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논평] 새 정부의 대중 통상정책 방향
ISBN 979-11-87558-76-7 95340
[편집자 주]
제2차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연차총회가 오는 6월 16~18일간 제주도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AIIB는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구축을 목적으로 2016년 1월 중국의 주도 하에 설립된 다자간 개발은행입니다. 이번 총회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내에서 개최되는 첫 대규모 국제행사로, 새 정부의 대외정책을 가늠할 첫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글로벌 통상환경에서 ‘팍스 시카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면서, 중국의 대외통상정책 방향이 단순한 지역개발과 투자촉진을 넘어 아시아 지역의 화합과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한국이 촉매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자연스럽게 사드 보복의 출구전략을 모색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대통령 탄핵이란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세계로 빠져나온 대한민국의 통상정책의 방향은 지난 정권의 정책을 철저히 반성함으로써 수립될 수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실리외교가 가장 요구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국내정치의 연장선상에서 통상외교가 자행되어 왔다. 특히 대북 압박정책의 수단으로 통상정책을 무의미하게 희생한 점은 아마추어적인 통상정책 결정체제의 문제점까지 보여준다. 북한의 핵무장이 진행되는데 국내정치적 고려가 작용해 통일대박론을 끄집어내고 흡수통일 기세로 몰아갔다.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중국의 협력을 이끌어 낸다는 명목 하에 2014년 11월 대통령의 방중일정에 맞추어 한-중 FTA 협상을 서둘러 타결했다. 한-중 FTA 조기 체결이 중국으로 하여금 우리의 대북 압박전략에 협조하도록 유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중 경제통합이 북한을 자극해 핵무장을 가속화시킨 측면이 있다. 한-중 FTA 자체의 경제적 효과가 크게 발생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 세계경제가 어렵더라도 한-중 FTA의 1년 차 성적표(FTA 혜택품목 수출 -4% 감소)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미래 수십 년 간의 한-중 통상관계를 좌우할 비관세 장벽, 불법어업, 서비스 개방 등의 이슈를 모두 빼버리고 자동차•철강•석유화학제품 등 주력 수출품목을 제외한 채, 정치적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설익은 과일’을 따먹듯이 한-중 FTA를 맺어버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북관계가 더 이상 악화될 수 없을 만큼 악화된 데다 북한 핵문제가 지구촌 최대 현안 중 하나로 급부상한 것은 앞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도 커진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실망한 박근혜 정부는 친미 안보노선으로 복귀해 사드배치의 길로 내달렸다. 뒤이어 벌어진 탄핵정국에서 아무리 보수진영의 결집을 위해 안보논리가 필요하더라도 사드배치를 조기에 마무리하면서까지 대중협상의 레버리지(leverage)를 한꺼번에 상실했고, 중국의 사드 무역보복을 초래했다. 무수한 한국 예능인들이 힘들여 쌓아 올린 한류열풍의 중국 진출이 하루아침에 막혀버렸고, 한국행 전세기 운항과 여행알선 업무가 중지됐는데도, 정부는 안보를 위해서는 통상의 이익쯤은 희생해야 한다는 단순 논리로 일관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국제규범 준수에 앞장서고 있는 중국이기에 한국에 대한 사드 보복은 WTO 협정 및 FTA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중국이 교묘하게 국제규범 위반을 피해서 사드 보복을 시행하고 있는데, 정부는 WTO 협정에 따라 중국을 제소하겠다고 대응해왔다. 미국에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방에 대해서도 통상보복을 공언하고 있는데 떠나는 정권과 맺은 대형 군수계약을 조기에 마무리해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대미 통상협상 레버리지를 날려버린 측면도 있다. 이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사드배치 비용 10억 달러를 한국에 요구하며 한-미 FTA 재협상과 연계시키는 사태로까지 이르렀다. 정확한 안보와 통상 간의 연계 효과를 분석할 능력도 없고, 실리통상외교의 독립적 가치를 인정할 의지도 없는 것이 정부 통상정책체제의 현주소다. 그래서 모든 것이 꼬이고 꼬여 대중관계는 물론,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도 모두 악화됐으며, 해결해야 할 통상 현안만 산적해있다.
글로벌 불확실성 시대에 밀려오는 대외통상정책 현안들에 대해 전문적이고 장기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통상정책 결정체제의 기능적 위치를 정립하는 일이다. 각 정부부처의 관련 정책기획 기능을 강화하여 전문적이고 하의상달형의 정책이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각 부처의 통상업무를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조정하고 외부 입김으로부터 기능을 보호해 낼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정부조직법이나 통상절차법 자체에 구축해야 한다. 구체적 정책은 장기적 시각에서 독립적 심의•자문기구에서 토론을 거쳐 입안되도록 해야 한다. 새 정부의 대중 통상정책 방향은 이러한 전문적이고 장기적인 의사결정체제 속에서 새로이 수립해야 한다.
