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특별논평 시리즈] ① 반도체 인공지능 기술 경쟁과 2024년 세계정치 변화
ISBN 979-11-6617-694-4 95340
1. 기술과 세계정치
반도체와 인공지능 기술이 세계정치 무대에서 주요 화두가 되고 있다. 반도체 수출 규제는 미국 대중전략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며, 생성형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등 첨단기술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전 세계가 인공지능의 군사적 활용에 주목하고 있다. 기술은 근대 이후 세계정치 변화의 주요 동인이었지만 배경이나 외재적 변수로 인식되었고 기술 자체가 세계정치의 주인공이 된 경우는 드물었다. 1990년대 이후 인터넷과 스마트폰 확산에 토대하여 디지털 변환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회 변화를 이끄는 기술의 역할이 보다 가시화되고, 기술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확대되고 깊어졌다. 이러한 현실 변화 속에서 ‘기술과 사회의 앙상블,’ ‘인간 비인간의 행위자-네트워크,’ ‘기술과 사회의 공동생산 · 공진화 · 상호구성,’ ‘기술정치(Techno-politics)’ 등 기술과 사회변화의 역동적 관계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다양한 개념들이 출현하였다. 미중 기술경쟁의 전개는 기술을 세계정치 무대 중앙으로 불러들이며 기술과 공진화하는 사회의 범주가 세계정치 수준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세계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기술에 대한 일정 수준의 지식이 요청되며, 동시에 기술 발전의 내용과 방향 및 가치가 세계정치의 역동적 전개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술은 세계정치 무대에서 군사안보, 경제, 규범과 문화의 영역을 넘나들며 안보와 번영과 가치가 추구되는 틀과 내용을 새롭게 바꾸어 가고 있다. 국가들은 기술 변화로 세계정치의 판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진단하면서, 무엇으로 어떻게 안보를 지켜나가야 하며 번영을 지속할 수 있는지, 어떤 가치와 정체성을 지키며 새롭게 형성해 나가야 하는지 모색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세계정치의 장에서 다양한 기술 가운데 특히 파급효과가 큰 기반기술로서 인공지능과 반도체에 관심이 모아져 왔다.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 기업 팔란티어(Palantir)의 알렉스 카프(Alex Karp)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포화를 뚫고 키이우를 방문한 첫 IT기업 대표였다. 팔란티어는 오사마 빈 라덴 추적 작전 “넵튠 스피어(Neptune Spear)”에서 그의 은신처를 찾는 데 기여한 숨은 공신이었다. 팔란티어 대표의 우크라이나 방문은 이 전쟁에서 빅데이터와 각종 인공지능 무기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드러내는 징표였다. 실제로 팔란티어는 상용 위성, 열 감지기, 소셜미디어, 정찰 드론, 스파이 등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종합 분석하여 러시아군 위치를 정확히 짚어 줌으로써 열세인 자국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러시아군을 상대하여 전투를 지속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왔다. 스타링크 위성 인터넷 서비스와 모바일 전자정부 애플리케이션 디아(Diia)의 활약 역시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지난 30년 간의 고성장 시대가 끝나고 팬데믹과 지정학적 갈등으로 세계경제 침체가 지속되는 가운데 선진국들이 생산성 저하, 고질적인 인플레이션, 노령화와 노동력 감소 등의 문제를 겪고 있다. AI의 경제적 활용은 청정에너지와 함께 세계경제를 다시 성장의 트랙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분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맥킨지 보고서는 생성형 AI의 출현으로 사무직 노동자 작업의 약 70%가 자동화되면서 1년에 독일 GDP 규모에 맞먹는 4조 달러 이상의 경제가치가 창출될 것으로 예측하였다.[1] AI 기술 발전으로 수동적인 디지털 봇(bot)과는 차별적인, 다양한 데이터를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AI 개인비서(agent)의 도래가 현실화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AI 비서의 하드웨어적 구현이 앱의 형태가 될지 아니면 핀, 안경, 목걸이, 홀로그램 등 새로운 디바이스로 갈 것인지, 다양한 데이터들이 어떻게 저장되고 분석되고 활용될지 등등을 놓고 치열한 혁신 경쟁이 진행 중이다. 현재 AI의 경제적 활용은 야구로 보면 1회초 첫 타자가 공을 친 상황으로 비유된다. AI 경제 확산을 위해 저비용의 고성능 칩 개발, 환각(hallucination) 혹은 작화(confabulation)가 아닌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AI 아키텍처 설계, 개인정보 보호, AI 비서에게 주도권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도 함께 찾아 나가야 한다. 