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EAI는 2017년을 맞아 대선과 신정부 출범을 앞두고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주요 이슈를 진단하고 바람직한 한국 외교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시고 라운드테이블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본고는 토론회에서 논의된 사항을 바탕으로 저자가 대표집필하였습니다. 오늘날 세계정치에는 한 국가가 독립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주요한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전지구적 기후변화에 대한 국가들의 공동 대응 노력, 글로벌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가들 간의 다자적 협의, 국제적인 빈곤 퇴치를 위한 협력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세계정치 현안에 대해 국가들은 협력을 통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는 글로벌 거버넌스를 수립하였습니다.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구적으로 대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정치의 변화로 기존의 글로벌 거버넌스는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미국, 중국, EU 등 글로벌 리더십 차원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이슈들이 서로 얽히면서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글로벌 거버넌스는 “초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승주 교수(중앙대)는 공적개발원조(ODA)와 기후변화 두 가지 어젠다를 중심으로 오늘날 글로벌 거버넌스의 현상을 진단하고, 한국외교가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서 논의합니다.

 

 


 

 

2000년대 초반 세계정치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황금기를 예고하는 듯이 보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기존 G7에 더하여 G20 정상회의가 세계경제를 관리하는 대안으로 급부상함에 따라 개도국을 포함하여 대표성을 갖춘 글로벌 거버넌스의 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알렸다. G20 정상회의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와중에 보호무역 수준의 현상 유지(standstill)와 신규 보호무역 조치의 철회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세계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가능성을 알렸다. 글로벌 거버넌스를 통한 지구적 문제 해결 방식은 개별 이슈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2015년 9월 제70차 유엔 총회에서 기존 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 MDGs)를 대체하여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의 실행을 담당할 ‘포스트-2015 시대’의 개막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어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기후변화협약(United Nations Climate Change Conference: UNFCCC) 제21차 당사국 총회(21st Conference of the Parties: COP 21)를 통해 2020년 이후 ‘신기후체제’의 출범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글로벌 거버넌스를 통한 지구적 문제의 해결은 비단 저위 정치(low politics) 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2009년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핵 무기 없는 세계’ 구상을 주창한 것을 계기로 2010년 4월 핵군축, 핵비확산, 핵안보를 3대 축으로 주요 핵무기 보유국들과 원전 보유국들이 참여하는 ‘핵안보 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가 성공적으로 출범하였다.

 

이처럼 글로벌 거버넌스에 기반한 접근 방식은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부상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급변하는 세계정치 환경을 고려할 때, 통상, 기후변화, 에너지, 핵 안전, 지속가능한 발전 등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다자주의적 노력의 제도적 근간이 되는 글로벌 거버넌스는 ‘초불확실성의 시대’(age of hyper-uncertainty)로 접어들고 있다(Eichengreen 2016).

 

불확실성을 초래하는 요인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글로벌 거버넌스를 실질적으로 주도해왔던 강대국들의 정책 지향의 변화이다. 21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등장 이후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한적 리더십을 행사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자국 제조업의 부활과 일자리 보호를 주 내용으로 하는 신보호주의와 시장 개방과 환율 문제를 이유로 상대국 정부에 강한 압박을 가하는 공세적 일방주의 기조를 강화하는 데서 나타나듯이 자국 우선주의에 주력할 가능성이 현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2월 트럼프 행정부가 국방예산을 약 520억 달러를 증액하고, 국무부와 국제개발처(USAID) 합동 예산은 28% 대폭 감축한 2018 회계연도 예산안에서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현실화하고 있는 단초가 엿보인다.

