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소련 시기 동안 소련과 북한은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문화 교류 성격의 상호 방문은 무용과 음악 기법을 서로 소개하고 전문가를 파견하여 교육을 진행하는 형태였습니다. 저자는 소련-북한 간의 음악예술 분야의 교류와 협력은 양자의 음악예술 분야 발전에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북한이 1950-60년대 생산한 저작물은 현재에도 러시아 수도권과 일부 지방도시의 도서관 곳곳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레닌기치』 신문에 수록된 정보들을 토대로 1948-90년 시기별 양국간 음악예술 분야 교류활동 상황을 살펴봅니다. 당시 교류 공연은 고려인 사회의 아픔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었으며 나아가 한민족 정체성을 계승하는데 이바지 하였다고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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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북한 정부 수립 이후부터 소련방 붕괴(1991) 이전까지 소련-북한 간에는 정치, 경제(농업), 문화와 예술, 체육 등 다방면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가령, 러시아10월혁명기념일(1917)이나 2차세계대전전승기념일(1945), 북한정부수립기념일(1948), 6•25전쟁기념일(1950) 등이 10년 주기의 행사로 성대하게 기념되었다. 이때 소련측에서 북한을 방문하거나 반대로 북한측에서 방문단을 구성하여 소련(모스크바)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치적 성격의 방문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치적 성격의 축하방문 외에 예술문화(음악 및 공연; 춤, 노래, 서커스 등) 교류 성격의 방문 또한 주기적으로 이어져 나갔던 것도 사실이다. 아쉽게도 후자의 경우 그 동안 연구물 형태로는 잘 알려져 오지 않았었다.

 

일반적으로 상호방문공연 과정에서는 춤과 무용, 노래, 악기, 작곡기법 등이 서로에게 알려지고 소개되었고, 한편으로는 장고와 북, 징, 꽹과리 등의 공연물품들이 서로에게 제공되기도 했으며, 종종 음악인-전문가 파견을 통한 장단기 교육도 제공되었다. 이때 교류방문 과정 시에 소련측의 경우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 예술인 그룹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유형의 방문공연들은 언급된 전 시기(1948-90)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는 소련-북한 간의 음악예술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강화시키고 한편으로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의 공연예술 분야의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상호방문공연 활동 외에 소련-북한 간에는 음악예술 관련 저작물들에 대한 상호 입수활동도 활발히 이루어 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주로 1950-60년대에 생산된 음악 관련 저작물들(춤, 무용, 노래 및 악기 등)이 북한에서 소련측으로 많이 입수되었는데, 이들 자료들은 현재에도 러시아 수도권과 일부 지방도시의 도서관들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는 우선 북한의 민족음악 관련 자료들의 소장 현황 및 연구현황 파악을 위해 CIS 내 북한 민족음악 관련 소장자료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국립도서관(과거 ‘소련방 국립레닌도서관’)과 성페테르부르그에 있는 “성페테르부르그 국립대학교 고리키 학술도서관”,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연해주 고리키공공도서관”, 그리고 카자흐스탄 알마타에 있는 “카자흐스탄 국립중앙영상및음성기록보존소”의 관련 자료 소장 현황을 살펴보았다. 이어 필자는 소련-북한 간 진행되었던 음악예술 분야 교류활동(상호방문공연, 음악인-전문가 파견 교육 및 물품지원 등) 상황을 보기 위해 소련 시기 고려인 삶의 전반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레닌기치」 신문(발행기간: 1938-90)의 1948-90년 시기의 기사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CIS내 북한 민족음악 자료 현황 및 연구성과

 