이제 막 시작된 게임이 9회말까지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로운 가운데 각 국가와 기업들은 게임에서 안타나 홈런을 치기 위해 도전하며 경쟁하고 있으며 게임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규칙들을 만드는 데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24년에는 1월 대만 총통 선거를 시작으로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세계 약 40개국에서 총선 또는 대선을 치른다. 정보 생산과 유통에서 AI가 휘두르는 영향은 막강하다. 특히 손쉽게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가짜뉴스들의 홍수와 사이버 공작을 통한 상대국 선거 개입은 이제 당연한 현실이 되었다. 가짜뉴스나 선거 공작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지만, 이것이 AI와 결합되면서 진짜 같은 가짜들이 태연하게 등장하고 국내 선거가 국제적으로 치러지는 양상마저 보인다. AI 알고리즘으로 선택된 정보들을 소비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견해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이기보다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어, 상식과 관용과 다양성에 토대하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 교수는 현재 AI 발전 상황을 진단하면서 인간이 지능 발전 역사의 한 단계가 되고 있으며 머지않아 AI가 인간을 통제하고 넘어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2] AI의 통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AI가 군사안보 경제 정체성에 이미 전방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음은 명백하다. AI가 제공하는 편리함과 효율성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동시에 AI에 내재된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며 AI 규범과 글로벌 AI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은 이미 AI법을 제정하였으며, 미국 바이든 행정부도 AI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명령을 발표하였고, AI에 대한 G7 국제 지도원칙과 국제행동강령이 마련되었다. 핵무기나 원자력발전을 관리하는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NPT)이나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와 같은 방식, 유엔 산하 AI 기구 등 다양한 제안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 2024년에는 텍스트 이외 이미지와 음성을 결합한 대형멀티모달 AI(Large Multi-modal AI) 기술의 경쟁적 발전이 진행되면서 세계 군사안보문화 영역의 변화가 가속화되는 한편, AI 발전 방향과 위험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과 논의도 활발해질 것이다.
2. 회고와 전망
기술과 세계정치 관점에서 2023년을 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역시 생성형 AI의 활용이 본격화되면서 세계정치 무대에서 AI를 둘러싼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동시에 AI 관련 규범과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데이터 기반 학습과 패턴 인식을 중심으로 한 머신러닝이나 인공신경망에 토대하여 특징 추출과 분류를 유기적, 계층적으로 학습한 결과물을 생산하는 딥러닝의 경우 주어진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류하거나 예측하는 수준에서 작동하였다. 이와 달리 생성형 AI는 문제 해결을 위해 데이터를 찾아서 학습하여 능동적으로 결과물을 제시하는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이 발휘되면서 일반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 쪽으로 한 단계 더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2022년 11월 말에 출시된 ChatGPT는 불과 한두 달 만에 1억 명을 넘는 사용자를 확보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ChatGPT를 출시한 오픈AI에 따르면 2023년 말 현재 ChatGPT 주간 활성 이용자는 1억 명이고 포춘 500대 기업의 92%가 ChatGPT를 사용하고 있다. 오픈AI가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구글도 올해 2월 AI 챗봇 바드(Bard)를 공개하였고 최근 대형멀티모달모델 제미나이(Gemini)를 내놓았으며, 메타와 IBM을 비롯한 50개 이상 AI 기관들은 AI 동맹을 결성하고 오픈소스 생성형 AI를 제공하며 ChatGPT를 바싹 추격하고 있다. 중국 역시 바이두가 ChatGPT의 라이벌로 어니봇을 발표한 이후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텐센트, 센스타임 등 중국 AI 기업들이 12개 이상의 생성형 AI를 출시하였다.