 

세계 질서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축인 중국은 2017년 1월 시진핑 주석이 다보스 포럼에서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촉진하는 자유무역의 수호자”로서 중국의 이미지를 대내외에 각인시킴으로써 보호주의로의 회귀를 시사한 트럼프의 미국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진핑 정부가 2016년 7월 남중국해 영유권에 대한 국제중재재판소의 판결 이후 필리핀산 바나나 수입 중단을 결정한 데 이어, 한국 정부의 사드(THAAD) 배치 발표에 대응하여 유무형의 경제 제재를 가하는 등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수호자로서 중국의 의지를 확인하기는 어려운 형국이다. 더욱이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하드파워뿐 아니라 과학적 해법과 규범적 우위 등 지식 권력과 규범 권력을 보유해야 하는데 현재의 중국은 고도의 지식 체계와 모범적 리더십을 구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독자적 리더십을 행사하는 데 한계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상황 또한 여의치 않다. 기후변화와 개발협력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왔던 유럽은 지속되는 유로존 위기, 난민의 폭증으로 인한 국내 갈등, 테러 위협, 브렉시트(Brexit) 등 유럽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급급하여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기에는 역량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유럽으로서는 브렉시트의 발생 자체가 예상하기 어려웠던 충격적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테레사 메이(Theresa May) 정부가 논란 끝에 ‘하드 브렉시트’(hard Brexit)를 선택함으로써 예상보다 클 수 있는 여파를 내부적으로 흡수하고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의 위상을 제고하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욱이 2017년 5월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에마누엘 마크롱(Emmanuel Macron)과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각각 1, 2위 득표를 하고, 전통 주류 정당인 공화당과 사회당 후보들이 결선 진출에 실패하는 등 국내정치 지형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 역시 지구적 문제의 해결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브렉시트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내부 지향성이 증가하는 추세가 감지됨에 따라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유럽의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요 강대국들이 국내 문제에 주력하는 내부 지향성이 점증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리더십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어렵게 될 전망이다.

 

둘째, 이슈 간 연계성과 복합성의 증가 역시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주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글로벌 거버넌스를 통해 해결 방안이 모색되어 온 대다수 이슈들은 개별 쟁점으로서 독자적인 중요성을 갖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신흥 이슈들(emerging issues)의 속성은 과거 별개로 간주되어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이슈들과 복잡하게 얽히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는 데 있다. 좁은 의미의 원조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가 민간 재원 조달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원조-투자 연계, 기후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 문제와의 연계, 지구적 차원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포괄적 접근의 필요성 등이 제기되면서 다양한 이슈들과 복합적으로 연계되는 현상이 대두되었다. 기후변화 역시 주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대응 방안이 논의되던 단계에서 벗어나 기후-에너지 연계라는 새로운 논의의 축이 더해지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슈 연계에 따른 복합성의 증가는 문제 해결의 대안을 모색하고, 이를 위한 집합행동을 조직하는 데 유무형의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지구적 문제에 대한 지구적 해결’(global answer to global prob-lems)에 대하여 원칙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해서(Martin 2005), 문제 해결의 방안에 대한 구체적 합의가 자동적으로 도출되기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개발협력 거버넌스

 

