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사만 대변" … 여론 점점 나빠져
신규 가입 드물고 회장단 참여 꺼려
"설립 목적에 맞게 경제살리기 전념
사회 이끄는 조직으로 변화해야"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

 

1995년 4월 고(故) 최종현(SK 명예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은 일본 게이단렌(經團連)에 전경련 국제담당 상무를 급파했다. ‘밀사’였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월드컵 유치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최 회장이 조용히 ‘공동 개최’라는 아이디어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싸우지 말고 화합하자”는 최 회장의 메시지는 게이단렌 회장을 맡고 있던 도요다 쇼이치로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월드컵 공동 개최의 싹은 이렇게 심어져 2002년에 결실을 이루게 됐다. 월드컵만이 아니다. 88년 올림픽 개최를 이끈 것도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었다. 81년 올림픽 유치가 확정될 때 그는 전경련 회장이었다.

 

88년 서울 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한민국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두 가지 국가적 빅이벤트 뒤엔 전경련이 있었다. 외환위기 직후엔 논란은 있었지만 주요 업종의 만성적인 과잉·중복투자를 교통정리하는 이른바 ‘빅딜’에도 적극 관여했다. 이렇듯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단체는 기업 모임이 아닌 한국 사회의 난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곳이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일본 상인의 횡포에 맞서 서울 종로 육의전 상인이 뭉치면서 싹이 튼 단체다. 그랬던 경제단체의 위상이 적잖게 흔들리고 있다. 지난 50여 년간 경제 성장에 일조했던 공은 잊히고 ‘재벌이나 회원사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보수단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의 ‘파워조직 영향력·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2005년 9위였던 대표적 경제단체 전경련의 영향력은 2007년 10위 밖으로 밀려났다.

 

지난해엔 15위로 떨어졌다. 삼성·현대차 같은 개별 그룹만도 못한 수준이다. 지난해 조사의 신뢰도 순위는 불신의 상징처럼 된 정치권 정당보다 낮은 13위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차기 회장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희범(65) 회장이 지난달 사임의사를 밝히면서다. 이 회장의 임기는 27일까지인데 당분간 후임 회장 자리가 공석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경총 관계자는 “통상임금, 근로시간 단축 등 산적한 현안은 많은데 안팎에서 회장 추천을 받은 기업인들이 모두 고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도 지난해 5월 이후 회장단 회의 좌석을 절반도 못 채우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1차적인 이유는 총수가 부재 중인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력을 불어넣을 신규 회장단 멤버를 찾기도 어렵다. 20일 총회에서 새 인물을 회장단에 추가하려고 했던 전경련 계획도 백지화됐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물을 찾기 어려웠고, 기존 회장단 내에서도 의견차가 컸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19일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전경련 회장단에서 빠지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에 전념하겠다”고 밝혀 전경련의 고민은 더 커졌다.

 

기업은 갈수록 전문화·세분화되고, 새로운 업종은 계속 생기고 있는데 경제단체가 기업이 변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방 상공회의소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재계 입장’이 하나로 모아졌지만 지금은 일부 정책에선 이해가 상충하기도 하는데 대한상의가 해법을 못 찾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수도권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규제 개혁 업무를 담당하는 정부 관계자는 “경제단체를 통해 개선이 필요한 사례를 취합하면 종종 사실관계가 틀리거나 이미 해결된 사안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낮아진 위상은 기업이 경제단체 가입을 주저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전경련은 조직 혁신을 위해 최근 회원사를 정보기술(IT) 업체와 중견그룹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표적 포털업체인 네이버·다음 등은 참여를 거절했다. 영입 제의가 오간 한 기업의 임원은 “전경련의 현재 위상과 평판을 감안하면 굳이 새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스러웠다”고 말했다. 한 중견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전경련이 SM엔터테인먼트·YG엔터테인먼트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였지만 눈에 띄는 조직 혁신, 인적 쇄신 등의 변화는 없었다”며 “외부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보여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존 회원사의 불만도 크다. 한 대기업 임원은 “대기업은 지난 수십 년간 매년 적지 않은 회비를 냈다”며 “그런데도 기업의 역할이 평가절하될 때 경제단체가 기업을 위해 한 게 뭐가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대한상의의 경우 지난해 회비 납부가 이례적으로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경기가 좋지 않아 기업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라면서도 “기업들이 상의 회비를 내지 않는 쪽으로 우선순위를 잡았다는 점은 씁쓸하다”고 말했다.

 

사랑받는 경제단체로 거듭날 수 있는 해답은 바로 사회적 인정을 받았던 이들 단체의 과거에 숨어 있다.

 

93년부터 6년간 전경련 회장을 맡았던 고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은 대기업 이익이나 대변하는 그런 단체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정부는 공정한 (시장)경쟁 환경을 만드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고 직언을 하기도 했다. 최 회장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한 관계자는 “미래 한국을 만들어 가기 위해 세워진 전경련의 원래 목적에 맞게 10년 후 한국의 먹을거리를 고민해야 한다”며 “정부와 기업, 국민 간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경련의 초대 회장을 맡았던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기업인들로 구성된 유럽 투자유치단을 꾸려 직접 독일에서만 2500만 달러의 자금을 끌어와 전력·철강·비료 등 산업의 기틀을 닦기도 했다.

 

좌고우면하지 말라는 목소리도 있다. 조석래 전 전경련 회장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차기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이 돼 달라”는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원칙론을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과 사돈관계인 점 등으로 인해 야당은 ‘회장 사퇴’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관 업무를 담당하는 한 기업의 임원은 “전경련은 기업 입장에선 방패”라며 “방패가 스스로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면 기업이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정부와 경제단체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협력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누가 봐도 정부 정책에 코드를 맞추려는 것으로 보이는 어젠다를 자꾸 주장해선 신뢰를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경제단체는 변화의 몸부림을 보이고 있다. 전경련은 “국민의 신뢰를 받는 조직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지난해 기업경영헌장을 발표하고 윤리경영에 대한 의지도 확실히 했다. 대한상의는 최근 교수진 등 외부 인사 40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을 출범시켰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특정 집단을 일방적으로 대변해선 정부와 국회, 국민을 설득하기 어렵다”며 “전문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경제단체가 본연의 설립 목적으로 돌아가 경제 살리기의 주축으로서 노력해야 한다”며 “부족한 역량이 있다면 서둘러 보충하는 노력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윤석 이화여대 경영대 교수는 “전경련은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처럼 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조직으로 변화해야 한다”며 “집단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스스로를 성찰하고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