현재까지 생성형 AI의 주도권은 미국이 쥐고 있다. 생성형 AI는 그래픽칩셋(GPU), 클라우드, 슈퍼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작동하는데 각 분야에서 미국은 대체 불가능한 우위를 보이고 있다. 미국 기업 엔비디아(NVIDIA)가 글로벌 GPU 시장을 지배하고 있으며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이 전 세계 클라우드 시장의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전세계 슈퍼컴 성능을 100%로 보았을 때 미국이 45.8%로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일본이 12.5%, 중국이 8.9%로 뒤를 잇고 있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미국의 절대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중국 AI 역량에 주목하는 이유는 막대한 데이터, AI 기초연구 및 특허 축적, 정부의 지원 등과 함께 AI 발전 과정에서 다양한 경로가 열려 있어 중국이 모방에 토대하여 차별적인 AI 모델을 구현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국 AI 발전에서 정부의 역할은 양가적이다. 중국 정부는 AI 기술의 최대 수요자이자 지원자이다. 다른 한편 중국에서 발효된 생성형 AI 산업 관리 임시규정은 AI 서비스가 중국 사회주의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고 명시하였고 생성형 AI가 정부의 의견에 반하는 대답을 내놓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AI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미국은 첨단기술 부문에서 중국과 최대 격차 유지 필요성을 느끼고, 민군 이중용도 기술에 대한 수출 규제를 계속 확대해 왔다. 특히 AI 반도체는 대중 수출통제의 핵심으로 설정되어 칩 자체의 수출 금지는 물론 칩 제조에 필요한 장비도 규제 대상이 되어 왔다. 2023년 초반 EU에서 대중전략이 경제의 분리를 의미하는 디커플링(decoupling)이 아니고 위험을 완화하는 디리스킹(de-risking)임을 밝힌 이후 미국 고위관료들도 연이어 미국 역시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 전략을 추구한다고 표명하였다. 2023년 5월부터 미국 기업인들은 물론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 국장, 아태차관보, 국무부, 재무부, 상무부 장관의 중국 방문이 이어졌고 9월에는 미중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양국의 소통 재개에는 다양한 배경이 논의된다. 양국 경제의 상호의존성이 생각보다 깊고 양국 모두 경제 회복을 위해 상대국과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미국 기업들의 대중 수출 통제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일론 머스크, 빌 게이츠, 젠슨 황 등의 중국 방문 및 미국의 대중 규제 비판 발언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일부 싱크탱크에서 중국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대선을 앞두고 미국의 대중 전략을 조정할 필요도 제기되었다. 미국 기업인과 관료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미중 정상회담이 진행되면서 미중 갈등이 다소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일각에서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반도체와 인공지능 부문에서 대중 수출 제재 완화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중 수출 규제의 범위가 확산되고 세밀해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2022년 말 미국 정부는 특정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존 수출통제 조치를 18나노미터(n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nm 이하 로직칩 등 통제목록 중심으로 바꾸면서 통제 대상을 확대하였다. 2023년 8월 미국 정부는 중국의 첨단 반도체, AI, 양자컴퓨터 등 3개 분야에 대해 미국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하였다. 특히 군사적 사용을 위해 설계된 AI, 반도체 설계 자동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군사 통신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양자암호가 대상이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나 기업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2023년 11월 다시 한번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확대 보완 조치를 발표하였다. 기존 수출통제에 대해 중국이 해당 조치를 우회하려는 시도가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중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 및 AI 연구 수준 제고를 견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 AI 기업들이 미국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감시망 밖에 반도체 제조기지를 구축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울러 기존에는 193nm 미만 파장을 가진 광원(EUV)을 사용하는 장비만을 통제했으나, 본 조치에서 193nm 이상 파장을 가진 광원(DUV)을 사용하는 노광장비를 명시적으로 수출통제 대상에 포함하여 규제 범위를 확대하였고 특히 AI와 관련되는 첨단 반도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였다.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의 효과, 특히 미국 기업들의 매출 감소와 연구개발 투자 감소에 대한 논쟁과 지속 가능성 여부에 대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는 지속되고 보완되고 강화되었다.
상무부는 이제까지 주로 첨단 반도체 칩을 규제해 왔던 것에서 범위를 확대하여 소위 레거시 칩(legacy chip)으로 알려진 성숙반도체 부문에서 중국의 부상 효과에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2024년 1월 미국 기업들이 성숙반도체를 어떻게 공급받고 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중국 기업들이 과거 철강이나 태양광에서 가격 경쟁력을 토대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면서 시장 지배자가 된 사례와 같이 성숙반도체 부문에서 유사한 상황이 진행된다면 이 역시 안보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미국이 성숙반도체 시장에서 중국 위상 공고화를 저지하고 통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조사 결과가 나오면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되겠지만 미국이 중국의 성숙반도체 공급을 제재하는 방식이 반덤핑이나 세이프가드 등을 포함한다면 양국 무역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해 볼 수 있다.