개발협력의 경우, 전통 공여국과 수원국 사이에서 주로 시혜적 차원의 해외 원조를 제공하는 비교적 단순한 문제로부터 포스트-2015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첫째, 새로운 행위자의 등장으로 인한 개발협력 거버넌스의 변화를 촉구하는 압력이 증가하였다. 개발협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 DAC)의 선진 공여국 중심으로 의제가 설정되었다. 그러나 OECD DAC 자체가 최근 멤버십을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회원국의 수가 28개국까지 증가한 결과 회원국 간 이질성 또한 높아지고 있다. 멤버십 확대가 향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OECD DAC가 과거와 같이 동질적인 집단이라고 하기 어렵게 되었다. OECD DAC 비회원 공여국 역시 증가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헝가리, 터키 등 OECD DAC 비회원국이지만 해외원조 자료 보고서를 제출하는 19개국과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는 비회원국이 전체 개발협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현재 17.8%에 달한다. 이는 적어도 중장기적으로 개발협력 거버넌스의 변화를 촉진하는 압력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에 더해서 비정부 행위자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개발협력 거버넌스의 복잡성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개발협력이 북과 남, 즉 선진국과 개도국의 문제였다면, 포스트-2015 시대의 개발협력은 북과 남뿐 아니라, 신흥 공여국의 대두로 인한 남과 남의 문제, 정부 행위자들과 민간 행위자 등 다양한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즉, 개발협력의 거버넌스는 공여국과 수원국 관계뿐 아니라 신흥 공여국과 비정부 행위자들을 포함한 지구적 차원의 파트너십의 형성이라는 보다 복잡한 거버넌스의 문제로 전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포스트-2015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개발협력 거버넌스는 다층적 구조로 변모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다층적 거버넌스가 대표성과 효율성 사이의 상충 관계를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층적 거버넌스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표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이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행위자의 수적 증가가 과연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둘째, 포스트-2015시대의 개발협력 분야에서는 이슈 간 연계의 증가에 따른 복합성이 비약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빈곤 퇴치라는 비교적 협소한 이슈를 중점 분야로 설정하였던 MDGs와 달리, SDGs는 경제 발전, 사회인간 개발, 환경 지속성뿐 아니라, 평화, 제도, 불평등과 같은 매우 포괄적 분야로 개발협력의 범위를 대폭 확대시켰다. 그 결과 개발협력은 지구적 차원의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기후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계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좁은 의미의 원조를 넘어 민간 재원을 다양한 방식으로 동원하는 원조-투자 연계의 문제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셋째, 위의 두 가지 점과 관련 중국의 부상이 개발협력의 거버넌스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흥 공여국으로서 중국은 기존 개발협력 거버넌스의 틀 밖에서 원조와 투자를 적극 연계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개발협력의 목표가 확대되면서 이를 실행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재원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중국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대일로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경우 개도국의 인프라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데, 인프라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공공재원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2015년 기준 OECD DAC 회원국의 순ODA는 1,314억 달러에 불과한데다, 그마저도 교육, 보건 등에 대부분의 ODA가 사용되고 인프라 건설에 투입되는 ODA는 19%에 불과하다. ADB 또한 매년 신규 투자 규모가 130억 달러에 불과한 데다, 소득 및 사회적 격차, 자원 관리, 혁신, 긴급 구호 등에 대처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인프라 건설에 투입할 여력이 제한적이다.

 

중국은 아시아 인프라 건설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원조와 투자의 연계를 시도하고 있다. 일대일로는 순수한 대외원조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업성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투자 사업도 아니다(왕이웨이 2016). 일대일로는 중국이 투자와 대외원조를 결합하여 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중국 정부가 반복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AIIB 역시 기존 다자개발은행들에 비해 민간 자금을 적극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에서 투자-원조 연계의 수단적 성격이 발견된다. 근본적으로는 원조 또는 다자개발질서와 관련된 국제 규범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동기도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원조와 투자를 연계함으로써 아시아 지역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증대시키고, 이를 지역아키텍처의 재설계 등 전략적 이익을 투사하는 데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기후변화 거버넌스

 