북한 민족음악 관련 자료들 소장 및 연구 현황 관련, 수도인 모스크바 내 도서관을 제외하고, 타지역들에서는 온라인 검색에서 문헌자료나 연구성과물들이 매우 적게 혹은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오프라인 방문 검색 시 상황은 달라질 수 있음). 확인된 자료들의 대부분은 단행본 형태이고 번역본은 극히 일부만 확인이 되었으며, 논문이나 기타 자료들은 전혀 확인이 되지 않았다. 검색된 자료들의 대부분은 민요, 혁명적 성격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추측되는 가요와 찬양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노래 서사시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비록 양은 적으나 1960년대 일정 부분 확인된 북한 민족음악 관련 소장 자료들은 나름의 의미들을 갖고 있다. 러시아국립도서관에 소장된 함화진의 「조선음악토론」, 「조선음악(연구자료편)」 등은 기존의 북한의 도서출간목록에는 빠져 있는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국가들을 포함한 동독, 중국, 일본 등 과거 북한 음악계와 활발히 교류했던 나라들에 남아 있는 1945-1970년 사이의 음악자료들은 북한 음악사의 재구성 뿐만 아니라 남북 통합 민족음악사 연구에서도 중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소련-북한 간 음악예술 분야 교류와 협력

 

1948-90년 시기 소련-북한 간 음악예술 분야 교류활동(상호방문공연, 음악인-전문가 파견 교육 및 물품지원 등) 상황을 소련 전시기에 걸쳐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발행되어 왔던 『레닌기치』 신문에 수록된 정보들을 토대로 몇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① 1948-1960년 시기

 

[레닌기치, 1955.9.17일자, 3면 기사]

 

해당 시기에는 교류방문이 많이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교류방문은 북한정부 수립 직후부터 활발히 시작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해서도 정치적 상황에 관계없이 꾸준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교류방문사례를 몇 가지 보면, 1950년 6월에 최승희, 리경팔을 비롯한 평양예술단의 모스크바 공연이 있었고, 이듬해인 10월에는 최승희, 김완우, 유은경 등의 평양예술단의 모스크바 공연이 수행되었다. 1953년 5월에도 170명으로 구성된 ‘조선인민군음악무용협주단’(단장 리춘현)이 모스크바에서 3회에 걸쳐 공연을 가진바 있다. 1955년 9월에 수행되었던 북한공연단의 교류방문(우즈벡공화국, 카자흐공화국)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해방10주년을 기념하여 정률(정상진)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공연단이 우즈벡공화국 타쉬켄트에서 공연을 마치고 9월 1일 알마타에 도착한 후 4일 동안 체류하며 ‘아바이 가무극장’에서 2회 공연을 수행했다. 이때 독주자 리인형의 피아노 독주 <영웅적 소나타>(작곡 문경옥), 배우 차진실의 <청진포 뱃노래>, 국립예술극장 무용가 라숙희의 부채춤과 검무, 배우 백락원의 민요 <박연폭포>, 국립예술극장 무용가 리석예의 춤 <뽕따는 처녀>, <장미화>, 안성희의 <바라춤>, <장구춤>, 독창가 왕수복의 민요 <배꽃타령>, <베틀가>, 유공배우 정남희의 가야금 환악 <평양의 아침>, 유공배우 유은경의 <아리랑타령>, <꾀꼬리>등이 공연되었고,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② 1961-1980년 시기

 

해당 시기에는 이전 시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교류방문의 횟수가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다. 신문검색 기록상으로는 본 시기에는 총 3회의 교류방문만이 잡힐 뿐이다. 첫째 건은 1966년 12월에 평양가무단이 소련의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의 대도시들에서 순회공연을 한 것이고, 둘째 건은 1969년 2월에 ‘베료스카’소련국립무용단의 평양대극장 공연을 들 수 있으며(비고려인으로 구성된 흔치 않은 사례), 마지막으로 1974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활동하던 ‘로동후비’가무단이 평양공연을 다녀온 것이 전부이다. 본 시기에는 교류방문보다 주로 소련-북한 양측에서 소조친선협회(조소친선협회)가 활동을 하며 양측에서 친선활동을 수행했다. 이 단체는 양측의 친선 교류의 창구역할을 했던 조직으로, 주로 모스크바와 성페테르부르그,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톡, 중앙아시아의 알마타와 타쉬켄트 등지의 도시들에서 컨퍼런스를 진행하거나 곳곳에서 북한 사진과 잡지, 서적 전시회를 했으며, 대형 영화관에서는 북한 영화를 상연하기도 했다.

