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재성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현재 동아시아연구원 아시아안보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53개국 정상과 국제연합을 비롯한 4개 국제기구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헤이그 커뮤니케(the Hague Communiqué)를 채택하고 지난 워싱턴 및 서울회의를 통해 마련된 핵물질 방호와 핵테러 방지를 위한 각국의 노력 및 국제사회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핵안보라는 숭고한 대의는 사실 그 중요성이 상당 부분 감소되었고 세계의 정상들은 각 지역의 문제들을 협의하는데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많은 지도자들이 모이는 장소인 만큼 핵안보정상회의는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는 회담장을 제공하는 것으로 주된 역할이 바뀐 느낌이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은 핵안보정상회담을 계기로 유럽연합,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등과 연이은 회의를 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방문하여 중동 문제를 협의했다. 유럽, 중동, 아시아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미국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 일주일이었다. 2년 전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한 바 있는 한국이기에 핵안보 증진을 위한 후속 조치가 관심을 끌만도 하지만 정작 한국인의 이목을 끈 것은 45분간의 한미일 정상회담이었다. 회담의 내용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3국 공조에 국한되었다. 심도 있는 대화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기에 그간 각국이 공유하고 있던 북핵 문제 해결 원칙을 재확인한 수준에 그쳤다. 사실 회담의 진정한 목적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던 한일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마련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특히 미국으로서는 4월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의 한국, 일본 방문을 앞두고 한미일 3국 협력의 기초를 서둘러 놓아야 하는 처지이다.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이 노력하는 것은 미국의 아시아 중시전략의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최근 국제정치 상황이 전개되는 양상을 보면 미국의 처지는 더욱 급박하다. 4년 전 핵안보정상회의가 시작될 때에만 하더라도 미국은 핵무기 감축 및 핵안보•핵테러 방지라는 지구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세계 정상들을 워싱턴에 불러모았지만, 지금은 세계 각 지역에서 불거져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핵안보는 뒷전인 것처럼 보인다.


시험대에 오른 미국:
우크라이나, 중동, 동아시아 이번 핵안보정상회의 기간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단연 우크라이나 사태였다. 주요 7개국(Group of Seven: G7) 정상들은 3월 24일 헤이그 선언을 발표하고 원래 러시아 소치에서 개최하기로 되어있던 주요 8개국(Group of Eight: G8) 회의를 러시아를 제외한 상태에서 헤이그에서 개최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을 우크라이나 주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자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함께 해나가기로 선언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가속화하고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위반한 러시아의 행보를 비판했다. 조지아, 몰도바 등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도 강화하기로 약속했다. 핵안보와 핵테러방지라는 탈근대적 이슈를 위해 모인 정상들이 러시아의 지정학적 팽창을 막기 위한 근대적이고 전통적인 균형정책에 몰두한 것이다.
겉으로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 간 큰 이견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 않다. 유럽국가들이 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비판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제재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러시아를 적대하기는 쉽지 않다.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가 러시아를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한 독려 정도라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은 대체 에너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와 경제관계를 축소하는데 많은 부담을 느낀다. 유럽의 지정학이 나토와 러시아의 군사적 대결로 비화하고, 우크라이나가 양 세력간 충돌의 장으로 화하여 유럽이 지지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반도로 분할되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 향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후속 조치가 가속화되어 러시아와 나토가 정면 대결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 것이 유럽 국가들의 속내이다.
문제는 미국이 유럽의 협력을 계속 이끌어낼 만한 자원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이 러시아에 대해 경제제재를 가한다고 하지만 비자발급중지, 금융자산동결, G8 멤버십 정지 외에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핵을 가진 러시아와 군사적 충돌을 감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에 비해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대러 강경정책이 미국 중심적이라는 느낌도 가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헤이그에서 열린 미국과 유럽연합 간 회담에서 유럽의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를 낮추고 수입다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체 에너지원으로 미국의 셰일가스를 언급하며 유럽에 대한 적극적 지지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기업들이 주도하는 에너지 시장에 미국 정부가 관여할 수 있는 수준의 한계를 명백히 하기는 했지만 미국으로서는 유럽에 줄 수 있는 인센티브를 강조하려고 애쓴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을 되돌릴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동유럽, 중동,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게임은 쇠퇴하는, 혹은 지도력 회복을 위해 세계전략을 재조정하는, 미국의 의지와 능력을 시험해 보는 게임이다. 과연 미국이 패권적 단극체제 이후 다른 지역 강대국들과 지역 내 리더십 차원에서 지정학적 조정을 할 수 있는 외교력이 있는지, 기존 미국의 동맹국들과 전략파트너들을 지원하면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유지해갈 수 있는지, 아시아 중시전략을 표방한 미국이 유럽과 중동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느 정도로 성의를 보일 수 있는지가 시험대 위에 오른 것이다.
