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랑방 6기 수료생 조소진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저를 사랑방으로 이끌게 했습니다. 중국과 미국이 그리고자 하는 모습, 설계하고자 하는 질서에 대한 청사진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조각, 조각을 모으면 큰 그림이 될 줄 알았습니다. 사랑방을 통해 제 자신이 ‘무엇’과 ‘왜’를 간과한 채 제 발걸음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고, 꿈을 좇게 되었습니다. 사랑방이라는 변곡점이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제풀에 지쳐 멈춰 섰을 겁니다. 동아시아 무대의 천하질서부터 근대 복합질서까지 3000년의 시공간을 살폈던 한 학기동안 저는 세 가지 두드림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두드림: 읽어서 안다고?

 

삶의 진폭이 좁았던 저에게 사랑방에서의 6개월은 성장통과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처음’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죽어있는 문헌에 숨을 불어넣는 일, 형세와 기세를 고려해 무대와 주인공을 복원하는 일, 끌리는 대상과의 지적연애, 그리고 답사지에서의 발표. 모든 것이 저에겐 처음이었습니다.

 

아직도 첫 수업시간의 충격이 생생합니다. 하영선 선생님께서는 페어뱅크(Fairbank)와 로싸비(Rossabi)의 글을 얼마만큼 이해했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주어진 자료를 읽었기에, 대부분 이해한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읽었지만, 제 가슴속엔 글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활자 그대로, 표면만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시각과 고민은 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읽어서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해석학적 시각’, 선생님께서 자주 사용하셨던 표현입니다. 죽어있는 텍스트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괴로움이 있는지 느낄 때 그것은 살아있는 지식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차 자료의 행간에서 그들과 마주해 고민을 이해하고 다시 나의 질문으로 돌아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각들을 가슴으로 살피며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두드림: 나의 첫 지적 연애

 

6개월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중국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각자 맡았던 곳과 주제에 대해 발제를 준비했습니다. 저는 청나라의 여름궁전 이화원에서, 서태후의 두 얼굴을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연애 초보자인 저에게 ‘밀당의 귀재’ 서태후는 쉽지 않은 상대였습니다. ‘청일전쟁 패배에 빌미를 제공했다’고 알려진 것처럼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비난과 비판의 부정적 표현으로 점철돼 있었습니다.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선, 쌓여있는 것들을 모두 거둬내야 했습니다. 백하우스(Backhouse)의 위조된 문서부터,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재현까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색안경이 되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태후의 맨얼굴을 봤다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19세기 어두워져 가는 청나라의 끝자락을 잡았던 서태후를 만나기 위해선 19세기 서세동점(西世東漸)의 태풍을 마주해야 했고, 이홍장과 옹동화의 대립으로 치달았던 제당과 후당의 국내정치적 싸움도 읽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서태후는 폭군보단 딜레마 속에 괴로워했던 결정권자였다는 것을.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국내정치 싸움 속에서 국제정치를 어떻게 전개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음을 말입니다. 원치 않았던 서양과의 만남, 그리고 그 속에서의 문명적 충돌을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괴로움, 그리고 그것을 ‘재현’하고 ‘기록’한 현재의 역사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세 번째 두드림: 왜?

 

『연암집』‘답창애’ 세 번째 편지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마을의 어린아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다가, 읽기를 싫어해서 꾸짖었더니, 그 애가 말했소.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싫어하는 겁니다.” 느끼지 못했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왜’ 공부해야 하며, ‘왜’ 우리는 한국이 주도하는 설계도를 그리고, 제시하지 못하는지. ‘왜 고민해야 하는가’의 목적론과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의 존재론 사이에서 선생님은 주연만이 빛나라는 법은 없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물상이 약하더라도, 거인들이 존경하는 작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매력 있는 ‘한국형 기준’제시와 한국의 역할에 대한 선생님의 고민은 시공간을 복합적으로 고려한 ‘한국형 네트워크 지식국가 구상’으로 까지 이어지신 듯 했습니다.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에 대해 고민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다가오는 1000년을 읽어내기 위해 지난 3000년의 역사를 살펴봤던 사랑방의 의미 또한 그 지점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한 학기 내내, 선생님의 질문은 벼리고 벼린 펜 같았습니다. 제 얕은 고민과 생각은 선생님의 질문에 맞닿기 전에 떨어지기 일쑤였고, 금요일마다 부족한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운 마음을 달래야했습니다.

 

성장통은 뼈의 성장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데 비해 근육의 성장이 느려서 생기곤 합니다. 사랑방에서 얻었던 질문과 깨달음으로 온 성장통은 제 지적근육을 단련시키며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선, 꿈은 현실을 ‘꾸미는 것’에서 온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현실화 될 수 있는 현래(현재-미래)와 미거(미래-과거)적 요소도 함께 봐야한다고도 덧붙이셨죠.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하영선 교수님의 사랑방까지. 있는 힘껏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는 한, 현래와 미거가 공존하는 꿈의 이어달리기는 계속될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