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EAI 사랑방, 그 후! - 16기 손승포(고려대학교 국제학부 졸업)

  • 2021-07-15
  • 손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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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을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하였건만 취업을 하지도 대학원에 진학하지도 않았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성급한 결정을 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왜 없었겠느냐만은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 공부가 아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로 알게된 동아시아연구원(EAI) 홈페이지에서 “동아시아질서건축사”라는 학기 주제로 강도 높은 지적 훈련을 제공하며 개인 연구를 위한 답사까지 지원해주는 “사랑방” 프로그램 소개글을 읽게 된 나는 어느새 가슴이 두근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성의 목소리를 들으면 실패가 없고, 가슴의 소리를 들으면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내가 추구하는 삶이란 무수한 실패 속에서도 후회가 없는 가슴의 소리를 듣는 삶이기에 나는 과감히 내 젊음을 사랑방 공부에 걸고자 동아시아연구원의 문을 두드렸다.

 

박규수의 사랑방, EAI 하영선의 사랑방.

 

사랑방 첫 주부터 하영선 교수님의 혹독한 지적 훈련이 시작되었다. 거진 하루에 책 한 권을 독파해나가는 속도로 정신없이 달려오던 와중 교수님의 저서 『사랑의 세계정치: 전쟁과 평화』에서 사랑방 공부 모임의 시초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문명사적 변환의 시기로 평가받는 19세기 말 평양 감사를 지낸 박규수가 청에서 『해국도지』를 들여와 자신의 사랑방에서 젊은 선비들과 시작한 공부 모임이었으니, 후학을 양성하는 일종의 사설 교육 기관이었던 셈이다. 동아시아의 천하질서(天下秩序)가 붕괴하고 전통적 유교 관념이 해체되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 중국과 일본 역시 새로운 사상과 이념, 가치를 담아낼 그릇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는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 동아시아 삼국에서 비슷한 형식의 공부 모임을 만들어내게 된다. 조선에서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유길준과 김옥균, 박영효와 서재필, 민영익과 같이 조선의 개혁을 주도하는 신지식인들이 탄생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이끌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배출된 문하생들이 메이지유신을 주도하며 일본 정치의 주류로 떠올랐고, 중국에서는 캉유웨이(康有爲)가 사숙 만목초당(萬木草堂)을 열어 량치차오(梁啓超)와 같은 근대 사상가를 양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박규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세계적 변화의 흐름에서 유리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35년 간의 굴욕적 지배 끝에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되었으나 국가는 분열되고 미소 간의 국제적 체제 갈등은 한반도에서 전쟁이라는 구체적 형식을 통해 표출되게 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후 세계가 50여 년에 걸친 이념 대결의 역사를 극복하고 탈냉전의 시대를 맞이하였음에도 21세기 한반도에서는 차가운 군사적 대치 정국이 지속되고 있다는 시대적 역설이다.

 

그렇다면 지금 EAI 하영선의 사랑방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과거 삼 천 년 동아시아를 풍미한 천하질서가 저물고 근대적 국제 질서가 들어선지 이백 년이 채 되지 않는 현 시점, 우리는 복합화라는 또 다른 문명사적 변환을 준비하고 있다. 심화하는 미중 갈등은 동아시아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북의 도발은 민족의 앞날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국제 정치적 인식의 빈곤 끝에 발생한 망국과 분단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어느때보다도 기민하게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더 나아가 이를 주도해야만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다.

 

사랑방 공부는 고대 동아시아를 관통하던 천하질서를 이해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예치(禮治)에 기반한 책봉체제론을 주장한 페어뱅크(J. K. Fairbank)를 필두로 힘의 균형에 기반한 다극체제가 과거 동아시아에도 존재하였음을 주장한 로사비(M. Rossabi), 그리고 헤비아(J. L. Hevia)가 제시한 회유원인(懷柔原人)으로서의 유연한 대(對) 티벳 외교에 이르기까지 세계적 석학들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천하질서의 진면목을 포착하고자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지적하듯 천하질서의 핵심은 단일한 이론적 틀에 의해 포섭될 수 없는 복합성에 있음을 깨닫는 데에 이르자 하영선 교수님이 전해주시고자 하는 국제정치학의 정수가 무엇인가에 관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명청기 중국은 동방의 조선에게는 대소사대의 원칙을 적용하여 예치하였으나 북방의 몽골에게는 정벌을 통한 힘의 원칙을, 서부의 티벳에게는 회유를 통한 기미의 원칙을 적용하는 등 다양한 대외 정책을 활용한 바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국제 관계 역시 표면적으로 관찰되는 양태와는 달리 점차 복합화되어 가고 있다. 작금의 미중 관계 관계를 표면적으로 관찰되는 패권 갈등의 양상을 통해서만 읽어내는 것은 그 이면에 전개되고 있는 경쟁과 갈등, 협력과 공생의 복합성을 포착하지 못한 피상적 수준의 해석에 불과하다. 미중은 군사적으로 갈등하고 산업적으로 경쟁하면서도 높은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고 있으며, 21세기의 비전통적 지구적 위협에 있어서는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의 신형국제관계 역시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경제 발전을 모색하고 직접적 군사적 충돌은 피하되 (신형대국관계) 중국의 핵심 이익이 결부된 사안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겠다는 (신형주변국관계) 복합적 외교 원칙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기술 등 다양한 차원의 관계망이 사안과 시기별로 중층적으로 엮여 나가는 복합 직조된(multi-textured) 지역 질서의 형성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맥락 속에서 대북 관계, 대중 관계, 대일 관계를 고민할 때에만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며

 

지난 4개월에 걸친 사랑방 공부는 곧 기존의 사고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고 다시금 빚어내는 ‘창조적 파괴’의 시간이었음을 추억한다. 사랑방 공부 첫 주차에 교수님의 『사랑의 세계정치』를 읽은 이후 한 학기를 마무리하며 다시금 『사랑의 세계정치』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은 진부한 기시감이 아닌 강렬한 이질감으로 내가 과연 동일한 텍스트를 반복하여 읽고 있는 것이 맞는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즉, 때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를 만큼 혹독했던 공부의 과정 속에서 국제정치학에 관한 나의 시공간적 인식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압축적 성장의 경험을 나누는 것은 내가 EAI 사랑방으로부터 받은 혜택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사랑방 후기를 작성한다. 매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희 사랑방16기를 지도해주신 하영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또, 고된 '지적 노동'의 과정을 즐거운 '지적 연애'의 과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함께 해준 사랑방 동기분들에게도 모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13주간 원 없이 공부할 기회를 주신 동아시아연구원 백혜영 실장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끝으로 하영선 교수님이 사랑방 수업 중 언급하신 공부의 자세 2가지를 매순간 기억하고 한다. 첫 번째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자 자존 의식으로서 의욕적으로 텍스트를 읽어 나가고 끈질기게 공부에 천착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핵심은 두 번째로 교수님은 학문에 대한 겸손함을 강조하신 바 있다. 어설픈 지식에 기반하여 자만하는 순간 추락할 수 있음을 언급하시며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이는 학문의 벽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새기며 더욱 낮은 자세로 성실하게 공부에 임하고자 한다.

 

EAI 사랑방, 그 후! - 16기 손승포(고려대학교 국제학부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