유럽의 위기였고, 재정 통합은 남유럽을 지원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나머지 모든 국가가 반대였다. 독일이나 북유럽은 원칙적으로 남유럽의 재정을 의심하며 통합을 반대했고, 동유럽은 자신들은 힘들게 긴축을 통해 간신히 유로에 동참했는데 발전 수준이 높은 남유럽을 도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2020년 코비드19 위기의 국면에서 재정 통합 논의는 약간 다른 형국이었다. 동유럽 국가들이 잠재적인 수혜지역으로 유로 위기 때와는 다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덴마크,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전통적인 정책 노선에 따라 공동 채권을 통한 재정 통합에 반대했다(Maillard 2020). 결정적인 역할은 결국 독일의 태도 변화다. 왜 독일은 수십 년 계속된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를 결정했을까.
유로 위기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남·북유럽의 균열은 코비드19 위기에서 거의 비슷하게 중첩되어 나타났다(Krastev and Leonard 2021). 재정 패키지를 결정했던 2020년 7월 가장 심각하게 보건 위기를 맞았던 것은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남유럽 지역이었다. 보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적 봉쇄라는 극약처방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바로 경제 위기로 이어져 10% 규모의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이미 유로 위기를 겪으면서 긴축 재정으로 장기간 고생한 남유럽 국가들이 코비드19로 상황이 악화하면 극단적으로 유럽을 탈퇴하고, 유럽 통합이 총체적으로 붕괴하는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실제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정치 변동은 이런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2018년 기존 정치세력을 누르고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리가와 독특한 포퓰리즘 성향의 오성운동이 연합하여 집권하는 이변이 발생했다(The Economist 2018). 스페인도 빈번하게 반복되는 총선에서 극우 반유럽 민족주의 세력인 복스(Vox)가 부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코비드19의 정치적 효과를 예단할 수는 없었으나 심각한 위기가 반(反)유럽 정치세력의 강화를 가져올 개연성은 높았다. 물론 독일에서 정책 변화가 정확하게 어떤 동기에 의해 이뤄졌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이런 유럽 정치의 상황과 변화는 독일에 영향을 행사했을 것이다.
재정 통합에 부정적이던 국가군에서 독일이 빠지자 나머지 회원국은 고립되는 모양새였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 등이 반대했지만 유럽연합의 정치에서 자주 볼 수 있듯 나머지 대다수가 원하는 정책에 끝까지 비토권을 행사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은 재정 지원에 조건을 부과해야 한다는 타협안으로 물러섰고 결국 유럽의 패키지는 합의되어 결정된 것이다.
코비드19 위기는 백신이나 재정 지원 패키지 등 규모는 그리 크지 않더라도 전략적인 분야에서 유럽연합의 역할 강화를 가져왔다. 일부 언론은 미국 역사를 들먹이며 유럽의 ‘해밀턴 모멘텀’이 왔다고 흥분했다. 미국의 연방정부가 독립 초기 재정적 기초를 마련했듯 유럽연합도 이제 독자적인 재정 연방주의를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었다는 해석이자 희망이다. 공동 채권의 원칙이 앞으로 발전할지 아니면 한 번의 기술적 혁신으로 그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재정 통합이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고 확산한다면 코비드19 위기가 진정한 재정 통합의 출발점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
VI. 결론: 코비드19 위기는 유럽 통합의 촉진제
코비드19 위기는 공교롭게도 2020년대의 시작과 동시에 닥쳤다. 유럽연합은 2010년대 이미 붕괴가 빈번하게 언급되는 존재론적 위기의 상황이었다. 2010년대는 글로벌 경제 위기의 여파로 발생한 유로 위기와 함께 보낸 10여 년이라고 할 수 있다. 1999년의 유로 출범은 주권국가의 상징인 화폐를 하나로 통합했음을 알리는 유럽의 대표적 결실이었다. 이 같은 유로권의 붕괴 가능성은 유럽 통합의 종말이라는 시나리오로 통했다.
