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Special Report_ 신시대를 위한 한일의 공동진화

 

동아시아연구원은 광복 70주년과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한 2015년, 변환하는 21세기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한일관계를 돌아보고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양국 관계의 목표와 가치, 역할을 재조정하여 새로운 한일관계의 출발에 기여하고자 <신시대를 위한 한일의 공동진화> 특별보고서를 출판하였습니다.

 

저자

하영선 EAI 이사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한국평화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자문위원,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위원이다. 저서 및 편저로는《하영선 국제정치 칼럼 1991-2011》,《복합세계정치론 : 전략과 원리 그리고 새로운 질서》,《한일 신시대와 공생복합 네트워크》,《변환의 세계정치》등이 있다.

 

손열 EAI 일본연구센터 소장,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원장. 미국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 국립외교원 자문위원, 외교부 자문위원, 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도쿄대학교, 와세다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채플힐(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방문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 연구 분야는 일본 및 국제정치경제, 동아시아 지역주의, 공공외교 등이며 최근 저술로는 “미중데탕트와 일본: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교섭의 국제정치,” South Korea in 2013 Meeting New Challenges with the Old Guard (공저), “아베정권과 미일관계의 향방, 한일협력” 등이 있다.

 

이숙종 EAI 원장, 성균관대학교 국정관리대학원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외교부, 통일부,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The Trilateral Commission, 싱크탱크세계평의회(Council of Councils: CoC)의 회원으로 정책연구와 관련하여 국제적인 네트워크 형성에 힘쓰고 있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 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Johns Hopkins University, SAIS) 교수강사, 독일 German Institute for Global and Area Studies 방문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최근 저술로는 “South Korea as New Middle Power Seeking Complex Diplomacy,” Public Diplomacy and Soft Power in East Asia (공편), 《글로벌 개발협력 거버넌스와 한국》(편), “The Demise of ‘Korea Inc.’: Paradigm Shift in Korea’s Developmental State” 등이 있다.

 

이원덕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동 대학 일본학연구소 소장. 일본 도쿄대학(University of Tokyo)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피츠버그대학(University of Pittsburgh)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 도쿄대학(University of Tokyo) 대학원 국제사회과학 전공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 연구 분야는 일본 정치외교와 한일관계 등이며, 주요 저서로는《한일 공문서를 통해 본 독도》(공저),《한일 신시대와 공생복합 네트워크3》(공저) 등이 있다.

 

전재성 EAI 아시아안보연구센터 소장,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숙명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 연구 분야는 국제정치이론, 국제관계사 등이며, 최근 저술로는《정치는 도덕적인가》,《동아시아 국제정치 : 역사에서 이론으로》, “구성주의 국제정치이론에 대한 탈근대론과 현실주의의 비판 고찰,” “유럽의 국제정치적 근대 출현에 관한 이론적 연구,” “강대국의 부상과 대응 메커니즘 : 이론적 분석과 유럽의 사례” 등이 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한국근현대사 및 한일관계사 전공 한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제2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객원교수,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및 간사, 일본 홋카이도대학(Hokkaido University) 특임교수, 일본 도쿄대학(University of Tokyo) 특임교수, 일본 도호쿠대학(Tohoku University) 동북아시아연구센터 객원교수, 한일관계사학회 회장, 일본방송교육개발센터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 연구 분야는 한국근대사, 한일관계사 등이며, 주요 저서로는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帝國日本の植民地支配と韓國鐵道 : 1892~1945》, 《교토에서 본 한일통사》등이 있다.

 

 


 

 

I. 서론

 