미국은 수출통제와 아울러 자국 첨단 반도체 제조역량 강화를 위해 반도체법을 통한 지원을 시작하였다. 2023년 3월 상무부는 자국 보조금 수혜기업의 국내 생산시설 확장 및 우려대상국 기업과의 기술협력을 제한하는 가드레일 세부 규정을 발표하였다. 아울러 자국 반도체 제조 역량강화나 수출 통제 확산을 위해 다양한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해 왔다. 일본과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기업들은 2023년 하반기부터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 대상을 추가하였다. 미국은 인도,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반도체 제조 및 패키징 협력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컴퓨팅은 중국몽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미국이 수출규제를 강화한 것에 대해 중국은 “무역과 기술 문제를 무기화하고 있다,” “즉각 잘못된 행동을 멈추기를 촉구한다”며 “중국은 모든 필요한 조처를 해 중국 기업의 합법적인 권리를 단호히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혔지만 실제로 중국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으며 크게 두 갈래의 흐름으로 대응하였다. 첫째, 중국 역시 수출입 통제나 규제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2023년 5월, 중국은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Micron)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며 주요 국유기업, 통신사업자, 클라우드에 제품 구매 중단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 기업들이 마이크론 제품 구매를 중단하였다. 8월부터 중국은 수출규제 대상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갈륨, 게르마늄과 화합물을 포함하였다. 둘째, 기술자립을 위한 다양한 지원을 강화한다. 중국은 미국의 수출통제 이후 구체적인 기술 리스트를 만들고 이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면서 기술 및 산업 생태계 자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23년 과학기술 자립 자강을 위해 중국 공산당 산하에 과학기술 부문 정책을 주도할 ‘중앙과학기술위원회’가 신설되었다. 시진핑이 전국인민대표대회 지역 대표단 회의에서 “우리가 예정대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전면적으로 건설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과학기술의 자립과 자강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였고 과학기술 자립을 이루기 위해 당 중앙이 직접 진두지휘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중국은 2014년과 2019년에 조성된 1,400억 위안, 2,000억 위안의 국가반도체펀드를 넘어서는 3,000억 위안 규모의 3기 반도체펀드를 준비하고 있고 특히 반도체 제조 장비를 지원할 것으로 알려졌다. 첨단 반도체 부문에서 어려움에 봉착한 중국은 부가가치가 낮지만 전기차, 사물인터넷 등의 성장으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레거시 반도체와 첨단 패키징 육성 및 장비와 소프트웨어의 자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쉽지 않겠지만 2024년에 미국이 첨단 반도체에 이어 레거시 반도체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는 경우 일정 수준의 시장 지배력을 확보한 중국이 어떻게 대응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2023년 화웨이가 자체 제작 7나노 프로세서칩을 장착한 최신형 프리미엄 스마트폰 메이트60프로를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현재 중국이 첨단 반도체칩을 합리적인 비용으로 대량 생산하는 것은 어렵지만, 첨단 반도체 칩의 제조는 중국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카드이며 미국의 거센 견제에도 불구하고 중국 기업이 절실하게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중국이 반도체 부문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최첨단 반도체 칩의 안정적 공급, 반도체 공급망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 및 장비 부문으로 지속적인 업그레이드, 한국과 대만 기업을 따라잡고 최첨단 반도체를 중국 내에서 제조하는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중국이 지속적으로 노력해 갈 것임은 자명하다. 중국이 얼마나 빠르게 이를 달성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2024년 기술과 세계정치 변화를 전망할 때 가장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가 미국 대선이다. 바이든 정부의 경제안보 정책의 키워드는 공급망과 첨단기술이며 이는 소위 3P 정책- 첨단제조 역량강화 지원(promotion), 수출통제(protect), 기술동맹(partnership) 정책으로 추진되고 있다.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 수출통제는 지속되겠지만 첨단제조 지원이나 기술동맹 양상에는 큰 변화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첨단기술 우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3P 정책은 한 세트로 작동해야 하는데 이 가운데 한 축이라도 무너진다면 결과는 중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3P 정책이 지속되는 경우에도 보조금 지급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수출통제에 대한 피로감이나 반발의 증대, 동맹국들의 동상이몽 등등 문제가 드러나면서 장기적으로 어떻게 이 정책들을 끌고 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중국의 경우도 기술혁신 역량강화와 기술자립을 위한 지원 정책들과 노력들이 과연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있을지가 문제다. 