중동의 상황도 미국에게는 도전이다.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시리아 정권을 제재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미국은 중동 지역정치에서 힘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민주화 물결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등 기존 동맹국 관계도 예전 같지 않고, 이스라엘의 지지도 유동적이다. 유럽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있는 이란 핵협상 역시 향후의 전개 양상에 따라 미국의 중동정책에 상당한 득이 될 수도 있고 실이 될 수도 있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중동의 지정학에 지도력을 발휘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계속 평가받고 있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미국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동맹국과 전략적 파트너들이다. 헤이그와 리야드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동맹국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당분간 축소전략이 불가피한 미국이 28개국의 유럽연합과 28개국의 나토국가, 그리고 중동의 전략파트너들의 도움 없이 패권적 영향력을 회복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헤이그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도 같은 맥락이다. 아시아 중시전략에서 두 축이 되어야 할 한국과 일본이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성공하기 어렵다. 유럽연합 내 혹은 나토 국가들간 갈등이 커져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미국 입장에서 큰 낭패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한일 갈등도 미국의 아시아전략, 나아가 세계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미국 아시아 중시전략의 핵심은 역시 대중 전략이다. 미국의 경제력을 회복하고 기후변화, 사이버안보 등 다양한 세계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헤이그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양국은 신형대국관계 속에서 전략적 협력을 지속해 나가기로 재확인한 바 있다. 문제는 미중 간 지정학적 경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힘이 커질수록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를 포함한 중국 주변의 전략 공간에 속해 있는 국가들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지난해 말 방공식별구역 사태에서 보듯 주변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선제적 시도는 관련국가들을 당황스럽게 하고 있다. 크림반도 사태에서 러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이 선제적 행동에 이은 후속조치를 밟아 사태를 기정사실화할 때 과연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확고한 의지와 능력을 보일 수 있을지 미국으로서는 큰 고민이다. 사실 방공식별구역 사태를 둘러싼 미국의 대응은 일본입장에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미국이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중 경제의존도가 매우 높은 주변 국가들이 중국의 경제보복을 무릅쓰고 미국에게 협력하기는 쉽지 않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중국 경제의존도는 유럽 국가들의 대러 에너지 의존도와 직접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전략협력을 통해 중국과 갈등이 벌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한편, 대중 공동노선을 취하기 위해 한국 및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미국의 고민과 한국의 동아시아 전략 

한일 관계를 중재하려는 미국의 노력 또한 미국 전략의 전반적 맥락에서 파생된 것이다. 일본의 그릇된 역사관을 바로잡아야 하는 한국에게 미국이 실제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대아시아 전략 차원에서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필요한 미국으로서는 자신이 구상한 전략 그림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수준으로 한일관계가 조정되면 충분하다고 볼 것이다. 미국 역시 일본의 그릇된 역사관을 바로잡을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일본의 진정성 있는 변화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바뀌어 한일 관계가 적절히 개선되고, 한미일 삼각협력이 재개된다면 그 정도로 만족할 것이다. 한국으로서도 미국과 맺고 있는 동맹관계가 국가안보 전략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만큼, 미국이 희망하는 삼각협력을 도외시하면서 한미협력을 계속 발전시켜나갈 수는 없다. 결국 한국은 일본의 역사관을 바로잡는 한편, 한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위해 한미일 협력을 활용하는 두 개의 방정식을 조합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향후 한미일 협력의 미래를 위해 한국 정부가 당면한 중요한 과제는 동아시아 지역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미중의 경쟁이 군사적 대결로 비화되고 강대국 간 세력정치가 동아시아 지역의 운명을 결정할 때 가장 큰 손실을 보는 국가가 한국인 만큼, 한국은 강대국 간 협력을 증진하고 세력균형의 변화를 안정적으로 이끄는 기제를 마련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전략 비전, 특히 대중 전략비전에 대해 합의에 이를 수 있을 때, 일본의 지역적 역할에 대한 한미 공통의 인식과 정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일본이 진정성 있는 과거사 반성을 통해 동아시아 국가들과 화해할 때 미국의 아시아 중시전략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논리와 비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미국의 아시아 전략과 한국의 대일 전략, 그리고 한미일 삼각 협력 사이의 공통분모가 마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