2015년 12월 채택되고 2016년 11월 발효되어 2020년 이후 ‘신기후체제’의 근간이 될 파리협정(Paris Agreement)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의 이정표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기후변화 거버넌스는 기후변화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슈의 성격상 변화가 매우 완만하게 체감되고, 기후변화의 주 요인으로 인식되는 탄소의 배출국과 피해국이 상이한 데서 오는 이해관계의 불균형성이 존재할 뿐 아니라, 기존 화석연료의 재구성을 통해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지연시키려는 시도가 여전히 이루어지는 등 다양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로 인해 기후변화에 대응은 사안의 중대성에 대한 공감대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으나 초기의 고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정책의 우선순위에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따라서 지구적 차원에서 리더십을 행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파리협정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무엇보다 교토의정서의 참가국이 주요 선진 27개국이었던 데 비해, 파리협정에는 195개국이 협약 당사국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상 기후변화에 대한 지구적 차원의 대응이라고 할만하다. 둘째, 제도 설계 면에서도 파리협정은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하였다. 교토의정서가 ‘공동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ies: CBDR) 원칙을 명분으로 선진국들이 감축 의무와 개도국에 대한 지원이라는 이중 부담을 하도록 함으로써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의 반발에 직면한 바 있다. 반면, 파리 협정은 비록 자발적이고 구속력이 없기는 하지만 모든 UNFCCC 당사국들이 저마다의 사정에 맞춰 제출한 ‘국가 결정 기여’(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INDC)를 채택하여 각국이 이를 이행하도록 촉구하는 신축성 있는 체제를 선택함으로써 선진국 대 개도국의 갈등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완화하였다. 셋째, 파리협정은 교토의정서와 달리 지구 평균 기온의 상승폭을 1.5-2°C로 제한할 것을 명문화함으로써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목표를 수치화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넷째, 교토의정서의 이행을 사실상 저지하였던 세계 1, 2위의 온실 가스 최대 배출국 미국과 중국이 파리협정의 타결을 위해 타협을 이끌어냈다는 점 역시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커다란 함의를 갖는다. 이 타협은 좁게는 그 동안 기후변화 협상을 주도하던 EU의 리더십을 미중 양국이 대체하였다는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게는 향후 미중 양국이 본격적으로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전초전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상당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파리협정은 풀어야 할 미완의 과제가 상당하다. 무엇보다 수치화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개도국 지원 체계가 선진국들의 의무 사항으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파리협정은 2020년까지 개도국 지원을 위해 연간 1,000억 달러를 조성하기로 한 코펜하겐 합의문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관련한 조항의 구속성 여부는 불투명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또한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기여를 개별 당사국들의 자발성에 의존하고 있는 점 역시 협정의 타결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해 메커니즘에 대한 의문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파리협정 협상 과정에서 전향적 자세를 보였던 미국과 중국이 향후에도 이제까지와 같은 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인지 여부이다. 2017년 2월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는 국내 제조업의 보호와 고용의 창출을 위한 자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데서 나타나듯이, 국내정치적 측면에서 대외정책을 조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자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는 기후변화 분야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기간 중 “지구 온난화 개념 자체가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중국의 속임수”라는 언급에서 나타나듯이 기후변화 관련 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편린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하였다. 트럼프 행정부가 아직 파리협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니지만, 이행과 관련한 동력을 약화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2018 회계연도 예산안에서 환경보호청(EPA)의 예산을 전 부처 가운데 가장 큰 비율인 전년 대비 31% 삭감하고, EPA 직원 약 19%를 해임하는 방안을 포함한 데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방향을 읽을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산업계의 이익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오바마 행정부와 같은 리더십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리인 것은 분명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입장은 중국 등으로부터 미국이 파리협정의 이행 의지를 갖고 있는지 여부에 대한 의구심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 변화는 중국의 태도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파리협정의 이행 과정에서 리더십 공백이 초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의 대응 전략

 

2000년대 이후 글로벌 거버넌스는 개발협력과 기후변화 분야를 필두로 여러 분야에서 지구적 공공재의 원활한 공급에 커다란 기여를 해왔다. 글로벌 거버넌스가 현재 및 미래 세계정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 가운데 하나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행위자들이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투사하는 가운데 타협을 이끌어내는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글로벌 거버넌스의 형성과 유지에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기 위하여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합의의 토대를 제공한 인지 공동체, 지적 ∙ 도덕적 리더십을 실천해왔던 EU,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타협적 자세를 보인 미국과 중국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하였다.

 

그러나 2017년의 글로벌 거버넌스는 전혀 새로운 국제정치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은 글로벌 거버넌스 분야에서도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 추구하는 자국 우선주의를 고수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거버넌스의 한 축을 담당하여 왔던 유럽 역시 산적한 내부 문제의 해결에 주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국 기존 선진국들이 주도하였던 글로벌 거버넌스에서 리더십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반면, 중국은 개발협력과 기후변화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이러한 리더십 공백을 활용하여 국내정책과 대외정책 사이의 전략적 연계를 추진하고 있다.