이제 팍스 시니카(Pax Sinica) 시대가 글로벌 통상정책에서 펼쳐지고 있다. 신보호무역주의와 신고립주의라는 방어적이고 이기적인 노선을 공공연히 표방하고 있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 맞서 대외개방과 국제규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는 국가가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이다. 지난 5월 14~15일 개최된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서 중국은 일대일로 관련국에 향후 5년간 최대 1500억 달러(약 170조)를 투자할 계획을 밝혔다. 이제 중국은 대외개방 통상정책에 대규모 투자까지 엮어 세계 각국을 중국의 깃발아래 모여들게 하고 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 반식민주의 사관(史觀)이 지배하던 중국의 대외정책 노선이 아니던가. 지금은 자본주의 국가의 경쟁력의 원천인 대외개방, 법치 및 경쟁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고, 모든 국가와 국제 세력을 아우르는 대국굴기(大國屈起)의 기치가 중국 대외통상정책을 지배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이러한 가치와 기치가 국제적으로 존중되는 분위기를 주도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더구나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보복의 주요 타깃이 중국경제를 정조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규범에 반하는 어떤 종류의 통상조치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은행 체제에 맞서기 위해 중국 주도로 설립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이러한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데 재정적 기반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6월 16일부터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2차 AIIB 연차총회에서 이러한 중국의 입장과 구상이 재확인될 것이다.
적폐를 청산하고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위상을 지닌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야심차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대외정책이 첫 번째 시험대에 올라선 셈이다. 아직 외교와 재정분야 장관이 업무를 개시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청와대 경제팀 구성과 총리인준을 마치고 대외정책수립 태세를 갖춘 우리 정부는 우리 영토에서 개최되는 이번 총회를 활용하여 전방위 대외정책을 펴야 한다. 팍스 시니카의 방향이 우리 대외정책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접점을 찾아 이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키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단순한 지역개발과 투자촉진을 넘어 아시아 지역의 화합과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촉매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사드 보복처럼 안보이슈를 일방적 무역 보복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의 위험성도 국제적으로 부각시켜 이것이 일대일로 패러다임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파해야 한다. 아시아 지역의 화합과 협력의 패러다임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중국 정부로 하여금 사드 보복의 자연스러운 출구 전략을 모색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중 FTA는 서비스 부문의 추가 개방 패키지 협상을 통해 업그레이드시켜 나가야 한다. 사드 보복의 직격탄을 맞은 미개방 서비스 부문(한류 진출과 관련한 개인자격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전세기 운항, 여행 및 관광알선 서비스 등)에서 중국 측의 양허를 이끌어내는 것은 이들 부문에서의 사드 보복을 종료시키고 앞으로도 유사한 보복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양허 상품분야에서도 선별적으로 양허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어차피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에 비해 경쟁력이 밀리는 부문은 과감한 산업구조 조정을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제조업 부문을 중국에 양허하는 것은 산업구조 합리화 정책 방향을 국내외에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 불법어업이나 비관세 장벽 이슈도 차차 양자 채널을 활용해 협의한 후, 그 합의사항을 한-중 FTA 부속문서 형태로 첨부해 넣을 수 있다.
팍스 시니카 시대에 한-중 간의 협력 양상(modality)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한-중 양국이 국제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팍스 시니카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통상문제가 불필요하게 외교문제로 비화하여 국민감정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해야 하듯이, 외교문제도 통상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국 '통상정책의 탈정치화'(depoliticization of trade policy)는 새 정부가 이루어야 할 국내과제이기도 하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달성해야 할 우선과제이기도 하다. ■
저자
최원목_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화국제하계대학(EISC) 원장, 통상법률센터(WTO Law Center) 소장. 미국 조지타운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매일경제 객원논설위원, 한국국제경제법학회 회장, 한국ABS포럼 회장, 한국 자원에너지법제연구회 회장, International Law Roundtable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저로는 'Like Products' in International Trade Law: Towards a Consistent GATT/WTO Jurisprudence (2003), International Economic Law: The Asia-Pacific Perspectives (2015), "우루과이라운드의 의미: 비차별•컨센서스의 세계에서 최소기준•규범력의 세계로" (2016) 등이 있다.
〈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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