한국과 일본은 수교 이래 최악의 상태에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과 각각 광복과 종전을 기념하는 70주년을 맞이했다. 빠르게 굴러가고 있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긴 세월이 흘렀어도 양국 관계는 더 나빠졌다. 문명사적 변환을 겪고 있는 21세기 동아시아는 더 이상 개별국가 중심의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과거 패러다임으로는 살기 어려운 환경을 맞이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한일 양국은 이러한 변환의 도전 속에서 새롭게 만나야 할 운명에 봉착해 있다. 2015년을 맞이해서 수많은 회의와 보고서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동아시아 연구원(EAI)이 새로운 보고서를 준비한 까닭은 단순한 한일관계 복원 대책을 넘어서,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21세기 변환의 동아시아 전체 판도를 정확히 읽고 그 속에서 한일관계의 목표와 가치, 역할을 재조정하여 신 한일관계의 출발에 기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21세기 문명사적 변환이란 기왕의 국제관계 에서 개별 국가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힘의 각축과 세력균형의 원칙이 행위자, 무대, 연기(演技) 세 측면에서 혁명적 변환을 겪고 있음을 말한다. 국가안팎의 비정부행위자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부강(富强)의 무대를 넘어서 기후변화 및 환경, 문화, 기술 등의 무대가 새롭게 부상하며, 국가이익뿐만 아니라 지역이나 지구적 이익도 함께 고려하는 경쟁, 협력, 공생의 복합연기를 해야 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의 빠른 부상으로 인한 세력전이가 일어나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세력균형 외교가 전개되는 한편 통상, 금융, 개발, 기후변화, 환경오염, 에너지, 문화 등 다양한 이슈영역에 지방정부, 시민사회단체, 다국적기업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참여하여 보다 수평적이고 유연한 네트워크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거버넌스적 질서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주요 국가들은 힘의 각축과 세력균형, 네트워크 거버넌스가 서로 어우러지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역질서 건축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치열한 경쟁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재균형(rebalance)’이란 기치를 내걸고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질서에 깊이 개입하고 있으며, 중국은 ‘친성혜용(親誠惠容),’ ‘운명공동체,’ ‘일대일로(一帶一路)’ 등 현란한 언어와 개념을 동원하여 지역질서 건축의 주도권을 잡고자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웃 일본은 이른바 ‘국제협조주의에 기초한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 하에 보통국가화의 길을 추구하는 동시에 미일동맹의 일체화로 지역적, 지구적 과제들을 해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러한 질서건축의 경쟁이 개별국가들의 각생(各生)이 아닌 지역 전체의 공생을 가져오도록 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일관계의 목표와 가치 그리고 역할도 이러한 시각에서 새롭게 모색되고 찾아져야 한다. 공생의 가치를 담는 동아시아 복합질서 건축을 위해 한일관계의 위상을 재설정하고 내용을 새롭게 채워가야 한다. 이제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진지하게 함께 성찰하고 협의하며, 그 속에서 과거사를 정리해가면서 다가오는 미래사의 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는 비전을 마련할 때이다.

 

1965년 한일 양국은 냉전 질서 속에서 자국의 부강을 위해 서로 필요해서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국교정상화의 결단을 내렸다. 한국은 일본과 경제협력을 통해 근대화를 성취할 수 있었고 일본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발돋움하며 경제협력의 이득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양국은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반공의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 안보협력을 착실히 쌓아왔다. 이러한 이익의 공유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역사인식의 수렴을 위한 노력도 꾸준히 경주해서 1992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1998년 김대중-오부치 한일파트너쉽 선언, 2010년 간 담화 등의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여 동아시아는 역동적 변환의 과정을 겪고 있다. 중국의 부상에 따라 동아시아의 전략적 환경이 변화하고, 일본 경제의 장기불황, 한국 경제의 저성장 국면 돌입, 민족주의의 부흥, 신흥이슈들의 대두 등, 커다란 변화를 맞아 한일 양국은 더 이상 과거의 국익 셈법에 따라 양자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부의 전략적 목표 설정과 추진 방법은 상당히 구시대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일본의 아베 정부는 아베노믹스라는 일국중심적 번영논리와 무력증강 그리고 미국과의 동맹강화라는 안보논리로 ‘보통국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우익 민족주의에 근거한 정체성의 정치를 전개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역시 단순한 반일 민족주의에 근거하여 역사문제 등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 온 결과 정책적 유연성이 약화되고 전략적 선택공간이 제한되는 결과를 초래해 왔다. 이런 속에서 한일관계는 본격적으로 협력의 신시대를 열기는커녕 상황적 필요에 의한 갈등의 봉합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한일 양국이 발상의 전환 없이 동아시아의 미래를 맞이한다면 단순한 양국관계의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 보다 구조적 위험을 겪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사의 성찰로부터 우리는 세 가지 국제정치적 위험의 가능성을 식별해 낼 수 있다. 첫째는 국가 간 안보갈등이다. 동아시아의 21세기 형세가 미국과 일본이라는 기성대국에 중국이라는 신흥대국이 도전하는 양상으로 짜이는 가운데 미중 양국은 과거 강대국 간의 불행한 역사적 선례와는 달리 평화, 신뢰, 협력의 ‘신형대국관계’ 건축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조심스럽게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상호불신의 틀 속에서 한미일 협력네트워크와 중국과의 관계는 서로 군비경쟁으로 치닫는 안보딜레마의 위험을 안고 있다. 둘째는 이익 갈등이다. 탈냉전과 함께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경제적 상호의존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나 최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과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의 잠재적 갈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국가 간 경제협력은 ‘윈-윈’ 경쟁이 아닌 ‘제로섬’ 경쟁의 측면을 띠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공생을 위한 협력이 보다 절실한 기후변화 및 환경, 첨단기술 및 지식과 같은 신흥무대에서의 협력도 빠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강대국정치를 지배해 온 관습대로 국제문제를 지나치게 안보적 시각에서 보게 된다면 이익에 기반한 협력의 틀을 만들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셋째는 감정 갈등이다. 근대 이행기와 냉전기의 잘못된 만남에서 만들어진 기억과 정체성의 충돌로 인해 한일관계와 중일관계가 감정적 갈등 관계로부터 계속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경우 상호 협력과 신뢰가 진전되지 못하는 아시아 예외주의(Asian exceptional-ism)가 사라지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 한중일 삼자관계는 물론 아시아 전체의 지역협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안보갈등, 심지어 무력충돌의 가능성도 열어놓게 된다.