2015년의 난민 위기도 유럽의 분열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심각한 사건이었다. 난민 통제를 위해 유럽은 이동의 자유라는 업적을 일시적으로나마 포기해야 했다. 난민 위기는 비교적 신속하게 해결됐으나 유럽이 자랑스럽게 내걸었던 인권 세력으로의 정체성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권위주의적 터키라는 국가에 난민의 통제를 ‘하청(下請)’했기 때문이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은 유럽 통합의 불가역성을 무너뜨리는 충격이었다. 그것도 중소 규모의 회원국이 아니라 유럽의 한 기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강대국의 탈퇴였기에 충격은 더 심하게 다가왔다.
유로, 난민, 브렉시트라는 2010년대의 3대 위기의 효과가 반드시 유럽 통합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기가 유럽 통합 과정을 더 탄탄하게 만든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유로 위기를 통해 유럽중앙은행의 위상은 더욱 강화되었고(McNamara 2012), 유럽은 은행 연합(Banking union)과 같은 추가의 정책적 통합을 추진할 수 있었다. 난민 위기는 역외 터키로의 정책 하청의 미봉책으로 종결되었고 회원국 사이의 분열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막중한 난민 부담의 책임을 도맡았다는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인식은 널리 퍼졌다. 브렉시트로 영국의 탈퇴는 그 과정에서 영국이 보여준 난맥과 위기로 유럽과의 관계 청산이 무척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van Middelaar 2020). 따라서 남은 회원국의 탈퇴 욕망을 오히려 줄여준 측면이 존재한다. 게다가 유럽 통합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던 영국이 빠짐으로써 유럽연합 내 결정 과정이 수월하고 단순해졌다.
코비드19 위기는 기존의 심각한 3대 위기에 더해진 위기였다(Wolff and Ladi 2020). 이 글을 통해 잠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현상은 유럽 통합은 위기의 여파로 중대한 어려움을 겪으나 위기를 매개로 새로운 정책으로 권한을 확대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보건 위기로 인해 격리와 봉쇄가 일반화되는 과정에서도 유럽은 사람들의 역외 이동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고, 보건 여권 논의를 조정하면서 여전히 이동 자유의 수호자 역할을 맡았다. 백신의 구매 정책에서도 공동 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기존 약품 인허가 권한을 넘어 유럽 시민의 건강 관리라는 포괄적 임무로 영역을 넓혔다. 끝으로 위기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재정적 패키지를 마련하면서 공동 채권이라는 기술적 혁신을 포함했다. 제한적 변화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런 작은 정책의 혁신이 향후 거대한 변화로 연결될 수 있음을 유럽 통합의 역사에서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코비드19 위기는 공동의 대응책 마련을 통해 유럽 통합을 부추기는 촉진제의 역할을 하였다. 도입부에서 소개했듯이 유럽은 위기에 대한 해결책의 집합이라는 구조적 설명과 행위자들의 다양한 계산 및 전략이 해결책의 마련으로 연결된다는 미시적 분석을 이 글에서 동시에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임기 초기에 취약한 ‘민주적’ 정통성을 극복하려는 집행위원회의 노력과 수십 년 전통의 정책 패러다임 변화를 수용한 독일 정부의 태도가 코비드19 위기 대책에서 결정적이었다(Wieder et Boutelet 2020). 이 글에서는 시간의 제약으로 깊은 연구와 분석이 부족했지만 향후 추가 연구로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다.
위기가 초래하는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공동 대응의 필요성은 거시적으로 동아시아나 세계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동아시아나 세계가 보여주는 모습은 협력보다는 분산된 대응이고, 때로는 대립하는 모습이다. 구조·기능적 필요 못지않게 행위자들의 전략에 대한 미시적 분석이 필요한 것은 물론, 행위자들이 행동하는 제도적 틀을 검토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 글에서는 거시와 미시를 연결하는 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거의 없다. 다층정치구조라는 사실만 소개하나 실제 행위자의 전략, 행동과 결정을 이해하려면 이 부분의 설명이 결정적이다. 특히 동아시아나 세계 차원의 행위자들과 비교 분석을 위해서는 말이다. 덧붙여 유럽은 이미 ‘유사(類似) 국가적 제도와 구조’를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기에 연방 국가 미국과의 비교가 이해의 열쇠를 제공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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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조홍식_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정치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정치경제, 유럽지역연구, 정체성의 정치 등이다. 대표 저서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 《하나의 유럽: 유럽연합의 역사와 정책》, 《유럽통합과 ‘민족’의 미래》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하은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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