 

③ 1981-1990년 시기

 

잠잠하던 양측 간의 교류방문은 1980년대 중후반 들어 다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교류공연이나 협력 사례를 보면 검색 기사 기준 총 18회에 이르고 있다. 그 중 몇 가지 사례를 보면, 1987년에 우즈벡공화국측의 교류방문단이 북한방문을 했었고, 그 답방차원에서 1988년 4월에 북한측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주간’ 행사를 위해 남포시인민극장 배우단(단장 박승일)이 방문하여 타쉬켄트주 ‘레닌쓰끼 뿌찌’콜호즈 문화궁전에서 손북춤과 무용극 <목동과처녀>, 그리고 공훈배우 리선옥과 김명숙, 로명순, 김희숙 등이 노래 <해빛밝은 내 나라>와 <조선팔경가>와 여러 무용곡들을 공연했다. 1988년 가을에는 청춘가무단의 3명의 무용수들(한 마르가리타, 박라이사, 김라리사)이 ‘소들리크’협주단과 함께 북한에 가서 <삼인무>, <양산도>등을 공연했다. 이어 이듬해인 1989년 4월에는 카자흐공화국의 아리랑가무단(고려극장)이 평양에서 개최되는 ‘4월의봄’국제친선예술축전(5개 대륙, 62개국, 77개 예술단들이 참가)에 참가하여 김소야의 닐리리 독창과 혼성삼중창, 부채춤을 공연했고(김일성도 참관), 2일간 원산에서 단독공연을 했다. 또 본 시기의 마지막 해인 1990년에 1월에는 카자흐공화국 탈듸쿠르간 ‘아침노을’음악무용협주단이 북한공연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양측 간에는 활발한 교류방문이 수행되었다.

 

글을 마치며

 

소련 시기 동안 소련-북한 간에는 음악예술 분야에서 적지 않은 교류와 협력이 발생했다. 앞서 제시된사례들은 어디까지나 1948-90년 시기 「레닌기치」 신문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살펴 본 것이다. 따라서 해당 시기의 다른 자료들을 참고한다면 더 많은 음악예술 분야 교류방문 사례들을 접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당시 교류공연의 핵심주체는 대부분 고려극장(당시 조선극장)의 아리랑가무단이나 각 지역의 콜호즈 내에서 활동하던 고려인 소인예술단들이었다. 이들은 1937년 강제이주 이후 각 지역의 고려인 콜호즈들을 순회하며 전통춤과 노래, 연극을 통해 강제이주의 아픔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었으며,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 고려인의 전통 춤과 노래들을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 계승에 이바지 했던 주체들이었다.

 

소련-북한 간 음악예술 분야 교류활동은 궁극적으로 양자의 음악예술 분야발전에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다. 소련측에서는 고려극장을 비롯한 각 지역의 소인예술단들이 실제적인 주체가 되어 활동했다. 북한음악은 자연스럽게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의 공연예술 발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가령 고려인들은 발성법을 현대적으로 개량한 북한의 민요를 선호하기도 했는데, 고려인들은 유럽 음악과 러시아 및 소비에트 음악을 배우며 성장했기 때문에 발성법이 개량된 북한의 신민요 계통의 노래에 태생적으로 더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타령>, <소방울소리> 같은 북한의 신민요들에 고려인들은 큰 반응과 호응을 보였고 지금까지도 명절이나 잔칫날에 해당 노래들이 애창되고 있다. 반대로 해방 이후 초기 10여 년 동안에는 일부 고려인 음악이 북한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가령 해방 직후 북한에서 한동안 널리 유행했던 노래 <기쁜 날>(1945, 김해운 작사, 김 빅토르 작곡)이 한 실례이다.

 


 

이병조_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학교(Al-Farabi Kazakh National University) 교수. 현재 한국학과 교수이자, 동방학부 학과장을 역임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고려인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로 러시아-CIS지역 한인(고려인) 이주사 및 문화 등 고려인 사회에 대한연구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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