 

결국 2017년의 글로벌 거버넌스는 리더십 공백으로부터 초래될 수 있는 불안정의 위험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주요국들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투사하는 변화가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 가능성이 한국외교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째, 글로벌 거버넌스의 주요 축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복합적 관계의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 조정은 파리협정의 타결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미중 양국이 파리협정의 이행에 대한 정책적 의지가 약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전적 대비가 필요하다. 개발협력 분야에서 중국은 기존 선진 공여국 중심으로 형성된 글로벌 거버넌스의 외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한국은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들과 중국을 위시한 신흥국들이 상충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둘째, 글로벌 거버넌스와 관련한 이슈의 특성을 감안하여 이슈에 대한 개별적 접근보다는 이슈 간 연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환경과 개발협력 이슈는 과거에는 경제성장의 하위 이슈로 인식되었으나 점차 주류화되어 가고 있다. 이슈의 성격이 변화하는 데는 이슈 간 연계의 양상이 과거와 다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이슈 연계성의 변화에 사전적인 대비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최근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이 개발협력, 환경, 경제성장 사이의 관계 또는 더 나아가 국내정책과 대외정책 사이의 연계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선제적 준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장의 움직임을 선제적으로 파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한국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추동하는 국제정치적 동력을 유지하는 노력을 다각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정책의 내향성이 증가하는 현상은 국제정치의 질적 변화를 수반할 수 있으므로 그 향방에 대해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가 국내정치적 또는 외교적 수사에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게는 중대한 도전 요인이기도 하다. 한국은 글로벌 거버넌스의 위기 가능성에 대해 중견국 외교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거버넌스가 담당하고 있는 지구적 공공재는 마치 공기와 같아서 평소에는 그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글로벌 거버넌스가 약화 또는 와해될 경우, 재구축하는 데 커다란 비용과 노력이 소요되기 때문에, 글로벌 거버넌스를 유지ㆍ관리하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한국 정부는 중견국들의 협력을 통해 글로벌 거버넌스를 발전시키는 중견국 리더십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강대국들이 행사해왔던 리더십의 공백을 메우는 중견국 외교 전략이 될 수 있다.

 

넷째, 한국은 글로벌 거버넌스 외교와 국내 정책 사이의 정합성을 제고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한국은 지구적 공공재를 제공하는 외교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국내 정책과의 균형을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개발협력 분야에서 보편적 가치의 추구와 국익 우선 추구 사이 긴장관계를 둘러싼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이 문제는 계몽된 또는 장기적 관점의 광범위한 국익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양자 사이의 긴장 관계를 해소할 수 있다. 또한 개발협력 외교의 목표는 주요 선진 공여국들의 사례를 볼 때 ODA의 제공에 대한 정당성을 국내적으로 획득하고 전체 외교정책 목표와 일치시키기 위해 치열한 고민와 논쟁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국익 대 보편적 가치의 양분법적 논의를 넘어 개발협력 외교의 목표가 한국의 현실에 맞게 유동적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는 동태적 관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접근은 환경 외교 분야에서도 요구된다. 과거 한국은 환경 분야에서 녹색성장 외교를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으나 탄소 감축을 실질적으로 부담해야 할 국내 이해 당사자들과의 협의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결국 한국이 지구적 차원에서 녹색성장 외교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구적 공공재를 제공하는 외교의 이니셔티브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국내 정책과의 정합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

 

 


 

 

[대표집필]

이승주_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통일연구원 연구원, 미국 버클리대학교 APEC 연구소 박사 후 연구원,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주 연구 분야는 동아시아 지역주의, 통상, 개발협력 등이다.

 

 


 

 

EAI 이슈브리핑은 국내외 주요 현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전문가들의 진단과 분석을 제공하고 바람직한 정책 수립 방향을 위한 제언을 담고 있습니다.

EAI는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하고 건설적인 정책 논의의 장을 마련하여 우리 사회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