시진핑 및 공산당 권력 강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것이 시장 활성화 및 기술혁신 친화적인 사회문화 확산과 공존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으며, 중국은 현재 양자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역사적으로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2024년에도 기술 부문에서는 미중 협력보다는 경쟁과 갈등이 압도할 것이며 반도체 인공지능 기술 경쟁과 함께 규범과 거버넌스 영역에서 갈등이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폴 케네디(Paul Kennedy)는 35년 전 그의 저서 『강대국의 흥망성쇠』(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를 통해 세계정치에서 국가 간 불균등한 성장률에 따른 생산 및 경제력 분포 변화 및 패권국의 과대팽창(imperial overstretch)으로 인한 패권 전쟁과 교체를 주장하였다. 그는 2023년 발표한 글에서 향후 수십 년 동안 강대국으로 불릴 수 있는 국가를 미국, 중국, 러시아, EU, 일본, 인도 6개국으로 꼽으며 이 국가들 간 갈등은 지속되겠지만 당분간 거대한 세력변동은 없을 것으로 예측하였다.[3] 그는 중국이 15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GDP를 추월한 국가이고 이것의 지정학적 의미가 적지 않지만 중국의 내적 문제들-낙후된 농촌, 높은 청년실업률, 높은 식량 및 에너지 수입 의존도, 부동산 버블, 환경오염 등등-을 지적하면서 중국 부상에 유보적인 듯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미국의 경우 압도적인 군사력, 우월한 기술력과 고등교육 체제, 달러의 힘에도 불구하고 세계정치에서 상대적 경제력 분포의 변화나 권력 이전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상대적 쇠퇴를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온 세계 구석구석까지 뻗쳐 있던 미국의 이해와 관심 가운데 어디부터 축소해 나갈 것인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술과 세계정치 관점에서 폴 케네디의 주장은 미국이 국익과 관련되는 지정학적 공간을 축소하고 재설정함과 동시에 첨단기술 우위 유지를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계속해서 안정된 질서 속에서도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행하는 조짐들은 있을 것이나 현재 우리로서는 정확히 언제부터 다른 시대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질서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질서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 1932년 군축회담 실패, 1933년 독일 히틀러 집권 등 가운데 정확히 어디인지 짚기 어려운 것처럼. 2024년은 미국 주도의 질서가 유지되면서 동시에 약해지는 흐름이 함께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국 우위의 흐름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지만 이 속에서 중국과의 갈등과 경쟁은 더 치열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3. 한국의 기술외교 전략
미중 기술경쟁으로 인한 경제기술안보 부상으로 현재 국가들은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여 대응하고 있다. 전략의 구체적 내용은 국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공급망과 첨단기술을 키워드로 하여 첨단기술 역량 제고, 공급망 안전성 강화, 기술동맹 강화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도 첨단기술, 특히 반도체 부문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공급망 안전성 확보를 위한 모니터링과 대응체제 구축, 한미 첨단기술 협력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1992년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이후 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개최하며 협력 어젠다를 모색해 왔고, 개별 기술 차원에서는 한미 원자력협정이 체결되어 양 국간 협력이 지속되어 왔다. 미중 기술갈등 심화와 함께 낮은 수준의 간헐적인 협력이 보다 전략적이고 지속적인 협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현재 특히 첨단기술 부문에서 여러 채널을 통해 미국과의 협력이 강화되면서 안보 중심의 한미 동맹이 기술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삼성의 미국 반도체 파운드리 투자가 진행 중이고 양자정보과학기술협력, 아르테미스 협정(Artemis Accords) 등이 체결되었으며 최근 차세대 핵심신흥기술 대화(Next Generation Critical and Emerging Technologies Dialogue)가 신설되어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바이오 등에서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반도체 부문에서 설립 중인 미국 국립반도체기술센터(National Semiconductor Technology Center: NSTC)와 한국 첨단반도체기술센터(Advanced Semiconductor Technology Center: ASTC)를 포함하여 민관 연구 기관 간의 협력을 강화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공동연구 지원 기회를 확대하며, AI 분야에서 미국은 한국이 내년 주최 예정인 미니 AI 화상정상회의, AI 글로벌포럼, 인공지능의 책임 있는 군사적 이용에 관한 고위급회의(Responsible Artificial Intelligence in the Military domain Summit: REAIM) 등에 협력하고, AI 작업반을 구성하여 국제표준, 공동연구, 정책 간 상호 호환성 등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첨단기술 부문에서 미국과의 협력 강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미국은 반도체 인공지능 기술 부문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어 미국 기업들과의 협력 없이 한국 반도체 인공지능 기술혁신 역량 강화는 불가능하다. 