 

한일 양국은 동아시아에서 한미일과 중국 관계가 상호 대결 구도를 형성하여 안보, 이익, 감정 갈등으로 악화되지 않도록 하고, 공생 구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이익 차원의 협력을 최대한 늘리며, 국가 정체성에 지역 정체성을 통합시켜 감정적 대결을 완화하는 복합 신질서를 건축하는 방향으로 양국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이러한 목표는 단순히 양국 간 개별정책들의 조정만으로 이루질 수는 없다. 대내적으로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 공생을 향한 ‘지구적 민족주의’의 토대를 쌓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복합외교 패러다임을 갖추어 가면서 양국이 ‘공동진화’ 혹은 ‘공진(coevolution)’해야 한다. 신 한일관계는 동아시아 복합신질서 건축을 위한 한일의 공진으로 비로소 가능하다.

 

미래사의 성찰을 통해 동아시아 복합신질서 건축을 위한 한일 공진을 모색하는 일은 21세기 동아시아 형세의 면밀한 진단에서 출발한다. 먼저 제 II장에서는 미래의 형세를 전망한다. 동아시아 지역질서 건축을 둘러싸고 미국의 ‘재균형전략’과 중국의 ‘신형국제관계론’이 경합하는 속에서 미중관계의 동학, 동아시아 고유의 체계적 요인, 국내정치적 요인을 입체적으로 분석한 후, 미래 동아시아가 봉착할 수 있는 3대 위험요소와 그에 상응하는 과제들을 제시할 것이다. 제 III장은 역사적 시각에서 한일관계의 현재를 진단하고, 양국관계의 악화 배경과 원인을 분석한 후, 단기처방을 제공하는 한편, 전향적이고 포괄적인 공공외교 방안을 검토한다. 제 IV장은 한일관계 과거를 극복하기 위한 다각적 접근법으로서 역사인식의 수렴, 역사갈등의 완화, 역사화해의 실현, 집합정체성 구축을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끝으로 결론에서는 미래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투-트랙’을 넘는 ‘쓰리-트랙’ 접근법을 제시한다. 첫째, 안보, 번영, 신흥무대에서 양국의 공통이익 확대를 위한 협력, 둘째, 근대적 갈등요인 극복을 위한 처방으로서 상호자극 회피, 내재적 요인 치유, 역사화해를 위한 제언, 셋째, 장기적으로 국가와 지역의 복합정체성 형성을 위한 노력 등 3면의 노력을 통해 한일관계 및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에 기여하고자 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