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적 균형' 극복하는 평화 추구해야
한국전쟁 이후 가장 긴 하루가 지나갔다. 연평도 포격훈련이 진행된 20일 오후 2시 30분부터 94분 동안 국민들은 불안했고, 국제사회도 숨을 죽였다. 우려했던 북한의 대응은 없었고 '힘의 우위'도 증명됐다. 문제는 '이후'다.
동아시아연구원(EAI)·한국리서치는 연평도 포격훈련이 예고된 지난 18일 여론조사에서 안보불안을 느낀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79.6%에 달했다고 20일 밝혔다. 이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인 지난달 27일(81.5%) 과 비슷한 수준으로 국민 10명 중 8명이 '안보위기'를 체감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국민들이 느끼는 안보불안은 EAI·한국리서치가 동일문항으로 조사를 시작한 2000년 이후 최고 수준이었다. 김대중·노무현정부를 통틀어 안보불안이 가장 높았던 때는 2006년 12월 북한의 1차 핵실험 당시(63.8%)였다.
이명박 정부는 안보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힘의 우위'를 선택했다.
북한의 추가 도발을 억제하고 위기관리능력에 대한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래식 전력과 정밀타격능력의 압도적 우위뿐만 아니라 굳건한 한미동맹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돌발행동으로 국제사회에서 완벽한 '명분의 우위'를 얻는 데는 한계를 보였지만 성과는 충분했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20일 연평도 포격훈련 이후 외교안보부처 최고위 당국자가 "우리가 세게 나가면 북한은 항상 꼬리를 내린다"며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평가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한발 더 나가 진전 없는 대화에 기댄 '굴욕적 평화'와 힘의 우위에 기반한 '실질적 평화'를 대비시키며 야권의 '전쟁 대 평화' 공세에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강(强) 대 강(强)' 대결 지속은 정부로서도 부담이다. 20일 주식시장은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안보불안이 폭발할지, 연기금이 어느 정도의 폭발력을 흡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6·2지방선거 직전의 상황처럼 400만명의 개미투자자들은 주가에 따라 정권에 대한 지지 여부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무역의존도가 90%에 육박하는 한국경제의 성격상 남북의 강경대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넘어선 새로운 위기를 부를 수 있다. 당장 경제협력을 위해 21일 방한할 예정이던 수실쿠마 신데 인도 전력장관이 한반도 상황을 이유로 출발 직전 일정을 취소했다.
국제신용평가사 S&P 킴응탄 한국담당 애널리스트는 20일 "상황이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이 들면 한국의 신용등급에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남북관계를 '파국적 균형'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갈등하는 세력들이 파국적인 방식으로 상호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 또는 '세력들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면 결국 상호파괴로써 종식될 수밖에 없게끔 균형이 취해져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보수성향의 원로 윤여준 전 장관은 21일 "압박이 계속되면 북한은 또 도발하려 할 것이고 거기에는 늘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도 "우리 정부 스스로가 긴장을 조성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