미국과의 협력을 중심에 두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국의 압도적 우위 속에서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찾기 쉽지 않아, 협력이 형식적이지 않고 실질적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 어젠다를 모색하고 제안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아울러 양국의 이해가 모든 부문에서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국이 협력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와 대응이 필요한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야 한다. 예컨대 미국이 반도체 제조의 중심이 될 때 한국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을 어느 부문에서 지속할 수 있을지 장기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인공지능 부문에서 미국의 칩과 클라우드가 한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미국 플랫폼 기업의 압도적인 영향력 하에서 한국 AI 산업이 어떻게 발전해나갈 수 있을지 한국형 AI 발전 모델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미국의 첨단기술 정책은 국경을 넘어 한국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모니터링하면서 사안별로 한국 기업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 정보력과 협상력의 업그레이드 및 민관 협력체제 구축이 필요하다.
미국과의 협력 강화로 첨단기술 부문에서 중국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 첨단기술 부문은 미중 전략 경쟁의 핵심인 군사기술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미중 디커플링 추세가 완화되기 어렵다. 미국과의 첨단기술을 강화하는 가운데 중국과 비첨단 기술이나 기초과학 부문에서 협력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런 메시지를 조심스럽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은 극단적 대치보다는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도 일종의 역할 분담을 통해 중국 전문가, 친중 정치인 및 경제인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한 소통을 강화하며 대중 외교를 이어가야 한다.
첨단기술에서 한미 협력 강화가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 약화로 진행되지 않도록 첨단기술 부문에서 다자 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 반도체 부문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대만, 일본, EU의 상호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각국의 기업들이 교차 투자하는 가운데 미국-일본-대만의 라인업이 형성되고 있다. 우리 협력의 중심이 미국이 되는 것은 맞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이고 동시적인 다자협력체제 구축이 필요하다. 일본은 물론 대만, EU, 인도, 이외 인도-태평양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협력 어젠다를 모색하고 협력을 발전시켜 가야 한다.
미중 기술경쟁 시대에 우리의 첨단기술 역량 강화와 이를 위한 외교적 틀을 짜고 지원하는 것이 한국 기술외교의 핵심 내용이다. 첨단기술이 가장 중요한 외교 자산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기술과 외교의 간극이 크다. 과학기술 부문은 기존 과학기술 국제협력의 틀로 기술외교를 인식하고 있으며 외교 부문은 기술에 낯설어 기술외교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과학기술 국제협력이 보다 전략적인 과학기술외교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이라는 내용과 외교라는 틀이 상호 침투하여 융합되어야 한다. 과학기술과 외교가 한국의 세계 정치적 위상 제고와 비전을 구심점으로 하여 통합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리더십과 거버넌스의 모색이 요청된다. ■
[1] McKinsey. 2023. “The economic potential of generative AI: The next productivity frontier.” June 14. https://www.mckinsey.com/capabilities/mckinsey-digital/our-insights/the-economic-potential-of-generative-ai-the-next-productivity-frontier (검색일: 2024. 1. 2.)
[2] Lambert, Harry. 2023. “Is AI a danger to humanity or our salvation?” The New Statesman. June 21. https://www.newstatesman.com/long-reads/2023/06/men-made-future-godfathers-ai-geoffrey-hinton-yann-lecun-yoshua-bengio-artificial-intelligence (검색일: 2024. 1. 2.)
[3] Kennedy, Paul. 2023.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redux.” The New Statesman. September 20. https://www.newstatesman.com/ideas/2023/09/rise-and-fall-of-great-powers-redux-paul-kennedy (검색일: 2024. 1. 2.)
■ 배영자_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담당 및 편집: 박한수_EAI 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ext. 204) | hspark@eai.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